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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든 물」외 7편

  • 작성일 2023-04-07
  • 조회수 1,806

철든 물

배영

강물에 철이 들었다.

한때 후덥지근한 낙조(落照)로 술렁이거나

붕붕거리는 날파리들로 어수선했지만

가을 깊숙한 곳까지 흘러온 강물에

이제,

울긋불긋한 철이 들었다.


가을 물들은 다 일렁이는 일을,

반영(反映)에 든 나무들의 색깔에 맡긴다.


흔들리는 물 밖을 굳이

물속까지 끌고 들어간 늦가을의 투명,

철이 든다는 것은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물속이

붉은 물 밖을 흉내 내듯 읽어 간다.

그 풍경을 절정이라 한다면

저의 물색(物色)을 다 비운 강물의 수고가 깊다.


여름의 물속은

불어 난 깊이로 우거져

물속 일만으로도 무성했지만

가을 강은

물 밖 혼자 익어 가는 철을 들인다.


탁한 물색들은 다 돌 밑으로 숨어들고

쓰라린 살갗 같은 얕은 추위가

명경(明鏡) 위에 깃들면

물속에 잠긴 붉은 한철이 일렁인다.


제철을 받아들인 강물은

나뭇잎 술렁이는 일로 붉다.




사슴의 몸속에는 뿔 모양의 피가 흐른다



우물가 옛 아낙들의 험담엔 피를 탓하는 말들이 많았다. 사람의 성정(性情)은 그 사람의 피의 모양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쁜 피와 칭송의 피를 놓고 그 피를 옮긴, 깔깔거리던 우물가 뿔들.


처음으로 사슴피를 마시고 머리를 쳐들고 휘젓는 뿔에 온종일 속이 찔린 적이 있었다. 성질이 급하고 다혈질이 된 것도 그 피의 속성을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슴의 피에는 발굽이 있어 그 어떤 동물보다도 피가 빠르다.


관목지대를 어릿어릿 가는 사슴의 뿔엔 불안한 갈림길들이 있다. 사슴피는 중력을 거슬러 뿔의 꼭지까지 치솟다 뿔을 닮은 갈림길에서 주춤거리고 불안이 무뎌지면 나뭇등걸에 머리를 비벼 뿔을 벗는다. 뿔을 벗은 사슴은 한동안 자신의 온순한 피를 경계해야 한다.


뿔은 아름답지만 훗날 어떤 입에서는 험담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사람에겐 드문드문 나는 뿔이 사슴의 머리 위에서 늘 자라고 있었구나. 아, 저렇게 아름다운 화(火)도 있었구나.




뜨개질



남극의 펭귄들이나 인간이 하는 뜨개질은

엉키고 교차하는 일로 따뜻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어

고마울 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몸속을 뽑아내 얽고 엮어 먹고 사는 일을 하는 거미나

부러진 나뭇가지를 주워다 결구(結句) 짓는 까치를 보면 사람이 하는

뜨개질은 하수의 손재주에 불과하다.


명작들은 모두 다변한 감정들을 엮어 탄생했다.


또 어떤 결말들은 엉킨 실타래에서 실마리 찾듯 그 엉킨 매듭들을 기

어이 헤쳐 나온 뒤끝들, 그런 뒤끝들을 정답으로 사용한다. 가령, 넝쿨

들이나 줄기식물들은 얽히고설킨 힘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명

백한 정답들이다


엉킨다고 다 난제들은 아니다. 꿰매고 기워 가는 상처처럼 벌어진 사

이들은 오히려 엉켜야 아물게 되고 이심전심으로 꽁꽁 묶여 있는 것들

이 온갖 세력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또 자연을 구부리고 끊고

다시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연명하는 일을 지켜 왔다.


태풍이 온다고 야단법석이지만 그 얽히고설킨 야단법석이 결국 무사

히 바람을 이기는 힘이 된다.


얽고 매듭지고 묶은 것들이

난제를 푸는 기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소매



씩씩거리며 소매 끝을 올리는 사람과

참으라며 소매 끝을 내려 주는 사람,

소매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벌컥 화를 내거나

화난 누군가를 말리는 소리 같다


분연히 일어섰다 차분하게 가라앉는

마음이자 행동의 시작과 끝인

소맷자락,

어떤 사람은 창대한 출발을

저 단출한 소매 끝을 걷어붙이는 일로 시작해서

올린 소매를 처음의 자리로

되돌려 마무리했다고 한다.


또 반소매쯤에서 꽃은 피고

무더위엔 아예 사라졌다가

추운 겨울에는 다시 자라는 소매,

추위와 더위에 유독 민감하다.


