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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 그림자」외 6편

  • 작성일 2023-11-15
  • 조회수 1,555

박제 그림자

김뱅상


더듬이가 잘려 나간 그림자들 거짓말을 쏟아 냅니다 형광

깜박입니다


신발을 더듬는데 문득,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엊그제 붙잡힌 슬픔엔 고막도 없다던데

핀 박힌 가슴 하나, 떠올립니다


무슨 울음이 이리 더듬거릴까요? 현관에서


                              ⁕


현관 센서 등이 켜진다 

더듬, 더듬 

빛이 사라진다 누가 다녀가는 걸까?


문 쪽을 바라본다 

여닫이문 열리지도 않았는데


다시 불 켜지고 문 앞, 웬 발자국?

귀 기울이면, 박각시나방 한 마리


더듬이 겹눈, 불빛 따라 어두워지고 

저런, 몸에 꽂힌 저 핀 좀 봐 


얼마나 오래 뽑지 못한 가슴일까? 녹이 슨 몸통하며······

깨진 날개 끝


그래,

녹슨 게 어디 나방 몸통뿐일까?



현관, 어두워진다 


어떤, 어둠은 등으로부터 오는 걸까?

머릿속, 어두워지고


어둠 속에선 왜 눈을 감아야만 돌아볼 수 있을까? 어둠에도

센서가 있는 걸까, 나를 닫으면


빛 들어온다 들어서지 못하던 발자국들, 다시

돌아온 게 틀림없어


                              


문 앞을 서성이는 그를 본다, 이내 돌아서는


환한 어둠 속에서 손 맞잡고도

이렇게 커다란 틈 하나 비집지 못하는, 뒤꿈치 든 저 발자국


그런가, 너도 

가슴에 박힌 핀 하나 네가 빼지 못하는구나, 빈 머리를 흔드는


더듬이를 꿈틀거려 보지만

잘려 나간 촉감, 어느 불빛을 따라갔을까?


한밤, 현관에 불 켜지다 꺼지면

자꾸만 출렁거리는 나방 한 마리, 또는 그림자 한 쌍



날 만나지도 못하고 힐끔 돌아서려는 


                              


무슨 그림자들이 이리 희번덕거릴까요?

어떤 슬픔은 왜 자꾸 더듬거리죠?






옆자리가 비었다

-피아노 계단



우린 가끔 야생적이지, 계단에 서서 

왈츠를 구르며


왼쪽으로 스텝을 옮긴다 레 미

오른쪽으로 돌면 눈빛 하나 파에 머물고


돌아갈 수 없는 아니, 다시 찾은 왼쪽이랄까?


바람 지나가자 출렁이는 높은음자리 

층계참까지 흘러내리고


눈을 접으면 꽃잎 하나 떨어지고

왼손을 풀자 계단마저 출렁거리고 


왜 머리가 흔들리는 거지? 

피보나치*로 확산하는 겨드랑이?


시 도, 음자리 술렁이고 머릿결 흔들린다

입술 치켜들면 건반 소리 커진다 포르테 포르테, 뻗어 나가고


내 얼굴, 속이 비어 있다 누가 탈출한 것일까?

동그라미, 이건 그림자들이야


끊어진 통화음이 부푼다

구름 부숭부숭 뭉그러진다


한 계단 오른발 내딛자

나 한 걸음 더 밖으로 사라지고


뭉개진 것은 음계였나? 

아니, 계단엔 여물지 못한 네가 나뒹군다


반음 내린 건반을 밟는다 미, 여태 계단 아래 묻혀 있고


그가 한 발 더 구른다 레, 

그래 오늘 오후는 느린 템포다


왼쪽으로 턴, 미끄러진다 출렁거리던 옆구리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끊어졌던 통화음 다시 들리고 길게 이어지지만 

버튼을 누를 수 없다


반음 위의 계단을 밟을지, 내린 계단을 밟아야 할지

나는


숨을 고른다 바람개비 빠르게 리듬을 탄다


층계참 지나자 파, 왼발을 난간에 걸친다

발끝에 닿은 리듬 오른쪽으로 비틀린다


어디, 잇단음표 하나 부려 두고 온 탓일까?

