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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노 엄마와 나

  • 작성일 2023-04-07
  • 조회수 1,38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치노 엄마와 나

최인정

“으아아아악!”

발바닥에 와닿는 기분 나쁜 축축함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되풀이되는 이 끔찍한 상황이 정말 싫다. 그러나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얘가 왜 자꾸 실수를 하나 모르겠네.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가.”

치노 엄마는 치노의 오줌을 닦으며 그렇게 중얼대는 게 전부였다.

“동생이니 네가 이해해야지. 응?”

“얘가 왜 내 동생이야?”

아빠의 넉살에 나는 반사적으로 발끈했다.

“너는 열두 살, 치노는 세 살! 그러니까 동생이지. 그렇지, 치노야?”

아빠는 오줌싸개 치노를 끌어안으며 날 약 올린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어이없다. 아니, 배신감까지 든다. 아빠는 원래 털 달린 동물을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동물을 키워 본 적이 없고, 아빠랑 함께 동물원에 가 본 적도 없다. 일곱 살 때 유치원 견학으로 동물원에 꼭 한 번 가 본 게 다였다. 그런데 아빠가 이토록 치노를 애지중지 싸고도는 모습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처음엔 치노 엄마가 함께 살던 강아지를 데려온다는 사실이 눈곱만큼 좋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치노 때문에 이렇게 찬밥이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똥오줌으로 날 이렇게 기겁하게 만들 줄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래서 치노의 구불구불한 갈색 털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유혹해도 난 끄떡 않는다. 여태껏 한 번도 치노를 안아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절대로 안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치노에게 딱 하나 고마운 게 있긴 했다. 억지로 함께 살게 된 아빠의 아내를 부를 만한 호칭이 애매했는데 다행히 치노가 있어 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치노 엄마’라고 부르게 됐다. “우리 치노, 엄마가 맘마 줄게.” “우리 치노, 응가 했어요?”라며 치노를 어르고 달래는 모습에 그만큼 딱 들어맞는 호칭은 없으니 말이다.

카푸치노를 좋아하는 치노 엄마 때문에 ‘치노’라는 이름을 갖게 된 녀석. 그런 치노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나는 가끔 휴지를 슬그머니 가져다주곤 했다. 언젠가 휴지를 뜯어먹고 있는 치노 모습에 기겁하는 치노 엄마를 보고 이거다 싶었다. 휴지는 치노가 제일 좋아하는 불량 식품인 동시에 치노 엄마가 아주 질색하는 것! 그러니 나는 치노를 위해, 동시에 치노 엄마를 위해 치노 앞에 휴지를 슬쩍 갖다줄 수밖에.

치노 엄마는 요즘 들어 부쩍 구석방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많았다. 뭘 하는지 긴 시간 숨죽인 채 있다가 나오곤 했다. 책을 읽는 건가? 책은 거실 소파나 안방에서 읽어도 될 텐데……. 어떤 날은 지친 표정으로, 어떤 날은 조금 들뜬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도대체 뭐지? 수상한 냄새가 스멀스멀 솟아났다.

치노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 나는 살그머니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탐정이 된 듯 매서운 눈초리로 방 안을 쭉 둘러봤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맥이 빠져 돌아서려는데 책상 한쪽에 끼워 둔 여러 장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연필 스케치 몇 장에 채색까지 다 된 것도 여러 장이었다.

흥, 혼자 꼭꼭 숨어서 한 일이란 게 고작 그림 그리기라니.

처음 만났을 때 치노 엄마는 자신이 삽화를 그린 동화책 몇 권을 내게 선물로 줬다. ‘그림 오현주’를 굳이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꽤 자랑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시큰둥하게 굴었다. 관심 없는 척하며 대충 보고 말았다.

처음으로 치노 엄마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림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구도가 특이하고 색감도 괜찮았다. 흠, 나쁘진 않군. 한참 그림을 보고 있는데 언제 따라 들어왔는지 발치에서 치노가 낑낑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그림을 다시 끼워 놓고 방에서 후다닥 나왔다.

오후 늦게 학원에 다녀왔을 때, 거실 탁자 위에 엉망으로 찢어진 그림이 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치노가 물어뜯은 흔적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내가 구석방에서 본 바로 그 그림들이었다.

“통쾌하니?”

뾰족한 목소리에 뒤통수가 서늘했다. 돌아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의 치노 엄마가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넌 내 그림이 그렇게 하찮아 보이니?”

이게 무슨 소리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치노가…… 딱 봐도 치노가 한 거잖아요.”

“그래, 네가 친절하게 치노 앞에 갖다줬겠지. 언제나처럼.”

