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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파오

  • 작성일 2023-09-01
  • 조회수 600

치파오    

김서율                     


   아침 일찍부터 울어 대는 수화기를 집어 든 건 순자였다. 치파오가 경찰서에 붙잡혀 있다고 했다. 어젯밤 을지로 상가에서 목걸이를 팔려다 붙잡혔고, 조서를 쓰는 과정에서 그 목걸이를 훔친 게 아니고 나로부터 선물 받은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걸려 온 전화였다. 치파오가 절도죄로 붙잡힌 모양이었다.

   경찰 두 명이 들이닥치듯 찾아온 건 전화를 받고 두어 시간 후였다. 당사자에게 직접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두 경찰을 눈으로 맞았다. 한 명의 경찰은 풍채가 컸으나 한 명의 경찰은 풍채가 왜소해서 바짝 말린 북어가 연상됐다. 나는 궁금한 눈으로 풍채가 좋은 경찰 쪽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내 예상과 달리 수사의 주도권을 쥔 쪽은 북어 쪽이었다. 북어는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나를 공범자를 관찰하듯 훑다가 사건 정황을 늘어놓았다. 이미 전화로 들은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치파오가 보석을 팔기 위해 을지로에 있는 한 허름한 금은방을 찾아갔고, 말투가 어색하고 어리숙해 보인 여자가 값비싼 목걸이를 흥정하려 들자, 이를 수상히 여긴 금은방 사장이 경찰서에 신고하여 치파오는 현장에서 붙잡혔다고 했다.

   치파오가 이레 가까이 나를 간병하는 동안 아내의 방에 들어가 아내의 목걸이를 자기의 물건처럼 이것저것 번갈아 가며 모양을 뽐냈다. 그리고는 순자가 퇴원하던 날 목걸이를 착용한 채 가 버렸다. 그 반클리프 목걸이는 vip 회원들만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예약 절차를 거쳐야 구할 수 있는 시가 육천만 원이 넘는 것이었다. 보석을 취급한 금은방 사장이 그 목걸이의 가치를 모를 리 없었다. 치파오에게는 무척 안된 일이지만 그녀에 관한 소식을 좋지 않은 방법으로나마 전해 듣게 되어 조금은 갈증이 해소된 기분이었다.

   북어가 신문하듯 침대맡으로 다가와 질문했다.

   “교수님? 교수님께서 그 중국 동포 간병인에게 그 고가의 목걸이를 주셨다는 게 참말입니까?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 그 어떻게 확인한다….”

   그제야 내 몸 상태를 인지한 듯 당황해하며 말했다. 북어는 습관처럼 아, 그, 하며 입맛을 다시듯 말을 끊어 가며 말했다. 내가 눈만 끔벅거리고 있자 북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풍채를 힐끔 바라봤다. 풍채의 생각 없는 표정을 훑고는 순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무표정하게 서 있던 순자가 대답 대신 필기도구를 꺼내오자 북어가 반기듯이 반응했다.

   “아, 쓰실 수 있단 말이죠? 아, 그렇다면 교수님! 여기에다 써 주십시오. 어떻게 해서 그 여자가 그 값나가는 목걸이를 선물 받은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말로 우기는지를…. 교수님이 얼마나 억울할지 압니다. 그런 못된 간병인도 있는 법이니까요. 특히나 신분을 알 수 없는 중국 동포 간병인들이 대게가 그렇죠. 안 그렇습니까? 교수님?”

   북어가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며 확답을 강요하듯 내뱉는 동안 순자가 내 손에 볼펜을 쥐여 주었다. 나는 볼펜을 꽉 그러쥔 채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힘을 줄 때마다 온몸의 혈관들이 푸른빛을 띠며 굵어졌다. 그러는 내게로 시선이 모아졌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북어가 응원가를 부르듯 외쳤다. 

   “아, 그 길게 쓸 필요 없습니다. 짧게. 부담 갖지 마시고.”

   나는 글을 쓰려고 온몸의 힘을 손가락에 모았다. 


