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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 집」외 6편

  • 작성일 2023-08-11
  • 조회수 2,062

   뜬구름 집

박종익


   차오르는 물살 끌어와 구름집을 샀어요

   딱히 집이라고 하기에는 겨우 물살의 끝점

   물거품으로 기둥 세우고 지붕을 올려 봅니다

   지푸라기 한 줌 얼씬거리지 않는 자리에

   파도가 쓸려간 구름집 한 채

   모래집이 허물어지고 몽돌이 으스러질 때까지

   물거품이 목숨값을 흥정합니다

   저 오갈 데 없는 수많은 찔룩게들

   물 주름은 어쩌라고요

   가진 게 파도뿐인 바다는,

   그저 아가미가 떡 벌어지는 세상입니다

   보증금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다는데

   엘니뇨가 드리우고 간 구름 지붕 아래서

   월말이면 민들레꽃이 피었다가

   다시 시들고 맙니다

   질경이꽃도 꽃이라고, 꽃게가

   가위 손을 흔들며 바닥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이제 막 품에서 보풀같이 풀려나온 주꾸미들

   어느 바다 어느 하늘에서 꿈꿀 수 있을까요

   파도는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떠도는 것은 더더욱 아닌데

   구름도 별자리도 얼씬거리지 않고

   물거품만 보송보송 피어오르는 구름집을

   남의 속 모르는 소라게가

   자꾸만 기웃거립니다






   허리끈



   위아래로 길게 하얀 줄이 도드라진

   추리닝을 입고 학교에 가요


   외줄 허리끈을 힘껏 잡아당기면

   아버지의 낡은 소가죽 허리띠보다 몇 걸음 더 팽팽해져요

   허리가 헐렁하면 지각할지 모릅니다


   친구들과 달리기해요

   검은 고무줄로 허리를 꿴 친구들이 앞서가요

   힘차게 달려나갈수록 허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흘러내려요

   앞발과 뒷발 사이에서 몸통은 엇박자로 뒤뚱거리고

   언제 넘어질지 모를 불안감이 등을 떠밀어요


   무릎에 구멍 나는 것보다

   허리가 헐렁한 것이 더 무섭고 살 떨려와요

   언제 쓰러질지 모를 일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매일 달리기 전에 허리를 바짝 졸라매요

   허리를 당겨 매는 만큼 달리는 발소리는 더 경쾌하거든요


   바지와 나는 점점 한몸이 되어가요

   집에 돌아갈 때는 달그락거리는 빈 도시락의 울음을 업고

   나는 다시 달려야 해요

   구멍은 어머니께서 작은 바늘로 메워 주실 거예요

   장에 가신 아버지는 노란 생고무 줄을 사 오실지 몰라요

   내일은 일등으로 달리고 싶어요

   술을 드시는 건지, 저녁별이 멀어질 때까지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네요


   허리끈이 팽팽하게 당기는 저녁이었어요






   빵에 대한 상대성이론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비껴간 빵은

   더는 식욕의 포로가 아니라 탐욕이다

   참치김밥 한 뼘이 삼천 원일 때

   삼천 원의 분량을 크기로 풀어보면

   식빵의 깊이와 폭이 가장 넓다

   하루 남은 유통기한에 목숨이 저당 잡혀 있는

   옥수수빵 봉지를 뜯으며

   싱그러운 딸기밭을 걸어간다

   먹어도 먹어도 식욕은 당기는데

   나는 배고픈 돼지가 아니어야 한다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순간

   빵을 떠난, 부스러기가 비바체 속도로

   비둘기 발등에 날아든다

   식욕 앞에서 비둘기가

   나와 빵부스러기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빵이 걸어온 이력과 함수관계를 의심한다

   거대한 시조새 부리에 묻은

   하얀 빵가루에 탐을 내는 야만의 개미도

   하늘을 향해 검은 입을 벌린다

   붉은 발가락이 잘려나간 비둘기,

   휘어진 시공 사이로

   사르르 함박눈이 이스트 가루로 내려앉는다

   더는 빵이 아닌 빵가루의 경적에

   중력의 올가미를 통과한 비밀의 문이 열린다

   식빵의 근원을 생각해 본 적 없는 개미가

   빵가루의 신비에 대해 새로운 가설을 세우며

   식빵의 행적을 은밀하게 누옥에 가둔다






   총구



   오늘 나는 여지 없이 죽었다

   탕, 한 방 맞고 분명 쓰러진 것이다

   붉은 피가 낭자하고, 정신은 아득했다

   아침에 내가 버린 플라스틱 검은 연기가

   말하자면 방향을 모르고 날아다니는 총알이 되었다

   말 한마디 무서운 세상에

   무심코 쏘아버린 플라스틱 총알이

   결국, 나를 겨누고 달려들었다

   세상의 모든 방아쇠는 믿음이 안 간다

   총부리에 검은 연기가 자라나

   영원히 총구의 방향을 알아차릴 수 없고

   빙하를 녹아내리고, 종잡을 수 없는

   태풍은 종횡무진 몰려와 세상을 덮친다

   총구를 떠난 검은 총알이 펄펄 날뛰다가

   지구 한 바퀴를 돌아와

   언제 내 뒤통수를 겨누었는지 모르겠다

   갈라진 입술이 날름거리는

   저 검은 혓바닥이 가지를 내고 잎을 펼치며

   해변을 휩쓸며 세상의 지붕을 집어삼킨다

   미끄러운 비누가 권총이라면

   플라스틱은 장총이거나 기관총이다

   내가 겨누고 나아가야 할 생의 방향을

   알 수 없듯이 이를테면

   아무렇게나 버린 플라스틱이 천년만년 자라고 자라나서

   오대양 어느 바다에 흉악범으로 떠돌 것이다

   이제는 검은 연기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총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 두렵고 살 떨리는 일이다

