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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열전

  • 작성일 2023-10-13
  • 조회수 1,322

아파트 열전

김명진


   단언컨대 그녀는 적이었다. 

   거친 언어와 쏘아보는 눈, 흐트러진 머리와 집시 옷차림. 시도 때도 없이 보내는 막말 문자. 나는 그녀에게 2년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을 위해 그러지 않았으니까. 몸을 웅크리거나 숨지 않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했으니까. 


   오늘 아침 현 동대표회장을 아파트 정문에서 만났다. 

    ̄아, 회장님 그때 노민영이를 감옥에 넣었어야죠. 지금도 시청에 민원 넣고 저를 경찰서에 고소했습니다.

    ̄하하하, 잘 이겨 내세요. 우리 아파트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좀 참으세요.


   8년 전 나와 노민영은 서로 알지 못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이름을 들은 적도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그 당시 공동주택관리법이 바뀌면서 아파트 동대표들은 2년 임기에 연임만 가능하게 되었다. 덕분에 터줏대감으로 군림하던 동대표들이 무더기로 탈락했다. 그건 정책의 좋은 변화였는데, 나에게는 최악이 되었다. 아파트 입주 시부터 같이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나를 동대표로 추천했다. 내가 직장 일로 힘들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는 아파트동대표회장을 여성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TV 뉴스에 아파트 관련 비리가 많이 나오는데 사건을 부드럽고 공정하게 해결할 사람은 여성이라는 것이다. 며칠 후 현 아파트 동대표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502동 동대표를 지원한 사람이 최근 6년간 우리 아파트에 대한 민원 접수를 시청과 청와대 등에 100건이 넘게 한 사람이라며 그녀를 상대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기적인 삶을 산다고 은근히 나를 책망하고 공동체를 위해서 일 좀 하시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입주한 지 8년 동안 관리사무실 한번 안 가 본 나를 무심하다 나무라고…. 알고 지내던 사람마다 전화해서 나오라고 당부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지원서를 덜컥 내밀었다.


   [Web 발신] 조사를 위해 2015년 9월 20일 2시 출석 바랍니다. 출석이 안 될 시 수배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동민경찰서 수사과 경제2팀 수사관 이영식

   뭐지? 스팸 문자가 이제 경찰서까지 사칭하나? 나는 혹시나 하고 인터넷으로 동민경찰서를 검색했다. 홈페이지에 있는 조직도에 들어가자 수사과에 경제2팀이 있었다. 

    ̄수사과 경제2팀 이영식 수사관님 부탁드립니다.

    ̄네, 이영식 경위입니다.

    ̄9월 20일 출석하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잘못 보낸 건가요?

    ̄고소장이 접수되었습니다.

    ̄제가요? 무슨 일로요?

    ̄같은 아파트 노민영 씨가 낸 고소장입니다.


   나는 관리소장에게 지금 갈 테니까 6시가 넘어도 잠깐 기다려 달라고 전화했다. 어떻게 지하철을 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관리소장은 들어오는 나를 보고 일어섰다. 

    ̄노민영이가 관리사무실에 왔었어요? 지금 경찰서에서 전화 받고 바로 오는 길이에요. 저 고소당했다고.

    ̄회장님을요? 얼마 전에 와서 회의록, 회계전표, 공문을 복사해 갔는데… 요새는 좀 잠잠해서 이상하다 했어요.

    ̄그런 일이 있으면 저나 감사한테 알려 주셔야죠.

   나는 화를 꾹 참고 의자에 앉았다. 아파트동대표회의 두 감사에게 관리사무실로 잠깐 나와 달라고 전화하곤, 복사해 간 서류들을 보여 달라고 했다. 두 감사는 느릿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어, 소장님도 계시네. 칼퇴근하시는 분이….

    ̄최 감사님, 제가 노민영이에게 고소당했어요. 동민경찰서 수사과에서 전화 받았어요.

   둘은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동시에 말했다. 

    ̄무슨 일로?

   나는 노민영이가 복사해 간 서류들을 가리켰다. 변 감사는 일단 진정하라고 말한 후 내일 경찰서에 전화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출석 날짜와 시간을 조정하라고 일러 주었다. 우리는 노민영이가 복사해 간 서류를 쭉 훑어보았다. 정기적으로 하는 월례회의 공고문과 회의 결과 공고문, 수입·지출에 관한 전표들, 대내외적으로 발송하는 공문들이었다.

