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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생은 피곤하다.

  • 작성일 2022-08-01
  • 조회수 1,888

[창작 - 희곡]

기존 〈글틴스페셜〉이 2021년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이선생은 피곤하다.



이수진




등장인물

이선생37세. 서울의 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 1학년 3반 담임. 코로나19 때문에 난데없는 온라인 수업을 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지황1학년 3반의 학생

학생1~121학년 3반의 학생들. 각자 이름은 있지만, 이선생에게는 그저 학생일 뿐이다.


무대

무대는 텅 빈 교실이다. 무대 중앙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두 개 있다. 그 뒤로 스크린에 가려진 칠판이 보인다. 스크린 앞에는 교사용 책상이 있고, 그 앞에는 학생들의 빈 책상이 있다.
스크린은 2개로 중앙의 큰 스크린에는 이선생의 노트북 화면이 투사된다. 오른쪽의 다소 작은 스크린은 세로로 길쭉하며, 이선생의 휴대폰 화면이 비춰진다. 마치 책상 위의 듀얼 모니터처럼 이선생의 사이버 세상을 보여준다.

* 이 작품은 현실 세계의 이선생과 인터넷 속의 학생들 사이의 대화로 구성된다. 채팅창의 대화는 네모 안에 이탤릭체로 표시하였다.


1장. 조회

불이 희미하게 켜지면 텅 빈 교실이다. 작은 스크린이 켜지며, 이선생의 휴대폰 속 세상이 나타난다. 휴대폰 화면은 건강상태 자가진단 앱이 켜진 상태이다. 자가진단 앱은 교육부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매일 아침 학생과 교직원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앱에는 ○○고등학교 교사 이민지라는 초기 로그인 화면이 뜬다. ‘나의 건강상태 진단’ 항목으로 화면이 바뀐다. 몇 가지 질문이 뜬다.

질문1. 귀하는 현재 코로나19가 의심되는 아래
의 임상 증상이 있나요?
질문2. 귀하는 오늘 신속항원검사를 실시했나
요?
질문3. 귀하 본인이 PCR 검사를 받고 그 결
과를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오’에 체크되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 우리 반 참여 현황’으로 화면이 바뀐다. 1학년 3반 학생들의 이름과 명단이 보인다. 명단 옆에는 실시한 학생들의 상태가 보인다.

1번 강민기 정상
2번 김시헌 미실시
3번 김창현 미실시
4번 김현우 정상
5번 김지황 정상
6번 배원이 정상


20번까지 이어지는 학생들의 명단이 보인다. 화면이 깜빡인다. 화면 캡처를 한 듯 보인다.
화면이 카카오톡 창으로 바뀐다.
‘1학년 3반 단톡방입니다.’라는 제목이 떠 있다.
조금 전의 명단을 캡처한 사진이 단톡방 창에 올라간다.
이선생의 메시지도 올라간다.

이선생 (메시지) 자가진단 하세요.

교실 문이 열리고 이선생이 들어온다. 한 손에는 노트북,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다.
이선생은 휴대폰 화면으로 시계를 확인한다.

이선생 (혼잣말로) 7시 50분. (메시지를 치며) 8시 전까지 자가진단 완료하세요.

이선생은 노트북을 교사용 책상 위에 올린다. 전원선을 꽂고 컴퓨터를 켠다. 손길이 다급하고 분주하다.
카톡! 소리가 울린다. 작은 스크린에 카카오톡 개인 대화창이 뜬다.

학생 1 (메시지) 선생님 자가진단 앱이 안
열려요.

이선생 (메시지) 지금 접속자가 많은 시간
이니까 잠시 후 다시 해보세요.

팝업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뜬다.
이선생이 팝업을 클릭하자 새로운 대화창이 뜬다.
이선생은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쓰는 와중에도 손이 여러 가지로 바쁘다.

학생 2 (메시지) 샘 저 열나요.
이선생 (메시지) 얼마나?
학생 2 (메시지) 몰라요.
이선생 (메시지) 체온계 없어?
학생 2 (메시지) 있어요.
이선생 (메시지) 체온계로 쟀어?
학생 2 (메시지) 쟀어요.
이선생 (메시지) 근데 몰라?
학생 2 (메시지) 잠시만요.

이선생은 한숨을 쉬고, 노트북의 비밀 번호를 친다. 중앙 스크린 화면이 켜진다. 이선생의 노트북 화면이 나타난다.
작은 스크린에 학생2의 메시지가 이어진다.

학생 2 (메시지) 37.6도예요.


이선생 (혼잣말로) 애매하네.

학생 2 (메시지) 37.6도예요.
이선생 (메시지) 머리 아파?
학생 2 (메시지) 네.
이선생 (메시지) 속도 안 좋아?
학생 2 (메시지) 네.
이선생 (메시지) 그럼 병원 가서 검사 받
고 결과 알려줘.

학생 2 (메시지) 네.
이선생 (메시지) 확인서 사진 찍어 보내.
학생 2 (메시지) 근데 샘, 저 왼쪽 귀는
36.9도인데요?

학생의 엉뚱한 대답에 이선생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선생은 휴대폰 통화 버튼을 누른다.


이선생 현우야, 담임샘이야. 그러니까 왼쪽 귀가 36.9도이고 오른쪽 귀가 37.6도인데 어쨌든 열은 난다는 거잖아?


학생2 (음성) 네.


이선생 머리 아프고 속도 안 좋다며?


학생2 (음성) 네.


이선생 그럼 병원 가서 검사 받아야지


학생2 (음성) 네.


이선생 9시에 병원 문 열자마자 바로 가서 검사 받고 결과지 사진 찍어서 보내.


학생2 (음성) 네.


이선생 언제부터 그랬어?


학생2 (음성) 아침에 일어나서 그래요.


이선생 그래, 병원 다녀와서 또 연락하자.


8시 조회 종이 울린다. 이선생은 전화를 끊고 황급히 자리에 앉는다.
큰 스크린에 동영상 통화 프로그램 줌의 화면이 켜지고, 이선생이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나온다.
이선생은 무의식적으로 화면 속의 자기 얼굴을 보고 얼굴매무시를 다시 한다. 의자에 걸어 두었던 재킷을 입으며 옷매무시도 다잡아 본다.
학생들이 접속해 들어온다. 화면은 이선생의 얼굴이 전체 화면이다가, 학생들이 접속해서 들어올 때마다 학생들 화면이 추가되면서 2분할, 4분할, 8분할로 바뀐다. 대부분의 학생들 화면은 카메라를 꺼서 암흑이지만, 가끔 얼굴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다.


이선생 조회 출첵 먼저 할게요. 강민기, 김시헌. 김창현…….


이선생이 출석을 부르면 학생들이 음성으로 대답을 한다.


