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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우물

  • 작성일 2023-08-11
  • 조회수 2,378

   검은 우물

   최웅식



   수술이 끝나 수술실에서 나온 황 노인은 소리를 질렀다. 전신마취가 풀리지 않은 상태여서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아들인 현수가 어렴풋이 보이자 황 노인은 자신을 묶은 사람들을 고발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현수에게 이 병원에 데려와서 자기를 죽이려 했냐고 따졌다. 현수는 수술 잘되었다고,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라는 말로 황 노인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이동침대에 실린 황 노인이 6인실로 갔다. 현수 어머니는 멍하니 황 노인을 가끔 쳐다볼 뿐이다.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서서 현수에게 말했다. 환자가 물을 먹고 싶다고 하면 물을 묻힌 거즈로 환자의 입술을 두드리라고, 많이 아프다고 하면 진통제를 투여하는 버튼을 눌러주라고 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황 노인은 아이고, 라는 말을 외쳤다. 황 노인이 아파, 아파, 라는 말을 연이어서 하자 현수는 링거 줄을 잡고 링거 줄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진통제가 황 노인의 손목으로 이어진 줄을 타고 혈관으로 들어갔다. 황 노인은 상체를 좌우로 뒤척거렸고 천장을 주시하기도 했다.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또다시 자신을 죽이려 했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옆 침대에 있는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현수에게 다가와 수술하다가 무슨 문제가 생긴 거 아니냐고 물었다.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자신의 남편이 잘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현수는 6인실인데,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수술은 잘되었다고, 좀 기다리면 조용해질 거라고 응수했다.

   황 노인은 불타는 집에 있었다. 천장을 장악한 불길이 나무로 된 기둥을 타고 사방으로 번졌다. 황 노인은 아이였다. 아이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기둥에 옮겨붙으며 집을 활활 태우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불은 뱀의 날름거리는 혀처럼 아이 앞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져 갔다. 아이는 저 불이 자신을 덮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만히 서 있었다. 밭을 태우는 불이 아이의 머리에 떠올랐다. 어른들이 해묵은 풀을 모아 한곳에서 태우면 풀 냄새가 났다. 아이는 멍하니 사방에서 몰려오는 불을 쳐다보기만 했다. 문득 이 집을 누가, 왜 태우려고 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어른을 찾았으나,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쉬기가 불편해서 콜록거렸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두 손이 나타나 아이를 안았다. 아이는 그 두 손이 누구의 손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을 안은 사람이 남자라고 생각했다. 

   사내의 두 발이 움직이자 아이가 출렁거렸다. 연기를 헤치며 뛰는 달음박질은 재빨랐다. 아이를 두 팔로 감싼 사내가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와 바닷가 쪽으로 달렸다. 아이의 집을 뒤로하고 바다 냄새가 나는 곳으로 뛰었다. 

   사내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커졌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내의 등 때문에 아이는 덜렁거렸지만 사내는 그때마다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느영 나영⋯. ”

   아이를 감싼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을 구한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어른들이 자신의 집을 왜 불태웠는지, 집에 있는 할머니는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사내는 뛰는 속도가 느려지지 않게 발에,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는 죽창이나 총을 든 사람이 마을을 돌아다닌 것을 보았다. 무장 경찰들은 총의 뾰족한 끄트머리로 누군가를 찌를 듯 마을 사람들을 위협했다. 그들에게 발각되면 사내는 처형당한다고 생각했다. 해안가를 뒤덮은 물안개가 보였고 사내와 아이는 물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두껍게 깔린 물안개는 그들을 감추어 주었고 젖은 공기가 사내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사내는 물안개 속에서도 미친 사람처럼 뛰었다. 몸으로 형체 없는 안개를 밀어내며 앞만 보고 뛰었다. 

   사내의 발걸음이 아이를 저 멀리 데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사내의 등 너머로 불타는 집을 보려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안개를 간혹 흩트렸지만 이내 안개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안개 속에서도 뜀박질하는 사내의 발소리가 아이에게 선명하게 들려왔다.