떠나는 사람의 소맷자락을 잡고 매달릴 때

때때로 이별은 그 소매 끝에서 머뭇거리기도 하는데

그때 소매는 바로 그 사람 자체이기도 하다

또 언젠가 본 어떤 사람의 소매 끝은

낡고 닳아서 조금씩 올이 풀리고 있었는데

그건 꼭 그 사람의

끝이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이 들어가고 또 나오는 출입구인 소매,

평생 그 입구와 출구를 사용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첫 소매에 손을 집어넣은 일에서

마지막 소매에서 손을 빼는 일에까지 가야 한다.




달의 모서리



굴러가는 것들도 때로는

어디쯤에선가 멈춰 설 때가 있다

그건 둥근 몸체에도

모서리가 생겼다는 뜻이다


멀고 높다가도 때로는

가깝고 낮은 달,

누군가 그 달의 모서리를 묻는다면

초순과 하순쯤이 아니겠냐 싶다고 대답한다.

그때쯤 모서리의 뿔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지면

다시 환하게 굴러가는 것이라고

만월의 말투로 대답한다.


모서리들은

꺾어진 곳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곳은 대체로 어둡거나 희미해서

한밤 식탁 모서리를 더듬듯 더듬어야 한다.

구석은 모서리를 위해 꼭 필요한

모서리의 짝이다

모서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돌면 나타날지도 모를 환한 바깥을 꿈꾸며

날마다 어두운 구석을 더듬는지도 모른다

달의 모서리에 몇 건의 경조사를 두고 있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모서리 밖이나

안쪽의, 반쪽 사람들이어서

늘 얼굴이 반쪽이다.

그건 어느 한쪽을 잃었거나

앓고 있다는 뜻이다


한동안 동그랗게 굴러가다가도

문득 제 자리에 멈춰서서

달의 모서리를 살고 있는 한달살이 들

지난달은 빠듯했으니 이번 달은 그럭저럭,

모서리를 벗어나 환하게

굴러갈 것 같다.




뼈의 표정



가끔 죽은 뒤의

내 표정이 궁금할 때

무수한 뼈들의 전시를 보곤 한다.

뼈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고 심지어

눈도 귀도 없는 뼈들은 모두

같은 표정이다

결국 표정은 삶의 피부라는 것

적어도 죽음 이후에는 웃음도 울음도

또 놀람도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더 이상

감정의 연대는 없다.


무표정을 향한

표정들의 여정을 두고

지루하다거나 슬프다고 할 일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울고 웃으면서

무표정의 종착지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이다

웃음은 메마른 피부에

윤택을 더하는 것이겠지만

울음은 그저 막힌 껍질에

작은 물길 하나 내는 것뿐이다.


온갖 감정들,

무표정의 무덤까지

왁자지껄 떠들며 가는 것이다

무료한 뼈의 날들이

온갖 표정의 끝에 기다리고 있으니

표정이 곧, 삶이다.




마중



아버지에겐

아버지의 등대가 있었다.

바다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마라

그곳은 배들이 지나다니는 길,

질펀한 비린내가 발목을 잡는 곳이란다.

전 재산이었던 목선 한 척과

파도처럼 억세던 네 할아버지를 삼킨 곳이다.

고등학교 시절 밤마다

손전등을 들고 마중을 나온 아버지는

늘 그렇게 얘기하곤 했었다.


그런 아버지의 말을

어떤 날은 흘수선 소리처럼 찰박찰박 들었고

또 어떤 날은 삐걱삐걱

목선이 물결을 앓는 소리로 들었다.

손전등이 동그랗게 뚫어 놓은 길

앞서가는 그 불빛 속으로 철썩,

주름진 파도 소리가 뛰어들곤 했다.

저녁 불빛들이 멀리 포구 쪽으로 모여들면

울퉁불퉁한 파도가 널브러져 있던 길

짭짤하게 절여진 별들이 뾰족뾰족 솟아 있고

그 별들 밟을까 물 고인 곳을 뛰어넘던 길

물에 젖은 일 따윈 생각도 하지 마라

바짝 마른일만 생각해라,

저 고개 너머엔 많고 많은 직업이 있다고

아버진 가끔 손전등의 불빛을

먼 고개 너머 쪽으로 비추곤 했지만

지금, 그 고개 너머가 아닌

동풍을 들이마신 불룩한 새벽녘으로

오늘도 나는 캄캄한 파도를 탄다.

뱃일을 처음 나가던 날

아버지의 호통인 양 젖은 멀미가 찾아왔다.


늦은 밤 어로작업 마치고 포구 쪽 등대를 보면

거기, 작은 등대 하나 손에 들고 마중 나온

아버지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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