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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목丘木

  • 작성일 2023-04-07
  • 조회수 1,509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소설(단편)]




구목丘木

지혜

그 여자가 찾아온 건 이사하고 두 계절이 지났을 때였어요. 어느 날 오후 깜빡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어요. 텅 빈 뱃속에서 허기가 몰려왔어요. 그즈음 배가 자주 아프곤 했는데 신랑은 배 속에 회충이 있는 게 아니냐며 약을 챙겨 먹으라는 게 아니겠어요? 어린애도 아니고 회충이라니. 농담이 아니라 살집이 늘어난 나를 은근히 비난하는 것 같아서 남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는 말이 맞다 싶더라니까요. 진심은 때론 그럴듯한 가짜 속에 묻히는 법이잖아요.

냉동실을 뒤져 육수와 만두를 꺼냈어요. 불꽃 소리와 함께 가스레인지가 켜지는 모습을 보자 무리를 해서라도 인덕션을 설치할 걸 후회가 밀려왔어요. 가스가 몸에 나쁘잖아요. 가뜩이나 조심해야 할 것투성이인데 집안에서도 매 끼니마다 위험을 마주해야 한다니…. 왜 살림은 매번 바꿔도 눈에 차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였을 거예요.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는 허기가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부유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집에 먹을 게 끊긴 적은 없었거든요. 저는 또래보다 키도 몸집도 컸는데 쉬지 않고 먹어 대는 습관이 있었어요. 자꾸 입에 뭘 넣고 싶더라니까요. 집에는 제철 과일이며 말린 과육, 생과자와 술빵 같은 주전부리들이 마를 날이 없었어요. 엄마는 내가 외할머니를 닮아 키가 크려 한다고 했지만 저는 제가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잖아요? 꼭 위장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 쌓인 흙을 본 거예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마당은 온통 나만의 차지였어요. 그곳에는 제가 원하는 모든 게 다 있었어요. 봉오리 진 무궁화, 축축한 진흙, 개미굴을 숨긴 나무뿌리, 작은 웅덩이와 무성한 이끼들. 세상의 습하고 어두운 모든 것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더 좋아요. 이 집처럼요. 집은 영혼이 쉬는 곳이라는데 그러려면 마당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파헤칠 흙 하나 없는 집에서 어떻게 사람이 편히 쉴 수 있겠어요? 비록 마당 아래 뭐가 묻혔는지 알 수 없을지라도 말이에요.

공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곳곳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잔재들이 남아 있었고 마당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정원을 꾸미다 남은 커다란 판석은 부러진 빗자루와 금이 간 독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어요. 한동안 인부들이 들락거리더니 집안은 엄마의 취향대로 완벽하게 바뀌어 있었어요.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판석 가장자리에 난 푸르스름한 이끼가 소보로빵에 올려진 부스러기 같아 군침이 돌던 건 생각나요. 그 아래 숨겨져 있을 살찐 개미들도. 개미들. 나의 새까만 친구들. 당신에게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겠죠? 지금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요?

이끼는 네모난 판석과 둥그스름한 장독대를 지나 흙이 쌓인 바닥으로 이어졌어요. 꼭 푸른 그림자 같았어요. 어쩌면 개미들이 지나다니는 길일지도 모르는. 나는 어느새 판석 앞으로 다가가 이끼 위로 손을 뻗었어요. 축축한 융단 같은 게 꼭, 사촌의 짧은 머리카락처럼 뾰족하고 따뜻했어요. 검붉은 흙 위에 초록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빛나는 그것들이 마치…. 저는 이끼를 한 움큼 집어 입속으로 집어넣었어요. 미식거리던 속이, 텅 빈 뱃속이, 내 몸이 그것들을 원하는 것 같았죠. 허기는 어디에서 올까요? 엄마 말대로 키가 크려고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나는 파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어요. 일렁이는 배 속을 메울 방법은 오직 무언가 목구멍으로 집어넣는 것뿐이었죠. 그때 나는 커다란 혀였을지도 몰라요. 어린아이만 한 내장 덩어리 말이에요. 저는 계속 입으로 흙을, 이끼가 묻은 부스러기들을 집어넣었어요. 그거 아세요? 흙을 오래 씹으면 무말랭이처럼 알싸한 단맛이 난다는 걸요. 사탕도 과자도 아닌 날것의 식감. 옛날 사람들은 나무뿌리 같은 걸 캐서 먹었다는데, 당신도 그런 적이 있나요? 옛날에는 흙이나 돌을 끓여 먹었을지도 모르잖아요. 하여간에 그건 확실히 특이했어요. 제가 먹어 본 어떤 음식보다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어요. 나중에는 씹지도 않고 흙을 마구 삼켰어요. 뱃속으로. 그 검고 아름다운 흙무더기를 말이에요. 얼마나 집어먹었는지 나중에는 배가 부풀어 발등을 절반이나 가릴 정도였어요. 요즘도 허기질 때면 그때의 메슥거림과 알싸한 쓴맛이 떠올라요. 그 맛을 다시 보려고 지금껏 매일 요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사는 타운은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접근성이 그리 좋지 않지만 한 번 들어오면 좀처럼 이사 가는 사람이 없대요.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부동산을 끼고 임장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한번은 웬 유튜버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다 어느 집 마당에 함부로 들어간 적도 있어요. 경찰이 오고 집주인과 유튜버가 싸우고 난리가 났었죠. 결국 타운 입구에 cctv를 늘리고 남자들이 조를 짜 시간마다 타운을 돌아다니기로 했어요. 신랑은 동네 남자들과 시간을 보낼 핑계가 생겨서인지 흔쾌히 방범조에 자원했어요.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타운 안에서 커뮤니티에 속하느라 열심이었죠.