   황 노인은 허공에 손으로 빗금 두 개를 그어 ‘X’라는 글자를 썼다. 주먹을 쥔 손에서 검지만 세워 허공에 연신 ‘X’를 그려냈다. 그는 앞이 흐릿하게 보였고 안개 속에 서 있는 것처럼 몸이 축축했다.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눈, 휘둥그레진 검은 눈동자가 시계추처럼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불덩어리가 자신의 장기를 태우는 것 같아 황 노인은 몸에 달라붙은 불을 끄고 싶었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검은 눈동자가 위로 쏠렸다. 황 노인의 눈에 흰자위만 보이자 현수 어머니는 그의 손을 잡았다. 황 노인은 그 손이 자신을 안은 손이라고 생각했다. 거센 손, 자신을 부둥켜안은 손,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자기를 어깨 위로 올렸다가 다시 꽉 잡는 손. 그 손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를 쫓아오는 발들이 수두룩했다. 환한 빛이 들어오는 빈방에 자신이 덩그러니 놓였다. 방에 들어온 사람들이 자신을 침대에 묶고 쳐다보았다. 기다란 칼을 든 사람이 그 칼로 자신을 내리 찔렀다. 

   너무 아프다고 황 노인이 말하자 현수는 진통제를 투여하는 버튼을 다시 눌렀다. 15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어 진통제가 줄을 따라 내려오지 않았다. 아프다는 말을 허다히 들어 버튼을 너무 많이 누른 듯했다. 

   황 노인은 맥락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커튼이 있었고 칼잡이들이 칼을 자신의 몸에 박아 넣었다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도 했다. 현수 어머니는 현수에게 네 아버지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초조해했고, 현수는 암호 같은 황 노인의 말을 들으며 그 말의 뜻을 추론했다. 현수가 생각하기에 칼잡이들은 칼을 든 의사를, 아이는 수술실 문 앞에서 서성거렸던 러시아인 부부의 아이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보호자 대기실 벽에 걸려 있는 스크린에서 수술 중이라는 황 노인과 황 노인 이름 밑에 있는 러시아인 이름을 보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인 부부는 수술실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서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현수는 수술실 문과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난간에 기대 창 바깥, 저 멀리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수술 시간이 길어지자 그들에게는 상황을 잘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곧 의사 한 명이 그들에게 다가가서 영어로 대화했다. 수술 시간은 네 시간을 넘어섰고, 수술실에서 집도했던 의사가 나와 러시아인 부부에게 뭐라고 설명했다. 통역하는 다른 의사가 집도했던 의사의 말을 듣고 아이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듯했다. 러시아인 부모의 안심한 얼굴은 아이의 수술이 결국 잘되었다는 말을 드러내 주는 것 같았다.

   황 노인이 목마르다고 해서 현수는 거즈로 그의 입술을 적셔주었다. 황 노인은 당분간 물과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수술 후 세 시간 안에 잠이 들면 안 되기에 현수는 황 노인에게 계속 말을 걸어야 했다. 현수는 황 노인에게 자신이 누군지 계속 물어봤고 현수 어머니도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자기가 누구냐고 소리를 높였다. 황 노인은 또다시 손가락으로 허공에 엑스를 두세 번 더 그려냈다. O, X 표시 중 X를 보여주는 이유가 현수는 궁금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무엇을 항의하고 싶은 걸까. 신우암에 걸린 황 노인의 왼쪽 신장을 하나 잘라냈을 때 의사가 보호자를 불렀고 현수는 수술실 앞에서 의사의 말을 들었다. 협착이 되지 않아 신장 잘 떼어 냈다고, 요관과 방광 일부만 잘라내면 수술은 끝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현수는 의사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요관과 방광 일부를 잘라냈을 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아버지가 온전한 의식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았다. 혼미한 정신을 걷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냥 기다리기만 해도 되는지, 현수는 걱정이 되었다.

