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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짓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332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중단편)]



쓸데없는 짓




이병승






어느 봄날이었다.
나와 김지현, 진구 이렇게 셋은 학교 앞 놀이터에 모여 햇볕을 쬐고 있었다. 우린 셋 다 학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늘 시간이 많이 남았다.
우리 아빠는 가난한 시인인데 지금까지 학원을 보내 준 적이 한 번도 없다. 공부는 혼자서, 재미를 느끼며 해야 한다는 것이 아빠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이유지만 실은 가난해서 학원비를 줄 돈이 없기 때문이다. 아빠가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쓴 시가 잡지에 실리면 쥐꼬리만 한 원고료를 받는다. 돈을 주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아예 원고료를 안 주는 곳도 있다. 가끔 김치나 쌀을 원고료로 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 아빠는 이제 김치 걱정은 덜었다며 히죽히죽 웃는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학원에 다니지 않는다.
김지현이 학원에 다니지 않는 이유는 엄마가 작은 도서관 관장님이기 때문이다. 김지현 엄마는 책만 많이 읽으면 시험을 못 봐도 야단치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으면 공부는 언젠가 저절로 잘하게 된다고 믿는다. 김지현은 가끔 숙제하기가 귀찮으면 책을 본다. 그러면 숙제를 안 해도 뭐라 안 한다. 책을 진짜로 읽었는지 확인도 안 하니까 책 보는 시늉만 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김지현은 진짜로 책을 좋아해서 열심히 읽는 편이다. 김지현 엄마는 아이들은 좀 놀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을 공부로 괴롭히면 안 된다는 말도 한다. 그런 말을 하는 김지현 엄마가 좀 멋져 보인다. 아무튼 김지현도 그런 이유로 학원을 안 다닌다.
진구는 사실 ‘최강 수학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모님이 꼬박꼬박 학원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구는 학원에 가는 날보다 빼먹는 날이 훨씬 더 많다. 부모님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진구는 그보다 더한 난리로 버틴다. 공부는 체질이 아니라고 우긴다. 진구는 나중에 유명한 래퍼가 될 거라고 한다. 평소에도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랩 가사를 쓴다. 가사의 내용은 대충 비슷하다. 맞춤법도 틀리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가사만 쓴다. 대부분은 아무리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가사가 훨씬 더 많다.
오후 3시쯤이 되면 우리는 학교 근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유치하게 놀이기구를 타거나 하진 않았다. 우린 등나무 벤치 그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구름이 흘러가고 바닥엔 개미들이 기어 다녔다.
“셋이라는 건 참 좋지 않아?”
나는 풀어진 운동화 끈을 다시 묶으며 말했다.
“왜?”
“3인조를 만들 수 있잖아.”
“삼총사겠지.”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김지현이 안경알 속의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긴, 3인조는 좀 그랬다. 어쩐지 3인조라는 말 뒤에는 강도나 조폭 같은 말이 붙어야 어울릴 것 같았다. 우리는 같은 유치원을 다녔고 초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몇 번이나 같은 반에서 만났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린 친했다. 나는 우리 셋의 이름을 만들자고 했다. 삼총사는 너무 구렸고 3인조는 틀렸다. 그렇다고 아이돌 그룹처럼 이름을 짓기도 싫었다. 우린 아이돌보다는 힙합이었다. 힙합은 크루가 있지만 대부분 노래 하나에 모였다 흩어졌다 한다. 이런저런 이름이 나왔지만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이 없었다.
“오징어파 어때?”
내가 말했다.
“우리가 일진이냐? 그리고 뭔가 구려. 아싸 찐따 같아.”
진구가 코웃음을 쳤다.
“난 괜찮은데?”
김지현이 눈을 착 내리깔고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뭐가 괜찮아?”
진구가 물었다.
“오징어는 먹물을 품고 있어. 위급한 상황이 오면 먹물을 쫙 뿜어서 적들을 물리쳐. 그리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을 먹물이라고도 해. 너희들 오징어 배 봤어? 커다란 배 옆구리에 엄청나게 밝은 전구를 백 개도 넘게 달아 놓고 밤에 바다로 나가. 그러면 오징어들이 빛을 향해 막 달려오는 거야. 오징어는 어두운 바다에서 살지만 빛을 좋아해. 빛은 진리를 상징하지. 그러니까 아는 것도 많고, 빛과 진리를 좋아하는 ‘오징어파’라는 이름, 나쁘진 않아. 그리고 다른 애들이 볼 때도 왠지 좀 무서워 보이잖아?”
역시, 김지현은 책을 많이 읽은 아이답게 말을 잘한다.
김지현은 어렸을 때부터 집보다 작은 도서관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거기서 살다시피 했다. 지금도 그림책이나 만화책까지 합치면 1년에 천 권도 넘게 읽는다.
나는 속으로 좀 창피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아빠는 시인이다. 아빠는 꼭 앞에 가난한 시인이라고 ‘가난한’을 붙인다. 엄마랑 이혼한 것도 가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좀 생각이 다르다. 아빠는 시인이기 때문에 이혼당한 거다. 시인은 좀 피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하고 생각이 아주 다르다. 하는 행동도 다르다. 아무리 가난해도 보통 아빠들은 애들을 학원에 보낸다. 못 보내면 미안해하거나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아빠는 다르다. 너무 당당하다. 학원보다는 집회 같은 데 데려가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도 아빠를 따라서 여러 번 가 봤다. 또 얼마나 예민한지 갑자기 혼자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고, 혼자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웃기도 한다. 어쨌든 저렇게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은 시인의 아들이 해야 폼이 나는데 나는 그런 점에서 김지현에게 늘 밀린다.
“오징어파면 어떻고 꼴뚜기파면 어떠냐?”
진구가 찬물을 끼얹었다.
하긴, 우리가 무슨 파를 만들든 아무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애들한테 돈을 뺏을 것도 아니고 우리를 괴롭히려는 동네 형들과 맞짱 뜰 일도 없을 테니까.
“그냥 심심해서 생각해 보는 거야.”
“맞아, 우리 엄마가 우리 나이 땐 쓸데없는 짓도 많이 해 보는 게 좋다고 했어.”
김지현이 말했다.
“그럼 그래 볼까?”
“뭘?”
“지금부터 쓸데없는 짓을 해 보는 거야.”
봄볕이 따뜻했고, 놀이터는 한산했고, 꽃잎들이 바람에 떨어졌다. 우리 셋은 딱히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진짜 쓸데없는 짓을 해 보기로 했다.


