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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면 삼키고 쓰면 글이다] 3화 : 독수리 다방, 기형도와 대학 생활

  • 작성일 2023-04-01
  • 조회수 1,554

들어가며

 기형도 시인과 성석제 소설가가 자주 찾았다는 독수리 다방을 방문했다. 마침 연세대의 졸업식 날이었는지, 푸른 가운을 입은 졸업생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카페를 들락거렸다. 카페 이용객의 연령대는 이십대 학생들부터 육, 칠십대 정도로 보이는 중노년층까지 굉장히 다양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거쳐 왔기 때문이리라. 연세대학교의 졸업식 날은 일견 독수리 다방이 그들의 추억으로 남게 되는 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카페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이 공간의 메뉴들은 단순한 이름을 가졌다. 아메리카노 대신 블랙커피, 카페라테 대신 밀크커피로 대표되는 메뉴명들은 다방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함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영수증과 컵을 함께 제시하면 블랙커피로 리필이 1회 가능하다는 점은 작가들이 어째서 독수리 다방에 자주 왔는가, 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독, 수, 리, 셋으로 나누어진 공간들은 각각 테마가 있다. 독방은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자제하며 면학 분위기를 유지하는 곳으로, 테이블이 크고 합석이 가능하다. 수방은 대화를 나누고 편안히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리방은 셋 이상의 인원이 미리 예약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모임을 위한 스터디룸 분위기의 공간이다.

 곳곳에는 기형도, 이성부, 성석제 등 작가들의 문장이나 시 전문이 붙어 있어 작가들의 단골 찻집이라는 ‘위엄’을 보여준다. 원목으로 된 인테리어와 구석구석의 활자들이 잘 어우러진다. 지하 1층에서 지상 8층으로 이전한 이 공간은 또 새로운 작가들을 위한 곳이 될 듯하다. 편안한 테이블과 의자, 창 너머로 보이는 교회의 높은 탑과 통창이 분위기를 더한다.

 문인들은 찻집과 다방을 거쳐 카페를 찾는다. 대학가 입구에 있는 독수리 다방에서 원고를 작성하며 기형도의 「대학 시절」을 읽었고 나의 대학 생활을 반추하기도 했다. 세상에 문학보다 더 중요한 게 있냐는 듯 습작하던 때를 떠올리면 기특하기도, 부끄럽기도 하다.

우리들의 집필 카페 - 서재진

 대학 시절에는 늘 카페에 있었다. 집에서 가깝고 흡연실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한 한 카페에 죽치고 앉아 글을 썼는데, 족히 서너 시간을 앉아 있다 보면 시는 시로 보이지 않고 그저 활자의 나열 같았다. 해가 진 시월의 어느 날 카페 창가에 앉아 프린트한 시의 순서를 이리저리 바꿨다. 신춘문예와 대산 대학 문학상에 투고하기 위함이었다.

지겨웠다. 지겨워서 콱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언제까지 써야 하는지, 예고도 없고 기약도 없는 등단을 위해 얼마나 더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되든가 안 되든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고 또 본 그 글을 일단 투고하는 게 우선이었다. 내 손에서 떠나보내고 싶었다. 그때부터는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단지 문학상이나 신춘문예의 등단자 발표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극지의 밤〉을 비롯한 총 다섯 편의 시가 당선되리라는 것은 맹세코 알지 못했다. 주변에서 간혹 등단 당시의 에피소드를 묻곤 한다. 그러면 나는 등단 소식을 나보다 남이 더 먼저 보고 내게 알려줬다는 것이나, 원룸 일층 주차장을 뱅글뱅글 돌았다는 얘기를 의례적으로 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시를 정리하며 카페에서 본 바깥 풍경이다.

그 거리는 아직 강경대 길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이었고 인명사고가 난 적 있다는 이차선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플라타너스 잎이 말라붙어 바닥에 떨어졌는데, 사람 얼굴보다 더 큰 그 잎들은 발에 차이고 밟히기 일쑤였다. 그 이파리들을 보며 했던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다. 어서 이 글을 어딘가로 떠나보내고 싶다.

 대다수 글은 떠나보내는 것을 전제로 쓰인다. 얼마 전,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 기억이 난다. 하필 집에 편지지가 하나도 없어 내가 가진 책 중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의 목차 부분을 북 찢어 빈 뒷면에 편지를 썼다. 당신이 인생의 목차를 넘겨 볼 때 이 편지가 떠올랐으면 좋겠다는, 욕심 가득한 글이었다.

언젠가 출간한 묶음 시집의 맨 앞장에 편지지를 붙이고, 제일 아끼는 봉투에 넣어 편의점 택배로 급히 부쳤다. 편지가 내 손을 떠나가고 나니 그제야 편안해졌다. 손안에 있거나 부치지 못했다면 그토록 마음이 가볍진 못했을 테다. 욕심스럽고 못됐지만 반짝거리는 마음을 보내고 나서 나는 와인을 한 잔 더 마셨다. 잔뜩 취해 잠들었고, 며칠 뒤 택배가 잘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나서는 완전히 빈 마음이 되었다.

