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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나

  • 작성일 2023-08-18
  • 조회수 796

   하이에나

이준상


   퇴근길에 영훈이 그 노인을 도와준 건 실수였다. 그는 거동이 불편해 보일 정도로 허리가 굽은 늙은이였고, 마침 그가 가려는 목적지는 집에서 1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니 모셔다드리고 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기까지 했다. 오직 영훈이 과하게 베푼 호의가 있다면 노인이 갖고 있던 정체 모를 귤 상자 하나를 들어 주었다는 점 정도였다. 그는 도착한 뒤, 끝끝내 영훈의 메신저 아이디를 받아 냈다.

   “거참, 엄청 심심한 노인네구먼.”

   그날 이후, 매일같이 영훈은 고마웠다는 노인의 메신저 문자를 받았다. 문자 안에는 어떻게든 사례하여 보답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영훈은 그 문자를 읽는 것조차 귀찮았다. 눈으로 보고 코로 맡아 봐도 영훈의 귀찮음은 쉽게 느껴졌다. 그냥 모른 척하며 지나갈걸 하는 깊은 후회가 그의 찡그린 미간 속에 가득했다. 자신이 직접 자처하여 노인이 들고 있던 귤 상자를 건네받았다는 점이 그를 더 약 올리듯 짜증나게 했다. 심지어 그 귤 상자를 두 손으로 받은 것이 민망할 만큼 가벼웠다. 역시 호의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 단어가 지금 당장 사라져도 우리의 삶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

   오늘 아침에도 영훈은 노인의 문자를 무시했다. 아니, 무시하려 했다. 이번 주 들어 벌써 세 번째 연락이니 점점 무시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고는 반쯤 감고 있는 눈을 전부 뜨지도 못한 채 툴툴거리며 문밖으로 나갔다. 귀찮은 듯이 철커덩하고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에 나도 완전히 잠에서 깼다. 유난히 큰 대문 개폐기의 파열음만으로도 영훈의 심란한 속마음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무거운 크로스백을 짊어지며 돌아왔다. 어젯밤 빨래방 건조기에 넣어 둔 형광 유니폼 조끼와 수건들이었다. 유소년 축구 코치로 일하는 영훈은 일주일에 두 번씩 공용 빨래방에 있는 큰 세탁기를 이용했다. 한꺼번에 아이들의 유니폼과 연습용 조끼들을 빨래할 때 자신의 수건 몇 개를 같이 욱여넣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영훈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내 자리를 맴돌며 일어났다. 그는 아직도 내게 아무런 시선을 주지 않았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미 나를 한 번쯤 안아주거나 나와 함께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노인의 문자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불안하다 못해 위태로워 보였다. 역시 다른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도와주는 행위는 예기치 않은 위험을 초래했다. 받은 만큼 꼭 되돌려 줘야 한다는, 지독히 이기적인 생각을 가진 유형의 사람들 때문이다. 바로 며칠 전 그 노인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그것이 선의든 적의든 다르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다시 보복하고자 했고, 영훈은 안타까운 피해자였다. 하지만 무게마저 속여버린 귤 상자를 들고, 노인의 느린 걸음에 발맞춰 언덕길을 오르는 영훈을 상상해 보니 오히려 영훈이 철없이 느껴졌다. 나 같은 개의 눈에도 말이다. 


*


   “알마야, 밥 먹어.”

   샤워를 마친 영훈의 목소리는 조금 더 밝아졌다. 그는 늘 샤워를 마치면 기분이 정화됐다. 뒤통수에 세차게 물줄기를 갈기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했다. 나는 꼬리를 흔들며 영훈에게 달려갔다. 정확히는 영훈이 아니라 그가 내미는 내 밥그릇을 향한 것이었고, 그건 뜀박질보다 종종걸음에 가까웠다. 2년 전에 심한 닭고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이후로 내 주식은 언제나 연어 사료였다. 은은한 단맛이 돌던 닭고기가 꿉꿉한 연어에 비하면 더 맛있었던 기억이 두개골 속 어딘가에 어렴풋이 존재했다. 내 어금니의 저작 운동은 매우 활발했다. 그 누구도 내가 닭고기 사료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고 맛있게 식사했다. 2년 넘게 매일 같은 것을 먹고 있는데도 마르지 않는 허기는 매번 나를 허겁지겁 먹게 했다. 빨리 먹으면 포만감을 덜 느끼게 해 과식으로 이어진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사료의 양은 내 몸무게를 늘 예의 주시하는 영훈에 의해 정해져 있었다.

   내가 연어를 다 먹어 치울 때까지도 영훈의 머리카락에는 여전히 다 털어 내지 못한 물기로 축축했다. 목덜미에 무심히 얹힌 수건은 물기를 다 흡수하지 못한 채로 천천히 말라 가고 있었다. 그만큼 그는 노인의 마지막 문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문자의 내용은 강렬했고 영훈의 눈빛은 이제 귀찮은 정도가 아닌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이내, 놀라움의 알맹이는 공포감으로 뒤바뀌었고 여기에는 적대심의 껍데기까지 생겼다.

   ‘꼭 만나고 싶어서 그래요. 바쁘신 거라면, 아이들 수업 끝날 때 맞춰서 기다릴게요.’

   연속으로 서너 번 자신의 문자를 거절한 것에 보복이라도 하듯 노인의 문자 속에 담긴 호의는 공격적이었다. 꼭 만나고 싶다니. 기다린다니. 아직 영훈은 이전 문자들에 대해서도 답장 하나 보내지 않았는데, 이렇게 거침없이? 노인은 사회적 안전거리의 중요성을 깨부수듯 막무가내로 돌진했다. 타인의 영역을 동의 없이 침범하는 행위는 범법까지는 아니지만 (사람과 개들에게) 질타받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영훈에게 가장 소름이 끼치는 부분은 다름 아닌 그가 ‘아이들 수업’이라는 말을 남겼다는 점이었다. 그는 노인에게 자신의 직업을 말한 기억이 없었다. 


*


   영훈에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 영훈이 노인의 마지막 문자를 보고 동요하는 3~4일 동안 나는 말 그대로 시각 장애인 안내견 노릇을 했다. 집 근처 편의점이나 빨래방에 갈 때도 나는 그와 동행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리에 나를 두는 것이 영훈이 불안함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심지어 아이들 수업을 위해 30분 거리의 초등학교까지 나갈 때도 나를 데려갔다. 초등학교 운동장 끝 어딘가 적당한 곳에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를 그대로 방치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동행을 갈구했다. 이렇게까지 멀리 떨어트려 놔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다가도 솜뭉치 같은 강아지를 보고 소리를 꽥꽥 질러대며 정신 나간 듯 열광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나면, 내가 수업 시간 내내 격리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처사였다. 나는 가슴팍에 목줄이 매여 대문 밖을 나갈 때엔 세차게 꼬리를 흔들어댔지만, 목줄의 손잡이가 운동장 빈 축구 골대에 묶일 때면 시무룩한 엉덩이를 차가운 모랫바닥에 내리깔고 영훈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는 나의 얼굴을 한두 번 매만져 주다가 얼마 안 가서 반대편으로 걸어가 꼬깔콘과 임시 골대를 세우면서 그의 일과를 시작했다. 

   나는 같은 운동장에 있으면서도 공을 차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축구 유망주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가끔 힘 좋은 6학년 학생이 실수로 뻥 하고 공을 잘못 차버리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이긴 했다. 이처럼 영훈은 항상 나를 자신의 영역 경계쯤에 놓아두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빈 골대에 묶여 있는 나에게 의지했다.

   “얘들아, 얼른 와. 이쪽으로 와서 웜 업 시작하자.”