    ̄그동안 복사해 간 것이 이렇게 많아요?

    ̄그건 일부입니다. 노민영 대표가 502동 동대표가 되고 나서 복사해 간 것은 지난 5년간 전표 공문 회의록 등 엄청 많습니다.

    ̄소장님, 서류는 열람만 되고 아파트 주민들의 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복사는 안 된다고 동대표회의에서 의결되었잖아요?

    ̄노 대표 성격 아시잖습니까? 밤 10시가 넘어서 관리사무실에 와서는 야간 기전 팀 장 주임에게 소리 지르고 욕을 했답니다. 장 주임이 당장 그만두겠다고 해서 제가 노 대표에게 전화했습니다. 장 주임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내일 와서 복사해 갈 수 있도록 조치 취하겠다고 겨우 달랬어요. 저한테도 욕하고 소리 지르고. 제가 60이 다 되도록 그런 쌍욕은 처음 들어봅니다.

   시계에 눈을 고정한 채 소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장님, 퇴근하세요. 저희끼리 상의하고 가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을 나가는 소장을 보면서 최 감사는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소장 일이 아닌가? 

    ̄소장은 노민영이가 와서 한마디만 더하면 짐 쌀걸. 표정 봐요. 6기 아파트입주자동대표회의가 시작된 지 10개월 지났는데 소장님 두 분 그만두셨잖아요. 참 나… 관리소장이 알아서 하니까 할 일도 없고 회의만 잘하면 된다더니. 노민영이가 동대표로 나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서 지네들은 쏙 빠지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속인 거야. 기가 차네요. 내가 미쳤지. 귀 얇은 내가 미쳤다니까. 생전 가 보지도 않았던 경찰서까지 가게 됐으니. 

   두 감사는 내 푸념을 못 들은 척했다.

    ̄같이 경찰서 가실래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우리보다 소장님하고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관리소장은 아파트동대표가 회장을 고소한 사건에 관여할 수 없다며, 경찰서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두 감사에게 소장의 의견을 전화로 알려 줬지만, 그들은 별일 없을 거라고 위로하며 같이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 어쩌지 젠장.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회사 빌딩 옥상으로 올라갔다. 담배를 피우거나 담소를 나누는 직원들이 삼삼오오 서 있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 직원들 뭐가 문제일까? 경비실, 기전실은 문제가 없다. 일도 잘한다. 그런데 사무실은? 전산시스템이 다 갖춰져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고 서류도 엉망이다. 서류를 전산화하자고 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 양식까지 줬는데도 실행을 하지 않는다. 왜 안 하냐고 묻자 하는 데가 없단다. 월급이 적다고 하지만 근무시간 대비하면 박봉도 아니다. 

   회장이 되고 서류를 인수인계할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국토교통부 공동주택관리법과 지자체의 공동주택관리규약, 아파트 자체의 관리규약을 다 지켜야 한다. 상위법을 어겨도 안 되고 아파트 자체의 관리규약도 지켜야 한다고. 아니 정치판도 아니고 무슨 법이 이렇게 많아. 대통령이 법을 다 외우냐고? 각 부서가 알아서 해야지. 그러면 관리사무소가 해야지. 이것을 왜 아파트동대표회장이 해야 하냐고. 회장 책임은 왜 이렇게 커. 공동체에 대한 봉사? 개뿔. 개싸움에 내몰린 거나 다름없다. 나는 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과 동대표들에게 화가 났다. 엄격히 아파트도 3권 분립이 이루어져 있는데 관리사무실을 견제했어야지. 뭐 한 거야? 

   노민영의 지나친 행동은 두 세력을 끈끈하게 이어 줘 공동전선을 만들어 주었던 게 아닐까? 그랬을 수도.

