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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 외 6편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685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개평




유수연






조금 얻어 올 수 있었다


전부를 걸어 얻을 것은 좀 더 넓어진 의미의 전부였기에
내가 걸었던 것도 그것뿐이었다


국수를 삶는 어머니
국수를 삶는 냄비가 바글바글 끓는 저녁이다


검지를 엄지에 이렇게 동그랗게 말면 한 사람이고
좀 더 크게 동그랗게 말면 두 사람도 넉넉히 먹일 수 있다


운동회에서 아이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더 넓은 원을 만들고
가운데로 모이며 좀 더 작게 원을 만들어 낸다


커졌다가
작아지는


놀란 눈동자를 본 적이 있다, 내가 본 도형 중
가장 슬픈 정수리였다


일의 뒤에 줄을 세우면 숫자가 커졌고 커지다 못해 감당할 수 없었다
영의 뒤에 줄을 세우자 아무 의미도 없었다


다 먹을 수 없을 양도 먹다 보면 다 먹을 수 있다
그런 양을 다 해치우다 보면


못 이룬 꿈보다 가끔 못 먹은 밥이 생각날 수도 있겠다는 네 말이 생각난다


그 미련이 가끔 웃기는 저녁이다


분명 누가 굴러떨어지고 깔아뭉개지고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데굴데굴 무릎을 안고 있는데


엄마, 배고파요
그게 유언인 삶도 있는 저녁인데


부러진 소면은 배수구에 흘려보내며 아주 가는 분노를 생각한다


다들 걸러져 접시에 올리는 일 인분을 가졌고
다들 저녁 다음에는 아침이 있었다









믿음 조이기






잘 버티고 있다


그거 하나쯤이야 그거 하나쯤이야
사는 데 문제없으므로


자신을 버리고 싶은 생각을 겨우 참아 본다


모든 사람을 지우고 싶은 날
조용히 운동장을 도세요


이런 생각은 그만 접어 두자 말하며 이런 생각은 그만 잊어버리자 생각하며 운동장을 잊을 정도로 돌았다


잊으려 할수록 또렷해지면 대개 그 생각이다
그러면 주먹을 쥐었다


누군가 울면 따라 울 힘을 남긴 채
묻지도 않은 대답을 준비한다


날씨가 좋네요 같이 죽을까요 날씨가 좋네요 날씨가 좋아요


마주 오는 사람의 눈을 먼저 보았다


두어 번 주저앉았지만 일어나 마저 운동장을 돌기로 했다










미래라는 생각의 곰팡이






공동묘지엔
비공동체적 침묵이 존재하고
주인은 청설모, 너


차에 치인 청설모가
죽기까지 튀어 오르는 걸 본 이래로
붉음은 내겐 탄성을 가진 색


언제나 그렇듯 붉은 것 안에는 하얀 것이 있고
언제나 그렇듯 박살 난 몸에는 빨간 피가 있고


윗부분만 깎은 사과를
서로 나눠 먹는 동안
너무 익은 분말 같은 속살을 씹는다


여기에
온몸을 납작 엎드리는 인사는 누가 시작했을까
슬픔은 일종의 세레모니
승기를 올리듯
썩은 것엔 곰팡이가 피듯


시체는 깨진 체온계


붙잡고 종일 울 것 같지만 만지기도 꺼려지는 것
이미 부풀어 오르고 싹이 난 감자가 되고
살았던 것보다 길게
그런 긴 환상을 잊을 만큼 따분한 상태였다


시체에게
영혼은 철 지난 상상일 뿐이고
여름은 무성한 잡초를 키울 뿐이니까


도려내고 싶다 사과에 난 곪은 상처처럼
깨물어 뱉어 버리고 싶다 상자 밑 사과처럼
그만 멍들지 않게
남은 사람은 슬픔의 테두리를 도려내 버려야지
붉음
개가 꾸지 못하는 색깔의 낮잠처럼
살짝만 좌절하고


자는 개를 깨우면
개의 표정도 경멸을 담을 수 있음을
그걸 보고 웃는 인간을 이해하는 노력으로


괜찮다는 마지막을 남기고
계속해 시체가 되는 버그가 있다


이해한다


성장하는 건 역시 끔찍한 것이군
멋쩍은 듯 던져진 게
그것이 종일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 만지기






잘 기다린다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갇힌 것 같다, 이 생각은 책에서 보았던 문장을 가둬 둔 것 아직 내 생각은 구하지 못했다


묘사하지 않아도 괜찮다
많은 사람이 각자의 것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눈이 어디에 있는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여러 방향으로 돌리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알아듣는 뜻은 아니니까