   현수는 전화기로 담당 간호사에게 아버지의 상태에 대해 말했다.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와서 황 노인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황 노인에게 물었다. 자신이 누군지 알겠냐고 말했을 때 황 노인은 아프다고 했다. 수술실에서 진통제 많이 맞고 왔다고, 아프지 않을 거라고 간호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황 노인은 수술이 잘 안되어 아프다는 말을 내뱉었다. 간호사는 수술 잘 안되었으면 중환자실에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있다는 건 수술 잘된 거라고, 황 노인을 안심시킨 후 다시 병실에서 나갔다. 현수는 병원 복도에서 담당 간호사에게 진통제가 들어가는데 아버지가 왜 계속 아프다는 소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담당 간호사는 수술 후에 이런 일이 종종 있지만, 주치의한테 전화를 걸어 다시 환자의 상태를 점검해 보겠다고 했다. 간호사는 주치의에게 전화했고 현수는 통화 내용이 궁금했다. 섬망이라고, 좀 더 기다려 보자는, 주치의의 말을 간호사가 현수에게 전했고 현수는 섬망이 뭐냐고 다시 질문했다. 간호사는 전신마취된 후 깨어났을 때 나이가 많으신 분들에게 환각 증상이 심한 예도 있다며, 그것을 섬망으로 부른다고 답변했다. 한두 시간 기다리면 증상이 없어질 거라며, 만약 증상이 사라지지 않으면 주치의가 자신에게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병원에 기록된 황 노인의 나이는 77세였다. 황 노인이 아이였을 때 많이 아파서 태어난 지 2년 지나고 출생신고를 했기에 그의 실제 나이는 79세, 같은 병실에 있는 사람 중에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황 노인은 수술하기 전, 편지지 아홉 장에 자신이 살아온 내력을 적어서 현수에게 건넸다. 그 편지는 일종의 유서였고, 현수는 그 편지를 읽었다. 황 노인의 아버지는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이 빗물에 쓸려가서 죽자 재혼하여 육 남매를 낳았고, 육 남매 중 다섯째가 황 노인이라는 내용으로 편지가 시작됐다. 막내는 세 살 때 폐렴으로 죽었다고 쓰여 있었다. 현수는 아버지의 글을 읽으며 그의 삶을 그려 봤다. 모여 앉은 식구들 앞에 고구마가 가득 든 양푼이 있었는데 고구마가 금방 없어져 간신히 한두 개만 먹어 배가 안 불렀다는 아버지. 시골에 살면서 돈을 조금씩 모아 송아지를 2만 3천 원에 사서 기뻤다던 아버지. 키운 송아지를 6만 8천 원에 팔아 부모의 도움 없이 결혼 자금을 마련했다는 아버지. 먹고 살기 힘들다며 자식 하나만 낳았던 아버지. 돈을 벌기 위해 밀항을 한 후, 일본에서 5년 동안 육체노동을 했던 아버지. 육체가 자산이라며 거의 매일 팔굽혀펴기 50개를 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자신이 죽는 걸 예상하고 자신의 삶을 편지에 정리해 놓으려 한 것 같았다. 그런데 편지에 적힌 내용 중에 ‘1948년 4.3⋯ 여수 14연대 不當 不履行’이라는 글자가 현수의 눈에 띄었다. 줄임표로 표시된 것과 한자로 된 부당 불이행, 즉 부당하므로 이행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수는 궁금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었으나 수술 때문에 심리적 안정이 필요한 아버지에게 현수는 생략된 내용과 한자에 관해 묻지는 않았다. 편지의 마지막 장에는 두 의사의 동일한 소견, 암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던 내용이 있었다.

   현수와 현수 어머니는 자신들의 이름을 황 노인에게 말해주며 자신들이 누군지 계속 물어봤다. 황 노인은 죽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현수 어머니는 네 아버지 곁에 저승사자가 온 것 같다며 네 아버지를 데려가려 하는 것 같다고 현수에게 말했다. 황 노인은 갑자기 집이 불타고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현수 어머니는 현수에게 네 아버지가 계속 헛소리하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떻게 하냐고 그녀는 노심초사했다. 현수는 간호사를 다시 불렀다. 간호사는 다시 그들 곁으로 왔다. 간호사는 엄지와 검지로 황 노인의 눈을 짚고 크게 뜨게 했다. 자신이 누군지 알겠냐고 물으니 황 노인은 간호사의 상의에 달린 명찰을 잡고 뚫어지게 쳐다보고는 간호사의 이름을 또박또박 읽었다. 그 행위는 혼미한 정신에서 벗어나는 청신호였다. 황 노인은 더는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지 않았다. 현수는 황 노인에게 자신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황 노인은 현수라고, 황, 현, 수라고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했다. 현수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도 아냐고 황 노인에게 말했을 때, 그는 황현수 엄마가 자신의 아내라고 대답했다.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는 증상 때문에 황 노인은 제주도 K 병원을 찾아가서 CT를 찍었다. 의사가 전화로 서울에 있는 현수에게 CT에서 암으로 보이는 악성종양이 보이는데 신장암인 것 같다고 했다. 현수는 제주도에 있는 또 다른 병원, G 병원에도 찾아가서 의사 소견을 한 번 더 들어보라고 황 노인에게 말했다. 의사 소견은 같았다. 황 노인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현수는 요즘 의료가 많이 좋아져서 암에 걸려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황 노인의 걱정을 덜어주고자 했다. 현수는 황 노인에게 서울로 올라와 치료하자고 했다. 