나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벚꽃 잎을 뚫어지게 봤다. 원래 애들은 꽃 같은 건 좋아하지 않는다. 장난감이나 전자 제품 같은 거라면 하루 종일도 볼 수 있다. 그 멋짐, 간지작살의 느낌이 주는 전율은 짜릿하다. 놀라운 성능에 감탄하며 찬양하고 경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꽃이나 풀, 식물, 나무 같은 건 지루하고 아무 느낌도 없다. 그러니까 떨어지는 벚꽃 잎을 보는 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 틀림없었다.
떨어져 날리는 꽃잎을 따라가며 한참 보고 있으니 눈이 아팠다. 그래도 보고 또 봤다. 그런데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벚나무는 일본을 상징하는 나무 아닌가? 그런데 우리나라엔 왜 이렇게 벚나무가 많지?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렇게 벚꽃을 좋아하지? 어른들은 왜 자존심도 없이 일본 꽃을 구경하러 다니지? 그러다 보니 독도가 생각났다. 일본의 강제징용과 위안부, 역사 왜곡, 독립운동가의 이름도 떠올랐다. 아, 안 돼. 이건 쓸데없는 짓이 아니라, ‘생각’이라는 걸 하는 거잖아. 그래서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을 하더라도 쓸데없는 생각을 해야 돼. 다시 벚꽃을 봤다. 떨어지는 벚꽃은 몸을 뒤집으며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떨어지면서도 춤을 추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춤을 춰야 한단 말이지? 가볍게! 아아, 나는 또 머리를 흔들었다.
“왜 그래?”
진구가 물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했는데 시를 쓰고 있었어. 내가 한 생각은 시였어.”
“시?”
“응.”
“괜찮아. 시는 쓸데없는 거니까.”
진구가 말했다.
그럼 아빠가 시를 쓰는 것도 쓸데없는 짓인가? 진구가 지금 아빠 욕을 한 건가? 하지만 아빠도 시는 쓸데없는 건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 말이었으니까 진심인지 아닌지 좀 헷갈린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기분이 나쁘다고 진구한테 화를 낼 순 없었다. 나중에 아빠한테 진지하게 물어봐야겠다.
진구는 누군가 벤치에 버리고 간 음료수 깡통의 깨알 같은 작은 글씨를 읽고 있었다. 교과서도 아니고 동화책도 아니고 캔에 적힌 작은 글씨를 읽는 건 진짜 쓸데없는 짓이 맞는 것 같았다.
“야, 넌 진짜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내 말에 진구가 히죽 웃었다.
“쓸데, 있는, 짓이야.”
김지현이 끼어들었다.
“어째서?”
“이 음료수에 뭐가 들었는지 그 정보를 깨알같이 작게 적어 놓았지만 그건 우릴 속이려는 거야. 칼로리 제로라고 되어 있는 것도 진짜 0칼로리가 아냐. 4칼로리 이하면 0칼로리라고 적을 수 있기 때문이거든. 그러니까 속지 않으려면 이런 걸 잘 봐야 해. 그러니까 진구가 한 짓은 쓸데없는 짓이 아니지.”
김지현은 역시 야무지고 똑똑하다.
“그런 너는 뭘 하는 건데?”
“그냥 멍때리고 있어. 이거야말로 쓸데없는 짓이지.”
김지현은 풀린 눈으로 입을 헤벌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것도 쓸데없는 짓은 아닐걸? 멍때리는 건 뇌를 쉬게 해 주는 거야. 그렇게 해야 더 창의적인 생각이 나온다고 했어.”
내 말에 김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다. 이 세상에 진짜 쓸데없는 일은 없는 것 같아. 뭘 해도 의미가 있어.”
김지현의 말에 나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내 생각엔 있을 것 같은데? 진짜 쓸데없는 짓.”


