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개들의 전쟁

  • 작성일 2023-09-06
  • 조회수 515

개들의 전쟁

정수남


   1 

   소문대로 여름이 되기 전에 ‘주식회사 동영’은 정리해고자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이 발표되자 사원들은 먼저 자신의 이름부터 살폈다. 개 같은 세상···. 명단에 오른 사원들의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소문은 비단 어제오늘 나돌던 게 아니었다. 음성 공장을 매각한다는 설이 나돌 때부터 떠돌던 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재작년부터 재벌급 제지회사와 대형제약회사가 동일 상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본사 재정부에서 금융을 비롯한 자금 업무를 맡았던 백 차장이 회삿돈을 몰래 빼돌렸다가 발각되어 쇠고랑을 찬 뒤부터는 더 흉흉해졌다. 빼돌린 금액이 처음엔 이십팔억이라고 했으나 올해 들어와서는 어느새 일백억이 넘는다는 소문이었다. 몇 달 전에 시행된 구조조정은 정리해고를 위한 전조라고 할 수 있었다. 명예퇴직을 원하는 사원을 우대한다는 조건도 그것을 전제로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명단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15년 넘게 몸담았던 자리를 비우라니,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점보 롤이나 핸드타올, 냅킨, 미용티슈, 두루마리 화장지 등을 들고 할인 매장이나 기업체, 선물 코너 등을 땀 흘리며 동분서주하던 내 모습이 순간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를 제외한 사원들은 사실 구조조정이 발표되기 전부터 회사의 앞날을 점치면서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정리해고를 예상한 몇몇 사원들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상사에게 빌붙어 더욱더 충견 노릇을 했고, 또 몇몇은 일찌감치 명예퇴직자로 위로금과 퇴직금 등을 받고 자리를 떴으며, 또 더러는 떠나는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떠나고 싶어도 받아 주는 곳이 없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을 맞았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후자에서도 후자에 속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나는 설마 그런 사달이 있었다고 창립된 지 40년이 넘은 제조회사가 문을 닫겠어, 하다가 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특히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맡은 일만 열심히 하라고, 공언하던 공 이사의 호언장담이 한 몫을 차지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게시판에 공고가 나붙자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을 통감하며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50이 넘은 나이라면 경력사원은 몰라도 이력서 들고 눈치 보며 찾아다니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순간, 실직한 뒤 백수 신세로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추레한 내 몰골이 눈앞을 스쳤다. 듣기로는 음성에 있는 공장에서도 난리가 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판매실적을 놓고 그동안 암암리에 경쟁하던 영업1과 박 과장과의 싸움도 필요 없게 된 셈이었다. 그도 그것을 느낀 듯 사물을 정리하다가 내 눈과 마주치자 쿡, 하고 힘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와의 싸움은 끝났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더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으면 아내는 뭐라고 할까. 박 과장을 건너다보면서 책상에 망연히 앉아 있던 나는 잠시 아내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분명한 것은 머리 맞대고 어찌할까 앞날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 성미에 악다구니를 써 가며 볶아댈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박 과장이 철야 농성하는 음성 공장의 생산직 사원들과 합류하기 위해 내려간다고 하자 나도 슬그머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럴까. 아침이면 장터같이 떠들썩하던 본사 사무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회사가 배려 차원에서 지급한 퇴직금과 위로금, 그리고 3개월분의 급료 등등,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 통장에 입금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 또한 법적으로 그어 놓은 하한선이기는 하지만···.

   과장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의자에 앉아 있던 영업2과의 심 대리가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며 물었다.

   글쎄···.

   나는 대꾸를 미룬 채 사장실을 돌아다보았다. 불이 꺼진 사장실은 조용했다. 

   저는 내일 박 과장님과 함께 내려갈 거예요.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지 않습니까? 근데, 왜 자기들 마음대로 문을 닫는 겁니까? 

   그는 내가 손을 내밀자 자주 연락하겠다고 하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맞잡은 그의 손은 의외로 뜨겁고 힘이 있었다.


   2 

   개 소리 때문에 살 수 없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던 아내는 실직 소식을 듣자 예상대로 눈을 크게 뜨고 팔짝팔짝, 뛰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요? 아내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똑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나는 그때마다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채 어눌하게 또 똑같은 대꾸를 반복했다. 회사가 문을 닫았어. 그래서 지금 온통 난리야. 혀끝을 차며 나를 노려보던 아내는 날마다 출근하면서 그동안 그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느냐면서 나를 정말 바보처럼 취급했다. 

   청맹과니 아니에요, 당신?

   아내는 서슴없이 쏘아붙였다. 그래도 나는 예상과 달리 아내가 울고불고하지 않는 것만을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조금만 기다려 봐. 결사 투쟁한다고, 모두 공장으로 몰려갔으니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몰라. 

   그걸 나보고 기대하라고요? 누굴 어린애로 알아요?

   심 대리가 연락한다고 했어.

   나를 향해 계속 쏘아대던 아내의 비아냥은 결국 위층에서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개 소리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다. 잘됐네. 아주 잘됐어. 이젠 저 집 개나 좀 치워요. 저 소리 때문에 내가 아주 병이 도지게 생겼어요.

   아내의 눈길을 피해 선 채 소리가 들리는 위를 올려보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거실 천장에 바른 벽지가 무지가 아니라 은색의 장미 무늬가 길게 이어져 있다는 것과 막대형광등 주변으로 까만 파리똥이 모래알처럼 많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회사에서 해고되기 열흘 전 저녁이었다. 그러니까 주차장을 점거한 ‘행복한’ 포장이사 탑차가 오전 내내 머물며 사다리로 짐을 나르고 난 다음 날 오후 시간대였다. 나는 그 짐들이 우리 집 바로 위층인 804호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이유는 그곳에 살던 노부부가 아들네 집으로 들어간다고 이사한 후 며칠째 뭘 뜯어고치는지 오후 늦게까지 뚝딱거리는 망치 소리와 이가 갈릴 듯한 그라인더, 굴착기 소리로 귀가 아팠는데 이젠 그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누가 입주하는데 요란을 떨까. 그 소리를 들으면서 사실 나는 이번에도 노부부처럼 부디 좋은 사람들이 입주하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아내의 기대는 나보다 더 컸다. 그것은 악성빈혈 증세로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가 진료와 처방전을 받아야 하는 아내가 오히려 며칠만 참으면 될 텐데 뭘 그래요, 하며 나를 다독거린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귀를 막고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그 보상을 새로 입주하는 사람들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에 쫓겨 승강기에 오른 나는 먼저 탑승해 있던 804호 입주자와 마주치는 순간,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입을 가리기는 했으나 쉬지 않고 가쁜 숨을 내뿜는 검은 개의 목줄을 움켜잡은 그를 본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한마디로 그는 프로레슬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것도 링 위에서 늘 악역을 천연덕스럽게 해 대는···. 어림잡아도 일 미터 팔십 센티는 너끈히 넘을 것 같은 큰 키에 백 킬로그램도 더 나갈 것 같은 그는 내가 주춤거리며 승강기에 오르자 고개를 까딱, 했다. 아래층에 사세요? 저는 804호에 어제 이사 온 사람입니다. 마스크를 쓴 탓일까, 약간 쉰 듯한 목청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를 올려다보던 나는 대꾸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우락부락한 인상에 지레 겁을 먹은 탓도 있지만, ‘동물의 왕국’에서 본 적 있는 늑대 같은 개가 헥헥거리며 내 주위를 계속 어슬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입고 있는 폴로 빨간 티셔츠 바깥으로 드러난 팔뚝에 퍼렇게 새겨진 전갈 문양의 문신이 윤기 흐르는 개의 검은 털과 어우러져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그러나 좁은 공간에 갇힌 나는 도망갈 곳을 찾을 수도 없었다.

   사람을 겉모양으로 가름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지만 그날 나는 그를 처음 본 순간 그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시끄러움에 대한 항의는커녕 눈살조차 찌푸릴 수가 없었다. 한 라인에서 사용하는 승강기가 한 대인 까닭에 싫어도 앞으로는 오르내리며 자주 마주칠 텐데, 걱정이었다. 더구나 그 주인만큼이나 우람한 개가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뛰어다니는 것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에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이웃 사이에 일상 나눌 수 있는 인사말, 일테면 환영한다든가, 어디 가느냐, 자주 보자는 등과 같은 겉수작도 건네지 못한 채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도망치듯 잰걸음을 놓았다.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나와 다른 모습이었다. 개를 앞세우고 내린 그는 조금 전까지 같은 승강기에 탔던 나의 존재 따위는 벌써 잊은 듯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공원 쪽을 향해 여유롭게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내는 내가 염려하던 대로였다. 이야기를 듣고 난 아내는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게 큰 개를 아파트에서 기를 수 있는 거예요? 그거 법에 걸리지 않아요?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겠더라니까. 덩치가 만만해야 말이지.

