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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들링

  • 작성일 2023-10-20
  • 조회수 586

허들링

황윤정


   비가 쏟아지던 목요일 저녁,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휴대폰에 찍혀 있는 ‘이모’라는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득 『보바리 부인』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떠올렸다. 그는 특정한 무언가를 가리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다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주장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이론을 곰곰이 되짚다가 생각했다. 만약 그가 옳다면, 내가 우리 이모를 부를 때 이모라는 낱말이 아닌 다른 낱말로 불러야 하는 게 아닐는지. 이모보다 훨씬 더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존재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는지. 여태 단 한 번도 이모라는 호칭이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었는데 그날따라 ‘이모’라는 글자를 보고 있자 상당히 마땅찮았다. 나의 이모인 도선주 여사가 이모라는 호칭을 듣기에 부족한 탓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모라는 호칭은 원칙적으로는 엄마의 언니나 여동생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금 범위를 넓힌다면 엄마의 친구나 아니면 아예 처음 보는 식당 아주머니 등에게도 쓸 수 있는 말이기도 해서, 그 호칭 자체의 깊이가 도선주 여사를 담아내기에 상대적으로 얄팍하다고 여겨진 탓이었다.

   그렇다 한들 이모를 대체할 어떤 표현이 쉽게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말문이 트기 시작할 무렵부터 엄마보다 도선주 여사를 볼 일이 더 많았기에 엄마, 엄마, 하는 것보다 이모, 이모, 하는 게 익숙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삼십 년 가까이를 이모, 이모, 하다가 갑자기 아예 다른 호칭을 생각해 내는 건 아무래도 어려웠다. 게다가 우연히 어떤 괜찮은 호칭이 떠올라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겠다고 선언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 새로운 호칭이 입에 밸 때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도선주 여사의 얼굴만 보면 습관적으로 이모라는 말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컸고 그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한동안, 아니 어쩌면 앞으로 쭉, 도선주 여사를 대할 때마다 긴장한 상태를 유지해야 할지도 몰랐다. 은근히 귀찮고 성가실 게 틀림없었다. 그냥 이모라고 부르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일지도. 어차피 도선주 여사는 우리 엄마의 피가 섞인 진짜 친동생이기는 했으므로 사전적 의미를 따지자면 이모가 맞기는 맞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순간에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되어 있는 ‘이모’라는 글자를 바꾸고 싶어서 견디기 어려웠다. 버스 창문에 세차게 닿아 부서지는 빗줄기가 만들어 내는 일종의 비명과도 같은 빗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 더 그랬을 수도 있었고, 혹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여름의 남은 열기나 눅눅한 버스 내부 곳곳에 스며든 사람들의 들큼한 땀 냄새가 거슬려서 더 그랬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당장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조급한 심정에 사로잡힌 나는 일단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이라도 임시방편으로나마 바꿔 놓자, 하며 편집 버튼을 누르고 들어갔다. 과감한 두 번의 터치로 이모라는 두 글자를 서둘러 지워버리고선 이번에는 앞선 터치와 사뭇 다른 조심스러운 터치로 ‘도선주 여사’라고 썼다.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이모보단 낫지만 다섯 글자는 너무 긴 것 같았다. 다 지우고 이번에는 ‘도 여사’로 수정했다. 그래도 여전히 썩 만족스럽지는 않아서 아직 저장을 하지 않은 채로 한참 동안 화면을 응시하며 머리를 굴렸고, ‘도 여사’라는 세 글자도 다시 지운 뒤 고민을 조금 더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이름을 천천히 입력했다. ‘줄리아’. 그래, 줄리아. 줄리아야말로 도선주 여사와 무엇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로소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저장을 눌렀다. 