그즈음 저는 신랑과 돌담을 올리는 문제로 자주 다퉜어요. 지난 장마 때 울타리 한쪽이 무너진 이후 고치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믿을 만한 업체를 알아보고 견적도 받았지만 도무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어요. 신랑은 허물어진 울타리를 세우고 니스 칠을 하는 것으로 수리를 끝내길 바랐어요. 타운에 어느 집도 돌담을 올리지 않았고 나무로 된 울타리가 더 보기 좋아서라나요. 저는 그럴수록 더욱 높은 돌담을 올려야 한다고, 누구나 함부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야트막한 울타리가 아니라 바깥과 집을 구분할 수 있는 완전한 경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제가 태어난 곳에선 밭과 밭 사이에 돌을 올려 이웃과 내 밭을 구분하는 담이 있었어요. 담이라기엔 낮고 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경계 말이에요. 그곳에는 유명한 특산물들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많은 건 단연 돌이었어요. 구멍 난 돌, 바스러진 돌, 돌집, 돌무덤과 해변, 어딜 가나 돌, 돌덩이들 뿐이었죠. 나중에는 그게 다 먹을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니까요. 하여간 돌담들 때문일까요, 예쁘고 보기 좋은 펜스가 아니라 단단한 게 필요하다고, 울타리를 바꿔야 집이 더욱 특별하고 아름다워질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허기로 뒤집힌 배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뭐라도 집어먹던 때처럼요.

우리가 사는 집은 지어진 지 사 년 된 타운하우스로, 이 집을 구했을 때 기뻐서 눈물이 났어요. 결혼한 지 팔 년 동안 남의 집에 사느라 슬슬 매매를 알아보던 차였죠. 남편과 타운을 둘러보고 돌아오던 날, 우리는 충동적으로 차에서 섹스했어요. 무척 오랜만이었죠. 인적이 드문 지하 주차장의 적막 안에서 어째선지 한없는 안도감이 드는 거예요. 내 집이 생겼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이 그렇게 너그러워질 수 있다니. 처음 보는 집인데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어요. 마치 전생의 내가 살던 곳이었던 것처럼.

잠시 후 육수가 끓어오르자 만두를 집어넣었어요. 만두는 건너편 집에 사는 매희 언니가 준 것이에요. 매희 언니의 집에는 전국 각지에서 보낸 온갖 식재료가 냉장고와 팬트리에 가득했어요. 곳곳에 사는 매희 언니의 친척들이 거리와 비용을 마다하고 새롭고 진기한 것들을 보내왔거든요. 사실 언니는 식도락엔 그리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발레리나처럼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 큰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마치 은퇴한 연예인 같은 느낌이었지만, 사실 언니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상냥하고 우아한, 이 아름다운 타운에 어울리는 사람이지만 어딘가 선을 긋는 타입이랄까요. 타운이 조성될 때부터 대표단이었던 매희 언니네 부부는 주기적으로 사람들을 불러 저녁을 대접하거나 각종 모임을 주도했어요. 만두는 언니네 고향에서 친척이 직접 만든 건데, 저에게 절반이나 줬지 뭐예요. 고맙게도. 손만두는 시중에 파는 것보다 두 배 가까이 크고 무거웠어요. 투명한 만두피 너머 잘게 썬 숙주와 두부, 생선 살이 들어가 무척 독특한 향이 났어요. 언니네 고향 특산물인 생선이 들어간 만두였죠. 하나도 비리지 않고 무척 맛있답니다. 당신도 이 맛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냄비에서 올라온 김이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피어올랐어요. 허기가 심해질수록 배 속을 채웠던 그 맛이 떠올랐어요. 나의 검붉은 흙더미들. 당신은 그 맛을 알지도 모르겠네요. 거실 창밖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마당이 보였어요. 화원에서 사 온 잔디가 모자라 마당은 들짐승이 헤집어 놓은 황무지 같았죠. 누군가 일부러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요. 사실 그건 신랑 때문이었어요. 마당에 나무를 심겠다고 돌멩이를 빼내고 구덩이를 파는 신랑을 보며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어요. 신랑이 집의 유일한 정원을 망쳐 놓는 모습이 말이에요. 땀을 뻘뻘 흘리며 땅바닥을 부수고 파헤칠 때면 뭐든 완벽해 보이는 그에게도 서투른 부분이 있다는 걸, 헤집어진 마당을 보면서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그때 누군가 울타리 밖에서 마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어요. 저는 비명을 지르며 손에 든 국자를 떨어뜨렸어요. 벌어진 울타리 사이로 사람 한 명이 드나들 만한 틈이 있었는데 낯선 사람이 우두커니 서서 집 안을 바라보는 게 아니겠어요? 처음 보는 젊은 여자였어요. 여자는 제가 있는 집이 아니라 마당을, 거기서 뭐라도 발견한 양 바라보고 있더군요. 꼼짝도 않고 마당 구석 어딘가를, 커다랗고 텅 빈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어요. 거실 창은 굳게 닫혀 있었고 저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여자를, 창밖 풍경을 바라봤어요. 단지 우두커니 선 그 모습을요.

