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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는 마음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858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임하는 마음




장진영






엄마에게 반말을 썼는지 존댓말을 썼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반말을 해서 혼났다는 건 기억이 났는데 그래서 내가 고쳤는지 못 고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고 내 신발이 엄마와 홍석주 오빠의 신발들 틈에 놓이게 되었다. 엄마가 엄마 신발과 홍석주 오빠 신발 사이의 내 신발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 신발은 예전에 박경란 언니가 신던 신발이었다. 술 장식이 달린 자두색 가죽 단화였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어쩐지 흉측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여서 그걸 얻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거나 몸을 밀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간절히 원했다면 아마 나는 기쁜 마음으로 포기했을 것이다. 나보다 먼저 그 신발을 신었던 김민지 언니는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김민지 언니가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속상한 척했으나 내심으로는 행복하였다. 속상한 척은 김민지 언니를 안심하게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박경란 언니를 속상하게 하지도 않았다. 박경란 언니를 속상하게 할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다. 그 신발은 박경란 언니가 내게 직접 물려준 신발은 아니었지만 물려줄 사람을 고른다면 내게 물려주었으리라는 걸 박경란 언니도 나도 알았다.
“다녀왔어.” 반말을 해 보았다.
엄마는 혼내지 않았고 반말이나 존댓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전에 반말을 했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내가 집에게 한 말인 줄로 엄마가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다녀왔어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방이 몇 개 있었다고 기억되는데 이제는 방이 하나였고 열어 보니 화장실이었다. 동그란 문고리에 구리색 물방울 문양이 소용돌이치듯 둘려 있었다. 만져 보니까 그 부분만 약간 도톰했다. 바깥쪽 문고리에는 열쇠 구멍이 안쪽에는 똑딱이 단추가 위치해 있었다. 물방울 문양과 똑같은 구리색이었다. 오줌을 싸고 나왔더니 방 천장에 노끈이 매달린 게 보였고 색색깔의 빨래를 널어 놔서 아름답게 느껴졌다. 건조 중인 수건에는 결혼식이든 야유회든 부활절이든 경사스러운 일을 기념하기 위한 글귀가 인쇄되어 있었다. ‘축’이라는 글자가 공통으로 들어갔다. 잠들기 전에 누워서 읽는다면 박수 치며 축하하는 꿈을 꿀 것 같았다. 싱크대의 타일 벽에는 프라이팬과 뒤집개와 국자가 매달려 있었다. 행거에는 엄마의 옷과 홍석주 오빠의 옷이 매달려 있었다. 모든 것이 다 매달려 있어서 이상해 보였다. 그래도 신발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내 신발이 엄마의 신발과 홍석주 오빠의 신발 사이에 놓여 있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박경란 언니가 어린이 시절에 신었던 자두색 신발이었다. 그런 모든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귀퉁이에 어깨를 대고 서서 엄마가 타일 벽에 매달려 있던 프라이팬을 가스버너에 올려놓는 모습을 보았다. 냉동실 문이 열렸고 불투명한 하얀 비닐봉지가 나왔다. 엄마가 꽝꽝 언 무언가를 수돗물에 씻더니 서로 엉겨 붙은 것들을 분리했다. 프라이팬에 두 개를 올리고 나머지는 아까 그 비닐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프라이팬에서 착 소리와 함께 비린내 실린 연기가 났다.
“유부초밥 먹고 싶다.”
엄마가 대꾸 없이 뒤집개로 생선 두 마리를 뒤적거렸다. 못 들은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잠자코 있었다. 이웃하는 두 벽에 어깨를 밀어 넣은 채 모든 것을 한눈에 보는 데 열중했다. 고개를 젖혀 머리통이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실험해 보았다. 귀가 닿을락 말락 했다. 육면체 공간의 이웃하는 두 벽 사이에 서면 그게 어느 벽이든지 간에 같은 각도를 이루지만 장소에 따라 어떨 때는 귀가 닿기도 하고 어떨 때는 닿지 않기도 하였다. 그 차이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없었다.
누군가 잠긴 현관문을 열쇠로 열었다. 웬 할머니가 남자애를 데리고 들어왔다. 남자애는 나보다 키가 작은 것 같았고 외모가 특이했다. 머리카락이 별로 없는 데다가 눈은 툭 튀어나와 있었다. 몸집이 왜소한 데 반해 머리통은 커다래서 균형이 맞지 않고 위태로워 보였다. 어느 벽에 서더라도 귓바퀴가 안 닿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남자애가 홍석주 오빠임을 알아보았다.
“너로구나.” 할머니가 나를 보며 반가워했다.
나는 이웃하는 두 벽 사이에서 약간 나왔다.
홍석주 오빠가 신발을 벗었다. 현관에 이미 홍석주 오빠의 신발이 많았기에 혹시나 신발을 신지 않고 외출했나 싶어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이었다. 엄마가 할머니를 향해 식사하시게요, 했다. 일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수납 영수증을 달라고 했는데 할머니는 못 들은 척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잠시 뒤 밀폐용기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 오이소박이를 십 킬로그램 담갔다고 했다. 기운이 넘치는 할머니였다. 엄마를 새댁이라고 불렀다.
