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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이의 신기한 여행

  • 작성일 2023-03-24
  • 조회수 1,497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장편)]




빨강이의 신기한 여행

양지영


차례




1. 여기가 어디지?

2. 넌 하늘을 나는 비행접시야

3. 나는 왜 일회용이야?

4.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5. 나를 꺼내 줘

6. 너희 집에 데려다줄게





1. 여기가 어디지?


“흐, 비 오나 봐.”

잠을 자고 난 아침이었어요. 어디서 흙을 파내는 소리가 들렸어요. 누군가가 온 게 틀림없어요.

나는 축축한 흙더미 사이로 주위를 살폈어요. 나를 깨운 건 공원에 산책하러 온 검둥이 개였어요. 검둥이는 볼일을 다 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지나갔어요.

“에이, 뭐야? 다 젖었잖아.”

더운 기운이 흙에서 확 올라왔어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깜짝 놀랐어요. 뭔가가 달라져 보였거든요. 내게 그늘이 되어 주던 은행나무 키가 훌쩍 자라 있어요. 하늘에 닿을 만큼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은행나무 앞에 벤치도 생겼어요.

공원 주변으로는 예전에는 없었던 높은 건물이 솟아 있어요.

“우와. 여긴 어디지?”

모든 게 어리둥절했지요.

아, 참 내 이름은 빨강이에요. 나는 일회용 플라스틱 접시이고요. 일회용이지만 몸이 아주 단단해요. 다행히 어느 곳도 다치지 않고 둥근 모양 그대로예요.

앞에는 큰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어느새 연못이 되었네요. 잉어가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고 있어요. 잠들기 전까지는 은행 열매에서 구린내가 진동할 즈음이었어요. 몸 위로 은행잎이 비처럼 쏟아졌던 것 같아요.

나는 은행나무 할머니에게 말했어요.

“할머니, 빨강이에요.”

“빨강이 이제 일어났구나.”

“네, 자고 일어나니 주위가 이상해졌어요. 제가 얼마나 잤는데요?”

은행나무는 나무 마디를 세더니 이렇게 대답했어요.

“아마도 10년은 지난 것 같어.”

그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와, 10년을 잤다고요? 그럼 내 친구들은요?”

“친구라면 네가 일전에 말했던 종이컵이랑 나무젓가락 말이야?”

“네, 분명히 쓰레기통에 있는 거 봤는데?”

“어휴! 그동안 남아 있는 얘들이 어디 있겠어? 안 썩는 네가 이상할 뿐이지, 걔들은 벌써 자연의 집으로 돌아갔단다. 내가 300년을 살고 있지만 너 같은 아이는 첨 본다.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구나.”

은행나무 할머니는 내가 그대로인 게 이상한가 봐요. 할머니는 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예요. 터줏대감으로 지내서 모르는 일이 없었지요.

나는 다시 물었어요

“자연의 집이라고요? 그런 집이 어디 있다고요?”

“세상 만물은 다 자연에서 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흙 속에서 자길래 너도 그렇게 없어지려나 했단다. 흙이 자연의 집이란다.”

“그럼, 흙 속에서 꼭 없어져야 해요? 그런데 전 왜 이래요? 할머니는 오래 살아서 아실 거 아니에요?”

“글쎄다, 보다가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분명한 건 너는 나보다 더 오래 살겠구나.”

은행나무는 그렇게 말하더니 바람에 가지를 털었어요. 이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어요. 10년이 지나도 모든 걸 잊어버린 건 아니었어요.

은행나무 할머니가 많은 이야기를 해 준 덕분이에요. 아무것도 없었던 이곳에 나무가 하나, 둘 생겼고, 다람쥐들도 많이 이사 왔다는 것도요. 또 정원에 꽃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놀러 온다고 했지요.

잠이 안 오면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던 생각이 났어요.

“얘야, 난 네가 처음에 내 앞에 왔을 때 무슨 물건인가 했다.”

“그래서요?”