여자는 카키색 카고바지와 몸에 달라붙는 분홍색 줄무늬 폴로 셔츠를 입고 어깨에 비스듬하게 베이지색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어요. 어째선지 그 모습이 조금 위태로워 보이더군요. 타운은 대중교통으로 다니기 어려운 곳에 있었는데 여자는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걸까요? 길 가다 훌쩍 방문할 만큼 교통이 좋은 곳이 아니거든요.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곳도 아니고요. 한 시간에 두어 대 있는 버스를 타고 긴 진입로를 걸어 이곳으로 들어온 걸까요? 여자의 시선 끝엔 남편이 만든 구덩이들이 묫자리처럼 파헤쳐져 형체를 알 수 없는 출토물들과 뒤섞여 있었어요. 마당에 수많은 작은 무덤이 생기다 만 것 같았죠. 저는 충동적으로 마당으로 나가 여자에게 말을 걸었어요.

“집 구경하시게요?”

타운 입주를 원하는 사람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다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듯이―시세가 얼마인지, 관리비와 난방비는 얼마나 나오는지, 치안과 방법은 어떤지―저는 자연스럽게 행동했어요. 여자는 제 말을 못 알아들은 듯 저를 빤히 쳐다봤어요. 어째선지 여자에게 도움을 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내가 뭘 원하는지 아는 건 무척 어렵잖아요. 때론 다른 사람 덕분에 내 진정한 소망을 알 수 있기도 하니까요. 저는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고 싶어졌어요. 왜인지 그 집을 구할 즈음의 나날들이 떠올랐거든요.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리고 이사를 결심하기까지 고생하던 나날들 말이에요. 그때 저는 심한 생리통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처녀 때 생긴 근종이 십 센티미터나 커져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뱃속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세포가 자라고 있었던 거예요. 쓸모도 없는 장기…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했어요. 그곳에 뭐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저는 그게 어릴 적 버릇, 그러니까 배 속에 집어넣은 것들이 이때껏 남아 근종 같은 세포로 변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미칠듯한 허기가 지금의 내 몸을 만든 것이라고 말이에요.

“죄송합니다, 지나가다 집이 예뻐서 그만….”

여자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어요. 그 모습은 방금까지 소름 끼치게 남의 집을 바라보던 사람이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사촌 자매처럼 보였어요. 사촌들, 나의 친정 식구들. 그들을 본 지 무척 오래되었다는 사실에 돌연 마음이 서글퍼졌어요. 그 때문일까요, 저는 여자를 집안으로 초대하고 싶어졌어요. 대문을 열고 망설이는 여자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어요. “괜찮아요. 차 한잔해요.” 여자가 우물쭈물하다 천천히 마당 안으로 발을 들였어요.

“동네가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볼 게 별로 없어요. 집 구하시나 봐요?”

나는 아껴 뒀던 다기를 꺼내 차를 우렸어요. 차는 매희 언니의 단골 다원에서 주문한 것인데, 향이 좋고 우아했어요. 좋다는 건 값비싸다는 것이죠. 저는 여자에게 차 한 모금이 얼마인지 알려 주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대접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여자는 어물거리며 거실로 들어온 뒤에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어요. 나는 얼려 뒀던 쿠키 반죽을 오븐에 굽고 레이스가 달린 테이블보를 꺼내 거실 탁자 위에 놓았어요(그건 사 놓고 세 번도 쓰지 않은 새것이었어요). 그리고는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여자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물었죠. 이 근방에 사는지, 매매 혹은 전세를 찾는지, 그 집에 살 가족은 몇인지 등등. 혹시 아이가 있는지 물어보려다 여자가 거북해하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어요. 여자는 무척 앳돼 보였거든요. 잠시 후 여자가 숨을 고르고 속삭이듯이 말했어요.

“제가 손금을 보는데요….”

“손금이요?”

“네. 봐 드릴까요?”

손금이라니, 그런 걸 본 게 대체 언제였을까요? 대학생 때 학교 앞에서 타로점을 봐 주던 카페가 있었죠. 맛집이 많은 여대 앞에서 유독 인기가 많은 곳이었지만 어쩐지 저는 관심이 가지 않았어요.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심리 테스트도 싫어했거든요. 내 속을 대체, 얼마나 더 알아야 하는 걸까요? 속이라면 지긋지긋한데. 내가 퍼먹은 흙이 쌓인 배 속의 구덩이, 그것들을 꼭 봐야만 알겠어요?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갖고 싶은 것만 많던 끔찍했던 나날들 말이에요. 여자는 제 침묵을 긍정이라고 받아들였는지, 덥석 내 손을 잡더니 손바닥에 코를 박듯 고개를 숙였어요. 여자의 콧김이 손바닥에 닿아 간지러웠어요. 여자의 손은 작고 마디가 짧았는데 감촉만은 무척이나 부드러웠어요. 한 번도 노동을 겪어 본 적 없는 아이의 손처럼 말이에요. 하마터면 그 손을 쓰다듬을 뻔했지 뭐예요.