   한 무리의 5, 6학년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자기들끼리 조잘거리며 딴짓하는 다른 무리의 아이들에게도 영훈이 큰 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수업을 정식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서너 줄로 나뉘어 일렬로 놓인 꼬깔콘 사이로 뛰어다니며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간단한 뜀박질, 뒤로 뛰기, 옆으로 뛰기, 런지, 무릎 올려 뛰기 등 다양한 스텝 운동을 하고 나니 아이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나는 멀리서 그들의 땀 냄새를 맡았다. 먼 거리에서 언뜻 맡아 봐도 모두 개성 가득한 체취였다. 그에 반해 어금니처럼 생긴 자갈들이 섞인 운동장 모래 냄새는 옆 학교 운동장에서 맡았던 것과 비슷했다. 오래 맡을수록 고소한 향이 은은하게 맴돌아서 혀를 날름 내밀어 핥아 보니 그 맛은 생각보다 밍밍했다. 마치 간이 안 된 연어의 맛 같았다. 조리가 덜 된 연어맛 모래 위로 숙성이 덜 된 듯한 아이들이 체취를 풍기며 이러저리 쏘다녔다. 

   준비 운동이 끝난 아이들은 다시 큰 원을 만들고 그 안에서 패스 연습을 했다. 한 여섯 명쯤 되는 아이들이 원을 만들어서 빠르게 패스하며 공을 돌리고, 가운데에 있는 일종의 술래를 맡은 한 아이가 그 공을 뺏는 훈련이었다. 술래가 힘껏 달려가 발을 뻗어도 공은 금세 다른 친구에게 가 있기 일쑤여서 공을 건드리는 것조차 꽤 힘든 일이었다. 운동장 반대편에서 한참 동안 공을 쫓아 헉헉거리며 지쳐 가는 술래를 바라보면, 마치 다수의 응집은 개인의 전력투구보다 훨씬 위대하다는 가치를 보여주는 퍼포먼스처럼 보였다. 소속감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쉴 새 없이 도망 다니는 저 공을 잡을 수 있다는 술래의 자신감은 그저 허영심, 자만심, 멍청함 그 자체였다. 적어도 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차피 공은 멈출 생각이 없는데 왜 저렇게 뛰어다닐까? 안간힘을 다하여 저 공에 겨우 다다른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공은 또다시 도망간다. 저 공간에서 헛되이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상은 뻥뻥 찰 때마다 이리저리 휩쓸려 가는 공과 술래뿐이다. 나처럼 턱을 고소한 모랫바닥에 괴어 누울 수 있는 것이 큰 특권처럼 느껴졌다. 공이 원 밖으로 나가서 한동안 소강상태가 됐을 때 교문 방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하버지! 또. 또.”

   까랑까랑한 꼬마 아이의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다섯 살이 안 된 것이 확실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다섯 살 미만의 아이한테서는 특유의 고주파수 음파가 존재했다. 나 같은 소형견의 달팽이관에서 특히 더 강하게 공명하는 그런 기분 나쁜 주파수였다. 그것도 그런데 잠시만 하버지?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쓴 건가? 나의 귀를 의심했다. 할아버지? 옛날에는 자주 썼다고 들었지만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사어였다. 단어는 본래 의미를 잃으면 알맹이 없는 껍데기뿐이다. 껍데기가 되는 순간 단어는 죽는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 종속된 관계가 존재하던 옛 시절, 그러니까 서른 살이 지나도 부모에 대한 기억이 온전히 유지되던 시절에 살아 있던 단어들이었다. 지금껏 살려 두기엔 너무나도 불쾌한 단어들. 일단 부모 자식은 나이가 들수록 서로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다 못해 괴롭히는 존재들이었고,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단어로 불리는 힘없고 병약한 노인들은 자식들에게 처치하기 곤란한 계륵 그 자체였다. 몇십 년 동안 자신을 양육해 왔다는 귀찮은 기억 때문에 그들을 챙기곤 하면서도, 동시에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랐으니 말이다. 지금처럼 부모에 대한 기억이 말끔히 사라지고 완전한 남남이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명쾌하고 깔끔했다. 불필요한 종속 대신 완전한 자존이 가능했으니까. 망각은 완벽한 축복이니까.

   “아이고, 오르막길이 미끄럽네.”

   60대 정도로 보이는 이의 손을 잡은 사내아이가 교문 오르막길을 통과해 나타났다. 이제 막 뜀박질의 즐거움을 깨닫고, 모든 발걸음마다 점프하며 뛰어다니는 두세 살 정도의 아이였다. 문장을 완성하는 기쁨은 아직 깨우치지 못했는지 알아듣기 힘든 옹알이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강아지, 이리로 와.”

   강아지라는 단어가 나를 향한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아챘다. 그들의 대화 속 단어의 개수가 제한적인 것에 비해 의사소통은 제법 원활했다. 아이의 듣기 능력은 말하기에 비해 훨씬 뛰어나서 노인의 통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하기에 비해 뛰어난 듣기 능력이라… 정확히 나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래서 저 사람은 아이를 강아지라고 부른 거였나?

   “하버지? 하버지?”

   아이의 대답은 그저 ‘하버지’뿐이었다. 앙증맞게 자라난 앞니 틈 사이로 반쯤 새는 소리였지만, 다시 들어도 정확히 ‘할아버지’라는 단어였다. 믿기지 않았다. 단어 자체에서 느껴지는 생경함 때문에 앞발을 곧게 세워 모랫바닥을 마구잡이로 파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아버지라는 철자를 두 눈으로 본 기억은 떠올리기도 어렵다. 그저 다큐멘터리를 통해 전해 봤을 뿐이다. 그 단어가 존재했던 시절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 시대에 가장 끔찍했던 건, 죽을 때까지 유년기 시절 부모에 대한 기억이 그들의 뇌 신경세포 안에 협착되어 그들의 여생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기본적인 양육을 끝마친 후에도 부모는 자식을 끊임없이 돌봐야 하는 존재였다. 노년기에는 반대로 자식이 부모를 양육하는 이상한 형태로 뒤집힌 양육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식의 자식(즉, 손자녀)을 봤고, 다시 그들의 양육을 도우며 자신의 불행이 배가되는 것을 자처했다.

   이런 불필요한 기억은 계급 사회를 만들었다. 성별이나 나이 또는 혼인이나 자녀의 유무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경계가 사회 곳곳에서 생겨났다. 20대와 50대의 사람들이 다니는 식당의 분위기는 현저히 달랐다. 자식이 있는 사람과 독거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예를 들면 60세 정도의 노인이 20대의 남녀가 즐비한 카페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다수의 젊은 무리는 한 명의 늙은 인간을 향해 끊임없이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댔다. 그리고 이내 그 시선은 손쉽게 혐오로 확장됐다. 혐오는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 있지 않으면 생겨나는 법이다. 마치 입 안에 있어야 하는 침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혐오스러워지는 것처럼. 젊은 무리에겐 늙어빠진 노인이 그 카페에 있는 것은 누군가 입 밖으로 뱉어 놓은 침 덩어리 정도였다. 

   무리라는 행복의 개념을 왜 이렇게 역겨운 방식으로 소비했는지, 그 시절의 사고방식은 모두 다 잘못됐다. 지금의 무리가 잘 섞이는 포용력을 기본 가치로 둔다면, 그 시절은 획일화된 적대심이 무리 안팎으로 가득했다. 무리에서 튕겨져 나온 사람은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축구공만 쫓아다니는 술래나 다름없었다.


*


   “알마야, 이리로 와. 이제 가자.”

   고학년 수업을 모두 마친 영훈이 다가와서 빈 골대에 엉성하게 묶여 있던 목줄을 풀어 줬다. 평생 고질병인 기면증 때문에 내가 단잠에 빠진 지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폭염이었던 오늘 하루가 어느새 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잘거리던 축구교실 아이들도 ‘하버지’를 외치던 아이도 더 이상 운동장에 없었다. ‘하버지’라는 단어만이 비몽사몽인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하버지라고 했을까? 아니, 왜 그 노인은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가르쳤을까? 이미 죽은 언어를. 죽은 관계를. 무엇 하러, 왜?