   현수는 신장암을 잘 고친다는 명의를 찾았다. 암과 싸우는 친구들이라는 카페에 가입했는데, 카페에서 신장암 수술을 했던 환자들이 J를 수술을 잘하는 명의로 손꼽았다. J는 암환자에게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는 친절한 의사라는 환우의 말이 현수에게는 인상 깊었다. 현수는 J가 쓴 ‘신장암 제대로 알고 치료하기’라는 책도 구매해서 읽었다. J가 근무하는 병원에 연락해 진료 예약을 잡았다. 

   황 노인이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현수는 황 노인을 차에 태웠다. 그들은 S 병원으로 가서, 황 노인이 갖고 온 진료소견서와 CT 사진이 저장된 CD를 접수처에 제출한 후, J 교수를 만났다. J는 CT를 보여주면서 오줌이 모이는 부분을 신우라고 하는데 그 신우에 종양이 보인다고, 신우암 초기로 1기 아니면 2기일 것 같다고 너무 근심하지 말라고 했다. 현수는 신장암이 아니냐고 했고, J는 신우암이라고, 신우는 신장 가운데에 있다고 했다. J는 왼쪽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고, 현수는 선생님이 신장암에 관해서 쓴 책도 다 읽었다고 수술을 잘해 달라고 당부했다. J는 자신이 쓴 책을 읽었다는 말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J는 환자가 나이가 많으니 로봇 수술로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 황 노인은 부당하다는 말을 작게 내뱉었다. 현수가 황 노인에게 로봇 수술로 하면 보험이 적용 안 되니 수술비가 많이 나온다고, 병원에서 로봇 수술을 많이 권한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장암에 대해 두 권의 책을 읽은 현수는 신장 한쪽 전부를 제거하니 복강경 수술로 해도 로봇 수술과 차이가 별로 없지 않으냐고 J에게 물었다. J는 그 말이 맞다고 했다. J는 복강경 수술로 황 노인의 신장 하나와 요관, 방광 일부분을 적출했다.


   제정신을 찾은 황 노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했다. 수술실에서 나온 황 노인이 현수에게 말한 첫마디는 자기를 죽이려 여기에 들여보냈냐는 것이었다. 황 노인이 현수에게 건넨 그 말을 전하자 황 노인은 미안하다고 했다. 현수는 아버지를 살리려고 이 병원까지 온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때 현수는 침묵했다. 황 노인이 병실에서 지낸 첫날, 현수는 날을 샜고 틈이 날 때 휴대전화로 섬망을 검색해 봤다. 수술한 어떤 나이 많은 환자가 섬망 증상 때문에 수술실에서 나오자마자 보호자에게 침을 뱉었다는 글에 눈이 갔다. 현수는 그 글을 읽고 나서야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 노인은 빨리 회복하고 싶어 했다. 간호사의 조언대로 하루를 규칙적으로 꾸려 나갔다. 매일 병실 복도의 끝과 끝을 30번 이상 왕복했고, 폐가 쪼그라들지 않도록 숨을 들이마셔 인스피로메타 안에 있는 공 세 개를 허공에 띄우는 일을 자주 했다. 슬리퍼를 신고 복도를 너무 많이 걸어 황 노인의 발에서 피가 나왔다. 욱신거렸지만 발에 밴드를 붙인 후, 신발을 신고 또 걸어 다녔다.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가 3층에 산책하기 좋은 데가 있다고 해서 황 노인은 3층으로 갔다. 현수는 오줌 줄과 링거 줄이 걸려 있는 링거 거치대를 옆에서 잡고 동행했다. 많은 환자가 가운데가 비어 있는, 원형으로 되어 있는 바닥을 걷고 있었다. 황 노인은 다섯 바퀴를 돌겠다고 했다. 창문에 비가 내리꽂히고 있었다. 유리창으로 비가 오는 모습을 보며 황 노인은 아들과 나란히 걸었다.