“모양도 둥근 것이 색깔도 빨간색이어서 예뻤다. 그런데 내 나이테가 많아지는데도 네가 변하지 않아서 마냥 신기했지.”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원을 천천히 살펴보았어요. 정말 10년 동안 공원이 많이 달라졌어요. 저 멀리 입구엔 길쭉하게 생긴 빨간 통이 보여요.

“할머니, 저기 빨간 통은 뭐예요?”

“저건 소원을 적어 넣은 우체통이란다.”

“소원요? 그럼 할머니 소원은 뭔데요?”

나는 궁금했어요.

“그거야 내가 죽으면 흙 속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지. 그것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집이기도 하고.”

할머니는 자연의 집으로 가야 한다고 또 말하는 거예요.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어요. 자연의 집으로 가는 길. 그게 내가 가야 하는 길이라는 것도요.

‘나도 내가 있을 집을 찾을 거예요. 저도 소원을 정했어요.’


공원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어요. 오후에는 유치원 아이들이 뭔가를 관찰하며 오기도 했어요. 서로 허리를 잡고 기차 모양을 만들며 주위를 돌았어요.

내가 있는 곳은 공원의 중앙이에요. 나무 사이로 작은 길들이 나 있고, 울타리가 쳐진 꽃밭에는 노란 국화가 유난히 빛나요. 작은 연못도, 꽃밭도 어우러진 공원엔 전에 없이 활기차 보였어요.

그때 노란 은행잎들이 우산이 되어 뱅그르르 돌며 떨어졌어요. 은행잎들은 하나같이 노래를 불렀어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나는 은행잎에게 물었어요.

“너희들은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은행잎은 노랑 치마를 활짝 펴며 대답했어요.

“땅에 떨어지면 흙이 되어 다시 태어날 거거든.”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어요.

“다시 태어난다고?”

“응, 주위에 있는 나무에 영양분을 나눠 줄 수 있어서 기뻐. 그게 우리가 할 일이야.”

은행잎이 하는 말이 거짓말 같았어요. 영양분을 나눠 준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에요.

“나도 너희들처럼 영양분을 나누어 줄 수 있어? 또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그 소리를 듣던 은행나무 할머니는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었어요.

“빨강아, 그것은 너한테는 어려운 일일 거다.”

“할머니, 왜요?”

“넌 시간이 흘러도 썩지 않아 안타깝구나. 모든 것들은 흙 속에서 썩어야만 새로 태어나는 거란다.”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에요. 다시 태어나는 일도, 영양분을 나누어 주는 일도요. 생각해 보니 할머니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내가 온 뒤로 주변에는 흙이 자꾸만 말라 갔어요. 마른 먼지가 풀풀 날리는 이곳에 풀들이 자라기는 어렵거든요. 그나마 개미들이 주위에 몰려 있다가 얼마 있지 않아 도망가기에 바빴어요.

“우웩! 이 냄새 뭐야? 도대체 뭘 먹었고?”

나는 개미에게 물었어요.

“얘들아, 내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에잇, 저리 가! 네 몸에서 굼벵이 토하는 냄새가 나!”

꽁지를 흔들며 도망가는 개미를 보며 마음이 아팠어요.

“영양분을 주기는커녕 주위에선 아무도 오지 않아.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난 왜 태어났을까?”

예전처럼 흙 깊숙이 꼭꼭 숨어 버리고 싶어요. 그런데 마음대로 숨지도 못해요. 생긴 모양도, 내 빨간 옷도 어딜 가나 눈에 띄기 때문이에요.


2. 넌 하늘을 나는 비행접시야


공원에 처음 오던 날이 생각났어요.

내가 있었던 곳은 어두운 창고 안이었지요. 내 옆에는 젓가락과 종이컵이 하얀 비닐 옷을 입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무젓가락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어요.

“여기서 나가면 어떤 일이 생길까?”

얌전히 포개져 있던 종이컵이 대답했어요.

“호홋, 그러게. 난 말이야, 진짜 내 몸엔 좋은 것만 담을 거야.” 젓가락이 픽 웃으며 비꼬았어요.

“좋은 것만 담는다고? 어떤 거?”