   나는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서 일주일 뒤 가겠다고 말하곤 아파트의 서류를 몇 가지로 분류해서 초기부터 검토했다. 소장을 비롯한 관리사무실 직원들의 눈총은 무시했다. 머릿속에 전체 그림이 그려지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동민경찰서 정문에 서자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1층 로비에서 방문 목적을 말하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몸이 떨려서 곧바로 수사과로 갈 수가 없었다. 겨우 진정을 하고 수사과 경제2팀이라고 써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영식 경위는 앞 의자에 앉으라고 말하며 성명을 묻고 컴퓨터에 입력했다. 옆에서 위압적인 말이 들리자 나는 몸을 움츠리며 침을 삼켰다.

    ̄왜 오셨는지 아시죠.

    ̄노민영 씨가 고소했다고 해서 왔습니다.

    ̄노민영 씨가 공금횡령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노민영 씨는 고소인 진술서 작성을 마쳤습니다. 제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하셔야 합니다. 변호사가 필요하시면 같이 오셔도 됩니다.

    ̄네? 공금횡령요? 말도 안 돼요. 변호사가 있어야 합니까?

    ̄본인이 결정하시면 됩니다. 

   내가 변호사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이 경위는 직업, 월급, 재산에 대해 위압적으로 물었다. 이게 고소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자 그는 사실에 근거하여 답변을 잘하라고 하며 대답을 안 해도 상관은 없다고 했다. 나는 주눅이 잔뜩 들어서 무슨 공금횡령이냐고 묻자 그는 서류를 보여주었다. 

    ̄이게 무슨 공금횡령이에요. 노인정 입구에 캐노피 공사를 한 것과 정수기 설치한 것이고 전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실행한 것뿐인데요.

    ̄고소인은 회장이 단독으로 아파트 예비비에서 지출했다고 합니다. 이게 출금전표고.

   너무나 뜻밖의 일에 기가 막혀서 이영식 경위의 계속되는 질문에 나는 멍하게 있었다.

    ̄잠깐만요. 생각 좀 하고요.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어요.

   이 경위는 나를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우리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고소인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일주일 뒤 자료를 준비해 오십시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더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나는 다음 날 회사에 휴가를 내고 아파트 임원회의를 소집했다. 나와 관리소장 임원 5명 총 7명이 동대표 회의실에 모였다. 나는 노인정 캐노피 공사 때문에 공금횡령으로 고소를 당했다며 어제 경찰서에서 있었던 내용을 자세히 설명했다. 임원들은 노민영을 맞고소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같이 고소하실 분.

   정적이 흘렀다. 

    ̄맞고소하자면서요. 적어도 감사님들은 같이해야죠.

    ̄아파트 이미지도 있으니 조용히 처리하시죠. 그 안건 처리할 때 노민영 씨도 함께 있었잖아요. 자료만 잘 준비해서 가면 될 것 같아요.

   최 감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장님 속상하시겠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등등 말만 풍성하게 늘어놓고 그들은 가버렸다. 이건 뭐지? 헷갈린다.

   회의실에 소장과 나만 남아 말없이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노인정 비용 예비비로 처리하기로 한 내용 동영상으로 녹화되어 있죠? 회의록, 캐노피 안건 투표 결과와 서명한 것, 아파트 홈페이지에 회의 결과 올리신 것 다 캡처해서 주세요. 제가 자료 챙겨 가 보고 다른 사항이 생기면 전화할게요. 혹시 모르니 이런 경우 위탁관리 본사에서는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알아봐 주세요. 

   몸속에 숨겨져 있던 전투 본능이 살아난다. 전임 회장을 근처 카페로 불렀다.

    ̄회장님이 염려하신 대로 노민영 씨가 말썽을 많이 피우네요. 저 공금횡령죄로 고소당했어요.

   전 회장은 6년 임기 동안 노민영에게 시달렸던 이야기를 장장 3시간이나 늘어놓고 아직도 분한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 그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 기회에 노민영이 혼을 냅시다. 노민영이 옆에는 자신들은 나서지는 않고 하는 일마다 딴지 걸고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 아파트를 위해서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송 회장 내가 도와줄게요. 그동안 송 회장과 노인회장 비난하는 대자보 붙인 것, 관리사무실 직원 욕하고 쫓아낸 것, 송 회장에게 욕설 문자 보낸 것 다 엮어서 고소합시다.

    ̄회장님은 6년 동안 왜 안 하셨어요? 