엄마가 조기에서 살점을 떼어 홍석주 오빠의 밥 위에 하나 올리고 내 밥 위에 하나 올렸다. 홍석주 오빠에게 한 번, 또 내게 한 번. 순서와 상관없이 공평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따금 가시를 뱉어야 했는데 홍석주 오빠는 한 번도 가시를 뱉지 않는다는 점은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었다. 기운 넘치는 할머니가 자꾸 나를 관찰해서 나는 조신한 표정을 지었다. 오이소박이를 씹고 있는데도 자꾸 오이소박이를 권하는 통에 곤욕스러웠다. 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것을 할머니가 다 먹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 생각을 하자 오이소박이가 짠 것도 아니었는데 목이 말랐다. 물을 마시고 싶었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냉장고 문을 열어도 되는지 헷갈렸다. 물을 달라고 하면 그 또한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그냥 목마른 채로 밥을 먹었다. 알고 보니 할머니는 엄마와 홍석주 오빠에게 이 집을 빌려준 집주인 할머니였다. 엄마가 마트에서 바코드 찍는 일을 하는 동안 홍석주 오빠를 돌봐 주기도 하였다. 오늘은 엄마가 나를 데리고 와야 해서 집주인 할머니가 홍석주 오빠를 데리고 병원에 다녀왔다. 수납 영수증은 귀찮아서 안 받았다고 했다. 원래는 어제가 엄마와 나의 약속된 날이었는데 엄마가 오늘만 마트에 휴가를 낼 수 있어서 나는 하루를 더 기다렸다. 일 년이나 일 년 하고 하루나 큰 차이는 없었다. 대동소이했다. 대동소이라는 사자성어를 나는 박경란 언니에게 배웠다. 남자들은 대동소이하고 어른들은 대동소이하고 홍석주 오빠와 나는 대동소이했다. 많은 부분이 같고 아주 조금 다르다는 뜻이었다.
홍석주 오빠가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을 꺼내려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리터짜리 생수병에 갈색 액체가 담겨 있었다. 보리차로 추측되었다. 홍석주 오빠가 생수병을 놓치는 바람에 생수병은 떨어지며 퍽 소리를 냈다. 원통 모양이 아니라 사각기둥 모양이라 바닥을 구르지는 않았다. 엄마가 보리차를 홍석주 오빠의 밥그릇에 부었지만 홍석주 오빠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먹기를 원했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내 몫의 보리차를 물컵에 따라주었다. 집주인 할머니에게는 의사를 묻지 않았는데 그것은 집주인 할머니가 밥을 다 먹은 뒤 밥그릇에 물을 부어 훌훌 마시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집주인 할머니의 식성을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내년에 학교 간다지?” 집주인 할머니가 엄마에게 물었다.
집주인 할머니가 엄마에게 물었지만 엄마는 어쩐지 홍석주 오빠의 눈치를 살폈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 학교 가는 사람은 나였다.
“나는 똑똑해서 학교 안 가도 되는데.” 홍석주 오빠가 중얼거렸다. 나에게 건넨 말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었다. 엄마와 홍석주 오빠는 아직까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밥알과 고춧가루와 기름기가 뜬 보리차를 마시고 밥그릇을 내려놓았다. 물 마시는 걸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엄마가 밥상을 치웠다. 나는 침을 삼켰다. 오기 전에 물을 많이 마셔 둘 걸 후회되었다.
밤이 되자 엄마가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았다. 엄마는 문가 쪽에 나는 창가 쪽에 홍석주 오빠는 엄마와 나 사이에 누웠다. 베개가 두 개뿐이라 엄마는 옷을 접어서 벴다. 배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방귀 소리 같아서 웃겼는데 웃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가로등이 나무틀에 끼워진 반투명한 창문에 수천 개의 십자가를 만들었다. 빛 하나하나는 십자가 모양이었고 다 모이니까 동그랬다. 가로등의 밝기로는 천장에 매달린 수건의 글귀가 읽히지 않았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몰래 박수를 쳤다. 그게 기억이 하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음을 알게 하는 것. 목이 말랐다. 내일 기회가 있으리라고 나를 달래 주었다. 내일 눈을 뜨면 나는 이 집에서 눈을 뜨게 되겠구나, 생각했고 자면서도 그 생각을 했는지 자다가 눈이 떠졌다. ‘축’이라는 글씨가 보이는 듯하였다. 엄마가 창가 쪽 벽에 붙어 누워 내 배를 토닥이고 있었다. 다시 눈을 떠 보니까 밝았다. 나 혼자 누워 있었다.