   현수는 대학에 다닐 때 4·3에 대한 대자보를 읽은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4·3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커다란, 하얀 종이에 적힌 글을 보고 놀랐다. 10명 중에서 1명이 죽었다는 내용을 읽고 수업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미시경제학 수업을 듣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이 되었지만, 강의실에 가지 않고 대자보에 있는 내용을 곱씹었다. 커다란 대자보가 자신에게 말을 계속 건네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 현수는 비를 맞았다. 학생들이 그 대자보 앞을 무심히 지나쳐갔지만, 현수는 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는 전율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황 노인은 자신도 잘 모른다며 그리고 알려고 하지 말라며,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현수는 자신의 고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현수는 제주도의 4·3 진상을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 같은 제주도 사람이 왜 4·3에 대해 쉬쉬하는지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비가 조금씩 자신을 적시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 후 고향에 갔을 때, 친척들에게 간혹 4·3에 대해 물어봤고, 그 물음을 들은 친척 중 일부는 그 말을 꺼내지 말라고 했다. 현수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황 노인은 창문 너머로 내리는 비를 쳐다보았다. 1948년 어느 날,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그 날 때문에, 죽음이 자신 앞에서 어른거려도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죽으면 그 사건은 잊혀야 하는, 어느 가족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황 노인은 자신이 묻힐 때 그 사건도 묻혀야 한다고, 수증기처럼 증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누군가 그 사건을 알면 그 사건은 다시 누군가의 머릿속을 차지하게 될 것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부당하므로 불이행하겠다는 14연대 군인들처럼 행동했다면, 경찰과 군인들이 제주도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어겼다면, 황 노인은 그 끔찍한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온 아이, 황 노인은 동굴에서 살아야 했다. 동굴에서 떨리는 손을 얼굴에 갖다 대고 우는 여자가 있었다. 울음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며 그녀를 꾸짖었다. 소리가 나면 잡혀간다고 했고 그녀의 남편은 죄송하다며 그녀 입을 손으로 막았다. 동굴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이 천장의 어느 지점에서 모이고, 동굴이 물방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면 물방울은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아이인 황 노인의 머리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자 그는 졸다가도 잠이 깨버렸다. 사람들은 토벌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까 소리에 예민해졌다. 그들은 귀로 동굴 위를 더듬었다. 혹 무슨 소리가 들릴까 귀를 더욱 기울였다.

   동굴에서 불이 피어올랐을 때 그녀는 가끔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끝없이 울다 보면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되고,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으면 웃음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웃을 때 마을 사람들은 우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을에서 데려오지 못한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어린아이와 불타는 집을 생각했다. 

   우물 앞에서 그녀는 아기를 안았던 두 손을 내려뜨렸다. 그녀의 딸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엄마의 젖을 깨물기 좋아했던 아기의 두 눈에 물이 들어갔다. 딸을 우물에 빠뜨린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기를 에워싼 물이 아기의 두 눈과 코와 입으로 스며들었다. 아기는 울었고 순식간에 우물이 아기를 집어삼켰다. 아기는 물을 먹기 싫었으나 물을 먹어야 했다. 물을 내뱉으면 더 많이 입으로 들어왔다. 허둥대었으나 엄마의 자궁이 아니어서 헤엄을 칠 수 없었다. 우물에는 탯줄 또한 없었다. 우물 바깥에서 물에 잠긴 아기를 끌어당기는 방법은 없었다. 아기는 두레박이 아니었다. 아기가 우물 바닥으로 내려갔다. 다리로 우물 바닥을 밀었으나 여전히 우물 안이었다. 물속에서 딸은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본 엄마의 얼굴과 젖을 떠올렸다. 우물 바깥에서 자신을 봤던 엄마의 얼굴은 자기를 안고 젖을 먹였던 얼굴도 아니었고, 자기를 안고 활짝 웃었던 얼굴 또한 아니었다. 우물이 아기 엄마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했다. 아기는 엄마의 얼굴이 지닌 의미를 읽으려고 했으나 물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와 숨을 쉴 수 없었고 자꾸 눈을 감아야 했다.

