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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 작성일 2022-10-07
  • 조회수 1,54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중단편)]



재회




박동현






소호야. 오랜만이네. 나 도현이야. 중학교 삼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네가 여름방학 직전에 학교를 그만뒀으니까 사실은 몇 달도 안 된 사이긴 하지.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널 기억해. 네가 티브이나 유튜브에서 자꾸 나타났거든. 못 본 척 지나갈 수가 없더라. 네 무대 영상도 봤고 예능에 나와 출연진들을 웃기는 모습도 봤어. 또 네가 팬들에게 하는 애교도 보았지. 새 종이처럼 구김 없는 네 표정은 정말이지 신비롭더라. 그런 얼굴을 할 수 있는 애였다니. 드물게 찾아오는 남성 팬까지 한껏 안아주는 네 몸짓이 내겐 특히 놀랍더라고.
그래도 혹시, 정말로 내가 기억나지 않을까? 이렇게 묻는 건, 우리가 서너 달 정도만 아는 사이였다곤 해도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났기 때문이야. 이중원이나 김상진, 최준학 같은 이름들은 기억해? 너 항상 걔네랑 몰려다녔잖아. 그리고 나는 너희의 셔틀이었잖아. 그렇잖아? 거기다 너희가 부르는 밤마다 나와서 대신 담배를 사야 했지. 너희가 지켜보는 앞에서 편의점이나 슈퍼를 들락거리고, 가능하면 훔치기도 했었어. 너희가 시켜서, 내가 그랬잖아. 아직도 기억나지 않을 수 있을 거야. 그럴 거 같아서 내가 만든 영상이 있어. 비공개로 올려서 우리밖에 못 보니까 걱정 마. 아이디와 비번 아래에 적을게. 그걸 전부 본 뒤에 나를 찾아왔으면 좋겠어. 동영상에 댓글을 달 수 있으니까 그걸로 연락하면 될 거야. 기다릴게.


소호는 책상에 내려둔 편지 봉투를 다시 살폈다. 곳곳에 붙은 스티커들이 알록달록했다. 소속사 주소와 우편번호를 쓴 글씨체가 삐뚤빼뚤함에도 어떤 정성이 느껴져 가장 먼저 뜯어본 팬레터였다. 그 안에 이런 내용이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편지에 적힌 유튜브 계정으로 로그인을 하자, 비공개 설정된 <asdsfwfwd> 따위의 제목을 가진 영상들이 소호를 맞이했다. 가장 먼저 눌러본 <voivelfjw>에는 소호가 카카오톡으로 보낸 메시지와 페이스북에서 친구들과 나눴던 상스러운 대화를 캡처한 이미지, 속옷만 입은 도현이 거울 앞에 선 자신을 찍은 사진이 슬라이드 쇼로 넘어가고 있었다. 사진 속 도현의 몸에는 검붉은 멍이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설명을 덧붙이는 자막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날은 제가 담배를 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맞았습니다. 소호가 뺨을 때리는 바람에 안경테가 부러졌는데 그때 왼쪽 뺨에 이렇게 상처가 난 것입니다. <nlnlndippppppp>는 도현에게 욕설을 퍼붓는 소호의 음성이 담긴 영상이었다. 소호와의 통화를 녹음한 것이라는 자막이 화면 하단에 표시되었다. 정확한 날짜와 시간까지 함께.
어떤 시간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소호는 배신감을 느꼈는데 그건 자기 자신을 향한 감정이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저럴 수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깔끔히 정돈된 자신에게서는 아무 답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억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대신 소호가 떠올린 것은 데뷔 후 질식할 것 같던 2년여간의 무명시절이었다. 길거리캐스팅을 받았다는 자신감으로 학교까지 그만두며 소속사에 들어간 소호는 모든 게 잘 풀리리라고 자신했다. 바로 데뷔조로 올라갔다는 사실은 자신의 재능을 증명하는 듯했다. 곧 보이그룹으로 데뷔한 소호는 첫 무대를 엉망진창으로 마쳤음에도 걱정하지 않았다. 전부 시간문제로 보였다. 놀랍게도 그룹을 반겨준 것은 무관심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어떻게든 그룹을 굴리기 위해 소속사가 잡은 온갖 자질구레한 스케줄에 내던져진 채였다. 어느 시골 축제의 무대에서 노인들의 무관심한 얼굴을 바라보며 춤을 추던 소호는 그간 어마어마한 착각 속에 지내왔음을 깨달았다. 인지도 없는 아이돌은 결국 계약에 붙잡힌 연습생과 다름없었다. 연차가 쌓이며 계속 낡아질 예정이었으니 연습생보다 더욱 암담한 처지였다. 소호의 선택은 매일 연습실을 오가는 것이었다.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연습했다. 소속사가 새로 런칭하려는 걸그룹 데뷔조만큼 열심히 했다. 그러고서는 기진맥진한 채 숙소로 돌아가 바로 잠들었다. 위약금을 낼 능력이 없어 탈퇴마저 불가능한 소호의 자기학대이자 아주 부지런한 후회였다. 그릇된 선택 하나가 인생을 손쉽게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셈이었다.