이불을 개서 행거 밑에 밀어 넣었다. 딸려 들어간 옷자락을 끄집어내 이불을 감추었다. 어제 기억해 두었던 이불의 원래 상태였다. 즉 이 집의 규칙이었다. 나는 의자에 까치발을 들고 서서 엄마의 옷을 꺼냈다. 윗도리와 아랫도리가 하나로 이어진 형태의 기다란 치마였다. 의자에서 내려와 옷을 껴안고 빙그르르 돌았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반대로 돌았더니 토할 것 같았다. 우리가 멈추니까 치맛단이 더 돌려다가는 포기하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나는 소매를 잡아 배를 토닥여 보았다. 이번에는 소매를 길게 잡고 휘둘러 뺨을 후려쳤다. 소매에 달린 단추가 뺨을 아프게 했다. 나는 옷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빨아들였는데 먼지 때문에 기침이 났다. 아무 냄새도 안 났다.
창밖으로 에어컨 냉장고 컴퓨터 산다는 녹음된 음성이 지나갔다. 오토바이 소리도 들렸는데 어제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제 못 웃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하하하하 웃어 보았다. 먼지가 반짝거리며 떠다녔다. 엄마는 마트에 간 것 같았고 홍석주 오빠는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오이소박이를 좋아하는 집주인 할머니 집에 놀러 갔거나 집주인 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갔을 수도 있었다. 이럴 수도 있었고 저럴 수도 있었다. 엄마와 홍석주 오빠의 일과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홍석주 오빠의 티셔츠를 입어 보았다. 작아서 몸이 잘 안 들어갔다.
다시 내 옷으로 갈아입고 내 신발을 신었다. 박경란 언니가 직접 물려주지는 않았지만 물려줄 수 있었다면 오직 나에게 물려주었을 흉측한 자두색 단화였다. 왼발 오른발의 술 장식 개수가 각기 달랐으며 뒤축이 접힌 채로 굳은 상태라 슬리퍼처럼 신을 수 있었다. 작은 선생님은 신발을 슬리퍼처럼 접어 신는 사람을 몹시 싫어했다. 규칙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규칙을 지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신발 뒤축이 손쓸 수 없이 접혀 있어서였다. 접힌 데다가 굳어 있었다. 물려받기 전부터 그러한 상황이었고 박경란 언니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같은 인생을 살 운명이었다.
집에서 나와 반 계단 내려가니까 기억대로 쇠로 된 대문이 나왔다. 열쇠는 필요 없었고 단추를 누르는 것만으로 문을 열 수 있었다. 구리색 물방울 문양이 들어간 화장실 문과 마찬가지로 열쇠 구멍은 바깥에 단추는 안에 위치해 있었다. 등 뒤에서 대문이 저절로 잠겼다. 잠그는 데는 열쇠가 필요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가파른 길과 낮은 벽돌집과 대각선 방향의 큰 교회를 나는 알아보았다. 예전에 살던 집도 이런 곳이었는데 왜 못 찾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떤 날 나는 집에 오기 위해 열 시간 정도를 걸었다. 걷다 보면 나오리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해가 저물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은색 택시가 옆에 서며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집이라고 대답했더니 택시 아저씨가 타라고 했다. 내가 길이 가파르고 낮은 건물이 많고 큰 교회 대각선 방향의 벽돌집을 말하자 택시 아저씨는 잘 안다는 듯 미터기를 켰다. 택시 아저씨는 원래 회사 사장님이었는데 노숙자가 되었다가 지금은 택시를 몬다고 했다. 원래는 택시 아저씨가 가족들을 만나기 싫어했는데 실은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보기 싫어했는데 이제는 가족들이 택시 아저씨를 만나 주지 않는다며 택시 아저씨가 이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택시 아저씨가 울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어느 동네에 도착했고 택시 아저씨가 차를 세우며 다 왔다고 말했다. 길이 가파르고 낮은 벽돌집이 많고 대각선 방향에 큰 교회가 보였다. 내리려고 하자 택시 아저씨가 미터기를 끄며 돈이 있는지 물었다. 돈이 있었다. 박경란 언니가 중학교 친구들에게 빌렸거나 빼앗은 돈을 언젠가 나에게 주었고 그 돈은 내 팬티 안에 있었다. 꼭 필요할 때 쓰라고 준 것이었다. 나는 바지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아랫도리로 지폐의 따가운 감촉을 느꼈다. 택시 아저씨에게 돈을 준다면 택시 아저씨의 가족들이 택시 아저씨를 만나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등이 일정한 속도로 그러나 재촉하듯 똑딱거렸다.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택시 아저씨는 그럴 줄 알았다며 천 원을 주었다. 나는 내려서 슈퍼마켓에 들어가 음료수를 산 다음 잔돈을 공중전화에 넣었다. 박경란 언니가 전화를 받았다. 몇십 분 뒤에 작은 선생님이 봉고차를 몰고 왔다. 그날 내가 걸어간 곳은 충청도였다.
