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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이

  • 작성일 2022-09-23
  • 조회수 76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동화(중단편)]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이




손이랑






‘아아, 어떻게 하지. 둘 다 너무 예쁜데.’
나는 원피스를 양쪽에 들고 한숨을 쉬었다. 커다란 장미가 그려진 원피스도 마음에 쏙 들었고, 엄지손톱만 한 초록색 꽃이 그려진 원피스도 마음에 쏙 들었다. 소매를 풍선처럼 부풀린 장미꽃 원피스는 장미꽃다발처럼 보였다. 엄지손톱만 한 초록색 꽃이 잔뜩 그려진 원피스에는 소매와 가슴에 하얀색 프릴이 달려 있었다. 두 원피스 모두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정말 어떻게 하지.’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봄이 되면 입고 가려고 벌써 한 달 전에 산 거였다. 학교에 입고 갈 생각을 하니 설레어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옷장에서 꺼내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나도 모르게 흥흥흥, 하고 콧노래가 나왔다. 그래 오늘은 장미꽃 원피스다. 한껏 부푼 어깨가 내 마음과 같았다. 오늘 여름이 누나가 우리 반에 책을 추천해 주러 온다. 독후감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학생은 반을 돌며 읽은 책 중에 한 권을 추천할 수 있었다. 오늘은 3학년 차례이고, 우리 반에도 여름이 누나가 온다. 장미꽃 원피스를 입고 초록색 꽃 원피스는 겨울 코트 안에 겹쳐서 옷장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방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살폈다. 누나는 학급 임원 모임이 있어 먼저 학교에 갔고 엄마한테만 들키지 않으면 되었다.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엄마를 불렀다.
“어, 화장실에 있어. 왜?”
휴, 숨을 몰아쉬고 뒤꿈치를 들고 빛보다 빠르게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아니, 학교 간다고.”
“알았어. 잘 다녀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
아파트 정문까지 단숨에 뛰었다.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마주치지 않았다. 학교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콩닥거렸다. 현관에서 실내화를 갈아 신을 때 1학년,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다겸이와 하나를 마주쳤다. 어, 박예찬, 하며 이름을 길게 불렀다. 나는 가볍게 안녕, 하고 교실로 향했다. 교실로 들어가 책상에 가방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박예찬, 이 옷 뭐야? 와 나도 갖고 싶던 원피스였는데. 너무 예쁘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짝꿍 윤지가 부러운 듯 한껏 부풀어 오른 어깨를 만졌다. 내가 봐도 나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예쁜 원피스였다.
“그런데 왜 네가 입었어? 이건 여자 옷이잖아, 박예찬.”
윤지가 치맛자락을 잡고 호호호, 하고 웃더니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얘들아, 박예찬 좀 봐. 원피스를 입었어. 글쎄 여자 옷을 입었어.”
반 아이들이 윤지의 말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뭐야! 박예찬, 넌 남자잖아. 저게 뭐야 하며 킥킥거리는 남자애도 있었고, 어머나 세상에 하며 멀찍이 떨어져 귓속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원피스 예쁜데. 예쁜데,라고 속으로 외치면서도 어깨가 자꾸 움츠러들었다.
“박예찬, 예쁜 옷 입었네.”
소라였다. 아이들 속에서 툭, 튀어나와 원피스를 잡은 윤지 손을 쳐 냈다. 소라는 걷기 시작해 어린이집을 다니면서부터 친구였다. 나와 소꿉놀이하고, 인형 놀이도 같이한 친구였다. 내가 왕관에 드레스를 입은 공주를 하겠다고 하면 불만 없이 여왕을 했다. 소라가 윤지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쏘아봤다. 교실 앞문이 열리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모여서 뭐 하는 거니. 자리에 앉아.”
