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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숲의 보물창고

  • 작성일 2022-10-21
  • 조회수 1,29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장편)]



토리숲의 보물창고




박그루






1. 숲속의 꼬마, 카쥬


토리숲의 아침이 밝았어. 얼기설기 얽힌 나뭇가지 사이로 내린 햇살에 카쥬가 눈을 떴지. 카쥬는 온몸에 갈색 털이 난 킨카주야. 얼굴은 너구리같이 동그랗고 눈동자는 흑진주처럼 까맣지. 카쥬가 몸을 길게 뻗치며 기지개를 켰어.
“으하암! 캣은 일어났을까?”
카쥬는 바나나 나무를 쪼르르 타고 올랐지. 몸통만큼이나 긴 꼬리를 가볍게 휘두르면서 말이야. 졸졸 흐르는 개울을 폴짝 건넌 카쥬는 곧장 바위 언덕으로 향했어. 바위 언덕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로 가득해. 돌 바위 언덕 중간쯤에 호리병 모양의 동굴이 있고, 그곳에 미어캣 가족들이 모여 살고 있어. 동굴 앞 큰 바위 위에 미어캣 히만이 망을 보고 있었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서 사방을 살피던 히만이 외쳤어.
“카쥬?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냐?”
“안녕하세요, 히만 아저씨. 캣은 일어났어요?”
“글쎄. 한번 들어가 보렴.”
카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속으로 폴짝 뛰어 들어갔어. 히만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어.
“쯧쯧, 매일 몰려다니기나 하고…….”
캣은 새끼 미어캣들 사이에서 쿨쿨 자고 있어. 기분 좋은 꿈을 꾸는지 입까지 헤벌린 채 말이야.
“캣! 캣!”
“으응. 누구야?”
캣이 인상을 찌푸린 채 눈을 떴어.
“이힛!”
카쥬가 캣의 코앞까지 얼굴을 쑥 들이밀었고 캣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어.
“으악!”
“헤헷. 늦잠꾸러기에게 딱 맞는 선물이지?”
“너, 깜짝 놀랐잖아!”
캣이 앞발을 휘두르며 벌떡 일어났어. 고요하던 동굴이 시끌벅적해졌고 새끼 미어캣들도 깨어 버렸어.
카쥬는 작은 귀를 쫑긋거리며 밖으로 후다닥 달아났지. 캣도 그 뒤를 바짝 쫓았어.
“아침부터 무슨 난리들이냐?”
히만이 나무랐지만 카쥬와 캣에게는 들리지 않았어. 둘은 쫓고 쫓기며 신나게 바위 언덕을 누볐지. 짱짱 숲의 아침이 활기차게 열렸어.


카쥬에게는 엄마 아빠가 없어. 카쥬가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떠났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가끔 외롭기는 했지만 카쥬는 괜찮다고 생각했어.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니까. 그냥 지금 없을 뿐인 거지.’
하지만 주위 몇몇 동물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나 봐.
“어쩜, 새끼를 버리고 그렇게 가 버렸데?”
“그러니까 말이야. 킨카주들은 원래 자식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토끼들도, 새들도 수군수군했어.
“카쥬는 너무 천방지축이야. 혼자 커서 그런가?”
어른 킨카주들은 걱정하듯 말했어.
모두들 서로의 생각만 얘기하느라 정작 카쥬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지. 카쥬는 커 갈수록 쑥덕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졌어. 또래 친구들이 바라보는 눈빛들도 조금씩 신경이 쓰였어.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고, 그때마다 흔들리는 자신이 싫었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아. 신경 쓰지 말자.’
스스로에게 말해 보았지만, 마음에 구멍이 난 듯이 텅 빈 기분은 쉬 나아지지는 않았어.
그럴 때면 카쥬는 숲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보듬에 올랐어. 맨 윗가지에 앉아 하늘을 올려보았지. 어떤 날은 구름 한 점 없는 높고 맑은 하늘이, 어떤 날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펼쳐졌어.
보듬은 카쥬가 한껏 고개를 젖혀 올려봐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카쥬가 앞에 서면 고목나무의 매미같이 느껴질 정도로 큰 나무지. 보듬은 낮에 흡수한 햇빛을 밤이 되면 은은하게 뿜어냈고, 그 빛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동물들에게 길을 밝혀 주었어. 그래서 토리숲에는 밤에 길을 잃고 헤매는 동물들이 없었지.
카쥬가 보듬의 가지에 한참을 엎드려 있을 때면 언제나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어.
“어서 내려와, 카쥬.”
캣이 부르는 소리야.
카쥬는 그렇게 힘을 냈어. 든든한 보듬이 있었고, 언제나 나무 아래에서 자신을 불러 주는 친구가 있으니까.


2. 카쥬와 캣의 보물창고


카쥬와 캣의 술래잡기는 깊은 숲속에서야 끝이 났어. 앞서던 카쥬가 수북한 덤불에서 무언가를 꺼내 캣의 앞발에 쥐여 주었지.
“짜잔! 어때?”
동글동글 윤이 나는 도토리 알갱이들이야. 캣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어.
“우와! 맛있겠다! 어디서 난 거야?”
“어젯밤에 도토리 창고를 발견했지. 별빛이 아주 밝았거든.”
캣은 도토리 한 톨을 움켜쥐고 까먹기 시작했어.
“도독! 오도도독!” 도토리 깨지는 소리가 신나게 났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카쥬가 덤불을 크게 젖혔어. 수북이 쌓인 도토리를 보고서 캣의 입이 떡 벌어졌어.
“세상에! 이 많은 걸 어떻게 가져왔어?”
“잠든 다람쥐들이 깰까 봐 꼬리로 살살 굴려 냈지. 헤헷!”
카쥬가 자신의 꼬리를 능숙하게 흔들어 보였어. 기다란 꼬리가 살랑살랑 부드럽게 흔들렸어.
“역시 넌 머리가 좋아! 꼬리를 쓰다니.”
“그럼! 내가 누구게!”
“누구긴? 토리숲의 말썽쟁이 카쥬지!”
“으하하하!”
카쥬와 캣은 볼이 미어터지도록 도토리를 먹었어. 순식간에 도토리가 사라졌지. 캣이 통통하게 오른 배를 두드리며 살짝 미안한 얼굴로 말했어.
“다람쥐들이 다시 도토리를 모으려면 힘들 텐데, 마음에 걸려. 이제는 몰래 가져오지 말자.”
“응.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젠 내가 직접 주울래.”
카쥬의 말에 캣도 밝은 얼굴로 말했어.
“그럼 나도 같이 주워야지. 참, 너한테 보여 줄 거 있는데. 따라와 봐.”
캣이 가벼운 걸음으로 앞장서자 카쥬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뒤를 따랐어.
“뭔데? 뭐야?”
캣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잎사귀들을 헤치며 숲속 깊숙이 들어갔어. 카쥬와 캣이 보듬 나무가 있는 풀밭에 도착했어.
“응,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거야?”
어리둥절해진 카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어. 항상 보던 보듬과 익숙한 잎사귀들만 보일 뿐이었지. 캣이 생긋 웃으며 보듬 나무 근처에 우거진 수풀로 갔어.
“짜잔! 어때?”
캣이 키 큰 수풀을 슬쩍 들춰내자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아늑한 굴이 나타났어.
“우와, 정말 멋지다!”
카쥬의 눈은 왕방울만큼 커지고 볼은 씰룩씰룩했어.
“헤헤! 그렇지?”
캣은 어깨를 으쓱했어. 카쥬는 굴속으로 쏙 들어가 보았어. 촉촉한 흙냄새가 향긋했지. 너무나 좋은 공간이었어.
“캣! 캣! 여길 나 주려고?”
카쥬의 목소리가 굴 안에서 메아리가 되어 크게 울렸어.
“어머머. 이 굴을 파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널 왜 줘?”
캣이 밉지 않게 입을 샐쭉거리며 말했어.
카쥬는 코끝에 흙을 묻힌 채, 굴 밖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어.
“헤헤, 지금까지 이렇게 어둡고 단단하게 잘 다져진 굴은 처음 봐.”
“그렇지?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 우리 함께 쓰자.”
“응, 신난다! 여긴 이제 우리만의 보물창고야!”
카쥬와 캣은 한참을 즐겁게 놀았어.
어느새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올라, 보물창고 입구에도 쨍한 햇살이 내렸어. 캣이 밖으로 나와서 편편한 바위에 올라 해를 바라보고 섰어. 두 눈을 감고 배와 가슴을 한껏 내밀었지.
“아, 좋아라.”
햇살이 캣을 따뜻하게 감싸 와 온몸의 황색 털이 금빛으로 빛났지.
“너도 이리 와 봐. 햇빛을 받으면 기분 좋은 힘이 생기는 거 같다니까.”
카쥬가 동굴에서 고개를 쑥 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어.
“난 야행성인 거 몰라? 햇빛은 반갑지 않다고.”
“참, 맞다.”
캣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어.
“그런데 오늘 아침엔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그야 너한테 도토리를 빨리 주려고 그랬지.”
캣이 함박웃음을 띄며 카쥬를 바라봤어. 카쥬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눈을 딴 데로 돌렸어.
“히힛. 고마워. 이런 거 보면 너랑 나랑 참 달라, 그렇지?”
“난 밤이 편하고, 넌 낮이 편하고. 난 까칠하고, 넌 상냥하고. 뭐 그런 거?”
카쥬의 말에 캣이 바위에서 깡충 뛰어내렸어. 그러고는 카쥬가 있는 동굴로 쏙 들어갔지.
“응! 그리고 난 들판이, 넌 숲속이 좋지! 그래도 난 너랑 노는 게 가장 재밌는걸!”
“나도, 나도 그래!”
“좋아, 좋아!”
둘은 서로 마주 보며 까르르 웃었어.


3. 숲속 대회


“꼬맹이들!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머리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어.
카쥬와 캣이 깜짝 놀라 위를 올려봤어. 커다란 몸집의 침팬지 찬이었어. 찬은 토리숲의 대장으로 숲속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어.
“이렇게 태평하게 있다니. 설마 대회를 잊고 있는 건 아니지?”
“아, 맞다. 숲속 대회!”
카쥬와 캣은 입을 모아 동시에 대답했어. 서로 눈이 마주치며 또 웃음을 터트렸어.
숲속 대회는 해마다 열리는 큰 행사야. 대회 기간 동안에는 모든 동물들이 다툼 없이 사이좋게 지내. 오래도록 지켜 온 약속이었지.
“나 참, 뭐가 그리 좋은 거야? 대회는 이미 시작됐어. 어서 가자!”
찬이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며 순식간에 사라졌어.
“가 볼까? 재미있을 거 같은데.”
캣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지만 카쥬는 머뭇거렸어.
‘동물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는 건 좀 불편할 것 같은데.’
카쥬는 고민이 되었지만 캣의 들뜬 얼굴을 보고 곧 마음을 정했지.
“한번 가 볼까?”
“응.”
카쥬와 캣은 찬이 앞서갔던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어.
“카쥬, 너도 달리기 선수로 나가면 좋았을 텐데. 엄청 재빠르잖아.”
“난 경기에 관심 없어. 달리기는 평소에 하는 걸로도 충분한걸.”
카쥬는 동물들 앞에 서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졸아들고 몸이 떨리는 것 같았어.