그 돈은 지금도 팬티 안에 있었다. 걷다 보니 시외버스터미널이 나왔다. 벽을 가득 채우는 파란색 판에 하얀색 스티커 글씨로 지명이 빼곡했다. 내가 아는 곳도 보였으므로 화장실에 들어가 지폐를 꺼냈다. 지난번에 버스를 탔으면 되었는데 바보같이 걷는 바람에 택시 아저씨에게 피해를 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박경란 언니가 강조했던 꼭 필요할 때가 마침 지금인 것 같았다. 택시 아저씨를 도울 수 있었는데 도울 마음도 충분히 있었는데 택시 아저씨의 오해로 인해서 그리고 내가 그 오해를 바로잡지 않음으로써 아니 그 오해를 부추김으로써 결과적으로 돕지 않게 된 것은 어쩌면 지금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창구의 직원이 엄마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서 마트에 갔다고 대답했더니 표를 주었다.
시외버스가 정안이라는 이름의 휴게소에서 출발할 때였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호두과자 봉투 입구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먹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봉투에 손을 집어넣자 훈김이 손을 따뜻하게 해 주어서 손을 빼기 싫었다. 나는 호두과자를 하나 가져오며 감사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였다. 앞니로 조금씩 깨물어 먹었다. 할아버지가 또 봉투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봉투 안이 따뜻하지 않아서 금방 손을 뺐다. 헤아려 보니 할아버지와 나는 호두과자를 반씩 나눠 먹은 듯했다. 할아버지가 봉투를 쪽지 모양으로 접어서 앞 좌석 등받이에 달린 그물망에 버렸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할아버지는 별다른 인사 없이 떠났고 나는 그물망에서 쪽지 모양의 쓰레기를 꺼냈다. 편지가 쓰여 있을 것 같았는데 호두과자라고만 적혀 있었다. 호두과자 그림도 있었는데 호두과자에게는 사람처럼 눈코입이 있었고 윙크하며 웃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다시 쪽지 모양으로 접고 싶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절대로 되지 않았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내리라고 소리쳤다. 나는 버스표를 사고 받은 거스름돈을 호두과자 봉투에 넣은 뒤 입구를 그러쥐었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천하와 영서가 달려왔다. 내가 아니라 호두과자 봉투에 코를 들이밀었다. 서운했지만 개들은 원래 그러니까 탓할 수 없었다. 두 마리 다 시베리아허스키였고 한 마리는 검은색 한 마리는 노란색이었다. 누가 암컷이고 누가 수컷인지는 맨날 까먹었는데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털이 더워 보여서 안쓰러울 뿐이었다. 나는 천하와 영서를 껴안고 싶었지만 더 더워할 것 같아서 참았다. 대신 천하야 영서야 하고 불러 주었다. 순서를 바꿔서 영서야 천하야 하고도 불렀다. 영서가 서운해할 것 같아서였다. 물론 영서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그 순서는 오직 나를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생활관 안에서는 작은 선생님이 아기들을 재우고 있었다. 나는 외벽에 몸을 밀착하고 눈만 빼꼼히 내민 채 안을 엿보았다. 아기들을 보자 막상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색깔이 다른 팔찌가 아니더라도 아무리 멀리서 엿보더라도 나는 아기들을 분별할 수 있었다. 윤영이가 작은 선생님을 도와 아기를 어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검지를 입술에 댔다. 윤영이가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웃으며 돌아섰다. 해가 쨍쨍했고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지나치게 조용했다. 그림자마저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아기들을 훔쳐봤다. 윤영이가 나 보라고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해서 하마터면 작은 선생님에게 들킬 뻔했다. 들키기를 내가 원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들키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들키기를 자처했는데 실은 원하지 않았던 거라면 돌이킬 수 없는 곤경에 빠질 것이었다. 아무래도 들키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는데 천하와 영서가 내 엉덩이 냄새를 맡으면서 자꾸 방해했다.
경비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는 박경란 언니를 기다렸다. 네 시나 되어야 온다고 했다. 경비 아저씨가 의아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충청도에서 작은 선생님이 운전하는 봉고차를 타고 돌아왔을 때도 경비 아저씨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피곤하고 부스스해 보였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를 크게 책망하는 느낌도 아니었다. 어떤 선택도 어떤 영향도 자신과 무관하다는 태도였다. 그것이 내가 경비 아저씨를 높이 사는 측면이었다. 나도 다시 태어나면 놀라지 않는 사람 무심한 사람 마음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시 태어났는데 경비 아저씨였으면 싶었다.