*


   줄리아는 나의 영어 이름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여덟 살 때 도선주 여사가 나에게 물려준 이름이었고 그것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내가 도선주 여사로부터 빼앗은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당시의 도선주 여사로 말할 것 같으면 고등학교도 미처 졸업하지 못한 열아홉 풋내기였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어렸었구나 싶지만 여덟 살이었던 나의 시선으로 봤을 땐 엄청난 어른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선주 여사는 자신이 고작 열두 살일 때 내가 태어나서 그 어린 나이에 이모가 되어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엄마가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자 그때부터 엄마를 대신해 나의 뒤치다꺼리까지 해 주었다. 할머니도 같이 살았으나 할머니는 식당 일로 하루 종일 바빴기에 나를 돌보는 일은 오롯이 도선주 여사의 몫으로 돌아갔다. 내게 분유를 먹이거나, 나를 어르고 달래 재우거나, 심지어 냄새나는 똥 기저귀도 군말 없이 갈아 주었으며, 나중에는 유치원에도 매일 데려다주고 데리러 왔다. 당연히 나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온 사람도 엄마가 아닌 도선주 여사였다. 그때쯤 엄마는 이미 아빠처럼 연락이 끊긴 상황이었다. 교복을 입고 내 옆에 선 도선주 여사를 보며 사람들은 언니가 동생도 잘 챙기고 참 착하네, 말했고 나는 옆에서 눈치 없이 이모예요, 이모! 외치며 도선주 여사의 다리에 매달렸었다.

   그렇게 도선주 여사가 돌봐 주고 챙겨 준 덕분에 별 탈 없이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얌전히 지내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몇 주 만에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하굣길에 학교 앞 문구점에서 세일러문 크레파스 세트를 훔치다 주인아저씨에게 그만 들켜버린 것이었다. 처음부터 크레파스에 손을 댈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사탕이나 하나 사려고 들어갔는데, 평소에는 불량식품을 고르거나 준비물을 사는 애들로 북적거리던 그곳이 그날따라 텅 비어 있었고 주인아저씨도 웬일로 안경을 벗어 둔 채 졸고 있었다. 마치 문구점이라는 공간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느껴질 만큼 나른하고 고요했다. 햇빛이 비치는 곳마다 먼지가 흩날리는 것을 빼면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운동화를 끌지 않고 사뿐거리며 문구점을 한 바퀴 또 한 바퀴, 총 두 바퀴를 돌았다. 여전히 주인아저씨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 기회야! 라든가, 오늘 기필코 훔치겠어! 라든가, 그런 다짐을 한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냥 무언가에 홀린 듯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크레파스 앞에 멈춰 서 바닥에 책가방을 내려놓았고, 찌익 소리가 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지퍼를 열었으며, 그 안에 크레파스를 넣었다. 그런 다음 역시나 느린 속도로 지퍼를 잠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과정을 끝내고 허리를 펴는 순간 주인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고 싸늘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어른의 눈에 온몸이 얼어붙어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주인아저씨의 다그침에 훌쩍거리며 도선주 여사가 다니던 고등학교 이름만 더듬더듬 반복했다. 휴대폰이 상용화되던 시기도 아니었고 할머니가 일하는 식당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딸꾹질까지 하며 계속 되풀이했다. 3학년 5반 도선주, 3학년 5반 도선주예요. 주인아저씨는 나의 보호자다운 보호자, 그러니까 법적 미성년자가 아닌 진짜 ‘어른’에게 연락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화가 조금 누그러진 듯했다. 그 고등학교로 전화하면 된다는 거지? 하는 물음에는 살짝 난감한 기색까지 섞여 있었다. 어쩌면 본인 선에서 대충 꾸짖고 집으로 보내버릴까, 속으로 고민했을지도 몰랐다. 전화기를 들고 잠시 머뭇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도 그 주인아저씨는 꽤 고집이 있는 편이었고, 화를 내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상황이 우스워진다고 여긴 건지 아니면 아이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게 어른의 의무라고 여긴 건지 잘 모르겠지만, 기어코 처음의 고집대로 도선주 여사의 학교로 연락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도선주 여사는 결국 조퇴를 하고 문구점으로 달려오게 되었다.