   개요? 사람이요?

   둘 다.

   나는 혀끝을 차는 아내를 피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신트림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친구들과 나눈 저녁 식사가 잘못된 듯했다. 주위를 맴돌던 그 개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도···. 

   그럼 이제부터가 더 큰 문제 아녜요?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좋은 이웃은 아니더라도 나쁜 이웃이 입주하지 않기를 은근히 바랐는데, 아내의 말대로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가 무섭게 생겼어요?

   그럼, 시커먼 게 꼭 송아지만 해.

   두 팔을 한껏 벌려 아내에게 개의 크기를 부풀려 나타내던 나는 문득 어린 시절 경자네 집 대문에 붙었던 ‘개 조심’이라고 쓴 문구가 떠올랐다. 그때 그 개는 사납기로 동네에서 유명했다. 그런 까닭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동네 사람들은 발뒤꿈치를 치켜올리고 걷기 일쑤였다. 나보다 한 살 어렸던 문철이가 대문 앞에서 멋모르고 얼찐거리다가 물리는 걸 목격한 뒤로 아이들은 누구나 겁을 먹고 있었다. 더구나 한번 짖기 시작하면 쉽사리 그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거쿨진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왁살스러운지 동네가 다 떠나갈 정도여서 사람들은 귀를 막아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개를 마음대로 다루는 경자까지도 무서워했다. 그녀의 입에서 까불면 메리 풀어놓는다는, 한마디가 떨어지면 찧고 까불다가도 모두 도망치기 일쑤였다. 그 개도 주둥이와 발목 쪽을 빼고는 모두 새카맸다. 그러나 얼마 뒤 그 개는 동네에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소문으로는 경자 아버지가 보신한다고 개천가로 끌고 갔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우려한 대로 그날부터 우리는 귀를 막고 살아야 했다. 간헐적으로 터지곤 하는 굉음 같은 소리는 한번 시작되면 끝날 줄을 몰랐다. 한두 번 짖다가 말겠지, 했으나 아니었다. 거기에 어찌나 크고 우렁찬지 한번 짖기 시작하면 4동 모두 합쳐 560세대가 사는 작은 아파트 단지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였다.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그 소리가 한밤중에도 예고 없이 터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한여름이지만 창문조차 마음대로 열 수가 없었다. 그래도 프로레슬러 같은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아래위층을 오르내리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양해를 구할 법도 한데,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조용하고 착한 단지였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건축한 지 20년이 다 되어 조금 낡기는 하였으나 고층을 선호하는 요즘 추세와는 달리 12층으로 비교적 나지막하고 또 모두 똑같은 28평 면적에 사는 까닭에 입주자들의 살림살이 또한 엇비슷한 편이었다. 자가라고 해서 유난을 떠는 세대도 없었고, 전세나 월세라고 해서 기를 펴지 못하는 세대도 없었다. 거기에 산자락을 끼고 도는 산책로와 공원이 이웃에 있고, 버스 정류장과 대형할인매장까지 가까이 있어 우리는 10년 넘게 살아도 불편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새로 조성된 이웃의 다른 단지보다 유독 노인네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특별히 흠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더 평화롭고 고즈넉하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전철역이 떨어져 있어 출근길이 불편하고, 인근의 20층짜리 신축 아파트에 비해 가격대가 낮다는 게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나는 아내의 말대로 오십이 넘은 나이에 이만한 아파트나마 건사하고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더욱이 노부부처럼 입주한 지 꽤 된 이웃들과 서로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것도 애착을 갖게 하는 점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우리 집 아래층인 604호 미란이 할아버지와 303호의 최 사장, 또 건너편 3동 808호에 사는 김 선생과 돈독한 사이가 된 것은 무형의 힘이 되었다. 


   적어도 그가 입주하기 전까지는 그런 셈이었다. 


   3

   컹, 컹, 커엉, 커엉, 컹! 

   아내와 함께 티브이 앞에 앉아 참외껍질을 벗기던 나는 그날도 그 소리에 소스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곧이어 뛰어다니는 육중한 소리가 쿵쾅쿵쾅, 천장을 울렸다. 그러고는 곧이어 요란스러운 소리가 고막을 때리기 시작했다.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짖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한번 터져 나오기 시작하면 우리 부부는 경기를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두 손바닥으로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허락 없이 고막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그 소리는 무방비 상태인 내 심장을 무차별 요격했다. 또 시작되었네, 시작되었어. 아내는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울상을 지으며 서둘러 주방으로 도망쳤다. 나는 반쯤 깠던 참외를 내려놓고 티브이 볼륨을 한껏 높였다. 그렇게 하면 그 불협화음을 조금은 잡을 수 있는 상쇄 효과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티브이에서는 마침 층간소음으로 시달리던 아래층 40대 남자가 위층의 60대 노인을 도끼로 살해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자 앵커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분노를 조절할 줄 모르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40대 남자가 어떤 심정이었을까, 충분히 이해되었다. 오죽했으면 그랬겠는가. 사실, 나도 그 소리가 예고 없이 우리 집 안으로 파고들 때면 그 40대 남자처럼 당장 도끼를 들고 뛰어 올라가 개와 프로레슬러의 머리통을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다만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마음을 먹었다가도 그날 승강기에서 마주친 송아지만큼 큰 검은 개의 위협적인 눈초리와 혹시라도 놓칠세라 가죽으로 된 목줄을 움켜잡고 있던, 덩치가 내 두 배는 될 것 같은 사내의 근육질 팔뚝이 떠오르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앉곤 했을 뿐이었다.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지···. 그러나 아내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며칠째 허락도 없이 우리 집에 함부로 침범해서 휘젓곤 하는, 불한당 같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왜 대책을 세우지 않느냐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내뱉곤 했다. 나는 아내의 요구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혈액 안에 헤모글로빈 수치가 떨어져 빈혈 증상을 보이는 아내가 요즘 들어와 두통과 소화불량 증세까지 일으키고 있는 것은 순전히 그 소리 탓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참하라는 해고 동료들의 전화가 빗발치는 가운데에서도 관리실에 달려가 몇 번 강력하게 민원을 제기도 하였고, 또 아내의 강요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용감하게 위층에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관리실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감감무소식이었고, 위층은 인기척이 없기 일쑤였다. 

   관리실은 도대체 뭐 하는 곳이래요?

   글쎄 말이야.

   나는 아내의 얼굴을 한번 살피고는 시선을 돌렸다. 실직까지 당해 가뜩이나 힘든 판인데 엎친 데 덮친 꼴이었다. 

   그것을 아주 근절시킬 방법은 없을까. 두억시니 같은 그와 맞서 이기기 위해서는 시간이 좀 지체되더라도 천천히, 자근자근 계획을 세워 이성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자칫 아내의 채근에 밀려 감정을 앞세웠다가는 실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왜 또 가만히 계세요? 몇 번이고, 그칠 때까지, 계속 올라가서 따져야지요? 그러니까 회사에서도 밀려났지···.

   알았어.

   당신이 올라가기 싫으면 제가 갈까요?

   아니야. 내가 다녀올게.

   그럼 꾸물대지 말고 냉큼 다녀와요.

   아내는 나를 쏘아보며 손사래를 쳤다. 내가 마스크를 챙겨 들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도 아내의 매서운 눈초리는 줄곧 나를 따라왔다. 

   나는 승강기를 버리고 계단을 택했다. 올라가면서 만약 그가 왈칵, 문을 열면 뭐라고 할까, 궁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어떤 일이든지 기선제압이란 중요하니까. 좋은 말로 될 것 같았으면 벌써 되었지. 804호 앞에 다다른 나는 숨을 한 차례 몰아쉬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빗발치는 아내의 성화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이 사태를 끝내기 위해서는 그와 한번은 마주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전갈 문신을 팔뚝에 새긴 그가 프로레슬러 같고, 그 송곳니 사이로 혀를 내밀고 있는 그 개가 크고 사납더라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숨을 몇 차례 길게 내쉰 나는 힘차게 초인종을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컹, 컹, 커엉, 커어엉. 초인종 소리가 나자 출입문 앞까지 달려온 개가 문짝을 앞발로 세차게 긁으며 요란스레 짖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으르렁, 거리는 품이 만약 출입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면 당장 뛰쳐나와 물어뜯을 기세였다.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어 그쯤은 이미 예상했으나 아주 가까이에서 그 소리를 듣게 되자 나는 다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개 소리만 요란하게 들릴 뿐,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조심스럽게 몇 번 더 눌러 보았으나 반응은 지난번과 똑같았다. 개만 남겨 놓고 모두 어딘가로 외출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개가 제왕처럼 큰 소리로 단지를 들쑤셔 놓을 적에도 그랬다는 것인가. 나는 갑자기 그렇듯 시끄럽게 짖는 개를 그냥 방치한 채 외출한 그들의 무책임에 분노가 치밀었다. 백 차장이 회삿돈을 빼돌리는 것도 모르고 미팅 때마다 목표액을 달성하지 못한다고 영업부만 닦달하던 공 이사처럼···. 나는 지난번 올라왔을 때 딱, 한 번 문도 열지 않고 인터폰으로 알았어요, 조심 시킬게요, 하고 단답형으로 대꾸하던 여자의 음성이 떠오르자 정말 이대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반드시 근절시킬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딸과 통화를 하고 있던 아내는 내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서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래요?