“태양선과 수성선이 뚜렷하네요…. 기운이 되게 좋으세요. 그런 소리 많이 들으시죠?”

나는 의외의 말에 여자를 쳐다봤어요. 사실, 딱 한 번 사주를 본 적이 있어요. 뭐라더라, 저한테 불의 기운이 많다고 했어요. 오행의 다섯 자리가 모두 불이라고, 너무 좋거나 너무 위험하다고.

“좋은데 기운이 고여 있어요.”

“어떻게요?”

“평소에 잠을 설치시나요?”

저는 여자가 콜드리딩을 하는, 한마디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어요. 육수 냄새가 풍기는 넓은 집 한가운데 몸집이 큰 창백한 여자라니, 너무 쉽잖아요. 엄마와 외할머니, 외할머니의 엄마 그 엄마까지 외가 여자들은 모두 피부가 하얬는데 특히 푸르스름한 정맥이 손목이나 목에 도드라지는 편이었어요. 어릴 땐 그런 외모가 내심 자랑스럽기도 했죠. 무언가 특별한 피가 섞인 것 같잖아요. 당신은 어떤가요? 피부가 까무잡잡한지 투명한 편인지, 점과 주름은 얼마나 많은지. 전 여자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하고 싶어졌어요.

“아뇨? 전혀요.”

“낮잠은요? 시도 때도 없이 졸거나 하진 않나요?”

“오히려 잠이 없는 편이에요. 깨어 있는 시간에 할 일이 너무 많아서요.”

고개를 돌려 거실을 둘러봤어요. 너른 평수에 비해 세간이 없는 건 남편과 제 취향이었어요. 몰딩을 없앤 새하얀 벽과 바닥, 무늬 없는 시폰 커튼, 창문 너머 보이는 마을의 풍경과 재개발 중인 신도시까지. 비슷비슷한 하우스들 사이에 놓인 그 풍경이 우리가 갖기로 한 가장 중요한 살림이었거든요.

여자가 제 손을 잡고 골몰하는 사이 잠시 고민했어요. 매희 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여자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어요.

“배 속 어딘가, 그러니까 위장이라든가 창자, 간, 음… 아니다, 자궁… 그래요. 자궁 같은 곳에 꼭, 거기 뭐가 뭉쳐 있어요. 피 같기도 하고 흙 같기도 한… 배 속에 진흙 같은 게 잔뜩 있는데 그게 꼭, 이 집 마당에 있는….”

여자가 고개를 들어 거실 창밖을 바라봤어요. 덱 너머 울타리가 휘어진 마당 구석에 흙더미와 돌멩이들이 전쟁터의 잔해처럼 여기저기 쌓여 있었어요. 그 모습이 꼭 흙으로 범벅이 된 어릴 적 내 배 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가 이렇게, 고여 있을 수도 있으세요.”

여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명치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그냥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빙글빙글 맴을 돌더니 이 부근에요, 라고 하는데 그게 꼭… 나한테 주문을 거는 것 같았어요. 주문이라니, 나는 미신 같은 건 믿지 않아요. 점도 괘도 손도 날도 모두 나한텐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도 여자의 손길을 꼭 내 속을 헤집는 것 같았어요. 마치 흙으로 가득 찬 배 속에 손을 집어넣은 것처럼. 언젠가 들었던 사주쟁이의 말이 떠올랐어요. 불의 기운이 과한 사람은 제 명에 살기 어려워요.

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 와중에도 여자는 제 왼손을 꼭 쥔 채였죠. 그즈음 뱃속 근종이 일 센티가 더 자라 가까운 시일 내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어요. 배 속에 흙이 아니라 주먹만 한 세포가 자라고 있었지만 나는 오랫동안 근종에 대해 잊어버렸고 그러다 보면 진짜 없어져 버릴 거라 믿으면서, 그것들을 모른 척하고 있었거든요. 세상엔 기억하지 않으면 잊히는 일들이 많잖아요. 마치 당신처럼요.

“나가 주세요. 신랑이 올 시간이라.”

나는 고개를 돌리며 쌀쌀맞게 말했어요. 여자가 값비싼 도자기를 내려놓듯 내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테이블 위에는 아무도 마시지 않은 차가 식은 채 놓여 있었죠. 아까워라. 여자가 저 차를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면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나는 여자가 거실을 빙 둘러 현관으로 나갈 때까지 꼼짝도 않았어요. 나는 여자를 반갑게 대해 줬는데 어떻게 함부로 내 속을 헤집어요, 예의 없게. 불쾌함이 여자가 말한 피처럼 몸속에 고인 것 같았어요. 여자는 처음 집 앞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대문 밖으로 나가더니 마당을 한번 쳐다보고는 골목 사이로 사라졌어요.

