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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 개, 살구

  • 작성일 2023-04-07
  • 조회수 1,392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단편)]




파란만장 개, 살구

최인정


“뭘 봐?”

녀석이 턱을 건방지게 치켜들고 이죽거렸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어이, 대답 안 해?”

녀석이 둔한 몸을 일으켜 슬슬 다가오는 듯했다. 단단히 텃세를 부려 볼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 나는 대꾸 없이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갑자기 녀석이 사납게 내 몸 위로 올라탔다. 그러고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새파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심심하셔? 그래서 시비야? 낮잠이나 자라고!”

벌떡 몸을 일으켜 녀석을 내동댕이쳤다. 뚱보 녀석이 날 얕잡아 보게 놔둘 순 없다.

“어쭈, 신고식 한번 제대로 해 볼까?”

녀석은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할 것처럼 등을 곧추세웠다. 그 순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산만 한 덩치의 오락 씨가 들어왔다.

“옹주야! 아빠 왔다.”

기세등등하던 녀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낭창하게 오락 씨에게로 달려갔다. 어울리지 않게 토끼처럼 깡충거리는 꼴이 어이없었다. 그동안 길에서 봐 온 고양이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빠 보고 싶었쪄? 배고프징? 얼른 맘마 줄게.”

오락 씨도 참 웃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혀 짧은 소리라니. 녀석은 밥 소리에 흥분해서 혀를 날름거렸다. 새파란 두 눈이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났다.

“어이, 방랑자! 너도 밥 먹어.”

나를 보고 오락 씨가 그릇을 툭툭 치며 말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선뜻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고양이 사료를 얻어먹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본체만체 녀석은 맛나게 쩝쩝 사료를 먹어 댔다. 저렇게 먹어 대니 뚱보가 됐지 싶었다.

어제저녁, 근처 길모퉁이에서 비에 흠뻑 젖은 채 오락 씨와 마주쳤다. 오락 씨는 처음 본 나를 망설임 없이 끌어안았다.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꼬질꼬질한 나를 품에 안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에고, 찬비를 쫄딱 다 맞고! 감기 들겠네.”

오랜만에 사람 품에 안겨 본 나는 그 포근함에 울컥했다. 그런데 집으로 들어선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바로 저 옹주라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옹주 녀석도 나를 안고 들어오는 오락 씨를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온 나를 향해 못마땅한 기색을 온몸으로 뿜어냈다.

오락 씨는 몽글몽글 샴푸 거품을 내어 냄새나는 내 털을 깨끗이 씻겨 주었다. 얼마만의 목욕인지, 개운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예전에 쓰던 샴푸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향이 꽤 괜찮았다. 오락 씨가 드라이어로 털을 말려 주자 나는 어느새 복슬복슬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뭉치고 눌린 털이 다시 살아나니 어깨가 저절로 쫙 펴졌다.

“방랑자, 어쩌다 길을 잃고 떠돌고 있었냐? 너, 집이 싫어 가출한 거지? 아니면 못생겼다고 버림받았냐?”

가출이라니! 못생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오락 씨가 어이없었다. 알고 보니 오락 씨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선지 제멋대로 꾸며서 생각하고 엉뚱한 말도 잘했다.

“돌아서면 마감이네. 야, 옹주! 아이디어 좀 줘 봐. 아빠 좀 먹여 살려 봐라.”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게 오락 씨였다. 그러면 옹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만 들썩해 보이고는 엉덩이 털을 핥을 뿐이었다.

“어이, 방랑자. 그럼 네가 아이디어 좀 내 봐라. 생명의 은인한테 보답 좀 해 봐.”

생명의 은인? 그 말에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나는 더없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널찍한 아파트에서 최고급 사료만 먹으며 향이 끝내주는 샴푸를 쓰면서 말이다. 값비싼 수제 간식만 먹었고, 나의 옷장은 멋진 디자인의 옷으로 가득했다. 푹신한 침대는 물론 나만의 소파도 있었다. 한마디로 무엇도 부러울 게 없는 상팔자였다.

오락 씨가 슬리퍼를 끌고 나가더니 잠시 후, 커다란 사료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초콜릿색 털의 작은 강아지가 웃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오락 씨는 사료를 듬뿍 담은 그릇을 내 앞으로 쑥 밀어 주었다.