   치파오의 본명은 최영님이었다. 순자가 치질 수술을 받느라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를 임시로 돌보게 된 간병인이었다. 그녀는 간병인 협회를 통해서 왔다. 아내는 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임시 간병인이라지만 최소한의 면접은 필요했다. 나에 대한 아내의 애정을 확인하는 하나의 사례였다. 아내는 일일 파출부를 구하듯 성의 없이 일을 진행했다. 치파오 입장에서는 나를 간병하게 된 일이 더없이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한국에 연고가 없는 중국 동포 간병인이 호스피스 병동이 아닌 가정집의 개인 간병을 하게 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녀를 치파오, 라고 불렀다. 속으로 나 혼자 불렀기 때문에 그녀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누구라도 그녀를 보면 이름보다 치파오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그녀가 나를 간병하러 온 첫날 그녀의 손에는 커다랗고 네모난 파우치가 들려 있었다. 몸매를 한껏 드러내기에 좋은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색상은 겨자색이었고 꽃무늬 천이었다. 대개 간병인들은 일하기 간편한 복장을 하기 마련인데 의상부터가 평범치 않았다. 게다가 연두색 아이섀도로 요란하게 화장을 하고 엉덩이까지 과장되게 흔들며 걷는 폼이 여간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자마자 파우치를 열어젖히고는 번들거리는 땀을 닦아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도 내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 나는 생명 없는 존재 같았다. 그녀뿐 아니라 모두가 날 그렇게 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치파오는 파우치에 부착된 거울을 통해 번들거리는 땀을 화장 솜으로 찍어 낸 후에 검고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돌돌 말아 핀으로 고정했다. 치파오는 그렇게 내 집에 오자마자 자신부터 돌봤다. 

   그녀는 내게 아는 척이나 인사도 없이, 엉덩이를 크게 흔들며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밀어젖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낯설기만 한 공기가 새어 들어왔다. 그녀는 내게 묻지도 않고 커튼을 열더니 시끄럽게 청소기를 돌리며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일하면서도 입을 잠시도 다물고 있는 법이 없었다. 방 안에 얌전히 고여 있던 먼지들이 그녀의 수다와 함께 일렁였다. 

   나는 저항 없는 시선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찢어진 치파오 사이로 허벅지가 비쳤다. 건강해 보이는 홍차색이었다. 내 시선을 의식한 것일까. 그녀가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나는 뭔가를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얼른 눈을 딴 곳으로 이동했다. 다시 내 눈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주름살처럼 여러 겹으로 진 쌍꺼풀과 광대뼈보다 낮은 코, 톤이 높아 경망스러워 보이는 음성…. 뭔지 모를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한 가지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녀가 내게 행하는 무례한 신체 접촉이었다. 내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나를 휠체어에 앉혔다. 팔과 다리, 목까지 뻣뻣하게 굳어진 내 육신은 그녀의 팔 힘에 옮겨졌다. 체형에 비해 그녀의 팔 힘은 다부졌다. 그녀는 나를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고 그녀의 거침없는 손길에 의해 빨가벗겨졌다. 나는 벗지 않으려고 저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은 우우, 거리는 비명뿐이었다. 욕실 거울에 비친 내 알몸은 보기 싫을 만큼 앙상했다. 비누 거품이 묻은 타월이 그녀의 손을 통해 내 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이 내 양쪽 볼을 집게처럼 잡았다. 벌어진 내 입 속으로 칫솔이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우우, 거리며 침을 질질 흘려 가면서 이를 닦지 않으려고 저항했다. 턱이 쳐들린 상태로 나는 계속 우우, 거렸다. 우우, 거림은 내가 듣기에도 소 울음소리 같았다. 저항을 멈추지 않자 치파오가 내 등짝을 철썩 내리치며 쏘아붙였다. 

   “입 크게 벌려. 아휴 입 냄새. 떡이 진 머리 좀 봐. 얼마나 안 씻겼길래. 좀 얌전히 있어 봐. 착하지.”

