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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무」외 6편

  • 작성일 2023-08-23
  • 조회수 740

먼 나무

정원선


   멀다는 것과 나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나무는 조금만 멀어지면

   꽃이나 나뭇잎을 떨구고

   잊어버린다


   새가 날아와도 잊어버리고,

   새집이 생겨 식솔이 많아져도

   새까맣게 잊어버린다


   속성은 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잠자코 앉아 바라볼 뿐,

   나무는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


   자기의 그림자 범위 안에서

   상상하고 춤을 추고,

   갈등하고 반성한다

   나무의 세계에서는 반성한다는 말이

   번성한다는 말로도 통한다


   나무도

   여유롭게 호기를 부려본다

   경이로움은 먼 데 있는 게 아니라는 듯 -

   절벽에서 피어난 철쭉꽃도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는 듯 -


   파도는 나무의 속마음을 모른다

   나무는

   열매나 꽃에도 알려주지 않는다



   바닷속에는 풍경이 없다는 말도

   물고기에는

   쓸쓸한 물고기만 있다는 말도

   다 거짓말이다

   좋은 노래는 다 거짓말로 때깔을 부린다


   바닷속에 뛰어든 햇빛이 다정해질 때쯤이면

   곱게 노을이 진다

   그럴 때

   갈매기가 바다 위로 홀로 내려앉으면

   수평선 위로

   나무 한 그루가 품위 있게 자라난다


   바다와 나무와

   물고기는

   갈매기 날개만큼의 거리를 두고,

   쓸쓸하면서도

   다정스럽게 속삭이며

   하루를 살아간다


   서로, 라는 말이

   미련 때문에

   속세를 떠나지 못하는 데는 사정이 있는가보다


   먼 나무에도 이제

   열매가

   붉게 물들어 가는

   시간이 찾아오고 있다.





회전문 중독자



   세상살이에 지친 손짓, 발짓도

   스텝 바이 스텝

   넥타이를 타고 질주하는 목소리 부대도

   스텝 바이 스텝


   젊은이들이 정글이라 부르는 곳

   빙글빙글 돌아가다 보면 구두들의 이야기가

   영화자막처럼 펼쳐지는 곳

   시곗바늘 뒤축이 닳아질 때까지

   돌아가는 곳

 

   늙은 새들의 고독사도

   물고기의 떼죽음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가는 곳

   엄마의 폐병도, 아버지의 빚보증도 양 세 마리와 함께 돌고 돌아가는 곳

   자기만의 울렁거림 안에서 평생을 휘몰아치며 되돌아가는 곳

 

   발걸음 소리도 날아오르고

   어지럼증도

   귓가의 먼 산 너머로 피어오르는 곳

 

   구멍 난 양말과 찢어진 스타킹의 독백이 모여

   물방울 숲을 지나 불의 해협을 건너간다

   스텝 바이 스텝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이 문을 잡아먹고 스텝이 스텝을 잡아먹어도

   울며불며 이를 갈며 돌고 돌아가는 곳

 

   가시가 꽃을 뱉고,

   꽃은 나무를 뱉고, 

   울며불며 이 악물고 되돌아가는 곳

 

   돌고 돌다 보니 모두 다 사라지고

   문과 문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에

   끼어서 돌아가는 건

   회전문 중독자


   어쩌면 우리는 모두

   세상살이에 지친 

   회전문 중독자.






꿈꾸는 식물*



   햇빛이 드는 쪽으로 추억을 맺지 못한 가지가 자란다

   나무에 뼈가 차오르기까지

   화분은 냉정해진다


   냉철함은 식물성에 가까운 거리,

   화분은 꿈을 꾸듯 몽롱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햇빛에 말라가는 양말과 속옷들,

   평범하지만 깨끗한 속마음을 지녔다


   배롱나무에 참새들이 모여 산다

   하나같이 꽃 진 자리를 안타까워하는 새들이다


   뜨거운 감자를 상상만 해도 죄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껍질을 벗기면 알맹이만 가지고 노른자로 치부하던 시절!


   식물의 표정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었지

   새로운 이파리 하나를 얻는다 해도 소용없었지


   껍질에는 이기심도 없고,

   이파리 사이에는 왕따도 없길 바랐지

   우리들의 노파심에는 행복의 나라가 어울릴까 몰라


   시들어 가는 식물은

   처음 듣는 풀벌레 소리에

   잠시,

   헛것에 빠져 산 게 아닌가 하는

   착란을 일으킨다



   작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 꽃잎 하나가

   옆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 이외수 소설 제목






전복의 서(書)



   섬돌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위에 무엇인가를 적어보고 싶어졌다


   가지런한 흰 고무신 한 쌍을 돋보기 삼아

   풍경 소리가 거느린 고즈넉한 사연을

   조용조용 적어본다


   흐릿한 달은

   흑심이 없어서 그런지

   홀로 근심하는 일이 적어졌다


   단 하나의 색에 집착하여

   염화미소까지도 흔들리고 있다면 어떨까?