카페에서 글을 쓰다 보면 언제든지 그런 기분을 느낀다. 카페인과 저녁 시간과 활자들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감정이다. 쓰고 고치는 중인 글이 너무 지겹고 꼴 보기도 싫을 때는 아직도 있다. 아마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커피 마시며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나 흡연실을 들락거리는 인영들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우습게도, 어서 이 글을 끝내고 새로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독수리 다방에서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대학가 인근의, 죽치고 앉아 글 쓰는 문학도나 과제에 찌들어 있는 학생들이 있는, 흡연 공간이 따로 있는 독수리 다방. 그곳은 내가 등단작을 마무리하던 카페와 몹시 닮아 있었다. 독수리 다방에서라면 편지도 시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떠나보내기 위한 글들을 쓰는 곳과 잘 어울리는 공간을 둘러보면 바깥에는 교회가 있었다. 교회당의 탑을 바라보며 지금도 누군가는 기도를 떠나보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보낸 것이 많다. 그 일들은 주로 카페에서 이루어졌다. 연인들은 이별의 장소로 카페를 자주 선택하고 내 손을 벗어난 글들은 카페에서 쓰였으며 카페에서 글을 쓰던 사람들은 언젠가 그 공간을 떠난다. 어쩌면 이 세상마저도 떠나버린다.

이 글을 떠나보내고 나면 그 자리에는 또 새로운 글이 나타날 것이다. 카페에 앉아 만들어지는 활자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는 커피를 마신다. 역시 글을 쓸 때는 카페인이 있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떠나간 것들을 떠올린다. 떠나가고 새로 생겨나는 것들이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카페는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글들은 떠남의 방식으로 새롭게 현존한다. 저기 창밖에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다방과 카페와 찻집 지붕 위를 활공한다.

우리들의 집필 카페 - 정성우

 내 대학 시절은 학점보다 학우, 수업보다 수다였다. 잠 덜 깬 몸 버스에 싣고 스무 정류장을 지나 지하철로 갈아타고, 낙동강 줄기 위로 끄무레하게 떠오르는 일출 보면서 꾸벅꾸벅 졸다가 일어나면 경사 50도의 엄광산 발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거기까지 두 시간인데 문제는 순환버스 정류장을 필두로 용처럼 늘어선 줄이었다. 캠퍼스가 배기음 빵빵한 오토바이조차 심심찮게 미끄러지는 비탈길 끄트머리에 있다 보니 학생들은 순환버스에 사활을 걸었다. 처음 봤을 땐, 그게 줄이 맞나 싶었다. 정류장에서부터 대로변을 따라 쭉 늘어선 인간 가드레일은 상가 건물 네 채를 꿰고도 남았다. 거기까진 기다릴 의향이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출석 시간 확인하며 맨 뒤에 시부저기 다가붙자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여기도 줄이에요.”

 심드렁하게 읊조리는 남자가 가리킨 곳엔 대로변에 버금가는 줄이 또 늘어서 있었다. 굳이 물어 보지 않았으나 남자는 통행에 방해가 되어 인도를 비워 두고 오르막 쪽으로 꺾어서 다시 줄을 선다고 덧붙였다. 교수가 출석부를 열 때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거대 ‘ㄴ’ 자를 다시 한 번 휘둘러보곤 어금니를 앙 물었다.

무작정 뛰었다. 팔다리가 저리고 입에서 피맛이 나는데도 캠퍼스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학생들을 잔뜩 태우고 삐걱거리며 올라가는 버스를 보니 두렵기까지 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이 짓을 해야 하는 건가. 종아리가 발통처럼 두꺼워지거나 눈 오는 날 버스와 함께 쳇바퀴처럼 구르거나, 내 미래는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그래도 수업 중엔 도착했다. 다행히 사정을 설명해 결석은 면했지만, 빈속에 안간힘을 쓴 탓에 엎드려 자고 말았다. 오티에 참석하지 않아 초면인 학우들도 내 대범함에 박수를 보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수업 시간에 엎드렸다. 학우들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기까지 했다. 그렇게 연민의 정은 쌓이고 학업은 뒷전이 되었다.

성적을 깔아 주는 좋은 동기가 된 나는 매일같이 학우들과 술을 마셨다. 그리고 학교 앞 ‘정글커피’에서 해장을 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과제, 자격증 준비 등의 이유로는 일절 가지 않았다. 오로지 해장으로만 커피를 마셨다. 공강에 시간을 때우면서 저렴하게 속을 달랠 수 있는 아메리카노. 그건 정말이지 희대의 발명품이었다.