“음, 맑은 공기도 담을 거고, 바람도, 비도 다 담을 거야. 아이들 웃음소리도…….”

그 말을 듣던 젓가락이 궁금해서 물었어요.

“그럼, 나도 너처럼 될 수 있을까? 비는 못 담겠지만.”

“실망하지 마. 너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젓가락이 될 거야.”

젓가락이 몹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어요.

“필요한 일? 뭐?”

종이컵은 주저 없이 대답했어요.

“젓가락이 없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지. 그건 저기 있는 빨강이도 마찬가지일걸. 빨강이가 없다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 줄 수도 없잖아.”

나는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나도 나한테 꼭 맞는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일이 아직 무엇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종이컵이 말한 것처럼 나도 잘할 자신이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마구 설렜어요. 내가 마치 대단한 물건처럼 느껴졌거든요.

“우리 어디든 꼭 같이 다니자.”

종이컵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어요.

“물론이지.”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창고에 얼마 있지도 못한 채 공원에 가게 되었어요.

공원에서 쏟아지는 햇빛은 눈부셨어요. 하얀 꽃이 비가 되어 마구 흩날렸어요. 좁고 어둑한 창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요.

“와! 공기가 달라.”

종이컵과 젓가락도 흥분해서 떠들었어요.

“우와, 이게 말이 되냐고?”

“헉! 눈부셔.”

사람들이 흩날리는 꽃비 사이로 손을 잡고 거닐었어요. 아이들은 풍선을 손에 잡고 깔깔거리며 쫓아다녔어요.

나는 공원을 둘러보았어요.

“얘들아,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어!”

나무 사이로 햇빛이 파고들면서 신비한 길을 만들었어요. 하늘거리는 잎도, 초록 잔디도 공원 안은 온통 푸른 물결로 일렁거렸어요.

종이컵이 아는체하며 말했어요.

“여기는 매일 축제가 열리는 곳이라고!”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사람은 대머리 아저씨였어요. 아저씨는 종이컵이랑 나무젓가락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어요. 그러고는 포개져 있던 나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하나, 둘 나누어 주었지요.

사람들을 이토록 가까이 본 적은 없어요. 내 빨강 옷은 햇빛 속에서 더 반짝반짝 빛이 났어요.

맑은 공기를 담겠다던 종이컵 안에는 검은 물이 담겼어요.

젓가락은 여기저기 음식을 집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나는 셋이 이렇게 꼭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내가 할 일은 음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에요. 사람들이 마주 보며 음식을 먹는 일은 참 행복한 일처럼 느껴졌어요.

“아! 하늘도 맑고, 바람도 시원해!”

나는 공원을 돌아보며 가슴이 벅찼어요. 하늘하늘 바람에 날아오던 벚꽃잎이 종이컵에도, 사람들 머리 위에도 살포시 앉았어요.

나는 잠시 이 풍경이 꿈인가 생각했어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야.”

그 기분도 잠시였어요. 얼마 있지 않아 끔찍한 일이 일어났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띤 채, 나와 친구들을 쓰레기통으로 처박아 버렸어요.

나는 너무 충격이 커서 밖으로 튕겨 나왔어요.

“앗, 이게 뭐야?”

젓가락은 거꾸로 처박혔고, 종이컵도 마찬가지예요. 맑은 공기도, 아이들 웃음소리도 담지 못한 종이컵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어요.

‘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고요.’

아무리 소리쳐도 누구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요.

나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어요. 얼마 있지 않아 이상한 일이 또 일어났어요.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내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게 아니겠어요. 하늘 위로 아득히…….

“으으으, 나무가 빙빙 돌아. 구름이 둥글게 보여.”

모든 게 꿈 같았어요.

“아, 아, 아. 말도 안 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딘가로 자꾸만 날아갔어요. 얼마나 그렇게 날았을까요.

어디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오! 일회용. 넌, 하늘을 나는 비행접시야.”


3. 나는 왜 일회용이야?