잔디광장에는 이미 다양한 경기가 열리고 있었어. 토끼들이 광장 한편에서 제자리높이뛰기를 겨루고, 그 옆에서는 토코투칸 새들이 자신의 커다란 부리에 물을 가득 담아 바삐 날랐어. 움푹 파인 그루터기에 누가 먼저 물을 채우나 겨루는 중이었지.
중앙에서는 코끼리들이 기다란 코로 힘 대결을 펼쳤어. 우렁차게 ‘뿌우―’ 소리를 내며 서로의 기를 죽이고 있었지. 평소에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치타들도 달리기 시합에 한창이었어. 어찌나 빠른지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 잔디광장은 경기에 참가한 동물들과 구경 나온 동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
카쥬와 캣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어.
“동물들이 이렇게 모인 건 처음 봐.”
“정말! 활기차다. 많이들 모였어!”
어느새 찬이 곁으로 다가와 으쓱거리며 말했어.
“이번 대회에 일등 상품이 좋거든! 모두들 탐내고 있어.”
“상품이 뭐길래요?”
캣이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어.
“보듬 나무의 수액이야. 너희도 알지? 그걸 마시면 힘도 세지고 백 년도 거뜬히 산다는 전설이 있잖아. 그걸 상으로 줄 거야. 내가 고심 끝에 정한 상품이야.”
“네? 지금까지 그걸 일부러 뽑은 적은 없잖아요. 보듬에 구멍을 내야 할 텐데…….”
카쥬가 너무 놀라 말했어. 생각만 해도 제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어.
“그러니까 귀한 상으로 내건 거지. 뭐, 조금 뽑는 건 괜찮을 거야. 보듬은 우리 숲의 터줏대감 같은 존재니까. 그 정도로는 아프진 않을 거다. 거뜬할 거야.”
찬이 경기장들을 둘러보며 흐뭇하게 말을 이었어.
“그래서 다들 이렇게 많이 온 거 아니겠냐? 우하하하!”
‘일부러 수액을……. 우리들에게도 좋은 거라면, 보듬에게도 필요한 것 아닐까.’
카쥬는 보듬이 약해지고 힘들어질 것 같은 걱정이 들었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카쥬는 저도 모르게 외쳤어.
“그러면, 내가 일등 할래!”
캣이 깜짝 놀라 카쥬를 쳐다봤어.
“뭐? 대회 나가겠다고? 아까는 안 나간다며?”
카쥬는 캣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어.
“그렇긴 한데 마음이 바뀌었어. 찬! 내가 참가할 수 있는 경기가 있을까요?”
“오호, 너도 욕심이 나나 보구나! 좋아, 좋아! 넌 체급이 작은 동물들 사이에서 열리는 경기에 참가하면 돼. 아! 저 경기장으로 가 봐. 곧 시작하겠어.”
침팬지 찬이 가리킨 곳에 여우, 몽구스, 너구리가 출발선에서 각자 자리를 배정받고 있어.
“달리기구나. 그럼 저기서 일등 하면 되는 거죠?”
카쥬가 가볍게 통통 뛰며 몸을 풀었어.
“일단 오늘 경기에서 일등을 해야 해. 그러면 일주일 후에 열리는 최종 경기에 참가할 수 있지.”
“최종 경기? 그런 게 또 있어요?”
“그래. 최종 경기에서 가장 뛰어난 한 선수를 뽑지. 바로 그 선수에게 수액이 주어진단다. 단 한 명에게만 말이야. 우리 심사위원들이 아주 공평하게 심사해서 뽑을 거라고.”
“종목이 다른데 그중에서 또 일등을 가린다고요? 휴! 쉽지 않겠는걸.”
캣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카쥬를 바라봤어. 하지만 카쥬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지.
“그럼 한번 해 볼까.”
카쥬가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선수들이 모인 출발선으로 성큼성큼 다가갔어.
“의외구나. 마음을 단단히 먹은 거 같은데?”
찬이 껄껄 웃자 캣은 카쥬의 뒤를 따르며 말했어.
“저도 이해가 안 되지만, 카쥬가 하겠다면 응원해 줘야겠어요.”


4. 카쥬, 달리다


긴장이 몰려오자 카쥬의 온몸에 힘이 들어갔어. 카쥬는 경기장을 에워싼 동물들을 보자 가슴이 갑갑해졌어.
‘ 내가 뛰는 걸 본다면 비웃거나 웃을지 몰라.’
카쥬는 눈을 질끈 감았어. 심장이 콩닥거리고 두려웠어. 그래도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지.
출발선으로 다가온 카쥬를 보고 원숭이 심판관이 피식 웃었지.
“말썽쟁이가 여긴 웬일이니?”
“나도 뛰려고요.”
출발선에 있던 동물들과 원숭이 심판관이 모두 껄껄 웃었어.
“그래. 오늘은 모두가 함께하는 축제지. 자, 어서 여기로 와 서거라.”
카쥬가 몽구스 몽몽과 여우 샤샤 사이에 서자, 둘은 가소롭다는 듯이 카쥬를 쳐다봤지. 구경하던 동물들도 의아한 눈빛으로 카쥬를 보고 있어. 카쥬는 입이 바싹 말라 왔지.
‘으아, 이렇게 다들 보고 있다니! 아냐, 아냐,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거야.’
카쥬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눈을 질끈 감아 버렸어. 보듬의 잎사귀와 나뭇가지로 흐르는 바람만 떠올리며, 카쥬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어. 원숭이가 세차게 휘파람을 불어 출발을 알렸어.
“자, 선수~ 준비, 휘릭!”
어찌나 힘줘 불었던지 원숭이의 빨간 궁둥이가 하늘로 치켜 올랐어. 선수들 모두 힘차게 발을 굴렀어.
“달려, 달려!”
구경하는 동물들이 환호성을 질렀지.
몽몽이 맨 앞으로 달려 나갔어. 그 뒤를 샤샤와 카쥬가 좇았지. 나머지 선수들은 점점 뒤로 처졌어. 선수들은 풀밭을 크게 돌아 다시 출발선으로 들어와야 했어. 달리는 길목에는 통나무와 덤불 같은 장애물도 있었지. 카쥬는 아슬아슬하게 장애물을 피하고, 뛰어넘었어. 샤샤를 젖히고 어느새 몽몽과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어. 카쥬는 더욱 안간힘을 내어 달렸어.
한편 몽몽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지.
‘훗, 당연히 내가 일등이지.’
결승선에 거의 다 왔을 때, 몽몽이 뒤를 슬쩍 돌아봤어. 뒤에 바짝 따라붙은 카쥬를 보고 너무 놀라 발이 엉켜 버렸지. 몽몽이 엉거주춤하는 사이에 카쥬가 박차고 나아갔어. 간발의 차이로 카쥬가 결승선에 먼저 통과해 버렸어.
“오오! 킨카주 꼬마가 일등이야.”
“누구야? 세상에! 카쥬잖아!”
경기를 지켜보던 동물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어.
“우와, 정말 조마조마했어. 잘했어, 카쥬!”
캣이 카쥬를 얼싸안았어. 카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헤헤 웃었어. 뒤따라 들어온 몽몽이 카쥬의 어깨를 툭툭 쳤어.
“에이, 아깝다. 너 제법인데? 축하해.”
관람하던 동물들도 한마디씩 보탰어.
“오호, 갑자기 출전하더니 일등 하다니, 대단한데.”
“그러게, 카쥬! 너 엄청 날쌔더라.”
갑자기 쏟아진 동물들의 축하에 카쥬는 어쩔 줄 몰라 눈만 깜박거렸어. 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자신을 향해 웃어 준 건 처음이었거든.
“으응, 고마워.”
카쥬는 겨우 조그맣게 인사를 했지.
이때 왕뱀이 스르륵 다가왔어. 진줏빛 비늘이 덮인 온몸이 움직일 때마다 보랏빛으로 일렁거렸어. 카쥬는 왕뱀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감탄했어. 왕뱀의 곁에는 점박이 너구리 둠과 흰 토끼 초비가 따랐지. 왕뱀이 얇고 긴 혀를 날름거리며 말했어.
“우린 지금껏 카쥬의 진가를 몰라본 거야. 앞으로 다들 잘해 주자고.”
“그래, 카쥬. 캣하고만 놀지 말고 우리와도 놀아.”
한쪽 눈에 큰 점이 있는 둠이 히죽 웃었고 곁에 있던 초비도 총총 뛰며 끄덕였어.
“우리 일등, 이제 밥을 먹어야지.”
왕뱀은 카쥬를 넓은 통나무 식탁으로 데려갔어. 알록달록한 꽃으로 꾸며진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곤충과 파파야, 망고, 바나나 등의 과일들이 잔뜩 쌓여 있어. 게다가 카쥬가 좋아하는 꿀도 나무 항아리에 가득 담겨 있었지.
“많이 먹어. 카쥬.”
왕뱀은 식탁 위 중앙에 똬리를 틀며 위엄스레 말했어.
“응, 고마워.”
카쥬가 멀찍이 있던 캣을 향해 외쳤어.
“캣, 너도 어서 와.”
“난 괜찮아, 아까 도토리를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어서 먹어.”
캣이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의 배를 통통 두드렸어.
“응. 알았어.”
달리고 난 터라 카쥬는 목마름과 배고픔이 몰려왔어. 긴 혀로 꿀도 핥고, 과일도 마구 먹기 시작했어. 토끼 초비는 춤을 추고, 너구리 둠은 느릿느릿 풀피리를 불었어.
경기에 참가했던 동물들도, 구경하던 동물들도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 대회를 구경하고 돌아가던 히만이 캣을 보았어.
“캣, 여기서 뭐 하니?”
“아, 삼촌! 혹시 봤어? 좀 전에 카쥬가 달리기 경기에서 일등 했어!”
캣이 히만에게 다가가며 신나게 말했어.
“그래? 만날 그렇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니 발이라도 빨라야지.”
“삼촌은 왜 그렇게 카쥬를 미워하는 거야? 정말 이상해.”
“난 네가 더 이해가 안 돼. 카쥬 같은 외톨이와 왜 함께 노는 거야? 좋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히만의 말에 캣이 발끈했어.
“어떻게 그런 말을! 카쥬가 얼마나 좋은 친군데.”
“삼촌은 어른이야. 내 말 잘 들어.”
히만은 왕뱀과 웃고 떠드는 카쥬를 흘깃 바라봤어. 그리고 캣에게 귓속말을 했어.
“저 왕뱀과 시시덕거리는 거 보라고. 조금만 추켜세워 줘도 정신을 못 차리잖아. 네가 아직 몰라서 그래.”
“카쥬는 그런 애가 아니야! 삼촌 너무해!”
캣은 콧김을 뿜으며 바위 언덕으로 쌩하니 돌아갔어.
히만은 한심한 눈빛으로 카쥬를 바라보고는 자리를 떠났어.