여자가 나간 뒤 집안의 모든 창과 문을 열었어요. 바깥 공기가 들어와 집안을 채우고 마침내 신선함만 남을 때까지, 여자가 두고 간 께름직함이 어서 사라지길 기다렸어요. 육수는 다 식어 있었고 만두는 속이 터져 형체를 알 수 없는 건더기가 국 표면에 둥둥 떠다녔어요. 나는 국을 퍼 쉬지 않고 먹었어요. 허기가 다시 나를 잠식했어요. 냄비 바닥이 보일 때쯤 마당의 울타리 한쪽이 삐걱거리더니 바닥으로 쓰러졌어요. 생명이 꺼진 껍데기처럼. 조만간 저 나무판자들을 없애 버려야겠다고, 높고 단단한 담을 올려 아무도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튼튼한 묘목 한 그루를 심어야겠어요. 묘목이 자라 아름드리 거목이 될 때까지. 그때까지 이 집에 오래도록 있어야겠다고.

당신이 출토된 곳을 지키겠다고 말이에요.


며칠 후, 신랑은 평소처럼 동네 남자들과 술판을 벌이고 새벽 늦게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날 아침에 시내 병원에서 검진을 하고 온 터라 저는 무척 피곤했어요. 이제 의사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지금 당장 입원을 하고 근종을 빼내자고 했어요. 의사들이 그 수술에 대해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감자를 캔다고 해요. 크고 작은 근종이 세포벽에 구황작물처럼, 뿌리처럼 이어진 모습이 마치 감자 같아서요. 배 속에 감자라니,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 기분이 좋아져요. 내가 마치 감자를 키우는 쓸모 있는 땅덩어리가 된 것 같잖아요. 사실 수술을 할 생각은 없었어요. 저희 엄마도 사십 년 동안 십 센티가 넘는 근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순간에 사라졌거든요. 엄마는 고희연 전날 밤에 요강이 넘치도록 오줌을 싸더니 그날 새벽 응급실로 실려 갔어요. 온갖 검사에 ct를 찍고 나니 의사가 그러더군요. 배 속이 깨끗하다고.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신체를 치유하거나 완벽해지는 능력이 생기는 걸지도 몰라요. 저는 엄마에게서 태어났으니 그 성질 또한 비슷할 거예요. 내 몸에 감자가 자라고 있다면 그 또한 스스로 사라질 거라고.

“누가 왔다 갔어?”

남편이 소파에 널브러져 물었어요. 누구 말하는 거야? 저는 짜증스럽게 대답했어요. 술자리가 늘면서 남편의 주사 또한 다양해졌는데 어쩐 일인지 술이 늘지는 않더라고요. 참 이상하죠. 처음 만나던 때와 달리 신랑은 점점 무던하고 평범한 삶에 자신을 맞춰 가고 있었어요. 타운하우스 입주를 제안한 것도, 이 고리타분한 시골에서 살자고 한 것도 모두 그였으니까. 저는 남편의 옷을 벗기며 일부러 여기저기 손톱자국을 남겼어요. 저번처럼 목덜미와 손목 부근에 립스틱 자국을 묻히고 왔나 유심히 살피면서요. 남편이 어느 연놈들과 놀아나든 솔직히 상관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한 사람만 사랑하겠어요. 아니, 사랑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겠어요. 이제 저에게는 당신이 있으니까요. 비밀을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재산을 가졌다는 말, 당신은 이해하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마당에서 흙을 고르고 있는데 처음 보는 노인이 대문 앞에 서 있었어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 마치 도인처럼 생긴 할아버지가요. 노인은 마당 안을 기웃거리더니 저와 눈이 마주치자 살포시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어요.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저는 깜짝 놀라 그에게 물었어요.

“누구세요?”

“어떻게 이런 데서 살고 있어?”

저 넝마주이 같은 이가 뭐라는 거죠. 지금 뭐라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노인이 타운에 사는 주민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당신도 같은 동네에 살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어요. 한낮의 골목에는 인적 하나 없었지만 무섭지는 않았어요. 곳곳에 cctv가 있었거든요. 여차하면 소리를 질러도 되고요.

“뭐라고 하셨어요?”

“사람이 살 데가 아닌데, 쯧쯧.”

노인은 혀를 차며 뒷짐을 지고 집 안을 기웃거렸어요. 저는 뭐냐고, 무슨 소리냐고 날카롭게 물으려다 참았어요. 어쩌면, 그러니까 치매나 무슨 병에 걸린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 노인의 행색이 특별히 초라한 건 아니었지만 평범한 모습도 아닌 것이…. 노인은 마치 개화기 시대 사람처럼 남색 두루마기를 두르고 뒷짐을 지고 있었어요. 그가 신은 낡은 등산화에 눈이 가자 더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럴 때 방범대는 뭘 하는 걸까요? 아무나 동네를 돌아다니도록 비싼 돈을 주고 관리하는 게 아니잖아요.

“할아버지, 그냥 가세요.”

“내가 아는 데 소개해 줄까?”

잘 아는 데가 있어. 노인이 주섬주섬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웬 명함을 꺼냈어요. 명함에는 ‘기 풀어 드립니다 사주 택일 궁합 작명’이라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어요. 저는 명함과 노인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괜찮다고 말하고 도로 건넸어요. 노인이 혀를 차며 저를 딱하게 보더니 한마디 했어요.