아래를 보니 모자를 쓴 꼬마 녀석이 고개를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있어요. 목젖이 다 보여요. 내가 땅에 떨어지자마자 녀석은 바람같이 달려와 어느새 또 공중으로 높이 던졌어요.

“얏, 힘내라고!”

나는 회오리바람이 되어 돌기만 했어요. 어지러웠어요.

“제발, 그만해. 그만하라고!”

몸을 비틀며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그 녀석은 지치지도 않는가 봐요.

녀석이 땅을 구르며 높이 점프했어요. 순간 나는 또 어딘가로 날아갔어요. 그러다가 큰 느티나무 가지에 끼고 말았어요.

“헉, 말도 안 돼.”

아래로 내려다보니 녀석의 동그란 모자만 보였어요. 아찔했어요. 이제는 힘도 없어요. 나뭇가지에 몸이 단단하게 끼여 움직이기도 어려웠거든요. 아래를 내려다보았어요.

“아휴, 떨어질 것 같아.”

나는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더 밀어 넣었어요.

그 녀석은 풍선을 놓쳐 버린 듯 아쉬운 표정을 지었어요. 그러고는 어딘가로 사라졌어요. 어느새 해거름이 밀려오더니 어둠이 내려앉았어요. 공원엔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졌어요.

밤이 되니 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반짝였어요. 별을 닮은 수많은 잎사귀가 파르르 떨릴 때면 내 몸도 따라 떨렸어요. 춥고 외로웠어요. 긴 밤이 계속되었지요.

“하룻밤, 이틀 밤…….”

셀 수도 없는 밤이 지나갔어요. 무성한 잎들은 매일 조금씩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끝이 나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일은 끔찍한 일이에요. 매일 밤 별을 보며 여행을 떠났어요. 그렇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요.

‘종이컵과 젓가락은 잘 있을까? 내가 여기 있을 줄 꿈에도 모를 거야.’

느티나무 뒤에선 매일 쓰레기를 나르는 청소차가 들락거렸지요.

나는 그 소리에 잠을 깨곤 했어요.

청소부들은 플라스틱을 함부로 다루었어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공원을 더럽히기만 하고…… 이게 한 번만 쓰고 100년 동안 없어지지도 않는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또 다른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그러게나 말일세. 일회용 좀 안 만들면 안 되나? 주위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들!”

아저씨는 화가 나는지 페트병을 발로 마구 짓밟았어요. 퍽퍽,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나는 청소부 아저씨들이 하는 소리를 숨죽이며 듣곤 했어요. 이젠 아저씨 눈에 띄면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 페트병처럼 발로 밟아 버리면 나는 그냥 산산조각이 나고 말 거예요. 몸을 더듬어 보았어요. 다행히 몸은 그대로예요.

‘난 아직 아무것도 못 했는데…….’

내 고민은 자꾸만 커졌어요.

공원에는 아침만 되면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어요. 사람들은 마치 뭔가를 버리기 위해 공원에 오는 것 같았어요.

쓰레기통은 꾸역꾸역 사람들이 버린 물건들을 집어삼키기에 바빴어요. 그러다가 밖으로 마구 토해 냈어요.

“꾸에에엑.”

일회용은 이곳에 와서 처음 듣는 말이에요.

‘일회용 젓가락, 일회용 접시, 일회용 컵.’

무엇보다 이런 말이 싫었어요. 생각할수록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에요.

“어휴! 나는 왜 일회용으로 태어났을까? 하루만 사는 인생이 어디 있다고? 근데 청소부 아저씨 말로는 하루만 쓰고, 100년을 그렇게 쓰레기로 산다니 그 말이 정말일까?”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어요.

나는 사람들이 메고 온 빨간색 가방, 빨간 모자, 아니면 빨간 신발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세상엔 빨간색 물건도 많은데 난 왜 하필이면 일회용 접시일까? 쟤네들은 그래도 주인들에게 오래 귀염받잖아.”

나는 공원 앞에 서 있는 소원 우체통이 무척 부러웠어요.

“저곳은 우체통이 서 있는 자리인 것 같아. 하다못해 편지들도 다 갈 곳이 있어. 그런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해.”