5. 토끼 부인의 초대


경기 다음 날이었어. 몽몽이 보물창고에 들렀어.
“안녕! 카쥬!”
자다 깬 카쥬는 얼떨떨하게 인사를 나눴어.
“어, 안녕. 웬일이야?”
“어제 좋은 경기였어. 우리 조만간 다시 한번 겨뤄 보자.”
“으응, 그래, 좋아.”
“그땐 내가 꼭 이길 테니 열심히 연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몽몽이 화통하게 웃으며 숲으로 갔어.
카쥬는 몽몽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갸웃했어. 뭔가 새로운 기분이었지. 지금까지 캣 말고 뭔가를 같이 하자는 동물은 처음이었거든. 어제 뒤로 갑작스레 많은 것이 변한 느낌이었어. 카쥬를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동물들은 또 있었지. 카쥬는 이런 변화가 낯설면서도 싫지는 않았어.
“카쥬, 낮에 차 한잔하러 오겠니? 친한 친구들이 온단다.”
은빛 털의 토끼 부인이야.
카쥬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어.
개울에서 간단히 세수를 마친 카쥬가 토끼 부인의 집으로 향했어. 부인 집에는 왕뱀과 너구리 둠, 토끼 초비가 와 있었어. 모두가 카쥬를 반갑게 맞이했어.
“어서 와. 카쥬!”
“오! 토리숲에서 가장 발 빠른 카쥬가 오셨구만!”
“이리 와, 어서 여기 앉아.”
카쥬가 수줍게 웃으며 통나무 의자에 걸터앉았어. 다들 치켜세우는 통에 카쥬는 몸 둘 바를 몰랐어.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카쥬는 너무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
‘이렇게 많은 친구들과 친해지다니. 믿어지지 않아. 너무…… 좋다.’
단짝과 있을 때의 즐거움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었어. 차를 홀짝이며 왕뱀이 말했어.
“우린 아무나 끼워 주지 않아. 그러니 영광인 줄 알라고.”
“응, 정말 고마워.”
카쥬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어. 진심으로 왕뱀이 고마웠거든.
“카쥬, 토끼 부인 집에 꽃잎이 필요한데, 너도 알다시피 토끼 부인은 너무 연약하잖아. 네가 좀 모아 줄 수 있겠나?”
“아, 그런 거라면 염려 마.”
카쥬가 왕뱀의 말에 자신 있게 가슴을 탁 쳤어. 그리고 곁에 있는 토끼 부인에게 공손하게 말했어.
“이렇게 맛있는 차도 주셨는데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언제 필요한 거예요?”
“오늘 구해 줄래?”
“오늘이요? 오늘은 좀…….”
카쥬는 잠시 망설였어. 어제 밤늦게까지 부엉이, 박쥐 친구들의 축하를 받느라 제대로 쉬지 못했거든. 사실 지금도 잠을 꾹 참고 있었어. 이때 왕뱀이 옆에서 나지막이 말을 건넸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잖아? 토끼 부인은 아무에게나 부탁 같은 거 하지 않는다고.”
토끼 부인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카쥬를 바라보고 있어. 카쥬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어.
“알겠어요. 오늘 할게요.”
토끼 부인이 기쁨의 탄성을 질렀어. 부드러운 표정으로 카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
“오, 역시 넌 착한 아이야.”
왕뱀도 미소를 띠며, 남은 차를 비웠어.
“해가 지기 전에 모으려면 지금 출발하는 게 낫지 않을까?”
둠이 말하자 모두들 카쥬를 바라보며 끄덕였어.
“으응. 다녀올게.”
카쥬는 먹다 남은 찻잔을 내려놓고 숲속으로 갔어.
“이 꽃은 찢겨 있었고, 이건…… 흠, 끝이 시들어 버렸네.”
숲속에 널린 게 꽃이지만, 막상 찾으려니 상태가 좋은 꽃들이 눈에 잘 띄지 않았어. 카쥬는 눈을 크게 뜨고 키 큰 바나나 나무 아래와 키 낮은 등골나무 사이도 꼼꼼히 살폈어. 주황빛, 노란빛, 알록달록하고 커다란 꽃을 모았지. 꽃잎이 다치지 않도록 곱게 다루면서 말이야. 카쥬는 노래도 흥얼거렸어. 그렇게 카쥬가 꽃을 모으고 있을 때였어.
“여기서 뭐 하니? 보물창고에서 한참 기다렸단 말이야.”
캣이 나타났어. 캣의 두 볼이 잔뜩 부어올라 있었지. 그제야 카쥬는 잊었던 약속이 번쩍 떠올랐어.
“아, 맞다! 낮에 만나기로 했지? 정말 미안해, 깜박해 버렸네.”
카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어. 캣이 코를 찡끗하며 카쥬를 흘겨봤어.
“으휴, 하여튼. 한 번만 봐준다. 그런데 그 꽃들은 뭐야?”
“토끼 부인에게 줄 꽃을 모으는 중이야. 같이 할래?”
“치, 나랑 한 약속은 잊고 이걸 하고 있었던 거야? 싫어, 난 햇볕이나 쬘래.”
캣이 뾰로통하게 말하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어. 카쥬는 슬그머니 나무 아래로 가서 따로 놓아둔 꽃 한 송이를 캣에게 건넸어.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더라. 예쁘지?”
백옥같이 하얀 꽃이었어. 암술과 수술은 황금 물감을 풀어낸 듯 진한 노랑 빛으로 물들어 있어. 이제 막 활짝 피기 시작한 꽃은 새벽안개처럼 맑고 환했어.
“우와!”
캣이 밝아진 얼굴로 조심스레 꽃을 만지작거렸어. 코를 가까이 대고 킁킁거리기도 했어.
“정말 예쁘다. 향기도 좋은걸. 곱게 말려야겠어.”
그런 캣을 보고 카쥬도 빙그레 웃었어.
“근데 카쥬, 괜찮아? 눈에 다크서클이 나보다 심하잖아. 제대로 못 잔 거야?”
캣은 카쥬의 얼굴을 살피며 깜짝 놀랐어. 하지만 카쥬는 캣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기운차게 대답했지.
“아냐, 괜찮아. 내가 누구야?”
“그럼 다행이지만. 이 미어캣의 눈가보다 거뭇하다면 어느 정도인지 알겠지? 어서 끝내고 빨리 들어가서 쉬어. 난 먼저 갈게.”
캣이 앞발을 흔들며 총총 사라졌어. 카쥬도 캣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앞발을 크게 흔들어 댔어.
“으아, 진짜 빨리 가야겠다.”
카쥬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서 힘겹게 꽃잎을 안아 들었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갔어. 카쥬가 꽃 더미를 머리에 이고 토끼 부인 집으로 갔어. 다른 친구들은 모두 돌아간 뒤였지. 토끼 부인은 흔들의자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어.
“부인, 여기 꽃잎이에요.”
“오, 고맙다. 하는 김에 꽃잎들을 집 앞에 좀 널어 주겠니? 내가 기운이 없어서 말이야.”
“아, 네.”
카쥬는 몸도 무겁고 어지러웠지만, 꽃잎을 하나하나 펼쳐서 해가 잘 드는 앞뜰에 널어 두었어. 내일 아침이면 모든 꽃잎이 고루고루 마를 수 있도록 말이지.
“다 널었어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수고했다. 카쥬야.”
카쥬는 눈꺼풀이 땅까지 내려올 것처럼 무거웠지만 뿌듯했어. 숲은 이미 캄캄하게 어둠이 내렸지만 걱정은 없었어. 보듬의 따스한 빛을 따라 동굴 앞에 도착했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참 멋진 일이야. 그렇지?”
카쥬가 보듬을 올려보며 히죽 웃었어. 동굴로 들어선 카쥬는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