“방랑자! 먹는 게 남는 거야. 어서 먹어.”

뱃가죽이 들러붙을 지경인 나는 못 이기는 척 일어나 사료 몇 알을 입에 넣었다. 그러자 침이 샘솟으며 입맛이 확 돌았다. 나도 모르게 우걱우걱 한입 가득 사료를 욱여넣었다.

“하이고, 엄청 배고팠고만. 그런데 체면 차리고 있었냐. 녀석 배짱 좋은걸.”

오락 씨는 밥 먹는 내 모양새가 재미난다는 듯 웃어 댔다. 옹주는 뭔가 못마땅한 듯 입을 삐쭉이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하고 한 그릇을 싹 비워 냈다. 좀 살 것 같았다.

오락 씨가 틀어 놓은 텔레비전 화면을 본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꿈에서도 그리던 혜린 언니가 화면 가득 나왔다. 아! 혜린 언니. 얼마 만에 보는 모습인가. 나도 모르게 화면 가까이 다가가 애타게 소리쳐 불렀다. 흑흑거리는 울음소리까지 섞여 나왔다.

한 달 동안 얼마나 애타게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마치 1년은 지난 것 같다. 혜린 언니도 날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언니 얼굴이 핼쑥해 보인다. 내가 사라진 이후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서 그럴 것이다. 흑흑.

“방랑자! 갑자기 왜 그래? 너 설마? 혹시?”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어쩔 줄 모르는 내 모습에 오락 씨 눈이 둥그레졌다.

“네, 맞아요. 제가 바로 혜린 언니 동생 마린이에요. 난 방랑자가 아니라고요!”

나는 오락 씨를 향해 소리쳤다. 오락 씨가 내 마음을 알아차리길 바라면서. 그래서 금방이라도 나를 혜린 언니에게로 데려다주길 바라면서.

“방랑자, 너 이 드라마 좋아하냐? 신기하네. 강아지가 드라마를 다 좋아하고.”

“그게 아니라고요! 바보 같은 오락 씨. 난 주혜린 언니 동생 주마린이라고요! 난 방랑자가 아니라고요.”

내 울부짖음에 옹주가 저만치서 키득거렸다. 고소해 죽겠다는 듯 한껏 웃어 댔다. 그런 옹주가 얄미워 나는 그만 울음을 뚝 그쳤다. 오락 씨는 입을 헤벌리고 드라마 속 혜린 언니를 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내 모든 걸 잃게 된 건 바로 그 사람 때문이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콧수염 남자! 혜린 언니 매니저와 동물병원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였다. 그 남자가 아무도 몰래 숨어들어 나를 납치하고 말았다.

그 남자의 집은 30년쯤 묵은 퀴퀴한 냄새와 온갖 벌레들이 득실대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바로 그 콧수염 남자였다. 나를 보며 히죽거리는 얼굴이 끔찍하기만 했다.

“우리 혜린 씨 강아지가 내 손에 들어오다니 꿈만 같구나! 흐흐흐.”

목소리와 웃음소리마저 느끼해서 토할 것 같았다. 견디다 못한 나는 탈출을 결심했다. 밤낮으로 달아날 기회를 엿보았지만, 쓸데없이 꼼꼼한 남자는 틈을 주지 않았다. 구역질을 견디며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아침부터 찾아와 옥탑방 문을 쾅쾅 두드려 댔다. 밀린 석 달 치 방세를 내고 방도 비우라는 말에 콧수염 남자가 흥분했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중에 열린 문틈으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순간, 나는 이때다! 싶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날쌔게 달려 본 적이 없었다. 현관문을 빠져나와 계단을 향해 이를 악물고 달렸다. 5층 옥탑방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계단은 끝이 없었다. 가파른 계단이 무서워 다리가 후들거렸다. 급하게 뛰어 내려가다 그만 헛발질을 하여 계단 아래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오른쪽 앞다리가 욱신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소리치며 따라오는 콧수염 남자를 골목에서 따돌렸다. 전봇대 아래의 찌그러진 상자에 겨우 몸을 숨겼다. 서럽고 무서웠지만 해냈다는 안도감도 컸다. 무시무시한 사생팬의 손아귀에서 죽을힘을 다해 탈출했으니. 하지만 나는 정작 갈 곳이 없었다.