이선생 김창현? 창현이? 창현이 없니? 오늘도 안 들어왔나? 자, 다들 자가진단 다 하셨죠?


채팅창에 아이들의 와글와글한 대화가 올라간다.


이선생 김현우, 김지황, 배원이, 양성훈.


다음 내용은 채팅창에 올라오는 내용이다.

학생 4 (메시지) 샘, 지각생 청소시켜요.
학생 5 (메시지) 지각생 청소 고고.
학생 6 (메시지) 우리는 청소 면제 개이득.


이선생은 채팅창을 바라보다가 얼굴이 찌푸려진다.


이선생 잠깐만, 애들 전화해서 좀 깨워 보자.


이선생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
(음향) 통화 연결음 소리가 끝없이 계속된다.
채팅창에 아이들의 두서없는 질문이 뜬다.

학생 4 출첵했으면 나가도 돼요?
이선생 잠깐만, 전달사항이 있어요.
학생 6 샘! 톡방에 띄워 주면 안 돼요? 화
장실 급한데.


이선생 어, 미안해. 샘이 전화하느라. 얘들아, 다음주에 학교에서 진로 특강 있대. 신청할 사람은 톡방에 링크 걸어 둘 테니 구글 폼으로 신청해라.


이 와중에도 전화 연결음은 계속되고 있다.

학생 4 진로 특강 생기부에 들어가요?


이선생 생기부? 그건 잘 모르겠는데. 톡방에 공지 쓸 때 알려줄게.

학생 7 선생님, 저 왔어요!


이선생 응, 그래 다행이다. 전화 좀 받지 그랬니.

학생 7 똥싸고 왔어요.
학생 5 ㅋㅋㅋㅋㅋㅋㅋ 똥밍아웃~
학생 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화 연결음이 끊어지고 음성 사서함 안내가 나온다.


안내 (음성)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이선생은 전화를 다시 건다. 통화 연결음이 계속된다.


이선생 자다가 수업 빠지지 말고! 얘들아, 오늘 하루도 파이팅!


중앙 스크린 화면의 학생들이 빛의 속도로 나가며 화면에 이선생의 화면만 전체 화면으로 투사된다.
서서히 조명이 어두워진다.
무대에 통화 연결음만 남는다.


2장. 2교시 한국사 시간


무대 위의 작은 스크린에 이선생의 휴대폰 화면이 나타난다.
스크린에 9시 15분 알람. 메모 사항에는 2교시라고 나온다.
이선생이 커다란 텀블러에 커피를 잔뜩 넣어서 들고 들어온다.
교실에 들어와서야 조심히 마스크를 벗는다.
다시 한 번 노트북을 펼치고, 이번에는 교과서와 태블릿도 거치대에 둔다.
중앙 스크린이 켜지며 이선생의 노트북 화면이 켜진다.
줌 대화방이 열리면 화면 전체에 이선생의 얼굴이 뜬다.
학생들이 접속하며 화면은 다시 2분할, 4분할, 8분할로 나누어진다. 학생들의 접속 화면은 대부분 카메라를 꺼서 검은색이고, 프로필명은 ‘103번호 이름’으로 이루어져 누가 접속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이선생 3반 안녕~ 한국사 시간이야. 누가 들어왔는지 보게 프로필을 자기 학번과 이름으로 설정하세요~ 출첵할 거니까 대답하세요. 음성 힘들면 채팅으로 해도 되요. 강민기, 김시헌, 김창현, 김현우. 김현우? 현우야~ 아……? 아 맞다. 얘들아, 현우 병원 갔어. 다른 시간에도 선생님들이 물어 보시면 얘기해라.


이선생의 얘기에 반응이 없다.


이선생 반장! 니가 꼭 말씀드려.


학생8 (음성) 네.

학생 7 현우 왜 병원 갔어요?


이선생 응? 왜? 아…… 열나서.

학생 7 확진이에요?
학생 5 헉…… 우리 또 검사 고고.


이선생 아…… 그건 모르지. 코로나일 수도 있고. 검사 결과 나와 봐야 알지. 김지황. 김지황? 지황이 없니? 일단 체크. 배원이, 양성훈, 이현빈. 이현빈? 현빈이? 일단 체크. 정명진, 정호창, 조현준, 차인재, 한찬휘. 없는 사람 다시 불러요. 김지황, 이현빈. 둘이 없네. 얘네 1교시는 들어왔니?


학생8 (음성) 샘, 걔네 게임해요.


이선생 뭐? 어디서?


학생8 (음성) 휴대폰으로요.


이선생 너는 어떻게 알아?


학생8 (음성) 저보고도 같아하자고 들어오라 했어요.


이선생 그럼 게임 같이하고 있는 거야 지금?


학생8 (음성) 아니여. 저는 안 해요.


이선생은 능숙하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한다. 통화 연결음이 여름날의 매미처럼 굉굉거린다.
이때, 채팅창에 ‘왕자지황’이라는 프로필을 단 참가자의 창이 뜬다. 카메라를 꺼서 검은 배경에 붉은색 글씨로 왕자지황이라는 이름이 화면 전면에 크게 뜬다.


이선생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돌리며) 왕. 자. 지. 황…… (긴 한숨) 하아…… 이 미친놈아. 지금 수업시간이잖아…….


이선생이 숨을 다잡고 목소리를 붙잡아 다시 이야기한다. 최대한 다정하고 우아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


이선생 지황아. 프로필을 반 번호 이름으로 바꿔.


여전히 ‘왕자지황’이라는 이름이 사라지지 않자, 이선생은 황급히 교과서 화면을 전체 공유한다. 스크린에는 교과서 화면이 뜨고, ‘왕자지황’이라는 이름은 사라진다.


이선생 현빈이, 아직 안 들어왔니? 얘들아 잠깐만. 현빈이한테 전화 좀 걸자.


학생8 (음성) 샘. 제가 연락해 볼게요.


이선생 그래, 고맙다. 역시 반장이야.


이선생은 몰래 줌 프로그램의 채팅창을 열어 본다. 참가자의 프로필에 여전히 ‘왕자지황’이라는 프로필 명이 있다.


이선생 (한숨을 쉬며) 지황아. 프로필 이름 바꾸라고 한 것 같은데? 10305 김지황으로 바꾸세요. 얼른. 듣고 있어? 얼른 바꿔. 그래야 출석체크하니까.


학생8 (음성) 샘, 현빈이 전화 안 받아요.


이선생 그래? 샘이 좀 있다가 할게. 고마워.


학생4 (음성) 샘, 책 어디 펴요?


이선생 아, 맞다 수업해야지. 87페이지 펴고 잠깐 읽고 있어요.