6. 친구들의 부탁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숲속 동물들이 줄줄이 카쥬를 찾아왔어.
“착한 카쥬야, 토끼 부인에게 예쁜 꽃들을 구해줬다며? 난 숲속 깊은 샘물을 마시고 싶어! 그건 보름달이 떠오를 때 가장 신선한 맛이 나거든. 마침 오늘이 보름인데 구해 줄 수 있을까?”
넉살 좋은 여우 샤샤가 나타나 카쥬에게 말했어.
“좋아. 밤에 다니는 건 내가 전문이잖아.”
그날 밤 카쥬는 숲속 깊은 샘물을 찾아갔어. 얼음처럼 차고 맑은 샘물을 떠서 샤샤에게 주었지. 샤샤는 얼마나 신이 났던지 덩실덩실 춤을 췄어. 여우가 달밤에 춤을 추다니. 그 우스운 광경에 부엉이들도 눈을 크게 뜨고 구경했어.
“난 그거, 그거! 강가에 악어 할머니가 만드는 실타래를 갖고 싶어. 그 곱고 부드러운 실타래 말이야. 악어 할머니가 얼마나 깐깐한지 알지? 카쥬.”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고릴라 굴리의 말에 카쥬는 웃음을 터트렸어.
악어 할머니는 온순하지만 자신이 만든 실타래를 엄청 아껴. 강가에 있는 집에 실타래를 잔뜩 쌓아 두고 있지만, 남에게 쉽게 주지 않았지. 특히 덩치 큰 장난꾸러기 고릴라에겐 그냥 줄 리가 없었어.
“걱정 마. 네가 악어 할머니 집 근처에만 가도 흙이 다 무너져 내릴 거야.”
카쥬는 그렇게 동물 친구들의 부탁을 열심히 들어주었어. 자신을 믿고 부탁하는 친구들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었거든. 숲에서 주워 오거나 캐면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훔쳐야 하는 것도 있었지.
그렇게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렀어. 바람이 따뜻하던 어느 한낮, 카쥬가 오랜만에 늘어지게 자고 있었어.
“카아쥬우!”
반가운 목소리에 카쥬는 눈이 번쩍 떠졌어. 서둘러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어.
“캣!”
카쥬는 며칠 만에 보는 캣이 너무나 반가웠어.
“요즘 바빠? 바위 언덕에는 통 오지도 않고.”
“아냐, 바쁘긴. 너도 바빴나 보네? 여기에 오랜만에 온 거잖아.”
“나 어제도 왔었거든. 네가 없어서 혼자 놀았지 뭐야.”
캣이 살짝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어.
그제야 카쥬는 어제 보물창고 입구에 못 보던 잎사귀들이 흩어져 있던 게 생각났어. 캣이 카쥬를 기다리며 잎사귀 놀이를 했던 거야.
“그랬구나. 미안해. 여기 근처 친구들이랑 할 일이 좀 있었어.”
카쥬가 머리를 긁적였어.
“알고 있어. 벌써 숲에 소문이 쫙 퍼졌던걸. 너한테 말하면 뭐든 해 준다고.”
“하하, 정말? 에이, 그 정도는 아닌데.”
카쥬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쑥스러워했어.
“캣, 나 친구들에게 도움 되는 게 정말 신나. 지금껏 내가 이렇게 다른 동물들에게 필요한 친구인 줄 몰랐어.”
카쥬의 말에 캣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어.
“어머, 당연하지. 카쥬는 언제나 필요한 존재인걸!”
캣의 말에 카쥬의 볼이 발그레해졌어.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울컥하기까지 했지.
“흠흠. 캣, 너도 뭐 필요한 거 없어? 도토리 좀 찾아올까?”
캣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어.
“아니, 괜찮아. 난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그런데 말이야, 이제 훔치는 건 안 하는 게 좋겠어. 악어 할머니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그렇지만 할머닌 실타래를 엄~청,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있다고. 친구들에게 조금 나누어 줘도 괜찮잖아?”
“그래도 그건 할머니가 만든 거고, 할머니 거잖아.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닌걸!”
캣이 단호하게 말하자 카쥬는 아무 말 못 하고 입만 쭈뼛거렸어. 캣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어.
“며칠 뒤면 최종 경기인데 달리기 연습은 좀 했어?”
“아, 맞다!”
카쥬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어. 최종 경기가 코앞에 다가온 걸 까맣게 잊고 있었지. 캣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
“하핫, 난 역시 너 없으면 안 돼.”
카쥬가 머쓱해서 웃었지만, 캣의 표정이 어두웠어.
카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어. 오늘의 캣은 평소와 뭔가 다른 느낌이었거든. 그때였어. 아까 돌아갔던 왕뱀이 스르르 나타났어. 왕뱀이 캣을 힐끔 보고는 씨익 웃었지. 캣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어.
“어이, 카쥬. 잠깐 나 좀 봐.”
왕뱀이 카쥬를 수풀 속에 데려가서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사라졌어. 캣이 카쥬에게 물었어.
“왕뱀이 뭐래?”
“별거 아냐. 수리마왕의 둥지에서 목도리를 좀 찾아 달래.”
캣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세상에! 그렇게 위험한 일을! 안 돼. 절대로 가지 마. 수리마왕 걸 건드리다니?”
“에이, 수리마왕이 먼저 가져갔대. 그리고 친구가 부탁하는 건데. 모른 체할 수 없지.”
카쥬의 말에 캣이 바락 외쳤어.
“친구는 무슨! 친구가 그런 위험한 부탁을 할 리 없잖아. 그리고 수리마왕은 무뚝뚝하긴 해도 지혜로운 독수리야. 왕뱀 말만 듣고 무턱대고…… 난 안 갔으면 좋겠어. 수리마왕은 한번 화나면 엄청 무섭다고.”
카쥬는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탁탁 털어 댔어.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왕뱀은 좋은 친구야.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카쥬, 왕뱀은 원래 달콤한 말을 잘한단 말이야. 속은 애들이 한둘이 아니야. 예전에는…….”
“그만해, 캣. 남을 헐뜯는 건 나쁜 거야. 오늘 왜 그래, 정말? 툴툴대기나 하고.”
카쥬가 한숨을 쉬며 캣의 말을 잘랐어.
“뭐?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잖아.”
캣이 어이없어하며 말하자 카쥬도 불퉁하게 쏘아붙였어.
“날 위해서라고? 아까부터 자꾸 잔소리만 하면서. 혹시 질투하니? 내가 요즘 다른 친구들하고 놀아서 그런 거야?”
카쥬의 말에 캣은 토라진 얼굴로 두 앞발을 꽉 쥐었어.
“으휴, 바보! 넌 정말 바보 멍텅구리야!”
그 말에 카쥬는 팽 돌아서서 나무를 타고 올랐어. 그러고는 재빠르게 다른 나무로 옮겨 타며 가 버렸지.
‘캣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다들 얼마나 좋은 애들인데.’
캣은 잠시 동안 카쥬가 사라진 곳만 멍하니 보다가 바위 언덕으로 터벅터벅 돌아갔지. 언덕에서 쉬고 있던 히만이 캣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어.
“무슨 일이 있었니? 왜 이렇게 축 처졌어.”
“흐이잉. 삼촌…….”
히만을 보자 캣이 울음을 터트렸어. 캣은 훌쩍거리면서 카쥬와 있었던 일을 털어놨지.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했니?”
히만이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어.
“흑흑, 카쥬 잘못이 아니야. 바보같이 속고 있는 거 같은데…… 내 맘도 몰라주고. 너무 속상해. 삼촌.”
“어휴, 착해빠진 녀석 같으니라고. 차라리 잘됐다. 이번 기회에 그 녀석이랑은 다시 만나지 마라. 이제 생각도 하지 마.”
히만이 매섭게 말했어.
캣은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지. 그런 캣을 보니 히만의 마음도 편하진 않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어.


7. 안개가 짙은 밤


다음 날, 카쥬는 수풀에 숨어 수리마왕의 둥지를 살폈어. 수리마왕이 먹이를 찾아 나설 때를 기다렸지. 마침내 둥지가 비자 카쥬가 단숨에 올라가 그 속을 헤집었어. 커다란 독수리 알들 사이로 푸른 헝겊 조각이 보였어.
‘저게 왕뱀이 말한 거구나!’
카쥬가 헝겊에 엉겨 있는 진흙과 짚을 뜯어내며 힘껏 당겼어. 그런데 너무 힘을 줘서 당기는 바람에 뒤로 벌러덩 넘어졌지.
빠직!
“어, 이게 무슨 소리지?”
아래를 내려다보니 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어. 카쥬가 넘어지면서 둥지 밖으로 쳐버렸던 거야.
“으앗! 알이, 수리마왕 알이 깨졌어!”
카쥬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머릿속이 하얘졌어. 아무런 생각도 들지도 않았지. 그때, 머리 위에서 커다란 날갯짓 소리가 났어. 카쥬는 허둥지둥 나무를 타고 내려가 근처 바위 뒤로 몸을 숨겼어.
“끼아아아아아!”
둥지에 내려앉은 수리마왕이 분노에 찬 울음을 길게 쏟아냈어. 처절하고 슬픈 소리였지. 카쥬는 식은땀만 흘리며 납작하게 엎드렸어. 카쥬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가 터질 듯이 크게 들렸어.
수풀 사이에서 동그란 눈동자가 이 광경을 쭉 지켜보고 있었지.
‘저 바보 같은 녀석. 정말 사고만 치고 돌아다니는군.’
눈동자는 살그머니 수풀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어.


카쥬는 꼼짝없이 보물창고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지. 자신이 한 일이 후회되고 또 후회되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었어. 수리마왕은 온종일 토리숲의 하늘을 뱅글뱅글 돌았어. 수리마왕의 비명 같은 울음소리에 다른 동물들도 숨을 죽였어.
“어휴, 대체 누가 수리마왕을 건드린 거야?”
“그러니까! 이 평화로운 기간에 저렇게 화난 걸 보면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
“아우 짜증 나! 괜히 눈치 보게 생겼잖아.”
생기 넘쳤던 숲은 한순간에 긴장감으로 가득했어. 자연스레 카쥬의 동굴로 찾아오는 동물들도 뜸해졌어. 휑한 바람만이 동굴 속을 훑고 나갔지.
카쥬는 왕뱀이 무척 보고 싶었어. 어서 빨리 목도리도 건네주고, 함께 따뜻한 차도 마시고 싶었지. 너무 무섭고 외로웠거든.
어둠이 내린 밤이 되자, 토리숲은 평소보다 더욱 고요해졌어. 사방에 안개까지 자욱하게 내려앉았지.
‘이런 밤에는 수리마왕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용기를 낸 카쥬가 왕뱀이 사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어. 카쥬가 도착하자 왕뱀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어.
“오늘 우리 숲이 시끄럽더군.”
“응. 이거 맞지? 으아, 내가 이거 땜에…….”
카쥬가 푸른 목도리를 내밀며 왕뱀 앞에 주저앉았어. 긴장이 풀리면서 겨우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거든. 왕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목도리를 살폈지.
“그래, 이게 맞아. 이제 너한테 갈 필요 없겠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카쥬가 눈을 껌벅이며 물었어.
“네가 숲을 이렇게 뒤집어 놨는데 마음 편히 같이 다니겠냐? 훗, 너한테 이제 볼일은 끝났다.”
왕뱀이 똬리를 틀며 그대로 눈을 감았지.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쉬륵’ 소리만 냈어.
“그, 그건 이 목도리 때문이었잖아. 네가 필요하다고 해서 난…… 그러다가 실수로 알을 깨트린 거라고.”
카쥬가 어리둥절해하자 왕뱀이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며 독을 뿜어낼 듯 말했어.
“도둑질이 네가 할 일이잖아. 그리고 내가 언제 알을 깨라고 시켰냐? 멍청한 녀석.”
“야…… 왕뱀. 너 어떻게 친구한테 그렇게 말 할 수 있어?”
카쥬는 갑자기 변해 버린 왕뱀의 태도가 믿기지 않았어. 왕뱀이 시뻘건 입 속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어젖혔어.
“크크크.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 봐. 친구? 친구라고?”
“그래. 우리, 우리 친구잖아…….”
왕뱀이 목을 높이 치켜들더니 카쥬를 깔아보며 말했어.
“좀 잘해 줬더니…… 정신 차려, 발만 빠른 애송아! 그깟 달리기 한 번에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으냐? 넌 죽었다 깨어나도 나랑 같은 급이 될 수가 없다고.”
카쥬는 왕뱀이 너무나도 차갑고 무섭게 느껴졌어.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게 두려움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
“그만 꺼져. 가다가 수리마왕에게 잡아먹히지나 마라.”
카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컴컴한 숲을 마구 달렸어. 옅어진 안개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어.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빛들은 멀어 보이기만 했지.
‘이럴 수가! 이건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다고.’
카쥬의 머릿속에서 왕뱀의 웃던 얼굴과 너구리 둠, 토끼 초비의 다정했던 표정이 떠올랐어. 지금껏 친절하게 다가왔던 동물들도 하나하나 다 생각났어.
‘모두들 새로 사귄 친구들이라고 믿었는데! 난 그냥 심부름 도둑이었던 거야!’
카쥬는 심장이 미친 듯이 쿵덕대고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어. 스스로가 너무나도 바보 같았지. 정신없이 달리던 카쥬의 발이 어느샌가 멈추었어. 카쥬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어. 달빛이 은은하게 바위 동굴 입구를 비추고 있었지. 저도 모르게 바위 언덕으로 온 거야.


