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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롱토롱

  • 작성일 2023-03-31
  • 조회수 1,255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토롱토롱

김다혜

하얀 입김이 눈 앞을 가린다. 길 위에 곤두선 살얼음이 버석거린다. 몸을 웅크려도 덜덜 부딪치는 이를 어쩔 수 없다. 싫어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토롱토롱. 걸음을 멈추고 귓가에 맴도는 소리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시 토롱토롱. 반가운 마음이 솟구쳤다.

나는 멈추었던 다리를 다시 움직였다. 실은 토롱토롱 소리에 교신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시선을 멍하게 두고 정신을 코끝으로 집중시키면, 태양계 끝자락을 뒤로하고 외우주로 나아가는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의 모습이 보인다. 지구의 메시지가 담긴 골든 레코드를 장착한 보이저 1호는 오늘도 초속 17km로 별과 별 사이를 가로지른다.

“보이저 1호, 전방에 부딪힐 만한 건 없어?”

토롱토롱.

“깨끗하다고? 좋아. 분광기에는 이상 없지?”

토롱토롱.

홀로 우주를 탐험하는 보이저 1호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안 봐도 뻔했다. 쌍둥이 탐사선 보이저 2호와는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고, 더 이상 2호와 교신이 어려워진 1호가 같은 주파수를 지닌 생명체를 찾다 158AU나 떨어진 내게 닿은 것이 틀림없었다.

살얼음을 피해 걷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단지에 들어섰다. 동 출입문 앞에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깨를 움츠리고 서 있는 노르쉬 형이 보였다.

“이제 와?”

작업복을 입지 않은 형의 모습은 언제 봐도 낯설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형은 아빠 공장에서 일했었다. 공장에는 형 말고도 다른 외국인 아저씨들이 많이 있었다. 노르쉬 형은 그중에서도 한국말을 유독 잘해 우리 가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찬영아. 사장님 어디 있어? 집에 안 계시던데.”

“몰라. 아빠가 찾아오지 말랬잖아.”

“사장님 꼭 만나야 하는데 연락을 안 받으셔. 오늘도 돈 못 받으면 나 내일부터 길에서 자야 해.”

형은 정말로 지친 듯 보였다. 바깥에 오래 있었는지 까맣고 기다란 속눈썹에는 작은 얼음들이 맺혀 있었다.

“나도 어디 있는지 몰라. 정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빠 보면 나 마주쳤다는 말은 하지 말고. 안 그러면 아빠 화낸단 말이야. 저번에도…….”

나는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노르쉬 형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핸드폰 있지? 사장님한테 전화해 보자, 지금.”

“형이랑 같이 있는 거 들키면 큰일 나는데…….”

“괜찮아. 내가 사장님한테 말할게.”

나는 하는 수 없이 노르쉬 형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형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더니 먼 곳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통화 대기음을 들었다. 나는 마치 잘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머리 위로 노르쉬 형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분을 삭이는 듯한 콧김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토롱토롱. 내 마음을 위로하듯 보이저 1호가 신호를 보내온다.

“안 되겠다. 사장님한테 전화 오거나 집에 돌아오면 나한테 문자 좀 보내 줘.”

“……응.”

형은 메고 있던 가방에서 주섬주섬 검은 봉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봉지 안에 과자 서너 개가 들어 있었다. 근처 슈퍼에서 산 모양이었다.

“이거 먹어.”

“고마워. 그런데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형 하나 가져가.”

형은 망설이다 내가 건넨 과자를 받았다.

“학교에서는 밥 잘 주지?”

“응. 맛있는 거 많이 나와.”

형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 다치거나 상한 데 없나 살피는 것이다. 나는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가.”

“사장님이 또 그러면…… 그땐 나 불러.”

“응. 알았어.”

“그럼 갈게. 또 보자.”

노르쉬 형은 그렇게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그런데 형이 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 사장님 안 미워해. 원래 안 그런 분이었잖아.”

형의 뒷모습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음씨 좋고 불쌍한 형. 그리고 그런 형을 불쌍하게 만든 아빠. 두 사람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형이 준 봉지와 가방을 내려놓고 TV를 켰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썰렁한 집 안을 채웠다. 나는 소파에 누워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시간이 많았다. 학원 갈 일도 없고, 숙제하라고 달달 볶을 사람도 없었다.

토롱토롱.

때마침 보이저 1호가 신호를 보내왔다.

“미안, 아까는 일이 있었어.”

토롱토롱.

“어때, 외계 생명체를 만날 조짐이 보여?”

그때 갑자기 띠디딕, 도어록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였다. 나는 놀라 굳은 채로 아빠를 바라봤다.

“아빠한테 인사도 안 해?”

“…….”

“학교 갔다 오면 가방 제대로 두라 했지. 이건 또 뭐야?”

아빠의 발에 노르쉬 형이 준 봉지가 채였다.

“아, 조금 전에 형이…….”

나는 다급히 입을 가렸다.

“노르쉬가 여길 왔었어?”

“…….”

“너 아까 나한테 전화한 거 노르쉬랑 있을 때 그런 거지?”

아빠의 목소리가 살벌해졌다. 더는 대답할 수 없었다.

“너 이놈 새끼가.”