이선생이 채팅창으로 다시 참여자 이름을 확인한다. 여전히 ‘왕자지황’이라는 대화명이 보인다.


이선생 지황아. 얼른 프로필 이름 바꿔.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몇 번을 이야기한 것 같은데? 지황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열일곱 살 남자애들은 2차 성장기이고 호기심이 많은 나이라서 여러 가지 엉뚱한 일을 벌인다고 나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 웃으면서 이야기할 때 얼른 바꿔.


이선생의 이야기와 동시에 채팅창에 왕자지황의 프로필을 발견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비처럼 쏟아진다.

학생 4 샘, 뭐요?
학생 5 지황이 미쳤네.
학생 7 ㅋㅋㅋㅋㅋㅋㅋ
학생 1 ㅋㅋㅋㅋㅋㅋㅋ
학생 8 ㅋㅋㅋㅋㅋㅋㅋ
학생 5 신고각!
학생 2 ㅋㅋㅋㅋㅋㅋㅋ
학생 9 ㅋㅋㅋㅋㅋㅋㅋ
학생 1 ㅋㅋㅋㅋㅋㅋㅋ
학생 4 미친.
학생 5 미친 ㅋㅋ


이선생 어, 안 돼. 얘들아. 그렇게 놀리면 못써. 장난은 장난으로 넘겨야지. 호기심에 재미로 한번 그랬는데 우리도 그냥 못 본 척해야 하지 않겠어? 지황아. 얼른 프로필 바꿔. 아직도 안 바꿨네? 너 자꾸 안 바꾸면 이거 캡처해서 뿌리는 수가 있어. 그럼 단톡방에 박제되는 거다.

학생 5 박제 ㄱ ㄱ


이선생 안 돼. 안 돼. 내가 말을 잘못했다. 너네는 가만있어. 장난이 지나치면 학교폭력이 될 수도 있어. 현빈이 아직도 안 들어왔네? 안 되겠다. 얼른 수업하자. 자, 87페이지 펴세요. 오늘의 수업은 근대 문물의 수용이에요. 수업 동영상 나가니까 잘! 보세요.


중앙 스크린에 수업 동영상이 켜진다. 이선생이 이전에 촬영해 둔 것으로, 동영상 속의 이선생은 단정한 정장 차림에 화장도 했다. 편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 민낯의 다소 피곤해 보이는 이선생의 모습과 화면 속의 이선생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동영상 이선생(명랑한 목소리로) 여러분, 한국사 시간이에요. 교과서는 87페이지, 프린트는 13번 참고하시면 돼요. 그럼 책에서 핵심 내용 먼저 확인할게요. 이번 단원의 주제는 근대 문물의 수용이에요, 우리나라에 전기가 언제 들어왔을까요? 1887년이에요. 경복궁에 처음으로 가로등을 설치했어요.


화면은 경복궁 점등 기록화로 넘어간다. 동영상의 이선생의 얼굴은 화면 한켠에 작은 모습으로 축소되었고, 계속 생기발랄한 태도로 설명을 이어 간다.


동영상 이선생경복궁에 전등이 설치된 것은 1887년이지만, 1884년에 미국 회사와 계약했다고 해요.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한 지 8년 만의 일이니까 엄청 빠르죠? 당시에 임오군란 등 잦은 변란을 겪으면서 불안해하던 고종이 경복궁에 밤에 불을 환히 밝히도록 했대요. 그런데, 당시 한양 사람들은 밤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도깨비불이라고도 하고 발전기가 충분히 돌아가지 않아서 자주 꺼지니 건달불이라고도 했다고 해요. 그럼 교과서 볼게요,


스크린이 전자 교과서로 넘어간다. 화면에 빨간색으로 줄이 그어지기도 하고, 동그라미와 별표가 쳐지기도 한다.
현실의 이선생은 다른 일에 분주하다.


이선생 (혼잣말로) 지황이한테 통화를 해봐야겠다.


작은 스크린에 지황이에게 전화를 거는 모습이 투사된다.
채팅창에 아이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학생 8 (메시지) 샘, 원이가 단톡방에 캡처
한 거 올렸어요.


이선생 단톡방? (휴대폰을 확인하고) 여기는 없는데?

학생 8 (메시지) 애들끼리 있는 데요.
이선생 (메시지) 빨리 지워. 얘들이 너네들
단톡으로 이상한 거 돌려 보면 안
된다. 얼른 지워.

학생 8 지웠어요.


이선생 안 받네. 지황이 이름 바꿨나? 지황이가 없네. 창피해서 나가버렸나.


이선생은 다시 전화를 건다. 작은 스크린 화면에 현빈이에게 전화 거는 화면이 투사된다.


이선생 현빈이니? 뭐 해? 담임샘이야. 잤어? 그래. 졸리지. 한국사 수업 얼른 들어와. 링크는 우리 반 단톡방에 있어 얼른 들어와서 수업 들어.


이선생은 전화를 한다. 작은 스크린에 현우에게 전화 거는 모습이 투사된다.


이선생 현우니? 병원 다녀왔어? (한숨) 아, 잤어. (시계를 보고) 병원 문 열었으니까 가야겠다. 그치? 음성으로 나온 검사확인서 사진 찍어서 톡으로 보내. 응. 오늘 안으로. 출석에 중요하니까.


이선생은 다시 휴대폰 전화를 건다. 지황이는 여전히 안 받는다.


이선생 (혼잣말로) 지황이 뭐야. 삐져서 수업 안 들어오는 거야?


이선생은 채팅창을 다시 살핀다. 10305 문지황이라는 이름이 있다.
강의 동영상에 ‘감사합니다!’ 라는 글자가 뜨고. 동영상 강의 수업이 종료됨을 알린다.
이선생이 줌 화면을 다시 자기 얼굴로 돌린다. 화면 가득 이선생의 피곤한 얼굴이다.


이선생 (음성으로) 얘들아, 수업 잘 들었어? 이제 교과서 탐구과제 할까? 교과서 89페이지 펴보시면 1880년대 모습을 상상해서 글쓰기를 하라는 과제가 있어요. 1880년대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전기, 전차, 전등, 기차 등등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조선 시대 사람의 마음을 느껴 보세요. 글로 쓰고 과제 게시판에 올려요. 다음 시간에 제일 잘한 다섯 명한테 선생님이 페라로 로쉐 쏩니다!

학생 5 (메시지) 오!로쉐!
학생 7 (메시지) 몇 개짜리요?
학생 1 (메시지) 샘, 저 초콜릿 알러지 있
는데.


이선생 아. 그럼 너는 다른 걸로 줄게.

학생 1 메시지) 상품이 없으니 의욕이 없
네염.


이선생 어, 다음에는 잘 생각해 볼게. 자, 얼른 숙제하고.