   없어, 아무도.

   비었단 말이에요?

   그렇다니까. 개만 있어.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낸 나는 그것을 그대로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나도 모르게 정수리에 땀이 돋았고, 목이 말랐다. 아내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관리실에 또 가서 항의하세요. 우는 아이 젖 먼저 준다고, 그래야 움직이는 척이라도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면 정말이지, 제가 먼저 죽겠다니까요. 당신 아시잖아요? 내 몸이 지금 어떤 상태라는걸···.

   나를 위층으로 몰아내던 조금 전에 비하면 아내의 눈초리가 좀 풀어진 건 확실했다. 하지만 아주 누그러진 것은 아니어서 그때까지도 말투에는 여전히 가시가 돋쳐 있었다. 아내는 다시 딸과 통화를 계속했다.

   ···둔하잖니, 본래. 그러니까 회사가 망할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졸지에 당한 거 아니겠어? 그건 받았지, 그럼 그거까지 주지 않았다간 큰일 나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래, 앞으로가 문제야. 아직 나이가 있는데 집구석에서 놀고먹을 수는 없잖아? 쌓아 놓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라고는 하는데 기다리긴 뭘 기다려, 난 기대 안 해. 그럼, 이번까지 벌써 몇 번째냐. 지겹지. ···그래, 보면 모르냐.

   물병을 식탁에 내려놓은 나는 딸과 통화하는 아내의 말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주방 조그만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경력사원으로 ‘동영’에 입사하기 전에도 같은 업종의 ‘승국주식회사’에 있었고, 또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는 왕십리의 건자재 대리점에도 잠시 몸을 담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이젠 끝이라는 자괴감이 자꾸만 나를 무겁게 눌러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줄기를 흩뿌릴 듯 잔뜩 흐려 있었다. 어쩌면 예보대로 늦은 장마가 정말 시작될 것 같기도 했다. 


   심 대리가 문자를 보낸 것은 일주일 만이었다. 그는 잠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점심을 먹은 뒤에 동료들과 자주 찾던 회사 근처 E 카페를 약속 장소로 정했다. 시간에 맞춰 카페 출입문을 밀고 들어간 나는 그의 얼굴에서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금방 감지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내가 아이스아메리카노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아무래도 회사가 소문대로 대풍제약으로 넘어갈 것 같다는,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나를 더욱 움츠리게 하는 것은 생산직은 그나마 인수할 회사가 부분 선별할 예정이라지만 관리직과 영업직은 모두 새 사람, 즉 자신들의 사람으로 채울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린? 

   뭐가 어떻게 돼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거지요.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런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투쟁 현장도 사분오열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앞장섰던 생산직 사원들이 슬금슬금 뒤로 빠지기 시작했으며, 관리직도 어느새 그쪽에 빌붙기 위해 이탈하는 사원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먹고산다는 게 뭔지, 심 대리가 혀끝을 찼다. 

   나도 모르게 이 사이로 앓는 소리를 내던 나는 박 과장의 근황을 물었다.

   그는, 그래도 박 과장은 초지일관 농성 현장을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허 과장님도 무임승차할 생각 마시고,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세요. 

   무임승차라니?

   국으로 댁에서 관망만 하고 계시니까 그런 볼멘소리들이 나오는 거지요.

   내가 그랬나?

   그런 셈이잖아요. 지금 하고 계시는 게···.

   카페 근처 술집에서 소주 몇 잔을 걸친 그는 다음 날 다시 내려간다고 하면서 나를 쏘아보았다. 무임승차, 무임승차···.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에게 지금 처한 내 가정의 다급한 현실, 즉 불한당 같은 개 소리를 설명한다는 게 왠지 구차스럽고 변명처럼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4

   문제의 핵심은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는 개였다. 개만 없다면 프로레슬러가 살든, 아이 다섯 명을 둔 가족이 살든 우리가 애면글면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노부부가 살던 때처럼 사이좋게 지내지는 못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파트란 토끼장처럼 층마다 개인 생활이 보장되어야 하는 공간이니까. 따라서 그 개만 없어진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이번엔 개를 어떻게 없앨까, 혼자 끙끙 앓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팔뚝에 전갈 문신을 새긴 야차 같은 그가 개를 치워 달란다고 순순히 들어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아파트에 데리고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죽여야 한다는 것, 죽여서 그 소리를 다시는 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내가 그와 같은 매몰찬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어떻게 하면 합리적으로 몰아낼 수 있을까를 놓고 고심했다. 그래서 찾아낸 게 법이었다. 그러나 동물보호법 제1조에 명시된 ‘동물에 대한 학대 행위의 방지 등, 동물을 적정하게 보호, 관리를 위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동물의 생명 보호, 안전보장 및 복지증진을 꾀하고, 건전하고 책임 있는 사육문화를 조성하여, 동물의 생명 존중 등 국민의 정서를 기르고 사람과 동물의 조화로운 공존에 이바지’하고자 제정한다는, 조문을 읽고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맹견’의 정의를 도사견, 핏불테리어, 로트와일러 등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 개로,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한 개를 일컫는다는, 애매모호한 조항을 읽었을 때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종자도 확실치 않은 위층의 개는 어디에 속한단 말인가. 그것은 사람의 권익보다 개의 권익을 우선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며칠 만에 내가 찾아낸 결론이란 결국 죽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결심하자 왜 지금까지 몇 날을 혼자 속을 끓였는지 스스로 후회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아내에게는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게 가장 적극적인 방법은 틀림없지만 잘못하면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터에 지청구나 들을 수 있고, 또 딸의 귀에까지 금방 들어갈 게 뻔했으며, 무엇보다 그런 일일수록 마무리할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개가 짖을 때마다 머리를 싸쥐고 주방으로 뛰어가 숨고(거기가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나에게 눈총을 주며 도대체 뭐 하는 거냐고 닦달하고, 틈만 나면 남편 따라 여수에 내려가 있는 딸에게 응원을 청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나는 아내가 핸드폰에 대고 내 흉을 쏟아 낼 적에도 짐짓 딴청을 부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언제까지요? 여름이에요. 이 여름에 창문도 열지 못하고 살게 생겼는데도요?

   글쎄, 조금 더 기다려 보자니까. 

   나는 아내를 향해 활짝,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해치우겠다고 세운 그 계획을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다. 현실은 계획과 달랐다. 그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넘기 어려운 장벽이 너무 많았다. 내가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죽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총기를 사용하여 직접 죽이는 방법이 있었고, 둘째는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 셋째는 목을 매다는 방법, 그리고 넷째는 독극물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첫째는 구매 과정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신상이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보관 또한 내 임의로 되는 게 아니었다. 총은 늘 경찰서에 비치하고, 사용할 때도 목적과 신분 확인이 필요했으며, 사용 후에도 반드시 기일 안에 반납해야 하는 제약이 따랐다. 그렇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겠다는 내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법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맞서야 하는 난점이 있었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그 크고 사나운 개와 대결하다니···. 그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내가 방점을 찍은 것은 독극물을 사용하는 네 번째 방법이었다. 청산가리. 그랬다. 그것 이상 효과가 만점인 것은 없었다. 그것을 알게 된 나는 혼자 쾌재를 불렀다. 그놈이 좋아할 튀김 통닭 배 속에 그것을 깊숙이 찔러 넣고 슬그머니 던져 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너끈히 해치울 수 있다고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그 보기 싫은 놈과 맞상대할 필요도 없고, 프로레슬러와도 낯 붉힐 이유가 없었다. 시치미만 떼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이웃한 나라에서는 들개들에게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한 적이 있었고, 파키스탄에서는 유기견을 없애기 위해 라두라는 음식물에 이같이 독극물을 넣어 자전거에 걸어놓는 방법을 통해 효과를 보았다는 보고도 있었다. 구매도 독극물치고는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익명으로 구매하면 신상이 노출되는 것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 경우, 어떻게 개 주둥이 앞에 치킨을 던져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개는 혼자 다니지 않았다. 더구나 밖으로 나올 때는 반드시 촘촘한 그물 마개로 입을 가렸고, 또 그가 늘 가죽으로 된 목줄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기회를 엿보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또 설혹 어쩌다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처음 보는 내가 뜬금없이    던져 주는 통닭을 그 개가 덥석, 받아먹을지도 의문이었다. 자칫 잘못하여 그 안의 독극물이 발각되는 날이면 오히려 덜미를 잡혀 망신살은 물론이고, 까딱하면 동물보호법 제46조에 명시된 대로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손등으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습기를 머금은 미지근한 바람이 반쯤 열어 놓은 주방 창문을 통해 들어와 내 얼굴을 연신 핥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우리 집 위층일까. 이게 무슨 일일까. 나는 개 소리가 예고 없이 쳐들어와 집 안을 온통 들었다 놨다 할 적마다 가슴을 쳤다. 며칠 동안 골똘히 세웠던 계획을 모두 내려놓은 날 나는 문득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돌아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작은 평수지만 내 집에서 그냥 아내와 함께 열심히 일하며 조용히 사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다니···. 그렇다면 더더욱 잃어버린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도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 소리를 중단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나의 존재감을 위해서도 필연이었다.