“하나 더 주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경비 아저씨가 빗자루에 묻은 꽃잎을 떼서 잠시 살펴보더니 내게 냄새를 맡게 해 주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며 박경란 언니를 기다렸다. 여자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손으로 공을 주고받았다. 양측 모두 경기에 심드렁한 느낌이었다. 관중이 하품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걸 보자 하품이 나왔다. 매사에 무심한 경비 아저씨도 하품을 했다. 어쩐지 안심이 되었고 먼 훗날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가 이 순간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네 시가 조금 넘어서 박경란 언니가 실내화 주머니를 휘두르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빙빙 돌리기도 하고 허공에 엑스 자를 그리기도 했다. 들고 다니기 너무 끔찍하다며 박경란 언니가 항상 좆같은 실내화 주머니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신발장에 둬도 되는 걸 굳이 들고 다니라고 시키면서 사람 쪽팔리게 만드는 곳이 학교라고 박경란 언니는 투덜대곤 했다. 책도 지고 다녀야 하고 실내화도 들고 다녀야 하고 둘 곳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매일을 이사하는 기분으로 귀찮고 무겁게 살아야 하지. 박경란 언니가 실내화 주머니를 공중에 던지더니 헤딩해서 땅에 내다 꽂았다. 버리지는 못하겠는지 다시 주워 들다가 경비실 안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어제였는데 아주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었다. 다녀왔어요, 나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우리는 공터를 거닐었다. 전반적으로 모랫바닥인데 드문드문 풀이 나 있기도 한 너른 땅으로 하루에 두 번 새천년건강체조를 하는 곳이었다. 볕이 따갑고 눈부셔서 나는 금강막기 자세로 빛을 가렸다. 박경란 언니는 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묻지 않았다. 어제 보고 오늘 또 본 것처럼 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나는 박경란 언니의 실내화 주머니를 대신 들어 주었다. 머리에 인 채 차양처럼 그늘을 만들기도 하였다. 용도를 발견하자 박경란 언니가 실내화 주머니를 다시 달라고 해서 자기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피부의 적인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박경란 언니는 다른 반 친구로부터 고백을 받았다고 했다. 항상 있는 일이었음에도 전혀 지겨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박경란 언니는 거울 달린 분첩을 꺼내 자기 얼굴을 비춰 보았다. 거울을 볼 때면 항상 같은 방향 같은 각도로 고개를 틀곤 했는데 그것은 박경란 언니가 자기 턱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그나마 한쪽 얼굴이 다른 쪽 얼굴보다 낫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박경란 언니는 자신의 턱이 네모나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돈을 모아서 턱 깎는 수술을 할 거라고 했다. 천만 원이 필요했다. 나는 거스름돈이 든 호두과자 봉투를 내밀었다. 너무 꾹 쥐고 있었는지 봉투 입구가 땀에 젖어 축축했고 호두과자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박경란 언니가 자기 지갑과 내 간이 지갑을 맞바꾸었다. 이제 나는 나의 지갑을 가져도 괜찮은 입장이라고 했다. 인간의 존엄은 너의 것과 나의 것을 구분하는 데서 생긴다고 했다. 그게 자본주의였다. 나는 택시 아저씨에게 천 원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고는 지금이라도 오해를 바로잡으려 했다. 달라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고 천만 원에 보태라고 그보다 이건 원래 박경란 언니의 것이었다고 아니 원래 주인에게 중학교 친구에게 돌려주라고 빌리거나 빼앗지 말라고 너의 것과 나의 것 즉 박경란 언니의 것과 중학교 친구의 것을 구분하라고 말했다.
“까불지 마. 사유재산제에 대해서 모르면.” 박경란 언니가 분첩을 캐스터네츠처럼 딱 닫았다. 손목에서 실내화 주머니가 달랑거렸다. “어른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절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 알겠어? 어른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절. 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
나는 주눅 들었고 왠지 패배한 느낌이 들었다. 자두색 단화 끝으로 모랫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경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항상 이기거나 지는 기분이었다. 항상 무언가에 임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심드렁하고 싶고 무심하고 싶고 무엇에도 임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태어나면 선수보다는 관중이 관중보다는 경비 아저씨가 되고 싶었다. 홍석주 오빠는 되고 싶지 않았다.
“홍석주 오빠 뭐?” 박경란 언니가 나를 노려보았다.
“응?”
“혼잣말 좀 하지 마. 미친년 같아.” 박경란 언니가 분에 찬 사람처럼 발을 굴렀다. “그놈의 홍석주. 홍석주가 뭔데. 누군데. 너 혼잣말하지 마. 벽 구석에 붙어 서 있지도 마. 바닥에 동그라미 그리지 마. 그러지 좀 마.”
“알겠어.”
“알겠다고 하지 마.”
박경란 언니가 실내화 주머니를 바닥에 패대기치고는 몸을 휙 돌려 걸어갔다. 나뭇가지를 줍더니 다시 돌아왔다. 토라진 줄 알았는데 웃고 있었다. 떠나려던 게 아니라 나뭇가지를 주우러 갔던 모양이었다. 박경란 언니는 느닷없이 화내고 느닷없이 화를 푸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박경란 언니가 무서웠다. 박경란 언니로 살면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박경란 언니가 나뭇가지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들어가.”
나는 들어갔다.
“나와.”
가만히 있었다. 주변보다 짙은 색의 움푹 파인 선을 바라보았다. 그림자가 일정한 각도를 이루었다. 작은 선생님은 이걸 동그라미 게임이라고 불렀다. 오래 버티고 서 있으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언제까지라고 정해 주지 않는 게 이 게임의 묘미였다. 나는 인내심이 강하다는 칭찬을 듣곤 하였다. 어떤 날 작은 선생님이 나오라고 했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작은 선생님은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고 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선 채로 밤을 새웠다. 나오라고 하는 사람이 없을 때 스스로 나갔고 정문을 통과해 충청도까지 걸어갔다. 경비 아저씨는 정문 자물쇠를 풀어 주면서도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봉고차를 타고 돌아온 날 이후로 작은 선생님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너네 오빠 아프다고 했지?” 박경란 언니가 잔인하게 웃었다. “나와.”