   내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치파오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나는 제어기랄, 하고 소리 질렀지만 내 입에서는 여전히 우우, 소리만이 음성 번역기처럼 새어 나왔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우우우, 거리며 항변을 멈추지 않았다. 여성의 손에 의해 말라비틀어진 내 몸이 무참하게 드러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나는 항변을 계속했다. 남성성을 지키려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몸부림이었다. 한참을 기를 쓰다 체념이라도 하듯 부끄러움과 자존심이 솜처럼 가라앉았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몸을 맡기다가 대화하듯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우우… 전 카이스트에서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교수였습니다. 무슨 연구였냐고요? 바로 당신 같은 일을 하는 간병인 로봇을 만드는 연구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성. 인간은 존중받아야 한다. 환자도 존중받아야 하고 간병인도 존중받아야 한다. 긴 병에 효자 없듯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도 없다. 이제 그딴 감상적인 기대는 집어치우고 간병인 로봇을 만들자. 그런 의미에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연구의 계기가 있었냐고요? 물론입니다. 제 아버지는 루게릭병을 앓는 환자였습니다. 돌아가시기까지 이십 년을 누워 계셨죠. 저는 아버지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어 공부를 핑계 삼아 도서관과 연구실을 배회했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바라는 건 없었습니다. 단지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일 말고요.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편이 아버지를 위해서도 행복할 것 같았으니까요. 누워만 있는 삶은 의미 없는 일 같았습니다. 결국 제 마음이 편하자고 생각했겠지만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낸 적 있냐고요? 그럴 리가요. 제가 그만한 분별력도 없어 보이십니까? 그런 말은 속으로만 하는 것이죠. 인간은 스스로 씻을 수 있을 때 존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 존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간병인 로봇만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주리라 확신했습니다. 물론 당신처럼 시키지도 않는 일까지 하는 로봇은 없겠지만요. 하하. 

   아버지는 촉망받던 화가였습니다. 병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삶 속에서도 붓을 입에 문 채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무엇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었을까요? 어머니는… 어머니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간병인보다도 못한 아내였으니까요. 그래도 신혼 한때는 행복했을지도 모르죠. 아버지는 세계적인 화가였습니다. 아버지 그림이 지금도 경매를 통해 낙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병이 진행되기 전까지는 행복했을 겁니다. 

   저는 지금 당신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하는 로봇을 연구하는 박사였단 말을 하려는 겁니다. 지금은 이 꼴이 됐지만 말입니다. 의학적으로 루게릭병이 유전이다, 아니다 명확히 판명되진 않았지만, 유전이 될 가능성 때문에 늘 불안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미래의 저를 보는 것 같았거든요. 제가 죽기 살기로 연구에 매달린 까닭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게 아닙니다. 내게 범한 무례를 멈추어 달라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환자는 어린아이도, 어린 학생도 아닙니다. 그러니 더럽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안 씻는 것이 아니라 못 씻는 겁니다. 환자도 인격이 있습니다.”

   공감을 얻으려 치파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자기 일에만 몰두했다. 약간의 실망을 뒤로하고 나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우우우… 연구에 성공할 가능성은 있었냐고요? 물론입니다. 모두 제 연구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성공시킬 자신도 있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그간 살아오면서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전 자만했습니다. 제 머리로 해내지 못할 게 없다고 확신했으니까요. 그런데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냐고요? 스트레스였습니다. 언젠가 저도 아버지처럼 병이 진행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하루빨리 간병인 로봇을 연구해 내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했습니다. 얻는 것은 더디지만 잃는 것은 순간이었습니다. 사실은 순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순간의 결과에는 교만이란 원인이 있었으니까요. 교만이 저를 순간으로 치닫게 한 겁니다. 그러니 제가 모든 것을 잃은 건, 교만 때문일 겁니다. 

   쓰러지던 날 몹시 피곤했습니다. 모처럼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일찍 집에 들어갔죠. 전 늘 연구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평소 아내를 혼자 있게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내는 늘 웃는 낯으로 날 대했지만, 행복해 보이진 않았습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병이 진행될까 봐 불안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대신 보석을 자주 선물해 주곤 했습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날도 제 가방 속에는 아내에게 선물할 목걸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집에 없더군요. 저는 아내가 들어올 때까지 잠시 눈을 붙일 작정으로 침대에 몸을 묻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병실이었습니다. 의사는 깨어난 제게 루게릭병에 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상세한 설명까지는 필요 없는데 말입니다. 그 병이라면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아니까요. 

   쓰러지기 전 전조 증상이 있었냐고요? 평소 약간의 이상 증상은 있었습니다. 볼펜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빠지는 수전증 같은 현상이었죠. 뭔가를 부주의하게 잘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발걸음이 무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연구실에 앉아 있을 때 이따금 머리가 깨질 듯 아팠습니다. 그때마다 몸살감기약을 먹었죠. 자고 일어나면 거뜬해졌습니다. 그래서 피곤한 탓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늘 불행이 덮칠까 봐 불안해했으면서도 불행이 저와는 멀게 느껴졌습니다. 전 너무 젊었으니까요.

