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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하는 시간

  • 작성일 2022-09-30
  • 조회수 1,83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관능하는 시간




임아라






두세 시간이면 돼.
팀장의 말을 고대로 남편에게 전하다가 의주는 저도 모르게 피식했다. 헛웃음을 감지한 남편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의주는 이따 보자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두세 시간이면 된다니. 경솔한 말이었다. 두 시간이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면 세 시간이지 두세 시간은 뭔가. 팀장은 부탁이라고 했지만 의주에겐 엄연한 명령이었다. 별것 아니라고 눙치기엔 한 시간 차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게다가 세 시간으로도 어림없다는 걸 팀장은 알고 있었다. 오후 7시 30분부터 시작하는 좌담회만 두 시간이었다. 앞서 현장에 도착해 차질이 없는지 점검하고, 끝나면 조사원과 뱐뱐한 의견을 주고받아야 했다. 에이전시에 일임했다고 결과물에 대한 책임도 전가되진 않으니까. 의주는 틈나는 대로 자료를 읽었다. 남편에게 기다리지 말고 자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말았다.
여섯 시가 되자마자 팀장이 출발하자며 의주를 채근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친히 모셔다주겠다고 생색내더니, 차 안에서는 이러다가 늦겠다며 툴툴거렸다. 의주는 내비게이션을 흘깃했다. 목적지가 머지않았으므로, 팀장은 사생활을 염려하는 중이었다. 팀장의 무심한 태도에 의주는 기가 찼다. 누가 데려다 달랬나, 분한 사람이 누군데. 팀장이 프로젝트 예산을 따냈을 때 의주는 마땅히 들떠 있었다. 그간 갖다 바친 제안서가 몇 권인데 입 닦지는 않겠지 방심했다. 팀장은 의주를 열외 시킨 연유를 배려로 포장했다. 신혼을 즐기라는 둥 야근을 피하라는 둥 하더니 울부짖는 아이를 두고 출근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그날을 되새긴 의주는 욕지기를 삼켰다. 아무래도 점심으로 급히 먹은 햄버거가 얹힌 것 같았다.
의주는 통사정하던 팀장의 창백한 안색을 떠올렸다. 굼틀대는 멀건 눈썹이 화급함을 아뢰고 있었다. 팀장은 반나절을 매달렸다. 대리가 예비군 훈련하는 오늘, 하필 베이비시터가 펑크를 냈고, 서방은 늘 그렇듯이 쓸모가 없으며, 이런 때일수록 같은 여자끼리 도와야 한다는 거였다. 의주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어째서 같은 여자 레퍼토리일까 의아했다. 팀장은 영민한 상사였다. 좀처럼 주머니를 열지 않는 대표에게서 대형 전결을 끌어냈고, 그로 인한 타 부서의 질시에 의연하게 처세했다. 야무지지만 속을 내보이지 않는 직속 부하의 실적을 경계했고, 그로 인한 위기를 기회인 것처럼 떠넘겼다. 그런 팀장이 빈번히 같은 여자, 같은 여자 하는 게 거슬렸다. 의주가 아는 한 같은 여자 같은 소리는 무지한 인간의 입버릇이었다.
이러한 의주의 벽견은 어머니로부터 기인했다. 의주의 어머니는 여자로 태어나서, 라고 서두를 떼곤 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대통령이 되다니 대단해, 여자로 태어나서 살찌면 못쓴다, 여자로 태어나서 송편도 못 빚냐, 하는 식이었다. 예사로운 어머니의 어투가 의주의 뇌리에 꽂힌 건 열네 살 무렵이었다. 의주는 학원에서 고득점을 받은 작문을 자랑했다. 아버지와 오빠의 칭찬에 고취된 의주는 여성주의 선구자인 작가를 추천했다. 온 가족이 책을 구경하던 도중에, 어머니가 웅얼거렸다. 여자로 태어나서 글솜씨 없는 치도 있어? 의주는 당혹스러웠다. 어쩐지 어머니가 옹졸해 보였다. 그 후 의주는 어머니에게서 묘한 반감을 느끼곤 했는데, 그게 실망이라는 건 서서히 깨달았다. 여느 자식이 그러하듯 의주도 부모가 완벽한 존재라고 착각했었다. 이젠 부모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고 때론 미련하게 굴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머니를 무지하다고 여기는 순간의 미안도 잊은 지 오래였다.
미안의 경중은 타인에게 달려 있으므로 함부로 드러내선 안 됐다. 이를 아는 팀장은 끝내 인사치레하지 않았다. 도리어 다 왔으니까 걷는 게 빠르겠다면서 차를 세웠다. 의주는 떠밀리듯 내려서 재빨리 횡단보도를 건넜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기도 전에 팀장의 차가 멀어졌다. 꽁무니를 빼는 광경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의주는 가다가 사고나 나라고 저주했다. 멀리서 울리는 사이렌을 외면한 채 카페에 들어갔다. 도무지 각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주는 거침없이 더블 샷을 주문했다. 가방에서 꺼낸 텀블러에 세이렌이 새겨져 있었다.


*


신입이 관찰실로 앞장섰다. 의주는 다이어리 포켓에 끼어 둔 명함을 더듬거렸다. 레알 직위가 사원이었나, 곱씹으면서 따라갔다. 신입이라기엔 연식이 있어 보였다. 옷깃이 매끈하게 하느작대는 블라우스, 다림질한 각이 멋스러운 슬랙스, 명품 로고가 각인된 안경테, 펌에도 살아남은 윤택한 머리카락. 신입은 풍길 수 없는 오라였다. 하긴, 중고 신입이 드물진 않지. 신입이라고 불리는 것만으로도 두근대는데, 중고라니. 가혹하지만 입에 착 달라붙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게 꺼림칙해도, 이보다 알맞은 명칭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직을 고려한 적 없는 의주에게 중고 신입이란 저세상의 소관이었다. 자기가 중고 신입이라고 불릴 일은 이승에선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연식에 관해서라면, 의주도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었다.
의주가 신입이었던 시절이었다.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울상을 지었다.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였다. 옷장에 말짱한 옷이 있는데 마음에 들지 않거나 트렌드를 따지는 게 아니었다. 도통 회사원의 복장에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번은 후드 티와 청바지를 입었다가 지적을 받았다. 복장에 제약을 두진 않지만 아직도 학생인 건 좀 심하지 않나? 부장이 턱짓했다. 의주의 가슴팍에는 OXFORD가 찍혀 있었다. 의주는 그제야 영문자를 인지했다. 이후로 이래저래 쇼핑했지만 족족 실패했다. 왠지 촌스럽고 맵시가 살지 않았다. 예금 잔액은 줄어드는데 옷은 늘지 않아서 두려울 지경이었다.
더욱이 정장은 불편했다. 뻣뻣한 셔츠는 얼룩지기 일쑤인데 손빨래해도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다. 매번 세탁소에 맡기자니 자못 지출이 컸다. 재킷을 덧입으면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렀고, 치마는 걸을 때마다 무릎 위로 말려 올라갔다. 스타킹은 까딱하면 올이 풀렸고, 구두는 굽이 낮은데도 딱딱거렸다. 사무실에 확성기가 있는 건 아닐까, 공상에 빠진 채 바닥을 살피는 의주에게 누군가가 쓴소리했다.
구두는 싸구려 신지 마.
놀란 의주는 굳었다. 멍하니 구두코를 응시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당시에 팀장이던 차장과 당시에는 과장이던 현재의 팀장이 옥신각신 떠들고 있었다. 역시 연식 있는 처자는 씀씀이가 남달라, 차장의 넋두리에 싹 고요해졌다. 그 와중에 의주는 차장이 나쁘다고 단정 지었다. 연식은 자동차에나 쓰지 않나, 궁리하다가 포털에 사전 검색을 했다.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세상에 나서 살아온 햇수. 그런데도 차장의 의도가 미심쩍어서 은근히 기피했다.
만년 차장으로 쫓겨나다니 안타깝네요. 강 과장님, 되게 아끼셨는데. 그날, 기억하죠?
구조 조정 바람이 분 후, 동기가 그날을 언급했다. 의주는 시큰둥했다. 차장의 사직에 무감했고 편애에는 동감하지 않으며, 그 무엇보다 그날을 상기할 수 없었다. 의주는 무슨 날인지 모르겠다고 하려다가 관뒀다. 캐물었다면, 전말을 알았을 것이다. 의주가 싸구려 구두를 신지 않게 된 계기가 바로 팀장이라는 사실을. 그날 퇴근길에 백화점에 간 의주는 초봉에 맞먹는 구두를 12개월 할부로 샀다. 그 구두는 굽이 높은데도 소음이 없고 뒤꿈치가 편했다. 지금은 통틀면 신입 연봉에 맞먹는 신발장을 가진 의주는 연식 덕분이라고 여겼다. 여러 켤레를 번갈아 신으면 신발이 닳지 않았다. 더구나 연식이 쌓일수록 가격이 오르는 중고로 재테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시다시피 저쪽에선 여기가 안 보여요. 패널 모실게요.
매직미러를 설명한 신입이 파일을 건넸다. 의주는 망설였다. 그 블로퍼, 브랜드가 뭐예요? 물으려다가 파일만 받았다. 관찰실의 조명을 조절하는 신입의 복숭아뼈가 뽀얬다. 어릴 수도 있겠어. 타고난 안목이 남다를지도. 집안의 재력이 한몫했겠지. 신입 주제에 에르메스가 가능해? 의주는 SNS를 탐색하느라 패널의 입장식을 놓쳤다. 신입의 블로퍼 따위, 패널의 의상에 비하면 깜찍한 수준이었다. 의주는 매직미러 너머가 눈요기에 훨씬 낫다는 걸 미처 몰랐다.


*


C그룹은 수도권에 거주하는 만 30세 이상, 만 40세 미만의 기혼 여성으로서 자녀가 있는 전업주부였다. FGD룸의 중앙에 있는 타원형 테이블에 여덟 명이 둘러앉았다. 창문을 등지는 쪽과 창문을 바라보는 쪽에 각각 네 개씩, 명패가 있어서 쉬이 자리를 찾았다. 소지품은 대기실에 있는 보관함에 넣었기에 모두 빈손이었다. 패널은 괜스레 일회용품을 만지작거렸다. 종이컵, 나무젓가락, 플라스틱 스푼이 수북했다. 그 외에도 볼펜, 생수, 비스킷이 세팅되어 있었다. 정시에 사회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눈 둘 곳을 찾던 패널의 시선이 한데로 모였다.
관찰실에 있는 의주는 매직미러 너머와 패널 명단을 갈마봤다. FGD룸의 명패에는 오직 이름만 적혔는데, 서류에는 C1부터 C8까지 번호가 있었다. 알파벳 U를 뒤엎은 배치도의 둥근 부분이 사회자 좌석이었다. 의주는 엉덩이를 들썩이면서 의자 바퀴를 굴렸다. 사회자와 정면인 곳으로 옮겼더니 시야가 안정됐다. 가장 가까운 C1과 C8이 호리해서 그 옆자리인 C2와 C7의 실루엣이 보였다. 사회자의 양옆에 앉은 C4와 C5는 옆얼굴만 보이다가 C3와 C6의 몸짓에 따라서 상반신도 보였다. 의주는 가만히 보고 들으면 됐다. 실은 보고 듣지 않아도 됐다. 좌담회는 녹화 및 녹취되고, 그 내용을 토대로 조사원이 보고서를 작성할 테니까. 그 보고서에서 인사이트를 도출하여 윗선에 제출할 자는 의주가 아닌 팀장이니까. 팀장은 의주에게 조언을 구하기는커녕 충고할 위인이었다. 관찰은 흔히 주어지는 경험 아니다? 팀장 잘 뒀지? 자화자찬할 게 빤했다. 기껏해야 소감 정도 묻겠지, 의주는 콧방귀를 뀌면서 따뜻한 커피를 홀짝였다.
사회자를 필두로 간략한 자기소개를 했다. 대체로 이름과 나이, 자녀의 수와 성별을 밝혔다. C2의 소개말에 유난히 리액션이 컸다. 서른여덟 살인데 첫째가 고등학생이라니, 더구나 아들만 셋이라니, 일순간 경탄했다. 그런 반응에 익숙한 C2는 유유했다. 미운 네 살 쌍둥이 엄마인 C7의 차례에는 사석인 것처럼 깔깔댔다. 사회자는 능숙하게 맥을 끊고 C8에게 바통을 넘겼다.
갓 돌이 지난 딸 키우는 도곡동 팰리스 맘이에요.
정적이 흘렀다. 굳이 거주지를 밝힌 C8은 쑥스럽다는 듯이 양손으로 볼을 감쌌다. 열 손가락이 각기 다른 파츠로 장식되어 있었다. 특히 엄지손톱에 붙은 크리스털이 반짝거렸다.
설문지 돌릴게요. HMR을 다룰 겁니다. 짧은 시간에 조리하는 가정간편식이요. HMR이 뭔지 몰라도 무방합니다. 그것도 조사의 일환이거든요. 1-1 체크해 주시고요. 평소에 어디에서 장 보세요?
사회자가 토론을 개시했다. 선호하는 마켓, 그 마켓의 장점, 장을 보는 사이클, 매대에 들르는 순서, 자주 구매하는 카테고리 등 소비 행태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초반에는 패널이 선뜻 나서지 않아서 사회자가 지목했지만 나중에는 누구 할 것 없이 짤막하게라도 말했다. 이마트랑 코스트코 가요. 전 컬리에서 새벽 배송 시키는데. 쓱은 원하는 시간대에 오는데 뭐 하러 외출해요.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더라고요. 밖에서 사야 하는 게 있다니까요. 인스턴트는 되도록 안 사는데 행사하면 맛보고 사요. 냉장이나 냉동 코너를 막판에 들러요. 냉동식품은 들고 가는 동안 녹으니까요. 그니까 모바일로 배달시키는 게 나아요. 아이스 팩 넣어서 깡깡 언 채로 오던데요. 그 무거운 걸 문 앞까지 가져다주잖아요. 금세 쓸 만한 소스가 나왔다. 사회자는 목적에 부합하면 심도를 더해 가도록 유도했다. 심드렁했던 의주도 메모하면서 귀기울였다.
냉동식품은 만두, 돈까스, 핫도그, 동그랑땡, 치킨너겟 등 육가공이 순위가 높네요. 9-2로 넘어갈게요. 6개월 내에 구매한 카테고리에 체크해 주세요. 혹시 면류 구매하신 분?