   “네, 여보세요. 오늘은 제가 다른 일정 때문에 못 갈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 2주치 해 갈게요.”

   영훈은 이마의 땀을 닦지도 않은 채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모임 일정을 미루는 여러 건의 통화였다. 퇴근 후에 서너 개의 모임을 한꺼번에, 그것도 바로 직전에 취소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개와 마찬가지로 인간들 무리에서도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배신하지 않는 것, 즉 작은 시간 약속도 어기지 않는 것이다. 충동적으로 오늘의 일정을 모두 취소한 영훈의 얼굴에는 여전히 망설임이 가득했다. 그건 텅 빈 시간표 위에 덩그러니 놓인 노인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하아, 다 취소하고 가는 게 맞는 거야?”

   ‘어제 그 문자 때문에 그래?

   “영 찝찝한데….”

   ‘왜? 그다음에 또 뭐라고 문자 왔어?

   “나에 대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는 내 대답을 무시하고 빈 운동장에 대신 질문했다. 혼란스럽고 답답해 보였다. 나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체취는 평소 같지 않았다. 혹시 좀 전에 내가 너무 깊게 자느라 그의 부름에 바로 답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닐지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영훈은 나를 끌고 아무 말 없이 운동장 밖으로 나섰다. 

   ‘영훈,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집으로 가?’

   힘껏 꼬리 치며 짖어 봤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그의 뒤꿈치를 콧등으로 건드려도 그는 무응답으로 답했다. 단지, 나는 그 무응답 속 혼란스러움이 나로 인한 것이길 바랐다. 그의 온 신경이 나에 대한 서운함으로만 가득 차서 노인을 향한 불안함은 전부 잊었으면 했다.


*


   “안녕하세요.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안녕하세요.”

   “그날은 집에 잘 들어갔어요?”

   “네.”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그때 정말 고마워서 꼭 보답하고 싶어서요.”

   영훈은 아무런 대답을 안 했다.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집요하게 영훈을 괴롭혀 온 사람치고는 노인의 얼굴은 태연했다. 뻔뻔하게 자기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범죄자의 표정 같아서 가증스럽기도 했다.

   “한번 대화해 보고 싶기도 했고….”

   바로 본색을 드러내려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영훈은 심기가 불편해졌지만, 동시에 하루 종일 가려웠던 곳을 긁어 주려는 것 같아 시원했다.

   “네, 한번 말씀해 보세요. 왜 연락하신 거예요? 제가 일하는 곳은 어떻게 아셨어요?”

   “일단 앉죠, 우리.”

   노인의 호흡은 느리고 병약했다. 대답하려다가 기침이 나오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1분 넘게 기침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늙은 인간의 병약한 기침 소리는 내 귀를 더럽혔다. 그 느낌은 너무 불쾌해서 내가 5성급 호텔 로비에 와 있다는 사실도 잊게 했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만들어 놓은 럭셔리한 로비도 사실 내겐 볼품없었다. 뭐, 어차피 호텔의 별이 몇 개든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한테나 중요한 일이었다. 오줌 한 방울 못 누는 대리석 기둥이 즐비한 곳은 그저 럭셔리한 감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노인이 시킨 아메리카노 원두의 원재료는 고양이 똥이라고 하니 오줌을 억지로 참아 내고 있는 나의 상황이 더더욱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저는 카페보다 호텔 로비를 좋아해요.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 괜히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여행 가는 거 좋아하나요?”

   한참 동안 시간 끌던 노인이 대뜸 영훈의 취향을 묻는 말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것보다 지금 저를 왜 부르셨는지가 궁금한데요.”

   “뭐 그거야, 차차 이야기하면 되는 거고. 그냥 우리 편하게 이야기하죠. 커피도 한 입 하시고. 커피 좋아하죠?”

   “죄송한데, 그렇게 편하지 않아서요.”

   “그래요, 그럴 수 있지.”

   노인은 모두 예상했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거렸다. 커피 마시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왜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 놓고 커피나 마시고 있냐고 따지기도 애매했다. 영훈도 노인이 시켜 놓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 

   “할아버지라는 단어 들어본 적 있나요?”

   이번 질문을 하는 노인의 말끝에는 작은 떨림이 있었다. 아주 미세해서 나만 알아챌 수 있는 정도의 떨림이었다.

   “알기야 알지만… 그건 왜요?”

   “제대로 알고 있죠?”

   “네, 그렇다고요.”

   “그럼, 할아버지라고 하면 뭐 떠오르는 건 없나요? 어떤 종류의 느낌이라든지?”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거죠? 그냥 속 시원히 말해 보세요. 왜 자꾸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거예요? 질문에 답해야 하는 건 오히려 그쪽이라고요.”

   호텔에는 오아시스의 〈Wonderwall〉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팝송 수집이 취미인 영훈이 특히 어릴 적부터 즐겨 듣던 오아시스의 명반 중 하나였다. 노인의 표정은 후렴구가 들리는 동안 잠시 진지했다. ‘You are my wonderwall’이라는 가사가 제법 잘 어울릴 만큼 결연했다. 그렇게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나도 엎드린 채로 둘을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망설임이 보였다. 

   “아, 미안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문해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하길래. 당신을 시험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서.”

   잠시 후, 호텔 직원이 다 먹은 잔은 치워 주겠다며 다가왔다. 노인이 꼬았던놨던 다리를 풀자 무릎과 오금 사이에서 오랫동안 땀으로 짓눌려 있었던 눅눅한 면의 냄새가 폴폴 풍겼다. 그가 우리를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다린 것 같아 괜히 기분이 불쾌했다. 우리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이라면 도리어 미안했겠지만, 제시간에 도착하는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 만큼 일찍 도착하는 건 상당히 무례한 짓이었다. 그는 커피잔을 치워 주는 직원에게 맥주를 요구했다.

   “병맥주는 종류별로 있고, 생맥주는 아사히인데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생맥주로 할게요.”

   직원이 맥주를 가지러 간 사이 그는 나를 다정한 눈으로 쳐다보며 영훈에게 물었다.

   “소형견을 선호하시나요? 저도 말티즈가 있는데.”

   나는 나를 말티즈라는 하나의 종으로 정의하는 것에 신물이 난 상태였다.

   “네, 뭐 그런 편이죠.”

   “대형견은 똥오줌 치우는 것도 더 오래 걸린대요. 사료비도 훨씬 비싸고. 소형견 두 마리가 대형견 한 마리보다 나은 것 같아요.”

   그는 모욕적인 말들을 연이어 뱉어 냈다. 나를 하나의 종 아니면 치우기 편한 똥오줌으로 여기고 있었다. 인간이 우리를 먹이고 똥오줌을 치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였다. 그들만이 할 수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그들의 똥오줌을 치워 줄 수는 없으니까. 마치 인간은 개에게 사료를 먹이며 배변을 치워 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개는 그 대가로 꼬리를 흔드는 노동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이해타산적 사고방식이었다. 

   “저는 그냥 작고, 흰 강아지가 좋아서요.”

   “저도 그래요. 우리 집에도 말티즈 두어 마리 있어요.”

   두어 마리? 자기 반려견이 몇 마리인지도 모른단 말인가. 기가 차서 그에게 하품을 크게 갈겼다. 그는 가볍게 무시하며 계속 영훈과의 대화를 주도했다.

   “말티즈라는 단어는 몰타에서 온 거예요. 이탈리아 밑에 작은 섬나라 알죠? 종의 원산지가 몰타섬이라서 그렇게 됐다는 설이 있어요. 근데 이제는 아무도 모르죠. 몰타가 나라인지 도시인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아요.”