얼음물을 마신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것 같니? 집들이 음식에 양념 뿌려 망친 거, 내 커피 머신 고장 낸 거, 현관문 열어 놓고 치노 가출 소동 꾸민 거, 몰래 치노한테 화장지 갖다주는 거.”

“그럼, 지금까지 다 알면서 모른 척했던 거예요?”

“모른 척 안 하면? 서른여섯이나 먹은 내가 고작 열두 살짜리 네 유치한 장난에 때마다 상대해 줘야 할까, 피곤하게?”

순간 나는 말문이 턱 막혀 두 눈만 껌뻑거렸다.

“그 정도 텃세는 괜찮아. 귀엽게 봐줬어. 하지만 이건 좀…… 나도 힘드네.”

바짝 메말라 있던 치노 엄마 목소리가 갑자기 축축해졌다. 내 마음은 다급해졌다.

“하지만, 이건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치노한테 그림 준 적 없다고요!”

“그럼 책상 위에 있던 그림을 치노가 어떻게 가져가서 물어뜯었다는 거야?”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치노한테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나 보죠.”

“지윤서!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니?”

“제가 한 거 아니라고요! 정말이에요! 전 그냥 보기만 했단 말이에요.”

나는 정말 억울했다. 분한 마음에 저만치 쭈그리고 있는 치노를 덥석 들어 올려 마구 흔들어 댔다.

“야, 치노! 말해 봐. 내가 너한테 이거 줬어? 응? 말해 보라고!”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놀란 치노 엄마가 냉큼 치노를 내게서 빼냈다.

“왜 애를 흔들고 그래? 치노 놀라잖아!”

“항상 치노, 치노! 치노밖에 몰라. 아빠도 그렇고 다들 치노만 좋아해! 나한텐 관심도 없고…… 다들 너무해! 으아아앙!”

나는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가슴 저 밑바닥에 숨어 있던 작은 불씨가 화산 폭발이라도 하듯 솟구쳐 올랐다. 예상치 않은 상황이다. 나는 그대로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어 댔다. 그간의 설움이 다 밀려 나왔다.

“나는 뭐 엄마 하기 좋은 줄 알아? 한 번도 안 해 본 일인데 쉬울 리가 있냐고! 너같이 제멋대로에 까칠한 딸, 정말 버겁다고!”

덩달아 치노 엄마도 터져 나오는 눈물로 반격했다.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나도 엄마가 있어 본 적 없어서 모른다고요. 엄마한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엄마라니!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울면서 혼자 잠시 뜨끔했다. 치노 엄마는 눈물 젖은 얼굴로 찢어진 그림을 부여잡고 더 서럽게 울어 댄다. 억울한 마음을 쉽게 누를 수 없는 나도 질세라 울음을 늘어놓았다. 막상막하다.

그러는 사이 치노는 우리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나를 한 번 봤다 치노 엄마를 한 번 봤다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치노가 갑자기 내게로 다가와 울고 있는 내 손을 핥아 준다. 치노 엄마가 아닌 바로 내 손을!

축축한 혓바닥. 왠지 싫지 않다. 나는 그만 치노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치노의 작은 심장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아, 따뜻하다. 치노를 절대로 안아 주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이러고 싶진 않았는데. 마음과는 달리 나는 치노를 더 깊이 꼭 끌어안았다.


피자와 치킨이 쫙 펼쳐진 식탁 위를 보고 나는 어리둥절했다.

“정신없이 달려들어야지, 왜 그러고 섰어? 너 먹고 싶어 노래 부르던 것들 아냐?”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보고 치노 엄마가 새치름하게 말했다. 배달 음식은 안 좋다고 늘 직접 만든다며 법석을 떨던 치노 엄마였다. 지난 두 달 동안 치노 엄마는 어설픈 요리 솜씨로 정체불명의 음식을 만들어 댔다. 치노 엄마에게 단단히 콩깍지가 씐 아빠는 괴상한 맛에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지만, 난 정말 배달 음식이 그립고도 그리웠다.

웬일인가 싶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치노 엄마가 덧붙였다.

“저녁 할 기운도 없고, 지윤서 소원도 들어줄 겸.”

몸속에 있는 눈물을 다 빼고 나서인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피자 한 조각을 들고 오물오물 씹어 본다. 쫄깃쫄깃 짭짜름한 치즈가 고소하다.

“윤서 너, 소이영 작가 좋아하지? 방에 그 작가 책 쪼르륵 꽂혀 있던데.”

갑자기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어 치노 엄마를 바라보았다.

“소이영 작가 새 책이 곧 나올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는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그러다 설마 하는 마음에 눈이 번쩍 떠졌다.

“혹시…… 아까 그 그림이?”

나는 엉겁결에 들고 있던 피자 조각을 툭 내려놓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 바람에 입 안에 있던 것들이 마구 튀었다. 치노 엄마가 인상을 팍 썼다.