    ̄같은 인간 되기 싫어서 상대 안 했어요. 변호사 선임해서 검찰에 직접 고소합시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며 고소하게 되면 도와달라고 했다. 같은 인간이 되기 싫었다. 그렇지만, 너는 같은 인간이 돼라? 이건 또 무슨 논리야. 


   나는 노민영에게 메일을 보냈다. 말도 안 되는 짓 하지 말고 고소 취하해라. 당신이 몇 년 동안 주장했던 아파트 문제점이 무엇인지 메일로 보내면 내가 다 살펴보고 타당하다면 조치하겠다. 그녀는 답을 보내지 않았다.


   아파트관리소장이 준비해 준 서류를 확인한 후 나는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는 지난번보다 두렵진 않았지만, 형사 앞에 앉는 것은 묘하게 불안했다. 나는 침착하게 아파트의 모든 일은 아파트관리규약에 의해 동대표회의에서 결정하고, 회장이나 임원진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고 설명했다. 회의 결과는 각 동 게시판에 일주일간 게시하며 동영상으로 녹화되고 홈페이지에도 올린다고 말했다. 이 경위는 동영상이 몇 분이냐고 물었다. 내가 4시간쯤 될 거라고 말하자 그는 어이없는 듯 나를 쳐다봤다. 

    ̄참 궁금한데 이렇게 힘든 동대표회장을 왜 하죠?

    ̄글쎄요. 떠미는 사람들 때문에 잠시 미쳤던 거 같아요.

   내 말에 이 경위는 픽 웃었다.

   며칠 뒤 이 경위는 동영상을 봤는데 싸우고 시끄럽게 소리 지르는 말만 들린다며 회의 결과만 집중적으로 보게 몇 분쯤 있는지 알려 달라고 전화했다. 홈페이지에 올린 회의 내용과 날짜는 확인했다며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 녹화 영상은 난장판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3:10:20 ̄3:30:40을 보라며 이 경위에게 문자를 보냈다. 녹화 영상 속의 노민영은 관리실 커피 사용량과 생수통 교체 시기, 이면지나 비품 사용 여부를 소장에게 따지고 그런 것을 보지 않고 넘어간다고 동대표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싸웠다. 왜 노민영은 적은 금액들을 저렇게 꼼꼼히 따져서 사람을 피곤하게 할까. 본인도 바쁘고 힘들 텐데. 대체 왜? 나는 노민영이 묘하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시작점이 분명히 있었을 거야. 그게 뭘까?

   한 달 뒤 검찰청에서 우편물이 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우편물을 개봉했다. ‘피의사건 처분 결과 통지서’에 ‘혐의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회장님 저 이번 달까지 다니고 그만두겠습니다.

   경리 정명자 주임의 갑작스러운 사직 통고에 나는 당황해서 내일 이야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무슨 일이야.

    ̄어제 노민영 대표가 지난 3년간 전표를 확인해야 하니 서류를 보여 달라고 해서, 2년 치는 사무실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고 그전 것은 창고에 상자로 봉해져 있어서 시간이 걸린다고 했더니, 월급 받고 일도 하지 않는다고 욕하고 난리 쳤습니다. 제가 열심히 일 안 한 적 있습니까? 노민영 대표만 보면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제명대로 못 살 것 같아요.

   나는 몇 달만 참으라고 정 주임을 달랬다.

    ̄근데 노 대표가 달라는 목록이 뭐예요?

   정 주임이 서류를 가져왔다. 없는 목록이 뭔지 묻고 지하 창고를 가 보자고 했다. 나는 지하 창고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 것은 회장인수인계서에는 없는, 직원들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노민영은 이런 것들을 건드렸다. 머뭇거리는 소장을 앞세워 창고 문을 열자, 상자에 꽁꽁 묶여 여기저기 나뒹구는 서류들과 어지럽게 놓인 비품, 만들다 만 선반. 누가 관리하냐는 내 질문에 소장은 출근한 지 4개월밖에 안 돼서 모른다고 했고, 관리과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소장님, 서류 정리 좀 하시죠. 다른 동대표가 서류를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제가 전산화하자고 했던 비품 목록, 시설·장비 현황 목록은 되셨어요?