한 음쯤 밀려가는, 옆구리 한 켠 자꾸만 결리는 스텝


끝이 다물어지지 않는 옆자리 하나


* 피보나치 소수가 무한히 존재하는지는 유명한 미해결 문제다.




카페베네 2층, 혼자 둘이서 



골목을 떠올립니다. 설레던 작별

산국 몇 송이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뒤꿈치가 가려워지고 그림자, 모서리가 접히던

몇 발작 앞서가던 오후


                              


등을 맞대면 딱딱해집니다 혼자가 둘인 이유

머그잔에 담긴 카페라떼 한 잔 소주보다 쓴 탓입니다


삼거리 현대슈퍼, 간이의자 한쪽이 기울어지던

잔도 없이 병나발 기울이던, 여자 

사내, 입술이 오물거리던 거짓말이라든가······


겨울이라니······


식은 소주가 목젖을 쓸어내리고, 갈변한

목소리

(아, 추워) 어깨를 들썩이며 골목을 돌아 나갑니다


바람 지나갑니다 마른 골목을 들썩이며

접힌 모서리를 들추지만 

그림자 속의 그는 그가 아닌, 뒷걸음치고


설레죠, 아니 황홀하죠, 막다른 등을 허공에 기대면

제목도 모르는 노래 몇 소절


                              


선인장을 키운 적 있어요? 그가 물어 올 것도 같아 물음보다 먼저

노, 해 버린 나는 

선인장 몇쯤 말려 버린 여름 어느 페이지를 또

간절히, 찢어 버릴 수도 있어요


하나가 둘이거나 둘이 하나이거나, 가시가 자랍니다 

뾰족해진 우리는······


                              


골목을 사정없이 달립니다 어디라도 도착하겠지요

낯선 곳이면 좋겠습니다






쏟아 버리고 싶은, 오후  



블랙커피를 쏟으면 수평선 벌컥, 뒤집어진다 


3월 5일, 바다는 그렇게

쏟아졌고


지나가던 바람에 비스듬 몸을 기울여 버린, 창유리마다

제 속을 덜어 내던 방 한 칸쯤 있었지 


우린 왜 기울어 쏟아진 집으로 들어갔던지


                              


왜 우린 다시 바닷가 이 마을로 돌아왔는지······


어두워지면 창 몇몇 환해진다 그 방

바라보지도 못한 채 흘려보낸 저녁 어스름, 우린 서로 

  

가장자리에서 태어나나 봐

움츠린 벽 속에 숨죽이며


난 블랙커피

넌, 새인가 블루베리스무디를 마시고 


내가 웃는다

넌, 운다 창을 막 빠져나온 탓일까 제법 검은 춤을 추며


짭조름할 거야 네게 나는

두어 모금 웃음을 쪼는 걸 보면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신다 가장자릴 일으켜 세우면

내일이 오락가락 얽히는, 우리 마주 

식어 가지만


9월 5일, 또 커피를 쏟아 버리고 싶어?


식상하잖아, 제발 춤을 멈춰 봐 



네가 또 운다 

부리를 테이블 위에 쏟아부으며


토할 뻔했잖아 


입술까지 묻어나온 커피 맛, 이리 쓰다

나는 또 블랙커피를······






삽화가 된 휴지통*



머그컵?


휴지통 앞에서 말이 꺾인다 


보도블록 한 장쯤, 기울어진 머그잔에 스트로를 꽂아 넣자

뭉그러지는 속엣말 몇 모금


와글시끌, 끌려오는 발바닥 조각들

가로세로들, 콜라주

  

나 왜 휴지통 앞에 서 있지?