“진짜예요? 네?”

“그래! 네가 망친 그림이 바로 그 책에 들어갈 그림들이라고.”

이럴 수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이영 작가의 새 책에 바로 내 앞에 있는 치노 엄마가 삽화를 그리게 되다니.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이번 주 안으로 출판사에 그림 넘겨야 하는데 큰일이다. 밤새워도 모자라겠네.”

나는 갑자기 미안해졌다. 내가 망친 게 아닌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마치 정말 내가 망친 것처럼 미안해지고 후회까지 되었다. 괜히 몰래 들어가서 꺼내 보는 바람에. 그나저나 치노는 대체 어떻게 그 그림을 가져가서 물어뜯은 거지? 소파에서 졸고 있는 치노를 확 째려본다. 나쁜 녀석. 말썽꾸러기. 사고뭉치. 오줌싸개. 엉덩이를 팡팡 때려 주고 싶다.

소이영 작가의 새 작품은 어떤 걸까? 몰래 봤던 치노 엄마의 그림을 떠올려 보면 커다란 나무도 있었고, 버섯 모양 집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궁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치노 엄마는 출판사에서 보내 준 원고를 보여 주지 않았다. 나중에 책으로 말끔하게 단장해서 나오면 보는 게 예의라고 했다. 괜히 자랑만 하고 보여 주지 않는 치노 엄마가 얄미웠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든가.

그 대신 책이 나오면 꼭 소이영 작가의 사인을 받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기대로 할 수 없이 궁금함을 좀 덮어 두기로 했다.

그날 이후, 치노는 부쩍 내 곁에 와서 엉겨 붙는다. 나도 싫지는 않다. 아니, 은근히 좋기도 하다. 치노의 그 복슬복슬 보드라운 털을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동글동글 눈망울도 사랑스럽고. 우리 둘이 소파에서 함께 뒹굴고 있으면 치노 엄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본다.

“치노 너! 엄마 배신하고 그러기야? 응?”

치노 엄마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모른 척 치노는 내 얼굴을 핥아 댄다. 그러면 나는 더욱 보란 듯이 깔깔대고 웃는다.

“공범자들!”

약이 오른 치노 엄마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구석방으로 휑 들어가 버린다.

나는 치노 엄마가 그림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집안일을 도왔다. 치노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소이영 작가의 책에 들어갈 그림이 잘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설거지도 하고 세탁기에서 빨래도 꺼내 널었다. 영 어설퍼서 치노 엄마 손길이 다시 닿게 했지만.


싸르륵싸르륵 아랫배가 아파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숙제를 했다. 저녁 먹기 전부터 조금씩 아파 와서 밥도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래도 배는 고프지 않고 점점 아프기만 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돌아보니 치노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네모난 쟁반을 받쳐 든 치노 엄마가 말없이 다가와 책상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초록색과 보라색 체크가 어우러진 찻잔을 보며 나는 어리둥절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치노 엄마 모습이었다.

“배 아플 때 먹는 묘약이야.”

나는 찻잔 속 노르스름한 정체불명의 차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독이라도 탔을까 봐? 걱정하지 마. 넌 백설 공주가 아니니까.”

속을 긁는 말에도 배가 아파 맞설 기운이 없었다.

“너만 할 때부터 우리 엄마가 타 주던 차야. 나도 그날만 되면 배가 심하게 아프거든.”

앗, 치노 엄마가 알고 있었다니! 밥 먹을 때 찡그린 내 표정을 보고 아빠가 눈치 없이 캐물었다. 대충 둘러댔는데 치노 엄마는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숨기고 싶은 걸 들킨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괜히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왜 두 잔이에요?”

“하나는 내 거. 나도 배 아프거든.”

치노 엄마는 침대에 걸터앉아 태연하게 찻잔을 들었다. 정말 묘약이라도 먹는 표정이었다. 그런 치노 엄마를 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카시아 꿀찬데, 이거 마시면 거짓말처럼 배가 안 아파져.”

순 거짓말! 그래도 나는 속는 셈 치고 차를 마셔 보았다. 차는 몹시 뜨겁고 달았다.

“아니, 둘이서만 뭘 그리 맛나게 마시는 거야? 왜 난 안 줘?”

빼꼼 열린 문으로 아빠가 불쑥 들어섰다. 그 바람에 화들짝 놀란 내 손에서 찻잔이 흔들렸다.

“앗!”

차가 출렁이는 바람에 손이 뜨거워 나는 그만 찻잔을 놓치고 말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찻잔은 쨍 소리도 없이 손잡이가 툭 떨어져 나가 버렸다. 화끈거리는 손은 잊은 채로 입이 쩍 벌어졌다. 치노 엄마가 제일 아끼는 찻잔이라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어머! 어떡해!”