   전 뇌졸중 증상을 동반하며 쓰러졌고 루게릭병은 빠른 속도로 진행됐습니다. 제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입니다. 제 연구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저를 차츰 잊어 갔습니다. 제 존재가 아침 이슬 같았습니다. 전 좌절했습니다. 희망이 잃으면 마음이 제일 먼저 무너지는 법이죠. 전 우울증까지 앓게 되어 극복 의지마저 잃은 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 저를 가만 놔두세요. 우우우….”

   “고개 똑바로! 오-올-치.”

   우우우, 거리는 내 말을 치파오는 알아듣지 못했다. 

   치파오는 하루 세 번 내게 칫솔질을 했다. 내 몸을 가만두지 않는 치파오가 몹시 성가셨다. 나는 성난 들개처럼 치파오의 손을 물어뜯었다. 

   “아―.” 

   치파오가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린 손을 그러쥐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는 거품 치약을 치파오의 얼굴에 뱉었다. 치파오가 내 등을 후려쳤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물린 데가 몹시 아픈지 울다 웃는 표정까지 지어 가며…. 그 모습이 가엾게 느껴졌다. 순자는 한 번도 가엾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순자는 늘 내게 깍듯했다. 늘 내게 예의를 갖췄다. 뭐든 내게 묻고 행동했다. 교수님, 블라인드를 내릴까요? 티브이를 켜 드릴까요? 어떤 채널에 고정해 드릴까요? 소리는 적당한가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내게 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묻고 행동했다. 순자의 질문은 기계 칩에 저장된 반복된 언어 같았다. 

   아내도 가끔 내 방에 들어왔다. 나를 보고 한숨 따윈 쉬지 않았다. 좀 어때요? 라며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잔잔한 음성으로 묻곤 했다. 좀 지루한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아내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아내는 나와 눈을 맞추지도 않았고 내 손을 잡아 주지도 않았다. 다소곳한 아내는 잘 다듬어진 석고상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창문을 반쯤 열고는 무료한 시선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면 침착한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조금 상기된 표정을 짓고서 몸을 의자에서 일으켜 세워 방안을 이리저리 어정거리며 통화했다. 조금 꾸민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아내와 처음 데이트할 때도 아내는 그런 목소리를 내곤 했다. 통화가 끝나자 아무런 미안함도 없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어떡하죠? 당신을 두고 다녀와야 해서. 몇 개월간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어쩐다지. 이런 상황에 순자까지 수술을 받게 됐으니. 수술받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아주 심해진 모양이에요. 당신을 위해 임시 간병인을 구해야겠어요. 서두를게요. 며칠만 참아 주세요. 큰 불편은 없게 할게요. 치질 수술은 아주 간단하니까 곧 순자가 퇴원해서 당신을 돌봐 줄 거예요.”

   그리곤 아내는 서둘러 출국해 버렸다. 무엇 때문에 가야 하는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내 방에 손님처럼 다녀가는 아내에게서 낯선 남자의 향수가 맡아졌다. 순자는 치파오가 오기로 한 날 인수인계도 없이 입원해 버렸다. 치파오에게 현관 키 번호만을 달랑 알려 준 채.

   내 임시 간병인 치파오는 부지런했다. 내게 지극정성으로 칫솔질만 해 주는 게 아니었다. 매일 나를 씻겼고 내 머리까지 가지고 놀았다. 롯드가 내 머리카락을 세 바퀴를 돌았다. 삼 년 동안 자르지 않아 단발이 된 머리를. 나는 온순해졌다. 무력한 저항에 힘을 쓰지 않았다. 치파오의 무례한 행동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리에서 싸구려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치파오가 손거울을 내 얼굴에 비추어 주었다. 나는 우스꽝스럽게도 분홍색 헤어 캡을 쓰고 있었다.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자 치파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치파오는 휠체어에 앉혀진 나를 조심성 없게 마구 밀며, 가구 모서리를 쿵쿵, 부딪혀 가며 이 방 저 방 집 안의 구석구석을 탐색시켰다. 내가 얼마나 침대에만 누워 있었는지 내 집이 남의 집처럼 낯설었다. 치파오는 휠체어를 회전시키며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거실 통유리 밖에는 나뭇잎과 잔디가 파랬다. 봄인가? 계절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치파오는 주방을 한 바퀴 돈 뒤 내 서재 문을 열었다. 벽돌처럼 견고하게 채워진 책장을 둘러보며 치파오가 감탄사를 내질렀다. 나도 내질렀다. 내가 읽었던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아서였다. 치파오가 나를 밀며 아내의 방문을 열었다. 내가 쓰러진 후 아내와 방을 따로 썼기 때문에 나 또한 삼 년 만에 들어와 본 방이었다. 내가 한때 아내와 신혼의 단꿈을 펼쳤던 방이었다.