   찬물에 밥을 말아 오이지를 반찬으로 대충 점심을 마친 나는 마스크로 무장한 채 관리실을 향해 운동화를 꿰어 신었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잃어버린 실마리를 다시 찾아보는 게 가장 빠를 것 같았다. 그사이에도 아내는 안방에 들어앉아 딸과 통화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은 관리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관리소장은 이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이쑤시개를 입에 문 채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그가 권하는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따져 물었다. 

   제가 찾아온 게 벌써 몇 번째인 줄 아십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커진 내 목소리에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내가 눈을 치뜨고 물었으나 마스크를 턱 밑까지 내린 소장은 이쑤시개로 이빨 사이를 파내고 있을 뿐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그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었다.

   소장님 귀에는 밤낮없이 짖어대는, 4동 804호의 개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단지를 온통 들었다 놨다 하는데도요?

   나는 그동안 내가 숙지했던 공동주택관리법 제20조 2항에 명시된 내용, 즉 층간소음이 발생할 시에는 관리 주체에 그 사실을 알리고, 이를 접수한 관리 주체는 피해 끼친 해당 입주자에게 층간소음 발생을 중단하거나 차단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을 들려줬다. 여기에서 관리 주체란 관리실을 말하며, 더구나 피해 끼친 입주자는 관리 주체의 조치 및 권고에 협조해야 한다는 3항을 들어 관리 태만 아니냐고, 다그쳤다. 그러나 소장은 입을 금방 열지 않았다. 이미 그와 같은 민원에 타성이 생긴 듯 미적거렸다. 결국 몇 번 더 같은 질문을 거듭한 후에야 이쑤시개를 빼고 입을 연 그는 요즘 반려견 기르는 집이 어디 한두 집이냐고 되물으며, 아파트 관리란 공동생활과 입주자들의 사생활이라는 양 날개를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고충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덧붙여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르는 반려동물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 줄 아느냐고 반문한 뒤 1,200만 마리가 넘는다는 것과 아울러 반려동물 등록제는 물론, 지금 반려동물 헌혈 운동 등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으며, 머잖아 반려동물 건강보험제도가 나올 전망이라는 것까지 들어가며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고 했다. 

   결국 나는 그날도 소장으로부터 직접 찾아가 중단시켜 달라는 요구에 대한 확답을 받아 내지 못했다. 다만 방송만큼은 고려해 보겠다는 언질을 받은 게 고작이었다. 드문드문 창구를 찾는 주민들이 늘어나자 더 이상 소장을 붙들고 있을 수 없어 나는 빈손으로 관리실 계단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개 소리를 듣지 않는 날은 언제쯤 다시 올까. 관리실을 벗어나자 문득 어젯밤 딸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경우, 강남 지역의 아파트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서로 먼저 중단시켜 달라고 아우성치지 않았겠어요?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보름 넘게 올 듯하면서도 빗방울을 뿌리지 않는 하늘은 그날도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집에 들어선 나는 아내가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평소 깔끔하기로 소문난 아내의 품성과는 달리 안방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아마도 급히 빠져나간 듯했다. 무슨 일일까. 조금 전까지도 딸과 통화하지 않았는가. 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뒤 가쁜 숨을 내쉬며 들어서는 아내의 모습에서 나는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또 개였다. 내가 관리실에서 소장과 다투고 있는 동안 개가 또 한바탕 짖어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럴까, 아내의 낯빛은 다른 때보다 더 창백했다. 아내는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어디 갔다 오는지 아세요?

   글쎄···.

   위층이요.

   흥분을 감출 수 없는 듯 아내는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었다. 아내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날아왔다.

   당신이 못 하면 나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어요?

   아내의 힐책이 다시 내 머리 위로 속사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용한 집 안에 불한당처럼 함부로 쳐들어와서 심장을 마구 찔러대는데, 당신이 해 줄 거라 믿고 무작정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요? 여긴 당신 회사가 아니라고요. 

   나는 머리를 수그린 채 마른침을 삼켰다. 아내의 말은 하나도 틀린 데가 없었다. 가장으로서 그것 하나 아직 처리하지 못하다니,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집, 참 이상하대요?

   아내가 나를 돌아보았다.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꾸가 없어요? 개가 그처럼 사납게 짖는데도···.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홧김에 올라가긴 했으나 아내 역시 헛수고한 게 틀림없었다. 정말 큰일이야. 아무 대책도 없이 이렇게 질질 끌려가다가는 성마른 내가 먼저 죽고 말 것 같아···. 혼잣말을 내뱉으며 아내는 혀끝을 찼다. 나는 그게 주변머리 없는 나를 탓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개를 싫어하게 된 것은 어린 시절 경자네 집 개가 그렇게 사라진 뒤부터였다. 그 사나운 개가 왜 이따금 내 꿈에 나타나곤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때마다 소스라쳐 깨어나곤 하였다. 어떤 때는 오줌까지 지려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그 뒤로 길거리에서 큰 개와 마주치면 나는 나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개를 싫어하는 쪽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우리 부부는 천생연분이 분명했다. 거기에다 개를 싫어하는 것은 자기 엄마를 쏙 빼닮은 딸도 마찬가지였다. 딸은 날리는 털과 배변 그리고 개들이 풍기는 냄새를 이유로 들었지만, 그것을 종합하면 총체적으로 싫다는 뜻이었다. 그런 까닭에 딸은 일 년에 댓 번 방문하는 처제가 반려견인 ‘구슬’을 안고 오는 날이면 자기 방에 숨어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모라면 죽고 못 사는 사이였지만 처제가 아무리 불러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면 아내까지 덩달아 개를 데리고 오려거든 앞으로는 우리 집에 발그림자도 들여놓지 말라고 엄포를 놓곤 했다. 그럼 어떡해, 집에 얘 혼자 있는데, 놔두고 와? 불쌍하잖아. 처제가 울상을 지었으나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딸이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건 열 번도 넘었다. 


   5

   박 과장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쩌다 술자리에 앉아도 으레 사이다나 콜라를 찾아서 일행들로부터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달랐다. 심 대리가 극구 말려도 막무가내로 마셔댔다. 따라 주지 않으면 혼자 따라 마셨다. 내가 웬일이냐고 묻자 그는 공장에 내려가 있는 동안 늘어난 게 술뿐이라면서 히죽거렸다. 

   다 알고 있어, 그쪽에서···.

   그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내뱉자 심 대리가 덧대어 설명해 주었다.

   양 대리 아시죠? 그놈이 프락치였어요. 우리 계획을 어떻게 속속들이 알까, 궁금했는데 그놈이 다 일러바친 거더라고요. 

   그걸 그냥 놔뒀어?

   그럼 어떻게 해요? 자신이 살겠다고, 결정하고 건너간 것인데···.

   그래도 그렇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숨이 막혔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덩치가 커서 목도꾼이라고 불리던 그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는 심 대리가 따라 주는 대로 연거푸 잔을 비웠다. 

   공장 생산직 사원들도 이젠 완전히 두 패로 나뉘었어요.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아요. 떳떳하게 고개를 바짝 쳐들고 다닌다니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머리에 띠를 두르고, 함께 결사반대 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인데 말이에요. 세상 참 웃기지 않아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 딱이에요.

   심 대리는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이 모두 돈 때문이라고 했다. 

   돈이 사람을 변절시키기도 하고, 돈이 사람을 한데 뭉치게도 한다니까요. 

   나는 그가 돈, 돈 할 때 문득 영업실적을 초과 달성할 적마다 만면에 웃음을 띠던 공 이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그날 술자리는 박 과장이 마구잡이로 술병을 깨고 테이블을 엎는 바람에 끝이 났다. 개 같은 세상, 개 같은 세상···. 누가 신고했는지는 모르지만, 경찰차가 오고 지구대에 실려 가면서도 그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했다. 