하지만 소호의 인생은 끝장나지 않았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덕분에 소호의 무대 직캠 조회수가 급상승한 것이었다. 대중들은 무관심한 관객 앞에서 꿋꿋이 칼 같은 안무를 소화하는 소호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포기하지 않는 무명 아이돌. 어느새 노력의 상징이 된 소호는 온갖 티브이 프로그램과 라디오에 불려 갔다. 그건 소호를 넘어 그룹 전체에 찾아온 기회였다. 신곡 쇼케이스와 팬사인회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숙소로 향하던 차 안에서 멤버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뒤늦게 몰려온 감격에 한껏 몸을 맡기며, 소호는 앞으로의 시간을 소중히 대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잘하자. 열심히 하자. 소호의 말에 멤버들은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돌아봤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몸 안쪽에 단단한 뼈대 하나가 새로 돋아난 느낌이었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야이씨발년아니일부러나좆돼보라고이러는거지개새끼가눈치살살보면서존나재고있네병신이쪼개지마새껍다니까진짜뒤질라고또개패줘?깝쳐?깝치냐고야야야

마찬가지로, 그것도 꿈이 아니었다.


*



도현이 제안한 대로 연락은 유튜브 댓글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의 아이디로 자문자답을 하는 식이라 알림도 뜨지 않아서 주기적으로 채널에 들어가 댓글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런 불편함 탓인지 연락은 아주 간소하게, 만날 날과 장소를 정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먼저 편한 날이 언제인지 운을 띄운 건 소호였다. 도현은 그래도 바쁘게 지내는 아이돌인데 이쪽 일정에 맞춰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행사 잡힌 날짜만 피한다면 맞출 수 있다고 소호가 답하자, 곧 날짜와 시간이 정해졌다. 장소는 두 사람이 다녔던 중학교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편의점이었다. 도현은 거기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도현을 만나기 위해 도착한 곳은 소호의 고향이기도 했다. 데뷔 이후로 부모를 만난 적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소호는 기차역 밖으로 나서자마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실제로 부모를 만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도현과 부모를 번갈아 마주하다가는 마음이 엉망이 될지도 몰랐다. 근처 모텔에 방을 잡은 소호는 끼니 때울 곳을 찾을 겸 주변을 걸었다. 갑자기 인기를 얻은 탓에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할까 걱정했지만, 슬슬 어둑해진 덕인지 아무도 시선을 보내거나 다가오지 않았다. 하기야 청바지에 후드티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 쓴 사람은 주변에 가득했다. 소호는 내심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라고 느꼈다. 도현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알아보는 시선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그런데 도현은 무엇을 할 생각일까? 소호는 도현의 태도를 떠올렸다. 유튜브에 비공개로 올라온 영상들은 소호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박살 내기 충분했고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보였다. 영상에서 느껴졌던 강렬한 적의를 떠올릴 때마다 소호는 끝났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한데 막상 소호를 대하는 도현의 말투는 미적지근했다. 불편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는 인상까지 받을 정도였다. 애초에 왜 그 영상들을 바로 공개하지 않았는지, 이런 은밀한 방식을 원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입막음을 조건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것도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돈 따위의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면 무엇을? 온갖 가능성의 다발이 소호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곧 그것은 소호를 만나 차분한 태도로 대화를 이어가던 도현이 눈앞에서 미리 작성한 메일을 연예기자들에게 보내고 유튜브 영상을 공개설정으로 바꾸는 식의 우스꽝스러운 상상이 되었다.