   아직 못했다는 소장의 말에 나는 열이 뻗쳤다. 바쁜 거야? 일을 안 하는 거야?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관리사무실에 가 보면 나름 한가했고, 입주민이 와서 문의하면 친절하게 대답할 때도 있지만 불친절한 모습도 가끔 보여 내가 대답을 대신해 준 적도 있었다. 다음 날 관리과장은 사표를 냈다. 

   그래. 이제 실상을 조금 알겠다. 천방지축 날뛰는 노민영의 행동이 관리사무실 일부 직원의 잘못을 덮어 주는 면피용이 되어 있었다. 괘씸한 것. 멍청한 노민영. 관리실은 분위기를 바꿔야 하고, 동대표들은 열심이긴 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서지 않고, 입주민들은 대부분 무관심하고 일부는 내용도 모르면서 나를 욕하고, 경로당과 부녀회는 지원금을 늘려 달라고 조르고, 전임 회장과 동대표들은 둘로 갈라져 서로 비난하고 공치사만 늘어놓았다. 정치판도 이런가? 다음에 시의원에 출마해서 그곳은 어떤지 한번 봐야 할까나? 젠장. 쓴웃음이 나왔다. 


    ̄차 과장님, 소장님께 사표 내셨다면서요. 다음 주까지만 나오신다고. 다른 데 직장 구하셨어요?

    ̄504동 전임 대표가 이상한 문자 보내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502동 노민영 대표도 툭하면 사무실에 와서 욕하고 소리 지르고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요. 심장병 생길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심장병 생길 것 같으니까. 알겠어요. 다음 주까지 근무하신다는 것 보니까 갈 곳 정해지신 것 같고.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그래도 일은 마무리하고 가셔야죠. 비품 목록 시설·장비 현황 목록 전산화 완료시켜 주시고 창고도 정리해 주시고 가세요. 8년 근무하셨는데 마무리도 잘해 주시리라 믿어요.

   차 과장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나는 경리 정 주임을 불러 노민영 대표가 뽑은 회계장부 통장들을 보자고 했다. 몇 시간 동안 서류를 보며 나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메모했다.

    ̄소장님, 본사에 전화하셔서 우리 아파트 담당하시는 서 상무님과 저와 전화 연결 좀 시켜 주세요.

   소장은 싫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내 기세에 눌려 본사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무님, 저희 아파트 관리사무실 난리가 났습니다. 상무님도 상황을 파악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자세한 사항은 소장님께 들으시고 당분간 본사에서 관리과장을 파견해 주십시오.

    ̄회장님, 어려움이 많으시죠. 내일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소장은 본사는 아파트 직원과 관련이 없으니 관리과장 모집 공고를 내서 회장과 동대표가 면접을 보자고 했다. 

    ̄소장님, 제가 절차를 모르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아파트는 위탁관리를 하고 있고 여기 직원들도 그쪽 소속이잖아요. 물론 우리가 월급 주고 직원도 소장님이 뽑고 관리하지만, 엄연히 소속은 위탁회사죠. 소장님은 그 회사 직원이고. 아닌가요? 제가 어젯밤에 국토교통부 공동주택관리법, 지자체 공동주택관리규약, 우리 아파트관리규약을 다시 정독했습니다. 위탁관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고, 소장님 책임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 관리사무실 직원들과 노민영에게 똑같이 칼을 뽑기로 했다. 아파트 관리에 지장이 없도록 우군도 만들어야 했다. 우선 일 잘하는 기전 팀 직원들의 동요를 막아야 한다. 경비 팀은 별도 외주니까 경비팀장께 잘 이야기하고 그쪽 외주업체 팀장도 만나야 한다. 두 감사와 임원진들과도 공조 관계를 돈독히 하고 동대표들과의 관계도 잘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시간이 필요했다. 회사에 일주일간의 휴가를 신청하고 때를 기다렸다. 

   위탁관리업체는 규정에 따라 3년마다 선정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아파트는 처음부터 8년 동안 같은 업체가 관리를 하고 있는데, 제대로 된 매뉴얼이 없었다. 나는 서 상무와 동대표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관리실 상황을 설명했다. 서류, 시설관리 문제 등등 확인된 사항만 나열하면서 각자 의견을 내달라고 했다. 동대표들이 서 상무를 바라보자 그는 관리과장은 아파트에서 직원을 뽑을 때까지 당분간 본사 인원을 파견하겠다고 약속하며, 본사 매뉴얼에 따라 직원 교육을 더 강화하겠다고 답변했다.