 

   개는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쉬는 듯하다가도 다시 짖어댔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또 며칠을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 소리가 터질 적마다 나를 향한 아내의 잔소리와 힐책도 따라 비례했다. 아내는 의사가 주의한 대로 두통과 불면증, 거기에 왝왝거리는 것을 보면 없던 구토 증세까지 나타내고 있었다. 어떡할 거예요, 저 소리! 나는 아내의 고성이 터질 적마다 귀를 막았다. 답답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머리를 짜 보아도 궁리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곳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아내가 들을 리도 만무하지만 나 자신도 그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항복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사이에도 개를 끌고 나온 그와 마주친 적은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내가 그를 처음 봤을 때처럼 개를 데리고 내려오는 그와 승강기에서 마주쳤고, 또 한 번은 오전 무렵 공원에서 돌아오는 그를 후문 앞에서 만났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모르는 척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도망치듯 피했다. 다만, 그때도 시커먼 그 개는 나를 안다는 듯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며 헥헥거렸다. 

   결국 내가 다시 며칠 동안 끙끙 앓으며 궁리한 묘안은 동조 세력을 규합하자는 것이었다. 혼자 해결하지 못한다면 여럿이 뭉치면 될 것 아닌가. 그동안 한밤중에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소리를 우리만 들었을 리는 없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갑자기 힘이 솟았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관리실도 어쩔 수 없이 적극성을 띨 게 틀림없었다. 나는 자리를 걷어차고 벌떡 일어났다.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후회스러웠다. 물론 발품은 팔아야겠지만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은 방법은 틀림없었다.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단숨에 비운 내 눈앞에는 어느새 프로레슬러 같은 그가 백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나는 그 묘안을 아내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방법이야말로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은 환영의 뜻을 비쳤다. 왜 그런 생각을 이제야 했어요? 아내는 그러나 입주자들이 과연 내 뜻을 잘 따라 줄지 의문이라고 했다. 요즘은 다 그렇잖아요. 저마다 바쁘게 사는데···. 아내의 말은 특별히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을 수 있다고 판단되면 기피하는 게 요즘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비록 타의에 의해 백수 신세로 전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단성과 단속하는 힘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이참에 아내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곧장 그 작업에 착수했다. 내가 처음 찾아간 사람은 3동 808호의 김 선생이었다. 그는 청주의 모 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퇴직한 사람인데 나보다 나이는 열두 살이 많았지만 몇 년 전 공원에서 음료수를 나눠 마신 게 인연이 되어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인품이 점잖고 후덕하다는 소문이 나 있는 만큼 잘하면 그를 통해 또 다른 동조 세력을 규합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나로서는 내심 깔려 있었다.

   그는 마침 집에 있었다. 내가 찾아가자 갈색 반바지 차림으로 나온 그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맘대로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냐고, 떨떠름한 얼굴로 한마디 던지고는 나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구조는 우리 집과 같았으나 나는 늘 그의 집에 오면 이상스럽게 도서관에 온 것처럼 무거운 느낌이었는데 그날도 틀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거실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서들 때문일 터이었다. 내가 두리번거리자 그가 혼자 돌아가던 선풍기 머리를 내 앞으로 돌려 주며 아내가 출타 중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요즘 잠은 잘 주무세요?

   나는 그가 내미는 음료수 컵을 받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얼굴이었다. 

   개 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지는 않느냐고요?

   찬 음료는 레몬이 첨가된 듯 약간 신맛이 났다.

   개 소리? 들었네만, 근데 왜?

   그는 여전히 뜬금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이런 일일수록 뜸을 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나는 그동안 그 소리에 대해 그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는 평일 오전 시간대인데 그런 일 때문에 회사까지 나가지 않았느냐고, 오히려 궁금한 듯 반문했다. 나는 그 질문엔 어물어물 대꾸하고 다시 물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잠을 잘 잤느냐고요? 

   거실 벽에는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언제 찍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가족 다섯이 두 줄로 앉고 서서 웃고 있는 커다란 액자 속의 그는 지금보다 훨씬 젊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불편해서 찾아온 모양이구먼. 

   맞아요. 어찌나 요란스레 짖어대는지 우리는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나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찾아온 목적에 대해 자초지종 설명을 풀었다.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말을 마친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며 음료수 컵을 다시 들었다. 차고 신 음료수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가 입을 연 것은 내가 컵을 절반쯤 비웠을 때였다.

   하긴, 바로 아래층이니까 그럴 만도 하겠군. 더구나 자네 내자는 더 힘들겠구먼.

   그렇지요. 이거야 무슨 대책을 세워서 단지에서 쫓아내든지, 아니면 아예 짖지를 못하게 만들든지 해야지, 이대로는 정말 성한 사람도 병나게 생겼다니까요.

   나는 덧붙여 아내가 그것으로 인해서 벌써 두통과 구토 증세까지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이해한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나는 비로소 그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는 기대가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직감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서 이야기인데, 나는 그동안 내가 생각해 낸 묘안을 구체적으로 꺼냈다. 그러나 개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리가 뭉치는 방법밖에 없다는 나의 제안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의외였다.

   자네, 이런 이야기 들어보았나?

   무슨···.

   프랑스에서는 내년부터 아예 강아지를 팔고 사는 것을 금지시킨다는 거야. 우리가 인권을 중시하듯 그들의 권리도 중시해 줘야 한다는 거지.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옛날엔 애완동물이라고 했지? 이제 그런 말을 하다가는 전근대적 사람으로 취급받아. 반려라고 해야지. 자네, 반려가 무슨 뜻인 줄은 알고 있지? 

   나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유도 없이 밭은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가 느리고 낮은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 혹시 절에 가 봤나? 나는 등산을 자주 가니까 절간을 지나칠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놀라곤 한다네. 왜 그런 줄 아는가? 개에 대한 제사를 엄숙하고 정성스럽게 지내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하거든. ···자네, 요 앞 이마트 가 봤지? 거기에서 뭘 봤는가? 몇 달 전까지 진열되어 있던 어린이 장난감 자리에 반려동물 코너가 신설되지 않았든가? 그걸 보면서 무엇을 느꼈는가?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갑자기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비록 에둘러 말하고는 있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그는 그런 사유를 들고 온 나를 달가워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이젠 그런 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지. 그럼 어떻게 한다? 참는 게 상책이야. 하긴, 소음진동관리법이란 게 있긴 하지. 층간소음 방지법이라는 것도 있고···. 그러나 모두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어. 

   그렇다면 형님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지금까지 참았단 말이에요?

   나는 나도 모르게 말꼬리가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셈이지. 자네도 알지 않는가, 만사가 다 마음먹기라는 말···. 그래서 그런지 날마다 들으니까 그냥저냥 참을 만도 하더라구.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비로소 내 예상이 빗나갔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구태여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애걸복걸할 필요는 없었다.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그의 자유의사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가 방관자처럼 나 몰라라 한다고 그 계획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방법이 유일한 마지막 수단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 집을 나왔다. 

 

   김 선생의 집을 나선 나는 이번엔 발걸음을 우리와 같은 동 303호 최 사장네로 돌렸다. 그러나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현관문을 열어 준 그의 부인을 보고서야 나는 그 시간대면 그가 출근한다는 사실을 새삼 되씹었다. 사전에 전화를 먼저 주고 오시지 그러셨어요? 이 양반은 밤늦게나 되어야 돌아와요. 그의 아내는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다는 눈빛이었다. 헛걸음을 친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그는 통일로 부근에서 주차장까지 갖춘 제법 규모가 있는 한정식 전문식당과 또 시내 번화가에서 룸이 여럿 딸린 고급유흥업소를 운영하는, 단지 내에서는 몇 안 되는 알짜배기 사업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살이 좀 심한 편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어린 그는 만날 적마다 울상을 지으면서 코로나 때문에 요즈음 경제 사정이 아주 나빠졌다는 것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저는 형님이 제일 부럽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면 봉급이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나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화장지 한 롤을 팔기 위해 발품을 얼마나 팔고 다녀야 하는지를 그가 알까. 물론 지금은 그나마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어쩌다 단지에서 회식 자리가 벌어지면 계산은 항상 그가 도맡았다. 명절 때 단지의 경비원들에게 양말이라도 돌리는 사람 역시 그였다. 그런 까닭에 단지 안에서는 비교적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더구나 무조건까지는 아니어도 내 말이라면 토를 달지 않는 편이어서 더더욱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내가 눈에 불을 밝히고 있을 터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려 이번엔 미란이 할아버지를 찾았다. 다행히 미란이 할아버지는 그 집에 당도하기 전 도로에서 만날 수가 있었다. 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이라는 그는 나와 마주치자 검은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활짝 웃었다. 작달막한 키 탓일까, 아니면 유독 배가 볼록 튀어나온 탓일까. 엘에이라는 대문자가 크게 새겨진 흰 야구모자로 대머리를 가린 그가 웃는 모습은 꼭 그림에서 본 달마대사 같았다. 

   어쩐 일인가?