“자네 고집이 참 세구만.”

그러더니 골목 저편으로 걸어갔어요. 그 후 노인을 다시 본 적은 없어요. 그건 꿈이었을까요? 방범용 cctv가 있으니 노인의 인상착의를 확인하고 동네에 알리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그냥 나의 비밀, 그러니까 이곳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비밀이 생겨난다는 말이에요. 신랑에게 다 말하지 않는 나만 아는 어떤 일들이.

신랑을 침대에 눕히고 마당으로 나갔어요. 멀리 떨어진 가로등 빛이 골목 사이에서 빛나고 창문마다 흘러나온 빛이 별처럼 반짝였어요. 며칠째 매희 언니네 집만이 깜깜했어요. 친정에 갔다는데 어디 여행을 갔을지도 모를 일이죠.

나는 마당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인 수석 앞에 쪼그려 앉았어요. 조경용으로 벽돌을 사러 간 가게에서 덤으로 준 것들이었어요. 돌들은 색과 모양이 제각각이라 원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신랑에게는 너무 크고 복잡했어요. 어려운 돌들. 한번은 어디서 뭘 보고 온 건지 연못을 만들겠다고 하지 뭐에요? 연못은 공짜로 생기는 줄 아나? 신랑이 또 집안을 망쳐 놓을 생각을 하면 몸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어요. 아무렇게나 쌓인 돌들을 바닥으로 하나씩 내려놓았어요. 무덤을 파헤치듯이, 제 손길은 거침이 없었죠. 한참 동안 돌을 옮기자 재가 뿌려진 것 같은 회색빛 바닥이 드러났어요. 석회가 떨어져 흙 위로 전분 같은 가루가 눈처럼 쌓인 것이었죠. 손으로 문지르자 평평한 바닥이 드러났고 잠시 후 당신의 머리가 보였어요. 털과 피부가 벗겨진 단단한 정수리가.

처음 당신을 발견했을 때가 기억나요. 그날도 신랑이 헤집어 놓은 마당을 저 혼자 치우고 있었죠. 한여름처럼 뜨거운 햇살이 내리쬈고 저는 곧 땀범벅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돌인 줄 알았어요. 신랑이 미처 꺼내지 못한 바닥에 박힌 돌. 삽으로 흙을 퍼내는 데만 한참이 걸리더군요. 원래 비밀은 깊은 곳에 있잖아요. 얼마나 지났을까, 저는 그게 평범한 돌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무언가 단단하고 강력한 게 그곳에 묻혀 있다는 걸 알았죠. 값비싼 수석이나 화석이면 어쩌지? 짧은 시간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군요. 원목처럼 딱딱하지만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장갑 위로 낯선 가루가 꽃가루처럼 묻어 있었어요. 잠시 후 손가락에 무언가 잡히자 힘껏 들어 올렸어요. 마치 새털 같은 무언가가 두 손가락에 걸려 지상으로 올라왔어요. 여기저기 구멍이 난 당신의 머리뼈였어요.

그때 시간은 저를 통과해 저만치 앞서 나갔어요. 나만 그곳에서 주위가 변하는 모습을 온전히 느껴 버렸죠. 시간이 멈췄다는 말이에요. 저도 모르는 새 비명이 터져 나왔어요. 무언가 손에 집히는 것들을 마구 던졌던 것도 같아요. 딱딱하고 오래된 몸. 어째서 내 집 마당에 해골이 있는 걸까요? 머리가 있다는 건 어딘가에 몸도 있다는 뜻일까요? 마당 한가운데 주저앉아 당신이 나온 구덩이를 멍하니 쳐다봤어요. 신랑에게 알려야 하는데, 아니. 그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가 마당을 헤집어 놓는 사이 당신의 일부를 조금도 본 적이 없을까요? 사람이 너무 놀라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에요. 그때 어째선지 오래전 퍼먹던 흙이 떠올랐어요. 험한 날씨에 배를 탄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어요. 풀과 묘목으로 가득 찬 마당은 물과 이끼로 축축했어요. 그러나 식욕 같은 건 조금도 느낄 수 없었죠.

나는 천천히 당신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어요. 딱딱하지만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촉감. 동시에 차가운 무언가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잘못인 걸 알면서도 입안에 흙을 퍼넣던 어린 날처럼. 나는 부드러운 공을 굴리듯 당신의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훑다가 잠에서 깬 듯 흙을 파냈어요. 파내고 또 파내고, 가까운 곳에 삽과 도구들이 있었지만 이건 오직 나의 손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념했어요. 오직 나의 손으로 나머지 당신을 파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그날 하루 종일 마당을 파낸 뒤 당신의 뼈 일부를 찾았어요. 당신이 있던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뼈들은 부러지고 삭아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기 어려웠어요. 저는 그것들은 몇 번 쓰다듬다가 다시 땅속으로 집어넣고 흙을 덮었어요. 그 위로 당신의 머리뼈를 올린 뒤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자그마한 둔덕을 만들었어요. 나의 비밀이 묻힌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집으로 들어왔어요.