이선생은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이선생 숙제하면서 들어, 오늘…… 조금…… 채팅방에서 웃기다면 웃긴 사건이 있었는데. 내가 또 남학생들을 여학생보다 많이 가르쳐 봤잖니. 17세 남자 고등학생들이 흔히 하는 장난이나 실수 중 하나가 성적인 호기심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더라고. 몇 년 전 수업시간에 조선 후기 문화를 설명하려고 ‘얘들아 춘향이 알지?’라고 했더니 1초 만에 돌아오는 대답이 ‘걸레야’라고 해서 내가 말문이 막힌 적이 있어. 근데 뭐, 필터 없이 말이 툭, 나올 수 있지. 그런데 한 번은 실수라고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여기는 인터넷 공간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교실이나 마찬가지잖아. 여기서 자기 이름표로 그런 걸 붙이고 있으면 장난치고는 과하지. 그렇지? 그러니까 지황아, 다음엔 그러지 말자.

지황 (메시지) ???????


이선생 응? 모른 척하는 거야? 부끄러워서?

지황 (메시지) ???????


이선생 (한숨) 그러면 못써. 실수할 수 있지만 또 인정하고 그래야지.

지황 (메시지) ???????


이선생 (목소리 높아진다) 지황아. 아까 있었던 일을 말로 꼭 지적을 해야 할까?

지황 (메시지) ???????
학생 8 (메시지) 아까 너잖아.
지황 (메시지) ???????


이선생 아까 줌 수업 입장할 때 프로필 이상한 거 띄웠잖아. 아, 진짜 캡처를 했었어야 하나? 지황이가 창피해서 그런가 본데 그럴 수 있지. 다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자. 다들 과제 올리고, 지황이는 남아.


줌에서 학생들이 빠른 속도로 나간다. 화면의 창이 8분할에서 4분할로, 다시 3분할로 줄어든다. 한 명이 안 나가고 계속 남아 있어 난감하다.


이선생 인재! 인재야! 너 또 수업 듣다 잠들었어? 영상 강의 끝났어. 나가서 숙제하세요. 교과서 89페이지. 지황이는 기다리고. 할 말 있어.


학생7이 화면에서 사라진다. 이선생은 학생들이 다 나간 것을 확인한다.


이선생 지황아. 너 아까 왜 그랬어?

지황 (메시지) ???????


이선생 너 자꾸 모른 척할래?

지황 (메시지) ???????


이선생 너…… 하아…… 아까…… 채팅창에…… 프로필이…… 왕. 자. 지. 황이라고. 그랬잖니?

지황 (메시지) ???????


이선생 아까, 줌 수업 시작할 때 출석체크 하는데 니가 ‘왕자지황’이라는 프로필로 들어왔잖아. 여기 수업하는 방인데 그런 이름으로 들어오면 되겠어?

지황 메시지) 네??????? 저 아닌데요.


이선생 전화로 하자.


이선생이 전화하지만 안 받는다.
무대에 지황이 등장한다. 랜선 너머 지황이의 방에 지황이 혼자 있는 모습이다.
이제부터 두 사람의 대화는 채팅창에서 벌어지는 내용이지만 둘은 실제로 눈을 맞추며 대화하기도 한다.


이선생 너 왜 안 받아?


지황 (타이핑하며) 집에서는 통화 못해요.


이선생 왜?


지황 (타이핑하며) 할머니 계셔서요.


이선생 여튼…… 그럼 알았어. 나는 말로 할 테니까 너는 채팅으로 말해 그럼. 아까 그게 니가 아니라고?


지황 네.


이선생 이름을 보면 너라고 쉽게 추론할 수 있는데?


지황 저 진짜 아니에요.


이선생 야, 내가 처음부터 야단을 칠 수도 있었지만, 학생이 그럴 수도 있지 싶어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장난으로 넘기려 했는데. 근데 끝까지 아니라고 할래?


지황 아 저 진짜 아니라구요.


이선생 나는 있잖아. 너의 사소한 실수를 웃으면서 넘기도록 배려도 해줬고, 그리고 이렇게 좋게 좋게 너의 잘못을 타이르려는 마음밖에 없어. 근데 끝까지 좀 너무하는데?


지황 진짜 억울해요.


이선생 그럼 누가 그러겠어?


지황 몰라요.


이선생 누가 하필 왕자지황이라고 하고 수업에 들어오겠냐고.


지황 억울해요.


이선생 너 진짜.


지황 신고할래요.


이선생 뭐?


지황 경찰에 신고할래요.


이선생 무슨 신고?


지황 사이버 모욕죄? 몰라요. 저 신고할래요.


이선생 신고하면 어떻게 되는데?


지황 범인을 잡아야죠.


이선생 범인?


지황 네.


이선생 같은 반 친구끼리 무슨 범인이야.


지황 억울해요.


이선생 신고해도 찾기 힘들걸?


지황 몰라요. 경찰이 알아서 하겠죠.


이선생 잠깐만. 경찰에 신고하면 니 마음이 풀릴까?


지황 네.


이선생 응?


지황 범인을 잡으면 명예 회복할 수 있잖아요.


이선생 그 범인 잡으면 니 명예가 회복된다고? ……니 명예가 그렇게까지 훼손될 것 같지는 않은데……. 애들이 내일이면 다 까먹지 않을까?


지황 아, 신고할 거예요.


이선생 신고해도 못 찾을 수도 있어. 줌을 만든 구글은 미국 회사인데…… 개인정보보호법이……. 아니, 아까 상황을 녹화해 둔 것도 없고. 그걸 찾을 수가 있나?


지황 네.


이선생 아…… 잘 모르겠는데……. 음…… 일단 알겠어. 신고는…… 생각을 한 세 번만 더 하고 하렴.


지황 그럼 나가도 돼요? 3교시 시작한 거 같은데.


이선생 응 그래.


무대에서 지황이 퇴장한다. 스크린 중앙의 줌 화면에서 이선생 홀로 남는다.
그 순간 카톡! 소리 울리며 작은 스크린에 이선생 카톡 화면이 뜬다.

학생 8 (메시지) 샘. 단톡방에서 지황이 엄
청 놀려요.


이선생 (화들짝 놀라며) 뭐?


이선생이 휴대폰 화면을 본다. 메시지를 친다.

이선생 (메시지) 뭐라고?
학생 8 애들이 지황이 박제해서 놀려요.


이선생이 학생8에게 전화한다.
무대에 학생8이 소환된다. 수면바지, 편안한 잠옷 차림이다.


이선생 야, 그게 무슨 소리야?


학생8 아까 그거 캡처해서 올렸어요. 찬휘가. 그거 보고 애들이 놀려요.