   나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






   거미집



   바람이 우주의 기둥을 흔들어요

   지붕은 벌써 날아가고 없습니다

   사는 게 이런 건가요

   아래로 내려갈수록 매달릴 데가 없습니다

   별똥별이 쏟아지듯 내려가 봐도

   외줄에 매달린 집은 사상누각입니다

   눈물과 웃음의 좌표는 늘 바람에 나부끼고

   생의 기울기는 숙성된 해와 달을 따라붙습니다

   하얀 밧줄을 탄 바람이 우주를 가로질러

   무중력의 끝점으로 추락하고 있어요

   삶의 무게는 중력 가속도를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지만

   두렵지 않으려고 악으로 깡으로

   수직과 수직을 외줄로 하얗게 엮어 봅니다

   태양이 사라진 암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고

   밤새 이슬이 방울방울 생의 줄기를 적시고 있어요

   젖은 몸 마르면 내일이면 어제보다 더 가벼워질까요

   허공의 중심에다 온몸을 걸고,

   죽을힘으로 나래짓을 해봅니다

   중심이 흔들리며 삐걱거려요

   바람이 나를 비켜 가고 있는 거지요

   가진 거 하나 없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궁핍도

   저녁이 내리면 달빛으로 흥건해지고

   이슬에도 빛나는 환한 집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어요






   물마중



   지구의 중심을 향해 바다를 오르내리는

   그녀는 들숨 날숨이 없다

   그러므로 전복 소라에게도

   벅차오르는 숨, 조여오는 물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더 깊은 푸른 바닥의 선심을 얻어야 한다

   바다가 아무리 등 떠밀어 올려도

   그녀에게 중력은 목숨이어야 하고

   최소한 밥이어야 한다

   막 건져 온 전복 홍해삼 뿔소라 성게

   산목숨 팔아 날 것을 얻는다

   이따금 돌문어라도 걸리는 날엔 횡재수다

   그녀의 나이만큼 낡은 망사리에

   가득한 목숨값으로

   어판장에서 또 내일을 사고판다

   멀리서 골목에서

   종일 엄마를 기다리다가

   엄마를 부르며 한달음에 물마중 오는

   철부지의 멍든 눈시울에

   모진 바닷물이 철썩거린다

   대문 깊숙이 들어서는 것도

   또 하나의 물질이다

   숙제를 안 해도 지아비가 술을 먹고 와도

   숨을 꾹 참고 식구들 가슴 깊숙한 곳으로

   물질해야 한다

   조금만 더 숨 참으면 식탁에 웃음꽃 피어나고

   저 깊은 바닥에서 세상 밖으로

   튼실한 날 것을 끌어내며

   뿜어내던 힘찬 숨비소리에

   살맛이 주렁주렁 열릴 것이라고

   밥상을 물려 놓고 먼 바닷바람 소리를 듣는다






   도마뱀의 이별법



   꼬리를 내어주는 대신 몸통을 포기하기로 했다

   갈비뼈를 반으로 나누어 셈을 치를 때

   어느 쪽이 슬픔이고 기쁨인지 정답을 몰라서

   이왕이면 큰 쪽을 떼어 주려다가

   세 치 혓바닥까지 덤으로 넘겨주었다

   몸통이 횡재수를 가졌다고 뛰어든

   하얀 자작나무 숲길에

   비스듬히 돌아누운 잎사귀 이름은

   노란 도마뱀이 아니고

   잘려나간 꼬리는 풀꽃이면 더더욱 안 된다


   도마뱀을 쫓아간 쪽은 바람이지만

   몸통에 네 다리 꺾어 주고 돌아선 꼬리가

   바람 소리에 놀라 부러진 상처를 드러내도

   누구도 귀띔해 주지 않는

   저 어둠의 정체는 알 길이 없다

   바람이 사정없이 내리치고 간 꼬리뼈 끝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무럭무럭 자란다


   누구일까요

   자작나무 잎사귀 사이에 숨어드는 그림자

   가까우면 어느새 멀어지는 숲길은

   수상한 반란이 금방 일어날 것만 같은데

   감당할 수 없는 바람이 사방으로 흔들릴 때

   꼬리가 잘려나간 방향으로

   죽어라, 몸통을 불러봅니다

   가지 끝에서 시간이 부러지고 꺾어집니다

   추억의 꼬리표를 잘라내고

   그 시간을 사각사각 후벼 파는 몸통

   두 손 들어주기 위해 악착같이 피어나는 상처에

   내 앞에서 핏발 서린 눈물 한 방울까지

   그만 제 몸통을 자르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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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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