   아기가 물 안으로 잠기자 그녀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우물이 다시 잔잔한 물살을 일으켰다.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 곡을 하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손으로 우물의 울타리를 내리쳤고 돌 모서리에 손이 긁혀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눈물로 젖은 눈으로 보는 우물은 흐릿했다. 우물에 그녀의 피가 몇 방울 떨어졌다. 

   육지에서 온 경찰이 제주도 사람을 빨갱이로 여기고 총으로 쏜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장 경찰이 쏜 총성이 황 노인이 아이였을 때 살았던 마을에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군화 소리가 이 마을에서 나면 이 마을도 끝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했다. 다른 마을에서는 서북청년단이 죽창을 들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찔렀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마을 사람 몇몇은 갓난아기 때문에 도망가도 다 잡혀 죽을 거라고 말했고 몇몇은 침묵으로 동조했다. 마을 사람들은 동굴에서 살자며 동굴에 항아리와 지슬과 고구마 따위를 넣기 시작했는데 미리 동굴로 간 몇 사람은 소리에 민감해졌고, 아기의 울음소리가 무장 경찰에게 발각되는 기척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아기 엄마는 동굴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기 엄마가 마을에 남으면 군인들이 그녀를 강간하고 집을 불태울 거라고 그녀의 남편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아기는 또 생기는 거라며 아기를 동굴에 데려갈 수는 없다고 집에 놓고 가야 할 것 같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딸 때문에 우리가 죽을 수는 없다, 마을 사람들도 죽게 할 수도 없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며칠 잠을 자지 못한 그녀는 급기야 아기를 우물 앞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아기를 우물에 버리고 동굴 속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검은 우물을 생각했다. 사람을 비추지 않는 우물, 아이가 물속으로 들어가 사라졌을 때 우물은 온통 검은빛을 띠었다. 검은 우물, 아기를 삼킨 우물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동굴에서 끙끙거리며 잠을 자다가 딸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 그녀의 남편이 그녀 입을 손으로 막으며 그녀를 깨웠다. 아기 엄마였던 그녀는 울다가 한참 동안 웃기도 했다. 그녀에게 지슬을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다. 영양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라며 자기가 먹을 음식을 그녀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마을로 돌아오자 몇 집은 불타버려 집을 잃은 마을 사람들은 다른 집에 얹혀살거나 움막을 지어야 했다. 그녀는 우물 앞으로 갔다. 우물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그녀는 마을 청년들에게 제지당했다. 마을 청년들이 팔과 다리를 잡아 그녀를 들었고 그녀는 버둥거리면서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마을 어른들은 잠수를 잘하는 사람을 우물 안으로 보내 아기의 시체라도 건져내려고 했으나 그 일을 자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레박에 묶여 있는 줄을 잡고 내려가 우물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도 있었으나 단지 말만 있을 뿐 누구도 그 일을 하지는 않았다. 우물에 있는 물을 빼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 또한 말뿐이었다. 아내도 잃을까 봐 무서운, 아기의 아빠였던 그는 아내를 가끔 방문에 줄로 묶어 놓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이로 줄을 끊고 우물곁으로 오는 것이었다. 우물은 피를 먹고 있었다. 이번에는 딸을 잃은 그녀 차례였다. 그때 아이였던 황 노인도 우물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였던 황 노인은 핏방울을 보았다. 아기 엄마였던 그녀 손에서 우물로 떨어진 핏방울, 금방 사라지는 핏방울과 줄 자국이 선명한, 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마을 사람들 몇몇은 죽창을 들고 마을 입구를 지켰고 몇몇은 그녀를 감시했다. 우물 주위에서 보초를 서거나 우물을 메우자는 의견을 낸 사람은 우물에서 딸을 잃은 아빠,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우물에 돌들을 떨어뜨리고 우물을 메우려는 모습을 그녀가 보게 된다면 완전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누군가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우물을 메우지 않기로 했다. 결국, 그녀가 우물 속으로 못 들어가게 하려고 마을 사람들은 우물 주위에 벽돌을 둥그렇게 성벽처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황 노인이 혼자 걸어 보겠다고 해서 현수는 우두커니 서서 아버지를 봤다. 현수는 환자복을 입은 아버지의 등과 걸음걸이를 바라봤다. 지난 추석 때, 아버지가 손녀의 손을 잡고 용눈이오름을 걸을 때가 생각났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아버지를 두드렸지만 매일 운동을 열심히 했던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흐트러짐 없었다. 현수는 아버지의 걸음에서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았다. 황 노인은 손녀의 작은 보폭에 자신의 속도를 맞추기도 하고 손녀 앞으로 다가가 몸으로 바람을 막아주기도 했다. 손녀가 오름을 올라가는 걸 힘들어하자 황 노인은 손녀를 안고 걸어갔다. 갈대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거렸는데 황 노인은 손녀를 안고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오름을 올라가는 황 노인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현수는 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딸을 자신이 안겠다고 했지만 황 노인은 옛 생각이 난다며 손녀를 조금만 더 안고 걷겠다고 했다. 숨이 차면서도 손녀를 부둥켜안고 한 발씩 걸어가는 황 노인의 등 너머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현수가 결혼한 지 9년 만에 생긴 아기를 황 노인이 처음 봤을 때 그는 아기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셌다. 손자를 원했던 황 노인이지만 아들이 결혼한 지 오랜 시간이 흘러 간신히 생긴 아이인지라 황 노인도 손녀를 귀하게 여겼다. 황 노인은 아들에게 빨리 나아서 손녀와 다시 오름을 걷고 싶다는 말을 종종 내뱉었다. 