생각하면 할수록 큰 바위에 짓눌린 마음이 되었어요.

“누군가 말 좀 해 주면 좋겠어.”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요.

달빛이 유난히 밝아 오던 밤이었지요.

별 하나가 소리 없이 꼬리를 그으며 떨어졌어요. 밤하늘에 별이 떨어지는 일만큼 멋진 풍경은 없을 거예요. 그곳에 가면 어쩌면 내가 고민하는 문제가 풀릴지도 몰라요.

“하늘에 가만히 떠 있는 별도 저렇게 떨어지는데…… 저 별도 집을 찾으러 갈 거야.”

이대로 시간만 보낼 수가 없었어요. 바람이 부는 틈을 타서 땅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있을 곳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순 없어.”

용기를 내자 하나도 두렵지 않았어요.

또 무수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지요. 매일 비가 오는 날을 기다렸어요. 그러다가 나무를 흔드는 천둥소리가 들려왔어요. 바람이 무척 세게 불었고요.

“오늘이 바로 그날이야.”

나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어요. 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바람이 부는 곳을 향해 몸을 비틀었어요. 얼마나 꽉 끼어 있었던지 몸이 빠지지 않았어요.

“빨강아, 힘내라고! 이젠 내려가야 해.”

나는 나뭇가지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어요.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나뭇잎이 후드득 떨어졌어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바람에 휘청대던 몸이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어요.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지요. 바람이 얼마나 센지 얇은 내 몸이 한순간에 바스락거리며 부서질 것 같았어요.


4.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야호! 이젠 됐어.”

나는 그제야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어요. 바람이 데려다준 곳은 바로 지금 있는 이 은행나무 밑이었지요. 정말 다행이었지요.

“여긴 조용하고 아늑해.”

은행나무 밑에선 그래도 잠이라도 잘 수 있어 좋았지요. 시끄러운 청소차 소리도 없어서 좋았어요.

은행나무 할머니는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려 주었어요. 300살이 넘은 할머니에게 물으면 모르는 것이 없었지요. 계절이 지나가는 것도,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할머니가 다 말해 주었어요.

또 하루가 밝았어요.

은행나무 할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요.

“어제 놀다 간 사람들이 쓰레기를 다 가져갔구나.”

“어떻게 알았어요?”

“청소차를 보면 알 수 있거든.”

“역시, 할머니는 모르는 게 없어요.”

초록색 쓰레기통 안에는 할머니 말대로 쓰레기 대신 은행잎들이 소복이 쌓였어요. 아, 참 그 옆에 작은 통도 하나 생겼어요. 이름이 도토리 저금통이라고 적혀 있어요. 도토리 저금통에는 도토리들이 가득 들어 있어요.

부지런한 다람쥐들이 쪼르르 달려와 입 안에 도토리를 힘껏 밀어 넣고 있어요. 그걸 보고 있던 할머니가 생각난 듯이 물었어요.

“빨강아, 세월이 지겹지?”

“네, 나도 할머니처럼 은행알이라도 열렸으면 좋겠어요.”

“호호, 그러냐? 그렇지만 언젠가는 너도 뭔가로 쓰일 거야.”

그 말은 내가 언제나 고민했던 말이었지요.

“할머니, 정말요?”

할머니는 가지를 힘차게 흔들며 말했어요.

“모르긴 해도 일회용이 많이 줄어든 것 같아. 줄어든다는 것은 일회용도 어딘가에 다 쓰임이 있다는 증거거든.”

“정말요?”

“그럼, 앞으로는 너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할머니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어요.

“봐 봐, 공원이 깨끗해졌잖아.”

주위를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계절이 점점 늦가을로 가고 있었어요. 할머니는 재주도 좋습니다. 올해도 열매를 맺었으니까요.

저녁이 되니 어둠이 빨리 찾아왔어요.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어요. 산책 나온 사람들이 허둥대며 공원을 빠져나갔어요.

할머니가 주위를 둘러보며 은행알에게 말했어요.