원래 살던 집을 찾아가는 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을 수도 없고, 혼자 버스를 타고 달려갈 수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처 없이 떠돌아야만 했다.

거리에서 마주친 녀석들은 나를 절뚝이라고 비웃었다. 탈출 때 접질린 오른쪽 앞다리를 제때 치료받지 못해 나는 절뚝이가 됐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주마린의 체면이 시궁창으로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를 갈았다. 내 삶을 있는 대로 꼬아 버린 콧수염 남자에게 언젠가는 복수해 주리라 다짐하면서.

“이래 봬도 난 만화 주인공이야.”

내가 인기 탤런트 주혜린의 애견이었다는 사실에 자기도 뭔가 자랑거리가 필요했나 보다. 작년에 『옹주의 사랑』이라는 오락 씨의 만화가 엄청난 인기였다고 옹주는 거드름을 피웠다. 내가 시큰둥하니 별 반응이 없자 옹주는 공주와 비슷한 거라고 냉큼 덧붙였다. 왕의 딸이라고 말이다.

『옹주의 사랑』이 인기를 끌면서 오락 씨도 유명해졌고, 자기도 인기가 많아졌다나 뭐라나. 흥, 나는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인기로 치면 내 꼬리털만큼도 따라올 수가 없을 거다.

혜린 언니와 사는 2년 동안 내 인기는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혜린 언니의 팬들은 나를 끔찍이 아끼고 좋아했다. 그래서 내게 어마어마한 선물을 보내 주곤 했다. 옷이며 신발이며 각종 사료는 물론 간식까지 직접 만들어 보내 주는 팬들도 많았다. 언니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댓글이 달렸다. 예쁘다, 귀엽다는 말이 지겨울 지경이었다.

나는 혜린 언니와 함께 옷을 차려입고 잡지 사진도 찍고 심지어 텔레비전 광고까지 찍었다. 언니와 함께 아파트 광고를 찍으며 나는 엄연히 내 몫의 출연료도 받았다. 자그마치 백만 원이었다.

“우리 마린이 다 컸네. 돈도 다 벌고.”

혜린 언니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뽀뽀를 쪽쪽 해 주던 그날이 생각난다.

내 얘기에 옹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만화에 이름만 등장하는 옹주의 인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못 박아 주었다.

“그러면 뭐 하냐. 지금은 떠돌이 방랑자인데!”

“흥! 혜린 언니가 날 엄청 찾고 있을걸. 조만간 난 원래 자리로 돌아갈 거야.”

나는 한껏 콧대를 세웠다. 금방이라도 그런 일이 생길 것만 같아 모처럼 마음이 들떴다.


“아이, 알았다고요. 이번엔 마감 칼같이 지킬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오락 씨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제멋대로 삐쭉삐쭉 솟은 머리가 가려운지 연신 긁어 댔다. 이 집에 온 지 나흘이 넘었는데 오락 씨가 머리 감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혜린 언니는 하루에 두 번씩도 감는 머리인데. 에고, 더러워라!

“아! 배고파. 밥도 못 먹었는데 아침부터 재촉이네.”

오락 씨는 시커먼 짜장 라면을 세 개나 끓였다. 산만 한 덩치라 그 정도는 먹어 줘야 하나 보다. 고소한 냄새에 침이 고여 쳐다봤지만, 오락 씨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어 치웠다. 온 집에 짜장 라면 냄새만 가득했다.

어어? 오락 씨가 틀어 놓은 텔레비전 화면을 보다가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혜린 언니가 나를 안고 있었다. 인터뷰 장면이었는데 혹시 예전 모습인가 하고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최근에 끝난 드라마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그럼 혜린 언니 품에 안긴 저 강아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나랑 똑같이 생긴 비숑 프리제. 크기도 생김새도 똑같았다.

“드라마 끝나고 우리 마린이랑 같이 맘껏 놀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당분간은 푹 쉴 거예요. 호호호.”

이럴 수가! 마린이는 난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화면 속에서 혜린 언니는 나를 닮은 그 가짜 마린이에게 뽀뽀를 해 댔다. 어떻게 된 일이지? 혜린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내가 사라진 사실을. 저 강아지가 가짜란걸. 아니면 다 알면서도 일부러 저러는 걸까.