나는 나가지 않았다. 나가면 내처 충청도까지 걸어가게 될 것 같았다. 영영 박경란 언니와 이별하게 될 것 같았다.
“여기 하루 서 있으면 홍석주가 하루 더 살 수 있어. 그럼 하루 서 있을래?”
당연했다. 나는 잘 참으며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작은 선생님이 징그러워 죽겠다고 너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고 말할 정도였다. 나는 홍석주 오빠가 아프지 않고 오래 살기를 바랐다. 아프더라도 아픈 채로라도 하루 더 살기를 바랐다.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나보다 먼저 학교에 가기를 바랐다. 고백도 하고 절교도 하기를 바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가만히 서 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이틀은? 사…” 박경란 언니는 사흘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했다. “삼 일은?”
“할 수 있어.”
“못 해. 너는 하루도 못 해. 엄마도 하루 늦게 왔다고 징징거렸으면서.”
“그거랑 달라.”
“며칠이나 할 수 있는데?”
“홍석주 오빠가 죽을 때까지.”
“그런 게임 없어. 누가 그런 게임 시켜 준대? 그런 게임 없다는 거 아니까 너도 할 수 있다고 마음 놓고 믿는 거야. 진짜 있으면 십 분도 못 견딜 거야.”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러라는 얘기처럼 들렸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십 분도 포기하지 말라는 얘기 같았다.
“나 지금 여기 십 분 정도 서 있었는데.”
무언가 강한 힘이 허리를 밀쳤고 나는 선 바깥으로 나동그라졌다. 김민지 언니가 나보다 더 놀랐다는 듯 자기 입을 가렸다. “미안. 넘어질 줄 몰랐어. 윤영이가 아까 너 봤다고 해서 귀신이라고 했더니 막 울잖아. 경비 아저씨도 너 못 봤다던데. 네가 근데 여기 왜 있냐?”
박경란 언니가 똑바로 사과하라면서 김민지 언니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김민지 언니는 대들었고 둘이 씨름하는 동안 모랫바닥의 선이 지워졌다. 박경란 언니가 일부러 문질러 없애는 것 같기도 했다. 김민지 언니가 내 존재를 작은 선생님에게 이른다고 협박했지만 이제 나는 작은 선생님이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천천히 일어나서 날아갔던 한쪽 신발을 발에 꿰었다.
“너 아직도 그거 신고 다녀? 엄마한테 하나 사 달라고 해.”
“엄마 마트 갔어.”
김민지 언니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신발을 사러 마트에 갔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엄마가 마트에 갔다는 말은 시외버스터미널 창구 직원에게 그랬던 것처럼 의외의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제 누가 물어보더라도 엄마는 마트에 갔다고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거짓말이 아니면서도 상대방이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만들 수 있었다.
“저녁에 카레 나온대.” 김민지 언니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같이 먹을래?”
“아니.” 박경란 언니가 나 대신 대답했다.
김민지 언니와 내가 동시에 박경란 언니를 보았다. 박경란 언니가 말했다. “저약 있어.”
“저약이 뭔데?” 김민지 언니가 약 올라 하며 물었다. 박경란 언니는 김민지 언니를 손쉽게 화나게 할 수 있었다. 내가 박경란 언니를 느닷없이 화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애정과도 관계한 일이었다.
“저녁 약속. 그것도 모르냐?”
낡은 흰색 승용차가 공터로 돌진해 들어왔다.


박경란 언니는 조수석에 앉자마자 햇빛 가리개를 내려 거울로 자기 얼굴을 확인했다. 거기 자기가 있는지 알아야겠다는 듯. 예의 그 각도로 얼굴을 튼 채 앞머리를 정돈하고 입술에 빨간색 화장품을 발랐다. 거울이 없다면 박경란 언니는 아마 죽을지도 몰랐다. 나는 뒷좌석에서 박경란 언니와 같은 거울을 바라보았는데 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박경란 언니만 보였다. 상관없었다.
대학생 오빠는 무슨 점수인지 하는 것 때문에 언젠가 우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몰랐는데 박경란 언니와 친밀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사적 연락 금지라는 규칙을 어긴 게 분명했다. 대학생 오빠는 내게 친한 척을 했는데 박경란 언니로부터 얘기를 많이 전해 들어서 이미 나와 친하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충청도 소녀라고 놀리는 것은 내 수치스러운 일화를 모른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박경란 언니가 택시에 탄 사람처럼 맥도날드로 가자고 말했다. 자기는 다이어트 때문에 먹을 수 없으니까 대신 먹어 달라고 했다.
“쿼파치 먹어 줘.”
“쿼파치가 뭔데?” 대학생 오빠가 물었다. 김민지 언니처럼 약 오른 말투는 아니었고 진정 궁금해하는 듯했다.
“쿼터 파운드 치즈버거. 그것도 몰라? 너는,” 박경란 언니가 햇빛 가리개의 거울을 이용해 말의 방향을 바꾸었다. 말이 내 쪽으로 반사되었다. “베토디 먹어.”