“얘들아, 큰 비바람이 올 모양이야. 가지를 꼭 붙들고 있으렴. 아직 더 여물어질 때까지 꼭 매달려 있어야 해. 아직은 땅에 떨어지기엔 일러.”

할머니 말이 끝나자마자 바람이 세게 불어왔어요. 은행알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그렇지만 몸이 가벼운 난 언제 날아갈지 모를 일이에요. 지금은 떨어진 은행잎들이 나를 포근히 감싸고 있지만 어떤 일이 생길지 무서웠어요.

바람이 온몸을 할퀴었어요.

“으으으, 또 날아갈 것 같아. 안 돼.”

느티나무 뒤쪽엔 발로 페트병을 밟는 아저씨들이 있어요. 퍽퍽, 하는 소리는 너무 무서운 소리예요.

“이제 그곳으로 가면 어떻게 될지 몰라.”

한바탕 나무를 뽑을 듯한 세찬 바람이 휘몰아쳤어요. 300년이나 굳건히 버틴 은행나무 할머니가 존경스러웠어요.

‘할머니는 대단해. 이 비바람에 버텨 내셨어. 그 많은 은행알도 보호하고 말이야.’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는데 갑자기 몸이 하늘로 치솟았어요. 소용돌이 바람이에요. 바람에 맞고, 비에 맞고 은행잎과 함께 뒹굴었어요.

“아, 어지러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바닥으로 튕기듯 떨어졌어요. 온몸이 아팠어요. 또다시 떼구루루 구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어딘가로 떨어졌어요.

“첨벙.”

“앗, 차가워.”

연못에 노닐던 잉어들이 갑자기 흩어지는 게 보여요.

나는 연못 위에 하늘을 보고 눕고 말았어요. 그러고는 한동안 세찬 비를 맞았어요.

“따다닥. 따 다다닥.”

그래도 물 속이라 다행이에요. 물이 가뿐하게 들어줘서 다치지는 않았거든요.

어디서 잉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어요. 잉어들은 자기 영역을 침범한 내가 신기했던가 봐요. 입을 뻐끔거리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어요.

어느새 바람이 멎고 비가 그쳐 가고 있어요.

내 몸 위를 누군가가 긴 다리로 간지럽히고 있어요.

소금쟁이 한 마리가 느리게 기어 왔어요.

“이 멋진 빨간 배 보라고! 하늘에서 날아왔나 봐.”

곧이어 등이 초록색인 청개구리도 폴짝거리며 올라왔어요.

“아이 숨차!”

청개구리는 다리를 크게 벌리며 누웠어요.

“여기 좀 쉬어 가도 되지?”

나는 어리둥절했어요.

“그럼, 되고말고. 너희들을 만나서 기뻐.”

어디서 날개가 젖은 잠자리가 또 사뿐히 날아왔어요.

“여기서 내 날개 좀 말리고 갈게.”

“응, 얼마든지.”

갑자기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내가 이런 일을 할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에요.

‘봐,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나는 일회용이 아니었다고!’

공원을 향해 힘껏 외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비가 오는 공원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지요. 한동안 친구들은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하나, 둘 물속으로 사라졌어요. 다시 혼자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오늘은 너무 기분이 좋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5. 나를 꺼내 줘


연못에도 둥근 달이 떠올랐어요. 달을 이렇게 가깝게 보다니 신기했어요.

“달이 이렇게 생겼구나.”

나는 하늘이 아닌 물에 뜬 달이 신기해 자꾸 내려다보았어요. 등불이 켜진 것처럼 연못이 환해졌어요.

“오늘 밤은 달 때문에 심심하진 않겠어.”

든든한 친구를 얻은 것 같았어요. 나는 달빛이 비치는 길을 따라 연못 안을 천천히 들여다보았어요. 물속에는 온갖 것들이 엉켜 있었어요.

이 연못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돌에 끼여 흐물거리는 비닐이며, 공도 보였어요. 옆에는 운동화 한 짝이 돌 틈에 끼여 이끼 집을 만들었어요.

작은 피라미들이 신발 안에 오글오글 모여들었어요.