   종, 종! 그놈의 종이라는 이야기 좀 그만하면 안 되나? 말티즈인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예전에는 개 사이에서도 혈통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내 조상이 진돗개나 삽살개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말이다. 

   직원이 가져다준 맥주를 입에 가져가기 전에 그는 맥주잔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펴봤다. 이내 손가락을 맥주잔 반대편에 놓으며 새로운 대화 주제를 꺼냈다.

   “사람들은 맥주를 향과 맛으로만 먹지만, 난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눈. 눈으로도 먹어야 하거든요. 봐요, 손가락 마디들이 거의 안 보이죠. 밀도 높은 밀 맥주라는 뜻이에요. 저는 밀 맥주를 좋아하거든요. 맥주 좋아하세요?”

   “네, 저도 먹긴 하는데, 밀 맥주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하나 시키실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노인은 영훈의 취향을 조사하기 위해 부른 건가, 착각이 들 정도로 자잘한 질문을 난사해 댔다. 지난 며칠간 끈질기게 문자를 보내오던 것이 단지 이것 때문이었나 싶은 이상한 의문점이 늘어갈 때쯤 노인이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요 며칠, 저 때문에 많이 귀찮았죠?”

   영훈은 침묵했다.

   “그래요. 그랬을 것 같아요. 제가 영훈 씨를 왜 그렇게 만나고 싶었냐면… 처음부터 다 말하자면 좀 긴데, 그리고 전부 다 말해도 아마 영훈 씨는 바로 이해하기 어려울 거예요. 젊으니까 더더욱 그럴 거고. 서론이 길죠? 아무튼 그래서….”

   개의 귀로 들어도 요점이 불명확한 문장들만 나열되고 있었다. 그는 말을 하는 듯 마는 듯, 혀끝에서 헛도는 서론을 주절거리다가 갑자기 자신의 의자 뒤편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의자와 거대한 호텔 로비 기둥 사이에 놓여 있던 것은 일전에 영훈이 들어 주었던 그 귤 상자였다. 영훈이 쓸데없이 호의를 베풀며 도와주었지만 예상보다 너무 가벼워 배신감만 느끼게 했던 바로 그 상자. 그의 주름지고 마른 손으로 힘겹게 연 귤 상자 속에는 귤 대신 알 수 없는 A4용지 열댓 장이 들어 있었다. 그중 아무 종이 한 장을 집어서 영훈 앞에 내려놨다.

   “내가 영훈 씨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입니다.”


*


   개들의 가청 범위는 45,000헤르츠를 넘나들기 때문에 나는 고주파수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 컵이 떨어지는 소리, 휘파람 소리, 흐느끼며 우는 소리, 공기 한 줌을 손바닥 사이에 두고 치는 박수 소리가 그렇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자극하는 소리는 깨물 때마다 삑삑거리는 이 장난감 인형 소리다.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다른 청각적 자극은 모두 마취에 걸린 것처럼 먹먹해지고, 삑삑거리며 요란하게 울려대는 장난감 인형 내부의 플라스틱 부속만이 내게 투명하고 맹렬하게 다가온다. 

   하필 그 소리가 조금 전 호텔 로비 어디에선가 울렸다. 어떤 개자식이 신나서 삑삑 물어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기 마련이다. 알 수 없는 개가 무차별적으로 쏘아버린 마취 총 때문에 나는 자신이 영훈의 할아버지라는 충격적인 발언 이후의 대화를 잠시 동안 놓쳐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을 때는 이미 영훈이 노인에게 연달아 질문을 하고 있었다.

   “실종이요?”

   “그래요, 그쪽도 이 말티즈가 사라지면 찾아다닐 거잖아요? 그것처럼 당신은 저에게 실종된 가족이었어요. 알아요, 무슨 말인지 지금 이해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저를 어떻게 기억하시는 거예요?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서른이 지나면 기억은 사라진다고요. 저는 엄마에 대한 기억도 없는데, 엄마의 아버지라뇨.”

   “할아버지. 그걸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영훈의 손에는 조금 전 노인이 귤 상자에서 꺼낸 A4용지 종이가 반쯤 구겨져 있었다. 거기에는 영훈의 아주 어린 시절 사진이 있었고, 핸드폰 전화번호와 함께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문장만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저는 보육원에서 자란 걸로 알고 있어요. 애초에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그거예요. 그게 지금의 저희를 만든 거예요. 지금은 더 이상 조부모와 손자녀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법적으로 부모의 기능을 상실한 경우에 한해서 조부모가 대안적 부모가 될 수 있었죠. 유아기에 한해서요.”

   “대안적 부모요?”

   “네, 법적으로 그렇답니다.”

   “그게 법적으로 된다고 해서 되는 건가요?”

   “혈연적으로도 그러니까요.”

   끔찍했다. 역시 노인이 내뱉는 모든 문장은 모욕적이었다. 말티즈가 몰타 출신이라며 혈통을 강조하더니 여기서도 자신이 영훈의 혈연적 조부모라는 개소리만 늘어놓았다. 호의. 혈연. 불현듯 히읗, 이응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은 모두 쓸모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다른 단어들도 생각해 보려는 순간, 영훈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앉아 있던 나를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그의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요?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뭐예요? 제 조부모라서 뭐, 돈이라도 달라고 하시는 건가요?”

   “아니지, 보통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돈을 달라고 하질 않아요. 게다가 나는 돈이 아주 많다고요.”

   “그럼 대체 왜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저를 찾아서 뭐 하시게요?”

   “가족이니까요.”

   영훈은 도통 그 말의 저의가 뭔지 모르겠다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노인을 쳐다봤다. 나 또한 그랬다. 가족? 무엇을 하면 가족이고, 무엇을 안 하기에 가족이 아닌지 헷갈렸다. 수십 년 전처럼 저 노인의 재산이라도 상속받아야 가족인 건가? 혹시라도 무책임하게 빌린 돈들을 자기 핏줄이니 대신 갚아 달라고 호소하려는 건가? 영훈의 손에 들린 종이가 차용증이 아니라 실종 전단지인 게 새삼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어쩌면 그 사람은 치매 증상의 초기를 겪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곧 자신의 정신이 온전치 않을 예정이니 앞으로 잘 좀 보살펴 달라는 간청의 메시지일 수도 있었겠다. 이러나저러나 그 요청은 현관 앞에 음식물 쓰레기를 투척하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 그리고 이거.”

   노인이 건네준 건 영훈의 오래된 명함이었다. 수년 전 계약직 체육 교사로 일할 때 만들었던 것인데, 아직도 영훈의 크로스백 앞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영훈은 더 이상 체육 교사로 일하지 않지만 일부러 그 명함을 가방에서 빼지 않았다. 자신을 소개할 때 교사라고 말하는 편이 낯선 무리 속으로 들어가기에 훨씬 더 수월했다. 게다가 명함 속 단어들로는 계약직과 정규직을 구분할 수 없었다.

   “어릴 적 얼굴이 남아 있을까 궁금했는데 여전히 있더라고요. 처음 영훈 씨를 봤을 때부터 긴가민가하면서 망설이다가 이름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헤어졌어요. 그런데 이게 떨어져 있었어요. 이영훈이라고 떡하니 쓰여 있더라고요. 그렇게 오랫동안 수소문했는데 결국 영훈 씨를 찾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영훈이 그 귤 박스만 들어 주지 않았어도 이 사단까지는 안 벌어졌을 것이다. 빌어먹을 호의를 무리 밖 사람한테 주는 건 결국 이런 비극을 낳는다. 언제나 그래 왔다.

   “제 가족이셔도 저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요.”