8. 밤손님과 대화


‘캣…….’
카쥬는 멍하니 바위 동굴을 바라보았어. 하지만 캣을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어. 그때 동굴 입구에서 미어캣 한 마리가 꼼지락거리는 바람에 카쥬는 서둘러 눈물을 훔치고 바위 언덕을 떠났어. 카쥬는 헛헛하고 시린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지. 언제든 볼 수 있던 단 하나의 친구까지 잃은 느낌이었거든. 숲속 바람이 카쥬의 마음을 할퀴듯 세차게 불어왔어. 정신없이 달리던 카쥬가 보물창고에 다다를 무렵이었어.
“으악!”
카쥬가 발바닥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어. 가시덤불에 발이 찢겨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어. 카쥬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고 말았지.
“흐흐흑. 엉망이야!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
다친 발도, 마음도 너무나 아팠어. 이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았어. 카쥬는 한참을 엉엉 울었어. 일렁이는 눈물과 안개 사이로 보듬이 뿜어내는 빛이 희미하게 보였어. 카쥬는 보듬을 향해 겨우겨우 기어갔어.
“보듬아, 이 세상엔 아무도 없어. 흑흑. 하늘 위엔 수리마왕이 버티고 있고, 땅 위엔…… 아무도 없어.”
카쥬가 앞발로 눈물 콧물을 훔치며 말했어.
“흐흑. 난 정말 바보인가 봐. 널 지키겠다고 경기에 참가해 놓고…… 새 친구들이 생겼다고 바보같이 좋아만 하고 있었어. 정말 난 친구들이라고 믿었어. 그랬는데…….”
카쥬는 보듬을 올려봤어. 안개 속에 싸인 보듬은 언제나처럼 말이 없었어. 카쥬는 당장에라도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포근한 품에 안기고 싶었어. 하지만 상처 때문에 아예 꿈도 꿀 수 없었지.
“난 벌 받은 걸까? 캣은 날 위해서,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건데…… 그걸 몰랐어. 어쩌지, 보듬아. 캣도 나한테 실망해서 떠나 버렸어. 가 버렸다고.”
카쥬는 너무 괴로워서 눈을 질끈 감아 버렸어. 늘 함께한 친구를 잃은 아픔은 말할 수 없이 컸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하며, 카쥬는 그냥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견디기가 너무나 힘든 밤이었지.
“에휴, 그러게 누가 바보같이…….”
어두운 수풀 쪽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어. 깜짝 놀란 카쥬가 눈을 번쩍 떴어.
“거기 누구야?”
“헙!” 하고 당황해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풀이 바스락거리면서 갈색 동물이 슬그머니 걸어 나왔지.
“흠흠. 질질 짜면서도 달리기는 잘도 달리더구나.”
카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어.
“히만 아저씨? 아저씨가 여기에 왜……?”
이 밤중에, 그것도 자신을 싫어하는 아저씨를 보자 카쥬는 당황스러우면서 겁도 났어. 카쥬가 고개를 외로 돌리고 훌쩍거렸어. 아저씨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 히만이 잠자코 바라보고 있자 카쥬가 겨우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어.
“어서 가세요. 절 내버려 두시라고요.”
“가든 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쪼그만 게, 하여튼.”
히만이 혀를 차며 가까이 다가서자 카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지. 하지만 히만은 스스럼없이 카쥬의 발을 들어 살폈어.
“아얏!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쯧쯧, 많이 찢어졌네.”
히만이 잠시 생각하더니 곧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졌어.
‘어쩌지. 지금껏 내가 한 말을 전부 들은 거 아니겠지? 아, 정말…… 내일 다른 동물들도 다 알게 될지도 몰라.’
카쥬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두더지 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을 지경이었지. 히만이 이대로 가 버리기를 간절히 바랐어. 하지만 카쥬의 바람과 달리, 히만은 곧 돌아왔어. 연한 무늬가 있는 초록 잎사귀를 한가득 안고서 말이야.
“자, 여기 앉아 봐.”
카쥬는 얼떨결에 히만이 시키는 대로 바위에 걸터앉았지. 히만은 돌로 풀잎을 짓이겨서 카쥬의 발바닥에 붙이기 시작했어. 짓이겨진 풀에서는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났어.
“상처 회복엔 바위취 풀이 제일 좋지. 당분간 붙이고 다녀.”
히만의 말에 카쥬는 코끝이 시큰거리더니 눈물이 핑 돌았어. 수도꼭지가 터진 것처럼 눈물이 주르르 흘렀지. 히만은 카쥬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잠자코 곁을 지켰어. 어느덧 보듬의 나뭇결이 보일 정도로, 숲속 안개가 말끔히 걷혔지.
“이제 좀 시원하냐?”
눈이 퉁퉁 부은 카쥬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어. 아무런 말을 하지도, 듣지도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후련했지.
“그런데 이 밤에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거예요?”
“아까 네가 우리 동굴 앞에 왔었잖아. 하지만 말이야, 난 네가 좀 전에 보듬한테 한 얘기는 못 들었다. 뭐, 질질 짜면서 웅얼거리니 통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난 오늘 아무 말도 못 들은 거야.”
히만이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게 말했어.
“아, 네.”
카쥬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어.
“아저씨, ……캣은 잘 있나요?”
“그건 네가 직접 물어봐.”
“이제 캣은 절 만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큰 잘못을 했거든요.”
카쥬가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리자 히만은 따뜻한 눈으로 카쥬를 보며 말했지.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 실수를 인정한 뒤가 중요하지. 그에 따라 상황은 아주 많이 달라진단다. 그러니까 네가 미리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실수를 인정하고, 그 뒤가 중요하다고?’
카쥬는 히만의 말을 되뇌었어.
히만이 연하고 부드러운 나뭇잎을 따 와 카쥬의 발을 꽁꽁 싸맸어. 발바닥이 화끈거렸지만, 카쥬는 단단히 매듭짓는 옹골찬 힘에 기운이 나는 것 같았어.
“아무래도 쉽게 나을 거 같지는 않은데. 일단 오늘은 푹 자 둬.”
“정말 고마워요. 히만 아저씨.”
카쥬는 잠시 머뭇거리며 히만을 올려다보았어.
“저 사실은…… 아저씨가 절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히만이 당황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어.
“아니 뭐, 흠흠. 그래도 다친 꼬마 녀석에게 막 대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못돼 먹지는 않다고. 어서 자거라. 꼬맹아.”
히만이 서둘러 작별 인사를 했어.
“고마워요, 아저씨. 조심히 가세요.”
카쥬는 폴짝폴짝 사라지는 히만의 뒷모습을 바라봤어.
‘정말 신기한 밤이야. 좀 전까지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카쥬는 뒤돌아서 보듬을 올려봤어. 언제나 그래 왔듯이 은은한 빛이 사방을 비춰 주고 있었어.