여자가 다시 찾아온 건 며칠 뒤였어요. 업자들이 견적서를 가져오고 마당 입구를 재고 간 뒤였죠. 결국 울타리는 돌담으로 바꾸기로 했지만, 제가 원하던 높이는 아니었어요. 신랑은 업체에서 가져온 샘플 사진을 보더니 흔쾌히 마음을 바꾸었어요. 아는 형네 집 현관과 비슷하다나. 그가 그럴 때마다 반가운 건지 화가 나는 건지 모를 감정이 솟구치곤 했어요. 남의 편과 나의 편. 나는 언제쯤 그의 온전한 편이 될 수 있을까요?

대문을 열고 마당 안팎을 치우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요. 고개를 돌리자 며칠 전 왔던 그 여자가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깜짝 놀라 손에 든 빗자루를 고쳐 쥐고 여자를 쳐다봤어요. 기분 탓인가, 그 사이 여자는 뭔가 달라 보였어요. 한껏 정돈한 머리를 하나로 묶고 주름 하나 없는 재킷에 단정한 치마를 입고 있었어요. 어디 면접이라도 가는 것처럼요.

“무슨 일이세요?”

“저… 이거 드세요.”

여자가 파란 비닐봉지를 건넸어요. 안에는 새까맣게 익은 무화과가 들어 있었어요. 세상에.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무화과거든요. 잘 모르지만 선악과가 무화과라는 얘기도 있잖아요. 그만큼 매력적인 과일이라는 말이죠. 일 년에 한 계절만 먹을 수 있는 작고 향기로운 열매. 꽃과 열매가 한 몸인 달콤한 과육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침이 고였어요. 저는 반갑고도 의아한 마음에 봉지를 들고 우두커니 서서 물었어요.

“이걸 왜… 잘 먹을게요.”

주는 걸 마다할 수는 없잖아요. 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바닥 비질을 마저 끝냈어요.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지나가더군요. 저 여자는 왜 또 온 걸까? 우리 집에 볼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여자는 제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몇 발자국 떨어져 제 뒤에 서 있었어요. 잠시 후 저는 마당 안으로 들어갔어요. 여자를 쳐다보자 우물쭈물하더니 결국 따라 들어왔어요. 여자를 집으로 들이는 일은 첫 번째보다 훨씬 쉬웠어요.

여자와의 두 번째 만남은 처음과는 다르게 무척 즐거웠어요. 여자는 손금이니 기운이니 하는 것 없이 제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화를 이어 나갔어요. 오랜만에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귄 것 같았죠. 신랑도, 매희 언니도 없는 타운은 적적하기 그지없거든요. 여자는 타운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소도시에 사는 대학생이었는데, 휴학을 하고 본가에 머물고 있다고 했어요. 타운이 생기기 전 주변 일대에 대해 아느냐고 하면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어요.

“여기가 예전엔 전부 마을이었거든요. 제 친척들이 살던….”

“그래요? 그건 몰랐어요.”

여자가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어요. 저번에 여자에게 대접했던, 그 향기로운 차였죠. 저는 여자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여자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어요. 무척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거든요.

“무슨 생각이 있어서 온 건 아니에요. 그냥 돌아가신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말은 반칙이에요. 여자는 조금 울먹거렸어요. 그런 말을 듣고도 매정하게 군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죠.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지만, 아니에요. 그 순간 여자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나는 알 수 있었어요.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이 동네에 뭐 볼 게 있다고 오겠어요? 투자 목적으로 집을 둘러보거나 유튜브를 찍으려고 온 것도 아닐 텐데. 저는 깨끗이 씻은 무화과를 반으로 잘라 여자에게 건넸어요.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와도 돼요.”

여자가 눈물이 맺힌 얼굴로 저를 쳐다봤어요. 의외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감동한 얼굴 같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여자는, 이곳에서 살던 어릴 적 추억을 만나러 온 것이었어요. 자세한 얘기가 없어도 저는 알 수 있었어요. 그 얼굴은 고향을 떠난 나의 모습과 같았거든요. 새 삶을 찾아 낯선 곳으로 떠났지만 고단함과 그리움을 피할 수도 없는 삶 말이에요. 타운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살고 있었지만 그것에 관해 자세히 얘기한 적은 없었어요. 나도, 남편도, 매희 언니도.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태어난 곳을 떠나서만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난 곳을 그리워해야만 할까요? 그런 상태를 뜻하는 단어가 세상 어딘가에는 있을 거예요. 혹시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그리움과 원망, 미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이방인의 마음을 뜻하는 말 말이에요.

여자가 화장실로 간 사이 소파에 놓인 여자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아주 잠깐, 여자의 가방을 열어 볼까 고민했어요. 저번과 같은 베이지색 크로스백은 여자의 단정한 옷차림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어요. 문득 이제는 쓰지 않는 가방을 여자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엠씨엠이나 코치같이 유행은 지났지만 여전히 쓸 만한 가죽 가방들 말이에요. 생각난 김에 가방을 꺼내 두려고 드레스룸으로 향했어요. 드레스룸은 침실 옆 화장실 맞은편에 있었어요. 여자가 화장실 안에서 불편할까 싶어 재빨리 지나치는데 문이 열려 있더라구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 문을 살짝 잡아당겼어요. 이상하게도 안에서 아무 기척이 없더군요. 저는 살짝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어요. 여자가 있어야 할 화장실 안이 텅 비어 있었어요. 화장실은 누가 다녀간 흔적 없이 깨끗하기만 했어요.