   치파오는 푹신한 침대에 벌렁 누워 계란말이라도 하려는 듯 몸을 돌돌 굴렸다. 튕기듯 일어나 옷장 문을 활짝 열었다. 옷걸이에 걸린 아내의 옷을 이것저것 꺼내 마음에 드는 옷을 침대에 던졌다. 치파오는 아내의 감색 원피스를 입어 보려는지 입고 있던 치파오를 벗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거의 알몸을 드러내며 옷을 갈아입었다. 엉덩이와 팔뚝 부분이 팽팽하게 늘어나 조금 조여 보였지만, 아내가 입을 때보다 더 잘 어울렸다. 치파오는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화장대 앞에서 값나가는 향수를 뿌려도 보고 화장품 뚜껑을 이것저것 열어 보며 얼굴에 찍어 발랐다. 한참 멋을 내더니 아내의 보석함을 열어 자신 것인 양 이것저것을 대 보다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제서야 내 존재를 의식한 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귀여운 것.’ 하며 내 볼을 꼬집으며 키스했다. 

   치파오는 내게 소설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언제 내 서재에 들어가 책까지 꺼낸 것일까? 나무껍질처럼 까칠까칠한 중국 연변 특유의 음성으로 읽어 주었다. 읽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치파오의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치파오가 읽어 주는 소설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들곤 했다. 

   한 날은 갑갑한 기분이 들어 눈을 떠 보니 치파오가 내 손과 발가락에 붉은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햇살로 눈이 부신 아침이었다. 내가 눈을 굴리자 잘 잤니? 라고 물었다. 치파오가 아내의 감색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깜박 아내인 줄 착각했다. 나는 대답 대신 창문 쪽으로 눈을 굴렸다. 치파오는 언제나 블라인드를 올려놓고 있어서 밝은 햇살이 창문 가득 비쳤다. 전에는 블라인드로 창문을 꽁꽁 가려 놓아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치파오와의 아침은 새로운 아침 같았다. 치파오가 수다스럽게 앵무새처럼 조잘댔다. 

   “장밋빛 매니큐어를 칠하는 중이야. 이쁘게 칠하고 밖에 나가자. 좋지?”

   치파오는 막무가내로 나를 휠체어에 태웠다. 치파오는 휠체어에 나를 태우고는 마구잡이로 밀며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쓰러지고 삼 년 만의 외출이었다. 치파오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공원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나는 햇볕에 널어놓은 빨래처럼 나무 그늘에 놓였다. 공원은 한산했다. 중년쯤 돼 보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중년 남자는 벤치에 홀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체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노숙인이었다. 담배를 쥐고 있는 손이 더러웠고, 은갈치 색 양복 목깃이 빤질거렸다. 내 머리는 덜 익은 라면처럼 꼬불거리는 데다 손톱은 장밋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에 중년 남자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를 구경했다. 

   치파오가 꼬불거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자기 지갑을 열어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지폐를 셌다. 치파오가 나를 끌고 간 곳은 공원 근처에 있는 꽤 넓은 레스토랑이었다. 새로 개업한 레스토랑 같았다. 치파오는 창가 자리가 좋겠다고 목청껏 말했다. 점잖아 보이는 직원이 살며시 다가와 정중하게 말했다. 

   “예약된 자리입니다.”

   우리는 구석진 곳으로 안내됐다. 직원이 사라지자 메뉴판을 든 다른 직원이 다가왔다. 가격표를 한참 들여다보던 치파오가 양송이 스파게티 1인분을 주문했다. 2인분을 주문해야 한다고 말하자, 자신은 간병인이지 손님이 아니라고 했다. 양송이 스파게티가 나왔다. 치파오가 포크로 돌돌 말아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맛은 괜찮았지만 나는 조금만 먹었다. 접시에 남은 것을 치파오가 깨끗이 비웠다. 나는 아내가 생각났다. 정기적으로 가는 병원마저 아내가 아닌 순자가 동행하다가 후에는 순자가 대신 가서 약을 처방받아 왔다. 치파오가 물컵을 엎질렀다. 동시에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다. 직원이 여러 번 왔다 갔다. 겨우 1인분을 시켜 놓고 치파오는 눈치도 조심성도 없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예약됐다는 자리는 공석이었다. 