베토디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박경란 언니가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 버거라고 알려 주었다. “토마토는 몸에 좋으니까.”
“나도 몸에 좋고 싶은데.” 대학생 오빠가 읊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외설적인 느낌이 들었다. 내게는 먹히지 않지만 박경란 언니에게는 먹히는 말인 듯했다. 박경란 언니가 과장되고 위태롭게 웃어 젖혔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해 공작 같은 웃음이었다. 나는 박경란 언니가 걱정스러웠다.
“천하랑 영서 알지?” 박경란 언니가 말을 돌렸다. “왜 천하랑 영서게?”
대학생 오빠는 맞히려는 노력 없이 바로 왜? 하고 물었다. 퀴즈쇼 참가자가 사회자에게 그래서 답이 뭐냐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천재는 하버드에 가고…” 뒤에서 내가 중얼거렸다.
“영재는,” 힌트라고 여겼는지 대학생 오빠가 답을 가로챘다. “서울대에 간다? 미친. 개한테 왜 그딴 이름을 붙여.”
대학생 오빠가 동물애호가인지 그 반대인지 헷갈렸다. 박경란 언니가 길고양이 사료에 타이레놀 빻은 가루를 섞어 경찰서에 잡혀간 일을 알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박경란 언니는 길에 돌아다니는 동물을 아주 싫어했다. 머리 아플까 봐 약을 주었다는 변명에 캣맘이라는 사람은 박경란 언니의 따귀를 때렸다. 지극히 보살피던 것들이 죽음에 이르렀으니 화가 날 법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귀했으면 왜 길에 뒀을까 하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길에 둘 거면 밥을 주지 말든지 밥을 줄 거면 집으로 데려가야 옳은 것 같았다. 박경란 언니는 촉법소년이라 풀려났고 그 고양이 엄마라는 사람은 두고 보자며 씩씩거리며 떠났다. 박경란 언니는 한동안 그 짓을 계속했다. 영서와 천하에게는 타이레놀을 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맥도날드에서 박경란 언니는 자꾸 대학생 오빠와 내 감자튀김을 뺏어 먹었다. 대학생 오빠가 그럴 거면 하나 시키라고 하자 배가 부르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감자튀김을 밀크셰이크에 찍어 먹는 것보다는 햄버거가 살이 덜 찔 것 같았다. 내가 베토디에서 몸에 좋은 토마토를 꺼내 주려고 하자 박경란 언니는 기겁하며 사양했다.
“토마토는 먹으면 건강해져서 안 돼. 너 병약미라고 들어 봤어?”
들어 보니 다이어트도 그 병약미인지 뭔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아픈 게 어떻게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홍석주 오빠가 들으면 슬퍼할지도 몰랐다. 대학생 오빠가 지금도 예쁘다고 박경란 언니를 달래 주었다. 건성으로 들렸다. 무심과 건성은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달랐다. 소동대이했다.
박경란 언니는 쉐이크쉑에 가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이놈의 촌구석에는 쉐이크쉑이 없었다. 쉐이크쉑은 분당이라는 곳에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붙은 파란색 판에서 그 이름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박경란 언니는 분당에 살면서 아침에는 수영을 하고 점심에는 카페에서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고 심심하면 제과나 꽃꽂이나 가죽공예를 배우고 저녁에는 백화점 식품관에서 장을 봐 와서 음식이나 살림은 도우미에게 맡긴 채 자기는 퇴근한 남편의 재킷을 받아서 걸기만 하는 미래를 꿈꾸었다. 너무 구체적인 꿈이라 오히려 와닿지 않았다. 대학생 오빠의 능력을 가늠하거나 구애를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보였다.
“분당에서 우리가 너를 납치할 거야.” 박경란 언니가 말했다. “너를 유괴할 거야. 내가 너를 키울 거야. 그게 나의 미래야. 이 오빠도 홍씨라서 내가 만나 주는 거야. 성이 다르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테니까.”
대학생 오빠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집에 갈래요.” 나는 햄버거를 내려놨다. 갑자기 토할 것 같았다. “엄마랑 홍석주 오빠가 기다릴 거예요.”
“집? 집이 어딘데? 집 어딘지 알아?” 박경란 언니가 느닷없이 시비를 걸었다. “또 걸어가게?”
“집에 데려다주세요, 대학생 오빠.”
“엄마랑 오빠가 걱정됐으면 너는 오늘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왜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걱정이 된다는 거야? 그렇게 도망가면 땡이지 너는? 거기가 싫으면 여기로 오고 여기가 싫으면 거기로 가면 된다는 거지?”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가게 해 주세요.”
“하루도 못 참았어. 하루도 못 참은 거야 너는. 홍석주는 너 때문에 하루 더 못 살게 됐어. 네가 그렇게 만들었어.”
“작작 좀 해.” 대학생 오빠가 감자튀김을 한 움큼 집어 박경란 언니의 얼굴에 던졌다. “애 괴롭히지 마. 너 내가 우습냐?”