   황 노인은 방귀가 나온다며 화장실로 갔다. 현수는 화장실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도했다. 조직검사 결과가 좋게 나와야 한다고, 어머니 말처럼 저승사자가 아버지를 데려가면 안 된다고 아버지가 손녀 크는 걸 몇 년 더 봐야 한다는 말을 혼자 웅얼거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황 노인은 아들에게 방귀 소리가 너무 컸고 방귀가 변기에 고인 물을 출렁거리게 했다고 했다. 화장실에 있는 사람은 다 들었을 거라고 농담도 했다. 배에 있는 수술 자국이 아물듯 황 노인은 수술하기 전의 걸음걸이를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현수는 병실에서 황 노인에게 4·3에 관해 물었다. 현수는 수술 당일 아버지가 불타는 집에 있었다며 소리를 질렀다고 하자 황 노인은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집에 있었는데 집이 불타버렸고, 다행히 누군가가 나타나 자신을 안고 바닷가로 뛰어가서 자신은 살았다고 말했다. 황 노인은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현수가 그 말의 뜻이 뭐냐고 묻자, 황 노인은 제주도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어긴 14연대 군인들처럼 군인과 경찰이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강조했다. 황 노인은 떠올리기 싫은 일이라고, 어렸을 때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며, 그 이야기를 더는 꺼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비가 왔다. 비는 며칠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굵은 빗줄기로 바뀌면서 빗줄기는 직선을 그으며 우물에 내리꽂혔다. 우물에 있는 물은 넘쳐서 길을 따라 흘러갔고 길에 있는 돌멩이들이 휩쓸려 떠내려갔다. 갓난아기를 우물에 넣은 그녀는 우물에서 나온 물의 흐름을 쫓았다. 그녀의 남편은 소를 끌고 지대가 높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소를 나무에 묶고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그녀를 만류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의 두 눈, 퀭한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고, 아내에게 괴기스러운 힘이 생겨 아내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소의 근심스러운 눈이 자기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줄기가 우물 옆에 있는 나무를 감아 천천히 휘돌아 나갔다.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흙과 섞여 물속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발을 잠기게 한 물이 간혹 그녀의 무릎을 때리고 지나갔다. 개천에서 흐르던 물도 원래 가던 길에서 벗어나 개천으로 들어온 작은 물줄기와 합류해 커다란 물줄기가 되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던 다리 위로 물줄기가 뻗어 나왔다. 물이 계속 모이자 물살이 빨라졌고,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거침없이 밀어냈다. 홍수가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나아갔고 물에 둥둥 떠 있는 물건이 늘어났다. 갓난아기의 엄마였던 그녀는 물살을 헤치기 시작했다. 허리를 굽혀 땅을 파헤치는 듯, 물속에 손을 넣고 허우적거렸다. 옷이 젖어 축축했으나 그녀는 뜨거웠다. 열기로 가득찬 그녀는 딸의 형상을 찾으려 했고, 물은 그녀의 무릎을 휘감았다.