   “그럼요. 저도 바라는 게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같이 맥주나 커피 한잔 같이하면 좋으니까요. 가족끼리.”

   삑삑. 다시 한 번 로비 라운지 건너편에서 장난감 인형의 고주파 소리가 들렸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내 귀를 마비시키고 싶지 않았다.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아니, 다물지 말고 인형을 가만히 좀 내버려 둬. 한 5분만. 2분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꼬리는 서서히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젠장.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요즘은 기억력이 좋아지면 쇠약해졌다고 하죠. 내가 어릴 때는 그 반대였는데. 부모님이나 자식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하면 앞다투어 자기들이 알고 있는 대학병원 전문의를 추천해 주죠. 안타깝다는 눈빛과 함께. 맞아요, 저는 아마 기억력이 좋아져버린 환자일 겁니다. 나의 부모님, 그리고 나의 딸과 당신까지 나는 모두 기억합니다. 불행해 보이나요?”

   유년기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은 무시무시한 형벌이다. 내 온몸이 삑삑 소리에 손쓸 틈 없이 마취되는 것처럼, 그 앞에서 사람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된다. 저 노인도 분명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기억이 그의 나이 든 뇌세포를 침윤했을 것이다. 

   삑삑. 또 한 번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내 귓속 신경세포를 향해 파고들었다. 나도 노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나의 모든 초점은 장난감 인형에 맞춰졌고, 다른 것들은 모두 옅어져 갔다. 


*


   한 발씩 내디뎠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 느린 발걸음이어야 했다. 표적은 태평하게 천장이나 바라보며 드러누워 있으니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천천히 다가가다가 한순간에 낚아채야 했다. 그의 어떤 시신경과 달팽이관도 내가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안주하는 바로 그때 우람한 앞발을 내밀어 그를 위협하고, 탄탄한 뒷다리로 전방을 향해 추진력을 얻은 후 뾰족한 송곳니로 그의 목덜미를 물어 삼켜야 했다. 이 모든 동작은 몇 초 안에 일괄적으로 일어나야만 했다. 나는 힘껏 몸을 던졌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어금니 틈으로 흘러나와 당황했지만 다행히 표적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비로소 민첩한 앞발로 그를 잡아냈다. 서둘러 가슴과 목 사이의 급소를 찾아내 단단한 턱 근육으로 먹잇감의 숨통을 끊었다. 그러자 소리가 들렸다.

   삑삑.

   “호랑이 같은 녀석이구먼. 아주 멋진 사냥이었어.”

   노인이 비웃으며 말했다. 나는 장난감 인형의 한쪽 몸통을 물고 있었고, 영훈은 그 인형의 두 다리를 쥐고 양옆으로 이리저리 흔들어대고 있었다. 난 신이 났다. 신이 나서 으르렁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알마야, 이제 그만. 위로 올라와.”

   여전히 우리는 같은 호텔 로비에 있었다. 영훈은 나를 다시 그의 무릎 위로 올려놓고, 내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먹잇감을 자처했던 장난감 인형은 그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언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만족스런 사냥놀이였지만 한 번밖에 하지 못한 것이 썩 아쉬웠다.

   “아무튼 일주일에 한 번만 이렇게 만나면 된다는 거죠?”

   “네, 그래 주면 저야 고맙죠. 그래야 한다기보다는 그러면 어떨까 하는 제안이에요. 영훈 씨 여러 모임들 많이 나가잖아요, 그렇죠? 요즘 사람들은 모임 없으면 못 산다고 들었는데. 이것도 그냥 그중 하나면 어떨까 해서요. 가족 모임.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음, 근데 보통 둘이 만나는 모임은 없어서요.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럼, 강아지랑 같이 나와요. 나도 우리 집 말티즈 데리고 나올게요.”

   이럴 때만 나를 끼워 팔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말티즈라고 묶어버렸다. 각자의 이름이 다 있을 텐데 노인은 우리를 강아지, 말티즈, 소형견 따위로 불렀다. 나도 그를 여전히 노인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보복으로 시작됐지만 이젠 그의 이름이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지.

   “거절하면 안 되는 건가요?”

   “당연히 되죠. 괜찮아요. 저라도 이런 머리 다 벗겨진 늙은이가 갑자기 나타나서 할아버지 아, 그러니까 같은 핏줄이니까 같이 커피 마시자고 하면 당황할 것 같아요. 영훈 씨는 아무런 기억도 없을 텐데. 그냥 부담 없이 나중에 생각나면 연락해요. 혹시 궁금하면 어린 시절에 대해 들려줄 수도 있고요.”

   “어린 시절이요?”

   “네, 영훈 씨 어렸을 적이 궁금하면요. 옹알이하던 아주 어린 시절이지만 보육원 들어가기 전까지 제법 긴 시간이었어요. 그땐 정말 나만 졸졸 따라다녔었는데.”

   아까 빈 골대에 묶여 영훈을 기다릴 때 ‘하버지’ 하면서 노인을 쫓아다니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친구도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그 노인을 따라다니는 걸까? 영훈도 삼십 년 전에는 지금 저 사람을 하버지라고 불렀을까? 나는 불신했다. 그 노인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가 말하는 모든 문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겁이 났다. 차라리 그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게 더 믿기 쉬웠다. 내가 이제 치매 환자가 되었으니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핏줄이 나의 간병인이 되어 자신의 똥오줌을 치워 달라는 말이 훨씬 더 정확할 것 같았다. 어쩐지 좀 전에 소형견이 대형견보다 똥오줌을 치우기 쉽네 마네 하는 말들을 왜 하나 싶었는데 그제야 말이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영훈의 개가 되겠다는 뜻이었다. 초대형견이 되어 자신의 똥오줌을 영훈이 치워 주길 바라고 있었다. 꼬리도 못 흔드는 늙은 인간 주제에. 


*


   가족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호텔 로비에서 노인과 마주한 뒤, 지난 3개월 동안 영훈의 일상에선 많은 것이 변했다. 변질됐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낫겠다. 노인과의 첫 만남이 끝나고 영훈은 일주일 동안 시종일관 가족, 할아버지라는 단어들을 뇌까리며 자신의 침대 앞을 서성거렸다. 깊은 생각에 빠진 모습이 얼핏 보면 조현병 환자의 초기 증상 같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환각에 빠지는 것보다는 새로운 단어에 호기심을 갖는 것에 더 가까웠다. 한동안 고민하던 영훈이 결국 먼저 노인에게 연락을 했다. 둘은 다시 같은 호텔 로비에서 만났고, 이번에는 나는 동행하지 않았다. 영훈은 낯선 이와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궁금해했다. 그 이후 둘의 만남은 조금씩 더 자주 반복됐다. 만나는 시간과 장소도 더 다양해졌다. 대낮의 한적한 찻집에서 만나거나 퇴근 후 골목길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주말이 되면 노인의 취미가 궁금하다며 그가 자주 가는 경마장에 따라가거나 영훈이 일하는 초등학교에 가서 서로의 일상을 엿보기도 했다. 

   “영훈이 너는 이 친구들보다도 훨씬 더 작았어. 또래들보다 말도 더 늦게 하고, 표현을 못 하니까 짜증내기 일쑤였지.”

   “제가요? 누구한테 짜증을 내요?”

   “나한테 내지. 나만 졸졸 따라다니고. 얼마나 쫓아다니는지, 내가 화장실 가는 그사이를 못 참고 하도 울어대서 내 옆에 나란히 앉힌 채로 볼일을 보고 그랬어.”

   “할아버지 화장실까지요? 그렇게까지?”

   “이 친구들도 몇 년 전이었으면 자기들 엄마, 아빠한테 똑같이 그랬을 거야. 커 가니까 그런 기억들이 사라지는 것뿐이지.”