이선생 어. 그렇구나. 어…… 어쩌나…… 어…… 그럼, 너네들끼리 있는 단톡방에서 오늘 나눈 대화 내용 다 캡처해서 나한테 보내 줄 수 있어?


학생8 어, 너무 많은데.


이선생 그럼, 그 부분만이라도.


학생8 네.


학생8과 전화가 끊어지고. 카톡! 알림음이 뜨며 대화창이 보인다.

학생 1 (메시지) 지황 미친…….
학생 2 (메시지) ??
학생 4 왕자지황
학생 11 (메시지) ㅋㅋㅋㅋㅋㅋ
학생 2 ㅋㅋㅋㅋㅋㅋ
학생 4 박제 성공!
학생 5 지황이 ㅁㅊ
학생 1 ㅁㅊㅁㅊ


이선생은 얼굴이 사색이 된다. 이선생은 다시 전화를 건다.
학생10 소환된다. 집인데도 교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었다. 모범생 티가 난다.


이선생 명진아.


학생10 네?


이선생 애들 단톡방에 너도 있지?


학생10 네.


이선생 거기서 지황이 막 놀렸대매?


학생10 네?


이선생 어, 그랬대.


학생10 아.


이선생 저기…… 부탁이 있는데.


학생10 뭐요?


이선생 혹시 오늘 10시 이후로 한 시간 동안 올라간 단체 카톡 내용 다 캡처해서 보낼 수 있을까? 이모티콘이랑 사진까지.


학생10 애들끼리 있는 단톡방이요?


이선생 응, 부탁해~


학생10 네.


학생10과 통화가 끝나고, 잠시 후 카톡방의 대화 내용 전체가 날아온다.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선생. 천천히 넘겨보며 분석하기 시작한다.
이선생이 긴 한숨을 쉰다. 그리고 토하듯 뱉는 혼잣말.


이선생 아씨 망했다.


3장. 이선생의 자아분열


이선생이 셋으로 자아 분열하여 등장한다.
하나는 이선생의 본체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동영상 속의 단정한 이선생의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이선생과 같은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었는데, 몽둥이를 들고 있다. 상당히 화난 모습이다.
작은 스크린에 이선생의 휴대폰 화면이 켜진다. 학생10이 보낸 단톡방을 캡처한 화면이 떠 있다. 이선생들은 그것을 함께 바라본다. 동영상 이선생이 프레젠테이션 하듯 화면을 넘겨 가며 분석한다.


동영상 이선생역시 명진이. 꼼꼼하게 캡처해서 보냈다. 자, 10시 18분경. 수업 시작되고 나서 내가 출석체크를 한참 하다가 그걸 발견한 시점. 왕자지황이라는 프로필을 캡처해서 원이가 올렸고. 그리고 거기에 호응해서 웃는 애들 4명. 미친놈이라고 욕하는 애 두 명…… 거기에 갑자기 뜬금없이 말 끊는 애가 한 명. 얘는 뭐야. 시헌이는 여기다가 허경영 사진을 왜 올리는 거야. 그리고 좀 있다가 지황이가 신고한다고 올렸다.


이선생 경찰에 신고한대잖아.


몽둥이 이선생이거 학교폭력으로 신고될 수도 있어. 신고하면 피해자 진술, 피해자 학부모 진술, 가해자 진술, 가해자 학부모 진술.


이선생 아 망했다. 안 그래도 할일 너무 많은데.


동영상 이선생파이팅!


이선생 뭐래.


동영상 이선생교사가 하는 일이 뭐야. 애들을 가르쳐야지. 애들한테 뭐가 잘못된 건지, 뭐가 잘 된 건지 잘 설명해 주면 되잖아.


이선생 아까 못 봤냐? 애들한테 장난으로 넘기자고 웃으면서 말했는데, 인제 그것도 학교폭력 방관이라고 고소당하게 생겼잖아.


동영상 이선생애들이 뭔 말을 못 하니. 사소한 오해니까 잘 타이르면 마음이 풀릴 거야. 애들을 사랑으로 잘 대해 줘야지.


이선생 아니 수업 시간에 왕자지황 이렇게 이름표 달고 들어오는 애를 어떻게 가르치니? 제정신도 아니고. 그거 기억 안 나?


동영상 이선생뭐?


이선생 초임 때 말야. 어느 날 학부모가 전화해서.


몽둥이 이선생맞아! 수업시간에 화장실 보내지 말라고.


동영상 이선생수업시간에? 아!


몽둥이 이선생어떤 애가 젊은 여자 선생 들어올 때마다 자위행위 한다고. 같은 반 엄마가 수업시간에 화장실 보내지 말라고 전화했잖아. 남자애들은 원래 개념이 없어.


동영상 이선생이건 그거랑 정도가 완전히 다르잖아. 그냥 해프닝인데 뭐.


이선생 지황이가…… 신고한대잖아.


동영상 이선생뭐…… 그것도 다 절차가 있는 거니까. 진짜 그러지는 않겠지.


이선생 그러다가 일이 커져서 학폭으로 신고하면? 일이 얼마나 복잡해지는데. 같이 밥 먹던 친구가 가해자와 피해자로 편갈리고…… 반 분위기 끝이야.


몽둥이 이선생애들을 너무 오냐오냐 해서 그래. 무서운 것이 없어. 잘못하면 좀 맴매도 하고 그래야지. 요즘 애들은 인권이니 뭐니 하면서 왜 지네끼리는 그렇게 서로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이선생 장난과 폭력은 한끝 차이야. 가해자 입장에서는 장난이고, 피해자 입장에서는 폭력이라고. 아 망했어.


잠시 무대에 정적


이선생 하루 종일 자는 애들 깨우느라 통화 연결음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 다른 할일도 차고 넘치는데 조용히 넘어갈까? 못 본 척? 애들도 그러다가 말겠지.


몽둥이 이선생무슨 소리야? 애들을 불러서 따끔하게 혼을 내야지. 그래야 다시는 안 그러지.


동영상 이선생개별 상담은 어때? 한 명 한 명 대화로 풀어 가면 애들이라 다 이해할 거야.


몽둥이 이선생지금 상황이 딱 학폭이라니까. 이렇게 중재하려고 하다가는 결국 교사만 독박 쓰게 되어 있어. 당장 다 불러.


동영상 이선생그래, 불러. 불러서 한 명 한 명, 눈 맞추고 이야기하자.


이선생 아…… 집에 가고 싶다. 야, 내가 콜센터 직원도 아니고 보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심부름센터도 아니고. 하루 종일 전화하고, 전화 받고 애들 뭐 안 된다고 하면 대신 연락해 주고. 이 마당에 이 일까지.


몽둥이 이선생일단 애들을 불러야겠어.


이선생 왜?