아이들이 흩어져 제자리에 앉았다. 교실을 둘러보던 담임 선생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로 조회가 시작되었다. 담임 선생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띄엄띄엄 아무도 울지 않는 하루, 괴롭지 않은 하루, 모두 즐거운 하루가 되도록 하자는 말이 중간중간 들렸다.
“1교시 국어 시간에 5학년 여름이가 책 추천하러 오는 거 취소되었다. 독감 유행인 것 알지? 당분간 교실 이동 수업도 하지 않는다. 조회 끝.”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누나가 오지 않는다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박예찬.”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분명 교무실로 오라고 하거나 원피스를 입고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하겠지, 생각하니 또 슬퍼졌다.
“원피스 예쁘구나.”
담임 선생님이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어머니가 골라 주셨니?”
“아니요. 제가.”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수업은 재미없었다. 국어도, 음악도 재미없었고 수학은 더더욱 재미없었다. 아이들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힐끔거리고 수군거렸다. 나는 속상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원피스도 예쁘게 입었는데. 어떻게 취소될 수가 있지. 어떻게.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빠져나오는데 소라가 다가왔다.
“쯧쯧. 정말 못 말리겠다. 왜 학교까지 입고 와서 이 난리야. 어이구, 박예찬.”
소라가 혀를 찼다.
“이상해?”
“이상해. 아까는 애들 앞이라 네 편 든 거야. 3학년씩이나 됐으면 이제는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니?”
소라는 마치 우리 엄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소라야, 나는 지금 울고 싶다고. 나 여기가 너무 아파.”
내가 가슴에 손을 얹자 소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름이 누나는 유치원에 원피스를 입고 가 남자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 예쁜 옷이네,라고 말하며 눈물을 닦아 준 사람이었다.
“그것도 그만해. 여름이 누나, 여름이 누나. 귀에 딱지 앉겠어.”
“여름이 누나는 내가 원피스 입은 것 예쁘다고 했어.”
“박예찬. 그만.”
소라와 아파트 건널목에서 헤어졌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엄마가 문 앞에 장군처럼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또 입고 밖에 나갔어! 게다가 학교에! 밖에 입고 나가지 않기로 약속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입고 나갔어!”
“학교에 입고 간 건 처음이잖아.”
담임 선생님이 전화한 게 분명했다. 오늘은 정말 짜증 나게 재수도 없는 날이었다. 엄마 얼굴에 오늘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어,라고 쓰여 있었다.
“수지 엄마가 대표로 전화했어. 혹시 아세요? 예찬이가 학교에 원피스 입고 왔는데.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러더라. 어휴.”
엄마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신발을 벗고 죄를 지은 사람처럼 주춤주춤 방으로 걸어갔다.
“이리 와서 앉아 봐.”
나는 엄마 눈치를 보며 건너편 소파에 앉았다. 엄마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엄마가 불같이 화를 낼 때보다 말없이 앉아 있을 때가 더 무서웠다.
“원피스가 그렇게 좋아?”
엄마 목소리가 좀 전과 달리 바닥에 닿을 듯 낮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엄마도 아빠도 못 입게 하는 건 아니잖아. 집에서만 입어. 그러기로 했잖아.”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어.”
특별한 날? 무슨 날?”
“여름이 누나가 오늘 우리 반에 온다고 했어. 그러니까. 꾸미고 간 거야.”
“세상에. 갈수록 태산이네.”
엄마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꾹 눌렀다.
“그러니까, 여름이 때문에 원피스 입고 학교에 갔다는 말이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다. 너 당장 원피스 벗어.”
“왜? 나는 예쁜 원피스 입는 것 좋아. 여름이 누나도 좋아.”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벗지 못해! 몇 번을 말해. 너는 남자야.”