   다행히 도선주 여사와 주인아저씨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도선주 여사도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고, 그때는 국민학교였지만, 어쨌든 그 문구점을 자주 이용했었다. 도선주 여사가 허겁지겁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구점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아저씨는 내게 보여주었던 싸늘한 눈빛을 언제 그랬냐는 듯 거두고선 아이고 너였구나, 오랜만이다, 하며 반겼다. 나는 죄송하다며 연신 허리를 숙이는 도선주 여사의 옆에 서서 여전히 눈물 콧물을 훌쩍이며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반복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함께 용서를 빌었다. 이윽고 주인아저씨가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등의 충고를 하며 사건이 그럭저럭 마무리될 즈음 도선주 여사는 크레파스를 계산하고 가져가겠다며 자신의 책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냈는데, 나는 그 순간 주인아저씨의 눈길이 천 원짜리 서너 장밖에 없었을 도선주 여사의 분홍색 지갑 속을 재빨리 훑는 것을 눈치챘다. 그 눈길에 담겨 있던 의미를 그때 당시의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온몸을 얼어붙게 만드는 그런 무서운 눈길이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돈은 됐다.”

   주인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책가방 속에서 꺼내 두었던 세일러문 크레파스를 다시 내게 건넸다. 황급히 만류하며 집에 가서 돈을 더 가지고 오겠다는 도선주 여사에게 어허, 하더니 나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당부했다.

   “오늘 일을 절대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주는 거니까 받아.”

   도선주 여사는 집으로 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잔뜩 기가 죽은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각자 생각에 빠진 채 하염없이 걸을 뿐이었다. 평소에는 도선주 여사와 함께 있으면 늘 조잘조잘 떠들어대곤 했기에 그렇게 서로의 사이에 침묵이 오래 자리 잡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래서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더 이상 울지는 않았는데, 이미 너무 눈이 퉁퉁 부어 지친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런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도선주 여사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나는 한 손으로는 도선주 여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크레파스를 든 채 열심히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 그날 도선주 여사가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색하게 떨어진 채 걸어갔다면,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 보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꼭 붙잡았던 도선주 여사의 손이 지닌 온기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에 다른 경우의 수를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그만큼 도선주 여사의 손은 ‘어른’이 아닌 열아홉 풋내기의 손이었으나 다른 누구의 손보다도 힘이 있었고 또한 따뜻했다. 

   우리는 집에 도착해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밥을 먹었다. 그리고 도선주 여사가 공부를 하는 동안 나도 복습과 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밤이 깊어 할머니가 일이 끝나고 돌아왔을 땐 둘 다 거실로 나가 할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도 나눴다. 하지만 도선주 여사는 할머니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일’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그래서 나도 굳이 먼저 입 밖에 올리지 않았다. 잘된 일이었다. 할머니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계속 찜찜했는데, 할머니와는 아니더라도 도선주 여사와는 ‘그 일’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잘 시간이 되어 양치와 세수를 한 뒤 나란히 이불 속에 눕고 나서, 도선주 여사가 마침내 내게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크레파스가 새로 갖고 싶었어? 물었을 때 마음이 찜찜했었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물음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도선주 여사에게 털어놓았다. 예지가 세일러문 크레파스를 자랑했는데 너무 부러워했던 것 같다고. 

   “잘못했어, 이모.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 거야.”

   “알겠어, 울지 마.”

   “진짜야.” 

   “알아, 믿어.”

   도선주 여사는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런데 예지는 누구야?”

   “걔 있잖아, 내 뒷자리에 앉는 애. 크리스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돌아온 예지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이렇게 했다는 둥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무엇을 먹었다는 둥 말끝마다 툭하면 오스트레일리아를 언급하는 게 습관인 아이였다. 입학 첫날 자리가 정해지고 나서 나는 친구를 사귀어 보겠다는 들뜬 마음으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예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너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며? 나름 자기소개를 유심히 듣고 기억하려 애쓴 거였는데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예지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그러고선 오스트리아가 아니고 오스트레일리아야, 오스트레일리아! 하고 스타카토를 찍듯 강조했다. 머쓱해진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나름 어딜 가도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해서 부끄러웠다. 별일 아닌 일에 무안을 준 예지가 미우면서도 어쩐지 그날부터 힐끔힐끔 예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예지가 가진 것은 왠지 다 좋아 보였다. 세일러문 크레파스도 마찬가지였고 그 크레파스 낱개 하나하나에 전부 크리스틴이라고 영어로 이름표를 붙인 것도 근사해 보이기만 했다. 

   “크리스틴?”

   “응, 영어 이름이 크리스틴이래. 걔네 엄마 아빠는 다 크리스틴이라고 부른대.”

   “그렇구나.”