까만 비닐이 물살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소리쳤어요.

“아, 답답해! 물속에서 꺼내 줘.”

그러자 어디선가 물방울이 또르르 올라오더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윽, 숨 막혀.”

“이렇게 사는 건 너무 힘들어!”

연못에서 퍼지는 소리는 원망이 가득한 소리예요. 그 소리가 마음을 마구 두드렸어요.

나뭇잎들은 흐물거리며 녹고 있어요. 은행알도 긴긴 잠에 빠져 있었어요.

연못에서는 밤새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어요.

“집으로 갈 거야.”

“제발, 나를 꺼내 줘.”

잉어들은 그 소리가 익숙해 보였어요. 연못 안은 또 다른 세상이었어요.

할머니 말이 또 떠올랐어요.

‘자연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어. 얘들도 나처럼 길을 잃었을 거야.’

다음 날 잉어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어요.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영차, 이 빨강 괴물을 밀어내자.”

잉어들이 튀어나온 입으로 나를 모서리로 자꾸만 밀었어요.

“그러지 마! 나도 여기 있게 해 줘! 너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단 말이야.”

잉어들은 내 말을 모르는 체했어요.

“쳇, 도움은커녕, 네가 있으면, 물이 자꾸 더러워진단 말이야!”

얼룩무늬 잉어가 모질게 말을 뱉어 냈어요.

“나, 너희들을 안 괴롭힐게.”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빨리 나가!”

나는 잉어에게 소리쳤어요.

“내가 있을 곳이 어딘지 제발 가르쳐 줘.”

“쳇, 웃겨,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그러고는 기어이 나를 연못 밖으로 내동댕이쳤어요.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마.”

땅 위에 다시 올라온 나는 부러운 듯이 바라보았어요.

“집이 있는 너희들은 참 좋겠다.”

잠시였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나는 은행나무 할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어요.

할머니는 가지를 흔들어 반겨 주었어요. 역시 할머니밖에 없어요.


6. 너희 집에 데려다줄게


오늘도 공원엔 새벽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어요. 다른 날보다 더 많이 보였어요.

사람들은 무슨 행사를 준비하느라 술렁거렸어요. 스피커에서는 씨앗을 나누어 준다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때였어요. 은행잎을 헤치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분홍색 리본으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무엇을 찾는 듯 둘레둘레 살폈어요. 양손에는 부삽과 까만 씨앗을 한 줌 쥐고 있어요.

아이는 치마를 나풀대며 바닥에 쪼그려 앉았어요.

“여기가 딱 좋겠어.”

그 아이는 부삽으로 흙을 파냈어요. 씨앗을 묻고는 은행잎 같은 손바닥으로 두드렸어요. 그러고는 치마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내더니 이번에는 연못으로 자박자박 걸어왔어요.

아이 옷엔 김사랑이란 이름표가 달려 있어요.

“어, 빨간 접시다. 왜 여기 있어?”

사랑이는 고개를 갸웃대며 다시 말했어요.

“여긴 네가 있으면 안 돼! 네가. 너희 집에 데려다줄게.”

나는 사랑이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앗, 우리 집이라고? 정말 그런 데가 있다고?’

정말 이런 날도 오는가 싶었어요. 나는 너무 기뻐 넓은 공원을 한 바퀴 떼구루루 구르고 싶었지요. 사랑이는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갔어요.

나는 가슴이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어요.

사랑이는 어딘가로 자꾸만 걸어갔어요.

파란 지붕 천막 아래는 ‘지구를 살리는 재활용’이란 문구가 보여요.

가판대에는 까만색 곰돌이, 나비 모양, 토끼 모양의 핸드폰 걸이도 보여요.

“하아, 내가 좋아하는 곰돌이잖아.”

사랑이는 가까이 다가가 곰돌이를 만지작거렸어요.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가 사랑이에게 다가왔어요.

“곰돌이가 마음에 들어? 이거 다 커피 찌꺼기로 만든 거야.”

사랑이 눈이 커졌어요.

“커피 찌꺼기로 핸드폰 걸이도 만들어요?”