나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걸었다. 엄마가 방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했다. 나는 베개에 코를 박고 훌쩍거렸다. 휴대전화 벨이 울리고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아, 네. 선생님, 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항상 예쁜 옷은 누나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누나 옷을 두고 싸웠다. 나는 누나의 원피스를 입으려고 떼를 쓰며 울었다. 왜 예쁜 옷은 다 누나가 입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나는 원피스를 입고 방으로 도망가는 나를 따라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옷은 누가 봐도 내 옷이잖아. 빨리 벗어, 박예찬! 저기 청바지가 네 옷이잖아,라고 말하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누나를 향해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바지 입기 싫어. 누나나 입어. 나는 꽃무늬 원, 피, 스가 마음에 든단 말이야. 누나 몰래 옷장을 뒤져 어깨와 배에 프릴이 잔뜩 달린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 보기도 했다. 이렇게 예쁜 수영복을 나는 입을 수 없다니. 그때를 생각하니 또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원피스를 벗었다.
‘나는 원피스가 좋은데. 왜 원피스 입으면 안 되는 거지? 어떻게 내 편은 한 명도 없지?’


아침밥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식탁 앞에 앉았다. 아침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면 어제 일까지 모두 다시 끄집어내어 혼날 것 같았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누나가 손에 얼굴을 괴고 노려보며 말했다.
“학교에 여자 옷을 입고 온 남자애가 있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박예찬, 너였더라.”
나는 대꾸하지 않고 밥만 먹었다.
“너, 지금 내 말 씹은 거지? 엄마, 박예찬 좀 어떻게 해 봐. 학교에서 나, 박예찬 누나인 것 다 아는데.”
“박예진! 조용히! 밥 먹자.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아, 정말 박예찬, 짜증 나.”
누나가 일어나 가방을 메고 현관으로 나갔다. 부서질 듯 꽝, 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밥을 먹다 말고 일어났다. 가방을 메고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아파트 앞 건널목에 소라가 서 있었다.
“오늘은 원피스 안 입었네. 너 바지 좋아하지 않잖아. 특히 이렇게 아무 무늬도 없는 멋없는 옷은 아주 싫어하잖아.”
소라가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았다. 내가 입을 비죽 내밀며 대답했다.
“이상하다며?”
“뭐, 그렇게 이상하진 않아. 생각해 봤는데 예전에도 박예찬은 그렇게 입었더라고.”
나는 소라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울 엄마가 그러는데, 네 취향을 존중해 줘야 한대. 취향은 다 다른 것이니까. 남이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놀리거나 괴롭혀서는 안 된대. 예찬이는 옛날부터 원피스 입는 것 좋아했는데 왜 갑자기 이상하다고 생각하냐고 묻더라고.”
소라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웃었다. 나는 소라가 내 친구라서 정말 행복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박예찬, 너 울어?”
나는 큰 소리로 아아아아, 하고 울었다. 소라가 옛날처럼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일주일 후 담임 선생님이 전화했다. 엄마가 학교에 왔다. 나와 엄마는 나란히 담임 선생님 앞에 앉았다. 엄마는 잔뜩 긴장해 오른쪽 손가락으로 맞잡은 왼쪽 손등을 문질렀다.
“선생님, 우리 예찬이 때문에 곤란하시죠?”
“평소엔 연락도 없던 어머니들이 갑자기 전화를 많이 해서 제가 전화를 받고 있긴 하지만 뭐, 괜찮아요.”
선생님은 재밌는 이야기라는 듯 하하, 하고 웃었다. 엄마는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어마나, 선생님. 우리 아이 때문에 고생 많으셨네요.”
“아닙니다, 어머님.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성교육에 다름에 관한 프로그램을 하나 더 넣기로 했어요. 물론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을 설득하는데 아주 조금 힘들긴 했답니다.”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 목소리가 봄밤에 부는 바람처럼 시원했다. 엄마는 선생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는 예찬이만 좋다면, 괜찮다면 예찬이가 원피스 입고 학교 오는 것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해요. 어머니 생각은 어떠세요?”
나는 너무 놀라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는 놀라서 눈이 커지고 입이 반쯤 벌어졌다.