사방으로 뚫려 있다, 사방으로 도망칠 곳이지만
도망친 것은 없다 나는 손을 뻗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이 생각은 빌려 온 것이라 다시 살려야겠다
이 세계에 쓸모없는 생명은 없으니까


아니다 여덟 정도는 있다


부드럽다, 이 생각은 별로인 것 같아 혼자 만지고 놀기로 했다


손이 겨우 닿을 정도의 벽에 달아 두었다


잠시 나왔기에 앉아 있으라고 했다 오래 서 있었으므로










무력의 함






먹지 않으면 똥은 안 나올 줄 알았다


통을 들고 복도에 나오면 보통의 세상이다
자꾸 깨어 있는 곳이다


깨진 화분처럼


물을 넣으면 물이 나오고
밥을 넣으면 똥이 나온다


자라는 게 없는 손아,


자꾸 잡아 보고 힘을 쥐어 보고 쥐여 줘도 잡히지 않는다


무당 아줌마,
기억해?
혼자 쓸쓸한 관이 된 사람 있잖아
너는 쓸쓸하게 박스가 되게 두지 않을 거야


오랜 혼잣말은 가끔 대화가 되고
돌릴 수 없는 게 자식의 마음이라면 부모의 고집은 헛된 드라이버질이겠지


십자가


제일 들어맞지 않는 것


어느 날 네가 먼저 깨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날 역시나 나만 먼저 깨어나 잠든 너를 바라본다


잡을 몸이 또 줄었네
그래도 표정이 좋다


그런 억지가 가끔 희망이 되는 곳에선 잠든 이만 꿈을 꾸었다










직성






이런다고 풀릴 게 아니다


우리 영혼은 껍질에 둘러싸여 있고 너는 내가 잠들었을 때 내 비늘이 비비빅 하는 소리를 들었다


가슴에 얼굴을 얹는 건 진부하지만 따뜻한 온도다


비비빅이 어떤 소리일까


혹시 공감각적 심상이니? 물어보려 하니 언제나 너는 잠들어 있다


이런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아슬아슬이야 정말 그렇지 않니? 언제 다시 엄마가 들이닥칠지 몰라 내가 오면 말이야 빗장쇠를 꼭 걸어 둬 숨을 시간은 벌어야 할 거 아냐


새로 우리가 집을 구했지만 우리의 집이지만
도망치면 들킬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면 들킨다
도망치면 들킨다


이런 생각이 풀리지 않게 되었을 때
망치가 닳기 시작했다










수련이 피기까지






너한테선 상처를 덮은 밴드 냄새가 난다


가렵지만 너를 뜯어 보고는 했다 가만히
잠들어 있는 걸 알면서도
그 속에는 작은 점


같이 누워 결혼에 대해 얘기하던 홍천의 밤하늘
흰 침대보
잔뜩 어지러운 별자리
역시 긁다 보면 모든 게 상처였다
흰 이불
얼굴까지 끌어당기고 무성한 머리칼을 만졌다
잠들어 있는 걸 알면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얼굴


사랑도 담요를 덮으면 그 안에 뭐가 든지 몰랐다
웃는 소리는 전혀 아니었는데
너의 눈에 든 멍도
내가 하늘을 가져다 다 가리고 싶었으나
자꾸 손바닥 밖으로 빠져나왔다


우리는 어떤 자세에 열중했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성공한 것이 없다, 이별을
서운한 일이라고 말해 줬지 차렷 자세로 누워서 말이야
주머니 없는 몸이었지만
넣어 갈 수만 있다면
네 마음을 키워 꽃을 피워 보고 싶었다


손등도 그게 있네
나랑 같은 오른손에 그게 있어
사실 나 말이야 죽을 만큼 힘든 적 없었다
사실일 것까지 없는데 나도 그런 적이 없다
우린


불효에 대해 생각하면
서울이 모두 불에 타도
우리는 주먹 꼭 쥔 채 버틸 것이다, 지독하게
우린


겨울 수감자처럼
서로를 안고 사랑보다는 생존하려 했다
그렇지
녹일 수는 없어도 죽을 수는 더욱 없으니까
잘 구운 상감청자처럼
내 몸을 초과하는 마음이 너무 많아도


우주는 다 계획이 있다
잎 속에 잎이 있듯


넘쳐 날 건 없을 것이다
우린


그저 수렴할 테니까
너 없는 지구라도 너와 닮은 것은 너무나 많을 것이고
같이 걸을 길은 자꾸 생겨나겠지
염치없이, 너 없는데도 말이야


홍천의 주일
꽉 움켜쥔 것은 무엇이든
손을 펴 봐


내 점이야, 왼쪽 눈 밑에다가 붙이고 살아
울음이 그친대













유수연
작가소개 / 유수연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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