대로변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소호는 담배 냄새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멋대로 연기를 뿜어내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바라볼 작정이었다. 한데 아무도 담배를 물고 있지 않았다. 대신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둘이 자제력 없는 말투로 떠드는 게 보였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한 명도 뒤쪽 골목에서 나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신호등 불빛이 바뀌었다. 소호는 건너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골목으로 향했다. 거긴 길이라기보다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생긴 좁고 지저분한 여백에 가까웠다. 양옆의 건물 외벽에서 실외기가 털털 소리를 내며 더운 바람을 밀어내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길 곳곳에 담배 냄새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맴돌았다. 거길 지나가기 위해서는 바닥의 꽁초와 쓰레기들, 그리고 침까지 밟아야만 했다.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전부 학생인 건 아닌지도 몰랐다. 다만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소호를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것은 전부 학생이었다. 교복 차림이 아니더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뻔뻔한 눈을 하고서 언제든 충동적으로 튀어 나갈 수 있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는 것이 그들의 특징이니까. 무사히 골목 밖으로 나선 소호 앞으로 넓은 사거리가 펼쳐졌다. 자동차들이 도로의 선과 신호에 맞춰 경쾌하게 지나다녔고 보행자들은 침착하게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소호도 그들 사이에 섰다. 녹색 불이 켜졌다. 길을 건너던 소호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그 좁은 틈에다 몸을 집어넣고 있었다. 건너편에 도착한 소호의 얼굴을 증기가 덮쳤다. 작은 만두가게가 호객을 위해 돌출시킨 찜기에서 뿜어진 것이었다. 원래는 분식집이었는데, 생각하던 소호는 과도한 증기로 가려진 가게 내부로 들어가 만두를 주문해 먹었다.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을 지나 십 분 정도 걸어야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여나 반대 방향으로 가거나 잘못 내리게 될까 봐 소호는 몇 번을 확인했으면서도 불안한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약속 시간에 늦는다면 도현의 심기를 건드리는 꼴이 될 것이었다. 소호는 지도앱을 켠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현재 위치를 알리는 점이 도착지를 향해 무사히 움직였다. 중학교 때만 해도 다급한 것은 도현 쪽이었다. 시간에 맞춰 나오지 못하면 맞았으니까. 어쩌다 도현이 그런 어둑한 시간에 불려 나왔더라? 소호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미 친구들이 도현을 그렇게 다뤄왔으니까. 도현을 툭툭 치거나 매점 심부름을 시키는 등의 괴롭힘은 교실에서도 이뤄졌지만, 본격적인 것은 방과 후였다. 그들은 도현에게 담배를 사거나 훔치게끔 시켰다. 당연히 도현을 통하지 않더라도 담배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현을 통해 구하는 편에는 즐거움이 있었다. 편의점이나 슈퍼에 들어가 애쓰는 도현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나중에는 보다 즐기기 위해 각자 성공과 실패에 돈을 걸기도 했다. 대개 도현은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가끔씩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담배를 꺼내 보이곤 했다. 운 좋게 사 오거나 잽싸게 훔쳐 온 거였다. 분위기가 과열되어 내기의 판돈이 커지는 날에는 진 쪽이 욕설을 퍼부으며 도현을 마음껏 때리기도 했다. 물론 괴롭히기 좋은 여러 상황을 연출한 것에 불과했다. 영상에서 나오던 자신의 목소리를 듣던 소호는 그 욕설에 달라붙은 즐거움 하나하나를 생생히 떠올려 냈다. 그날 이후로 잠을 설쳤다. 도현에 의해 무너질 위험에 처한 앞날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무언가에 중독된 자신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즐거운 일이었나? 고작 그것이? 목소리는 꿈속에서도 그칠 줄 몰랐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길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소호는 걸음을 멈추었다. 화면의 점이 도착지에 닿아 있었다. 고개를 들자 어두운 거리에 덩그러니 놓인 편의점이 보였다. 문을 여니 어서오세요, 하고 힘없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에 도현이 있었다. 소호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몰라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다가오는 도현이 보였다. 주위에 진열된 상품들과 함께 이 공간 내부가 팝콘처럼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소호는 기꺼이 무릎이라도 꿇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현이 꺼낸 말에 소호는 아무런 자세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멀뚱히 도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너 진짜 소호 맞구나.”
도현이 먼저 손을 내밀어서 소호는 얼떨결에 악수를 했다.


편의점은 대로변 안쪽의 주택가 사이에 있었다. 주변은 빌라와 구식 주택으로 가득했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세탁소나 철물점, 김밥집 따위가 자리한 모습이었다. 밤새 불 켜진 곳이라고는 이 편의점이 전부인 듯했다. 거리는 늦고 외로운 귀가를 하는 이들의 신발 끄는 소리나 영역을 두고 다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정도를 빼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도현은 손님도 물류도 많지 않은 편의점이라 일하기 편한 대신 최저시급은 못 받는다고 했다. 담배를 입에 물어서 발음이 웅얼거렸다. 도현은 피우겠냐며 담뱃갑을 내밀었다. 소호가 즐겨 피웠던 프렌치 블랙이었다. 소호는 손을 내저으며 이제 끊었음을 밝혔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담배 두세 모금마다 침을 뱉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편의점 앞이 침으로 범벅이었다.
“네 직캠 많이 봤어. 방송도 웬만한 거 다 봤고.”