   그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그늘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놓인 벤치는 옆으로 가지를 길게 뻗은 느티나무가 햇볕을 가려 주어서 이야기를 꺼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본론을 꺼낼 기회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팔십이 가까운 나이지만 어찌나 말이 잰지, 내가 미처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가 늘 열정적으로 쏟는 이야기란 이혼한 아들이 맡기고 가버린 미란이 양육 문제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때로는 정치가들을 비판하는 것이거나 사회 문제 또는 마찰을 빚고 있는 국제 분쟁들이었는데, 그것은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서 나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특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가는 귀가 먹어 대꾸하는 사람이 늘 목청을 높여야 했다. 그날 그가 첫말을 꺼낸 것은 확진자가 급증하는 코로나 문제였다. 기회를 엿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데 그는 평소와 똑같이 말끝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인사치레로 머리를 주억거리던 나는 그가 물을 때마다 일일이 대꾸하기도 곤혹스러웠다. 

   이러다가 정말 지구의 종말이 오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 거, 누가 예언을 벌써 오래전에 했다잖아. 노스트라다무슨가, 뭐신가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해?

   글쎄 말이에요. 하긴, 그것 때문에 세상이 더 뒤숭숭해진 건 사실이에요. 

   내 생각에는 그걸 지구에서 없애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고, 앞으로는 그걸 감기처럼 늘 끼고 살아야 할 것 같아. 티브이를 보니까 어느 박사도 그렇게 이야기하던데, 자네 생각은 어때?

   그럴지도 모르죠. 이렇게 쭉 계속된다면.

   마스크를 고쳐 쓴 나는 여전히 언제 기회가 올까,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꽃무늬가 있는 긴 원피스 차림의 젊은 여자가 갈색 털을 지닌 조그만 강아지를 안고 우리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쳤다. 말을 계속 이어 가던 그도 그 강아지와 여자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햐, 그놈 참 예쁘게 생겼네! 그가 감탄사를 내뱉자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혹시 요즘 개 짖는 소리 때문에 힘들지 않으셨어요? 

   어렵게 운을 뗀 나는 그의 얼굴부터 살폈다. 그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그의 곁으로 바투 다가가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였다. 

   개 짖는 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는 않으셨냐고요?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그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들었지. 내가 어디 귀먹은 사람인가, 그 소리도 못 듣게.

   아주 시끄럽지요? 동네가 온통 떠나갈 만큼.

   나는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활짝 펴면서 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그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잠을 설친 것 같지도 않았다. 하긴, 약간이긴 해도 가는 귀가 먹었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렇다면 그쯤도 예상하지 못하고 찾은 내 오산이었다. 

   큰 개인가 봐, 소리가 제법 우렁차더구먼. 

   시끄럽진 않았어요?

   시끄럽긴···.

   그는 내 얘기보다 그 개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6

   불이 꺼진 공장은 마치 공룡이 머물다가 떠나간 동굴 같았다. 출입문에 걸려 있는 현수막을 목격한 순간,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붉은 글자로 크게 쓰여 있는 ‘복직을 보장하라’는 구호가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현수막과 벽보는 비단 거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눈에 띄는 곳곳마다 그와 비슷한 내용의 현수막과 벽보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농성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천막엔 겨우 몇 명밖에 없어 오히려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도 생산직 사원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심 대리를 비롯한 관리직 사원 몇 명뿐이었다. 무임승차할 생각 말라는 심 대리의 경고성 발언이 밤마다 살아나 송곳처럼 가슴을 찔러대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 현장을 찾아왔으나 솔직히 나는 몇 명 되지 않는 그들의 몰골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 대리는 내 얼굴을 보자 원군을 만난 듯 반겼다. 

   잘 오셨어요. 진작 그렇게 하셨어야죠.

   수고들 하네. 근데, 박 과장은 어디 갔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심 대리는 갑자기 시큰둥한 어조로 밑도 끝도 없이 갔다고, 했다.

   어딜 가?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는 어디겠어요. 양 대리 따라갔으니까 저쪽이겠지요.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내 속의 말들이 순간 모두 흩어져버렸다. 그래도 심 대리는 기가 꺾인 얼굴이 아니었다. 대풍에서 곧 협상하자는 제안이 들어올 거라고 장담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박 과장이 왜 돌아서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궁금했다. 며칠 전에도 개 같은 세상, 운운하면서 같이 소주를 마셨고, 테이블을 엎었고, 병을 깼고, 신고 받고 출동한 경찰차에 실려 지구대에 가면서도 목소리를 굽히지 않던 사람 아닌가. 따지고 보면, 한때 경쟁 상대였지만 박 과장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지난 시간 숫자에 구속받으며 살아온 셈이었다. 그걸 부추긴 곳은 ‘동영’이란 회사였고, 공동체라는 이름의 사회였다. 회사는 영업 과정을 거치면서 얼마만큼 땀을 흘렸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을 중요시했다. 과로 뒤에 오는 피곤을 쾌감으로 여기라고 했다. 전월 영업1과는 매출실적을 8억이나 올렸는데 3과는 그 시간에 뭐 했어? 이번 달엔 반드시 9억 목표치를 넘기도록 분발들 해. 두 눈을 모로 뜨고 욱대기던 공 이사의 얼굴이 갑자기 눈앞을 스쳤다. 

   나는 핸드폰으로 박 과장을 호출했다. 그러나 신호가 여러 차례 가도 그는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도 답신이 없었다.

   이길 자신 있어?

   그럼요. 아니라면 벌써 포기하고 말았지, 이 땡볕에 이 짓 하겠어요?

   정말이지? 

   나는 결국 박 과장이 왜 그쪽으로 갔는가에 대해서는 묻지 못했다. ‘동영’이 ‘대풍’으로 넘어가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화된 듯했다. 그러나 심 대리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면서 장승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는 그곳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준비해 왔던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건네주면서 다시 물었으나 그의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회사는 자본주만의 것이 아니잖아요. 엄밀히 따지자면 사회가 키워 준 거니까 사회의 것이기도 하지요. 안 그래요? 

   그의 주장은 그렇게 보면 근로자들의 권리도 당당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심각한 위기도 겪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때에는 자산 매각이나 근무 시간 단축, 무급 휴직 등, 경영 정상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지요. 그래도 안 될 때 마지막 수단이 정리해고입니다. 물론 거기에도 경영 사정과 노동자 사정을 고려하여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대상자를 선정해야 하고, 또 해고 예정일 오십일 전에는 근로자 대표에게 통보하라고 법이 정해 놨어요. 그런데 어디 그런 적 있었어요? 자기들끼리 골방에서 담배나 빨아대면서 일방적으로 선정하고 또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 아닙니까? 이건 분명히 근로자들을 무시한 불법행위입니다. 

   나는 그의 정수리 위에서 힘차게 펄럭이는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복직만이 살길이라고 쓰인 붉은 글자가 자꾸만 가슴을 찔러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아내는 공장에서 돌아온 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아도 벌써 안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 전까지 또 딸과 통화한 듯했다. 이젠 박 과장도 저쪽으로 넘어간 모양이야, 했으나 아내는 한번 머리를 힐끗 돌렸을 뿐 가타부타 토를 달지 않았다. 나는 힘이 빠졌다. 개가 또 짖지 않았는가, 묻고 싶었으나 입을 다문 채 내 방으로 들어갔다. 

   결국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하려던 나의 계획은 수포가 된 셈이었다. 믿고 찾아갔던 그들은 모두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풍기를 돌려 땀을 식히면서 나는 머리를 짜 보았다. 그러나 안하무인처럼 내 머리 위에서 당당하게 짖어대는 저 개를 못 짖게 해야 한다는 목표는 분명하지만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공장에서 보았던 현수막이 자꾸만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며칠 동안 나는 방 안에 박혀 이웃을 원망했다. 산책길이나 공원 등에서 눈길만 마주쳐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사이 아닌가. 그런데 이처럼 중차대한 일에 나 몰라라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피해자인 셈인데도 반응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가 자기 대신 나서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도 될 터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반려견에 대한 인식이 나와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주민 전체가 아니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비록 밖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주민들도 꽤 많이 숨어 있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물 위로 끄집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궁리한 끝에 얻어낸 결론은 그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단지 곳곳에 현수막을 설치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공장 현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것은 딸의 조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딸이 그것을 제의한 것은 아니었다. 딸은 처음엔 반려견이 웬만한 사람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고는 성대 수술과 중성 수술 등에 관해서 말을 이었다. 성대 수술 받게 하는 건 어때요? 그럼, 짖지는 않을 텐데···. 그러다가 불쑥 꺼낸 게 불특정 다수인 이웃을 모으는 방법으로는 먼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프로레슬러라고 해도 여러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꼼짝달싹 못 하고 두 손 들게 되어 있어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프로레슬러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내가 관심을 보이자 딸은 그러기 위해서는 주민들을 동원해서 관리실을 압박하는 방법이 최고라고 일러 주었다. 강남이라면 벌써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때 내가 떠올린 게 현수막이었다. 공장에서 목격한 뒤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붉은 글자의 현수막. 내 말을 듣자 딸은 바로 그거라고, 큰 소리로 깔깔거렸다. 아내도 그 제안엔 이의를 달지 않았다. 물론 딸의 조언이라고 전제한 탓도 있었지만 내 설명을 들은 아내는 나보다 한술 더 떴다. 