아빠의 눈에 불이 붙었다. 그렇게 되면 곧 내 눈에도 불이 번쩍한다. 그 열기 때문에 세상이 잠시간 벌겋게 보이고, 목덜미는 태양을 삼킨 듯이 뜨거워져도 숨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열기가 조금씩 사그라든다. 완전히 식으려면 내 방 침대에 누워 한참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보이저 1호에게 말을 걸었다.

“보이저 1호, 대답해 봐. 외롭진 않니?”

“…….”

“무섭진 않아?”

“…….”

“영원히 외계 생명체를 만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보이저 1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노르쉬 형에게 문자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이 도착했다. 계속해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나는 방에서 나와 현관문을 주시하고 있는 아빠를 지나쳤다.

“너 어디 가?”

아빠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곧장 현관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형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형은 신발도 벗지 않고 성큼성큼 아빠 앞까지 걸어갔다. 아빠가 당황해 주춤하는 사이, 노르쉬 형이 아빠의 양팔을 붙잡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장님,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너 내가 집에 찾아오지 말랬지.”

“그 돈 못 받으면 저 쫓겨나요. 사장님한테는 큰돈 아니잖아요.”

“뭐 하는 짓이야. 당장 안 나가?”

아빠가 노르쉬 형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형은 꿈쩍도 안 했다.

“부끄럽지도 않아요? 찬영이도 있는데…….”

그 말에 아빠가 갑자기 노르쉬 형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몰아붙였다. 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당탕, 좁은 탁자에 쌓여 있던 빈 맥주캔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네놈이 뭘 안다고.”

아빠의 거침없는 손에 먼저 지친 건 노르쉬 형이었다.

“사장님, 제발 그만하세요. 저 바보라서 참는 거 아니에요.”

“네놈한테 줄 돈 한 푼도 없어.”

아빠는 형의 팔을 잡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형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활짝 열린 현관문 사이로 형의 흐느낌이 멀어졌다.

“넌 조금 이따가 봐.”

집으로 돌아온 아빠가 날 노려보며 말했다. 쾅 닫힌 화장실 문 너머로 노르쉬 형에게 하는 듯한 아빠의 욕설이 들렸다. 이제 아빠가 내는 소리는 그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안방으로 향했다. 옷장을 열어 보니 엄마가 아끼던 주황색 카디건이 보였다. 엄마가 있을 땐 잘 개켜져 있던 것이 아빠가 헤집어 놨는지 지금은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었다. 나는 옷 틈 속에 숨겨져 있던 종이봉투를 꺼내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아빠는 아직 화장실에 있었다.

조용히 현관문 손잡이를 돌렸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숨을 죽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아파트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정신없이 뛰었다. 길이 미끄럽건 말건 앞을 향해 내달렸다. 발걸음마다 살얼음이 파사삭 튀었다. 갑작스러운 찬 공기에 폐를 꽉 쥐어 잡힌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데도 자꾸만 뒤에서 손이 뻗어오는 것 같아 멈출 수 없었다.

목구멍을 간신히 비집고 나온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그 사이로 노르쉬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

형이 뒤돌아봤다. 울퉁불퉁 부은 눈에 놀라움이 번졌다.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내 형에게 건넸다.

“이거 혹시…….”

“얼른 가. 아빠가 따라 나올지도 몰라.”

“넌 어떡하려고?”

“…….”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형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나랑 같이 갈래?”

형을 따라가면 아빠와 당분간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될까.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나는 가족이니까.”

결국 형의 등을 떠밀자 형은 울음을 참으며 인사했다.

“또 보러 올게.”

발걸음을 서두르면서도 자꾸만 뒤돌아보는 형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형은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사나운 바람과 함께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다. 문득 돈 봉투가 없어졌음을 알고 나를 찾고 있을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느리게 이어졌다. 고르지 못한 보도블록이 자꾸만 운동화 앞코를 가로막았다. 귀에서 쿵쿵 심장의 진동이 울렸다. 그 소리가 마치 아빠의 발소리처럼 들려 어느새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마다 새어 나오는 아득한 불빛들이 까만 우주 속 별 무리 같아 보였다.

토롱토롱.

“보이저 1호, 전방에 부딪힐 만한 건 없어?”

토롱토롱. 토롱토롱.

나는 엄마가 떠나고 노르쉬 형이 수없이 허탕 쳤던 그 길을 따라 뛰었다. 달릴수록 집이 점점 멀어졌다.

저 멀리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걷는 노르쉬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르쉬 형!”

숨이 차서 목소리가 멀리 뻗지 못했다. 다시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갈비뼈 아래가 뻐근해지고 심장이 터지겠다 싶을 때쯤, 형의 외투에 간신히 손끝이 닿았다.

“찬영아!”

형에게 매달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함께 가고 싶다는 말 대신 형의 옷을 꽉 쥐고 놓지 않았다. 노르쉬 형은 그런 내 손을 말없이 끌어 잡았다.

형을 따라 올라탄 버스에는 창문마다 뿌옇게 습기가 달라붙어 있었다. 축축한 창문 유리를 훔쳐내자 손자국 너머로 보이저 1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창문에 기대어 작게 속삭였다.

“나도 너처럼 외우주로 나왔어.”

토롱토롱. 토롱토롱. 토롱토롱. 토롱토롱…….

작가소개 / 김다혜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제3회 밀크T 창작동화 공모전 금상을 받았습니다. 면과 면 사이, 흐릿하지만 날카롭게 존재하는 모서리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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