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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이라는 것」 외 6편

  • 작성일 2023-04-07
  • 조회수 1,74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시]




허공이라는 것

엄원태

화살나무 가지는 촘촘하다.

곤줄박이가 날렵하게 파고들어 꼬리를 까닥인다.

가지가 순간, 흔들렸던가.


수수꽃다리 가지는 성글다.

쇠박새가 무심한 몸짓으로 앉았다가 훌쩍 날아간다.

가지는 미동조차 없다.


곤줄박이 앉았던 자리보다

쇠박새 앉았던 자리가

말갛다.


조금 더 비어 있다.


비어 있던 가지였는데

새가 앉았다가 떠난 뒤에야

더 말갛게,

헹궈 낸 듯 비워 낸 게 보인다.


새는 그렇게

저들의 자취를 허공에 남긴다.


생애(生涯)라는 건,

원래부터 비어 있는 단애(斷崖)를

비로소 마주하고,

온몸으로 통과해 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새는 노래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울지 않고, 다만 여문 부리를 깨물다 떠난 것으로

허공을 한 번 더 헹궈 낸 것이다.


세상 노래를

다 한 것이겠다.




구골나무



내 어릴 적 아버지는

임금님 풍채의 영락없는 큰 어르신이었는데,

돌아가실 적 마흔둘 아버지,

드물게 활짝 웃던 모습을

이제 마흔 넘긴 큰아이에게서 문득 본다.


아버진 참 젊게만 사시다 가셨구나.


어린 게 무슨 낚시질이냐,

못마땅한 안색으로 거창행 출장길 나서시던 마지막 모습만 남아


낮달처럼 가끔, 먼 공중에 떠 있곤 했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겠구나,

철들기 전에

그를 알아보기도 전에 떠나가 버리신 아버지.


세상 저 혼자 너무 늙어 버렸네.


공원 한구석 골골대는 저 구골나무는

풍파에 낡아서는, 이 추위에 때아닌 듯 꽃을 피웠구나.


이 땅의 전쟁과 기근, 재난 소식과 미세먼지 속에서도

더는 의미 없을 것 같은 희미한 향기를

찬 허공에 더해 보는구나,


그게 살아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도 된다는 듯.




이 동물원을 위하여·2 - 동물원 학교



나는 꽤 창의적인 분야의 선생이었으나

퇴직 후 노인대학 대신 동물원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굳이 좋아서 선택한 건 아니었는데

사회적 풍조 탓이라고 해 두어야겠다


설립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명성 드높은 역대 교장 선생님들의 희생과 봉사 덕분에

연예인을 능가하는 팬덤으로 무리를 이끌어

학교는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선생님들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실력이 출중하고 평판이 자자하신 분들이다


양 떼를 잘 몰아 유명해진 목동 출신의 전 교장 선생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 대신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끝내 집착하다가

마침내 승냥이 무리를 규합해 등장한 학생과장 세력에게 쫓겨났다

유혈목이를 목도리 장식처럼 두른

신령한 기운의 도움이 컸다는 후문이었다


소문은 곧 잠잠해졌지만

학교는 두 반으로 나뉘어 패가 갈렸다

서로 벤치마킹하면서도 서로를 비난하여 저주를 퍼붓거나

살점이 뜯기고 피가 나도록 물고 늘어졌다


학생들은 무조건 두 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짐승들이 창궐하는 세태를 맞아

이 동물원은 홍보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신입생들로 무진장한 자산을 늘려 나갈 것이기에


나는 이제 나라 따위를 염려해서

저출산 문제 같은

노인의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참 여러모로 대단한 걸 배우고 있는 셈이다

우리들의 동물원 학교로부터




이 동물원을 위하여·3 - 고라니 울음



신참인 저 고라니는 별난 부적응자인가


저녁이면 속엣것을 전부 토해 내며

제 인후부를 마구 긁어 대는 울음을 운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서 비명처럼 저리 운다고 한다


고라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제 분수엔 턱도 없을 꿈이지만

멧돼지가 되려는 것보다는 더 그럴듯한 꿈인 건 분명하다

꿈이란 게 그런 것일지도 모르니까


지도부에게 저 울음은 꽤 거슬리는 것일 터


그 울음은 제 안의 짐승을

모두 토해 내 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첩보에 따라

신속한 중단 조처에 처해졌고

울음은 조금 더 처절하게 며칠 이어지다 말았다


잘 운다고 고라니가 표범이나 사람이 되진 않을 텐데

이 동물원에선 그런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편 갈라 물어뜯는 것이 사람의 것인 동물원에서라면

사람의 말이 짐승의 소리로 넘쳐 나는 이 동물원에서라면


짐승들이 서로 물어뜯지 않고

그저 잘 울기만 하면

사람이 되지 말라는 법 없겠다 싶기도 했다




이 동물원을 위하여·4 - 왜가리의 자세



왜가리는

단지 그 조용한 성격 탓에

격리 조치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조류관도 곧 폐쇄될 거란 소문이다

새들의 방관자적 수동성이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라는 진단이 언론에 보도되자

새 지도부의 전격적 혁신 정책 목록에 포함되었다 한다


독방 신세인 왜가리는

대접만 한 물웅덩이를 배정받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쪽 다리를 접어 몸속에 집어넣는 일


제 얼굴만 겨우 비치는 물웅덩이를 골똘하게 들여다보는 일


왜가리도 한 번씩 울 때가 있지만

이미 일생의 울음을 다 울어 버렸다는 듯

거친 쇳소리는 이내 잦아든다


왜가리는

그 무언가에 대해

저항하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왜가리의 방식이다


왜가리의 태도이다




이 동물원을 위하여·5 - 백색소음


*


이 도시가 한때 거대한 식물원이었던 적이 있었다


식물들은 서로 합창했다. 구화로


꽃을 피우자고, 구화로

저들만의 암유를 위해서, 구화로

저들만의 결사를 지키기 위해서, 구화로*



*


지금 이곳엔

짐승의 합창이 곳곳에 넘쳐 난다


노래가 넘쳐 나면

소음이 된다

노래가 더 넘쳐 나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노래가 도처에서 서로를 찌른다

찌르고 긁어 대고 할퀴며 찢어발긴다

오장육부를 뒤집고 털가죽을 벗겨 제 얼굴에 뒤집어쓴다


모두가 짖어대고 울부짖고 있다

짐승과 사람의 구분이 불분명해진 것이다


새로운 합창이

조금 더 기이한 모습으로 유행하고 있다


소음과 침묵의 구분도 덩달아 불분명해진 것이다



* 이경록, 「이 植物園을 위하여·5」 (『이 식물원을 위하여』, 흐름사, 1979)에서





이 동물원을 위하여·6 - 비정규



이곳의 구성원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경영구조 혁신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대세이자 풍조이기도 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유인원사의 저 아동 오랑우탄은

부모가 계약 만료로 쫓겨나는 바람에

덩달아 이곳에서 함께 쫓겨날 운명이다


불쌍한 어린것이라도

이 동물원에 갇힌 채로나마,

창창한 앞날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냐는 동정 여론은

부모의 본능적인 사랑 때문에 간단히 무시될 것이었다


체험 학습이라는 혁신적인 교육과정에

조기 취학이라는 새 방안도 좋은 대안일 수 있었고

‘아웃소싱’에 무기 계약제 같은 범국가적인 대책도 있었지만

부모의 애착은 그 모든 제도적 뒷받침을 거부하게 했다


어쨌거나 사랑은

애착과 집착과도 구분이 불분명하다


짐승과 사람이 그러하듯 어쨌거나

작가소개 / 엄원태

199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물방울 무덤』 등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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