*


의주는 A, B그룹 소개서를 들췄다. 수도권에서 자취하는 미혼 여성, A그룹은 만 20세 이상, 만 30세 미만이고, B그룹은 만 30세 이상, 만 40세 미만으로 연령대만 달랐다.
A, B그룹은 엄마가 차려 주는 밥 말고 손수 챙겨 먹는 소비자, C그룹은 손수 안 챙겨 먹는 애랑 남편 키우는 소비자, 이의 없지?
팀장이 그룹을 설계한 후 대리에게 분부했다. 고스란히 타이핑하면 될 걸, 대리는 눈치 없이 이견을 내놓았다.
C그룹은 전업주부라는 키워드에 메리트가 있는데요, A, B그룹은 꼭 여성에 한해야 하나요?
엿들은 꼴이 된 의주는 모니터에 몰두하는 척했다. 팀장은 공연히 의주의 뒤통수를 힐끔했다. 대리가 해맑게 고백했다.
저도 밥해 먹거든요.
오오, 밥해 먹는구나! 착하네. 설계 건은 오전 중으로 에이전시에 메일링 해. cc 까먹지 말고. 아, 반찬해 주는 어머니께 전화는? 것도 까먹지 말고. 아르찌?
팀장의 혀 짧은 발음에 폭소가 터졌다.
살살해라, 살살해.
부장이 킬킬대면서 기지개를 켰다. 꾸벅 목인사를 한 대리가 제자리로 갔다.
전 직원이 파티션에 가려져 있지만, 그 벽을 뚫는 제3의 눈을 장착하고 있었다. 초능력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PPT와 매신저를 넘나드는 멀티 신공 모드에 돌입했다. 마짱이 뼈때려쏘, 때리 오또케? 긍데 인정ㄱㄱ. 뇨자만 입달림? 어멋, 때리 푠드는고? ㄴㄴ 마짱이 시러서. 어랏? 마짱이 때리 데꼬나간닼ㅋ 때리 어깨반토막낫엉ㅎ 간드아ㅠ 의주는 대화 창을 보면서 엔터를 누를까 말까 고민했다.
옾라인 남패널 가뭄ㅠㅠ 온라인 조사능 남자도│
의주는 깜빡이는 커서를 뒤로 밀었다. 단체방 멤버는 PM, CS관리사, 웹디자이너였다. 또래로서 뭉쳐서 뒷담화할 뿐, 각자의 업무에 관한 이해도는 별개였다. 의주는 팀장의 기획력을 높이 샀다. 설계가 세부적일수록 데이터에 가치가 부여됐다. 이를테면, 수도권 거주자에 한한 건, 이왕이면 유통 구조가 비슷한 사례로 값을 내기 위해서다. 푼돈 받겠다고 고속도로를 타지 않을 테고 말이다. 미혼에 그치지 않고 자취라는 조건을 단 건, 소비의 주체를 가리기 위해서다. 식량을 자급자족해야 진정한 소비자라는 의미다.
얘가 콩나물무침 삼켰다고 소비잔 줄 아네? 시장에서 콩나물을 사야지. 밥해 먹는다고? 쌀은? 집에서 보내 줬지? 밥솥은? 숟가락은? 찬값은 드리니? 저번에 썸녀 백 사줬다며? 카드 값 메우느라 간당간당하지?
팀장은 뒤끝이 있기로 알아줬다. 대리는 며칠간 타박을 받았다. 성차별을 문제 삼은 대리의 변은 대견했지만, 그건 현황에 깜깜하다는 걸 증명한 셈이었다. HMR 소비자가 전부 여성은 아니어도 대다수인 건 명백했다. 그녀들은 소비자라는 자격을 적극적으로 응용하기도 했다. 파워 블로거, 맘카페 회원, 홍보 서포터즈, 좌담회 알바, 관능평가 요원으로서 활동했다. 물론 HMR 소비 행태에 대해서 논의하고 맛보는 관능 평가자로 남성을 뽑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낯선 모임에 참석하여 장을 보는 과정을 상세하게 논하고, 음식을 맛본 후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을까? 머릿수만 채울 패널은 무용했다. 그러기엔 에이전시에 들인 예산이 컸다. 이천칠백 만원, 부가세 별도에 준하는 100페이지의 결과보고서는 거저 만들어지지 않는다. 쓸 만한 말을 많이 하는, 가성비가 뛰어난 패널을 선별해야 했다. 지원자를 거르면, 젊은 여성만 남았다.
남자만 배제했니? 청소년, 중장년, 그 뭐더라, 아, 딩크도 뺐어. 맞벌이 부부가 이것 땜에 연차 내겠니? B, C그룹 스케줄을 괜히 저녁 늦게 잡았겠냐고!
시식을 포함한 좌담회이므로 끼니때여야 했다. 조금씩 맛보더라도 가짓수가 적잖고, 포만감은 방해가 될 테니까. 20대인 A그룹은 정오로 지정했지만 B, C그룹에게는 일과를 마치고 이동할 말미를 줘야 했다. 주말을 사수하고 싶다면. 의주도 한때 이러한 애로 사항에 둔했다. 이젠 팀장의 속을 꿰뚫는 경지에 이르렀다. 각설하고 정리하자면, A, B그룹은 냉동식품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HMR 시장의 방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연령대만 달리했다. B, C그룹은 1인 가구의 증가에 따른 추세와 일반 가정의 니즈를 비교하기 위해서 미혼과 기혼으로 분류하되, 플러스알파로 자녀를 얹었다. 팀장은 차별한 게 아니라 설계한 거다. 효율적으로.


*


A, B그룹은 직업을 제한하지 않았다. 무직, 대학생, 직장인, 프리랜서, 취업준비생 등 다양했다. 어차피 데이터로는 무의미한데 정성 조사니까 해석에 참고하고자 표시했다. 의주는 괄호 안의 무직과 취업준비생을 쏘아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취준생이 무직이랑 뭐가 달라? 어쭈, 백수가 수도권에서 자취?
결혼식 하기 두 달 전, 친정에서 출가해 신혼집에 입주한 의주에게 자취는 판타지였다. 대리로 승진했던 시기에 독립을 꿈꾸며 부동산을 드나들었는데, 억 소리 나는 전세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의주는 경제관념이 투철했다. 고작 일곱 평인 오피스텔에서 자취했던 남편이 월세와 생활 요금에 월급의 반을 쓴다고 까발리자마자, 동거하자고 프러포즈했을 정도였다. 차마 동거는 하지 못했고, 동거와 견줄 만한 나날을 지냈다.
학부생일 적부터 철두철미하게 취업을 준비했던 의주는 실습 겸 패널로 활약했었다. 그러한 바로 짐작하건대, 아마도 이번 좌담회의 패널은 8만 원을 받을 거였다. 시급 4만 원이면 괜찮은 수당이었다. 다만 선정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서 전업으로는 불가했다. 조사마다 대상, 날짜, 장소가 판이해서 짜 맞추기도 고역이었다. 딱 부업 각이었다.
가입은 간단했다. 리서치 기업 홈페이지에서 본인 인증하고 요청한다. 그러면 업체 측에서 신상을 검토하고 정보 수집에 대한 동의를 구한다. 즉시 일거리를 따내진 못한다. 온라인 설문조사에 응하면서 포인트를 쌓아야 한다. 일정액에 달하면 현금화할 수 있는데, 소액이니 기부해도 좋다. 그러다가 구미가 당기는 공고가 있으면 신청해 둔다. 기대는 하지 않는 게 낫다.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니까. 어쩌다가 당첨되면 출석한다. 의주는 미용기기 체험 인터뷰와 편의점 간식 좌담회에 참여했다. 그 밖에도 별의별 조사가 수두룩했다. 제일 인상적이었던 건 ‘걸이’였다. 조사원이 패널의 집에 방문한다고 했다. 옷, 수건, 칫솔, 거울, 액자와 같은 생필품을 거는 온갖 걸이를 관찰하려고. 의주는 호기심이 일었고 높은 사례비에 혹했지만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남이 와서 들쑤시는 게 무슨 공부야? 시집가서 해. 내 집에선 안 돼.
어느덧 의주에게도 ‘내 집’이 생겼다. 엄밀히 따지면 은행의 것이고 온전히 소유할 날이 막막하며 남편과 공동 명의지만, 조사원을 초대하기 전에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의주도 집에 조사원을 들이지는 않을 거였다. 학구적인 도전을 하기엔 여러모로 여유를 잃었고, 십만 단위에 별 감흥이 없었다. 일이십만 원을 벌겠다고 몰려다니는 아주머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줌마라니, 의주는 몸서리쳤다. 얼른 에어쿠션으로 광대를 두드렸다. 정기적으로 레이저를 쐬는데도 기미가 생겼다.
모해? 애 재우고 드뎌 누워써. 의주는 바쁭가봉가. 관리 받나부다. 부러버. 의주도 곧 쫑이야. 산후조리하면 피부고머고 내려놓게되. 나 머리빠져ㅜ 숱더줄기전에 샴푸바꿔. 살은안빠져. 의주는 카톡방과 FGD룸을 관망했다. 동창과 패널이 똑같았다. 의주가 그토록 거북해하는 아주머니였다. FGI가 있어서 외근 중^^ 의주는 일부러 전문 용어를 섞은 문자를 쓰고 관찰실 인증 샷을 첨부했다. 동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애깼다. 휴식 쫑. 잘가ㅋㅋ 우리 언제 뭉치지? 살좀빼고보자. 못만나겟네ㅎ 의주가 근황을 전하고자 셀카를 고르는 중에 한 동창이 영상을 보냈다. 갓난이가 6초간 죄암질했다. 머리맡에서 둥글게 만 기저귀가 나뒹굴었다. 의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내려놨다. 기필코 정년퇴직하겠어. 새삼스레 다짐했다.


*


둘째가 좋아해서요. C2는 끄떡하면 삼 형제를 들먹였다. 냉면, 떡볶이, 치즈스틱을 늘어놓으며 식성이 제각각이라고 하소연했다.
신랑이 좋아해서요. C4는 신랑과 술을 마시느라 닭발, 불막창, 꼬치구이를 즐긴다고 했다. 요즘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완성되는 안주가 잘 나온다고.
딸내미가 좋아해요. C5는 냉동 새우와 즉석 밥을 볶느니, 새우볶음밥을 벌크로 사뒀다가 데운다고 했다. 딸내미가 대기업 손맛에 엄지척한다고.
시어머니가 안 좋아해요. C7이 떡갈비를 빚었다고 하자 여럿이 탄식했다. C7은 간편식이 옛날 같지 않다고 달래도 소용없다면서 울상을 지었다.
제가 좋아해요.
C8이 말했다. 중국집의 크림새우와 칠리새우에 버금갔다고, 에어프라이어 사고 나서는 인덕션을 켜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주로 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하시나 보네요. 손들어 볼까요? 에어프라이어 쓰는 분?
의주는 허공에 6을 그렸다.
왜 저럴까?
이전부터 의주는 궁금했다. 주부는 뜬금없이 남편이나 아이를 대언했다. 남푠이 맛있데욧. 울애가 잘먹어용. 온라인에 전국의 남편과 자녀 스토리가 넘쳐났다. 의주의 회사도 자사몰이 있기에 반기별로 품평을 모니터링하는데,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맛없대서 안 사려고요. 아이가 순삭해서 또 사려고요. 후기를 남기면 100원이 적립됐다.
줌마는 왜 그럴까?
의주는 식품보다는 의류를 구입할 때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했다. 그곳의 회원은 본인을 중시했다. 체형에 따른 핏, 키와 몸무게에 의한 사이즈, 착장감이 어떻다는 후기를 남겼다. 또한 의주는 푸드몰에서도 같았다. 후기를 남기는 경우가 드물뿐더러, 내 입맛에 어떤지는 써도 남편이 어쨌다고 쓸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난 안 그럴 줄 알았어. 베프가 푸념했었다. 카톡 프로필에 애기 사진 올리는 거 이해 안 됐거든. 근데 앨범에 내 최근 사진이 없어. 졸업 직후, 베프는 AICPA자격을 취득한 후 미국에서 회계사가 될 계획이었다. 이민에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노렸는데, 연수에서 변수가 생기는 바람에 경력을 채우지 못하고 귀국했다. 덜컥 임신한 것이다. 돌이킬 수 있을 줄 알았어. 베프는 회한을 되풀이했고 의주는 위로에 지쳐갔다. 그러다가 베프가 둘째를 가졌다는 핑계로 의주의 결혼식에 불참한 후론 연락이 뜸해졌다.
난 안 그럴 거야.
의주는 자부했다. 베프에겐 티 내지 않으면서 줄곧 선을 그었다. 타인에 빙의한 품평을 남기는 소비자를 대하듯이. FGD룸에서 열띤 토론 중인 패널을 관찰하듯이. 의주는 뇌까렸다.
난 안 저럴 거야.
의주는 흠칫했다. C8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매직미러라서 불가능하단 걸 아는데도 의주의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관능하겠습니다.
사회자가 호출하자, 신입과 조리사가 서빙을 했다. A와 B, 두 가지 토마토파스타가 진열됐다.
블라인드 테스트입니다. 제품의 후면에 제시된 레시피대로 만들었고, 한 접시에 1인분 정량을 담았습니다. 4번 체크할 때 감안하세요. A, B, 어느 것을 먼저 먹느냐는 상관없으나, 그 중간에 물을 마시세요. 또는 비치해 둔 비스킷으로 입안을 가시세요.