   “이모, 나도 영어 이름 가지고 싶어.”

   도선주 여사의 품에 안겨 칭얼거렸다. 

   “영어 이름? 가지면 되지. 하고 싶은 거 있어?”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줄리아!”

   “줄리아?”

   그 순간 다른 이름도 아닌 줄리아라는 이름이 하필이면 생각난 이유는 당시 나에게 가장 친숙했던 외국 여자 이름이 줄리아였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도선주 여사와 내가 함께 자는 방의 벽에는 영화 〈노팅 힐〉의 포스터가 늘 걸려 있었는데, 나는 어려서 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도선주 여사는 그 영화를 아주 좋아했고 특히 주연 배우인 줄리아 로버츠의 팬이었다. 포스터를 제외하고도 도선주 여사의 물건 곳곳에 가위로 예쁘게 오린 줄리아 로버츠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으며 내가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도선주 여사는 줄리아, 줄리아 로버츠야, 하고 알려 주어서 자연스럽게 줄리아라는 이름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따르는 이모가 좋아하는 배우, 게다가 엄청 예쁜 배우의 이름이었으니 당연히 줄리아라는 이름이 멋져 보였고 영어 이름을 만든다면 줄리아가 제일 좋을 것 같았다. 다만 나는 도선주 여사가 줄리아 로버츠를 좋아한 진짜 이유는 모르고 있었는데, 나중에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사실 도선주 여사는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오디션도 몇 번 보러 가기도 했다고. 고등학교 시절 내내 다이어리에 스스로의 이름을 줄리아라고 적어 두고 스크린 속에 자신이 나오는 것을 상상했다고. 그러나 도선주 여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할머니의 허리가 계속 안 좋아지고 있었고, 할머니가 일을 그만두는 즉시 집에 수입이 끊길 터였다. 

   “그래, 앞으로 네가 줄리아 해.”

   도선주 여사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으로 들어가 좌우로 데굴데굴 굴렀다. 신이 났을 때 하는 나만의 몸짓이었다. 포근하고 좁은 공간에서 구르다 보면 기분이 한층 더 좋아졌다. 그렇게 여러 번 기쁨의 세리머니를 즐기다 도선주 여사가 이제 그만 자야지, 줄리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다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예스! 일부러 영어로 대답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피곤했었는지 눈을 감자마자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그날에 관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부였다. 자다가 설핏 눈을 떴을 때, 잠자리에 누운 뒤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눈을 뜬 채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도선주 여사를 보았던 것 같기도 했지만, 그리 명료한 기억은 아니기에 실제인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날을 시점으로 나는 줄리아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단 한 번도 남의 물건에 손대는 일 없이 성장했으며, 도선주 여사는 더 이상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배우를 꿈꾸지 않았다.


   나의 딸 세윤은 내가 도선주 여사를 이모라고 부르는 것처럼 예지를 이모라고 불렀다. 예지 이모, 예지 이모, 하다가 가끔은 크리스틴 이모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와 예지가 친자매인 건 아니었지만 이십 년 동안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세윤의 입장에서는 예지가 엄마의 가장 오랜 친구였기에, 다른 호칭보다도 이모라는 호칭이 가장 무난하고 나았다. 처음에 나는 내가 예지와 이토록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 나가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다시피 우리의 첫 대화는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 관한 것이었는데, 만남의 시작이 그런 식이라면 누구라도 상대방을 향해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서로를 오해하다가 나중에 뒤늦게 친해지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예지를 잘난 척하는 새침데기로 여겨서 미워하면서도 은근히 질투했으며 예지는 나를 붙임성만 좋은 덜렁이로 여겨서 한심해하면서도 역시나 은근히 질투했다. 친구가 되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러나 평생 가까워지지 않을 줄 알았던 예지와의 관계는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느 아이의 생일 파티 날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졌다. 생일 파티를 열었던 그 아이는 또래들보다 키가 훌쩍 크고 축구를 잘해서 누구에게든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그 아이가 생일 파티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너도나도 초대를 받고 싶어 조바심을 냈다. 더군다나 파티 장소도 동네에 새로 오픈한 피자 가게였다. 그 피자 가게 매장의 가장 안쪽에는 칸막이로 분리되어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단체석이 있었는데 미리 예약을 하면 풍선도 달고 놀 수 있었기에 조금 잘나간다 싶은 아이들은 다 그곳에서 생일 파티를 열곤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초대를 받았고 예지는 못 받았다. 나는 원래 두루두루 애들과 잘 지내는 편이어서 그 아이와도 장난을 많이 치며 놀았지만 예지는 그 아이와는 말 한마디 제대로 섞어 보지 않은 처지여서 그랬다. 