   레스토랑에서 나온 치파오는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나를 데리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아니지, 라고 나는 우우, 거렸다. 양송이 스파게티로 기운이 강경해진 치파오는 전철에 나를 실었다. 내가 교수로 근무했던 모교로 가는 방향의 전철이었다. 의도적인 행동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었다. 나는 몸을 비틀었다. 내가 삼 년 동안 방에만 있었다는 것을 치파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자포자기한 채 고개를 떨구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한철우 교수님! 맞죠? 한철우 교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찍기 위해 휴대전화기를 들이댔다. 나는 어디라도 숨고 싶었다. 그 와중에 치파오가 창밖 풍경을 보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제발, 치파오.’ 나는 타는 목소리로 간절히 말했다. 물론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치파오가 사람들을 뚫고 다가와 나를 창 쪽으로 끌며 외쳤다. 

   “저것 좀 봐. 노란 개나리꽃이 시루에 담긴 콩나물 대가리 같이 올라왔어?”

   나는 창밖에 콩나물 대가리처럼 올라온 노란 개나리를 배경으로 사진이 찍혔다. 어떤 사람은 동영상을 녹화했다. 집에 돌아와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우스꽝스러운 내 모습이 올려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철우 교수님 사랑합니다. 힘내세요.’란 용기를 주는 댓글이 무수히 올라왔다. 창피함과 뭉클함이 교차한 혼란스러운 마음을 나는 단식의 행동으로 치파오에게 화를 냈다. 치파오는 내게 사과하는 대신 내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치파오는 계속 말했다. 

   치파오는 한국에 온 지 삼 년 됐다고 했다. 한국에 온 첫날부터 요양 병원에서 간병 일을 했다. 입원 환자 대부분은 치매, 뇌졸중, 파킨슨병, 루게릭병, 암 환자였다. 여덟 명의 환자를 혼자서 돌봤다. 24시간 교대 근무였다. 간병인들은 환자만 돌보지 않았다. 환자의 침상을 정리하고, 기저귀를 교체해 주고, 환자의 양치질과 세안, 음식을 주입하는 콧줄 속에 가래를 뽑는 일까지 했다. 환자 목욕도 시키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체위를 바꿔 주고, 휠체어에 태워 물리치료실을 오가고, 워커로 걷기 연습까지 도와야 했다. 그렇게 일하다 과로로 쓰러진 간병인도 있었다. 간병인은 환자를 돌보다 쓰러져도 산재 처리가 되지 않았다. 노동자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서였다. 반대로 간병인 때문에 환자가 다치면 전부 간병인이 책임져야 했다. 기계처럼 쉼 없이 일한 뒤에도 협회에서 월급을 떼어 갔다. 협회를 통해 일자리를 얻어서였다. 치파오가 일하던 요양 병원마저 폐업한 바람에 몇 개월 치의 월급을 받지 못한 채 체류 기간이 만료되어 가고 있었다. 재외 동포 간병인들은 월급을 받지 못한 부당한 처지에 놓여도 노동법에 관한 보호 조치마저 마련돼 있지 않았다. 

   치파오는 자신의 우울한 이야기를 들려주다 말고, 내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발끝을 세워 빙그르르 돌다가 허리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를 반복했다. 나풀거리는 옷깃 사이로 아내의 목걸이가 슬쩍슬쩍 비쳤다. 내가 계속 무표정하게 있자, 그 빵빵한 엉덩이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미안해!’

   나는 무표정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만 것이다. 무척 어색한 미소였다. 오랜만에 지어 본 미소였기 때문이다. 내가 웃자, 치파오가 침대맡으로 엎어지듯 달려와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잠이 깼다. 눈을 떠 보니 치파오가 아닌 순자가 커튼 앞에 서 있었다. 순자가 퇴원한 모양이었다. 커튼에 가려진 햇살. 방 안은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연극이 끝난 무대 같았다. 나는 눈으로 치파오를 찾았다. 치파오가 내 볼에 입 맞춘 부드러운 촉감이 꿈처럼 느껴졌다. 메마른 가슴에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인사도 없이 가 버린 치파오를 배웅이라도 하려는 듯 나는 쓸쓸한 눈을 굴렸다. 순자가 물었다. 