*


A는 ㅍ사의 냉장 제품, B는 자사 제품이었다. 즉, 냉장식품과 냉동식품을 비교하는 관능평가였다. 이러한 실상을 패널에게 숨기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실온 제품인 라면은 경쟁 대상에서 제외했다. 라면은 면의 세계에서 다른 차원이었다. 냉장식품이 냉동식품의 라이벌이자 동반자였다. 시중에 출시된 냉장식품을 분석하면 냉동식품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냉장식품이 냉동식품보다 살짝 앞섰다고나 할까. 소비자는 HMR을 구매할 시, 냉장과 냉동을 인지하지 않는다. 냉장인지 냉동인지 모른다는 게 아니고, 냉장이든 냉동이든 관계없이 구매한다는 뜻이다. 맛있으면. 저렴하면. 유명하면.
‘맛있다’와 ‘맛없다’는 참으로 무성의하다. 음식은 어떤 맛이든 있기 마련이고, 없기는 어렵다. 그러한데 맛‘있다’와 맛‘없다’라니. 맛의 유무를 따질 법한 말이다. 이렇듯 혼란한 한 마디에 의해서 어느 제품은 흥하고 어느 제품은 망한다. 이 추상적인 형용사를 어떻게든 구체화하여 숫값을 내는 게 관능평가다. 맛, 향, 식감, 양, 만족도, 구매 의향 등을 환산한다. 설문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A파스타 2. 향
① 매우 좋지 않다. ② 좋지 않다. ③ 보통이다. ④ 좋다. ⑤ 매우 좋다.


5점 만점 내의 평점만 매기지 않고 글자를 부연한 건, 정성적인 정보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기 위해서다. 패널은 시식하면서 객관식 평가를 하고 주관을 밝힌다. C1은 이랬다.
A는 토마토의 새콤한 향이 입맛을 돋워서 매우 좋았어요. 다른 야채의 냄새도 진하던데요? B는 고기 누린내가 나서 좋지 않았어요. 토마토파스타니까 토마토의 향이 강해야죠.


B파스타 3-1. 면의 식감
① 매우 좋지 않다. ② 좋지 않다. ③ 보통이다. ④ 좋다. ⑤ 매우 좋다.


A는 소스를 버무리려고 면을 뒤적거렸더니 뚝뚝 끊기더라고요. 한눈에 봐도 건조하고 입에 넣기도 전에 부스러졌어요. B는 면이 탱탱하게 살아 있는데, 파스타치곤 통통해요. 소스에 있는 건더기가 커서 씹는 맛도 있고, 면의 식감도 좋았어요.


B파스타 5. 만족도
① 매우 좋지 않다. ② 좋지 않다. ③ 보통이다. ④ 좋다. ⑤ 매우 좋다.


패널이 관능 만족도를 평가한 후 사회자가 A와 B의 가격을 공개했다. 가격을 염두에 두고 구매 의향을 평가해야 이상적이니까. 소비자는 맛만 척도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가격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 가심비가 대세라지만 HMR과는 먼 얘기다. 가심비를 따질 거면 외식, 테이크아웃, 배달 주문하면 된다. HMR은 어쨌든 조리를 요했다. 식재료를 일일이 사긴 싫고 요리가 번거로우며 실력이 어쭙잖은 이가 편히 먹으려고 HMR을 택했다. 그러므로 사치와 검소의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되, 합리적인 가격에 치우치는, 속된 말로 쌀수록 대박이 터졌다.
그렇다고 무조건 싸고 적당히 맛있다고 해서 팔리지도 않았다. 소위 회사빨이 있어야 했다. 소비자가 신제품의 맛을 어찌 알고 사겠는가? 광고해서 인지도를 높여야 했다. 한데 어느 기업이든 TV 광고를 할 순 없다. ATL과 BTL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TTL 전략이 판을 친다지만 중소기업에게는 이론서 나부랭이였다. 중소기업은 거창한 사업계획서를 기반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큰 건은 걸러 내고 각종 커뮤니티에 포스터 몇 장을 뿌렸다. 겉치레지, 효과는 없었다. 자사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의 조회 수는 87이고, 의주가 네 번 클릭했다.


B파스타 6. 구매 의향
① 절대 구매하지 않겠다. ② 구매하지 않겠다. ③ 고민하겠다. ④ 구매하겠다. ⑤ 반드시 구매하겠다.


B는 너무 비싸네요. 그럴 거면 배달시키죠. 피자 주문할 때 종종 오븐스파게티 추가해요.
맞아요. 면이랑 소스 사서 해 먹고 말죠.
A보다 B가 더 맛있긴 한데, 갭이 심하네요. 이 돈 주고 살 만한 맛은 아닌데.
가격을 공개하자 자사 제품에 대한 혹평이 쏟아졌다. 요약건대 ‘절대 구매하지 않겠다.’였다. ③을 택했어도 ①이라고 봐야 했다. FGD룸에 앉아서 맛이라도 봤으니, ③을 택한 거다. 마트의 냉동 코너에서 B파스타의 가격을 보면 절대 장바구니에 담지 않는다. 아니, B파스타를 발견할 리도 없다. 대기업에 밀려 구석에 처박혀 있을 테니까. 심지어 B파스타보다 덜 맛있다는 A파스타가 더 팔릴 것이다. 판촉원이 미니 컵에 담긴 A파스타를 권하면 고객은 무심코 맛본 후 하나쯤 사기도 하니까. 이 행사를 하려고 식품회사가 마트에 지불하는 비용은 예상외로 세다. 중소기업은 함부로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다.
원가를 낮춰서 소위 저렴이로 승부하면 되지만 이도 중소기업에게 불리하다. 원가를 낮추려면 식재료의 질을 낮춰야 하는데, 이는 경쟁력을 상실하는 것과 같다. 더불어 대량 생산할수록 원가가 절감되는데, 중소기업은 대기업보다 소량 생산할 수밖에 없다. 잘 팔리면 많이 만들어서 싸게 팔 텐데, 잘 팔리지 않으니 적게 만들어서 비싸게 파는 거다. 비싸니까 적게 팔리고, 적게 팔리니까 브랜드의 값어치가 오르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짜로 손해를 강행하기도 한다. 순익은 포기하고 매출을 남기려고. 이런저런 제품을 생산한다는 카탈로그를 찍어 내려고. 이를 처음 겪었을 때 의주는 당황했다. 밑지는 장사를 누가 하냐고? 의주의 직장이 했다. 그러면서 현실을 부정했다. 대기업도 잘 나가는 제품으로 메우고 그러는 거라고 위안했다. 그러다가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중소기업 얘들은 이래서 안 돼. 멀리 보고 브랜딩을 해야지. 다름 아닌 의주가 ‘얘’였다. 의주는 ‘얘’로서 ‘들’과 ‘이래서’ 안 됐다. ‘이래서’에 순응했다. ‘들’과 ‘얘’로서.
스크린에 주목하세요. ㄱ은 파스타가 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커버를 뜯고 전자레인지 조리해서 드시면 돼요. ㄴ은 그릇이 없고, 면과 소스가 봉지에 개별 포장되어 있습니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면을 삶은 후 소스와 함께 조리하죠. 둘 중 어느 제품을 사시겠어요? ㄱ이신 분? 전원이네요. 그럼, 가격을 보겠습니다.
사회자가 리모컨을 누르자 스크린에 ㄱ과 ㄴ의 가격이 등장했다. 패널이 웅성댔다.
1인분 기준입니다. ㄱ을 구매하실 분?
C8만 손을 들었다.
자, 벌써 한 시간하고도 오 분이 지났네요. 십 분 쉴게요. 시간 엄수해 주세요.


*


의주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패널과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다. 패널은 의주를 모르는데도 그랬다. 에이전시는 강남역세권 빌딩에서 세 층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에이전시도 중소기업이고 연매출은 의주의 회사가 높지만 순이익은 불 보듯 뻔했다. 에이전시가 알짜배기였다. 나도 여기 왔다고, 독촉 대응시키진 않겠지? 의주는 일주일 전을 회상했다. 아악, 쪽팔려. 팀장이 중얼댔다. 에이전시에 거래명세서를 요구한 마당에, 경영지원팀에서 선입금하지 못한다고 발뺌했기 때문이다. 팀장은 격양된 목소리로 통화했다. 결국 대금의 반만 이체했다. 나머지는 후불로 협의했는데, 드문 케이스였다. 내가 이까짓 쇼부를 봐야 해? 팀장은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뒤치다꺼리해야겠냐고! 비상구에서 팀장의 호통이 메아리쳤다. 때마침 문을 열었던 의주는 살포시 손잡이를 놓고, 사무실과 같은 층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의주는 평상시 다른 층의 화장실을 다녔다. 회사 생활에서 화장실은 그야말로 해우소였다. 입으로 쏟아 내는 근심을 모면하기 위해서 더 걷는 수고쯤이야 운동으로 간주했다. 의주는 페인트칠 된 9F를 내려다보며 근심했다. 설마, 연체하겠어? 커뮤니케이션 거부하면 되지, 뭐. 호기를 부렸으나 의주는 알고 있었다. 팀장이 오더를 내리면 찍소리 못할 거였다. 계단에 발을 내딛는 의주의 기분이 텅텅 가라앉았다.
의주는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멈칫했다. C3는 검은 타이와 일체형인 푸른 원피스 차림인데, 의주는 진퉁으로 한 벌 가지고 있었다. C3가 입은 건 짝퉁이었다. 그게 이미테이션인지도 모르고 예쁘니까 샀지? 눈썰미는 있네, 의주는 속으로 비웃었다.
의주가 빈칸으로 들어간 직후 C3가 수군댔다.
자기도 봤지? 네일?
C3의 옆에서 핸드크림을 바르던 여자도 패널이었다. 의주는 인상착의로 누구인지 추측했으나 알 수 없었다.
어. 그 손으로 어떻게 돌 지난 애를 안아?
허스키하니 C5가 틀림없었다.
내 말이! 애 몸에 상처라도 나면 어쩌려고? 글구 웃겨, 혼자 첫 번째 찍은 거 웃기지 않아?
C3가 혀를 찼다.
아무리 비싸도 사 먹는다고 잘난 척하는 거야? 그렇게 잘났으면서 여긴 왜 왔데?
C3와 C5가 맞장구치며 화장실에서 나갔다.
의주는 변기 레버를 눌렀다. 화장실에서 뒷말한 건 못마땅하지만 C3의 주장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의주도 ㄱ을 선택한 C8이 뻐긴다고 치부했다.
시중에서 유통하는 식품의 용기가 다채롭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용기를 생산하는 설비가 다채롭지 않기 때문이다. 식품회사의 공장에서 용기도 생산하는 경우는 드물다. 용기를 생산하는 공장에 의뢰하고, 그걸 입고했다가 포장한다. 겉포장 디자인은 식품회사가 하는데, 그 와꾸는 대부분 유사하다. 새로운 형태와 재질의 용기를 제작하려면, 설비를 개발해야 하는데 막대한 투자를 요한다. 그래서 컵라면의 ‘컵’, 통조림의 ‘통’, 술병의 ‘병’이 고만고만한 거다. 여하튼 식품회사가 용기를 자체 생산하지 않으면, 원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오븐 조리가 되는 ‘패키지’, 불에 닿아도 타지 않는 ‘은박트레이’ 같은 건 비싸니까, 그런 용기와 함께 포장된 제품도 비싸다. 더군다나 이중 포장하면 부피가 커지므로 유통이 제한적이다. 살림집의 냉동실은 내리 가득해서 부피가 큰 HMR은 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창고형 마트에서는 팔아도 편의점에서는 팔 수 없는 제품이 있는데, 이는 수익 때문이다. 동일한 내용물도 4인분 담은 것과 1인분 담은 것의 수익이 다르다. 4인분짜리로는 수익을 내는데, 1인분으로는 수익을 낼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 와중에 전자레인지 조리용 파스타를 출시한다? 1인분 기준 세 배 이상 비싸다.
의주의 회사에서 생산하는 B파스타가 그랬다. 전자레인지 용기에 담아서 1인분 포장하면 편의점에 제안할 수 있으나 수익이 마이너스였다. 그런데도 PM은 개척하길 바랐다. BtoB에서 BtoC로 나아가려면 감수해야 한다고 어필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이사진은 BtoB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BtoC를 골칫덩이로 여겼다. 손실의 주범, 예산을 갉아먹는 떼거리. 사업자를 대상으로 영업해서 겨우 회사를 키웠는데, 소비자의 코 묻은 돈 당기느라 탕진하다니. 동시에 이사진은 예감했다. 동향을 보아하니 BtoC를 해내지 못하면 BtoB도 얼마 못 간다. 그래서 팀장의 조사 기획안을 결재했다. BtoC로 직진하는 길을 찾아라! 통행료는 내줄 테니 우리를 안내하라! 종국에는 이사진을 안내하기는커녕 B파스타를 편의점에서 판매하지 못할 것이다. 개당 0.5원을 남기려고 거래하는 컵밥도 있으니 말 다했다. 소비자는 편의점에 아이스크림 외의 식품을 전시하는 냉동실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 안에 B파스타가 들어간들, 유통기한 내에 빛을 보진 못할 게 빤했다. 왜냐하면 웬만한 컵라면보다 세 배 이상 비싸니까.
그런데 C8은 ㄱ을 선택했다. ㄴ이 월등히 저렴한데도, 전자레인지용이라는 편의성에 후한 점수를 줬다. C8이 싫어하는 게 조리일까? 설거지일까? 주방이 모델하우스처럼 휑하겠지? 의주는 핸드타월을 뽑으며 C8의 손을 상상했다. 하얗고 반드러운 손, 주뼛이 돋보이는 젤네일. 의주도 정기권을 끊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젤은 없고 매니큐어에 스티커를 붙여 줬는데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의주는 마음에 쏙 들었는데, 어머니는 얼마냐고 캐묻더니 팔뚝을 세게 때렸다. 미쳤다! 봉숭아물 들이고 말지! 의주는 손자국이 찍힌 팔을 문지르면서 야유했다. 언제 적 봉숭아? 엄마도 해, 손이 그게 뭐야, 쭈글쭈글! 의주는 제 손등과 손바닥을 훑었다. 조만간 네일 숍에 가겠다고 기약했다.