소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도현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방송에 나온 소호가 이영자와 신동엽을 폭소하게 만든 순간에 대해, 앞으로 이 기회를 계기로 멋진 모습 보여주겠다고 말한 인터뷰에 대해, 무대의 끝마다 맏형으로서 멤버들의 어깨를 두드려주던 모습에 대해, 팬사인회에 모인 팬들에게 진심 어린 태도로 건넸던 다짐에 대해, 소호를 무명 시절부터 좋아했던 팬들이 풀어내는 미담에 대해…. 도현은 사인을 부탁했다가 나중에는 사진까지 몇 장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소호는 문득 자신이 도현을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하여 말까지 더듬었다. 점점 커지는 목소리와 억지로 섞은 웃음이 밤거리 곳곳을 뒤적거렸다. 누군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밤의 편의점 앞에 선 두 남성을 알아보기 어려울지는 몰라도, 대화를 엿듣는 과정에서 둘 중 하나가 소호임을 알아채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 있었다. 소호는 도현의 어깨를 잡아 편의점 안으로 밀었다. 힘을 쓰자 도현은 가만히 굳어서 저항도 없이 순순히 이끌렸다. 학창 시절의 어느 순간처럼. 소호는 계속 힘을 쓸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떼고 한 발짝 정도 물러났다. 다만 이렇게 된 김에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대체 무엇을 바라는 거냐고. 도현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어두워졌다. 내키지 않는 화제인 듯했다.
“소호야, 나는 네 많은 게 까발려지는 상상을 해. 모두에게 실망을 안기고서 고개 숙인 자세로 사라지는 네 모습을 말이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고.”
도현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시 말했다.
“근데 이제 다 무슨 소용이야. 그렇잖아? 그렇게 해서 나에게 좋을 게 있을까? 아닌 것 같아. 진짜로. 그러니까… 정말로 네가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찾아온 거라면 나를 도와줘. 그게 널 매장시키는 것보다 좋은 일일 거야.”
소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 영문 모를 상황에서 무언가 명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픈 조급함 탓이었다. 도현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이 상황의 끝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하지 못할 순간이라면 최대한 빨리 마주하고 보내는 게 나았다. 어쩌면 이건 연습실을 오가며 보냈던 시간과 비슷한 걸지도 몰랐다. 도현은 핸드폰을 잠시 확인하고서는 어두워졌던 얼굴에 애써 웃음을 섞으며 말했다.
“그럼 사진 먼저 찍어도 괜찮을까? 아직 시간이 좀 있어서….”
소호는 기꺼이 도현과 나란히 섰다. 도현이 먼저 어깨동무를 했다. 소호도 자신의 팔을 도현의 어깨에 걸쳤다. 사진을 찍는 내내 핸드폰을 잡은 도현의 손이 달달 떨렸다. 소호에 어깨에 건 팔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호는 난데없는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무명 시절부터 음악방송까지 따라오던 팬 하나가 팬사인회에서 눈물을 보였을 때였다. 소호는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린 팬을 가볍게 안아 주었다. 품에 안긴 몸의 조심스러운 떨림은 앞으로 잊을 수도, 어떠한 경험으로 대체할 수도 없는 순간임이 분명했다. 다만 왜 지금 그 순간이 떠오르는가? 소호는 불길한 마음으로 흔들리는 화면 속 도현의 미소를 유심히 살폈다.
내킬 때까지 사진을 찍은 도현은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펼쳤다. 접힌 흔적도 없는 새 공책이었다. 도현은 모든 페이지에 사인을 부탁했다. 그렇게까지 필요하냐며 소호가 묻자, 도현은 집안 곳곳에 부적삼아 붙일 거라고 했다. 소호는 이번 활동기에 앨범과 포토카드 따위에 한참 사인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공책 정도야 금방이었다.
“봐, 오늘 세 개나 나왔어.”
플라스틱 뚜껑으로 덮인 도시락들을 들고 온 도현은 여기서 맘에 드는 게 없으면 파는 걸 골라도 좋다고, 자신이 기꺼이 내겠다고 했다. 소호는 도시락을 챙겨 창고로 향하는 도현을 흘끔거리다가 펜을 내려놓았다. 사인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날림이 되었다. 노인들 앞에서 무대를 했을 때도 이만큼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소호는 밀려오는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번 하루만 잘 버티면 되는 거였다.
편의점 문 위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울린 건 그때였다. 손님이었다. 진열대 쪽으로 슬그머니 피하려던 소호는 계산대를 바라보았다. 자랑스레 펼쳐진 공책을 두고 갈 수 없었다. 다급히 공책을 챙기던 소호는 문득 그 옆에 놓인 가방을 보았다. 무언가 가득 담긴 낡은 가방은 함께 치워야 할 물건으로 느껴졌다. 창고에서 나온 도현이 계산대로 향했다. 진열대 구석에서 고개를 떨군 채 손님이 나가길 기다리던 소호는 무심결에 가방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꽤 가벼웠는데 지퍼가 열려 안쪽이 훤히 다 보였다. 가득 담긴 건 담뱃갑들이었다. 아무렇게나 욱여넣은 건 아니었고 많게는 예닐곱 갑끼리 고무줄로 묶어 잘 구분해 놓은 상태였다. 계산을 끝낸 손님이 나갔다. 종 울리는 소리와 함께 다가온 도현이 머쓱한 얼굴로 가방을 돌려받았다.
“봤어?”
소호는 조심스레 그렇다고 답했다. 여전히 지퍼를 닫지 않은 가방을 들고 서 있던 도현은, 이내 결심한 듯 가방에서 꺼낸 담배 묶음들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도현은 이게 뭔지 알겠냐며 물었다. 소호는 그 답이 담배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이게 내 부업이거든.”