   기왕이면 연판장도 준비하도록 하세요. 

   연판장?

   이 양반은···. 그래야 나중에 개 주인이 뭐라고 해도 옴짝 못하게 할 수 있지요, 주민 다수가 서명한 증거가 있으니까. 

   그렇군.

   그러니까 여태까지 당신이 요 모양 요 꼴인 거예요. 

   아내의 핀잔이 떨어지자 나는 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째 물기만 머금고 있는 하늘은 그날도 청회색이었다. 바람도 없었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계획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현수막 제작은 이틀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의 단잠을 깨우는 개 소리를 추방합시다!’ ‘개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새겨진 현수막을 정문 앞에서부터 뒷문, 그리고 공원 입구와 단지를 잇는 도로 주변에 여섯 개 달아맸다. 물론 현수막 아랫부분에는 내 핸드폰 번호를 검은 글자로 새겨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 현수막이 설치된 아래에는 단지 길 건너에 있는 ‘부활’ 재활용센터에서 임시로 빌린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아내의 말대로 서명날인할 수 있는 A4 용지를 볼펜과 함께 여러 장 비치했다. 준비는 물론 내 몫이었다. 주민들의 눈에 잘 띌 수 있는 곳을 미리 선정한 나는 혹시라도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한 끈도 단단히 묶고 홀쳤다. 아내가 도와준 것은 문방구에서 볼펜 몇 자루 사 온 게 전부였다. 그래도 나는 아내를 탓하지 않았다.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렸으나 더운 줄도 몰랐다. 그보다는 이것이 정말 개와의 마지막 싸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7

   현수막이 걸린 지 사흘이 지났으나 주민들은 무엇이 걸려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민 가운데 간혹 낯익은 사람이 지날 때면 반갑게 달려가 자초지종 엉너리까지 치면서 서명을 권해 보았으나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지나가던 나이 든 할아버지는 도대체 이게 뭐 하는 거냐면서 날도 더운데 쓸데없는 짓거리 그만두라고 호통을 치기도 하였고, 또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의 한 아주머니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먼발치에서 손사래를 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관리실 직원이 나타나 현수막을 철거하라고 몇 번 만류할 때는 심 대리가 가르쳐 준 대로 시위법을 들어 가며 쫓아버렸다. 자기 세상인 양 시도 때도 없이 당당하게 짖어대는 개 소리를 단지에서 반드시 추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날이 밝으면 나와서 긴 여름 해가 넘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따금 문자를 보내 격려하는 딸과 때가 되면 찬합에 밥과 반찬을 들고 나와 중중대며 한숨을 쉬는 아내가 나에게는 유일한 위로였다. 

   그렇듯 아무 성과 없이 또 하루가 지나가던 오후 무렵이었다. 1동 사는 에어로빅댄스 강사가 상가에 볼일이 있어 가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건방지다고 할 만큼 허리가 너무 꼿꼿하고, 노랗게 염색한 머리가 나이와 어울리지 않았으나 나는 반갑게 맞았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래요. 눈을 크게 뜨고 묻던 강사는 내 설명을 듣자, 그런 일은 주민이 나설 게 아니라 관리실이 앞장서서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알지게 물었다. 

   왜 찾아가지 않았겠어요? 몇 번씩 가서 따졌지요. 

   뭐래요?

   그럴 때마다 조치하겠다고는 했지만 말뿐이었어요. 오죽 답답하면 이렇게 직접 나섰겠습니까? 아니, 개 소리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는데 주민이 어떻게 관리실을 믿겠어요? 

   맞아요. 자기들이 누구 덕에 밥 먹고 사는데···.

   길게 늘어뜨린 강사의 노란 머리가 내 눈에는 유난히 도도해 보였다. 

   그날 자진해서 연판장에 서명한 강사는 다음 날엔 아침마다 공원에서 에어로빅댄스를 하는 회원들을 몽땅 데려오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동안 놓지 못했다. 아줌마들의 힘이 이런 건가, 비로소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잠시 뒤 찬합을 가지고 나온 아내도 내 이야기를 듣고는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아내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나는 하얀 앞니를 모두 드러내고 웃는 아내의 얼굴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강사는 약속을 지켰다. 긴가민가했으나 다음 날 아침 약속대로 정말 여러 명의 여자를 데리고 씩씩하게 나타났다. 길고 큰 손가방 하나씩 들고 우르르, 몰려든 여자들은 모두 여덟 명인데 연령대가 같지는 않았다. 물론 대부분이 강사 또래였으나 그중에는 삼사십 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도 두어 명 끼어 있었다. 그녀들을 보는 순간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힘이 솟았다. 

   몸을 흔들며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바람에 잠시 혼란스럽기는 하였으나 여자들은 사전에 강사한테 상황을 들어 알고 있다는 듯 모두가 적극적이었고 긍정적이었다. 서로 다투어 가면서 서명을 마친 그녀들은 곧장 관리실을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소장은 도대체 뭐 하는 작자야?

   복지부동도 유분수지, 이런 민원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옷 벗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때 입주자대표는 또 뭐 하고 있는 거야?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여자들의 입에서는 막말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녀들이 중구난방 쏟아 내는 그 막말들이 내 귀에는 하나같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처럼 시원하게 들린다는 점이었다. 

   영주 엄마도 개 소리 들었어? 

   빨간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갈색 머리 여자를 돌아보았다.

   듣기만 해? 난 그 개도 봤어. 공원에서 마주쳤는데 시커먼 게 정말 송아지만 하더라니까. 얼마나 무섭던지···.

   두 팔을 한껏 벌린 영주 엄마란 여자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 말이 끝나자 이번엔 긴 생머리를 뒤로 깡똥 묶은 여자가 끼어들었다. 

   저도 들었어요. 우리 집은 창문이 돌아앉아 잘 들리진 않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들려올 땐 정말 신경이 곤두서더라고요. 아이들도 짜증을 부리고. 그래도 저는 그러다 말겠지, 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까···. 

   그러니까 이건 주민들이 모두 나서서 반드시 막아야 해. 아파트는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잖아? 공동생활엔 질서가 있어야 하는 거거든. 그 질서가 뭐겠어? 개보다는 입주민들의 인권이 먼저라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관리실이 매일같이 경고 방송을 내보내면 제가 아무리 철면피라도 무슨 조치를 하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나는 그녀들에게 전날 강사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개 주인이 프로레슬러 같아서 왜소한 나 혼자서는 상대하기가 버거웠다는 것과 송곳니가 유난히 날카로운 그 검은 개의 모양과 당장 잡아먹을 듯 쏘아보는 매서운 눈매 그리고 그동안 찾아다녔던 이웃들의 무관심과 그것 때문에 지병이 더 악화한 아내의 고통 등을 알렸다. 또 그동안 내가 관리소장에게 여러 차례 주지시켰던 공동주택관리법에 기재된 층간소음 방지법에 대한 것을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녀들은 내 말을 하나도 흘려듣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말을 마치자 숨을 한 차례 길게 내뱉은 강사는 내 등을 두드리면서 내일은 회원들을 더 많이 데리고 올 거라고 했다. 오늘, 안 되면 내일, 내일 안 되면 모레, 이런 일은 길게 잡고 끈질기게 싸워야 한다고 했다. 지쳐 쓰러지면 지는 거라고 했다. 

   법, 그거 믿지 말아요. 그거 믿다가는 지레 늙어 죽어요. 이런 건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없어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다 그렇잖아요? 

   나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문득 음성 공장의 심 대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매일 방송하고, 그래도 개가 또 짖으면 이번엔 단지 안의 남자들을 모두 동원해서 그 집 앞에서 아주 며칠이고 텐트를 칠 거야. 우리가 누군데! 

   강사는 자신 있다는 투였다. 강사가 허리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자 그때까지 떠들며 부산을 떨던 여자들이 모두 따라 웃었다. 

   한동안 웃고 떠들던 여자들은 잠시 뒤 강사가 길거리로 내려서자 정말 우르르, 관리실을 향해 몰려갔다. 나는 마스크를 단단히 고쳐 쓰고 의기양양하게 잰걸음을 놓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현수막을 내릴 날이 예상보다 더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용기를 내어 나서긴 했지만, 여름날 땡볕 아래에서 자리를 지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악물고 버텼다. 지나가는 주민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지쳐도 지친 기색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심 대리 역시 그런 심정으로 지금 동굴 같은 공장을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문득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을 그의 처연한 얼굴이 떠올랐다. 


   오후가 되자 흐렸던 하늘에서 마침내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가뭄이 이윽고 끝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맞아 보는 빗방울이었다.