*


참기름 냄새가 복도를 점령했다. 의주는 이미 소고기야채죽 관능평가가 시작됐다는 걸 알아채고 서둘러 관찰실에 들어갔다. FGD룸에서 패널이 A, B, C를 갈마들고 있었다. A는 냉동, B는 냉장, C는 실온 제품이었다. C를 선정할 때 골치가 아팠다. ㄷ사, ㅂ사, ㅇ사가 물망에 올랐다. 팀장은 ㅂ사를 찍었다. 셋 중에서 용량이 컸다. 양으로 밀어붙이는 우리 회사 스케일에 맞춰야 하지 않겠어? 우리가 컵죽을 낼 리 없잖아? ㅂ사는 캔죽 아니어도 즉석조리되네? 이놈의 레토르트. 팀장은 조사를 화제 삼으면 입이 거칠어졌다. 죽 쒀서 개 줄 것 같아, R&D에서 실시간 공유하라고 지랄이야. 의주는 팀장의 새빨간 입술을 주시했다. 팀장은 충북에 있는 본사에서 임원 회의하는 날엔 메이크업을 진하게 했다. 그래야 얕보지 않으니까. 참석자 중 여자는 팀장뿐이었다.
그거 알아요? 소고기야채죽 라인 타는 거 보러 공장 다녀왔는데요. 깡그리 여사님이에요. 생산직은 여자만 뽑나 했는데, 반장급은 다 남자예요. 대리가 일러바치듯이 말했었다. 의주는 뭐 어쨌다는 건가 싶었다. 공장 밥 먹는데요. 주방 이모님이 계란프라이를 팀장님 식판에 올리더라고요. 남초에서 버티려면 공장 밥으론 안 된다고. 저한텐 계란은 부족해서 못 준다고, 팀장님 잘 모시라고 했어요. 대리는 심각했다. 전 여사님들이랑 팀장님 존경하거든요. 저희 엄마는 S전자 전략부에 계셨는데 이사를 목전에 두고 못 하셨어요. 팀장님은 꼭 하셨으면 좋겠어요. 대리가 구구절절을 마치자, 의주는 속어림했다. 엄마가 S전자? 금수저 납셨네.
스푼을 교체하면서 시식하세요. A, B, C가 섞이면 안 됩니다. 비스킷이나 물로 입안 가시는 것도 잊지 마세요.
사회자가 패널에게 권고했다. 딴생각하던 의주는 패널이 먹는 것과 같은 비스킷을 텄다. 소금기는 살짝 있지만 패널이 시식하는 제품에 비하면 염도가 현저히 낮아서 입안을 가시기에 제격이었다. 의주가 비스킷을 혀에 올리자 침샘이 바빠졌다. 의주는 저녁 식사를 걸러서 허기졌다. 참기름이 매직미러를 뚫고 흘러드는 것 같았다.
소고기야채죽에 참기름을 별첨하느냐, 한 데 섞느냐, 이러한 논점으로 회의에 소집되는 게 우스웠었다. 운영진은 식량난 대책 위원회라도 되는 듯이 위엄스러웠다. 의주는 이를 앙다물고 표정 관리했다. 특산 버섯 넣고 카피로 강조하죠? 한우로 차별화하죠? 깨랑 김 가루 동봉하죠? 이런 아이디어가 없어서 입을 꾹 다무는 게 아니었다. 색다른 시도를 하면 원가가 오르고, 원가가 오르면 성과는 내려갔다. 윗선은 회의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달랐다. 들어가선 기밀이었다가, 나와서는 휴짓조각으로 폄하는 경우가 숱했다. 의주는 이제 안다. 소고기야채죽에 참기름은 별첨할 수 없고, 이러한 논점은 우습지 않다. 소고기라고 할 것인가? 쇠고기라고 할 것인가? 야채 말고 채소로 표기해야 하지 않나? 회의에서 시시콜콜한 안건은 없다. 그리고 소비자에게 야채죽으로 통하면 야채죽인 거다. 채소죽과 같은 모험은 무모하다.
C가 갑이네요. 간이 딱 맞고 죽답게 부들부들 넘어가요. B는 싱거운데, 죽이란 게 그렇다 싶고, 야채가 종류별로 들었는지 색깔이 화려해서 건강한 느낌? A는 죽 같지 않아요. 뭐랄까, 식감은 누룽지탕 같고요. 닭죽이랑 비스무리하게 기름진데, 소기름 냄새도 아니고, 뭘까요?
C4가 의문하자, C5가 거들었다.
어머? 저만 그런 게 아니네요. 저도 A가 죽인가, 죽치곤 알갱이 크네 했어요. 야채가 큰 건 좋기도 해요. 양파는 익으면 으깨져서 안 보이는데, 눈에 보일 정도니까 신선한가 봐요. 밥알은 흐물흐물해야 죽이지 않나요? 이건 물 부으면 국밥 같겠어요. 짜요!
A는 자사 제품이고 아직 라인을 타지 않았다. 라인을 타지 않았다는 건, 공장에서 생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R&D, 즉 연구실에서 만든 샘플이다. 압력솥으로 한 밥, 채 썬 채소, 볶은 고기를 냄비에 넣고, 간은 짜게 맞춘 후 끓였다. 그걸 식혀서 밀폐 포장했고 냉동실에 넣어 뒀다가 퀵으로 에이전시에 보냈다. A는 누룽지의 형상이었다. 에이전시의 조리사는 연구원이 권장한 조리법대로 냄비에 A 한 봉지당 물 300ml를 넣고 7분 끓였다. 그러므로 C4와 C5의 평은 날카로웠다. A가 라인을 타게 되면 건더기가 큼직할 수 없다. 라인이 열기를 내뿜으며 사정없이 찔 테니까. 죽을 생산하는 라인은 찜통과 흡사하다. 그러면 죽 특유의 걸쭉함을 갖추니 식감은 개선되겠지만 맛은 달라지지 않는다. 맛은 간이고, 간은 나트륨을 비롯한 성분에 의해 좌우된다. 패널이 빅매치를 성사한 셈이다. 의주는 팀장과 연구소장의 기 싸움을 그리며 비스킷을 한 봉지 더 텄다. 참으로 고소했다.
전 C가 어디 건지 알 것 같아요.
C6는 의기양양했다. 마술을 관람하다가 속임수를 알아챈 관객 같았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단 일치 여부를 알려 드리진 않습니다.
사회자가 조정했다.
ㅂ사예요! 이거 쟁여두고 먹거든요. 전복죽이랑 단호박죽이 최고예요.
의주는 감탄했다. 과연 주부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C가 대기업의 히트 상품이고, C6가 충성고객이라고는 하나, 시식하는 환경이 다른데 품명을 알아맞히기란 쉽지 않다. 식품회사의 직원도 자사품인 걸 모르고 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얼마 전, 의주는 웹디자이너와 분식집에 갔다. 의주는 참치김밥과 김치만두, 웹디자이너는 오니기리와 가쓰오우동을 먹었다. 애사심이 상당한데요? 의주가 벙글대자, 웹디자이너가 받아쳤다. 뭐래요? 의주는 우동을 오물거리는 웹디자이너에게 말했다. 여기 우동, 우리 면 쓰잖아요. 난 또 애사심 폭발한 줄. 웹디자이너는 경악했다. 진짜요? 나 여기 오면 만날 우동 시키는데! 의주는 김밥에서 단무지를 빼내며 덧붙였다. 놀라운 건 뭔지 알아요? 이 우동 디자인, 누가 했게요? 사레들린 웹디자이너가 마른기침했다.
죽 관능, 마지막입니다. ㄱ과 ㄴ이 있습니다. ㄱ은 전자레인지 조리 가능하고, 데우지 않고 먹어도 됩니다. 가격은 이렇고요. ㄴ은 냄비에 물과 함께 넣고 끓입니다. 가격은 이렇습니다. 어느 것을 구매하시겠어요? ㄱ을 구매하실 분?
사회자가 질문하자, C8이 되물었다.
중복해도 되나요?
….
죽은 아플 때도 먹으니까, 그럴 땐 요리할 의향이 있거든요.
찰나, 적막했다.
그럴까요, 그럼? 두 번 손드셔도 됩니다. ㄱ, 구매하실 분?