   문제는 생일 파티 당일이었던 화창한 일요일 오전, 초대를 받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피자 가게에 모여들기 시작할 즈음 예지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타나면서 발생했다. 그 둘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게 나였다. 내가 피자 가게의 문을 막 열기 직전에 그들도 도착했는데, 바로 그 앞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나는 문에 한 손을 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예지는 초대를 받지 못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곤 예지와 예지의 어머니를 살폈다. 예지는 늘 그랬듯이 나에겐 없는 꽃무늬 레이스 원피스를 걸치고 큐빅이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었으며, 예지와 똑 닮은 예지의 어머니도 블라우스에 치마를 갖춰 입고 모자까지 쓰고 있어 누가 봐도 멋쟁이 느낌이 났다. 그런데 예지의 표정이 이상했다. 다른 아이들이 무슨 말만 해도 콧방귀를 뀌던 평소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었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채 앞을 바라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얼굴빛이 창백했다. 나는 여전히 문에 손을 올려 두고선 그냥 먼저 들어갈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어른을 봤는데 인사를 안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예지의 어머니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예지는 그제야 시선을 들어 나의 존재를 눈치챘다.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어머, 안녕. 우리 크리스틴 친구니?”

   “네, 이다솔이에요. 예지, 아니 크리스틴 앞자리에 앉아요.”

   예지 어머니는 눈을 반짝거리며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렇구나. 다솔이를 만나서 이 아줌마가 정말 기쁘네. 얘가 며칠 전부터 오늘 생일 파티 있다고 자랑해 놓고선 갑자기 안 간다고 하는 거야. 선물도 샀으면서 말이야. 그래서 그럼 선물이라도 주고 오자고 내가 데리고 왔단다.” 

   나와 예지의 눈이 마주쳤다. 예지의 눈에 당황하는 기색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예지는 한 손에 포장지로 곱게 싼 선물을 들고 있었다. 그 선물을 뒤로 감추며 예지가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안 간다고 했잖아! 가기 싫다고 했잖아!” 

   예지의 어머니는 예지가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고 예지는 본인이 생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예지와 예지의 어머니가 실랑이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어쩔 줄 모르고 그냥 서 있기만 했다. 인사도 했으니 그냥 먼저 들어가 버릴까, 아니면 예지가 입학 첫날 나에게 무안을 줬듯이 나도 예지의 어머니 앞에서 예지를 난감하게 만들어 버릴까, 잠시 그런 갈등에 휩싸였다. 한편으로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나의 엄마를 떠올리며 ‘우리 엄마도 사진으로 보면 꽤나 멋쟁이던데’ 하는 뜬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어쨌든 확실한 점은 내가 예지와 예지의 어머니를 앞에 두고 그 짧은 시간 내에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으면서도 예지를 챙겨야겠다는 마음은 맹세코 절대 가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참 의아한 일이 일어났다. 멀리서 초대를 받은 다른 친구들 두어 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자마자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예지에게 가까이 다가가 예지의 손을 꽉 잡았던 것이다. 예지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못 본 척하며 예지의 어머니에게 잘 놀고 오겠다고 말했다. 예지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좋아하며 내게 당부했다.

   “다음에 집에도 꼭 놀러 오렴, 다솔아.”