    ̄서 상무님, 다 아시는 문제겠지만, 노민영대표가 문제가 많죠. 그냥 입주민도 아니고 동대표가 되었으니… 그런데 참 직원들도 만만치 않아요. 제가 기술이사님과 샘플까지 주면서 전산화시켜 달라고 했던 자료들 지금 그대로 있습니다. 노민영이가 괴롭혀서 힘들다고 호소하면서 본인들이 해야 할 일도 안 해요. 노민영 대표가 제일 나쁘죠. 사납게 말하고 욕하고. 하지만 노 대표로 인해 직원들의 개인적인 업무 태만을 퉁칠 수는 없잖아요. 저한테도 문자 테러하고 게시판에 대자보 붙이고 고소하고….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서 노민영 대표가 주장하는 것들을 체크해 봤더니 60%는 맞더라고요. 서 상무님, 뭐가 문제일까요? 해결책 좀 알려 주세요.

   서 상무는 기분 나쁘게 껄껄 웃었다. 임기 2년밖에 안 되는 동대표회장인데… 뭐 소나기 오니까 좀 피하지 하는 표정으로. 능구렁이 같으니라고. 속으로 개새끼 하고 욕을 퍼부었다.


   동민경찰서 수사과에서 전화가 왔다. 명예훼손죄로 고소가 들어왔으니 12월 2일 3시에 경찰서에 들어와서 조사를 받으라고 했다. 명예훼손요? 고소한 사람이 누굽니까? 수사관은 노민영이라고 했다. 무슨 내용이냐고 묻자 동대표회의 때 자기에게 모욕을 준 것이라고 했다.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자기가 쏟아 놓은 오물 치우느라 내가 생고생을 하고, 이제 겨우 관리사무실이 안정되었는데. 바보 같은 것.

   나는 소장에게 노인회장 전임 회장을 관리사무실에서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 30번은 참은 것 같다. 그렇게 원하니 싸워 주지.

    ̄노민영 대표가 저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어요. 저도 노 대표 고소하려고 합니다. 전 소장님들 관리과장도 사표 냈죠. 정 주임도 사표 내려고 하는 것 제가 말렸는데,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고 남편이 아파트를 상대로 고소하겠다고 한답니다. 노 대표는 혼도 내고 달래도 봤는데 안 돼요. 업무방해죄도 같이 걸어서 고소할 생각입니다.

   세 사람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전임 회장은 자신이 잘 아는 변호사를 찾아가자고 했다. 만난 김에 우리는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다. 변호사는 사정을 쭉 듣더니 그 사람은 정신감정을 받아 봐야 할 사람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고소인은 누구로 할 것이냐는 말에 나는 세 명이 다 시달리고 문자, 대자보로 모욕을 당했으니 셋이 같이하자고 했다. 노인회장은 찬성했지만, 전임 회장은 생각해 보겠다며 슬쩍 발을 뺐다. 노민영이를 혼내라고 만날 때마다 요구하고 힘을 합치겠다고 큰소리치더니. 어라, 이건 또 무슨 경우? 같은 인간 되기 싫어? 망할.


   동민경찰서 수사관실에 들어가자 수사관은 나를 사방이 막힌 방으로 안내하며 지금 말하는 내용은 영상으로 녹화가 되니 잘 대답하라고 했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아니 무슨 중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영화에서나 보던 영상취조실에서 조사를 받다니.

    ̄동대표회의에서 노민영에게 발언을 못 하도록 하고, 혼을 내겠다고 협박하고 모욕을 준 적이 있습니까?

    ̄노민영이가 큰 소리를 지르고 오랫동안 혼자 발언을 해서 회의 진행상 5분 이내로 하라고 주의 준 적 있습니다.

   수사관은 다양한 각도로 비슷한 질문을 계속했다. 나는 참다못해 이것이 영상 녹화를 할 정도로 큰 죄냐고 물었다. 노민영이 나를 모욕하고 괴롭힌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수사관은 짧게 대답했다.