   풍경 소리는 오롯이

   신들린 배흘림기둥을 꿈꾸며 살고 있다


   목탁 소리가 부처님 손바닥을 떠나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잘도 달려간다

   보리수 역에 단번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한없이 커진 것이다


   섬돌 바닥에서

   서리를 품은 성근 별이 하나둘씩 켜져 간다

   잔잔하게 늙은 별들의 미소까지 들썩거린다


   흰 고무신을 떠도는 모든 구천의 냄새는

   쳇바퀴 도는 자비의 형태로 전해져 내려온다


   섬돌 위에 도래한 갸륵한 밤은

   하얀 서릿발로 먹을 갈아 새로운 전복의 서를 써 내려간다



   컹컹거리는 개 발자국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한 권의 밤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우리에게 맛있는 먹잇감으로 던져준다


   섬돌 위에는

   뜻밖이라는 듯,

   소나무의 기괴한 비명이 미끄러져

   덩그러니 남아 있다.






모래알



   팔다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목구비를 갖춘 것도 아니지

 

   크기는 작은 물방울과 비견되지만

   물방울처럼 마르지도 않지

   눈물방울처럼 짭조름하지도 않지

 

   작은 공인가 싶어 집어 보면 한 알 한 알 집기가 더 어려워지지

   절대 한 톨로는 멀리 못 날아가지

   모래알을 손에 가득 쥐고 던져야 조금이라도 날아가다 흩어지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것이 유일한 탄성이지

 

   모래알을 손바닥에 놓고 비비면

   구름이 침처럼 입에 고이지

   누군가는 모래알을 사리처럼 여겨 가슴 해변에 쌓아두고 지내지

   모래시계는 잃어버린 시간을 향해 흘러가는 중이며,

   모래 언덕은 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벅차오르지

 

   모래알은

   똥도 누지 않고,

   오줌도 싸지 않으며,

   냄새조차 풍기지 않네

 

   모래알에는 달빛에 되비치는 표정도 없고,

   끌어당기는 점성도 없어 서로 사랑하며 지내기가 어렵지 뭐야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모래알은 

   단 한 톨의 욕망마저 거세한 어린 천사라네

 


   모래알은 섹스하지 않아도 그 수가 줄어들지 않지

   자식을 낳지 않아도 수가 줄어들지 않지

   뺄셈, 덧셈, 곱셈, 나눗셈을 몰라도

   반짝이며 주눅 들지 않지 


   모래알을 손에 쥐고 눈을 감으면 들려오네

   모래알들이 개미처럼 줄지어 모래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소리가 -

 

   모래알은 단 하나의 육체로 기억되고 싶어도

   표정을 잃어버린 탓에 실패를 거듭했네

 

   해변, 공사장, 테니스장, 공터, 놀이터의

   모래알을 한데 모아

   조그만 기암괴석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더군.






개미와 개미 떼



           1.


   개미는

   조그만 틈바구니에서

   혼자 살아남아

   깨끗하게 영혼을 씻는다


   씻는 소리

   자체가

   살아남은 개미에게 치욕일까,

   흉한 점괘 같은 것일까


   혼자 중얼거리는 것은 몽상가 파리일까

   살아남은 개미일까?



           2.


   개미와 개미 사이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들 하지

   죽은 지렁이를 닮은 상처의 문양이

   개미의 하늘에 새겨질 때를 기다리는 전통을 두고 하는 말이지


   개미와 개미 사이에

   잠결에 흘러나오는 노둣돌이 없었다면

   지렁이는 죽은 채 발견되지 않았겠지


   어쩌다 먹잇감을 발견하면

   개미의 발자국은 쓰나미처럼 몰려들 가고, 몰려들 오지

   이럴 때 개미 떼는 전위 군으로 불리지



   개미하고 부르면

   개미만 한 목소리가 품에 안겨 오네


   개미는 평생 파리를 모르고 지내도 좋을 것이네

   왜냐하면

   파리는 방금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지


   죽은 지렁이의 똥구멍을 핥는 개미의 궤변은

   지렁이 영혼 깊은 곳까지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볼 작정인가 보네


   이제는 천천히 기다려 보세

   일희일비하지 말고!



           3.


   개미를 뛰어넘어

   개미 떼는

   한발 앞서 나아가야지


   좋은 전략과

   전통은 밀고 당길 때만 가능한 법이라네.





풍선 공동체



   공은 공동체에 더 어울리지

   하지만 나는 공보다 풍선을 좋아해

   그런 의미에서 장난꾸러기가 되려고 해

 

   비록 하늘은 더욱 멀어 보이지만

   구름은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지

   그런 의미에서 사춘기 소년으로 되돌아가려고 해

 

   사실 하늘과 구름이 운명공동체라면

   조그만 풍선 하나쯤 서로에게 필요할 거야

 

   머릿속을 뚫고, 

   기막힌 상상의 나래를 뚫고, 

   조그만 풍선이 날아오른다면

   비행운으로 구름의 상념에 시비를 걸 수도 있겠지  

 

   조그만 풍선은 이미 신비한 심부름꾼이야

   끈을 달고 조용히 날아올라

   하늘과 구름을 중재하지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을 때

   거짓말처럼 바람이 빠져서 사라져 버리지

 

   지상에서 

   풍선의 끈을 놓는 순간,

   우리들의 관계는 낯선 신기루에 휩싸일 거야 

   물론, 맑은 하늘은 구름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사력을 다하겠지만 말이야  

 

   풍선의 민낯은 바람의 시간 속에 숨겨져 있어

   극적인 것은 오히려 해가 될 뿐이야

   열렬히 사랑한다면 

   열렬히 지지한다면

   서로 처지를 묻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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