   영훈이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발음은 어느새 많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영훈은 조금씩 노인을 자신의 할아버지로 인정했다. 그가 들려주는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기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어떤 모임에서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생겨나는 일상이 아니라 사라지는 일상이었다. 영훈이 노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원래 있던 모임들의 참석 횟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수요일 밤마다 가던 공포․오컬트 영화 클럽은 깐깐했던 클럽장 때문에 두어 번 참석하지 못하자 한 달 만에 바로 제명 조치를 당했다. 다른 모임들도 비슷했다. 매번 자신들의 무리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는 영훈을 불만 섞인 눈초리로 바라봤고, 모임 속에서 영훈을 제외한 소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리의 대원칙을 어긴 영훈에게는 이처럼 가차 없는 징벌이 계속 가해졌지만 정작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사라지는 모임을 대신하여 자기 할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나 또한 영훈으로부터 점점 소외됐다. 그는 노인과 둘이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고, 그가 나갈 때마다 아직도 대문 여는 방법을 모르는 나는 집에 혼자 남겨졌다. 가끔 노인의 반려견과 함께 만날 때에는 나도 영훈과 동행했지만, 그는 여덟 마리나 되는 반려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데리고 외출하는 것이 아니면 혼자 다니기를 선호했다. 나는 어떻게 그 노인이 이갈이도 안 한 쫑이부터 열다섯 살의 노령견 돌돌이까지 이렇게나 많은 강아지와 나날을 보내는지 궁금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부러운 점이었다. 

   노인은 영훈을 만나는 것 외에는 다른 특별한 모임이 없었다. 일요일마다 성당에 가는 종교 활동을 빼고는 그 어떤 사교 모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갖지 못한 것인지 자의로 갖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아무런 모임에도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은 내 9년 견생에서 처음이었다.


*


   ‘오늘도 시간이 안 되신다고요?’

   영훈이 머리를 말리며 애타는 문자를 보냈다. 일주일 전부터 노인의 연락은 뜸해지기 시작했다. 영훈이 그를 자신의 할아버지로 확신하게 된 지 넉 달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영훈과의 약속을 파투 냈다. 주변 사람들의 부고 소식 때문에 갑자기 장례식을 갔어야 했다는 게 그의 핑계였다. 장례식이 아니라면 병원이었다. 예를 들면 욕실 바닥을 잘못 밟고 미끄러져서 꼬리뼈와 무릎이 부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고, 핸드폰을 집에 두고 가는 바람에 병원에 며칠 동안 입원했었다는 식이었다. 친구가 죽었고, 뼈가 부러졌다니 영훈도 갑작스럽게 약속이 취소돼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난 노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사람이 참석해야 할 장례식이 많다는 것부터 의심스러웠다. 

   결정적으로 난 그의 거짓말을 직접 목격했다. 지난달, 노인이 심한 기침을 한다는 이유로 영훈과의 약속을 하루 전에 취소한 적이 있었다. 병문안을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손자한테 감기를 옮기는 것만은 할 수 없다며 영훈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영훈은 아쉬운 대로 나와 함께 집 근처 산책을 나섰는데, 나는 그날 저 멀리서 노인이 언덕길을 올라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코로 맡았다. 분명 그의 체취였다. 놀라운 점은 그때 그의 두 손에 귤 박스가 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 영훈의 실종 전단지를 싣고 나르던 바로 그 귤 박스였다. 나는 목청껏 짖고 꼬리를 흔들며 영훈에게 이 사실을 알려댔지만, 그는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과하게 흥분했다고만 생각하며 나를 진정시켰다. 정말 인간의 단어 하나를 아직까지 말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서글픈 순간이었다. ‘저기’라는 단어 하나만 말할 수 있어도 됐을 텐데. 말은 못 했지만 대신 내 꼬리를 믿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 더 힘차게 흔들었다.

   허무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인에 대한 의문점이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왜 노인은 영훈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밖을 왜 저렇게 서성거린 거지? 역시 치매인가. 치매 환자들은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무엇에 홀린 듯이 옛 시절에 자주 가던 거리를 걷는다고 했다. 요즘 들어 늘어난 그의 의심스러운 행동과 아까 봤던 그 모습은 분명 치매 환자의 증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헛것을 본 건가? 내가 치매인가? 벌써 아홉 살이니 그럴 법도 했다.


   “알마야, 너무 심심하다. 너무 심심해서 우울해.”

   영훈은 나한테 자주 심심하다고 투덜대며 장난감 인형을 삑삑거렸다. 그의 말을 들어주며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내 신경은 그가 던진 인형에게 향했다. 영훈이 안타까우면서도 이제 언제나 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이 내심 기뻤다. 이건 그가 외로움을 느낀다는 뜻이었지만 내가 그 외로움 옆에 놓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오후가 되자 영훈은 나와 함께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출근했다. 난 오랜만에 묶이는 골대가 반가웠다. 차가운 하얀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지긴 했어도, 내가 올 때마다 목줄의 한쪽 끝을 단단히 잡아 주는 고마운 녀석이었다.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친구의 발밑에 오줌을 갈겼다. 그러고는 앞에 앉아서 연어 사료 냄새가 나는 고소한 모래 향을 맡았다. 

   영훈의 훈련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됐다. 저학년 수업이 끝나자 5학년, 6학년 수업을 차례로 진행했다. 갈수록 고학년의 슈팅 훈련의 난이도는 높아졌고, 콤비네이션 패스 훈련은 순서가 너무 복잡해서 외우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나 이상한 점은 그가 더 이상 술래잡기 훈련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저학년 교실의 경우에는 여럿이 모이는 단체 훈련 대신 두 명이 짝을 짓고 하는 헤더, 트래핑, 패스 훈련을 중점적으로 했다. 체취를 풍기며 한심하게 뛰어다니는 술래의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모든 수업이 끝나가고 날도 점점 어둑어둑해질 때쯤, 영훈은 운동장 한쪽 끝으로 이동하면서 전화 통화를 했다. 오랫동안 통화하는 것을 보니 꽤 심각한 연락 같았다. 영훈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곧 전화를 끊더니 수업을 5분 일찍 조기 종료하고 아이들을 급히 해산시켰다. 그러고는 영훈은 꼬깔콘과 유니폼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나를 향해 뜀박질해 왔다. 오줌을 눈 골대와 미처 인사를 하지도 못했는데 영훈은 정신없이 내 목줄을 풀고 나를 그의 가슴팍에 고정시켜 사정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항할 틈도 없이 그가 가는 곳을 향해 나의 몸을 맡겼다. 


*


   “이영훈 씨, 서울시 동남구 삼정동 354-2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경찰서 바닥에선 온갖 종류의 냄새가 났다. 주로 알코올 계열의 향이 깔려 있었고 그 위로 사람 오줌, 개 오줌과 함께 젖은 아스팔트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가끔 피 냄새도 나의 콧속을 들락날락거리며 간지럽혔다. 흥미로운 향이 많아서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나와 달리 영훈의 마음은 근심으로 가득했다. 

   “김건우 씨랑 연락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죠?”

   “저희 할아버지랑요? 작년 10월부터니까 한 넉 달 정도요. 무슨 일이 있나요? 혹시 할아버지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할아버지… 그 뜻이나 알고 말하는 겁니까?”

   떼꾼한 눈의 경찰관은 영훈을 비꼬며 물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영훈의 뒤편을 가리켰다. 가로로 길게 늘어진 목재 의자에는 영훈과 비슷한 또래의 남녀들이 다른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몇 명은 허망해 보였고, 몇 명은 대기 시간이 길어서인지 몹시 피곤해했다.

   “저 사람들이 가해자인가요? 할아버지가 저 사람들한테 맞았나요?”

   영훈은 흥분하며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일어났다. 흔들리는 내 꼬리의 주파수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경찰관은 전부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귀찮은 한숨을 쉬었다.