9. 카쥬의 사과


다음 날 아침, 카쥬가 퀭한 눈으로 동굴 밖으로 나왔어. 다친 발바닥은 퉁퉁 부어올라 있었지. 한 발걸음씩 뗄 때마다 쓰라리고 아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카쥬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어. 천천히 발을 디디며 걷기 시작했어. 두 앞발과 남은 뒷발에 힘을 더 실어 걷는 바람에 뒤뚱거렸지. 지나가던 둠이 카쥬를 보게 되었어.
“앗, 저 녀석. 다리를 다쳤잖아? 어서 왕뱀에게 알려야겠어.”
둠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어.
겨우 수리마왕의 둥지 아래에 도착한 카쥬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어.
“수리마왕, 일어났어요?”
나무 둥지 위에서 수리마왕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어.
“웬일이야? 꼬마 킨카주야.”
“저, 저기, 수리마왕.”
카쥬는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어.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그냥 떠나고 싶었지. 수리마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물었어.
“무슨 일인데 그러냐?”
카쥬가 침을 꿀꺽 삼키고 힘겹게 입을 뗐어.
“저, 사실은…… 알을 깨트린 건 저였어요. 정말 죄송해요.”
“뭐, 뭐라고?!”
수리마왕이 곤두박질치듯이 땅으로 내려왔어. 거친 날갯짓에서 태풍 같은 바람이 일어서 카쥬가 휘청거릴 정도였어.
“네가 뭘 했다고? 다시 한번 말해 봐라.”
수리마왕의 눈은 불꽃이 튀듯 이글거렸어. 카쥬는 심장이 잔뜩 오그라드는 것 같았어. 고개를 푹 숙인 채, 힘들게 입을 뗐어.
“그때 너무 무서워서 도망갔는데, 그랬는데, 정말 실수였지만 죄송하단 말을 드리려고 왔어요. 저, 저를 잡아먹으신대도 할 말이 없어요. 정말 죄송해요.”
“도대체 왜 그런 거냐? 왜 내 둥지에 와서!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야!”
수리마왕이 매섭게 말했어.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였어.
“친구가 잃어버렸다는 목도리만 가져가려고 했어요. 그러다 실수로…….”
수리마왕은 거친 숨을 내뱉었어. 카쥬는 숨이 턱 막히고 다리가 달달 떨려 왔어.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한번 말했어.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수리마왕님, 내일 경기 끝낼 때까지만 기다려 주실 수 없나요?”
“용서를 빌러 온 녀석이 그런 조건까지 내걸다니, 지금 뭐 하는 거냐?”
수리마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부라렸어.
“경기가 끝나면 어떤 벌이든 받을게요. 그때까지만 제발, 부탁드려요.”
수리마왕이 카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어. 열기가 푹푹 뿜어져 나왔어. 카쥬는 온몸이 달달 떨려 왔어. 한참 말이 없던 수리마왕이 입을 뗐어.
“흥! 대회가 끝난 뒤에 보자. 어차피 대회 기간에 동물들끼리 분란은 금지야. 그걸 너 때문에 깨고 싶지도 않다.”
수리마왕의 말에 카쥬는 고개를 번쩍 들었어.
“아!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너 고마우라고 그런 거 아니야. 그동안 나도 널 어찌할지 생각을 해 볼 테니,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아, 네, 네! 그래도…… 감사해요.”
카쥬가 침을 꼴깍 삼키며 대답했어.
수리마왕이 어떤 벌을 내릴지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했어. 제대로 펴지 못했던 몸과 마음이 차라리 편해지는 느낌이었어. 하지만 다음에 갈 곳을 생각하니 카쥬의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어.
이때였어. 나무 위를 지나던 침팬지 찬이 카쥬에게 아는 체를 했어.
“카쥬! 오랜만에 보는구나. 내일 준비는 잘하고 있지?”
“아, 찬! 마침 잘됐어요. 의논할 게 있는데요.”
카쥬가 찬에게 다급하게 말했지만 찬은 이미 다른 나무로 옮겨가고 말았어. 찬은 내일 최종 경기 때문에 바쁘게 다니고 있었거든.
“으아, 어쩌지…….”
카쥬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나뭇잎으로 동여맨 자신의 발바닥을 내려봤어. 상처를 동여맨 잎은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했지.
“이 상태로는 달리기에서 일등은커녕 맨 꼴찌로 들어갈 게 뻔해.”
카쥬는 서둘러 바위 언덕으로 갔어. 예전의 몸 상태였다면 숲에서 바위 언덕까지 가는 건 식은 죽 먹기였지만, 오늘은 달랐어. 비 오듯 땀을 흘렸고, 벌어지기 시작한 잎 사이로 상처가 다시 터지고 있었어. 카쥬가 겨우 바위 동굴에 다다랐을 때, 새끼 미어캣들이 나와 볕을 쬐고 있었어. 근처 큰 바위에서 다른 미어캣이 망을 보고 있었지.
‘히만 아저씨는 안 계시나 보다.’
카쥬는 눈길을 돌려 새끼 미어캣들에게 다가갔어.
“안녕? 혹시 안에 캣이 있어?”
“잠깐만요. 보고 올게요.”
눈이 유난히 큰 미어캣이 동굴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가 금세 나왔어.
“캣 언니는 지금 잔다는데요. 앗, 아니, 자는데요.”
카쥬는 고개를 떨구었어.
‘단단히 화가 났구나. 내 얼굴도 보기 싫은가 봐.’
카쥬가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어.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 말했어.
“캣에게 전해 줄래? 내가 어리석었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이야.”
카쥬는 절뚝거리며 바위 언덕을 내려왔지.


10. 대회에 참가하려면?


드디어 시합 날이 되었어. 동이 트기도 전에 카쥬는 동굴 밖으로 나왔어. 다친 발은 여전히 엉망이었지. 카쥬가 고개 돌려 동굴을 가만히 바라보았어.
‘우리의 동굴인데…… 캣이 없으니까 아무 쓸모 없는 창고가 되어 버린 거 같아.’
카쥬는 씁쓸한 기분으로 보듬 나무로 다가갔어. 싱그러운 새벽이슬을 잔뜩 머금은 보듬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한 빛을 내고 있었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야. 아무도 널 다치게 할 수는 없어.’
일찌감치 경기장으로 향하는 카쥬의 머릿속은 복잡했어.
‘하지만 이렇게 엉망인 상태로 대회에 어떻게 나가지? 어떻게 해야 일등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보듬을…….’
카쥬는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어느새 태양이 떠올라 숲에 따뜻한 빛을 비추고 있었어.
‘햇빛을 받으면 힘이 생긴다고 그랬어.’
카쥬는 캣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어. 부드러운 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왔지.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카쥬의 눈빛이 반짝였어.
토리숲 광장에서 최종 경기가 열렸어. 지난 대회 때보다 더 많은 동물들이 모여들었지. 심사단은 침팬지 찬을 포함해서 호랑이, 새 등의 종이 다른 다섯 마리 동물로 이루어졌어. 이들은 주의 깊게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태도와 성적을 보며 신중하게 심사했어.
왕뱀과 둠, 초비가 달리기 경기장으로 갔어. 달리기 대회는 이미 진행 중이었지. 초비는 고개를 쑥 내밀고 선수들 사이를 두리번거렸어.
“역시, 안 보이는데?”
“그 꼴로 달리는 건 무리지. 결국 기권했나 봐.”
둠과 초비의 말에 왕뱀이 비웃듯이 킬킬거렸어.
“어차피 부려 먹을 만큼 부려 먹었어. 우린 오늘 최종 일등만 공략한다. 살살 굴려서 수액을 잘 뽑아 먹는 거야. 다들 명심해.”
“좋아!”
둠이 대답했어.
달리기 시합이 끝이 나고 마지막 경기가 열렸어. 초비가 그곳을 가리켰어.
“저기에 많이들 모여 있는데? 무슨 경기지? 한번 가 보자.”
출발선에는 빈 바구니 넷이 놓여 있고 멀리 떨어진 곳에 바나나 무더기가 쌓여 있었어.
“어? 저 녀석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동물들 틈으로 카쥬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어. 발에 나뭇잎을 동여맨 채 말이야.
“저게 뭐 하는 짓이지?”
“나 참. 저 꼴로 그렇게 나서고 싶나.”
왕뱀도 한심하게 쳐다봤지만 곧 표정이 바뀌었어.
“오호. 혹시라도 만약에, 저놈이 수액을 타게 되면 그땐 너희들이 한껏 띄워 주라고. 단순한 놈이라 금방 넘어올 거야.”
“좋아, 좋아!”
초비와 둠은 카쥬에게 바투 다가갔어. 카쥬는 그새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었어. 발이 아파서 오래 서 있기가 힘들었거든.
“카쥬! 이겨라!”
“카쥬! 카쥬!”
초비와 둠은 휘파람을 불어 대며 요란을 떨었어.
카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끄덕였어.
그때 심사단도 마지막 대회를 관람하러 왔어. 카쥬는 고개 숙여 심사단에게 인사를 했지. 사실 카쥬는 경기 전에 심사단을 찾아가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출전할 수 있는 다른 종목을 찾았던 거야. 심사위원들은 의논 끝에 부상당한 선수에게 기회를 더 주기로 했지. 물론 선수들에게 이해를 구하고서 말이야.
“자자. 이번엔 꼬리 긴 동물들의 경기를 시작합니다. 선수가 아닌 동물들은 뒤로 물러서요.”
심판인 날다람쥐가 주변을 정리했어.
초비와 둠은 뒤로 성큼 물러섰어.
출발선에는 카쥬와 여우원숭이 둘, 레서판다, 코아티가 각자 자리를 잡았어. 지난 경기에서 우승했던 선수들 중에, 체급이 비슷한 긴 꼬리 동물들이 출전한 거야. 숲에서 가장 활달하고 기술이 많은 친구들이었어. 마지막 경기인 만큼 많은 동물들이 몰려와 경기장을 에워쌌어. 알록달록 화려한 새들도 나뭇가지 사이사이 내려앉았어. 한쪽 나무 귀퉁이에서 히만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어.
‘녀석, 저렇게까지…… 힘내라. 꼬마야.’
어느새 히만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어. 구경하던 동물들이 수군대기 시작했어.
“어? 저기 카쥬 발 좀 봐. 저 지경이면 질 게 뻔하잖아?”
“그러게. 꼬리 길다고 나온 거야? 한심하긴.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겠다.”
“저 녀석 욕심도 많아. 미련하게. 그렇게나 수액이 갖고 싶은 거야? 쯧쯧.”
카쥬는 굳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았어.
‘누가 뭐래도 상관없어. 포기할 수 없는걸.’
“선수 제자리~~ 준비! 휘릭!”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파람 소리가 힘차게 울렸고 선수들이 쏜살같이 달려갔어. 쌓여 있는 바나나들을 꼬리로 감아 바구니로 옮기기 시작했어. 정해진 시간 안에 바나나를 가장 많이 옮겨 담은 선수가 우승하는 경기야.
“이번 경기는 손과 발을 사용하지 않고서 오로지 꼬리만 사용해야 하는구나.”
“아하, 좀 어렵겠는걸.”
둠과 초비는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보았어.
카쥬도 바나나 하나를 꼬리로 감아쥐었어. 그리고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빈 바구니에 옮기기 시작했어. 여우원숭이들은 최종까지 올라온 실력자답게 날쌨어. 한 원숭이는 한 번에 바나나 두 개를 쥐기도 했지. 레서판다와 코아티도 몸놀림이 가벼웠어. 카쥬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바나나를 쌓아 갔어.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꼬리 힘도 빠지고, 꼬리뼈도 뻐근해졌지. 다친 발이 점점 부어올라 걷는 속도는 더욱 떨어졌어.
그때 원숭이와 코아티가 지나가다가 서로 부딪혔어.
“아야! 내 길을 막고 난리야!”
“무슨 소리야, 멍청아! 네가 눈을 바로 뜨고 걸었어야지!”
둘은 툭탁거리기 시작했어.
“휘익! 거기 경기 방해야. 조용히 해.”
심판을 보던 날다람쥐가 경고를 주었어. 하지만 원숭이와 코아티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목소리를 높였어. 날다람쥐 심판관이 콧김을 세게 내뿜고 외쳤지.
“둘은 퇴장이다!”
뒤늦게 두 선수는 울상을 지었지만 경기장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지.