바로 이해하지 못한 소호에게 도현은 이중원, 김상진, 최준학이라는 이름을 꺼냈다. 소호는 그 이름을 육성으로 듣자마자 발을 헛디뎌 넘어지듯 아찔해졌다. 도현은 그 셋이 강제 전학을 당한 건 아는지 물었다. 연습생 생활을 시작하며 그들과 연락을 끊었던 소호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도현은 그해 여름방학 전부터 자신이 괴롭힘당했음을 입증할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더는 그냥 당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는 도현의 말에는 강한 적의가 되살아나 있었다. 소호는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그저 응,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방학이 지난 뒤에도 계속 이어졌던 괴롭힘은, 결국 도현이 모았던 자료를 학폭위에 제출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고 했다. 곧 졸업이라 좋게 좋게 넘어가려 했던 학교였지만, 워낙 자료들이 집요하여 징계를 먹일 수밖에 없었다고.
그러면서 도현은 한 가지를 고백했다.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게 초여름이었는데, 그즈음 소호는 길거리캐스팅으로 연습생이 되어 학교를 그만둔 상태였기에 모을 만한 자료가 적었다는 거였다. 그래서 유튜브에 올린 영상들은 소호가 하지 않은 일까지 최대한 긁어모아 교묘히 섞어 만든 결과물이라고 했다.
“사실 네가 알아챌까 봐 걱정했었어.”
듣고 보니 숙소에서 밤새 듣고 되새겼던 목소리 중 어떤 것은 도현이 아니라 친구를 향했던 것 같기도 했다. 소호는 운 좋게 도현의 계획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지만, 그 영상들이 지금 드러나서는 안 될 시기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였다. 소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무엇이 괜찮은지는 전혀 모르는 채였다.
도현은 그 셋을 처리했다는 사실 덕에 알 수 없는 성취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다만 그 기분을 나눌 사람은 없었다. 도현을 주로 괴롭혔던 것은 앞선 세 명이었지만, 도현을 따돌린 건 학교라는 환경 자체였으니까. 졸업하면서도 홀로 그 끓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어느 날 시작한 것이 담배였다. 그러니까 직접 담배를 구매한 뒤, 피우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을. 도현은 거기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담배를 자연스레 구매하는 자신이 꽤 그럴듯하게 보였다고 했다.
소호의 미간이 구겨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 달 정도 담배를 사다 보니 뜯지도 않은 담배가 남아돌았다. 특히 입맛에 맞지도 않은 담배들은 억지로 전부 피우기도 곤란했다. 도현은 별생각 없이 중고 거래 사이트에 담배를 올렸다. 정가보다 오백 원 더 낮춘 가격이었다.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 게시글은 지워지고 도현은 사이트에서 강제로 탈퇴되었다. 하지만 이미 구매 의사를 밝히는 쪽지가 잔뜩 도착한 채였다. 도현을 놀라게 했던 것은 웃돈까지 얹을 테니 제발 자신에게 팔아 달라며 사정하던 초등학생들의 쪽지였다. 판매자를 골탕 먹이려는 장난이라 여기면서도 야릇한 기대를 안고 직거래 장소로 간 도현을 맞이한 건 진짜 초등학생이었다. 담배를 전부 처분한 도현은 담배를 판 돈으로 다시 담배를 사서 웃돈을 주고 사겠다며 쪽지를 보낸 초등학생들에게 담배를 팔았다. 곧 도현은 이런 상황이 그다지 드문 게 아님을 깨달았다. 거기서 기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쓸모를 찾은 느낌이라고 했다.
도현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현재로 이르렀다. 지금 일하는 편의점은 사장이 운영하는 여러 지점 중에서 겨우 본전만 유지하는 곳이었다. 사장은 이 지점의 CCTV를 확인하지 않거나 매출에 지장이 없다면야 그냥저냥 넘어가는 게 분명했다. 종종 거래를 위해 문을 잠그고 이십여 분 가까이 나갔다 왔음에도 문제 없이 근무하는 자신이 근거라는 도현의 말투가 은밀했다. 최저시급도 받지 않으면서도 계속 일하는 이유라고 했다.
“요새는 잘 안 팔려. 애들도 전자담배를 피우더라니까.”
그건 도현의 농담이었지만 소호는 웃을 수 없었다. 이 공간에서 혼자 거꾸로 매달린 듯한 기분이었다. 도현은 이 불쾌한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핸드폰을 내밀었다.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소호는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어느 지하주차장 내부에 있는 도현의 모습이 보였다. 곧 도현 앞으로 앳된 남자아이 하나가 나타났다. 많이 쳐 봐야 중학생이었다. 둘은 담배 묶음과 돈을 주고받았다. 남자애가 담배를 확인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자리를 떠난 뒤, 돈을 주머니에 넣은 도현이 화면을 향해 손을 뻗는 것으로 영상은 끝났다. 도현은 이게 증거라고 했다. 증거? 차마 눈을 떼지 못했던 소호가 진저리를 치며 도현을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도현이 조금 물러났다.