아니나 다를까. 치노 엄마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애 놀라게 그렇게 불쑥 들어오면 어떡해요?”

생각지 않은 말에 눈을 슬그머니 떠 보았다. 치노 엄마가 붙잡고 있는 것은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찻잔이 아니라 나의 오른손이었다.

“괜찮아? 뜨거워서 놀랐지?”

치노 엄마가 내 손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순간, 나는 머쓱하고 난감해졌다.

“어떡하니? 병원 안 가도 될까?”

“괜찮아, 윤서야? 덴 거 아니지?”

치노 엄마에 이어 아빠까지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치노 엄마 손에서 손을 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근데 이거…… 어떡해요?”

내 눈길을 따라 치노 엄마와 아빠가 바닥에 떨어진 찻잔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이거 당신이 제일 아끼는 찻잔 아냐? 스웨덴 여행 가서 사 온.”

“찻잔이야 다른 것도 많은데 뭐.”

치노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한바탕 소동에 치노까지 들어와 깨진 찻잔 주변을 킁킁댔다.

“오, 치노 저리 가. 안 돼.”

아빠가 냉큼 몸을 숙여 깨진 찻잔을 치웠다. 다른 찻잔도 많은데 하필이면 왜 이 찻잔에다 차를 내온 건지. 애지중지하던 찻잔인데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치노 엄마 얼굴을 슬쩍 살폈다. 속마음이야 어떤지 몰라도 정말 괜찮은 듯한 표정이었다.

저녁 내내 싸르륵거리던 아랫배는 어느새 아프지 않았다. 정말로 아카시아 꿀차가 생리통의 묘약인 걸까. 문득 배가 아팠던 게 꿈이었던가 싶었다.

여름 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불볕 속을 걸어 학교에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초록색 표지가 냉장고에서 갓 꺼낸 수박처럼 시원했다.

『짝짝이라도 괜찮아!』, 글 소이영. 그림 오현주. 드디어 소이영 작가의 새 책이 나온 거였다.

나는 책을 덥석 집어 들고 펼쳐 보았다. 소이영 작가의 사인이 있는 속지를 보고 내 입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나는 책을 가슴에 꼭 안고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웠다. 누운 채로 팔을 쭉 뻗어 책장을 후루룩 넘겨 보았다. 좀처럼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치노 엄마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과감한 붓 터치와 다채로운 배색이 인상적인 그림들이었다. 치노 엄마의 삽화는 더운 여름 공기를 뚫으며 가슴을 확 트이게 했다.

“흠, 제법 멋진걸!”

나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감탄이 올라왔다.

마지막 장 속지에 또 하나의 다른 사인이 있었다. 소이영 작가의 사인과는 다른 사인. 바로 오현주 그림 작가의 것이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인과 함께 두어 줄의 글도 적혀 있었다. 이건 뭔가 싶어 벌떡 일어나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은 없어. 하지만 언제나 네 편은 돼 줄 거야.

나는 동글동글한 글씨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 글자들은 물수제비가 되어 내 가슴에 동그란 물결을 만들었다. 나는 애써 목소리를 큼큼대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방에서 나와 소파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 치노 엄마에게 다가갔다.

“약속대로 사인받아 줘서 고마워요.”

나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야.”

치노 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참! 나도 고마워.”

문득 생각난 듯 치노 엄마가 돌아보았다. 난데없이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림 말이야, 다시 그린 게 더 잘 나왔거든. 윤서 네 덕분이야. 그림 망쳐 줘서 고마워.”

“제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나는 다시 발끈했다. 그날처럼 억울함이 불쑥 튀어나왔다.

“여하튼!”

치노 엄마는 얄밉게 생글거렸다. 그 모습에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치노가 악어 인형을 물고 와 내 손바닥에 슬며시 들이밀었다. 던져 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제가 동화 작가 되면…… 그림 그려 줄래요?”

나는 괜스레 악어 인형을 조물거리며 말했다. 치노 엄마가 빨래 개던 손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음, 글쎄. 봐서 글이 마음에 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치노 엄마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쳇, 끝까지 잘난 척이다. 그래도 뭐 괜찮다. 내 글이 마음에 안 들 리는 없을 테니까.

치노 엄마와 나, 잘난 척 하나는 정말 닮았다. 인형을 멀리 던져 주자 치노가 휭하니 달려갔다.

작가소개 / 최인정

처음으로 썼던 치노와 살구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내며 그때처럼 새롭게 설렙니다. 어린이를 향해 말랑한 마음으로 다부지게 걷겠습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바나나핫도그』 『마법 가루를 찾아라』 『동전 먹는 고양이』 등이 있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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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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