11. 최선을 다했지만


남은 원숭이 룸바와 카쥬, 코아티는 계속해서 바나나를 쌓았어. 재빨랐던 룸바도 시간이 흐르자 점차 속도가 떨어졌어. 긴 팔을 간간이 땅에 대고 숨을 골랐지. 코아티도 길쭉한 입을 벌리며 헥헥거렸어. 카쥬의 발에 동여매진 나뭇잎은 진즉에 뜯겨 나가 버렸어. 구경하던 동물들은 숨을 죽였어. 햇살이 머리 위에서 따갑게 내리쬐었고, 카쥬는 땀을 폭포처럼 쏟았어. 궁싯거리던 왕뱀도 말없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어.
‘아, 진짜 토할 거 같아. 어지럽고 꼬리가 빠질 듯이 아파.’
너무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카쥬는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어. 마음속으로 보듬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어느새 카쥬가 쌓은 바나나 더미도 작은 산을 이루었어.
“허억, 나 더 이상은 못 하겠어.”
결국 룸바가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려 동그라미를 그렸어.
“나도!”
코아티도 뒤로 벌러덩 누웠지.
카쥬는 숨을 꼴깍꼴깍 삼키며 마지막 바나나까지 바구니에 담았어. 정해진 15분이 끝나고 날다람쥐 심판관이 호루라기를 “피익!” 불었어. 그리고 꼼꼼한 눈으로 바구니에서 바나나 개수를 세기 시작했어.
“룸바가 쌓은 바나나, 육십다섯 개! 코아티는…… 육십하나!”
심판관은 이어서 카쥬의 바구니로 갔어. 바구니 속의 바나나를 하나씩 풀밭으로 던졌지.
“서른여섯…… 마흔아홉…… 오십…… 카쥬가 쌓은 바나나, 오십네 개! 우승자는 룸바!”
심판관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어. 구경하던 동물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어.
“잘했어. 룸바!”
룸바는 끽끽거리며 주변을 크게 한번 돌며 승리를 자축했어. 원숭이들이 몰려나와 축하 헹가래를 쳤어. 심사위원들도, 출전한 선수들도 박수를 보냈지. 심사위원 중 호랑이가 안쓰러운 얼굴로 카쥬를 바라보았어.
“축하해, 룸바.”
카쥬는 겨우 축하 인사를 건네고서 한쪽으로 비켜 나왔어. 온몸에 기운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지. 카쥬는 맥없이 푸른 하늘만 올려다보았어.
‘하아, 정말 열심히 했는데…… 미안해, 보듬아.’
숨을 고른 카쥬는 고개만 떨군 채, 풀잎을 쓸었어.
왕뱀 무리들이 보란 듯 카쥬 앞을 쌩하니 지나쳐, 룸바에게 다가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
“룸바! 룸바! 정말 대단해!”
“넌 최고야, 룸바!”
그 어느 때보다 왁자지껄하게 외쳐 댔어.
카쥬는 자리에서 일어났어. 이제는 발도 꼬리도 마비가 된 것처럼 아픈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어.
“난 역시 안 돼…… 안 되는 거였어. 애초부터 하지 않았으면 되었던 걸까. 결국 이렇게…… 모두 내 잘못이야.”
그때였어. 카쥬 앞에 앞발 하나가 조심스럽게 내밀어 왔어. 앞발에는 낯익은 꽃이 동여매져 있었어.
“어? 이건…….”
카쥬가 고개를 번쩍 들었어.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지.
“보듬아, 나 진짜 캣이 보고 싶은가 봐. 이제 환상까지 보여.”
카쥬가 멍하게 중얼거렸지.
“카쥬!”
캣이 멋쩍게 말했어.
“우와, 말도 한다…… 어? 어? 진짜 캣이야?”
카쥬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 눈앞에서 방긋 웃고 있는 건 정말 캣이었어.
“캣…… 너!”
“이 바보야. 이렇게 다치기나 하고. 넌 정말 나 없으면 안 돼.”
카쥬의 까만 눈에 눈물이 훅 차올랐어. 카쥬는 그만 앞발로 얼굴을 가리고 말았어. 캣은 그런 카쥬를 힘껏 안아 주었지.
“흐흑, 미안해. 캣. 내가 정말…….”
“괜찮아, 카쥬. 나도 말이 심했어.”
캣이 카쥬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려 주었어. 그러자 굳어 있던 카쥬의 몸이 풀리는 것 같았지. 카쥬는 캣을 꼭 안았어. 캣의 품은 보듬처럼 따스하고 편안했어.
“그런데…… 나 결국 이기지 못했어. 흑.”
카쥬가 슬픔에 가득 찬 얼굴로 울먹였어.
“일등이 중요해? 네가 한 걸 봐. 이만큼 한 것도 정말 대단한 것 같은데.”
“그렇지만…….”
보듬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카쥬는 마음이 쓰렸어.
숲속 동물들은 심사를 기다리며 시간을 가졌지. 카쥬와 캣은 풀밭에 앉아 한참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했어. 겨우 며칠 못 본 것뿐인데, 서로 할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어.
“히만 아저씨가 날 치료해 줬어. 날 미워하는 줄 알았는데 정말 감동했지 뭐야.”
“삼촌이?”
캣이 깜짝 놀라 되물었어.
“응. 아저씨가 얘기 안 했어?”
“아니, 전혀 몰랐는걸.”
캣은 곰곰이 생각해 봤어.
며칠 동안 잘 보이지 않던 히만이 그제 밤늦게 들어왔을 때였어. 히만의 표정은 평소와는 다르게 누그러져 있었어.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캣. 동물들은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믿거든. 자기 생각을 정해 놓고 상대방을 판단하지. 그래서 언제나 눈을 크게 뜨고 넓게 봐야 해. 우리가 망을 볼 때처럼 말이다. 그러면 누군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는 오기 마련이야. 다행히도 나한테 그 기회가 늦지 않게 찾아온 것 같구나.”
“응? 삼촌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때 캣은 삼촌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 조금 알 것 같았지.
‘어쩐지! 그때 삼촌이 카쥬의 뒤를 쫓아다녔던 게 분명해. 그러다가 삼촌은 카쥬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된 거야. 삼촌도 진짜 카쥬를 알게 된 거야! 덤벙대지만 착한 내 친구 카쥬를.’
캣은 기분이 좋아서 킥킥거렸어.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카쥬가 수리마왕에게 용서를 빌러 갔던 때를 말하자 캣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발을 동동 굴렀어.
“그럼 수리마왕이…… 이제 어떻게 해?”
“어쩔 수 없지. 내가 저지른 일이니까. 그것보다 일등을 못해서…….”
카쥬가 발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지었어. 캣이 잠자코 있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어.
“안 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정말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데 카쥬, 왜 그렇게 일등에 목을 매는 거야? 너답지 않아.”
잠시 망설이던 카쥬는 캣에게 귓속말을 했어. 자신이 대회에 참가하려던 진짜 이유를 말했지.
“그런 거였다니…….”
캣은 놀란 얼굴로 카쥬를 바라보았어. 그러고는 잠시 동안 골똘히 생각에 빠졌어. 그때 몽구스 몽몽이 카쥬에게 다가왔어.
“카쥬! 너 대단한데? 그 몸으로…… 정말 근성 하나는 최고야! 빨리 나아, 나랑 겨뤄야지!”
몽몽이 카쥬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려 주었어.
언제 왔는지 고릴라 굴리와 여우 샤샤도 따뜻한 눈길로 카쥬를 바라보고 있었지. 동물들의 위로에 카쥬의 마음이 뭉클해졌어.
“그런데 네 단짝은 어딨어, 카쥬?”
“응? 방금까지 여기에…… 어? 캣?”


12. 시상식


왁자지껄했던 숲속 대회의 마지막 순서만 남았어. 바로 시상식이었지. 심사는 전에 없이 오랫동안 길어졌어. 각 경기에서 일등 했던 동물들이 잔디광장 무대 앞으로 나왔어. 각종 새들도 광장을 에워싼 나뭇가지 위에 앉아 구경했어. 다들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지.
“저 중에 최종 일등은 누가 될까? 다들 정말 멋있게 잘했잖아.”
“맞아, 달리기도 엄청 재밌었는데! 이번에 신기록이 나왔잖아. 치타가 되면 좋겠다!”
“난 코끼리! 정말 볼만했어.”
“누가 되든 부럽네. 보듬의 수액이라니.”
드디어 심사단 대표로 침팬지 찬이 광장의 중앙무대에 올라섰어. 찬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어.
“이번 숲속 대회는 여느 때 보다 많은 선수들이 참가해서 자리를 빛내 줬어. 모두들 고맙고, 정말 잘해 주었다. 이제 심사단들이 결정한 숲속 대회의 최종 일등을 발표하겠다.”
코 힘겨루기 대결에서 우승한 코끼리도, 가장 빠르게 달렸던 치타 치리도, 커다란 부리로 가장 많은 물을 모은 새도, 원숭이 룸바도, 각 경기에서 일등 했던 동물들 모두 긴장한 채 찬의 입만 바라보았어.
“이번 대회의 최종 일등은 바로― 치타 치리! 평소에도 꾸준한 체격 관리로 이번 대회에서 전에 없던 새 기록을 경신한 치리가 최종 일등이다!”
동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냈어.
“와우~! 오예!”
치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뻐했어.
웅성대는 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찬이 말을 이었어.
“그리고 우리 심사단은 이번에 특별상을 뽑았다. 다들 기억하겠지만 십여 년 전에 특별상을 수상했던 호랑이를 기억하겠지. 경기 중에 우승을 코앞에 두고도 그걸 포기하고 기절한 다람쥐를 살리는 데 힘쓴 일이 있었지. 그때 이후 아주 오랜만에 특별상이 부활한 셈이 되겠군. 올해 달리기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다른 동물들의 특기 분야에 도전해서 끝까지 멋진 경기를 보여 줬던 동물이 있어…….”
동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어.
“설마?”
찬이 카쥬를 바라봤어. 카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찬을 올려다보았지.
“부상당한 몸으로도 포기하지 않는 도전정신과 용기를 보여 준 꼬마 킨카주, 카쥬! 카쥬에게 특별상을 수여한다.”
찬의 말이 끝나자 많은 동물들 사이에서 박수가 쏟아졌어.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어.
“흥. 수액이 탐나서 참가한 애한테 그런 상을 뭐 하러 준담?”
초비가 얄밉게 궁싯거렸어. 둠도 뿌루퉁한 얼굴로 세차게 끄덕였지.
카쥬는 믿기지 않아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어.
“대단해, 카쥬. 넌 상 받을 자격이 있어.”
히만이 미소를 지으며 멀뚱히 서 있는 카쥬를 무대 근처로 데리고 갔어. 왕뱀과 초비, 둠은 떫은 표정으로 바라봤지.
시상식이 시작되고 각 경기에서 일등을 했던 동물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어. 카쥬의 상처 난 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
“뿌우― 이리 오렴.”
코끼리가 긴 코로 카쥬를 번쩍 들어 무대로 올려 주었어.
꽃과 나무 덩굴로 만든 다발과 메달이 일등 한 동물들의 목에 걸렸어. 지켜보던 동물들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어.
“치리에게는 고무나무로 만든 트로피와 부상으로 보듬 나무의 수액이 수여된다.”
찬이 열대장미로 만들어진 화관을 준비했어. 무대 중앙에서 치타는 한껏 가슴을 내밀며 우아하게 인사를 했어. 카쥬의 목에도 화사한 야생초 목걸이가 걸렸어.
“전 이기지도 못했고 잘한 것이 없는데…… 이 상은 믿기지 않아요.”
“허허. 말 그대로란다. 승패와 상관없이 네가 포기하지 않는 스포츠맨십을 보여 준 것으로도 의미가 있지. 다만 예정에 없던 상이라 선물은 없단다. 이해해 주렴.”
찬이 웃으며 말했어. 그러자 카쥬가 다급하게 말했어.
“고마워요, 찬. 그런데 잠깐 할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그럼. 당연하지.”
카쥬가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자 치리가 선뜻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었어. 카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빛들을 보았어. 다정한 눈빛도, 차가운 눈빛도 보였지. 카쥬는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어.
“저기, 모두에게 고백할 게 있는데…… 수리마왕을 화나게 했던 건 나였어요. 제가 알을 깨뜨려 버렸어요.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모두가 있는 곳에서 이 말을 해야 할 거 같아서.”
“뭐라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고 동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어.
“그럼 그렇지. 저 사고뭉치가 어딜 가겠어?”
“어쩐지. 수리마왕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봤다니까?”
“우우! 세상에. 그래놓고 태평하게 경기를 했다고?”
어떤 동물들은 큰 소리로 야유를 보내기도 했어.
초비와 둠은 서로 속닥이며 카쥬를 비웃었지.
“쟤, 바보 아니니? 저런 얘길 왜 해?”
“그러니까 말이야. 크크.”
왕뱀은 한심해하며 혀를 날름거렸어. 카쥬는 귀가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웠어.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꾹 참고서 잠잠해지기를 기다렸어.
“맞아요. 난 사고뭉치였어요. 이번 일도…… 정말 미안해요.”
그때였어. 펄럭이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바람에 쓸려 사방으로 나부꼈어. 쨍쨍한 햇살 아래 검회색 날개가 그늘을 만들었어. 날카로운 눈빛의 독수리가 키 큰 파라고무나무에 날개를 접고 앉았지.
“앗! 수리마왕이 나타났다!”
“으악!”
동물들이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졌어. 서로 우왕좌왕 대며 난리법석을 떨었어. 잔디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지. 나무와 수풀 뒤로 몸을 숨기거나 그 자리에 굳은 채로 바들바들 떨기도 했어.
“분위기를 망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거 좀 미안하게 되었군.”
수리마왕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어.
“수리마왕…… 자네.”
찬은 염려스러운 얼굴로 말을 아꼈어. 아무리 성품이 곧은 독수리라 할지라도 알을 잃은 마당에 큰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카쥬는 굳은 마음으로 수리마왕 앞으로 가서 섰어.
“기다려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수리마왕. 이제 절 마음대로 하세요.”
“그렇게 대회 출전을 하려고 하더니…….”
이때 카쥬의 곁으로 캣이 달려와 바싹 붙어 섰어.