    ̄고소하세요.

    ̄사람이 변할 수도 있어서 기다렸는데 안 변할까요?

    ̄안 변할 겁니다. 

   다행히 내가 제출한 회의 동영상을 검토한 수사관은 동대표들에게 전화로 일일이 진술을 받고는 나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변호사에게서 조서를 작성했으니 오라는 연락이 왔다. 계약서에는 1심 재판비용이 5백만 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2심 3심은 뭐냐는 내 질문에 변호사는 고법, 대법까지 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상대가 불복해서 항소할 수 있으니 그때까지 비용을 한 번에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아니 이게 대법까지 갈 일이 뭐가 있다고. 나는 잠시 생각을 해 보겠다고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내 말에 이기면 상대가 소송비용을 다 물어내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노인회장은 1심만 계약을 하자고 했다. 변호사는 형사소송에서 이기면 민사소송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으니 민사소송 계약서도 작성하자고 했다. 노민영 같은 사람은 돈으로 주는 고통을 가장 아파할 거라고 나를 설득했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나는 승소하면 그때 이야기하자며 자리를 피했다. 

   변호사에게서 검찰청에 고소장을 접수했다는 연락을 받은 지 한 달쯤 지난 후 1월 28일 3시에 검찰청 215호실로 출두하라는 문자가 왔다. 한평생 겪을 일을 노민영이 때문에 일 년 동안 다 겪고 있다. 아파트동대표회장에 취임한 날부터 시청에서 부르고 법정, 경찰서, 검찰청까지…. 담당 수사관은 조서를 쭉 읽으면서 조서가 엉망이라고 했다.

    ̄변호사가 작성했는데요. 

   수사관은 조서를 짚어 가면서 지적했다. 그러곤 1. 업무방해죄 2. 직원 폭언 3. 명예훼손죄 4. 모욕죄 이렇게 4개로 나뉘는데 이 부분 전부를 고소할 것인지 물었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하자 그는 조언을 하나 하겠다며, 업무방해죄와 직원 폭언은 증인이 출두해야 하는데 증인을 설 사람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지금 있는 자료만으로도 가능하다며 다음에 올 때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했다. 관리사무실에 가서 내가 직원들에게 수사관의 이야기를 전하자 모두 진술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니, 저한테 혼내 달라고, 제가 고소하지 않는다고 원망하셨잖아요. 이제 다 해 주고 변호사 비용도 개인 비용으로 5백만 원이나 드는데 왜 안 하시겠다는 거예요.

    ̄할 사람 아무도 없을 거예요. 이 바닥 좁아요. 금방 소문이 나서 취직도 어렵고.

   소장의 말에 정 주임이 고개를 끄떡였다. 진짜 노민영이를 고소하면 뭐든지 하겠다더니 막상 하니까 우리는 빼고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이건 또 뭐지? 이중성.


   검찰 수사관은 두 가지 항목을 잘 뺐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실제로 진술을 하거나 증인을 서 달라고 하면 거의 안 합니다. 두 가지 항목만으로 조서를 다시 써 오시고 핸드폰은 포렌식 분석을 해야 하니까 두 분 다 두고 가세요. 참 그리고 앞으로도 두 분이 같이 오실 겁니까? 한 사람에게 위임하실 겁니까?

    ̄저는 나이가 팔십이고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회장님한테 위임했으면 좋겠습니다.

   노인회장의 말에 검찰 수사관은 수긍이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나를 봤다. 이건 또 무슨 일? 변호사 사무실에서 전임 회장이 쏙 빠지더니, 이제 검사실에서 노인회장이 쏙 빠진다고?

    ̄아니요. 저는 일 년 정도만 알지 지난 것은 잘 모릅니다. 회장님이 계셔야 같이 확인할 수 있느니 같이하겠습니다.


    ̄수사기관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므로 양쪽 의견을 다 듣고 결정합니다.