   나는 예지의 손을 잡은 채 피자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매장의 가장 안쪽으로 걸어가자 이미 도착한 반 친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내게 인사를 하려던 친구들은 예지를 보곤 멈칫했고 그것을 느낀 예지가 시선을 내리깔며 내 손에 잡혀 있던 자신의 손을 빼려고 힘을 주었지만, 나는 예지보다 조금 더 힘을 주어 아예 깍지를 껴버렸다. 그리고 일부러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려 흔들며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야, 내가 예지 데려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예지와 나란히 앉았다. 다행히 반 친구들은 속으로 탐탁지 않아 했을지언정 굳이 왜 예지를 데려왔느냐고 시비를 걸지 않았다. 더군다나 생일 파티 주인공이었던 아이의 어머니가 예지를 향해 잘 왔다고 재밌게 놀라고 말해 주어서 그 뒤부턴 다들 처음부터 예지가 초대를 받았었던 것처럼 대했다. 

   나와 예지는 그날 피자 가게에서 계속 옆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냈지만 파티가 다 끝나고 나서는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래서 그냥 평소처럼 데면데면한 사이로 다시 돌아갈 거라 여겼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별말 안 해도 예지가 먼저 물건을 빌려주기도 하고 먹을 것도 나눠 주기도 해서 아, 이렇게 친구가 되는 거구나, 가슴 한편이 처음 느껴 보는 감정으로 일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내리 함께 다녔고, 스무 살이 넘어 예지는 대학에 가고 나는 세윤을 낳아 기르면서 처한 상황이 달라졌는데도 언제나 서로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하며 서로를 신뢰했다. 사실 도대체 내가 왜 예지 어머니 앞에서 예지의 손을 잡는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처음 손을 잡게 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때 잡은 예지의 작은 손이 마치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어서, 잡는 순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잡기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손이 서늘하게 얼어붙었을 때 누군가가 온기를 지닌 손으로 꽉 잡아 주는 것이 얼마나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일인지 나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나는 세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올해부터 미뤄 왔던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고민을 거듭하다 잠시 멈췄던 학업이었다. 대학 합격 소식과 함께 찾아왔던 임신 소식은 고려한 적 없던 예상치 못한 변수였고 나를 끝없는 혼란 속으로 몰고 갔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내가 세일러문 크레파스를 훔쳤을 때 나를 데리러 문구점으로 뛰어왔던 도선주 여사의 당시 나이 열아홉을 넘긴 나이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런 중대한 문제를 혼자 해결할 상황 판단 능력을 미처 갖추지 못한 나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할 때가 되어서야 도선주 여사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서른을 갓 넘긴 도선주 여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계속 일을 하며 내 뒷바라지를 해 주고 있었는데, 나에게 꼭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던 학교의 신문방송학과에 붙었다는 소식을 알린 날 처음으로 잔뜩 취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랬던 도선주 여사였기에 단호하게 공부를 계속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도선주 여사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나는 너에게 무조건 대학을 가라고 한 적 없어.”

   “그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는 내게 도선주 여사는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했지.”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질문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꼭 닫았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도선주 여사와 함께 자던 곳이기도 했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온전히 내 방으로 쓰고 있는 곳이기도 한 방이었다. 도선주 여사의 물건은 대부분 다른 방으로 옮겼지만 여전히 한쪽 벽에는 영화 〈노팅 힐〉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도선주 여사가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배우를 꿈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울면서 왜 나 때문에 이모의 꿈을 버리느냐고, 누가 그런 걸 고마워하기라도 할 것 같으냐고 따졌었다. 내 나름대로는 정당한 추궁이었는데 도선주 여사는 도리어 황당해하며 화를 냈다. 너 때문에 그랬다고 누가 그래? 내가 직접 한 선택을 함부로 안타깝게 여기지 마. 나는 내가 좋아서 너와 더 오래, 잘,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거야.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떤 기준으로 타인의 선택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건방지고 우스운 일인지, 기준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가변적인 것인지. 나는 포스터 앞에 서서 줄리아 로버츠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를 낳겠다고 ‘선택’했다. 사정상 남편 없이 세윤을 낳았지만 그래도 양육비는 받을 수 있었고 재택근무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세윤을 키우면서도 단 한 번도 세윤을 낳은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이번에는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또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 방송 공부에 다시 도전해 볼래.”