   비가 싹 걷혔다. 어둠으로 덮인 사위도 물러가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몰려들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어 물을 증발시켰다. 마을 사람들이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을 찾았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마당에 있는 큰 돌부리에 우두커니 앉아 멍하니 허공에 뜬구름을 바라봤다. 축축한 공기가 그의 가슴팍으로 계속 밀려 들어왔다. 그는 우물에 빠져 죽은 딸이 엄마를 불러내기 위해 비를 쏟아지게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이 고인 흙탕물에서 그의 아내를 발견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다행히 바다 쪽으로 흘러가는 물살에 휩쓸리지 않아서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는 말이 그의 귓가에서 감돌았다. 아내는 거적때기에 돌돌 말려서 그에게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흙이 묻어 있었고 몇 개의 손톱이 부러져 있었다. 그는 마을을 진작 떠나야 했다며 아내의 두 눈을 감겼다.


   병원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황 노인은 옛 마을에 있는 우물이 너무 뚜렷하게 떠올랐다. 우물에 빠진 아기와 그 우물 곁을 맴도는, 아기의 엄마 곁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황 노인은 CT에 찍힌 신장도 오줌이 고여 있어 우물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 몸에도 우물이 있다며 화장실에서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황 노인은 수술 자국에 붙어 있는 밴드에 손을 갖다 대더니 불쑥 현수에게 말했다.

   “신장이 우물 가탐쩌.”

   “우물마씸?”

   “아니다.”

   “둥근 모양이니까마씨. 방광도 우물로 보이는데마씨. 오줌이 고여 있으니 우물로 보염수광? 아버지 신장 하나 없어져도 잘 살 수 있수다.” 

   현수는 수술 부위를 만지는 황 노인을 쳐다보았다. 현수는 신장 하나가 없어서 아버지가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황 노인은 혈뇨가 나왔을 때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을에 있었던 우물. 피에 섞인 우물이 불현듯 떠오르더니 그 후 검게 보이는 그 우물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아이인 황 노인이 살던 마을에는 몇 집이 불탔고, 집을 떠나지 않거나 떠나지 못한 노인들은 대개 죽었다. 황 노인은 젖먹이, 우물에 빠뜨려 갓난아기를 죽게 한 게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비가 오면 그 우물이, 검은 우물이 선명하게 떠올라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아기의 울음소리와 아기 엄마의 부르짖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9박 10일의 입원을 끝으로 황 노인은 퇴원했다. 조직검사가 나왔는데 신우암 초기였다. 의사는 추적 관찰이 필요하다며 3개월 후 황 노인에게 병원에 다시 오라고 했다. 현수는 CT와 혈액, 오줌, 방광 내시경 검사를 예약했다. 병원 바깥은 봄이었지만 쌀쌀했다. 현수는 황 노인과 자신이 겪은 시련이 꽃샘추위라 믿고 싶었다. 지나가면 그만인 추위, 아버지가 말하지 못하는 4·3이 결국 꽃샘추위로 여겨지기를 바랐다.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는 글자의 의미를 밝힌 것처럼, 몇십 년 전의 사건을 아버지가 가슴속에 묻지 않고 자신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냈으면 하는 소망을 품었다. 현수는 손녀를 보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더 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현수는 공항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배웅하며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버지가 늙은 나무라면. 현수는 늙은 나무에 다시 꽃이 피듯 아버지의 몸에도 꽃이 피어나기를 바랐다. 

   황 노인은 수술을 한 후 병원에서 4·3이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숨어 있던 기억이 나타나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은 자신에게서 끝나야 한다고, 우물에 관한 일을 발설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땅속에 가져가야 할 아픔이라고,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믿었다. 공항에서 황 노인은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봄이 온 것 같았다. 황 노인은 얼굴에 훅 밀려오는 봄바람을 느꼈다. 아직은 더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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