“존나 한심하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소호는 다급히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숨겼다. 그러나 도현은 이미 입술을 부르르 떨며 버려진 아이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소호는 그저 예상하지 못해 당황했을 뿐이라며 도현을 달래 보려 했다. 도현은 편의점 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뒤따르려던 소호는 걸음을 멈췄다. 도현은 멀리 가지 않고 문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기를 뱉으며 눈물을 닦는 그 뒷모습을, 소호는 바라보기만 했다. 그제야 편의점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들렸다. 소호 자신의 목소리였다.
줄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도현은 휴지로 눈물과 콧물을 닦으면서도 계속 훌쩍였다. 빨갛게 부은 코끝이 살짝 까져 있었다. 도현은 계산대 안쪽에서 가위를 꺼냈다. 소호는 온몸의 피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도현이 잘라낸 것은 가방에서 꺼낸 담배 묶음의 고무줄이었다.
“실은 네가 오면 이 짓을 그만두기로 했거든….”
그러더니 도현은 여전히 훌쩍이며 갑작스레 흥분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소호는 난감한 마음으로 사과를 받았다.
계산대 위는 금세 담뱃갑으로 어질러졌다. 공간이 넉넉지 않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담뱃갑이 많았다. 도현은 개의치 않고 당장의 가위질에만 몰두했다. 바닥으로 떨어진 것들을 주워 든 것은 소호였다. 소호는 흩어진 담배를 모아 종류별로 늘여놓았다. 곧 담배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도현은 소호가 정리한 담배를 계산대 아래 수납장에 일렬로 넣었다. 소호는 죽은 애벌레처럼 주변에 흩어진 고무줄들까지 전부 버렸다. 정리가 끝날 즈음에야 도현은 감정을 추스린 듯했다. 소호는 도현이 만지작대는 마지막 담배 묶음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지?”
도현이 결연한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나랑 같이 가주면 돼.”


안쪽에서 편의점 문을 잠근 도현은 창고로 들어가더니 곧 건물 뒤쪽에서 나타났다. 출발 직전에 들어온 손님이 느긋하게 술과 핫바를 사 가는 바람에 촉박해진 모양이었다. 도현은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급한 몸짓이었다. 소호도 뒤를 따랐다. 도현은 가로등이 망가져 어두컴컴한 길목에서도 망설임 없이 달렸다. 소호는 방향을 틀 때마다 눈앞에 무언가 우뚝 나타날 것 같아 두어 번 몸을 움찔거리며 멈추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앞서 달리던 도현이 담벼락을 넘어가고 있었다. 소호는 그 경쾌한 몸놀림이 부담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멍청한 장난을 되풀이하는 기분이었다. 담벼락을 마주한 소호의 움직임은 우물쭈물했다. 높아서가 아니라, 부끄러움이 밀려들어서 그랬다.
둘은 작은 공원에 다다랐다. 소호는 담 두어 개 넘어간 것만으로도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초조한 듯 두리번거리던 도현은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산책로 외곽으로 소호를 이끌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 구석에서 깜빡이는 빨간 점과 함께 녹화 시간이 표시되고 있었다. 도현은 가로등의 백색 빛을 쬐고 있는 배드민턴 코트를 가리켰다. 저길 찍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촬영을 멈추면 안 됨을 강조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무 뒤에 숨은 소호는 이게 전부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영상을 찍고만 있으면 끝이냐고.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를 응원해줘.”
소호는 숨죽인 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도현이 코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도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자 상대방은 당장 넘기라는 듯 손짓했다. 소호는 그것만으로도 화면 속 둘 사이의 위계를 파악했다. 위축된 건 누가 보아도 도현 쪽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건네지 않자, 둘 사이의 분위기는 금세 험악해졌다. 물론 그건 일방적이었다. 상대방은 도현과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다가갔다. 뒷모습만으로도 도현이 눈을 내리깔고 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상대방이 목소리를 점점 높였다. 소호에게도 몇 마디 정도가 들렸다. 물론 별 내용 없는 욕설이었다. 도현이 뺨을 맞은 건 그때였다. 짝, 하는 선명한 소리에 소호는 조금 흥분했다. 상대는 담배를 내놓으라는 듯 도현에게 손을 들이밀었다. 도현이 담배를 내놓는 것으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길어질 거였다. 도현은 담배를 내놓지도, 그렇다고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완전히 굳어버린 듯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상대는 강제로 도현의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는 태도였다.