   내가 공표했을 때 나는 도선주 여사와 예지와 세윤과 함께 전지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던 중이었다. 주말에 다 같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알을 품은 황제펭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은 바깥쪽에 있던 펭귄의 체온이 떨어지면 안쪽에 있던 펭귄과 자리를 바꾸는 식으로 무리 전체가 서로의 위치를 바꿔 가며 한겨울의 추위를 극복하는 황제펭귄의 ‘허들링’을 담은 다큐멘터리였고, 방송이 끝나자마자 세윤이 펭귄을 그리겠다고 졸라댔다. 우리는 못 이기는 척 세윤을 위해 거실에 판을 벌였다. 워낙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는 세윤 덕분에 집에는 늘 미술 도구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세윤이 가장 좋아하는 미술 도구는 크레파스였다. 도선주 여사는 크레파스를 좋아하는 세윤을 볼 때마다 모녀지간 아니랄까 봐 크레파스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나를 겨냥해 놀렸고, 그러면 나는 왜 옛날이야기를 꺼내느냐고 툴툴거리곤 했다. 어쨌든 다들 커다란 전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아 힘을 합쳐서 펭귄 무리를 그리는 데 푹 빠져들었다. 나 역시 한참 동안 펭귄의 까만색 날개를 색칠했다. 그러다 문득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거실 창으로 따스한 햇빛이 한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그 햇빛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햇빛을 손안에 담아 두려는 듯 그렇게 한참 동안 손을 내밀고 있다가 이내 표명했다. 방송 공부를 다시 하겠다고. 

   그러자 세윤이 밝은 목소리로 먼저 대답했다.

   “공부? 엄마, 나랑 같이 공부하자.”

   예지도 대답했다.

   “그래, 나 어차피 칼퇴니까 내가 세윤이 픽업할게.”

   도선주 여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펭귄만 열심히 그리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러나 대답을 듣지 않아도 나는 도선주 여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내가 혼자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언제나 묵묵히 내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주었던 도선주 여사라면 이번에도 틀림없이 나의 의사를 존중하고 지지해 줄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틀린 선택이라 할지라도 언젠가 스스로 깨우칠 나를 믿고 기다려 줄 것이었다. 나는 어느새 햇빛이 고스란히 담긴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내 옆에 앉아 신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세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세윤은 머리카락을 만져 주자 기분이 좋은 듯 계속 만져 달라고 말했고, 나는 나의 손길을 원하는 세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 마침내 나의 손이 지닌 온기가 도선주 여사의 손이 지닌 온기만큼 제법 따뜻해졌구나,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선택을 직접 내렸고 이제는 보호자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보호자가 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휴대폰에 저장된 도선주 여사의 이름을 ‘줄리아’로 바꾼 나는 버스 창문을 내리치는 빗줄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월요일부터 내린 비는 목요일인 그날 저녁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날은 도선주 여사가 몸을 담고 있는 사진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작은 전시회를 여는 날이었고, 전시 기간은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나흘이었지만, 그래도 개장 첫날에 꼭 가고 싶어서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그곳으로 가고 있던 차였다. 