                              


얼굴 따윈 필요 없어, 뒤통수를 반쯤 기울여 보면 알아

숨은 것들이란 가장자리 쪽으로 기울거든


머그컵을 뒤집는다 오토바이 소리 자동차 소음 엎어지고

소프라노, 어제 죽은 여배우의 대사 비스듬히 선다


공중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너와 난 어깨를 들썩였잖아, 어슷 햇살이 잘려 나가는 찰나였어


라운드 미드나잇 흐르고

피카소 달리 에른스트 마그리트, 지나가고

머릿속에 엉겨드는 토끼 여우, 이건 뭐! 짐승도 아니고······ 


비스듬한 것들은 늘 새롭지

저 휴지통 좀 봐, 기울어 있잖아 오늘은 취하지도 않았어


                              


미술관 앞, 제 발로 걸어 나간 발바닥들 자꾸만 말을 걸어오고

난 머그컵이나 툭툭, 기울이며


* 르네마그리트 <삽화가 된 젊음> 변용.




수요일의 빛깔



  오후의 가슴둘레, 바이올렛이다

  어깨너머로 햇살 서너 줌 짓물러지고


  하늘 바다 돌 파도, 한통속으로 물들어 가면

  저녁, 벤치 옆 길목을 서성인다


  막 몸속을 통과하는 스펙트럼의 맨 아래 

  끊어지듯 이어지는 선율들


  바람 아니, 바이올린  

  그래, 이럴 땐 세상에서 가장 긴 혀를 가진 내가 나를 핥는 거야


  닿을 수 없는 우듬지가 있었지

  내 속에 나 부풀어 오르고 


  가슴둘레가 왜 이리 꿈틀거리지?

  카페베네 2층 창가


  맨 아래쪽 옆구리 울렁일 땐 마른 나뭇잎? 흔들린다

  둥치마저 꿈틀거리고, 이 몸통


  사라진 줄 알았던 것들 몸 안쪽을 향해 걸어온다

  바스락거리는 것들이란 늘 조금씩 어려운 것이지만



  가위를 들고 장미 넝쿨을 자른다 가시들은 손가락을 손등을, 가슴을 찌르기도 하지

  잘려 나간 꽃들 흩어지고


  저녁의 빛깔 손바닥 위에 올리면 

  잘린 지문들


  바람 사붓대는 길목에서

  푸른부전나비 한 마리 오물거리는


  바이올렛, 어둠 쪽으로 겹쳐져 가고 

  내일은 또 어떤 빛깔들, 자라날까?






화요일의 식탁



네가 들어오는 꿈에선 진물이 묻어난다 거즈를 갖다 대면 벌건 물이 스며드는


너는 말라 있다 딱지들 떨어진다 내년엔 너는 조금 더 마를 것이고 

색깔이 지워질 수도 있다


나는 너를 초대하지 않는다


                              


어쩜, 식탁에 놓아둔 꽃 한 송이 피었다

식은 보리차라도 따라 줄까, 돌아보면

 

너는 봉오리 몇 더 피워 낼까?

빨강, 더 짙어질까?

 

잎사귀 위로 물방울 흘려 본다 도르르

새 한 마리 날개를 턴다


                              

 

구부정히 걸어가 꽃대를 흔든다

오늘 화요일인가? 뒤쪽을 살피면 네 목덜미엔

 

여름 가고 봄 가고, 동지가 와도

봉오리만 붉었었는데

 

물을 주다가······

밥은 먹었니? 생각했을 뿐인데······


흠뻑, 마른 너는 머뭇거린다


                              


물을 자주 주면 물맛만 나잖아요?

 

물맛들,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래, 안의 혼잣말 흩어지는 식탁이 있지

 

나, 꽃 떨군 지 오래되었어요 

가장자리, 파도가 조금씩 모래를 끌어가고


닿지 못할 먼 곳 

끌어당겨 본다

 

쯧쯧, 식탁의 방식으로만 일어서려는 안쪽, 화요일?


                              


체온도 때론 버려지는 것인가, 오늘 아침엔 

식탁 아래 부스러기인가 

 

아무도 없다 507호

하얀 침대보와 천장에 떠도는 싸늘한 체온뿐


따듯한 것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화요일인데


                              

 

거리가 비워진다 쓰레기봉투를 뒤적이는 고양이 울음소리 날 보채지만 

 

문득 나와 나 사이, 멀고

희미해지고 너는 자꾸

 

허공으로 풀어지는 목소리의

 

                              

 

아이야, 화요일인데 잘 가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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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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