어느새 소호는 진심으로 도현이 무언가를 보여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몸집은 도현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몸집뿐 아니라 종합적인 느낌이 그랬다. 둘은 사실 거기서 거기였는데 그들 자신만 모르는 듯했다. 도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한 방 먹일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그 이상도 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도현이 상대에게 박치기를 먹이는 순간에 소호는 오, 하고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져 나온 소리로 감탄했다. 주머니를 뒤지느라 무방비했던 상대가 코를 움켜쥐었다. 문제는 도현이 거기서 다시 굳어버린 것이었다. 순식간에 자빠져 상대에게 깔린 채 얻어맞기 시작한 뒤에야 손을 뻗어 머리채를 잡는 등 저항하는 도현이었지만 상황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서로 너무 흥분한 탓이었을까? 도현 위에 올라타 있던 상대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도현이 한 손으로 상대를 밀어내고 다른 손으론 코트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래, 좀 해봐, 그대로 밀면 된다고… 소호는 바닥을 짚은 도현의 팔이 꺾이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 중얼거렸다. 뒤늦게 자세를 고친 상대가 온몸으로 짓누르려 했다. 소호는 애써 버티는 도현을 보며 이상한 전율에 휩싸였다. 소호는 그 둘이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 공원까지 뛰어다니느라 아무 설명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실랑이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관계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듣지 못한 덕에, 도현의 움직임은 간절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화면 정중앙에서 상대와 뒤엉킨 도현이 불빛 아래서 힘을 겨루는 모습은 음악이 사라진 무대에서 펼치는 안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꽤 버틴 도현이었지만, 힘이 전부 빠졌는지 결국에는 다시 상대에게 짓눌리고 말았다. 소호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다시 아래로 깔린 도현은 일 분 정도 더 맞았다. 상대 역시 지쳐 있어서 심각한 상황이 되진 않았다. 느릿느릿 주먹을 들어 내리치는 반복에 불과했다. 더러운 꼴을 보았다는 듯 도현을 내려다보던 상대는 두어 번의 발길질을 끝으로 공원을 떠났다.
코트에 홀로 남겨진 도현은 조명이 꺼지길 기다리는 배우처럼 한참을 누워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암전도 박수도 없었으나 바라보는 소호는 있었다. 두세 번 휘청거리며 다가온 도현은 전부 찍었느냐고 물었다. 도현이 입을 열 때마다 피가 묻은 이빨이 언뜻 보였다. 소호는 핸드폰을 도현에게 넘겼다. 도현은 바로 편의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괜찮지만 물류 기사를 기다리게 하면 곤란하다면서. 풀린 다리 탓인지, 담벼락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가로등이 멀쩡하게 솟은 아스팔트 도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둘은 걷다 뛰었다 다시 걸으면서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미 도착한 물류 기사가 도시락과 빵을 담은 플라스틱 상자를 잠긴 문 앞에 쌓아두고 있었다. 기사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도현에게 뭐라 툴툴거린 다음 트럭을 타고 떠났다. 편의점으로 들어간 소호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손을 떠는 도현 대신 빵과 도시락을 정리했다. 손님이 오면 구석으로 피할 셈이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도현과 실랑이를 벌였던 상대는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고등학생인 건 아니고, 수시로 개설과 삭제를 반복하는 SNS 계정으로 처음 만났을 때는 중학생이었다. 어느 날 아이는 딱 한 번 담배를 정가에 팔 수 없냐고, 나머지 금액은 다음 거래 때 얹어주겠다며 애걸복걸한 적이 있었다. 그 애걸복걸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도현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도현은 그게 둘 사이의 마지막 거래일 줄 알았다고 했다. 애당초 서로 다시 만날 이유가 없는 사이니까. 그러나 이듬해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다시 도현에게 연락해 담배를 구매했다. 다음에 주겠다던 돈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채였다. 도현은 문득 불길해졌다. 아이가 돈을 얹어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가 도현을 대하는 태도 탓이었다. 머지않아 도현은 확신했다. 아이가 자신을 얕잡아보고 있다고. 그리고 자신은 아이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외상은 안 되느냐며 아이가 요구했을 때, 도현은 저도 모르게 승낙하고 말았다. 담배가 급하니 어서 구해 오라는 재촉에도, 받지 못한 채 쌓이는 외상에도 따지지 못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됐다. 도현은 자신이 어떤 시간에 멈추어 버렸다는 생각에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즈음에 화제가 된 소호의 직캠을 본 거였다.
“네 영상 보면서 내가 뭘 느꼈는지 알아? 사람이란 변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거였어. 그렇잖아? 지금의 너처럼….”