몽둥이 이선생그냥 넘어가는 게 제일 찜찜해. 이 일이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오히려 교사가 학교폭력을 알고도 방관했다고 할 거야. 진짜로 애들끼리 문제 심각해지면 그때는 어쩔래?


동영상 이선생설마 애들이 그렇게까지 하려고?


이선생 잘 모르겠어.


동영상 이선생잘 타일러 보자.


이선생 몰라. 모르겠어…… 근데, 일단 애들 얼굴을 봐야겠어.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4장. 공지


무대가 어두워지고 작은 스크린 화면에 이선생의 공지가 뜬다.

이선생 (메시지) 13시 10분까지 교실로 올
것.
5~6교시는 학교에서 진행합니다.


카톡! 소리가 나고 채팅창이 바뀐다.

학생 6 샘, 저 오늘 못 가요.


5장. 일장연설


아이들의 소음이 들린다. 불이 켜지면 교실에 아이들이 가득 앉아 있다.
이선생의 길고 긴 잔소리가 시작된다.


이선생 얘들아. 조용! 쉿! 갑자기 학교에 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응. 한 명은 안 왔지. 내가 생각을 참 많이 했는데 일단 객관적으로 사건을 정리해 볼게.
(말투가 건조하게 바뀌어) 오늘 10시 10분경, 한국사 시간, 줌 수업방에 입에도 담기 민망하지만 어떤 친구가 ‘왕자지황’이라는 이름으로 입장한다. 여기서 첫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공적 공간에서. 그게 인터넷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여기는 엄연히 교실과 동일한 공간인데, 여기에 이런 이름표를 달고 등장하는 것. 이것은 공용 공간에서 이상한 문구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가 발생한다. 이걸 캡처해서 너희들만 있는 단톡방에 올리고 그걸 가지고 막 웃었지. 근데, 솔직히 웃을 만하긴 해. 웃기지. 근데 문제는 여러 명이 한 사람을 같이 놀렸다는 점이야. 여기는 사이버 상황이라서 글자로만 보면, 말의 뉘앙스나 숨은 뜻을 찾기 힘들지. 예를 들어 우리가 장난으로 야, 미친놈아라고 하는 거랑, 대놓고 상대방을 욕하려고 미친놈아라고 하는 거랑 다른데, 사이버상에서는 그걸 구분할 수 없어.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걸 자신을 모욕한다고 받아들이면 그건 말한 사람 잘못이 되어버려. 문자로 의사를 전달할 때는 더더욱 표현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 거라고. 게다가, 너네는 모두 같은 반 같은 학교 학생이기 때문에 이건 학교폭력으로 취급될 수 있고, 그러면 모두 심각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어. 얼마나? 그건 규정을 찾아서 따져 봐야지. 학교폭력위원회도 열리고. 경찰하고 변호사도 오고 그럴걸?


아이들 소리가 웅성거리다가 다시 잦아든다. 교실은 무척 적막해진다.


이선생 세 번째로, 지황이는 경찰에 이걸 신고하겠다고 하고 있다. 본인은 ‘왕자지황’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경찰에 신고하면? 사건은 쉽게 해결될까? 이건 사실 밝혀지기도 어려울뿐더러 밝혀진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과연 우리 반이 앞으로 서로 잘 지낼 수 있을까. 누구를 위한 범인 잡기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어. 범인이 밝혀진다고 과연 지황이가 놀림 받은 사실은 사라지나? 또는 범인으로 밝혀진 제3의 인물이 있다면, 그 친구는 다른 친구에게 어떠한 평가를 받는 것이 정당한가.


지황 저 진짜 억울해요!


이선생 봤지? 지황이는 너무 억울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이버상에서 모욕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자기 이름을 연상하게 하는 그 친구뿐만 아니라 자기를 놀린 친구까지 학교폭력으로 신고하겠다고 하고 있지. 인제 일이 점점 더 커지고 있지?


지황 저 진짜 아니에요.


이선생 얘들아, 미안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누구 편도 들 수 없어. 나는 그 누구 말도 믿지 않기로 했어. 공평하게. 지황이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지황이가 종종 그러고 다니는 걸 본 적 있다는 친구 말도 있었어.


지황 누가요?


이선생 그건 좀 곤란해. 근데 내가 지어낸 말은 아니야, 여하튼. 지황이의 말이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지만, 단톡방에서 여러 명이 지황이를 놀린 건 빼박 사실이야. 그렇지? 그리고 이건 학교폭력으로 볼 수도 있어.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성훈이?


학생9 저는 몰랐어요.


이선생 뭐가?


학생9 단톡방에 그런 게 올라온 줄도 몰랐고. 줌 수업 창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이선생 뭐? 단톡방에 계속 글이 달렸는데?


학생9 단톡방 잘 안 봐요.


이선생 우리 반 학급방이잖아?


학생9 네.


이선생 너도 그 안에 있잖아?


학생9 네.


이선생 그러니까 너도 뭔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니니? 얘들아. 학교폭력에서 가장 나쁜 게 뭔지 알아? 옆에서 안 말리는 거야. 정도가 지나치면 말려야 하는데, 그냥 모른 척하는 거야. 그런 걸 흔히 방관자라고 하지. 현실에서도 그래. 얘랑 얘랑 서로 장난을 치는 것 같아. 과격한 것 같은데 서로 재미로 그러는 것 같기도 해. 그러다가 감정이 상하는 거지. 누군가가 선을 넘을 때, 바로 그때 “야, 너무 심하다.” 이거 한마디면 되는데, 그걸 아무도 안 하는 거야. “이거는 아니지.” 하면서 옆에서 말리면 되잖아. 단톡방에서 한두 명이 미친놈이라고 하고, 같이 웃고. 그런데 아무도 그걸 안 말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방관하는 건 아니지.


이선생이 아이들의 반응을 살핀다. 숨을 가다듬는다.


이선생 자, 다시 정리할게. 오늘 사이버 공간에서 부적절한 이름으로 수업에 들어온 애가 있었어. 두 번째, 이걸 단톡방에서 놀렸어.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충분히 학교폭력이라 주장할 수 있는 사안이지. 세 번째, 아무도 그걸 말리지 않았어. 이 부분에 대해서 모두 반성문을 쓰도록 해. 정확히 말하면 반성문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생각을 적어 보는 거야.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선생은 비장한 얼굴로 말을 마친다. 주변의 아이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6장. 반성문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고, 이선생 혼자 반성문을 읽고 있다.
이선생이 반성문을 읽고 있지만, 상상 속의 학생이 등장하여 반성문을 읽어 준다.


학생1 나는 정말 큰 잘못을 했다. 친구의 실수를 단톡방에서 놀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크게 잘못한 거 같다. 그냥 웃겼다. 친구에게 사과해야겠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이선생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적기만 했네. 진정성이 없어 보여.