*


지난 추석, 의주는 자사 제품을 들고 시댁에 갔다. 직장에서 전 직원에게 발송한 선물 세트였다. 완자, 동태전, 고기만두, 불고기잡채, 양념돼지갈비 등 명절과 관련한 냉동식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졸라 크네. 트렁크에 들어가려나.
아이스박스를 든 남편이 낑낑거리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보기에만 그래. 550, 372, 335야.
의주가 아이스박스의 가로, 세로, 높이를 읊었다. 그 아이스박스에 맞춘 보냉백을 제작하느라 업자와 티격태격한 결실이었다. 의주는 보냉백에 찬사를 보냈다. 저 천 쪼가리가 뭐라고, 그 안에 든 식품만큼 값나갔다. 적어도 잡채의 원가에 비하면, 배보다 배꼽이 컸다. 게다가 의주와 소통했던 업자가 어찌나 도도한지, 1mm라도 어긋나선 안 된다며 시안을 수차례 반려했다. 웹디자이너가 대신 피날레를 장식했으나, 의주는 보냉백이라면 치를 떨게 됐다. 그래도 시댁에서 전 부치기가 더 싫었다.
명색이 식품회사 다니는 며느린데 뭔가 보여 줘야지 않겠어?
설에 봤잖아, 우리 집은 거창하게 명절 안 쇄. 한 끼만 먹고 후딱 장인어른 뵈러 가자.
남편은 의주의 아버지를 유독 따랐다. 단순히 어르신을 공경한다거나 바른 사위라기에는 장인을 편애했다. 의주는 시어머니와 암만 통화해도 겸연쩍고, 부모님께 드물게 전화하는데, 남편은 장인께 꼬박꼬박 안부를 물었다. 돌연 둘이서 근교로 드라이브를 다녀온 적도 있었다. 의주는 황당했다. 나쁜 짓이 아닌데도 남편이 이상스러웠다. 정작 남편은 의주를 핀잔했다. 장인어른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형님은 멀리 있으니까 네가 모시고 콧바람 쐬고 그래라, 좀. 의주는 이혼 가족으로 자란 설움을 푸느라 그러는 것이라고 헤아렸다. 시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시어머니는 일찍이 돌싱이 됐다. 남편은 트라우마가 있는데, 시어머니는 그다지 유별나지 않았다. 시어머니도 아무렇지 않기야 하겠냐마는 의주를 붙들고 쏟아 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의주는 혈혈단신 2남 1녀를 키운 시어머니가 애처로웠다. 그래도 시댁에서 전 부치기는 싫었다.
의주는 비장하게 시댁에 입성했다. 현관에서부터 의주는 불길했다. 시누이가 맞이했기 때문이다. 두 살배기를 그러안은 시누이는 대뜸 친정에 온 사연을 풀어냈다.
그이는 추석이 대목이잖아. 못 쉬니까 아예 시댁엔 가지 말자더라고. 끝나고 같이 가자고. 집에 있기 적적해서 왔어.
의주는 시어머니, 아주버님, 시누이, 조카, 남편에게 에워싸인 기분이었다. 거실과 부엌에 흩어져 있는데도 그랬다. 결혼 후 첫 명절이었던 설은 어떻게 치렀는지 아득했다. 그땐 넷이었기에 단출했는데, 시누이가 조카를 데리고 나타났다는 변수만으로도 대미지가 굉장했다.
산적이 이렇게 나와?
시누이가 선물 세트를 헤집었다. 햄, 어묵, 쪽파, 느타리를 꼬치에 꽂고 계란을 입힌 산적은 명절 시즌에만 제조했다. 꼬치를 꽂는 설비는 도입되지 않아서 사람이 직접 꿰었다. 고로 고인건비 품목이므로 일 년에 두 달만 라인을 탔다. 진소위 핸드메이드, 정성으로 견주어도 살림집에 뒤처지지 않았다.
소고기를 뺐네. 산적에 소고기가 빠지면 무슨 맛이야? 쟤가 소고기산적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났잖아!
시누이가 남편을 가리켰다. 의주는 모르는 먹성이었다.
내 안 그래도 마련해 놨다. 일전에 못 먹여서 보낸 게 한스러워서.
시어머니가 지그시 냉기를 뿜었다. 의주는 전기 그릴을 쳐다봤다. 속칭, 잔치팬. 홈쇼핑에서 완판 신화를 이뤘던 직사각형의 멀티 쿠커였다. 연기가 나지 않고 기름이 튀지 않으므로 실내에서 사용하기 안성맞춤이라고, 쇼 호스트가 법석법석했었다. 의주는 저런 걸 어따 두냐고 코웃음 쳤었다. 세련된 인테리어를 망치는 요인! 팬트리에서 먼지투성이 될 짐! 자사에서 경품으로 뿌렸던 애물단지가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뒤집개를 내밀었다.
부쳐라!
시어머니가 주문을 외운 건 아닐까, 의주는 홀린 듯이 전을 부쳤다. 도저히 안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천연덕스럽게 도란도란하며 꼬치를 끼웠다. 시어머니는 굴, 고추, 애호박에 밀가루를 입힌 후 의주의 곁에 뒀다. 의주는 계란을 입혀서 팬에 올렸다. 시누이는 징징거리는 두 살배기를 어르느라 안방에 들락거렸고, 아주버님은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댔다.
아! 올케가 가져온 것도 부칠 걸 그랬네, 동태전은 먹을 만하지 않을까?
시누이가 간을 본답시고 깻잎전을 먹다가 손뼉을 쳤다. 그 기척에 의주는 질겁했다.
엄마야!
일제히 의주를 빤히 봤다. 비로소 의주는 주문에서 풀려났다.
제가 가져온 거, 냉동실에 넣었어요. 좀 녹았을 거라서, 빠른 시일 내에 드시는 게 좋아요.
의주는 귀동냥으로 배운 멘트를 했다. 회사에서 CS관리사와 밀접한 보람이 있었다.


*


밤늦게 시댁에서 빠져나온 의주는 친정은 내일로 미루자고 볼멘소리했다. 한껏 차려입은 옷이 식용유에 절었고, 번들번들한 얼굴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처가에서 하룻밤 묵자며 칭얼댔다. 의주는 이 꼴을 보고도 그 말이 나오느냐고 맞받아치려다가 참았다. 남편의 꼴도 피차일반이었다. 남편이 운전대를 잡았는데, 왼손의 엄지가 붉었다. 꼬치에 콕콕 찔린 모양이었다. 의주는 자신의 손목에 두른 밴드를 어루만졌다. 쇼 호스트의 자랑과는 달리, 팬에서 기름이 폭죽처럼 튀었다. 펑펑! 잔치가 따로 없었다. 회사가 박람회에 참가했을 때 부스에서 호떡을 지졌어도 데이지 않았는데, 시댁에서 기습을 당하다니! 의주는 서러웠다.
어때? 이래도 자기 집은 거창하게 명절 안 쇄?
의주가 기어이 한마디 했다. 남편은 침묵했다. 그러자 의주는 복받쳤다.
난생 전 부친 적 없는 거 알면서, 뒤집개질 근처도 안 오더라?
미안. 형이 아파서 엄마가 예민하더라고. 걱정돼서.
아주버님은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고시생이라는 딱지가 아물지 않았는데 십년지기 애인에게 차였으니 상처가 덧나고도 남았다. 의주는 예비 동서로서 만났던 그녀를 떠올렸다. 아주버님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크고 팔다리가 가느다라며 과감한 쇼트커트가 어울리는 동년배였다. 결혼 전 만남인지라, 의주는 멋쩍으면서도 그녀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우연히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의주가 그녀의 훤히 드러난 귓불을 눈여겨봤다. 귀걸이가 앙증맞았다. 낮은음자리표예요. 그녀가 운을 뗐다. 쉼표인 줄 알더라고요. 높은음자리표는 곧잘 알아보는데, 낮은음자리표는 몰라줘서. 그녀는 스웨터에 가렸던 목걸이를 꺼내어 보였다. 높은음자리표 펜던트가 매달려 있었다. 지방의 악단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던 그녀는 이별을 치유했을까, 의주는 차창에 입김을 불고 검지로 낮은음자리표를 그렸다. 덧그릴수록 쉼표였다.
화 풀어. 우웅?
남편이 애교를 떨었다.
담엔 내 편 들어. 안 그럼 두고 봐.
의주는 덮기로 했다. 남편은 훗날에도 어쩔 수 없을 거였다. 지인이 하나둘씩 유부가 되고 의주가 다소 조급해졌을 무렵, 누군가가 주정을 부렸었다. 연애는 쉼표가 되는데, 결혼은 쉼표가 안 돼. 결혼에서 쉼표는 마침표야. 쉼표 몇 번 찍다가 도장 찍는 거라고! 한창 열애 중이던 의주에게는 감성적인 추태로 들렸다. 그가 누구였는지, 그곳이 어디였는지는 망각했는데, 맞보고 있던 남편의 눈빛은 생생했다. 흔들리지 않는, 까만 눈동자. 저 온점이 쉼표일 리 없지, 의주는 트로트 가사 같은 행복에 빠졌다. 행복을 마다할 까닭이 없기에, 기꺼이 젖었다. 그런데 식용유에 젖으러 가는 수순이었다니. 의주는 미끈대는 목을 쓰다듬었다. 쇄골에 예물 시계가 닿았다. 화들짝 놀라서 시계를 풀었는데 틈틈이 연노란 기름방울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씨, 짜증나.
의주가 두리번거리면서 물티슈를 찾았다.
입이 험하다?
자긴 항상 십팔십팔하면서 난 씨도 안 돼?
의주와 남편은 정색했다.


*


조사는 잘 되고 있어?
팀장이 물었다.
네. 막바지 관능 메뉴 나르고 있어요.
의주는 방음 스위치를 곁눈질하며 소곤거렸다. OFF였을 OF를 보고도 안심이 안 됐다.
그건 그렇고 강 과장, 굼뜨다?
네?
내가 전화하기 전에, 강 과장이 중간 보고했어야지?
….
의주는 어처구니없었다.
회사에서는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는 거라고? 개소리였다. 그럴 거면 직책과 부서를 뭣 하러 나누나? 네 일 하라고 전공, 자격증, 내력, 평판 조회해서 적합한 인재를 뽑는 거다. 네 일 하지 않았으니 무책임하다며 임금 동결하고, 네 일 하지 못했으니 무능력하다고 승급 까이는데, 타인의 업무를 할 오지랖이 어디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주는 현재 팀장을 대행하고 있었다.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훈계라니. 의주는 OF를 노려봤다. 닳아 없어진 F처럼 팀장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의주는 멘탈을 다잡았다.
시정하겠습니다.
그치? 금방 파하겠네. 최종 보고는 문자로 남겨.
넵.
의주는 스피커에서 귀를 떼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종알대더니 띠리링, 뾰로롱, 효과음이 연이어졌다. 팀장은 뒤늦게 통화 종료를 눌렀다. 드디어 의주는 쌍욕을 했다.
씨팔. 지는 기어들어 가서 애 처보면서.
의주는 FGD룸을 향해 분풀이했다.
니들도 참, 집에서 애나 보지, 몇 푼 벌겠다고 여길 오고.
패널은 우아하게 치즈케이크 A, B, C를 포크질했다. 중간중간 음료로 입을 가셨다. 디저트라는 특성상 디카페인 커피, 스파클링워터가 제공되었다. 마치 코스 요리를 만끽하는 분위기였다.
저는 꾸덕꾸덕한 치즈케이크를 좋아하는데, B가 그랬어요. 덜 달고, 치즈는 진하더라고요. C는 달긴 한데, 촉촉하고 사르르 녹는 맛이 무난해요. A는 꾸덕꾸덕하지 않고 푸석푸석하네요. 아이스크림처럼 차갑고. 암튼 B가 제 스타일이었어요. 카페에서 사 먹는 거에 뒤지지 않네요. 어디 건지 알고 싶어요. 티타임에 내놓게.
C3가 B를 칭송했다.
곧바로 C8이 발언했다.
으음, 치즈케이크는 치즈의 원산지와 함량에 따라서 풍미가 달라지는 거, 아니겠어요? S호텔 부티크에서 치즈케이크를 즐겨 먹는데, A, B, C는 가짜 치즈네요. 버터밀크요. 이건 프레시 치즈가 아니니까, 치즈케이크라고 할 수 없죠.
C8의 말투는 적이 연극적이었다.
C3가 눈코를 찡긋거렸다.
사회자가 수습에 나섰다.
주제가 HMR이라는 점을 다시 말씀드려요. 베이커리 케이크가 아니고 냉동식품, 흠, HMR이기 때문에 평소 드시는 거랑 다를 수 있는데요. 여태껏 슈퍼, 편의점, 대형마트, 온라인몰 제품과 비교했잖아요? 그런 제품을 중심으로 평가해 주세요. 아시겠죠?
태연한 척하던 사회자가 실수하더니, 장황하게 해설했다. 모조리 냉동식품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K과자점 치즈케이크도 프로마주 프레이가 꽤나 고급인데, 온라인 주문되거든요. 그거랑 비교해도 되지 않나요?
C8은 차분하게 묻더니, 얼음이 담긴 플라스틱 컵에 스파클링워터를 부었다. 쏴아아, 기포가 퍼졌다.
그렇군요. HMR을 정의하기가 애매하죠? 베이커리에서 파는 건 배제해 주세요. 다른 분의 평가를 들어 볼까요?
사회자가 손끝으로 정중히 C1를 짚었다.
저도 B가 입에 맞았어요. 알던 맛이에요. 구덕구덕한 게 치즈케이크다 싶네요. A랑 C도 나쁘지 않았는데요. C는 해동을 오래 했고, A는 해동을 덜한 것 같았어요. 본래 식감이 그럴 수도 있고요.
의주는 패널의 테이블을 살폈다. A와 C는 거의 그대로인 반면에, B는 C8의 접시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B는 수입산, C는 국내의 ㅅ사, A는 자사 제품이었다. 패널의 평가는 여지없이 맞아떨어졌다. 우리가 익히 먹은 건, 미국산이 파다했다. 수입처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지는 꽤 되었고, 근래에는 국내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늘었으며, 치즈케이크 마니아를 타깃으로 하는 베이커리와 카페도 수많다. 그러나 제아무리 신상품을 출시해도 치즈케이크의 원조 격인 B를 따라잡긴 힘들다. 맛은 추억의 영역이기도 하기에, 소비자는 ‘아는 맛’을 원하곤 한다. 비록 가짜 치즈여도, 치즈케이크가 아닌 치즈케이크일지라도.