   “맞긴 했죠. 근데 가해자는 그쪽 할아버지, 아니 그니까 김건우 씨예요. 저 사람들은 모두 피해자고.”

   “피해자요? 왜요, 할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죠? 

   “자, 그건 이제 차차 알려 줄 테니까 기다려요. 그리고 미리 말해 두지만 혹시라도 본인이 여기 보호자 신분으로 왔다고 생각하면 실망할 겁니다. 당신도 피해자니까.”

   “네?”

   경찰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는 엎드려 졸면서 조사를 받고 있는 상습 절도범의 뒤통수를 검은색 클립보드 모서리로 가볍게 내려쳤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박스를 하나 들고 나타나 영훈의 책상 앞에 툭 내려놨다. 그건 노인의 귤 박스였다.

   “보신 적 있죠? 어린 시절 실종됐다고 하고. 본인이 영훈 씨 어머니의 아버지, 그니까 할아버지라는 표현을 쓰면서 접근한 거 맞죠? 다 같은 수법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같은 방식으로 당했어요.”

   귤 박스 안에는 수십 장의 실종 전단지가 들어 있었다. 놀랍게도 전단지 속 어린아이의 얼굴은 모두 달랐다. 그 속에는 어린 영훈도, 다른 피해자의 어린 시절도 담겨 있었다. 영훈은 떨리는 손으로 전단지들을 여러 장 훑어 봤다. 훑어 보는 영훈의 얼굴에는 생기가 전혀 없었다. 하얗게 질린다는 표현은 지금 영훈의 표정을 묘사하기 위해 생겨난 것 같았다. 

   “놀라셨을 거예요. 김건우 씨 상습범이에요. 페어런츠피싱. 들어본 적 있죠? 이영훈 씨도 조금 이따가 다시 정식으로 참고인 조사 받아야 하니까, 저기 뒤쪽에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경찰관은 점심시간에도 쉬지 못하고 일한 은행원처럼 영훈의 반응을 귀찮아했다. 영훈은 마치 번호표를 뽑은 고객처럼 피해자들 무리로 순번을 지켜 합류해야 했다. 오직 다른 것은 번호표 대신 가짜 실종 전단지를 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그는 영락없이 피해자 모임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저기 잠시만요. 근데 왜 그런 거죠? 그 사람이 저한테 왜 접근한 거죠?”

   영훈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이 피해자가 된 이유를 간곡히 찾으며 자신의 허망함을 달래려 했다. 영훈이 여러 번 소리쳐도 담당 경찰관은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돌아섰다. 그 공간에서 소리치는 사람은 영훈이 유일했다.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뒤돌아서 있는 경찰관을 향해 피해자가 소리치는 장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이 형씨, 이리 와요, 내가 설명해 줄게. 경찰관 아저씨들은 바쁘니까. 먼저 냉수도 한 잔 자시고. 결명자차도 있는데 이거 줄까?”

   피해자 중 제일 가해자처럼 생긴 남성이 넋을 잃은 영훈에게 말을 건넸다.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삭발한 지 두세 달 정도 지난 듯 보이는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의 길이는 2cm도 안 될 정도로 짧으면서도 동시에 신기할 정도로 매우 지저분했다. 그 노인을 만난 지 넉 달밖에 안 됐지만 벌써 영훈의 일상이 많이 어지러워진 것과 흡사했다.

   “괜찮아, 괜찮아. 상습범이라 금방 처리될 거야. 지금 혹시 다른 피해자들이 더 남았는지 수소문하고 있대. 피해자 목록만 정리되면 다 끝날 거야. 페어런츠피싱 뉴스에서 본 적 있지?”

   “페어런츠피싱이요?”

   “부모였다고 말하면서 접근하는 사람들 말이야. 나도 듣기만 했지 당한 건 처음이라 엄청나게 당황했지. 페어런츠피싱은 있어도 그랜드페어런츠피싱은 처음 들어, 파하하.”

   그는 분명 피해자 중 가장 험악해 보였지만 또 제일 유쾌하고 호탕했다. 자신이 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의연하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럼, 저분이 제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건가요?”

   “그 단어 좀 그만 말해. 오늘 하루 동안 그 단어를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평생 들어야 하는 양을 다 몰아서 들은 것 같다니까? 당연히 아니지. 그냥 독거노인이야. 외롭고 역겨운 독거노인.”

   영훈은 벙쪘다. 지금껏 노인의 모든 것이 가짜고 연기였다는 사실에 실망을 넘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데 이르렀다. 처음 귤 박스를 들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것부터 호텔 로비에서 같이 커피를 마시는 것까지 모두 같은 수법의 사기 범죄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심심한 인간이었던 거야. 어떻게 보면 불쌍해 보일 뻔도 했는데, 아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뻔뻔하게 나타나는 것 보고 화딱지가 나더라고. 턱주가리를 한 대 갈겨 줬지.”

   노인이 맞았다는 건 사실이었다. 때린 사람은 역시 이 남자였다. 목재 의자에 앉아 있는 피해자 중에서 노인을 향해 거침없이 주먹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이 남자가 유일했다. 아무리 분통이 터지더라도 나이 많은 인간을 때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자가 노인의 턱주가리를 갈겼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난 고마운 마음에 그 사람 발등에 내 코를 문질렀다. 

   “아니 근데 저는 피해 본 게 없는데요? 이분이 저한테 돈을 요구한 적도 없다고요. 혹시 저도 모르게 제 계좌에 손을 댔나요? 그리고 실종 전단지는 어떻게? 제 어린 시절 사진은 어디서 구한 건가요?”

   “자자 알아, 알아. 형씨 마음 다 아니까 천천히, 하나씩. 이래 봬도 나도 너랑 똑같은 피해자라고.”

   영훈은 그 순간에도 자신만은 그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자신이 경찰서에서 몇 시간 동안 대기하면서 수많은 피해자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영훈에게 낱낱이 설명해 줬다. 김건우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은 20년 전 서울에 있는 한 보육원에서 일하던 직원이었고, 일을 그만두기 직전에 공립 보육원 전산망에 손을 댔다. 그때 보육원 아이들의 신상 정보가 대부분 해킹당했다. 고로 그 경찰서 목재 의자에 앉아 있는 피해자들은 모두 각기 다른 공립 보육원 출신 30대 사람들이었다. 노인은 비슷한 수법을 이용해 부모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이들만 노려 그들에게 접근해 할아버지 행세를 했다.

   “잃은 게 없다고 했지. 당신 어제 하루 동안 뭐 했어? 집에 있었지? 집에서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지? 거봐, 잃은 게 없긴 뭐가 없어. 당신이 원래 나가던 모임들,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만나더니 다 없어지지 않았어? 우리의 일상이 파괴됐다고. 이 새끼는 그걸 노린 거야.”

   “내 일상을 망가뜨려서 뭐 하게요?”

   “그니까 사이코패스지. 아무도 몰라. 자기랑 비슷한 취향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랑 놀아나는 것도 재밌었겠지. 경마장 가고 그랬지? 자기 말 타는 거 구경하고 싶지 않냐고 하면서.”

   영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하하, 거 봐. 어떻게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똑같이 했냐? 이놈의 개수작은 신선함이 없어.”

   “근데 전 아직도 이분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대체 저를 왜 속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해 주면 잘해 줬지 괴롭힌 적은 없어요.”

   “이야, 가스라이팅 제대로 당했네. 당신 같은 사람은 또 처음이야. 잘해 줬다고 이 작자가? 이 인간의 목적은 너를 만나는 게 아니라 네가 다른 사람을 안 만나는 거야. 네 모임을 끊는 거라고. 매번 둘이서만 만나자고 하고, 다른 모임 있는 시간만 골라서 불러내지 않았어? 아마 네 뒤도 밟았을걸? 아직도 다른 모임을 나가는지 스토킹도 했을 양반이라고.”