당신은 알고 있죠? 그렇죠?


그날 저녁 경찰이 집에 왔어요. cctv를 확인하고 동네를 수색하고. 신랑이 내내 제 곁에 있었지만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어요. 저는 혹시 여자가 어디서 잠이 들었거나 사고가 난 걸까 봐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어요. 해가 진 뒤 창밖에 어둠이 가득 찼을 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죠. 여자가 모르고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말이에요. 골목 입구에 달린 cctv에는 정확히 나를 따라 집으로 들어오는 여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어요. 무화과가 든 파란 봉지를 건네는 모습도요. 먹다 남은 무화과와 아무것도 없는 낡은 크로스백, 현관에 놓인 검은 단화가 여자가 남긴 흔적 전부였어요. 그날 늦게까지 경찰이 집에 머물렀지만,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어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하세요.” 저는 경찰관의 연락처가 적힌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직감했어요. 이 집에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웃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말이에요.


그 후에도 몇 번 낯선 사람들이 다녀갔어요. 명함을 줬던 노인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고 카메라를 든 유튜버가 집 앞에서 라이브 방송을 해 경찰을 부르기도 했어요. 경찰이 오기도 전에 유튜버는 사라졌지만요. 유튜버는 그때 우리 집 앞에서 무슨 말을 한 걸까요? 한적한 소도시의 타운하우스에서 생긴 미스터리, 뭐 그런 소문을 들은 걸까요? 그러나 아무도, 여자가 우리 집에 왔다는 사실에 대해 묻지 않았어요. 여자가 산다는 본가에도, 여자의 친척들이 있었다는 이전 마을에 대해서도 저는 알지 못했어요. 경찰은 여전히 조사하고 있다고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무척 힘든 상황이라고 했어요. 신랑은 저에게 무슨 일이었냐고, 계속해서 물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다 했는걸요. 누구보다 궁금한 건 바로 저였으니까요. 여자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정말 내가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요? 거실 테이블 위에는 여자가 먹다 만 무화과 조각이 깨문 자국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여자가 들어간 줄 알았던 일 층 화장실뿐 아니라 이 층 화장실, 침실, 드레스룸, 서재, 부엌, 뒷마당과 베란다 집 안의 모든 곳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여자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마치 꿈을 꾼 것 같았죠. 결국 여자의 가방을 열었을 때 저는 여자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여자의 가방 속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제 정말 당신밖에 없어요. 당신은 알고 있죠? 그렇죠?


여자가 여전히 집 안에 있다는 걸 나는 알아요. 나는 더 이상 집 밖을 나가지도, 매희 언니를 만나거나 사람들을 초대하지도 않아요. 매희 언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도 더는 하지 않게 되었죠. 단지 집 안 어딘가에 있는 여자의 흔적을 쫓아 매일매일, 마당을 파고 집 안을 청소하며 시간을 보내요. 가끔 여자는 자신이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듯이 정돈되었던 식탁이나 정원, 거실 테이블 위를 보란 듯이 어질러 놔요. 저는 그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여자의 흔적을 치워요. 왜 이제야 왔냐는 듯이, 잘 지냈냐고 물어보듯 말이에요.

때때로 여자가 당신을 찾아온 건지,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아니 그건 확실해요. 그래서 여자는 이 집에 왔을 테니까요. 그럴 때마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허기처럼 몸속을 잠식했어요. 나는 딱 한 번, 마당의 흙을 퍼 가장 좋아하는 접시에 올려 그것들을 입 안에 넣고 음미한 적이 있어요. 예전만큼 강한 허기도 메스꺼움도 나를 괴롭히지 않지만, 오직 입속의 혀만이, 모든 걸 맛보겠다는 나의 혀가 원한 일이었으니까요. 그 안에 당신의 일부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흙은 어째선지 달콤하고 조금 짰어요. 축축한 풀과 마른 뿌리, 죽은 벌레가 알싸한 향을 내며 입안을 가득 채웠어요. 당신의 맛은 생각보다 짜고 차가웠어요.

신랑은 언젠가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가 다른 곳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해도 괜찮아요. 나야말로 이 집에서 혼자가 아니니까요. 여자는 해마다 어디선가 무화과를 가지고 와 거실 테이블이나 식탁 위, 혹은 침실 입구에 두고 가요. 나는 그가 가져온 것들은 맛있게 먹어 치우죠. 나는 비로소 이 집에 이사 온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진정한 내 편을 찾았거든요. 비록 볼 수도, 이야기할 수도 없지만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어요. 당신도 알고 있죠? 그렇죠?

작가소개 / 지혜

2018년 ≪경향신문≫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0년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AnA Vol.1』, 『사라지는 건 여자들뿐이거든요』, 『N분의 1을 위하여』 등에 참여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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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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