나는 그만 멍해졌다. 나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랑 똑같은 다른 강아지를 다시 데려다 키우고 있다니.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커다란 충격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너 같은 거 그리워하고 있을 줄 알았냐. 기다리는 거 좋아하네. 그랬으면 벌써 여기저기 알려서 찾았지. 너 없으면 너랑 똑같은 강아지 또 사서 마린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야! 이제 알았냐? 요 맹추야.”

얼이 빠진 내 옆에서 옹주가 쌤통이라는 듯 깐족거렸다. 나는 있는 대로 성질이 났다.

“뚱보 고양이 주제에 뭘 안다고 쫑알대? 공주도 아닌 옹주 주제에! 내가 모를 줄 알아? 공주랑 옹주가 격이 다르다는걸. 별 볼 일 없는 옹주 주제에 잘난 척 까불기는!”

“뭐? 별 볼 일 없는 옹주 주제? 너 내 발톱 맛 한번 볼래?”

옹주는 내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나도 질세라 옹주의 꼬리를 있는 대로 꽉 물어 버렸다. 옹주는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면서 홧김에 내 온몸에 발톱을 휘둘러 댔다. 몸을 뒤덮은 부슬부슬한 털 때문에 괜찮았지만, 맨살이 드러난 코는 어쩔 수 없었다. 콧잔등에서 피가 나자 나는 참을 수 없어 옹주의 귀를 콱 물었다.

우리의 싸움은 오락 씨가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끝났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를 본 오락 씨는 눈썹이 있는 대로 올라갔다.

“야, 옹주! 새로 온 친구랑 잘 지내야지. 왜 이래? 그리고 방랑자 너! 여려 빠진 우리 옹주를 이렇게 험악하게 대하다니. 너 길에서 순 나쁜 것만 배웠구나. 엉?”

나는 정말 억울했다. 옹주를 여린 고양이로 보는 것도, 내가 성질 고약한 떠돌이 강아지로 찍히는 것도. 옹주는 오락 씨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가증스러웠다. 억울함과 분함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서러운 눈물이 한참 동안 펑펑 쏟아졌다.

“드디어 『빛보다 개살구』 56회 끝!”

오락 씨는 그대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밤새도록 컴퓨터 앞에서 만화를 그리더니 힘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아이고, 먹고살기 힘들다. 마감 때마다 팍팍 늙네! 늙어!”

오락 씨는 누운 채로 천장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귀가 찢어진 옹주는 초저녁에 곯아떨어져 정신없이 코를 골고 있었다. 나는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반창고를 붙인 코가 아릿아릿했다.

“방랑자! 많이 아프냐?”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눈앞에 커다란 산적 같은 오락 씨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녀석! 졸기는. 삶은 원래 고달픈 거야. 너도 알만큼은 알지?”

오락 씨가 반창고 붙은 콧잔등을 살살 어루만져 주면서 말했다.

“너 보니까 작년에 옹주 처음 데려왔던 때 생각나네.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고 살았는지 잔뜩 겁에 질려선 탁자 밑에서 나오지도 않고…… 꽤 오래 불안증에 시달렸는데 요즘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야.”

오락 씨가 측은한 눈으로 옹주를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럼 옹주도 나처럼 길에서 데려온 건가.

“같은 처지니까 서로 토닥토닥해 주며 살아야지. 그래도 옹주가 선배니까 대접도 좀 해 주고. 알았지?”

모로 누워 자는 옹주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비웃음도 거드름도 없는 얼굴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사납게 굴던 녀석이 저렇게 순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음, 방랑자. 살구 어떠냐? 인기 연재 중인 내 만화, 『빛보다 개살구』에서 따와서 말이야.”

뭔 소린가 싶어 쳐다보니 오락 씨가 씩 웃었다. 산적 같은 얼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초승달 같은 두 눈이 꽤 정겨웠다.

“네 이름 말이야. 이제부터 방랑자 말고 살구 어떠냐고. 좋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살구. 나는 낯선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마린이보다는 촌스러운 것 같지만, 방랑자보다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하긴 방랑자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지만. 오락 씨가 싱긋 웃으며 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간질간질함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작가소개 / 최인정

처음으로 썼던 치노와 살구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내며 그때처럼 새롭게 설렙니다. 어린이를 향해 말랑한 마음으로 다부지게 걷겠습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바나나핫도그』 『마법 가루를 찾아라』 『동전 먹는 고양이』 등이 있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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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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