13. 진정한 친구


“어, 캣!”
캣은 입을 꼭 다문 채 카쥬의 앞발을 잡았어. 수리마왕이 공중으로 슬쩍 떠올라 카쥬와 캣의 주위를 크게 한 번 돌았어. 카쥬는 눈을 지그시 감았어.
“이제 절 죽여도 괜찮아요.”
“안 돼! 카쥬. 그런 말 마.”
캣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 수리마왕이 카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어.
“네 잘못을 생각하면 용서하기 힘들지만, 오늘 경기를 보면서 네가 어떤 아이인지 알게 되었다. 보듬을 위해 최선을 다한 너를 보면서…… 실수에 대해 용서하기로 했다. 네 죄에 대한 대가는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치른 것 같으니.”
수리마왕의 말에 카쥬의 눈이 솔방울처럼 커졌어.
“네?”
“좋은 친구를 두었더구나.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길 때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다.”
수리마왕은 따뜻한 눈길로 카쥬와 캣을 한 번씩 바라본 뒤, 하늘 저편으로 크게 날갯짓하며 사라졌어.
카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었어.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였어. 여기저기 숨었던 동물들이 고개를 삐죽 내밀었어. 수리마왕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다시 모여들었지.
캣 혼자서만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질렀어.
“역시 수리마왕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카쥬는 어안이 벙벙해서 캣을 바라봤어.
“이게 무슨 일이야?”
캣이 고개를 끄덕였어.
“내가 수리마왕에게 말했어. 네가 왜 경기에 그렇게 열심이었는지…… 어쩌면 수리마왕이라면 이해 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했어. 널 그냥 둘 순 없었거든.”
“캣…….”
카쥬는 먹먹한 마음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어.
그때 침팬지 찬이 물었어.
“잠깐, 보듬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캣이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어.
“사실 카쥬는 보듬의 수액을 뽑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보듬이 약해질까 봐요.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 일등을 하려고 했대요. 수액을 받지 않으려고요. 우릴 지켜 준 보듬을 지키려고.”
“그, 그런!”
찬은 무언가에 얻어맞은 표정으로 카쥬를 바라봤어.
캣의 말을 들은 심사단들과 동물들도 깜짝 놀랐지. 동물들이 웅성대기 시작했어.
“잠깐. 그럼 발이 그 지경이 돼서도 경기에 나간 게 보듬 때문이었단 말이야?”
악어 할머니는 눈가가 촉촉해졌어.
“세상에, 천방지축 꼬마가 그렇게 속이 깊은 줄 몰랐구나.”
“그러게, 하긴 수액을 빼내는 게 보듬한테 무리가 될지도 몰라. 이거 생각도 못 했는걸.”
그때 치타 치리가 카쥬에게 천천히 다가갔어.
“어린 꼬마가 대견하구나. 난 대회에서 신기록을 낸 걸로도 충분히 만족해. 보듬의 수액은 받지 않겠어.”
치리의 말에 찬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어.
“그걸 받기 위해 다들 얼마나 열심히 경기했는데, 정말 괜찮다고?”
“찬, 경기의 상품만을 위해 뛴 건 아니야. 난 오늘 신기록을 세웠다고. 어제의 나를 이긴 걸 확인했잖아. 뭐, 보듬의 수액도 탐나긴 했지만 카쥬 같은 생각을 못 했어. 항상 우리 숲을 밝혀 주는 보듬인데…… 받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었나 봐.”
치리의 말에 카쥬가 용기를 내어 말했어.
“정말? 난 보듬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생각했던 건 이 방법밖에 없었거든. 치리야, 정말 괜찮다면…… 부탁해.”
“괜찮고말고.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기도 해.”
치리가 시원하게 대답했어.
동물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곧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어.
“치리도 멋진데!”
“카쥬, 대견하다. 어린데도 생각이 나보다 나아.”
고릴라 굴리의 말에 동물들이 웃음을 터트렸어.
다른 동물들도 환호성을 질렀지. 코끼리는 힘차게 “뿌우―” 소리쳤어. 숲속은 지금껏 없었던 박수 소리로 가득 찼어.
그러는 사이 초비와 둠은 울상이 되어 버려 투덜거렸어.
“뭐야? 이거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완전 쓸모없는 놈이잖아.”
“저 바보 같은 녀석. 어휴, 정말!”
이때 둘의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지. 둘이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휙 돌아보자 히만이 매서운 표정으로 서 있었어.
“보자 보자 하니. 너희들도 정신 좀 차려. 왕뱀한테 이끌려 다니지 말고.”
히만의 카리스마에 눌려서 둘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뺐어.
떠들썩한 함성 속에서 찬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어. 자신이 야심 차게 내건 상품이 쓸모없게 된 것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어. 하지만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어.
“저 꼬마는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았어. 다른 누군가를 위해 저렇게 희생한다는 건…….”
찬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치리에게 말했어.
“우승자가 상품을 사양한다고 하니 의미가 없겠지. 보듬의 수액 대신 좋은 걸 찾아보마.”
치리가 씩 웃으며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어.
찬은 카쥬에게 다가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어.
“사실 난 네가 철없는 꼬마라고만 생각했단다. 기특한 녀석.”
카쥬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인걸요.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찬.”


뒤풀이가 열리고 모든 동물들이 함께 어울렸어. 다람쥐들의 공연이 열리고, 코끼리들이 원을 크게 그리며 “뿌우―뿌우―” 합창을 했지. 호랑이들도 바위에서 여유롭게 음악을 즐겼어. 색색별 고운 새들이 공중에서 무지개 빛깔을 만들기도 했어.
“역시 동물은 오래 봐야 알 수 있나 봐. 카쥬가 이렇게 놀라게 할 줄이야.”
“그러게. 그리고 수리마왕이 저렇게 용서해 주는 걸 보면, 생각보다 더 괜찮은 녀석일지도 몰라.”
굴리와 샤샤도 카쥬가 한결 더 좋아졌어. 친구들과 즐겁게 대화하던 카쥬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어. 캣이 물었어.
“뭘 찾는 거야, 카쥬?”
“아, 저기 있다. 잠시만.”
나무 그늘 아래 왕뱀과 토끼 부인이 있었지. 카쥬는 그리로 다가갔어.
“왕뱀.”
“흥, 또 뭐야? 네가 뭐 대단해진 거 같으냐?”
왕뱀이 비아냥거리며 말했지만 카쥬는 주눅 들지 않았고 말했어.
“네가 했던 말이 맞았어, 왕뱀. 난 너 같지 않아. 내게는 정말 좋은 친구들이 있거든. 넌 계속 그렇게 지내. 네 주변엔 네가 대하는 딱 그만큼의 친구만 남을 테니까 말이야.”
말을 마친 카쥬가 돌아섰어.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말이야.
“흥! 뭣도 모르는 애송이가.”
왕뱀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카쥬의 말이 가슴에 박혀 들어왔어. 곁에 있던 토끼 부인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않았지.


카쥬와 캣은 시끌벅적한 대회장을 빠져나가 숲속으로 갔어. 둘은 나란히 동굴 앞에 앉아 보듬을 올려보았지. 보듬은 여느 때와 같이 잔잔히 푸른 잎을 일렁이며 동굴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어.
“널 지켜내서 다행이야.”
카쥬가 행복한 표정으로 보듬에게 나지막이 말했어. 그런 카쥬를 보며 캣은 중얼거렸어.
“어쩌면 카쥬. 네가 지켜낸 건 보듬만이 아닌 거 같아.”
보듬의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이 햇살에 반짝반짝했어. 향긋한 풀 냄새가 풍겨 왔지. 카쥬와 캣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토리숲 가득히 울려 퍼졌어.











박그루
작가소개 / 박그루

2017년 부산아동문학신인상과 김유정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작품으로는 『편의점 도난 사건』,『미술관 추격 사건』, 『마음대로 하고 싶어』, 『나도 크리에이터!』 등이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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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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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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