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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유보트 따라 하기」외 6편

  • 작성일 2023-10-18
  • 조회수 945

카유보트 따라 하기

조효복


화가의 정원입니다

혼자서는 만들지 못하는 소리로 이루어졌죠


그는 투명해진 채 기다립니다 

지치지 않고 놓여 있지요 귤처럼요 


물방울이 닿는 곳에 소리가 있지요 그곳에서 모양과 색이 생겨납니다

껍질의 기분을 알고 싶은 알맹이처럼 그는 온몸으로 귤이 되기도 하지요 

.

바깥의 소리를 몸에 새깁니다

물그림자 속에 빗줄기를 켜는 화가의 활이 보여요


그곳엔 보이지 않는 물뱀과 

아직 태양을 모르는 물이끼와  

몸을 흔들만한 적당한 리듬이 있죠


눈을 감아요

우호적으로 배어듭니다

서로의 뒷모습까지 알 수 있어요


바구니 속에서 귤이 물러집니다 포기하고 싶은 공간이지요

나빠지는 것은 아니에요

잘 섞여 갈릴 수도 있어요

몰려다니며 물드는 푸른 청귤의 시간이 구름 속에 있어요 


세계 바깥으로 흩어지는 과육이란

내리는 비와 같아요


빗방울의 살과 즙으로 정원이 풍성합니다 

청량하게 짜낸 햇살이 물을 건너오며

맑은 시트러스 향을 흩뿌립니다


*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작품






오르골    



식물원에 동물이 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정글 같다 

소리가 나는 방향에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있다 


빛이 쏟아지는 대형 창 앞에서

종려나무를 스케치하고 있던 나는 반사된 채 지워지고

밀림으로 들어간다


보이드 도마뱀이 떨어트린 나무 열매를 주웠다

그 옆에 잘린 꼬리가 있다

마른 나무토막 같다

몸통만 남은 도마뱀은 웅덩이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은 언젠가 돌아올 거라 믿는다 종려잎을 흔든다


제 냄새에 취한 사향쥐가 꼬리를 잡고 돈다 본능적으로

식물원에선 감정을 감출 이유가 없다

층고가 높고 채광이 좋아 나는 투명에 가깝다

진심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바라보는 일은 만지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손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따뜻한 말일까 감정도 사막화된다 

가시가 사라진 선인장이 꽃을 피운다 

가짜인 것 같아 만져봐야 할 것 같고


아열대 식물원을 나가면 연못 정원이다

가까운 데서 바라보면 물고기는 물고기 같지 않고

돌아온 것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 종려잎이 흔들린다


나는 어제의 꼬리를 찾아 

야자수 아래 흙더미를 뒤지고 있다 

뒤진 곳을 또 뒤진다

축축해지면서






우린 아직 웃는 법을 모르고     



눈과 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혼자가 아니어서 너는 춤을 추는 것 같다

단내나는 흙이 우리를 빨아들였지만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떨어뜨린다 

엉키고 더러워진 머리칼을

네온에 물든 갈라진 손톱을 

감춰두고 돌보지 못한 새를 


돌아가야 할 길을 만들지 않는다

숲을 향하는 우리의 도주는 

축제의 불꽃 아래서 들키지 않는데

우린 아직 웃는 법을 모르고


숲을 꿈꾸는 오르페우스 같다

상상한 것을 의심할 줄 모르고

가야 할 곳을 갈 줄 아는 걸음으로

잎을 문질러 어제의 노래를 되살리며 간다


층층이 쌓인 장작을 뛰어넘어 

울타리용 나무를 실은 트럭을 지나

발을 빠트리고 선 허수아비와 

기울어진 누각을 돌아 나오면


발을 떼는 만큼 멀어지는 숲 

숲이 돌아보는 것 같아 손을 뻗어보는데 

우린 아직 그곳에 닿지 않고 있다






플리마켓                  



잊고 있었던 것을 만나게 될지 몰라

여분의 가방을 챙긴다


건기의 동물들이 불려 나온다

먼지구름이 몰려온다 

땅은 너무 많은 발바닥을 가져서 풀은 자라지 않는다 

진짜일 필요는 없다


인형의 머릿속엔 똑같은 머리가 여럿 들어가 있다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살점을 내어준 담비를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은여우의 목젖도 볼 수 있다 비명을 느낄 수 있다 

잘 말린 사슴과 엘크 고기는 특산품이다


전깃줄에 앉지 못한 새는 발가락을 잃어 친구가 없다

배가 찢긴 채 발견된 바다거북의 눈은 

알이 사라진 방향으로 돌아가 있다


유리창으로 날아오던 새가 노래를 잃고

우는 영혼들의 등이 구부러져 있다

무거운 감정이 가벼운 농담보다 싸게 팔리고 있다


빈 상자를 다시 열어본다 

들여다보면 웃게 되는 거울이 있다고 한다

서프라이즈가 반복되면 의심이 커진다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 있다 갈런드에 네가 매달려 있다