*


신년 회식의 이슈는 ‘분홍소시지’였다.
분홍소시지가 소시지가 아니라고요?
대리가 부르짖었다.
이야! 이럴 거예요? 아마추어같이.
PM이 혀를 내둘렀다.
바나나우유가 우유인 줄 아는 건 아니죠?
CS관리사가 가세했다.
바나나로 안 만드는 거 알아요. SNS에 떠돌거든요. 딸기우유에 딸기 안 들어간다고.
아뇨, 향 말고. 애초에 우유가 아니라고요.
네에? 우유가 아녜요?
여 봐, 아마추어! 어디 가서 식품회사 다닌다고 하지 마요.
PM과 CS관리사는 대리를 놀리느라 혈안이 됐다.
딸기우유에 딸기 안 넣고 뭘 넣는데요?
웹디자이너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와아아!
급실망!
봐요! 봐요! 저만 모르는 거 아니죠!
의주는 막걸리로 입을 축이며 동료들과 와글댔다. 그러다가 게맛살에 게살이 없다고 하려는데, CS관리사가 선수를 쳤다. 곧이어 PM이 어육과 연육을 강의했다. 대리와 웹디자이너는 열혈 수강생이 되어 탄성을 연발했다.
기본 안주가 촉발한 PM의 강연은 제2부 전란액과 전란분으로 옮아갔다. 그즈음이 되자, 너도나도 하품하면서 도망쳤다. 의주는 PM이 뭐라던 흘려들으며 전란액을 입혀서 부친 어육을 씹어 삼켰다. 달큼한 밤 막걸리와 찰떡궁합이었다.
가쫘 꼬기, 가쫘잉.
혀꼬부랑이가 된 PM이 분홍소시지전을 찢으며 구시렁댔다.
덩달아 취기가 오른 의주는 고기로 대접받지 못하는 생선살을 두둔했다.
가짜라뇨오. 버젓이 원재료가 찍히는데에.
분홍소시지는 알고 보면, 소금 덩어리였다.
이건 보온도시락에 들어 있어야 제 맛인데에. 따듯하고오.
의주는 짭조름한 추억에 잠겼다. 드문드문 필름이 끊겼다. 취중에 쨍그랑쨍그랑하는 소동을 들었다.
다음날, 의주는 생수를 달고 살았다. 하도 물을 마셔서 하마라는 별칭도 얻었다.
동료들은 하 과장이라고 부르면서도 회식에서 나눈 사담은 들추지 않았다. 위법행위가 아닌 이상, 회식에서의 사건으로는 일절 헐뜯지 않았다. 회식의 사건은 묻고, 묻지 않기. 불문율이었다. 의주는 소동의 전말을 알 수 있진 않을까 고대했는데, 다들 별일 없었다는 듯이 업무에 임했다.
무사히 퇴근한 의주는 막걸리집의 기운이 스며든 옷을 스타일러에 넣었다.
우욱, 쉰내! 그나저나 골목에서 인턴이 울었는데….
의주는 드레스 룸에 널브러져 있는 빨랫감을 주웠다. 간밤에 내팽개친 브래지어에서도 매캐한 냄새가 스쳤다.
부장이 담배 피우면서 인턴한테 삿대질했는데….
조각난 기억은 진짜 같지 않았다. 의주는 가짜 같은 시간을 짜 맞추다가 숙취를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잠들었다.


*


여러분, 장장 두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저희 직원이 소소한 증정품을 드릴 겁니다. 늦은 시각인데 조심히 가시고, 앞으로도 좌담회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당부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가 끝인사를 하자 패널이 박수를 쳤다. 신입이 정문을 열었고, 조리사가 후문을 열더니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패널이 줄지어 바깥으로 나갔다.
의주는 한산해지기를 기다렸다가 FGD룸으로 갔다. 조리사가 테이블을 닦고, 사회자는 남은 치즈케이크를 맛봤다. 의주도 양해를 구하고 포크를 들었다. 패널을 응대하고 돌아온 신입이 시원한 생수를 가져왔다.
조사가 잘됐나요?
팀장님께서 원체 꼼꼼하시잖아요. B그룹 조사한 후에도 설문 손보셨거든요. C그룹 관찰은 못 하신다면서 철저하셨어요. 그 덕을 봤네요. 관찰하시니까 어떠셨어요? 반영할 사항이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 주세요.
사회자가 응답했다.
갑자기 투입되어서 딱히. 온라인 조사는 어디까지 진행됐죠?
그제 기 팀장님, 황 대리님께 2차본 링크 드렸습니다. 내주 스타트에 문제없습니다.
신입이 스케줄러를 넘기면서 답보했다.
온라인 조사와 매끄럽게 연계할 수 있겠죠? 오프라인이 미흡한가 해서요. C그룹만 봐서는 데이터가 충분한데, A, B그룹도 이랬나요?
지난주엔 관찰을 안 하셨죠? 추후 보고서 보면 아시겠지만, 금번만큼 패널 퀄리티가 높았어요. 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회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흰자에 핏발이 섰고 입술은 허옇게 부르텄다. 신입의 행색도 아까와 달랐다. 마스카라가 번져서 눈 밑 애굣살이 검었다. 의주는 에이전시의 CI가 새겨진 벽시계를 올려다봤다. PM 09:57 사회자와 신입이 오죽 퇴근하고 싶을지 십분 공감하고도 남았다. 의주는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다가 끝맺었다. 의주가 한사코 말리는데도 사회자가 배웅했다.
본의 아니게 야간 의뢰했네요.
저희 일이 그래요. 잦은 편이에요.
의주는 유리 외벽을 내다봤다. 빌딩 숲의 불빛이 호화로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 의주는 거울을 봤다. 떡진 앞머리와 인중에 붙은 비스킷 가루를 툭툭 쓸었다. 입술 색이 옅었지만 립스틱을 덧바를 힘이 없었다. 지도 어플을 터치하기 성가셔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버스 승객의 틈에 서서 치이면 쓰러질 것 같았다. 좌석에 앉더라도 기절할 거였다. 택시를 잡으려면 길을 건너야 하는데, 그마저도 하기 싫었다. 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싶었다.


*


저기요.
C8이 가로막았다.
허억!
의주는 주먹을 불끈 쥐고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 죄송해요! 놀라셨죠? 죄송해요!
C8이 사과했다.
무슨 일이죠?
호흡을 가다듬은 의주가 날이 선 채로 따졌다.
죄송해요, 너무너무. 실례지만, 자사 식품 직원이시죠?
그건 왜요? 어떻게 아셨어요?
목걸이에….
C8이 손가락질했다.
의주는 이제껏 사원증을 차고 다녔다는 걸 깨달았다.
맞긴 한데, 무슨 일이시냐고요.
언니를, 언니가…. 기혜민 씨는 안 오셨나요?
기혜민은 팀장이었다. 의주는 허구한 날 팀장의 이름을 보고 듣고 말했는데도, C8의 입을 통하니 생경했다.
팀장님은 안 오셨는데요. 누구신지.
동생이에요.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기혜지입니다. 기혜민 씨 동생. 언니를 볼 수 있을까 해서. 온 김에 만나면 좋겠어서….
C8은 횡설수설했다.
아아, 어쩌죠? 팀장님은 안 오셨어요.
의주는 번뜩 의심했다. 팀장은 급한 사정이 생긴 게 아닐 수도 있었다. C8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은 게 수상했다.
기왕 무례한 김에 부탁할 게 있는데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딜 들어가서 뭘 마실래요? 시간 많이 빼앗지 않을게요. 언니한테 줄 게 있어서요. 바쁘신 건 아는데….
C8이 깍지를 낀 손을 꼼지락댔다. 팔꿈치 아래에서 로랑백이 대롱거렸다.
의주는 C8의 신발을 봤다. 구찌 스트랩 힐, 계절감이 없는 초이스이므로 차를 몰고 왔을 거였다.
이 옆에 스벅 있어요. 잠깐만 앉을까요?
의주는 군말 없이 C8을 뒤따랐다. 트위드재킷과 미디스커트는 미국 대통령의 딸이 입어서 잘나가는 MM, 헤어밴드는 싱어송라이터 U만 협찬하는 CL, 휴대폰케이스이자 카드지갑인 크로스백은 PA. 의주는 눈이 즐거웠다. C8은 걸어 다니는 명품관이었다.
고마워요. 제가 원래는 이렇지 않거든요. 아차, 뭐 드실래요? 아뇨, 아뇨. 제가 사야죠.
의주는 창가에 있는 폭신한 소파를 골라서 앉았다. 노곤하고 얼떨떨했다.
결제를 마친 C8이 한라봉주스와 골드키위주스를 들고 왔다.
아무거나 드세요. 전 시식하느라 배가 불러서.


*


별건 아닌데, 전해 주시겠어요?
C8이 아이패드만 한 상자를 쓰윽 들이밀었다. 오로지 이 상자를 담기 위해서 로랑백을 들고 온 것 같았다. 크기가 쏘옥 들어맞았다.
직접 주시지, 시급한 건가요?
급하진 않아요. 그냥 가지고 왔으니까.
의주는 가까이서 보니, C8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패널 명단에 만 39세라고 적혀 있었으니까, 동갑이거나 한 살 많을 거였다. FGD룸에 있을 땐 마냥 주부로 보였는데, 카페에서 마주하니 되레 동안이었다. 볼과 이마가 빵빵하고 팔자주름이 부자연스러운 게 필러를 주입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쌍꺼풀 수술한 지는 아주 오래됐을 테고, 눈썹과 아이라인 문신은 재시술한 티가 났다. 이러한 점을 참작해도 C8과 팀장이 닮지 않았다고, 의주는 결론지었다.
전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난처할까 봐요. 제가 직속 부하거든요. 팀장님께서 뭐라고 하실지. 혜지 님이 미리 말하지 않으면, 제가 혼날 수도 있고.
그런 생각까진 못했어요. 죄송해요.
C8이 사과를 거듭하자, 의주는 급격히 피곤했다.
괜찮아요. 이것도 팀장님께 전달할게요. 다만, 말해 두셔야 해요. 곤란하지 않게.
그래 주시겠어요!
저, 제가 오전 여덟 시 출근해서 여태 쉬지를 않아서요. 용건이 이뿐이면 일어날까요?
댁이 어디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택시 타면 돼요.
여기 앉아 계세요. 지하에 주차해 뒀어요.
괜차….
C8이 황급히 걸어갔다. 체력이 고갈된 의주는 C8을 말리지 않기로 했다. 주스 두 병에 맺힌 이슬을 냅킨으로 닦고 가방에 넣었다. C8이 맡긴 상자도 담았다가 꺼냈다. 물기가 닿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의주는 망연히 창밖을 봤다. 제네시스가 멈추더니, C8이 손짓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블레이징 레드, 실물이 월등했다. 의주는 느릿느릿하게 다가갔고, 조수석에 탔다. 내부가 널찍했다.
주소 알려 주시면 찍고 갈게요. 길눈이 어두워서.
가는 길에 내려주세요. 먼 걸음 하지 말고.
부담 갖지 마세요. 저 한가해요. 밤에 잠도 안 오고.
C8이 의주네 주소를 찍자, 내비게이션이 소요 시간 59분임을 알렸다. 의주를 데려다주면, C8은 열두 시가 넘어서 귀가할 거였다.
염치없이 신세를 지네요.
뭘요. 제가 죄송했죠. 바쁘신 분한테. 눈 붙이셔도 돼요. 도착하면 깨워 드릴게요.


*


사무실이 서늘했다. 과장급 이하만 궁둥이를 붙이고 있었다. 간신히 지각을 면한 의주는 부랴부랴 메신저에 접속했다. 깨알 같은 소식이 톡톡 쏟아졌다. 품질관리팀 난리남. 요번엔 머? 잠만! 퀴즈퀴즈! 맞추면 젤리 쏜당! 머리카락! 우우, 약해, 비상이라규. 쎈걸로ㄱㄱ 나사? 땡! 못? 땡! 나사랑못이랑다름? 몰랔ㅋ 장갑? 오바? 통째ㄴㄴ 실오라기ㅎ 우린고무ㅎ 내포장실에선 면장갑. 알겟음둥! 창의력을 발휘하랏! 당근꽁다리! 오홋! 귀엽고 참신행! 쥐꼬리! 우우, 모방? 내 월급! 철 수세미? 근접햇옹! 의주와 동료들은 각양각색 이모티콘을 사이사이에 남발하면서 채팅했다.
입사 직전, 의주는 상상했다. 은빛으로 번쩍번쩍하는 최첨단 설비에서 차곡차곡 탄생하는 제품의 향연! 하지만 OJT 중에 공장을 견학하고 환상이 와장창 깨졌다. 공장에서 식품을 생산하는 과정은 의외로 수작업이었다. 곳곳에 자동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으나 국소에 한하며, 이 또한 손길을 요했다. 전처리가 대표적인 예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메뉴에 따라서 채소의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 4cm, 7.5cm, 동그라미, 반달 등 필요에 따라서 채소를 다듬는데, 이를 전처리실에서 생산했다. 집에서 요리하듯이, 사람이 칼질과 가위질을 했다. 채소를 기계에 넣으면 원하는 대로 뿅! 나오는 게 아니었다. 채소를 세척, 탈피, 절단하는 기계가 있으나, 모든 채소에 아물리어 작동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계를 전부 도입할 수도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전처리를 한 채소를 매입한다. 이처럼 손이 닿은 채소는 그만큼 값이 오른다. 그 손이 인건비니까! 그래서 채소마다 매입하는 방식이 다르다. 세척한 오이, 탈피한 마늘, 절단한 양배추 등 손익을 따져서 투입한다. 전처리를 거친 재료이더라도 검열한다. 전처리를 하는 업체에 컴플레인을 하여 불량률을 낮추기 위해서, 제품의 질을 높이고 위생과 관련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그래도 완전할 수는 없다. 이렇듯 사람의 손을 거치므로.
모기업의 제품에서 이물질이 검출됐다는 뉴스가 터지면, 의주는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므로.
단, 검출된 이물질이 무엇인가는 중했다. 머리카락, 비닐 조각, 양파껍질 따위는 어느 틈에 들어갈 수 있다. 볶음류에서는 달팽이껍데기가 나오기도 했다. 대파의 잎에 숨어 있다가 으스러진 것으로 추정됐다. 대자연을 연상하면, 용서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대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가차 없이 처단해야 하는 이물질이 있다. 꽁초, 칼날, 동전 같은 건, 누군가가 몰래 넣은 거다. 생산자는 주머니 없는 윗옷과 바지를 입고 방수가 되는 앞치마를 매며 장화를 신는다. 긴 머리카락은 꽉 묶고 그물망과 위생모를 착용한다. 장갑과 마스크는 필수이고, 재탕하지 않는다. 이렇게 중무장하는데, 생산실의 입구부터 출구까지의 절차가 있는데, 기상천외한 이물질이 출현할 수는 없다. 백이면 백, 고의로 엿 먹인 거다.
젤리 내가 사줄겡, 먼댕먼댕. 똑딱삔. 엥? 머리핀? 어케들어가찡ㅠ 백퍼조작. 알바신상털어야함. 생산일자능? 여사님이 꽂앗던고 빠졋을수도. 검출기 안울림? 프리패쑤!
포장 작업은 내포장, 외포장으로 나뉘었다. 급속냉동라인을 거친 식품은 내포장된다. 이 단계에서 금속검출기를 통과시킨다. 쉽게 말하자면, 엑스레이다. 금속성 이물질을 검출하면 신호음이 울리고, 무사하면 외포장으로 넘어간다. 외포장이란, 박스 작업이다. 박스 채로 냉동 창고에 옮겼다가 시중에 유통한다. 이렇게 체계적인데, 신기하게도 이물질이 든 제품이 유통된다. 기계도 불완전할 수 있다. 사람이 창조했으므로.
다쳤음? 이빨깨짐? 똑딱인 튀어서 걸러낼듯ㅋ 엉ㅎ청경채를 둘럿다고함. 청경채?짬뽕이구만? 웃기는짬뽕이넼ㅋ 스파이짓이네. 얼큰하게담금. 개운햇을꽈. 똑딱짬뽕! 오늘짬뽕콜?