“어머니. 저는 여자중학교를 졸업했어요. 저는 3년 내내 바지 교복을 입었답니다. 학교 개교 이후 바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제가 최초였어요. 아직도 여전히 치마보다는 바지가 더 편하고 좋아요.”
담임 선생님은 개구쟁이처럼 엄마를 향해 다리를 쭉 뻗었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복잡한 얼굴이었다. 집에 와서도 식탁 의자에 앉아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했다. 저녁이 되어 아빠가 퇴근해도 엄마는 생각 중이었다. 간식을 먹고 텔레비전을 볼 때도 엄마는 생각 중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애들 텔레비전 보라고 하고 우린 산책 다녀올까?”
아빠가 엄마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다 방으로 들어갔다. 옷장 문을 열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꽃무늬 원피스를 만져 보았다. 나흘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옷장 앞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원피스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꽃무늬 원피스를 입으면 안 되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빠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박예찬답지 않게 풀이 죽었어.”
아빠가 나를 안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히고 텔레비전을 껐다. 누나가 아빠, 하고 불만스럽게 부르자 엄마가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엄마한테 들었는데 학교에서 일이 있었다며. 엄마하고 아빠의 결론은, 예찬이 원한다면 선생님 말씀대로 원피스 입어도 된다는 거야.”
“아빠!”
누나가 벌떡 일어나자 엄마가 앉으라고 손짓했다.
“박예진. 너 2학년 때 남자가 되고 싶다고 했어. 남자애들처럼 서서 소변 누겠다고 막 떼썼어. 기억 안 나? 세 번이나 서서 오줌 누다 팬티며, 바지며 다 적셨잖아.”
“아, 아빠, 그 얘기를 지금 왜 해?”
“예찬이를 이해해 주자는 거지. 있는 그대로 봐주자고.”
아빠가 나를 보며 한쪽 눈을 찡끗했다. 나는 다시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너무 좋아 잠이 오지 않아 천장만 보고 누워 있는데 방문이 열렸다.
“박예찬! 꽃무늬 원피스 네가 입어. 나 이 옷 필요 없어.”
누나가 꽃무늬 원피스를 바닥에 툭, 던졌다.


나는 문방구에서 오늘 미술 시간에 사용할 물감을 사고 손톱에 붙일 스티커를 고르고 있었다. 아까부터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문방구 아주머니가 내 옆에 오더니 물었다.
“그런데 너는 여자니? 남자니?”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뒤에서 쏘아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애는 남자고, 내 친구예요.”
문방구 아주머니는 나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런데 왜 원피스를?”
소라가 허리에 손을 얹고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애는 원피스를 좋아하는 남자애예요. 왜요?”
아니, 뭐. 아주머니가 말을 웅얼거리며 물러났다. 계산하는 내내 소라가 옆에 버티고 서 있었다. 소라는 교문을 통과해 교실의 내 자리에 앉을 때까지 호위무사처럼 내 곁에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나를 쳐다보았지만 모여들지는 않았다. 조회 시간이 되고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번 쭉 훑어보더니 빙긋 웃었다.
“오늘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야. 잘 들어야 해. 윤지는 오늘 무슨 옷을 입고 왔지?”
“백설 공주 그림이 있는 스웨터에 청바지요.”
“그럼 재현이는?”
“청바지요.”
윤지와 재현이가 고개를 숙이고 옷차림을 확인했다.
“윤지는 왜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었어?”
“저는 바지를 좋아해요. 편해요.”
“재현이는?”
“저는 바지밖에 없고, 남자니까요.”
제현이가 힘주어 말했다.
“그럼 재현이는 예찬이가 원피스를 입는 게 이상하니?”
“치마는 여자가 입는 건데.”
재현이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바지는?”
“…….”