손님들이 이쪽을 쳐다봤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왔다. 다 드셨으면 나가 달라고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닦았는데 소금이 묻어 있지 않았다. 감자튀김에 맞은 건 내가 아니라 박경란 언니였다. 대학생 오빠가 질린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왜 박경란 언니나 내가 아니라 대학생 오빠가 화를 내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까 박경란 언니가 나뭇가지를 주우러 갔던 것처럼 그냥 담배를 피우러 나간 것인지도 몰랐다.
맥도날드 문을 나서자마자 박경란 언니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나를 끌어안기까지 했다. 너무 숨이 막혀서 놔 달라고 소리쳤는데 내 목소리가 박경란 언니의 배 안에서만 웅웅 울렸다. 담배 냄새가 났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박경란 언니가 이다음에 커도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풀어 달라는 뜻으로 읽혔는지 박경란 언니가 팔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대학생 오빠의 흰색 승용차에는 내 주소가 입력되어 있었다. 박경란 언니가 사무실에 잠입해 알아낸 것이었다. 둘은 다시 사이가 좋아 보였다. 박경란 언니는 새롱거리고 대학생 오빠는 건성이었는데 그게 잘 어울리는 듯도 하였다. 나는 뒷좌석에 누워 마음 놓고 잠을 잤다. 엔진의 진동이 신경을 느슨하게 해 주었다. 일어나 보니 박경란 언니는 코를 골고 있었고 대학생 오빠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캄캄할 때 출발했는데 어느결에 환했다. 해가 구름을 벗어나고 있었다. 철새들이 하늘을 새 모양으로 날았다. 나는 기지개를 켰다.
“아까는,” 대학생 오빠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어제는 미안했다.”
“박경란 언니와 사랑하는 사이인가요?”
대학생 오빠가 코웃음을 치더니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그럼 뭘까 싶었는데 아무렴 어떨까 싶기도 했다. 나와 박경란 언니의 사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느닷없이 화내고 느닷없이 화해하는 사이.
우리는 국도에서 과일과 뻥튀기를 산 다음 주유소에 들렀다. 대학생 오빠는 차에 기름을 넣었고 나는 문이 잠겨 있지 않은 화장실에서 오줌을 쌌다. 그러는 동안에도 박경란 언니는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잤다. 나는 대학생 오빠가 박경란 언니와 나를 더 재우기 위해 길을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논이 지나갔다. 저 커다란 마시멜로의 이름은 곤포 사일리지였다. 김민지 언니가 박경란 언니를 이기기 위해 어디서 알아 온 비장의 무기였다. 박경란 언니는 코를 파며 그래서 어쩌라고? 대꾸했고 김민지 언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다음에 커서 곤포 사일리지라는 말은 잊어도 내가 김민지 언니와 박경란 언니를 잊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았다.
“곤포 사일리지?” 대학생 오빠가 물었다. 내가 또 혼잣말을 한 모양이었다. 박경란 언니가 듣지 못해서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근데 너 왜 언니라고 안 하고 박경란 언니 박경란 언니 그러냐?”
“언니라고 부르면 열 명이 동시에 쳐다봐서요.”
“아.” 대학생 오빠가 아, 했다. “대박이네.”
한참 달린 후 풍경의 분위기가 시골이 아닌 느낌으로 바뀌었다. 대학생 오빠의 차가 가파른 길을 올랐다. 옆으로 낮은 벽돌집이 지나갔고 저 위로 큰 교회가 보였다. 차가 우리 집 앞에 정확히 섰다. 그게 주소의 역할이었다.
“잘 가라.”
“태워다 주셔서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 나는 박경란 언니의 뒤통수를 보았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귀가 삐져나와 있었다. “언니 안녕.”
“가.” 대학생 오빠가 박경란 언니 대신 대답했다. “이제 보지 말자.”
나는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닫았다. 흰색 차가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언덕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돌아서서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응답이 없어 몇 번 더 눌렀다. 잠시 후 집주인 할머니가 나왔다. 집주인 할머니가 내 엉덩이를 때렸다. 엉덩이가 개에게 물린 것처럼 따가웠다.
우리 집 문은 열려 있었다. 열쇠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다. 내 자두색 단화가 엄마와 홍석주 오빠의 신발들 사이에 놓였다. 전보다는 익숙한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온 느낌 같았다. 집에 돌아오기도 하였고 집에 돌아온 느낌이기도 하였다.
“다녀…”
집 안이 약간 어수선했다. 엄마와 홍석주 오빠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집주인 할머니가 뒤에서 무어라 얘기를 쏟아 냈는데 말이 너무 빨라 알아듣기 어려웠다.
“다녀왔다네.”
그렇게 외치고 나는 냉장고로 걸어갔다. 냉장고 안에 유부와 당근이 보였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보다는 목이 마른 것 같았다. 나는 보리차를 꺼내서 입을 대고 마셨다. 정말 시원했다.











장진영
작가소개 / 장진영

201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마음만 먹으면』, 장편소설 『취미는 사생활』이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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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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