추천 콘텐츠

없는 사람

없는 사람 이혜오 휴대폰 알람은 새벽마다 나를 밀쳤다. 나는 미지근해진 자리끼처럼 엎질러졌다. 바닥에 쏟아진 나를 겨우겨우 주워 모아 연습실로 출근해서 스트레칭을 하면, 그제야 팔다리가 달린 사람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엎질러진 나를 어떻게든 수습하는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 댄스 학원에 다닌 것은 열네 살 때부터였다. 길거리 캐스팅이 될 만큼 뛰어나게 예쁘지 않은 나 같은 애들은 대개 그때부터, 혹은 그전부터 학원을 다니며 오디션을 준비했다. 대형 기획사의 공채 오디션에서는 번번이 떨어졌고, 열여섯, 중3 때 중소형 기획사 하나에서 내 영상을 보고 대면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제안을 했다.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가서 대면 오디션을 봤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가득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당시 사옥이 위치해 있던 청담동은 내가 살던 동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동네 전체가 백화점 같았다고 할까.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그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나는 기뻤다. 그다음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 연습을 하고, 학교에 갔다가 하교 후에는 연습실에 가서 레슨을 받고, 레슨이 끝나면 밤까지 연습을 하다가 숙소에 가서 잠을 청하고 다시 학교에 가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연습생 숙소에는 나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연습생들이 때에 따라 열 명에서 열네 명까지 모여 살았다.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를 한 여자애 열네 명이 한 공간에 모여 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끝없이 쌓이는 머리카락을 줍고, 줍고, 또 줍다 보면 문득 인간의 머리에서 머리카락이 계속 자란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지곤 했다. 그곳에선 언제나, 모든 자원이, 부족했다. 동진에서 부모님과 살 때는 부족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것들까지. 화장실과 콘센트의 개수나 냉장고와 옷장과 침대의 넓이, 그리고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 내가 온전히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이불 속밖에 없었다. 나는 좁다란 이층 침대에서 늘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었다. 그 어둡고 텁텁한 공간만을 편안하다고 느꼈다. 나는 천천히, 깨끗하고, 반들거리고, 비싼 것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가득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갔다. 회사가 작아서인지 제대로 된 트레이닝 시스템이랄 게 없어서, 데뷔 조가 아닌 연습생들은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했다. 어린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가 또 우르르 나갔다. 들짐승처럼 방치된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했다가 또 끌어안았다가 하며 그 시간을 견뎠다. 물론 견디지 못하는 애들이 더 많았다. 고참들은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을 텃세로 풀었고, 신입들은 눈치만 보다가 나가떨어졌다. 매일 갈등이 있었고 매일 누군가 울었다. 누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기란 어렵다는 것. 그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남을 미워하지 않고 버티기는 힘들다는 것. 이제는

  • 관리자
  • 2023-11-15
멜들다

멜들다 양혜영 멜*이 들어왔다. 강 선주가 포구 안으로 들어온 멜 떼를 발견했다. 강선주는 포구에 매어 둔 배를 살피러 나왔다가 방파제 아래 바닷물이 은색으로 팔딱이는 것을 보고 멜 떼가 들어온 걸 알았다. 강 선주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와 족대를 챙겨 나오며 멜이 들어왔다고 마을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소도리 포구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급히 나오느라 베개에 눌린 머리와 엉덩이께 대충 걸친 바지 차림을 하고도 양손 가득 뜰채와 양동이를 들고 나오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가랑이가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바닷물 속으로 텀벙텀벙 들어가 뜰채로 멜을 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은빛 물보라가 튀어 올랐다. “아이구, 이제랑 좀 앉아 쉬어 보카” 일찍 멜을 발견한 덕에 양껏 멜을 건진 강 선주가 슬그머니 방파제 한쪽에 술자리를 벌였다. 그 모습을 본 남자 서넛이 뜰채를 넘기고 방파제로 올라와 강 선주 옆에 앉았다. “아이고, 맛나다.” 검지 끝으로 멜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입 속에 털어 넣으며 장 씨가 웃었다. “그냥 녹암쪄, 녹아.” “입 속에서 꿈틀꿈틀 헤엄쳠서.” “아이고, 맛 좋다. 맛 좋아.” 누가 채여 가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멜을 집어 먹었다. 멜이 수북이 쌓였던 접시가 어느새 허연 속살을 드러냈다. “아이고, 다 떨어지기 전에 여기들 왕 한잔씩 합써.” 강선주가 선심 쓰듯 바다에서 멜을 건지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좀 조용헙써! 바당 전세 냈수과!” 갑자기 강 선주를 향해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대성호를 모는 박 선주였다. 민망해진 강선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박 선주를 쏘아보았다. 박선주도 강선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한판 붙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옆에 있던 박 선주의 아내가 황급히 박 선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그냥 멜이나 건집써. 시간 아깝수다.” 아내의 말에 박 선주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멜을 건지기 시작했지만, 잔뜩 굳은 어깨가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냈다. 강 선주는 그런 박 선주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다 바지통을 잡아끄는 일행의 손끝에 못 이긴 척 앉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보통 멜 떼가 머무는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도리 포구 사람들은 죄다 포구에 나와 있었다. 이미 강 선주와 박 선주 사이가 껄끄럽다는 소문을 아는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둘을 힐끗거렸다. 강 선주는 그런 사람들의 눈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아 눌렀다. 포구 사람들 사이에 끼어 멜을 건지던 정순도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둘 만큼이나 정순도 그들과 껄끄러웠다. 몇 년 전 화재 보상 문제로 생긴 앙금이 다 풀리지 않은 탓이었다.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자 바닷물 속에서 희끗거리는 멜 떼가 보였다. 정순은 손을

  • 관리자
  • 2023-11-15
물을 잡으면

물을 잡으면 호인 티브이 화면 가득 연한 푸른색의 거인이 누워 있다. 거인의 배가 천천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는 동안 배꼽에서 꿈틀꿈틀 연두색 싹이 올라온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듯 시야가 확 멀어지며 줄기가 솟구쳐 오른 끝에 등불처럼 맑고 밝은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봉오리가 활짝 연꽃으로 벌어지자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다. 화면이 빙글 돌며 보여 주는 남자는 사방마다 하나씩 네 개의 얼굴을 가졌다. 남자가 눈을 뜨자 주변의 어둠이, 캄캄한 태초의 우주가, 섬세하게 일렁이며 여명이 밝아 온다. -멋있다. 저거 뭐니? 말을 걸 기회를 노리던 입에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튀어나온다. -멋지구리하면, 게임 광고일 걸요? 한솔이는 티브이 쪽을 보지도 않고 중얼댄다. 그래도 그 정도면 근래 보기 드물게 긴 대답이다. 나는 용기를 얻어 질문을 계속해 본다. -게임? 무슨 게임인지 아니? 한솔이는 티브이를 흘끔 보더니 곧 다시 고개를 숙인다. 대답은 짧고 무성의해진다. -인도 신화예요. 지난해 동남아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저 거인들은 비슈누나 브라마 같은 힌두교의 신들이겠구나. 티브이 화면이 휙휙 바뀌더니 중세 유럽풍 갑옷을 입은 힌두 신들의 영상이 번쩍거리면서 브라흐마가 눈을 뜨면 새로운 칼파가 시작된다아, 낮고 웅장한 소리가 울린다. 나를 사로잡은 건 멋지구리한 신들의 모습보다는 칼파라는 단어다. 칼파, 겁파, 겁(劫). 내가 아는 하나의 겁은, 세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주기, 천지가 한 번 개벽한 뒤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이다. 그 무한한 시간이 게임이 서툰 아이에게는 한순간에 끝나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하나의 겁이 새로 시작해서 금방 끝나고, 또다시 새로운 겁이 시작하겠지. -저거, 네가 하는 게임이니? 내 질문은 어딘가 건성이 되어 버린다. -아니요. -요즘 컴퓨터 게임은 여럿이 함께 한다며? 너도 그러니? 한솔이는 수저를 탁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티브이에서는 신들과 악마들이 단 몇 초 화려한 전쟁을 벌이다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다. 하나의 칼파가 끝나 세상이 캄캄해지고 티브이 화면 가득 게임의 이름이 반짝거린다. 광고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하지만, 텅 빈 거실에서 티브이나 보고 있을 생각은 없다. 남편은 집을 나간 후 생활비를 보내지 않고,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비즈 팔찌를 만들려고 작업실로 가는데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의식적인 곁눈질이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한다. 고개를 돌리자 어항이 보이고, 역시나, 금붕어 한 마리가 불길한 수류를 따라 떠돌고 있다. 지난 보름 사이 네 번째. 금붕어가 죽었다. 이 년 전, 남편이 한솔이를 위해 사 왔던 금붕어가. 이 년 전 지나가 버린 그 시절 책임감 있던 가장이 착했던 아들을 위해 사 왔던 그 금붕어가. -*- 시조카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건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가을이었다. 툭하면 사람을 패고 다니는 시동생이 또 사고를 치고, 동서가 죽는다고 소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부부가

  • 관리자
  • 2023-10-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