담임 선생님은 다시 아이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여자라고 치마만 입으라는 법이 없듯이 남자도 바지만 입으라는 법은 없어. 아주 옛날에는 남자도 치마를 입었었어. 남자도 치마를 입을 수 있고, 여자도 바지를 입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예찬이가 원피스를 입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란 말이고 예찬이를 놀리거나 괴롭히거나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야.”
앞문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담임 선생님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말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윤지가 여러 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사실 나는 치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치마 입기 싫은데 엄마가 치마 입어야 예쁘다며 입으라고 할 때가 있는데 사실 싫어. 사과할게. 그때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한 것 미안해.”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담임 선생님 뒤에 여름이 누나가 있었다. 교실 안이 술렁거렸다. 쿵. 쿵쿵. 쿵쿵쿵쿵쿵. 가슴이 마음대로 뛰기 시작했다.
“조용! 저번에 하지 못한 책 추천 지금 할 거야. 짧게 여름이가 책에 관해 이야기할 거야. 바르게 앉아 잘 듣도록.”
여름이 누나가 교탁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5학년 김여름입니다.”
쨍강쨍강. 귓가에서 여름이 누나의 목소리가 한낮 종소리처럼 울렸다. 나는 꽃무늬 원피스를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원피스를 입고 오길 참 잘했어.











손이랑
작가소개 / 손이랑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습니다. 201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이 당선되고, 202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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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태몽 찾으러 왔어요

태몽 찾으러 왔어요 변선아 1. 태몽 때문이야 “4교시는 체육이니까, 수업 종 울리면 축구 골대 앞에 모여 있어요.” “네.” 3학년 1반 아이들은 신이 나서 운동장으로 나갔어요. 성운이는 힐끔 선생님을 봤지요. 성운이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이 활짝 웃었어요. 교실에 남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요. ‘야호!’ 그제야 성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갔어요. 마음은 쌩하고 운동장으로 달려나갔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죠. 성운이는 소아 천식을 앓고 있어요. 절대로 뛰면 안 돼요. 엄마는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담임선생님께 전화해서 성운이가 뛰지 않도록 부탁해요. 운동장에서 하는 수업이 있을 때는 성운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게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몸을 크게 움직이는 활동이 있는 수업에는 미리 선생님이 말했어요. “성운이는 교실에 남아 있을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좋아.” 이뿐인가요? 급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도 먹지 못해요. 천식에 좋지 않으니까요. 의사 선생님은 가끔씩 한두 번 먹는 건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절대 금지’라고 했어요. 어쨌든 지금, 선생님이 그냥 웃기만 했잖아요? 체육 수업에 참여해도 좋다는 말일 거예요. 그동안 교실에 혼자 남아서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오늘은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할 거예요. 조심히 달리면 괜찮겠죠? 성운이에게 소원이 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맘껏 뛰어보는 거예요. 쉬는 시간에 잡기 놀이도 하고 축구도 하고 싶어요. 