*


의주는 마라탕을 먹느라 얼얼해진 혀를 프라푸치노로 달래면서 사무실에 복귀했다. 곧장 양치질하러 위층 화장실에 갔는데, 팀장이 모퉁이 칸으로 들어갔다. 의주는 도로 나갈까 하다가 칫솔모에 치약을 짜고 소지품을 세면대에 둔 후 옆 칸으로 들어갔다. 칸막이에서 진동이 계속됐다. 팀장이 문고리에 가방을 걸어 둔 것 같았다. 불현듯 의주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C8이 부탁한 상자!
의주는 민트향 거품을 머금은 채로 어제를 리플레이했다. 가방에 주스 병과 상자를 담았다가, 상자만 다시 꺼낸 것까진 재생이 됐다. 그 후부터는 새까맸다.
팀장이 화장실에서 나가고 한참 동안, 의주는 변기 커버에 앉아서 칫솔질했다. 허벅지에 후두둑 물거품이 떨어졌다. 화장지로 바지를 꾹꾹 누르며 닦았지만 뿌연 자국이 남았다.
의주는 동선을 차근차근히 되감았다. 카페에서 나왔고 C8의 차에 탔다. 눈뜨니 아파트 단지였고, C8의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탔고, 중문을 열자마자 짐을 내려놓았다. 그때, 상자가 있었나? 가물가물했다.
익월 프로모션 플랜을 짜고, 리타케팅 광고 배너를 외주에 토스하고, 라디오 CM 파일을 팀과 공유하고, 자사몰에 리뉴얼 상품을 등록하고, 문화센터 쿠킹 클래스 지원 송장 번호를 입력하는 내내, 의주는 빨대를 잘근잘근했다.
도대체 상자는 어디에 있는 걸까?
의주는 애가 탔다. 일단 카페부터 들르기로 했다. 그 카페에 가면 상자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초조한 의주는 반차를 낼까 머뭇거렸다. 사내가 삭막했다. 여기저기서 똑딱똑딱했다. 의주는 의기소침했다. 육수에 똑딱핀을 담근 범인이 된 심정이었다.
강 과장, 면담하자!
의주는 다이어리와 펜을 챙겼다. 심장보다 입술이 콩닥콩닥했다. 마라탕의 여운이었다. 상자의 행방이 묘연한 채로 면담실에 들어가려니 죽을 맛이었다.
어젠 별 탈 없었지?
팀장은 심상한데, 의주는 찔렸다.
조사요?
어. 그럼, 뭐겠어?
그렇죠. 조사, 무탈했습니다. 조사원도 결과에 긍정적이었습니다.
응. 그렇다고 하더라고. 에이전시 측 피드백은 있었어. 강 과장은 잊은 거 없어?
네?
내가 관찰 지시했다고, 시위하는 거야?
아아뇨?
최종 보고 안 남겼더라? 대기 타다가 자정 넘겼다, 나?
아아! 깜빡했어요.
그래, 그랬겠지. 깜빡은 괜찮니?
….
깜빡이 더 문제라고 보는데?
잘못했습니다.
뱉고 나니, 대역 죄인의 대사였다. 미안은 미스매치고 죄송하다고 할 걸, 의주는 분했다. C8이 훼방하지 않았다면 에이전시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탔을 테고 최종 보고를 잊지 않았을 거였다. 그랬다면 상자도 걸머지지 않았을 텐데.
프로페셔널, 응?
팀장은 의주의 저자세에 만족했다.
의주는 고개를 숙인 채 어림짐작했다. C8은 팀장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


의주는 칼퇴했다. 머리로는 지옥철? 눈탱이? 갈등했는데, 몸이 절로 눈탱이를 탔다. 목적지를 밝힌 의주는 피가 말랐다. 이 시간에 택시를 타다니, 다급해서 판단력이 흐렸다. 택시비는 얼마가 나와도 되니, 빨리 카페에 다다르길 바랐다.
손님, 발밑에 뭘 흘렸어요.
택시 기사가 눈짓했다.
의주는 데굴데굴 구르는 컨실러를 주워서 핸드백에 담았다.
차에 두고 내렸나?
의주가 독백했다.
네?
이거 말고, 이건 주웠어요!
의주가 요란을 떨자, 택시 기사가 묵묵부답했다.
의주는 앞차의 해치백을 감상하며, C8의 옆에 앉았던 시간을 그렸다. C8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고, 의주는 안전벨트를 맸다. C8이 수면을 권하더니 인텔리전트 시트를 조절했다. 의주는 사양했으나 엉따를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이 착좌감이야말로 첨단이구나, 의주는 졸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 순간, 손아귀가 풀렸을 테니 상자를 흘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상자를 발견한 C8이 의주를 깔지언정 다행이었다. 그러게 지가 주지, 나한테 맡겨서 고생시켜? 의주는 C8을 원망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지 않았으니 소통할 수도 없었다. 탐문 수색에 매진하는 수밖에.
아저씨, 내릴게요. 걷는 게 빠르겠어요!
여기선 못 내려요. 글구 아저씨라뇨. 저보다 위인 것 같은데?
택시 기사가 깜빡이를 켜면서 투덜거렸다.
의주는 그제야 택시 기사를 쳐다봤다. 턱선이 갸름하고 체격이 훤칠했다. 오른손에 찬 CK시계와 그 곁으로 삐져나온 털이 보송보송하니, 서른 언저리? 의주는 뾰로통했다. 아저씨라고 부른 게 뭐 대수라고?
의주는 묵언하다가 택시에서 내렸다. 냅다 뛰다가 초록 간판이 시야에 들자 멈춰서 헥헥거렸다. 카페가 성지처럼 아름다웠다.
카페에 들어선 의주는 탁자 기둥과 소파 다리를 샅샅이 뒤졌다. 상자가 있다면 눈에 띄지 않고는 못 배기는 여건이었다.
분실물 없나요? 저기 앉았었는데!
의주가 헐레벌떡거렸다.
리저브에서 푸어 오버로 핸드 드립 커피를 내리던 바리스타가 앞에 앉은 고객을 주시했다. 그 시선을 따라서 의주도 몸을 틀었다. 연인이 의주를 훑었다. 남자가 절레절레했고, 여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의주는 귀와 목이 화끈화끈했다.
의주는 홱 접수처로 향했다. 줄이 길었다. 흥분을 가라앉힐 겸 맨 뒤에 섰다.
분실물 접수된 거 있는지 봐 주시겠어요? 제가 어제 저녁 열 시 넘어서 저 창가에 앉았는데요.
분실물이 뭔가요?
상자예요. 요만하고, 리본이 달렸어요. G백화점 리본.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접수원이 이내 돌아왔다.
접수된 게 없네요.
한 번 더 확인해 주시겠어요?
저흰 분실물을 전자 시스템으로 관리해요. 게다가 어제오늘 한 건도 없었습니다.
의주는 망연자실했다. 카페에서 상자를 찾을 확률이 희박하다는 걸 알았는데도 허탈감에 빠졌다.
화장실은 어느 쪽이죠?
2층에 있습니다.
의주는 터벅터벅 층계를 올랐다. 도중에 리저브를 내려다봤는데, 연인이 다정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정수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털이 풍성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귓속말하더니, 남몰래 볼에 입을 맞췄다. 의주는 풀이 죽었다. 상자고 뭐고, 나 몰라라 하고 싶었다.
화장실엔 빈칸이 한 곳뿐이었다. 핸드백을 팔에 건 의주는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그 아줌마는 분실물 찾으셨어요? 마감 시간대라서 누가 주워 가진 않았을 텐데.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오갔다. 악의는 고사하고 호의가 묻어나는, 바리스타들의 대화였다.
그런데도 의주는 울적했다.
아.줌.마.
그들에게 의주는 아줌마였다. 매장에서는 고객이고, 문밖에선 그저 남이며, 실상 모르는 사이. 그런 사이에서 예사롭게 호칭하는 아줌마.
팬티에서 생리대를 뗀 의주는 천천히 돌돌 말았다. 소변과 핏덩어리가 변기로 주르륵 떨어졌다. 파우치에서 탐폰을 꺼낸 의주는 한숨을 쉬었다. 호르몬 때문일 거야, 의주는 마인드 컨트롤 했다. 상자는 집에 있을 거야, 상자 찾고, 치킨 시키자! 치킨에 맥주, 치킨에 맥주. 의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


GG로퍼를 벗으면서 휘둘러 봤지만 상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의주는 영역을 표시하는 강아지마냥 집안 구석구석을 싸다녔다. 수납장을 여닫고, 카펫을 들추고, 서랍을 뒤지고, 커튼을 펄럭이고, 식탁 밑을 기고, 침대 밑을 쓸고, 세탁 바구니를 털고, 심지어 화분을 옮겼다. 물을 준답시고 욕실에 방치했던 스투키였다. 생명력이 강하다더니, 뿌리가 썩어서 문드러져 있었다. 햇빛을 보면 나아지려나, 의주는 베란다에 주저앉았다.
상자를 잃어버렸다.
의주는 먼 산을 바라보며 인정했다. 결단할 차례였다. 먼저 입을 여느냐, 팀장이 입을 떼기를 기다리느냐. C8이 팀장에게 별말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주가 입을 열면 죄다 해명해야 했다.
조사원과 헤어지고 빌딩 정문을 나오는데 C8이 가로막았다. 자사 소속이냐고 묻더니 팀장님의 성함과 관계를 밝히고 다짜고짜 카페에 들어갔다. G백화점 리본이 달린 상자를 팀장님께 전해 달래서 수락했더니 고맙다고 집에 데려다준댔다. 극구 사양했는데 차를 몰고 오셔서 어쩔 수 없이 탔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들고 말았는데 눈뜨니 집 앞이었다. 잠결에 상자를 깜빡했는데, 내가 들고 있었는지 아예 두고 내렸는지 알 길이 없다. 그 상자를 사방팔방 찾아 헤맸으나 없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차에 두고 내린 것 같다.
팀장님, 동생 분께 연락해 보시겠어요? 제가 상자를 두고 내렸는지, 아아아악!
의주는 관자놀이가 지끈지끈했다. 다짜고짜, 극구 사양, 어쩔 수 없이, 피곤한 나머지는 방어적인 뉘앙스를 폴폴 풍겼다. 그리고 깜빡이라니, ‘깜빡’이 팀장의 심기를 또 건드리면 어떡하나? 어느 포인트에서 팀장이 언짢아할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섬뜩했다.
그렇다고 안면몰수하고 때를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고, ‘때’가 되었을 때 안면몰수하면 더욱 악화되는 시추에이션이었다. 그 무엇보다 C8의 차에 상자를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C8은 상자가 팀장에게 전달되었다고 믿는다면? 의주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기름진 치킨, 상쾌한 맥주가 절실했다. 남편에게 전화했는데 방금 주차했다면서 문을 팡 닫았다. 삐빅! 의주가 치킨과 맥주를 시키겠다고 하자, 남편은 흔쾌히 동조했다. 의주는 루이닭 오리지널과 수제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천 씨씨, 부족할까? 의주는 냉장고를 열었다. 네 캔에 만 원, 스텔라 아르투아가 열을 맞추어 대기하고 있었다.
시켰어? 씻을 여유는 되겠지.
남편은 욕실로 직행했다.
냉장고에서 클렌징 티슈를 꺼낸 의주는 싱크대 앞에서 화장을 대충 지웠다.
뭐가 들었을까?
문득 상자의 속내가 궁금했다.
왜 연락 안 했을까?
C8과 팀장의 내막도 의아했다.
왠지 명품 막장 냄새가 나.
의주는 클렌징하다 말고 티슈를 펼쳤다. 검고 붉고 누런 불순물로 얼룩져 있었다.
안 닮았어. 이미지가 딴판이야. 나이 차도 꽤 나고. C8은 씀씀이가 어나더클라스….
띵동!
의주는 망상을 멈췄다. 초인종 소리만 들었는데도 군침이 돌았다.