학생11 원이가 캡처 올릴 때 웃지 말걸 그랬다. 나는 그냥 ㅋㅋㅋㅋ만 했는데 학교폭력이라고 샘이 그래서 깜짝 놀랐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이선생 이것도 잘 모르겠다.


학생9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근데 앞으로 단톡방 확인을 잘해야겠다.


이선생 어쩌면 같은 반 학생들끼리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학생11 (머리를 쥐어뜯으며 폭풍오열) 나는 지황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나도 초등학교 때 학교폭력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 너무 힘들고 죽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학교폭력을 방관한 것도 가해자나 다름이 없다는 말에 그런 거 같았다. 나는 정말 나쁜 놈이다. 학교폭력 가해자는 죽여야 한다. 나도 죽어야 한다. 나는 살 가치가 없다.


이선생 (혼잣말로) 아 망했다. 현준이는 아스퍼거라 이런 상황을 잘 모르는데. 빼고 부를걸.


이선생 전화한다. 학생12가 소환된다. 교복 차림이다.


이선생 현준아. 집에 갔어?


학생12 (울먹이며) 네.


이선생 현준아, 오늘 마음이 많이 상했어?


학생12 아니요.


이선생 니가 쓴 반성문 읽어 봤어. 선생님이 너무 말을 세게 한 것 같아. 현준아, 니가 크게 잘못한 건 없어. 그냥 너는 몰랐던 거잖아.


학생12 (울음이 터져 끅끅거리며)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잠시 학생12의 울음소리만 가득하다. 정말 당황한 이선생의 표정.


이선생 자자 현준아. 우리 같이 숨 쉬어 볼까? 들이쉬고 내쉬고. 후 후.


학생12는 아이처럼 이선생의 지시에 따른다. 점점 진정되는 모습이다.


이선생 현준이 오늘도 학원 가니?


학생12 네.


이선생 응. 몇 시?


학생12 6시요.


이선생 응, 그렇구나. 밥은 먹고 갈 거지?


학생12 네.


이선생 뭐 먹을 거야?


학생12 그냥 밥이랑 김치요.


이선생 엄마는 아직 안 오셨어?


학생12 네.


이선생 그렇구나. 저녁 맛있게 먹고 학원 잘 다녀와~


학생12 네.


서둘러 전화를 끊는 이선생.


이선생 맙소사.


동영상 이선생과 몽둥이 이선생이 어느새 등장한다.


동영상 이선생좀 더 부드럽게 말할 걸 그랬어. 현준이는 부르지 말고.


이선생 아니, 현준이만 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잖아. 아, 이게 뭐야, 담임의 할일은 어디까지인 걸까.


몽둥이 이선생잘했어. 어쨌든, 애들끼리 싸우는 것보다 담임이 애들한테 욕먹는 게 낫지. 애들끼리 싸움을 니가 온몸으로 막았다고 생각해.


이선생 이대로 잘 끝날 수 있을까? 지황이가 진짜 안 그런 걸까? 아까 거의 울상이던데…….


몽둥이 이선생걔, 그냥 연기하는 것 아닐까?


동영상 이선생설마 애가 그렇게까지 하겠어? 진짜 범인은 따로 있는 것 아닐까?


몽둥이 이선생그래, 진범이 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현빈이는 어때? 현빈이는 오늘 왜 안 왔지? 혹시 걔가 범인 아닐까? 아까 수업 시간에 현빈이도 늦게 들어왔잖아. 그때 현빈이가 ‘왕자지황’ 이렇게 이름 쓰고 들어왔다가 쓱 나간 것일 수도?


이선생 뭐?


이선생의 전화가 울린다. 작은 스크린에 김시헌 학부모라는 글자가 뜬다.
이선생이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전화 너머의 학부모가 무대로 등장한다.


학부모 선생님?


이선생 네.


학부모 저 시헌이 보호자인데요.


이선생 네. 무슨 일이세요?


학부모 저 여쭤 볼 게 있어서.


이선생 네, 말씀하세요.


학부모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이선생 네? 아 그게 애들끼리 장난이 너무 심해서 제가 학교로 불러서 전체적으로 좀 타일렀어요. 잘못하면 학교폭력으로 번질 수도 있어서. 아무래도 온라인에서 애들끼리 좀 서로 놀린 것 같은데 놀림당한 아이가 너무 속상해 해서요. 시헌이가 집에 가서 뭐라고 하나요?


학부모 아 그게 조금 전에 학교 갔다가 집에 왔는데.


이선생 네, 15분 전에 다 집에 보냈어요.


학부모 들어오자마자 방에 콕 들어가더니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이선생 네?


학부모 어디 갔다 왔냐 그랬더니 학교 갔다고. 근데 오늘 온라인이잖아요.


이선생 네, 맞아요. 근데 제가 애들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불렀어요.


학부모 방에 처박혀서 꼼짝도 안 하니까. 싸웠나 싶고. 혹시 애들이 시헌이를 놀렸나요?


이선생 아니요. 시헌이는 아무 일 없었는데. 놀리지도 않고, 놀림 받은 것도 아니고.


학부모 아 그래요?


이선생 네.


학부모 여튼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이선생 네.


학부모 무대에서 퇴장.
전화를 끊은 이선생 완전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동영상 이선생이 작은 스크린에 아이들의 단톡방 사진을 다시 띄운다.


동영상 이선생허경영 사진 올리고 뜬금없는 소리 한 게 시헌이네.


이선생 뭐?


동영상 이선생대화의 흐름과 전혀 상관없이 계속 이상한 사진을 막 올리고 혼자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몽둥이 이선생혹시.


이선생 혹시?


몽둥이 이선생시헌이가 범인 아니야?


이선생 응?


몽둥이 이선생시헌이가 좀 원래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하잖아. 평소에 지황이가 그러고 다니니까 본인도 한번 해본 거 아닐까?


이선생 ‘왕자지황’이 시헌이라고?


몽둥이 이선생애들이 계속 엉뚱하게 지황이 놀리고, 지황이가 막 신고한다고 그러고. 그러니까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고 그런 거지.


이선생 정훈이가 그랬잖아. 평소에 지황이가 그러고 다닌다고. 진실은 몰라…….


몽둥이 이선생이 전화를 건다. 작은 스크린에 이현빈이라는 이름이 뜬다.
이선생은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몽둥이 이선생현빈이!


학생6 네?


몽둥이 이선생야, 현빈이.


학생6 네?


몽둥이 이선생아까 왜 학교 안 왔어?


학생6 저 지금 집 아닌데요.


몽둥이 이선생뭐?


학생6 저 할아버지 댁 왔어요.


몽둥이 이선생뭐?


