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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병」외 6편

  • 작성일 2023-11-08
  • 조회수 1,023

아름다운 병

이향란


어쩌겠어, 그러지 않으면


나무는 썩어 땅속을 떠돌다 이무기가 되고

강물은 느닷없이 물고기가 되고

당신은 나로, 나는 당신으로 변할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못한 기억들이 돌멩이가 되어

이리저리 차이는 걸 거야


내가 뭘 가지러 부엌에 왔지?

그토록 철학적인 질문에 박수를 보내면서 생각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왜 왔지? 라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금방 한 말을 또 하는 사람 곁에서

금방 들은 귀로 또 들어주는 

이런 반복의 오류 속에서 우리는

맑고 깨끗하게 씻기는 건지도 몰라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를 애타게 묻는 당신의 질문은

수시로 까무룩 당신을 잊는다는 것


그러니 괜찮아

전화기를 들고 전화기를 찾는 것


방금 한 이야기를 처음 하는 것처럼

또 하는 것


어제는 모르고

부재중인 지금만 아는 것






활짝


 

활짝, 이라는 말

더 이상 필 것 없이 눈이 부신 말


허공과 부재의 정수리가 팽팽하게 맞닿아

주름 없이 편편하게 펼쳐진 말


첫눈이 내리던 기억 속의 그 아침처럼

그저 눈부시고 그저 아름다워

마른입 속으로 침만 조용히 삼키게 되는 말


여러 개가 겹겹으로 어우러지면서

둥글둥글 얇게 빚어지면서

절정의 첨탑으로 치솟다가

팡!


끝내 눈물을 쏟게 하는 말


나비의 가벼운 행보와

뒤척이던 새벽꿈의 향기와

이슬의 차가운 전언이 어우러진


꽃잎들의 얇고 넓은 전용어






빛의 옹이

 


눈부신 것의 껍질을 벗기면

그 속은 무지막지한 어둠이라는 걸 나는 몰랐지

빛나는 건 빛나는 속성으로 줄곧

반짝이는 줄만 알았지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

빛날수록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거


태양의 흑점


눈부심 속에는 길이란 길 다 날아가 버리고

절뚝거리는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는 거


말할 수조차 없는 무진장의 밝음 뒤에는

상처투성이로 앓아누운 깊고 깊은 어둠이 있지

감히 헤쳐 볼 수 없는


그러므로 그 밤의 불빛은 날카롭지

잘못 건드렸다가는 찔리거나 데이고 말지


광활한 빛이 오래도록 키워온

바로 그게 깊숙이 박혀 있으니까






수면水面의 완성 

 


넘치고 가라앉기를 닳도록 반복했다


밀고 당김으로 탄력까지 키웠다


아무것도 아닌 건 놓아주었다


물빛 체념으로 누웠으나 잠에 젖지 않았다


바람이 역류를 부추기며 일으켜 세우려 하고

슬픔의 소용돌이를 심으려 했지만

마음의 소리만 몇 번 다녀갈 뿐


아무 소요도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날카로운 눈빛의 새가 윤슬을 쪼아대도

엉키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찢어지거나 깨지지도 않았다


물비린내가 요동했지만 씻지 않고도 깨끗해졌다


들러붙고 던져진 것들을 잔잔히 띄웠다


만져지지도 만질 수도 없는 살갗으로

차갑게 오래 버티었다


찰랑거렸으나 꼼짝하지 않았다


배후는 언제나 물의 뿌리였다






시인의 장례

 


짧고 간결하게

그녀의 부고가 도착했다


시인으로 태어나 시인으로 살던 그녀가

저 세상으로 갔다고


고개 숙이고 있던 그녀의 시들이

웅성대며 하나둘 일어서더니

시집의 문을 열거나

문예지의 표지를 들추고 나와

검은 예복으로 갈아입는다


그녀의 시들이 한 행으로 나란히 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녀가

어떤 영감으로도 쓸 수 없던 시를

운율이 흐르지 않는 차가운 문장을

타인의 입술을 빌려 쓴다


흰 국화 송이로 시의 향을 피우며

스스로에게 조문한다






밖을 내다본다는 것

 


밖을 내다본다는 것은

안을 들여다본다는 것


꽉 막혀있는 마음을 창가로 데리고 가

밖을 내다봅니다


창밖 커다란 나무의 잎사귀들은 흔들리면서 반짝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던 얼굴을

그 흔들림 속에서 완성합니다


내게 왜, 라고 묻지 않던 사람


우리는 서로에게 추운 밖이면서

따스한 안이기도 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흘러내릴 것도 없는 딱딱한 시절


나는 밖을 보며 무심했던

안을 들여다봅니다


눈부신 가운데 고요한 어둠을






나눗셈풍경

 


그렇다면, 정 그렇다면 나누어야지요


새가 날개와 지저귐으로 나뉘어

공중을 가볍게 떠도는 것처럼

강물이 소리 죽여 울며

저마다의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는 것처럼


정수리에 냉큼 올라앉는

한 자리수의 정답은 올려다보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머지 수는

속절없이 내려다봐야겠지요


빛나는 몫과 비애라는 나머지


모든 게 그렇지요


불쑥 선택되어지는 것과

하찮게 버려지는 것들


몫으로만 우뚝 솟지는 않지요

나머지가 바탕을 이루지요


풍경은 그래서 맑고 유순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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