   수사관은 나와 노인회장 노민영을 같은 시각에 검찰 수사관실로 불러서 말했다. 그는 똑같은 질문을 세 사람에게 하고 다른 질문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람은 겉모습과 달라서 수사관들은 현혹되지 않도록 반복적으로 점검을 한다고 했다. 경찰서에서 들은 말과 같은데 도대체 누구보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수사관을 쳐다보았다. 수사관은 노민영에게 죄가 거의 확실해서 벌금형 이상을 받을 것이라 지금이라도 사과하라고 했고, 나한테는 같은 아파트 주민이니 고소 취소를 하고 합의를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저는 잘못한 것 없어서 사과 안 해요. 회장님은 고소 안 할 거라고 믿었는데…. 왜 뒤통수를 치세요?

   이건 또 뭔 소리? 왜 내가 고소를 안 한다고 믿어? 말도 장소를 가려 가면서 해야지. 여기서 할 말이니 그게. 어휴.

    ̄내가 말했죠. 30번만 참겠다고. 그 이상을 당신이 한 거야.


   노민영이 고소했던 명예훼손죄도 ‘혐의 없음’이라는 통지를 받았다. 변호사는 이번 재판은 이기는 것이 확실하고, 거기다 두 번의 무고죄까지 있으니 민사소송을 제기하라고 했다. 아마도 노민영은 아파트를 팔고 이사 가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전임 회장은 민사소송까지 하라고 전화를 하고 동대표들은 고소하다며 즐거워했다. 모든 부담은 내가 다 지고 있는데 동참도 안 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한 것처럼 좋아했다. 물론 동대표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협조했고 변호사 비용 일부라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관리실 직원들은 노민영이가 이사 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고 회장님 수고하셨다는 말을 연거푸 해댔다. 고민이 깊어지고 어찌해야 할지 속을 끓이고 있는데 구원은 엉뚱한 곳 검찰 조정위원회에서 왔다. 피고소인과 같이 만나서 재판까지 가지 말고 합의를 하면 어떠냐고 물어 왔다. 나는 노인회장을 설득해서 이야기라도 들어보자고 조정위원회에 참석했다. 그사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복도에서 만난 노민영은 나를 보자마자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요?

    ̄회장님, 제가 죄송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상황? 나는 눈을 껌벅거리며 노인회장을 쳐다봤다. 조정위원실에는 세 명의 위원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같은 아파트 주민임을 강조하면서 합의하기를 종용했다.

    ̄아니 잘못한 사람에게 사과하라고 하는 것이 우선이지, 저한테 합의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우선입니까?

   조종위원들은 노민영에게 사과하라며 우리가 조건을 제시하면 무조건 수용하라고 다그쳤다. 지금 상황으로는 고소가 취하되지 않으면 형사처분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민영은 자기는 돈도 없고 몸도 아프다며 불쌍히 여겨서 다 용서해 달라고 사정했다. 노인회장은 노민영이 현재까지 입주민을 상대로 한 고소를 취하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고, 나는 아파트 게시판에 한 달간 반성문 게시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과 이런 일이 반복되었을 때의 배상금을 명시한 공증서와 경로당에 가서 노인회장에게 사과하고 입주민에게 사과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조정위원회는 다음 주까지 모든 서류를 준비하고 조건들을 만족시킨 결과를 가지고 오라고 노민영에게 말했다. 

   노민영은 약속을 지켰고, 조정위원들에게 매달려 변호사 비용도 감면하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 태도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서 나는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잠은 잘 자겠어요. 노민영하고 원수지지 않고 공증까지 받아 놨으니… 동대표들과 전임 회장, 전임 동대표들은 난리 나겠네요. 잡은 고기 놓쳤다고 두고두고 저한테 욕을 할 거고. 관리실 직원들은 짜증 낼까요? 노민영이 사무실 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은 하겠죠.

   내 말에 노인회장은 웃었다.

    ̄잠을 잘 자는 게 제일 좋잖아. 밤길 조심 안 해도 되고. 배고픈데 밥이나 먹지.


   누가 손해를 봤는지 결과를 보면 안다. 노민영과 내가 가장 손해를 많이 봤다. 나머지 사람들은 정의를 말했고 분노도 많이 표출했지만, 손해는 조금 봤다. 아파트는 어쨌든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누군가는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분노하는 사람은 많아도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노민영식이 아닌 점잖게 문서 위주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변했을까?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세상은 묘하고 참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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