학생6 오늘 온라인이라 할아버지 댁 왔어요.


몽둥이 이선생너 혹시 아까 그 일 때문에 피하는 건 아니지?


학생6 네?


몽둥이 이선생그러니까 니가 지황이 이름 사칭해서 수업방에 이상한 이름으로 들어온 거 아니야?


학생6 네? 저한테 왜 그러세요?


몽둥이 이선생아니, 수업방에 그러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


동영상 이선생걔한테 갑자기 왜 화내고 그래?


몽둥이 이선생혼자만 학교 안 온 것이 수상하잖아. 무섭게 훈육해야 한다고!


이선생은 어느새 가방을 다 쌌다. 동영상 이선생과 몽둥이 이선생의 아옹다옹 싸우는 모습을 본다.


이선생 하아........ 때려치워야 끝나 이거.


이선생은 터덜터덜 퇴근하고, 동영상 이선생과 몽둥이 이선생은 계속 다투는 듯, 논쟁하는 듯 아옹다옹하는 모습이다.


천천히 암전









이수진
작가소개 / 이수진

2014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앨리스, 학교가야지>, 2014 피지컬 씨어터 페스티벌 <벽난로가에서의 꿈>, 2018 《동아일보》 신춘문예 <친절한 에이미 선생님의 하루> 당선, 2018 봄 작가, 겨울 무대 <고시원 연쇄 화재 사건>, 2021 시나리오 <너를 줍다>, 2021 장편 <친절한 에이미 선생님의 하루>.


《문장웹진 2022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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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2-10-01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너와 나의 알싸한 세계 백온유, 『페퍼민트』(창비, 2022) 김젬마 재난이 남긴 것들 백온유의 『페퍼민트』는 준비 없는 재난 앞에 닥친 기약 없는 기다림과 불투명해진 미래를 견디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소설은 ‘프록시모 바이러스’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돌보는 ‘시안’과, 슈퍼 전파자라는 낙인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안고 사는 ‘해원’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전염병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안과 해원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바이러스가 삶에 침투하자 이들의 평범한 일상과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식물인간이 된 엄마의 세계가 멈추고 자신의 미래까지 멈춰버린 시안은 돌봄 노동을 수행하느라 정작 자신의 세계여야 할 학교와는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그저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버티며 사는 것 외에는 그 어떤 희망이나 미래를 품을 수 없는 고단한 삶 속에 놓여 있는 시안의 일상은 위태롭고 무력할 뿐이다. 엄마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보다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엄마를 누구보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돌보지만 결국 모든 정성과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들에 지쳐 있다. 한편 슈퍼 전파자라는 무차별 공격으로 인한 불안함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지원’으로 개명하고, 이사와 전학을 선택한 해원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삶에 없었던 것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가족만큼이나 끈끈했던 두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6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들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이 공백은 두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과 멀어진 마음의 거리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시안과 해원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시안은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해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감정의 화살을 해원에게 돌린다. 해원은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를 아는 시안의 등장이 당혹스럽기만 하고 지난 시간을 들추는 것 같아 불편하다. 희망 없는 현실을 견디고 있는 시안과 과거로부터 도망쳐 평범한 삶을 꿈꾸는 해원, 이 두 사람은 다시 연결될 수 있을까? 고여 있는 삶 재난을 준비할 시간도 없이 엄마와 이별을 한 시안은 식물을 돌보듯 엄마를 간병한다. 엄마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엄마가 썩지 않도록 기저귀를 자주 갈아 주는 것뿐이지만, 시안은 엄마의 미각을 깨우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매일 우려 입에 적셔 준다. 시안은 매일 같이 차를 우리며 어린 시절을 회상할 뿐 아니라, 절망과 무력함으로 점철된 일상에 작은 희망을 품으며 나름의 의식을 행하고 있다.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98쪽) 시안이 오랜 간병 경험으로 얻은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

  • 관리자
  • 2022-10-01
K-할머니의 이름은

[리뷰 - 청소년소설] 기존 〈글틴스페셜〉이 9월호부터 〈Part.g〉로 변경되었습니다. 〈Part.g〉는 청소년 대상의 성장소설은 물론 창작희곡과 그래픽노블까지 다양한 영역의 '작품'과 '리뷰'를 게재할 예정입니다. K-할머니의 이름은 유은실, 『순례 주택』(비룡소, 2021) 김젬마 불편한 것들에 대하여 동화나 청소년소설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대개 죽음이라는 소재와 연관되거나 주인공에게 정서적인 위안을 주고 성장을 돕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주로 돌봄 노동과 모성의 주체로 호명되다 보니 자신의 이름보다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불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호칭들에 매우 민감한 이가 있으니, 바로 『순례 주택』의 건물주 순례 씨다. 75세인 순례 씨는 어머니, 할머니, 사부인, 동거녀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과 가족 단위로 엮이는 호칭들을 불편해한다. 이러한 호칭들은 순례 씨의 다채로운 삶과 이력들을 괄호 칠 뿐 아니라 순례 씨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무례함을 담고 있다. 순례 씨는 사별한 남자친구의 손녀인 수림을 손녀가 아닌 최측근으로 호칭 정리하며 할머니와 손녀라는 전형적인 관계 방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순하고 예의바르다’의 순례(順禮)에서 남은 인생을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기 위해 순례(巡禮)로 개명할 만큼 자신의 이름에 대한 애착과 소명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가족으로 소환될 뿐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경험이 없는 ‘K-할머니’의 이름은 자신을 옭아매는 규범적인 호칭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재정의 된다. 순례 씨는 호칭뿐만 아니라 물질과 돈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필요 이상의 것들을 덜어내는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하는 인간들과 쓰고 남는 돈, 썩지 않는 쓰레기가 인생 최대의 고민인 그는 푸짐하고 손 큰 할머니의 밥상이 아닌 노동력을 최소한으로 하는 간단하고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 순례 씨는 정직하게 땀 흘려서 노동하는 삶을 추구하며 세상과 물질에 욕심 없는 다소 초월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자기만의 경계가 매우 뚜렷한 인물이다. “월세 밀리는 건 참아도, 분리배출 제대로 안 하는 건 못 참”(80쪽)을 만큼 그는 순례 주택의 생활 수칙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고 단호하다. 이렇게 순례 주택 입주민들은 공용 생활 수칙과 자신의 바운더리를 지키며 사는 것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53쪽)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유은실의 『순례 주택』은 고정된 공간과 다양한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며 기본적으로 순례 주택이라는 공동체의 복작거리는 삶을 그린다. 이는 사건이 인물과 장소의 활용도가 높고 이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시트콤의 형식과 비슷하다. 『순례 주택』은 등장인물의 이름, 나이, 직업, 특징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이

  • 관리자
  •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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