“그럼. 한번 만들어 볼래?”

사랑이가 나를 옆에 밀쳐 두었어요.

나는 불안했어요. 누군가가 또 어딘가로 던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에요. 사랑이를 잃어버릴까 봐 옆에 꼭 붙어 있었어요.

사랑이는 곰돌이 틀에 커피 찌꺼기를 눌렀어요.

아줌마는 사랑이가 만든 곰돌이 틀을 오븐에 구워서 주었어요.

사랑이는 곰돌이가 꽤 마음에 들었나 봐요. 곰돌이를 손가락에 걸고서는 다음 부스로 향했어요.

옆 부스에는 글자 모양이 들어간 가방 전시회예요. 가게 이름은 ‘현수막 가방’이라고 쓰여 있어요.

사랑이는 그 가방이 또 마음에 드는가 봐요.

“이것도 가방이 되는구나.”

사랑이랑 같이 가는 시장 놀이는 재미있었어요.

넓은 광장으로 나갔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더 큰 시장이 열리고 있었거든요.

사랑이는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공원 안은 무척 넓었어요. 사람들이 물건을 파는 풍경은 처음이에요.

사랑이는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필통을 만지작거렸어요.

시장 안에는 없는 물건이 없었어요. 한편 나는 또 걱정되는 거예요.

나는 사랑이를 향해 물었어요.

“언제 집에 데려다줄 거야?”

시장 구경에 정신이 팔려 사랑이는 내게 한 말을 잊어버렸는지도 몰라요.

이제는 여기저기 바람 따라다니는 것도, 굴러다니는 것도 지겨울 뿐이에요. 사랑이가 말한 집에만 데려다주면 내 소원은 이루어지는 걸 거예요.

시장은 너무 넓어서 끝이 안 보였어요.

사랑이가 두리번거렸어요. 무얼 찾는 듯이 보였어요.

“여기 있을 텐데?”

천막으로 지어진 작은 집들이 많아 보였어요. 사랑이 눈이 살짝 흔들렸어요.

“어디 갔지?”

그러더니 사랑이가 나를 흔들며 그곳으로 뛰어갔어요.

“아, 찾았다.”

사랑이는 나를 초록색 지붕이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아담한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대문엔 ‘플라스틱 재활용’이라는 문패가 달려 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었어요. 종이가 사는 집도 있고, 비닐이 사는 집도 보였어요. 순간 연못 속 친구들이 생각났어요.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 생각도 잠시 사랑이는 나를 그곳에 내려놓고는 말했어요.

“이곳이 네가 있을 집이야. 여기 있으면 너도 나중에 예쁜 상품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젠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안 돼.”

말을 마친 사랑이는 사람들 속으로 총총거리며 사라졌어요.

나는 사랑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어요.

‘사랑아. 우리 집에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제 긴 여행이 끝이 났어요. 이 넓은 공원 한 바퀴를 돌아서 이제야 집을 찾았어요. 우리 집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지 또 몰랐던 거지요.

은행나무 할머니 말이 맞았어요. 좋은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거라는 말이에요. 할머니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요.

나는 반대편에 있는 은행나무 할머니를 바라보며 크게 외쳤어요.

“할머니, 제 말 들려요? 그동안 저를 지켜 줘서 고마웠어요.”

바람을 타고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어요.

“빨강아, 잘 가거라.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단다.”

“네,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바람이 불자 은행나무잎들이 서둘러 떨어지는 게 보여요. 깔깔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아득히 들려옵니다. 긴 여행에 너무 지쳤나 봐요. 어느새 잠이 스르르 몰려옵니다.

작가소개 / 양지영

2013년 통일창작공모전 최우수, 여성 조선 문학상 우수로 작품활동 시작. 2021년 해양 스토리 창작공모전에서 우수 받았고, 현재 <크릴 전쟁>이 환경부 우수 환경 도서 100선 선정. 지은 책으로 <카멜레온 원장님의 비밀><달나라의 정원사><크릴전쟁><거제도의 기억, 공저>가 있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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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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