나는 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우리는 학원 복도에서 교실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생각한 쓸데없는 짓은 수업하는 아이들 구경하기였다. 내가 공부하는 게 아니니까 성적에 전혀 도움도 안 되고, 그렇다고 수업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쟤네들을 보고 있으니까 우리가 좀 한심하게 느껴지는데? 어쩐지 나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이것도 쓸데없는 짓은 아닌 것 같다.”
진구가 돌아섰다.
“야, 쟤네들이 우리 쳐다본다. 가자.”
김지현도 돌아섰다.


학원에서 나온 우리는 걸어가다가 오른쪽에 골목이 나오면 무조건 그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면 굉장히 멀리, 아주 멀리,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곳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건 금방 알게 되었다. 우리는 네모를 그리며 골목을 뺑뺑이 돌고 있었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두 번, 왼쪽으로 한 번으로 바꿨다. 그러자 제법 멀리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쓸데없는 짓은 아냐. 다리 운동이 되잖아. 그리고 별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재밌어.”
진구가 말했다.
“아냐, 그건 우리 생각이고 어른들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걸? 시간 낭비!”
내가 말했다.
“맞아, 남들 공부하느라 정신없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펄펄 뛸 거야.”
김지현이 폴짝폴짝 뛰어가며 말했다.


다시 놀이터로 돌아온 우리는 미끄럼틀 위에 올라가 앉았다.
나는 미끄럼틀을 타고 미끄러졌다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몇 번 그러고 나니 내려가는 건 쉽지만 올라가는 건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그 말을 했더니 김지현이 핀잔을 주었다.
“그건 뭔가 시적이고 의미 있는 생각이야. 하지 마.”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김지현이 불쑥 말했다.
“지구 온도가 1도 올라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 일어나.”
“야, 그것도 의미 있는 생각이야. 하지 마!”
내가 소리쳤다.
“이것 좀 볼래?”
진구가 수첩에 적은 랩 가사를 보여 주었다. 우리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그것을 봤다.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진구가 가사를 쓰는 건 진짜 쓸데없는 짓 맞는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물었다.
“야, 알아내려고 하지 마. 생각도 하지 마!”
진구와 김지현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다 우리는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붉었다.
우리는 그냥 노을을 바라보았다.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이상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는데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기분이 좋아지는 짓을 했으니 쓸데없는 짓이 아닌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우린 오늘 오징어파라는 이름도 만들었고 쓸데없는 짓도 많이 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이병승
작가소개 / 이병승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계간 《어린이와 문학》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정채봉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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