   도선주 여사가 사진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된 건 내가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결심하고 두어 달 즈음 지나서였다. 어느 날 직장 동료들끼리 점심을 먹다가 예쁜 고양이를 만나 모두 각자의 휴대폰을 꺼내 들고 고양이 사진을 찍은 다음 서로 공유했는데, 다들 도선주 여사의 사진을 보고선 전문가의 손길이라며 극찬을 했다는 것이었다. 구도며 타이밍이며 센스가 타고 났다고. 도선주 여사는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나와 세윤을 붙들고 자신이 찍은 고양이 사진과 동료들이 찍은 고양이 사진 중에 어떤 것이 더 잘 찍은 것 같은지 계속 물어보았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도선주 여사가 찍은 고양이가 가장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나와 세윤이 도선주 여사를 추켜세우자 도선주 여사는 몹시 기분이 좋은 듯 웃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도선주 여사가 십 대일 때 줄리아 로버츠의 사진을 오려 여기저기 붙이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당장 다음 날부터 괜찮은 사진 아카데미를 찾아보았고 지역과 강의 시간 등을 고려해 하나를 추렸다. 그곳의 커리큘럼을 인쇄한 종이와 수강료를 봉투에 담아 도선주 여사에게 건넬 생각이었다. 원래는 카메라도 사 주려고 했으나 그건 예지가 선수를 쳤다. 사진 아카데미를 알아보고 있다는 말에 평소에 봐 둔 카메라가 있다고, 학창 시절부터 잘 챙겨 주었던 선주 이모한테 꼭 본인이 무언가를 해 주고 싶다고, 무조건 자신이 사 주겠다며 아득바득 우기는 거였다. 분명 예지가 사면 초보 실력에 맞지 않는 비싼 카메라를 살 게 뻔해서 너무 과하지 않겠느냐며 손사래를 치자 이번에는 돈은 많은데 돈 쓸 데가 없어서 그런다고 징징거렸다. 나중에는 세윤까지 꼬드겨 합공했다. 세윤아, 예지 이모가 카메라 사 주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고 엄마한테 전해 줘, 그러면 세윤이 그대로 전하는 식이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자 예지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곧바로 백화점에 달려갔다. 그렇게 예지가 사 준 카메라를 포함해 커리큘럼과 수강료를 퇴근하고 온 도선주 여사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도선주 여사의 손을 꼭 잡았다. 도선주 여사의 손은 ‘이렇게 작았나?’ 싶을 만큼 생각보다 작았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혹시 거절하면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도선주 여사는 말없이 나의 선물을 바라보다가 눈시울을 붉힐 뿐 거절하지는 않았고, 나의 바람대로 순순히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도선주 여사가 무언가를 배우러 어디에 나간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재밌고 적성이 잘 맞았는지 함께 배우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꽤 잘하는 편이었고 강의하는 선생님들로부터도 매번 칭찬을 받는 것 같았다. 가끔 나에게 직접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나는 사진에 관해 잘 모르는 입장이기에 전문적인 분석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선주 여사의 사진이 좋았다. 그 사진들에 담겨 있는 도선주 여사의 시선이, 예리하면서도 따스한 눈길이 좋았다.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허들링〉이었다. 나는 이전에 도선주 여사와 예지와 세윤과 거실에 모여 앉아 함께 크레파스로 그렸던 ‘황제펭귄의 무리’를 〈노팅 힐〉 포스터 옆에 걸어 놓았었다. 그리고 종종 세윤을 안고 그림과 포스터를 번갈아 가며 구경하곤 했는데, 어느 날 우리가 그렇게 꼭 끌어안고 그 앞에 서 있을 때 우리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선주 여사가 뒤에서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도선주 여사는 그 사진의 제목을 〈허들링〉이라고 지었고, 얼마 전에 귀띔하길 〈허들링〉도 이번 전시회에 냈다고 했다.

   나는 문득 조금 전까진 비명처럼 들릴 만큼 세찼던 빗줄기의 기세가 어느새 한풀 꺾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아도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밤부터 드디어 비가 잦아들 거라고 했었다. 그렇게 올해의 마지막 장마가 끝나면 남아 있던 여름의 열기가 가시고 진정한 가을이 시작될 거였다. 시계를 한번 확인했다. 벌써 일곱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지만 그래도 별 문제없이 시간 맞춰 잘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내릴 준비를 하기에 앞서 나의 영원한 ‘줄리아’에게,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그저 선택하며 살아왔을 뿐인 나의 이모 도선주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다가 멈추고 이내 도선주 여사의 밝고 들뜬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다솔아, 어디쯤이야?”

   “응, 나 거의 다 왔어. 이제 내려. 세윤이는?”

   “예지가 데려왔지. 참, 예지 어머님도 같이 오셨어.”

   “아, 정말? 금방 갈게.”

   전화를 끊은 뒤 우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차 벨을 누르고 버스가 전시회장 앞 정류장에 멈추기를 기다리며, 내가 언제부터 신나는 일이 생겨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어가 좌우로 데굴데굴 구르지 않았는지, 그 기쁨의 세리머니를 어떤 계기로 그만두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특별한 원인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크면서 자연스럽게 하지 않은 듯했다. 나중에 도선주 여사 앞에서 오랜만에 미친 척 데굴데굴 굴러 보면 도선주 여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는 상상을 이어 나갔다. 도선주 여사가 다 큰 나에게 이제 그만 자야지, 줄리아, 하고 언젠가 그랬듯 똑같이 말하자 내가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아이처럼 예스! 하는 그런 상상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며 정류장에 멈춘 버스의 열린 뒷문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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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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