수업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축구 골대 앞에 모였어요. 물론 성운이도 당당하게 서 있었죠. 곧 선생님이 와서 말했어요. “오늘은 축구를 할 거예요. 성운이는 벤치에 앉아 있을까?” “네? 저도 축구 할 건데요?” 성운이가 실망하며 말했어요. “안 돼. 성운이는 뛰면 안 되니까 친구들 수업하는 걸 지켜보자.” “휴.” 그럼 그렇지요. 성운이는 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축 떨어뜨리며 벤치로 갔어요. “살살이 공성운, 넌 앉아서 공 차는 거나 구경해.” 민찬이가 성운이 뒤에 대고 소리치고는 혀를 쑥 내밀었어요. 성운이는 민찬이가 얄미웠지요. 민찬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어요. ‘살살이’란 별명도 민찬이가 지어준 거예요. 천식 때문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니는 걸 놀리는 거죠. 민찬이와 아이들이 공을 굴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녀요. 그 모습을 보는 성운이 마음은 소금에 절인 배추 같아요. ‘나도 뛰고 싶다.’ 생각할수록 속상했어요. 왜 자기만 천식이 있어서 뛰지 못하는 건지 알 수 없었죠. 지루했던 체육 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에요.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면서 밥을 많이 먹었어요. 벤치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성운이는

  • 관리자
  • 2023-11-10
「어떤 겨울밤」외 6편

어떤 겨울밤 김미혜 눈보라가 휘이잉 몰아치는 밤, 하얀 옷을 입은 눈 아이가 어깨에 소복 쌓인 눈을 털며 들어왔어. 가늘고 새하얀 손을 비비며 추워라, 추워라, 달달 떨었어. 이리 와 불을 쬐렴. 할아버지가 난로에 불을 켰어. 눈 아이 손이 흐물흐물 녹고 발목도 녹고 종아리도 녹았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데 아, 따스해라, 따스해라 입은 녹지 않았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오던 할아버지는 그만 얼어 버렸어. 쨍그랑 찻잔이 깨져 버렸어. 할아버지는 얼른 난롯불을 껐어. 웃을락 말락 철창에서 빠져나온 흰둥이 요리 폴짝 조리 폴짝 배롱나무 뒤로 갈락 말락 잡힐락 말락 마당 밖으로 발을 디딜락 말락 숟가락 내던지며 달려 나와 저놈 좀 잡아라, 할아버지가 소리치면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한테 오지 마, 제발, 제발, 흰둥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도 가, 멀리 가 어둑어둑 붉어지는 논둑을 가로질러 갑니다 흰둥이가 멀어집니다 개와 늑대 사이를 달립니다 울락 말락 웃을락 말락 밤이 옵니다 족제비 일기 기름진 고기 냄새가 닭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요. 삼겹살 한 점이 끌어당겨요. 철커덕 철창문이 닫혀요. 오르락내리락 두리번두리번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힘이 풀려요. 잠잠해지기로 해요. 가만히 기다리면 비상구가 나타날 거예요. 어쩌나, 날이 밝아 오는데 아무 데도 뚫리지 않아요. 닭장 문이 열려요. 할아버지가 덫 안에 든 나를 안아요. 바르르 떨고 있는 나를 자동차에 태워요. 망할 놈의 족제비, 다시 잡히면 안 놔 준다, 욕하며 겁주며 구박하며 풀어 주러 간대요. 잡히기만 해 봐라, 닭이 죽어 나갈 때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잔뜩 벼르더니, 구불구불 강 건너 멀리 놓아 주러 간대요. 큼큼, 냄새를 맡아요. 메모를 해 둬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서는 안 되거든요. 여우양말꽃이 피었습니다 여우 양말을 알록달록 걸어 놓았으니 여우가 오겠지요? 오늘 밤에는 분홍 양말 흰 양말 맘에 드는 양말 골라 신고 발소리 숨기고 신나게 놀다 가겠지요? 양말이 시들기 전에 오겠지요? 우리 집 꽃밭에는 여우양말꽃이 여러 켤레 활짝 피었답니다 민들레 걱정 민들레를 피하려다 개똥을 밟았다 “야, 개똥을 왜 밟아?” “그럼 민들레를 밟아요?” 시 선생님이랑 꽃 보러 가면 내가 아닌 것 같다 개꿈 어둠 속에 툭 던져 놓고 쌔앵 달아나는 자동차를 쫓아가요 “멈춰요! 잊은 게 있어요!” 달려가던 자동차가 지쳐 헉헉거려요 이때다, 가속페달을 밟아요 두 발로 서서 앞을 가로막아요 창문 너머로 뺨을 핥으며 인사해요 “그냥 헤어지는 게 어디 있어요.” 나는 꼬리를 흔들며 보내 줘요 “안녕!” 앗, 이건 꿈이야 깨면 안 돼 나는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알아요 어서 자, 계속 자 번개처럼 꿈속으로 돌아가야 해요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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