 그런 내가 카페에 죽치고 앉아 글을 쓰고 있다고 하면 믿지 않는 지인들이 아직 있다. 한 학기를 다니고 자퇴를 한 뒤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온라인 문창과에 들어가 습작을 하기까지 거친 변화를 그들이 온전히 알기 어려우니 그럴 것이다. 따지고 보면 카페에 대한 인식도 여러 번 바뀌었다. 만화책 카페나 일반 카페에서 일할 땐 타 카페에 가면 알바생들이 눈에 밟혔고, 누나를 도와 성균관대 후문에서 카페를 운영할 땐 텅 빈 카페를 보면 사장님들의 싸늘한 아우성이 느껴졌다. 그런 게 쌓여서 점원들이 만들기 힘든 프라푸치노를 최대한 주문하지 않게 되었고, 사장님이 개발한 케이크가 있으면 꼭 시켜 먹게 되었다. 글을 쓰고부터는 의자와 테이블의 조화를 먼저 살피게 되었는데 확실히 식사나 서비스의 공간보다는 작업실로 여겨지는 면이 크다. 이젠 디저트의 맛을 크게 따지지 않게 되었다. 점차 낭만이 사라져 가는 것 같지만 서글프진 않다.

 저렴하고 편안한 카페를 골라잡아 6년 동안 출퇴근을 하다 보니 말동무가 생겼다. 사장님과 먹고사는 걱정을 나누고 직원들과 연애나 진로 걱정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고 온종일 앉아 있어도 별다른 눈치를 받지 않았다. 그 정도면 따끔하게 한 마디 쏘아붙일 만도 한데 추우면 히터를 틀어 주겠다, 더우면 에어컨을 틀어 주겠다, 먼저 권해 오니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미안했다.

 그런 카페를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핑계로 1년 동안 가지 않았다. 그 기간엔 대체로 집에서 글을 썼다. 능률이 확실히 떨어졌다. 라꾸라꾸를 구입하고 좌탁을 바꾸고 청소를 해도 예전 같지 않았다. 나는 결국 거리두기가 풀리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카페를 찾았다. 한창 출퇴근할 때였다면 테이블이 절반 이상 차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테이크아웃을 기다리는 손님 한 명만 카운터 앞에 서 있을 뿐 테이블은 휑했다. 직원도 바뀌었다. 언젠가 술 한 잔 하자고 약속한 사람도 있었는데 번호 교환을 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쓸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통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행인도 줄었고 건너편 반찬 가게도 문을 닫았다. 글 몇 자 끄적이면서 한 시간을 기다리니 사장님이 들어왔다.

 “어, 저는 무슨 일 있으신 줄 알았어요.”

내가 걱정을 들을 입장인가 싶어 민망해졌다. 그리고 수척해진 사장님의 볼을 보니 저절로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죄송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그럴 수도 있죠. 편하게 있다 가세요.”

 사장님의 태도는 1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가 글을 썼다. 그날은 이상하게 두 달 동안 손 놓고 있던 원고 한 페이지를 내리 썼다.

그날 가로등이 끄먹거리는 오르막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그동안 잃었던 게 자리와 커피뿐만이 아니었단 걸.

나가며

 독수리 다방 로비에는 포스트잇으로 빼곡한 게시판이 있다. ‘토익 만 점 가즈아!’ ‘JH 하트 SW 영원히∼’ 등 코앞에 당도한 현실적인 목표부터 사랑을 이어 가고자 하는 풋풋한 염원까지 다양한 내용이 짤막하게 채워져 있었다.

 왼쪽 벽면에 적힌 안내문에 따르면 칠팔십 년대는 손님들이 그곳을 일종의 연락처로 썼다. 다방에서 약속한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경우 전할 말을 편지로 써서 꽂아 두는 식으로 말이다. 삐삐나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니 꽤나 요긴했을 테지만, 약속 장소에 오지 않은 상대방에게 이유를 듣기까지 속깨나 끓였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나까지 덩달아 답답해졌다.

 아무리 살펴도 약속을 어긴 상대방에게 이유를 묻는 메모는 보이지 않았다. 자격증 획득이나 입사 염원, 사랑 기원 등 대부분이 연락 수단보다는 부적 비슷하게 쓰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2005년 다방이 문을 닫으면서 함께 뜯겨 나간 모양이었다. 현재의 독수리다방은 2013년 재개장한 모습으로 다방보다는 카페라는 말과 더 어울린다. 영업이 멈춘 8년 동안 시나브로 휘발된 33년의 기록이 아까우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비록 사라졌을지라도 8년의 터널을 넘어 형태를 바꿔 소소한 문화로 남지 않았는가. 그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해서 숙연해졌다.

 카페의 분위기는 인테리어나 음악이 큰 부분을 차지하겠지만 손님의 몫도 작지 않을 것이다. 카페 곳곳에 새겨진 기형도와 성석제의 글귀나 소통 수단으로 사용한 포스트잇처럼.

 커피를 홀짝이고 케이크를 파먹고 웃고 떠들고 글을 쓰고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두드리고 책을 꺼내고 다시 꽂는 행동들을 수십 년이 지나면 인공지능 로봇이 대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게시판의 포스트잇처럼 세월에 묻힌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하나의 문화로 뿌리내려 주지 않을까 싶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 되기 위해 포스트잇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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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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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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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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