그러나 소호는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도현을 괴롭히며 느꼈던 즐거움이 낯설어졌다고 그걸 변화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었다. 그건 잠깐의 시절에 불과했다. 감기에 걸렸다 낫듯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실이 밝혀질 필요는 없었다. 공원에서 몸싸움을 벌인 두 사람의 사연처럼,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잘하고 시시해지는 법이니까. 그런 사실 따위는 공백 아래로 던져두는 게 나았다. 소호는 도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아직 사인을 덜 했으니 공책을 달라고 했다. 눈이 동그래진 도현은 계산대 아래에서 꺼낸 공책을 내밀었다. 소호는 다시 사인을 시작했다. 그 사인은 회사에서 만들어 준 것으로, ‘소’의 모음의 끝을 길게 늘여 만든 둥근 동산에 미소를 지으며 떠오르는 해를 그리면 그것이 ‘호’가 되는 식이었다. 그 대책 없이 해맑은 사인을 연습하는 건, 모양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속이 뒤틀려지는 느낌에 익숙해지기 위함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주 능숙하게 해의 미소까지 그린 소호는 그전에 쓰지 않았던 문구를 덧붙였다.
항상 응원할게요!
마지막 페이지까지 사인을 마친 소호가 공책을 내밀었다. 도현은 공책을 펼쳐 한 장 한 장 넘기며 사인을 확인했다. 그건 여태 보인 도현의 모습 중에서 가장 느리고 신중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 공책을 덮은 도현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서는 소호와 자신의 모습을 아무렇게나 찍기 시작했다. 기념사진이라기보단 소호와 자신의 모습을 한 화면에 집어넣기 위한 행위에 가까웠다. 소호는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끝나지 않았음에 충격을 받으며 도현을 바라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던 도현은 지금이 몇 년도 몇 월 며칠 그리고 몇 시인지를 과장하여 발음하기 시작했다. 동영상을 찍는 거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소호의 중학교 동창 이도현입니다. 저는 오늘 소호에게 정중한 사과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끝난 일입니다. 혹시 다른 누군가가 이 일을 폭로한다면 그것은 저희끼리 잘 마무리한 일을 다시 꺼내는 일이 될 겁니다. 어쩌면 제가 폭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저와 소호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닙니다. 제 감정 기복으로 인해 약속을 어기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짓에 불과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초코맛 츄러스 과자는 이번 달 오리온에서 나온 신상품입니다. 때문에 이 영상은 조작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소호를 비난하고 있다면 이 영상을 보고 멈추시길 바랍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소호에게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



소호는 모텔 전화에 잠에서 깼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 화면을 켰다. 퇴실 30분 전이었다. 손에 든 것은 자신의 핸드폰이 아니었다. 소호는 누가 옆에서 자는 게 아닌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다른 이의 흔적은 없었다. 소호는 뒤늦게 그 핸드폰이 도현에게 받은 공기계임을 기억해 냈다. 도현은 유튜브에 올렸던 영상들과 관련된 것들 전부를 세상에서 아예 지워 버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며 자신과 소호의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됐음을 알리는 영상을 찍은 공기계를 소호에게 건네준 거였다. 거기에는 자신이 담배를 판매했다는 증거도 있다고. 도현은 만약 자신이 그 영상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폭로한다면, 거기에 담긴 사진과 영상들을 이용해 역으로 자신을 매장시키라고 당부했다. 사진첩에는 도현이 말한 증거로 가득했다. 도현이 담배 판매를 위해 만든 SNS 계정부터 스스로 담배 거래 과정을 촬영한 영상, 편의점에서 소호와 찍은 사진, 그리고 소호와의 문제를 해결했음을 설명하는 영상까지…. 소호는 도현이 마지막으로 건넨 말을 기억해냈다.
“나를 믿지 마. 나라면 절대 안 지울 거야.”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도 소호는 공기계에 담긴 사진과 영상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 추잡한 기록을 들추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무언가 빠진 듯했다. 모든 사진과 영상을 확인한 소호는 공기계에서 무엇이 빠졌는지 알아챘다. 바로 소호 자신이 촬영한, 도현과 고등학생이 공원에서 벌인 몸싸움을 찍은 영상이었다. 주로 핸드폰 화면을 통해 보았던 그 광경을 떠올리는 소호 곁으로 누군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혹시 소호 아니예요?”
소호는 공기계 화면을 껐다.
“맞죠? 혹시 사진 부탁드려도 될까요?”
다가온 여자를 바라보던 소호는 창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확인한 뒤 알겠다고 했다. 사진을 찍은 여자는 지금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부적으로 삼고 싶다면서 응원을 담은 사인을 부탁해도 되는지 물었다. 물론이라고 답한 소호에게 여자는 자신의 문제집 맨 앞장을 펼쳐 내밀었다. 소호는 자연스레 다음과 같이 사인했다.
소호
항상 응원할게요!
저기요… 저기요…? 여자의 당황한 얼굴을 본 소호는 그제야 자신이 문제집을 너무 강하게 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문제집의 표지가 구겨져 있었다. 뒤늦게 손에 힘을 뺀 소호는 여자에게 연신 사과했다. 여자는 괜찮다고, 자신도 항상 응원하겠다고 답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소호는 서둘러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퇴하는 풍경과 겹쳐진 얼굴이 보였다. 서울까지는 이제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박동현
작가소개 / 박동현

1994년생. 2021년 대산대학문학상 등단.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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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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