   “찾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교수님?”

   나는 커튼을 걷어 달라고 우우우, 거렸다. 

   “교수님? 괜찮으세요?”

   순자는 놀란 눈으로 반복해서 물었다. 내가 그토록 연구하려고 애썼던 로봇의 저장된 말 같았다. 나는 우우우, 거리며 말했다. 

   “커튼을 걷어 줘요.”

   “교수님, 의사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순자가 말을 반복했다.


   “그 애쓰지 마시고 간단하게 맞다, 아니다, 로만….”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북어가 재차 외쳤다.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온몸에 힘을 주는 동안 북어와 풍채는 지루한 몸을 비틀었다. 풍채는 열쇠 꾸러미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쇳소리가 나서 쓰는 데 여간 방해가 되는 게 아니었다. 북어는 순자가 내온 부드러운 질감의 원두커피를 아끼듯 홀짝였다. 매혹적인 재스민 향이 북어의 찻잔에서 흘러나왔다. 생각할수록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북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 하고 감탄을 자아냈다. 입 안에 감도는 초콜릿 향 때문이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애용하는 커피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 손님 접대용으로 쓰다니. 불만스러운 마음이 순자에게로 향했다. 북어가 일어나 뒷짐을 진 채 어정거리기 시작했다. 눈으로 촘촘히 내 방을 훑기 시작했다. 순자는 보릿자루처럼 구석에 서서 빈 쟁반을 가슴에 보듬은 채 나를 지켜보았다. 마치 감독관 같았다. 순자는 내 간병인이다. 오래전부터 집안의 잡다한 일과 가사 일을 도맡아 해 오다가 내가 쓰러진 뒤부터 나까지 도맡았다. 그러니 간병인이라기보다는 집사란 호칭이 걸맞을지도 모른다. 순자는 아내에게 신뢰받고 있다. 순하게 보이지만 생각보다 교활할 정도로 눈치가 빨랐다. 어느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특히 강자와 약자를 잘 분간할 줄 알아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그림 멋진데요. 이 그림이 교수님의 아버님이신 한승기 작가님이 그리신 그림이 맞나요?”

   커피 향 때문인지 북어는 여유롭고 차분한 시선으로 방 안을 훑었다. 북어가 감상하고 있는 그림은 아버지의 그림이었다. 몇 년 전 경매를 통해 몇억 원대에 팔렸던 원본이 아닌 에디션이었지만, 캠퍼스 천에 인쇄한 그림은 원본 같았다. 작가의 세계관이나 내면세계를 보기에는 북어의 그림 감상은 초보 수준이었다. 북어도 SNS에 떠도는 나에 관한 사진과 정보들을 접한 것일까. 내가 한때 촉망받은 교수였고, 작고한 내 아버지의 그림 덕분에 어느 정도 재산이 있을 거라는 것과 또 그것을 누가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해들 하는 댓글 말이다. 북어가 사뭇 진지하게 감상하는 동안 나는 단문 한 줄을 완성했다. 

   “그 목걸이는 내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 맞습니다.” 

   그녀는 제 아내보다 더 나에게 온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습니다. 그 목걸이는 그 답례입니다. 나는 이런 말까지는 쓰지 않았다. 손에 힘을 풀자 볼펜이 바닥에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이 가슴에서부터 솟구쳤다. 아버지도 나를 위해 이렇게 힘들게 그림을 그렸을까? 붓을 입에 물고서…. 내가 치파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단문 한 줄을 힘겹게 완성한 것처럼. 내가 애써 외면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 그림 덕분에 비참하나마 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그림은 지금도 경매를 통해 낙찰되고 있으며 그 일은 아내가 전담하고 있다. 아내가 내 곁에 머문 까닭이다.

   북어는 내가 온 힘을 들여 쓴 한 줄의 단문을 눈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외로운 마음을 노려 금품을 뜯어내는 꽃뱀인 줄 모르고….” 

   북어가 한심하다는 듯 내뱉자 풍채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을 달성한 둘은 순자가 가는 뒤를 따라 현관 쪽으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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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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