   “그래도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요. 뭐, 그 일종의… 뭐라고 하지. 그냥 질투 같은 거죠.”

   “질투라, 그것도 오랜만에 듣는 단어네. 잘못된 게 아니라고? 너는 당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지? 그래, 그러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지금 이 상태로 딱 한 달만 더 지내봐. 당신이 어디까지 떨어지는지 지켜보라고.”


*


   영훈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누군가를 너무 좋아해서 다른 사람을 못 만나게 하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지 체감할 수 없었다.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범법 행위로 여겨지지는 않으니까. 돌이켜 보면 아마 영훈은 그때까지도 자신이 그 노인의 손자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운 피해자고, 자신만은 할아버지의 선택받은 손자라고 세뇌당한 채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럼, 이 이야기가 당신한테 재미날지도 모르겠군. 너 돌돌이 알지? 쫑이도. 이 새끼가 데리고 사는 반려견들 말이야. 같이 산책한 적도 있지 않아?”

   “얘네들이 공범이라는 말이라도 하시려고요?”

   “호오 나한테 비꼬기까지? 이 친구 아주 제대로 당했네. 너 그 노인네에게 왜 그렇게  반려견이 많은지 생각해 본 적 없어? 여덟 마리나 되는데?”

   “그거야 할아버지가 다른 모임이 없으니까.”

   “외로워서 그랬다고? 외로워서 반려견을 여덟 마리나? 외로워서 애를 낳았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그리고 모임이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몇십 년 전이면 몰라도 너 요새 모임 없이 사는 사람 본 적 있어? 모임에 중독되는 사람은 있어도 없이 사는 사람은 절대로 없어.”

   “그럼 뭔데요?”

   “너는 어떤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처참한 피해자들이 많았어. 유부남들이나 심지어 아들, 딸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접근했어. 어떻게든 자기랑 둘만의 시간을 따로 갖자고 했지. 그럼 어떻게 되겠어? 가정 파탄이지. 모임들 못 나가는 것뿐이겠어? 이상한 소문도 나고, 소문 잘못 돌면 이 세상 사람들이랑 순식간에 다 관계 끊기는 거야. 모임에 들어가는 건 어려워도 내쳐지는 건 너무 쉬워. 너도 당해 봐서 알 거 아냐. 근데 이 새끼는 결국 이러다가 또 다른 사람으로 옮겨 간다고. 아무도 없이 남겨지는 건 너랑 나 같은 피해자들뿐이잖아. 이 새끼가 남겨 놓은 끔찍한 일상을 맞이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어.”

   “네? 자살을 했단 말이에요?”

   그러자 남자는 가까이 와서 작게 속삭였다.

   “그것도 딱 여덟 명.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죽은 사람 여덟 명. 반려견 여덟 마리.”

   “무슨 말이죠? 걔네들이 전부 그 죽은 사람들의 반려견이라고요?”

   “됐어, 작게 말해 이 친구야. 2차 피해 줄 일 있어? 지금 여기 경찰서에 그 사람들 지인도 있다고.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나도 피해자야.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내 옆에 얌전히 앉아 있으면 돼.”

   나의 꼬리는 경찰서 콘크리트 바닥에 축 늘어졌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연속으로 듣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나도 그 노인의 집에서 돌돌이, 쫑이와 함께 지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괜찮아, 너무 우울하게만 생각하지 마. 그래도 피해자들이 많으니까 다행이야. 우리끼리 모임이라도 하면서 서로 으쌰으쌰 해 보자고.”

   이 사람은 어디에 내놓아도 그 모임의 장을 할 것 같은 리더형 인간이었다. 피해자 모임이라, 전혀 힘이 되지 않으면서도 될 것 같은 이상한 단어의 조합이었다. 모임이라는 단어가 가진 매력을 피해자라는 단어가 바로 옆에서 물기 하나 안 남기고 말려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피해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한 무리 안으로 모인다는 사실은 묘한 안정감을 줬다. 영훈도 결국 그들의 무리에 끼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직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당신의 고통을 전부 다 알고 있으니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영훈도 그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노인과 자신이 한 지난 넉 달간의 대화를 되짚어 봤다. 영훈은 이 무리의 신입이었다. 노인이 망쳐 놓은 일상을 아직 일주일도 보내지 않은 파릇파릇한 신참이었기에 일상의 무너짐이 주는 파멸이 어떤 것인지 전부 알 수는 없었다. 이 상태로 한 달, 두 달, 일 년을 보내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예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때까지도 어쩌면 노인에 대한 아주 소량의 신뢰가 있었을지도.

   영훈은 옆 사람이 준 미지근한 결명자차를 몇 잔 들이키고 나서야 자신이 오늘 수업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달려왔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아직 학교 운동장에 수업 물품들이 그대로 널브러져 있을 게 분명했다. 영훈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고 경찰서 밖으로 향했다. 나는 영훈이 급한 일 처리를 할 동안 옆 사람에게 잠시 인계됐다. 하필 노인을 때린 그 남자였다. 그는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거침없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거침없이 어리석었다. 그는 영훈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가방에 손을 막무가내로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 인형을 꺼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 꼬리는 세차게 반응했다.

   “역시 이거 좋아하는구나.” 

   삑삑, 그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장난감 인형의 소리를 시끄럽게 울려댔다. 나의 꼬리는 더 큰 진폭으로 흔들렸다. 이 한심한 인간아, 나는 너한테 반응하는 게 아니고 네가 들고 있는 저 인형 속 플라스틱 부품이 생성하는 고주파에 반응하는 거라고. 

   “자, 여기 있다. 물어 와.”

   그는 장난감 인형을 나의 머리 뒤쪽을 향해 던졌다. 내 목줄의 길이를 염두에 뒀는지 인형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졌다. 그가 물어 오라고 했다 해서 내가 움직이는 것이 수치스러운 행동일까 생각할 틈도 없이, 나의 온 신경은 이미 그 인형을 향하고 있었다. 한순간에 먹잇감을 힘껏 물었다. 동맥이 흐르는 목덜미를 향해 송곳니를 있는 힘껏 쑤셔 넣었다. 삑삑. 이번에도 성공. 완벽한 사냥이었다.

   “이야, 멋지다 친구. 아주 멋져. 완전 호랑이인 줄 알았어.”

   내 사냥 실력을 비꼬는 어리석은 인간의 목소리였다. 인형을 다시 그 사람에게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목줄의 길이가 허락하는 만큼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기분 나쁜 건 그의 불쾌한 말투도 쓸데없이 두꺼운 손가락도 아니었다. 그의 단어 선택이 짜증났다. 호랑이라고? 호랑이 같았다고? 내 동작이? 나는 호랑이가 되고 싶었던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호랑이는 혼자 살고, 혼자 다니고, 혼자 사냥하는 무식한 종족이었다. 난 무리에 속하고 싶었다. 무리에 속해서, 떼로 몰려다니며 먹잇감을 이리로 몰고 저리로 몰다가 한순간에 연합해서 포획하고 사냥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하이에나가 되고 싶었다. 얼룩말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스무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그런 하이에나가 되고 싶었다. 사냥감 한 마리를 혼자서 쫓아다녀야 하는 멍청한 술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저 힘없는 인형을 향해 혼자서 달려든 이유는 단지 그곳에 내가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있는 하이에나 한 마리가 혼자 먹잇감을 향해 달려드는 것처럼. 

   “할아버지 어디 계시죠? 저희 할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예요?”

   바로 그때, 또 다른 새끼 하이에나 한 마리가 소란스럽게 경찰서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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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김순란

    개의 시선으로 본 이야기가 신선하네요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2023-08-21 09:26:37
    김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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