온몸으로 잠그지 않으면 반복되는 후렴구 같다

오르골은 새로운 오늘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


가판대가 즐비한 오후의 공원에서 파란 지니가 부풀어 오른다

아름다운 시간이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


찾지 못한 감정에게 어울리는 저녁이다

텅 빈 놀이터에 홀로 남겨진 가젤이 보였다가 사라진다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아는데 찾는다는 것을 알면 숨는다 

찾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다






코끼리 씻기기       



어쩌다 흘린 나를 주웠다는데 

더는 들킬 게 없어진 난

그늘 깊은 집에서 불안을 키웁니다


가만히 두어도 잘 자라는 불안은

어두운 방을 차지하고 누워 귀를 세워요

비좁고 눅눅한 그곳에서 살을 찌웁니다 

시간을 퍼먹는 코끼리 같아요 


아프고 뒤처지고 싸늘합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 같아요 

사람들은 나를 굴려 소문을 만들지요 


커지는 코끼리가 나를 재촉합니다 

귀를 세차게 펄럭이고 코를 휘두르고 

진흙에 몸을 더럽힙니다


샤워기를 틀어요 그 큰 몸을 씻어냅니다

먼지를 가라앉혀요 넘쳐흐르는 기분을 즐깁니다 

거품과 함께 미끄러집니다

모난 생각들은 어느 만큼 보드라워질까요


코끼리 너머의 코끼리들

밀려나고 숨어있던 얼룩의 굵은 다리들 무수한 주름들

푹 패인 커다란 발자국을 지우며


어제보다 가벼워지기를 

물 밖의 세계가 맑아지기를 바라는데요


창턱에 걸쳐진 긴 코가 재밌게 보이는 날 

난 조금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름 속으로 발을 넣었다    



남자는 오랫동안 공중을 읽어왔다  

성공 또한 해지도록 읽었다

눈이 짓무르도록 한 곳만 보았다


베란다 창에 몸을 기댄 채

시선을 멀리 두면 가진 게 많아지는 것 같았는데


먼 산 너머 구름만큼 부푸는 신발을 갖고 싶어

꽉 낀 구두를 벗어 난 젖은 발은 

건널 곳이 많은 발은

희고 아름다운 맨발은


남자가 뛰어내렸다

앵두의 목이 길어지고

흰 손들이 한꺼번에 펼쳐져 그를 받아안았다


가벼워 얇은 잠처럼 쉬이 찢어지는

닿을 듯 말 듯 허공에 잠긴 저 꽃잎은 

땅에 닿지 못하고


제 것이 아닌 허물을 나눠 가질 수 없어서

방향 없이 흩날리는데


꽃부리가 놓아버린 맨발 위로 앵두꽃잎 내려앉고


추락인지 비상인지 알 수 없어 비가 내린다 

벌어진 입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어 꽃잎 진다


무른 흙 위로 둥근 꽃무덤이 젖는다

저 떨궈진 꽃잎들은 머지않아 붉은 생을 일으키겠지


그는 오늘 한꺼번에 많은 잎을 떨궜다 

팔다리를 잃었으므로 꿈을 셀 수 없다


우는 것들의 한기로 봄이 느리게 지나갔다






그림자 길들이기                 



그는 해체되어 회전문 안에서 배양되었다

난산 끝에 거대한 그림자를 낳았다 

다리만 긴 그 희귀 곤충은 

얼마 남지 않은 남자의 살점을 뜯어먹는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몸을 휘감는 불편한 동거는 

빛이 없어도 계속되는데


그늘에선 서로가 경계를 푼다 

발이 많은 그림자끼리는 쉽게 들키고 몸을 키우며

한 번에 멀리 뛰어오른다


주차장에 웅크린 불안과 비둘기의 잘린 발 

벤치 위에 구부린 잠을 끌어와 거미처럼 공중을 넓힌다


한낮에도 햇빛 아래를 활강하는 곤충은

겁 없이 몰려다니는 아이들 같아

빛에 녹아버릴까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남자가 밥을 먹는다 혼자가 아니어서 수저를 건넨다 

보이지 않는 손이 젤리를 굴리고 흔들흔들 찰리 푸스를 듣는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내주고 발을 맞춘다


나눠 가진 그림자들이 탈피를 꿈꾼다 

발아래 깊숙한 곳에서도 탈피한다


햇빛 아래 남자를 업은 그림자가 걷는다 

분리불안을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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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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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감자바우
    감동했어요

    예쁜 글 입니다~^^ 잘 봤습니다.

    • 2023-10-18 11:58:48
    감자바우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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