*


왜 따라갔어?
부탁할 게 있대서.
카페엔 가지 않아도 됐잖아.
얼결에 갔어. 안 돼?
상황에 따라서는.
남편은 냉철했다. 의주는 앞니로 물렁뼈를 뜯어내고 말끔해진 다리뼈를 트레이에 내려놨다. 이어서 윙을 마저 집어 들었다. 하나는 남편에게 양보하려고 했는데, 말하는 꼬락서니에 정떨어졌다.
차라도 타지 말지.
사양했다니깐?
결국 탔잖아?
막무가내인 걸 어떡해?
널 강제로 태웠어?
그런 건 아닌데.
아니잖아. 카페도, 카풀도, 네 의지였어. 왜 네 의지가 아니었다는 듯이 굴어?
그야 팀장네 가족이니까.
팀장은 없었잖아. 여전히 너랑 만났다는 사실조차 모르잖아. 막말로 이상한 사람 따라다닌 걸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없지, 패널이었다니까. 그리구.
글구, 뭐?
차림새가 그렇지 않았어.
뭐?
명품으로 휘감았더라고. 차는 신형….
야, 강의주!
그렇잖아? 그 조건이면 사회적인 지위가 있을 텐데, 신분 확실한 거지.
복붙이다, 너. 말단이랑.
말단?
우리 회사 이사가 성폭행 연루됐다고 했었잖아. 피해자가 말단이야. 이사는 합의한 섹스라는데, 말단은 부정하지. 그 말단이 너랑 똑같이 말해.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대. 호텔에서 업무할 줄 알았대.
그 일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호텔로 부르는데 의심 안 했느냐니까 말단이 뭐라는 줄 알아? 어쩔 수 없었대. 걔 호텔에 끌려간 거 아냐. 제 발로 갔어.
걔가 나랑 뭔 상관이냐고!
난 페미니스트는 못 돼도, 여자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한남은 안 될 거야. 근데 이해가 안 돼. 어째서 자신을 삼자처럼 일컫는 거야? 주체적이지 않아, 가끔. 현실에서 도피한다고. 말단은 성폭행인 줄 몰랐대. 이사가 증거로 제출한 문자, 통화 목록에 말단이 먼저 연락한 게 대다수야. 내용? 이사한테 매달리는 폼이야.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 너도 그러고 있잖아. 카페도, 카풀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남의 탓하고, 넌 그 상황에서 무력한 존재였다고 하잖아. 너 무력하지 않아. 주관 뚜렷하잖아. 시댁에서 전은 안 부칠 거고, 안부 전화하기 싫고, 아이는 대출 갚고 낳을 거고. 가족한텐 영리하잖아.
불똥이 그리로 튀어?
그러니까 내 말은, 직시하라고. 네가 처한 상황에서 주체가 되라고. 남의 겉핥지 말고. 그 상자, 네가 잃어버렸어. 남 탓하지 마. 팀장 탓은 더더욱 아냐.
남편은 A기업 인사팀 과장이었다. 일 년 전, 직장 내 성희롱 건이 여태 지지부진했다. 성희롱은 성폭행이 됐고, 피해자는 불륜녀가 됐으며, 가해자는 불륜남이라도 되어야 했는데 도리어 피해자가 됐다. 언론을 막으려고 애썼으나, 한 정치인의 자살과 맞물리면서 일파만파 퍼졌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그런데 의주는 고작 상자를 분실한 건으로,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찡찡거렸다. 그까짓 상자, 사과하고 사례하면 그만이었다.
뭔데, 그 상자?
몰라.
말해 봐. 사 줄게.
어찌 알아? 내 선물이니?
뭐냐고 안 물어봤어?
어떻게 물어보니?
카페 가고, 차도 타는데, 상자에 뭐 들었는지는 못 물어?
이씨, 적당히 해라.
의주가 맥주를 원샷 했다.
월요일에 털어놔. 막상 털어놓으면 별거 아냐.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한다?
네 일이 남의 일이니?
남편은 의주를 노려봤다.
스텔라는 스텔라 잔에 마셔야징.
의주는 회심의 콧소리를 냈다.
울 자기, 맥주는 언제 사 놨댕.
의주가 캔을 따자, 거품이 올라왔다.
괜찮을 거야.
남편이 위로했다.
알겠엉. 불금이잖앙. 마셩, 마셩.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못할 거야. 아무 일도 아냐. 아무 일도.


*


미어캣? 하마에서 미어캣으로 갈아탐? 미어캣보단 스쿼트? 드뎌 다이어트? 먼뎅먼뎅. 하과장이자꾸 일어나도리도리. 왜구럼? 마짱안옴? 연차! 헉. 스케줄안봄? 전산달력? 난달력볼라궁출근,휴가,빨간날,월급날! 난낼쉬지롱. 안물안궁! 남치니랑가평ㄱ 칫,자랑질?
팀장의 공석으로 인해 사무실이 활기찼다. 모두 신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의주는 답답하면서도 안도했다. 월화수목금금금 같은 주말 중에서 최악의 금금금을 보냈는데, 월요일에도 후련하지 못하다니. 동시에 유예하는 기쁨도 누렸다. 팀장의 연차는 천재지변이었다. 예기치 못한 재앙인데, 한낱 인간으로서 수용할 수밖에.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의주는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올만에 애슐리갈꽈? 45분나가서 15분들오면 뽕뽑! ㅇㅋ 때리 데꼬가야함, 공범! 어흥! 뽀인트는내꼬, 찜콩! 시즌메뉴머? 짐보는데딸기끝낫엉ㅜ 런치능별로안달랑ㅋ 연어없겟징ㅠ
포털 브랜드 검색과 키워드 광고를 컨펌하고, 홍보 기사 초안을 첨부하여 송출 요청하고, 사방넷 접속하여 배송 누락 오류를 캡처하고, 홈쇼핑 촬영본을 사내 공유하고, 자사몰 매출보고서를 수정했더니, 애슐리로 출동할 시간에 임박했다. 의주는 메신저를 로그아웃하면서, 발레 슈즈로 갈아 신었다. 이럴 땐 손발이 척척 맞았다.
엘리베이터에 탄 PM은 바이어 미팅이 있다면서 B2를 눌렀다. CS관리사, 웹디자이너, 의주만 애슐리에 가기로 했다. 대리는 혼자서 순댓국을 먹겠다고 했다. 웹디자이너는 입을 잠그라고 연기했다. 영화 타짜의 빨치산을 흉내 낸 거였다. 대리는 너구리처럼 허둥지둥 내뺐다.
주말엔 뭐했어요?
남치니랑 한강 가서 돗자리 깔고 죽쳤어요.
좋았겠다! 이 날씨에! 나도 데이트하고 싶다.
소개팅은요?
나가리.
과장님은 주말에 뭐했어요?
집에 있었어요.
유후! 신혼!
아아니, 신혼은 뭘. 뭘 찾느라. 실은 나 고민이 있는데….
의주는 C8과의 만남부터 이별까지 풀었다. 수십 번 되새긴지라 술술 썰을 풀 수 있었다. 애슐리에 도착해서 착석하느라 잠깐 흐름이 끊기긴 했지만 무탈하게 이야기를 마쳤다. CS관리사, 웹디자이너는 진중한 표정으로 경청하다가 발랄하게 뷔페를 즐겼다. 의주는 동료에게서 뭐든 득하리라 기대했다. 팀장을 본 적 없는 남편보다 동료가 유익할 거라고 믿었다.
속눈썹 연장술, 이 건물에서 했는데! 15층이던가?
아, 맞다! 거기 연락처 알려줘요. 예약하게.
와우, 누가 웹디 아니랄까 봐 플레이팅이 예술인데요?
훗, 푸드스타일리스트 감리하는 느낌으로 담아 봤어요.
으음! 훈제 오리 맛있어! 또 떠야지.
와플 가져올게요. 인스타 감성으로!
CS관리사와 웹디자이너는 수다를 떨면서 식사했다. 의주는 후회했다. 공허한 속내를 채우려고 바지런히 숟가락질했다.
단발병 도졌어요. 확 잘라 버릴까요?
쟬 보고도?
에이, 퇴치짤 각. 저 단발머리, 인턴 닮았죠?
그러고 보니 요즘 인턴이 안 보이네요.
의주가 끼어들자, 웹디자이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CS관리사는 후식을 가져오겠다며 모면했다.
강 과장, 무신경한 건 아는데 심하네요.
….
인턴이 부장, 신고했잖아요. 성희롱으로.


*


HMR 시장조사 및 관능평가 결과보고서가 완성됐다. 총 96페이지의 PPT이고, 외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PDF로 변환하여 암호를 설정했다. 비밀번호는 자사 창립기념일, 프로젝트 멤버는 팀장, 대리, 의주. with R리서치그룹. 팀장은 이사진에게 메일을 발송했다.
참조자로서 첨부 파일을 다운로드한 의주는 프로젝트 멤버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걸 알고 놀랐다. 단 두 시간, 좌담회를 관찰했을 뿐인데 기여자가 되다니. 의주의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었지만 팀장과 대리는 공을 나눈 셈이었다. 대리에게는 권한이 없고 팀장이 결정했을 텐데, 의주는 꿍꿍이를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보고서가 꽝이라서 덮어씌우려는 건가? 미심쩍이 정독했는데, 꽝은커녕 광이 났다. 자사에서 본 적 없는, 최적의 데이터베이스였다. 한 줄기의 빛이 되어 꽁꽁 얼어붙은 내수를 녹일 것만 같았다. HMR 중에서도 어느 카테고리부터 입지를 다지는 게 유리한지, 생산 라인을 분배할 시 어떤 제품을 우위에 두고 개편할지, 오프라인과 온라인 유통의 성장 격차를 냉동식품에 어떻게 접목할지, 형형색색의 그래프가 인도하고 있었다.
C8의 상자에 관해서도 컨설팅해 주는 에이전시가 있으면 좋으련만, 의주는 시름에 잠겼다. 좌담회를 관찰한 날로부터 보름이 흘렀는데 팀장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지 못했다. 의주뿐만 아니라 C8도 잠잠한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의주는 C8의 차에 상자를 떨어뜨렸다고 확신했다. 조수석에서 상자를 주운 C8이 알아서 조치했을 거라고. C8이 의주를 데려다준 헛수고를 고자질하더라도 팀장은 개의치 않을 거라고. 팀장은 공과 사는 구별하니까. 의주는 프로젝트 멤버에 등극한 후 팀장을 한층 신뢰했다.
강 과장, 면담!
팀장이 외쳤다. 의주는 냉큼 인쇄 뭉치와 펜을 챙겼다. 하마와 미어캣은 한철이었다. 의주는 사철 다람쥐였다. 쳇바퀴를 돌리듯이 총총걸음으로 일했다.
차주 내로 기안서 제출해.
팀장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명했다. 에이전시에 의뢰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정기적인 좌담회를 주최하자는 거였다. 일명, 자사 서포터즈! 관능요원 모집부터 결과보고서 작성까지, 담당자는 의주였다. 의주는 인쇄 뭉치를 응시했다. 그 표지에 이름이 있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팀장은 의주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관찰도 했겠다, 관능이야 껌이니까 할 수 있을 거야. 어시스트는 대리 투입시킬게. 더 할 말 없지?
팀장이 옷매무새를 다듬다가 덧붙였다.
인사과에서 부르면 쓸데없는 참견하지 마. 뉴 프로젝트에 집중하라고.
팀장님, 드릴 말이 있는데요.
의주는 뭐라도 덜어 내고 싶었다. 부담, 양심이 안 되면, 하다못해 상자라도. 남편의 조언대로 까짓 상자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엮인 거 있니?
그게 아니고요.
봤니?
네?
부장이 추행하는 거 봤냐고.
그걸 본 게 아니.
아이, 됐어. 듣기 싫어. 인턴이랑 엮일 거니?
….
빨랑 말해. 뉴 프로젝트 딴 데 맡기게.
….
우리 일하자. 일. 프로페셔널, 응? 시간이 없어!
팀장이 왼팔을 휘저었다. 롤렉스 데이저스트 28, 의주의 로망이었다.
의주는 허전한 손목과 두둑한 약지를 매만졌다. 예물 시계는 수리점에서 기름때를 벗고 있었다. 그래서 큰맘 먹고 결혼반지를 꼈다. 보석함에 고이고이 모셔 뒀던 0.1ct 다이아.
하겠습니다.
의주는 맹세했다.
시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임아라
작가소개 / 임아라

1982년 서울 출생.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2016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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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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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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