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수업
- 작성일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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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수업
공화순
“언어는 어떤 언어나 고요한 자리에 놓고 위하기만 하는 미술품이 아니다”라고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글이 생각난다. 그동안 너무 오래 잊고 살아온 이 말은 문득, 내 언어의 표현에 의문을 가져다준다. 늘 속에 가두고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 숱한 내 감정의 말들이 밖에서 소비되는 대신 안에서 곪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딸애의 병원에 동행하여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통증의 정도를 10단계로 나눠 표정과 함께 구분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인가요? 아주 조금, 이 만큼?” 조절 레버를 움직이며 의사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환자에게 묻는다. 과연 통증의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통증의 단계를 몇 단계로 말할 수 있다면 내 감정의 단계도 말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미처 들었다. 그동안 나는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고, 많이 감추며 살아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람은 살아가며 마치 사소한 물건을 쓰듯 언어를 사용한다. 상황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면서도 감정에 대해선 필요한 만큼 내어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어쩌면 내가 필요에서 내었다가 곧 불필요에서 닫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아, 진짜 화가 나려고 하네.”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 말 한마디는 곧장 상대에게서 외려 두 배의 무게를 얹은 한마디로 되돌려 받았다. “야, 너도 화낼 줄 아니?” 그 순간, 속에서 억눌린 감정들이 나를 책망하는 듯했다. 서러웠다. 감정 표현에는 영 서툴지만, 지금까지 글로 대신하지 않았냐고 위무해 봐도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는다. “나는 우울해. 음, 지금은 3단계 정도?” 소리 내어 말하곤 피식 웃어버린다.
글을 쓰다 보면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애를 먹다가 가장 근접한 말로 대체할 때가 더러 있다. 지금 내 감정이 꼭 그렇다. 엉거주춤 감정을 추스르는 일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을까. 또 눈물을 삼키고 참아가며 애써 삭히려 한 적은 또 얼마던가. 그럴 때 누구에게라도 너무 억울하다, 너무 슬프다며 감정을 내어놓았더라면 조금은 후련했을까?
감정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영어로 ‘이모션(emotion)’의 ‘e’는 에너지를 뜻하고 ‘motion’은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니 감정은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드는 셈이다. 감정의 방향을 잘 잡아준다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 나는 그동안 감정의 동물인 것을 애써 무시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성적인 힘에 많이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자칫 건조한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작정하고 감정수업을 해본다. 날이 꾸물대니 우울하군. 전화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으니 조금 외로운 건가? 외로움 2단계! 이 정도는 참아야지. 어쩌면 감정의 표현이 내게 그리 절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눌러 참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모에게서 보고 자란 대로 참는 게 미덕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떻게 할 말을 다하고 사니?”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그래도 상대방이 속에 무슨 꿍꿍이를 담고 통 입을 열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아이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알려주고 열어주려고 애썼던가? 생각해보니 오히려 아이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에 아예 입을 막아버리는 짓을 했던 것 같다. 그런 일로 하여 내 아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감정 표현에 서툴고 혼자서 말없이 견디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억울해서 울거나 마음 아파서 우는 일조차 용납하지 못했던 옹색한 엄마였다고 생각하니 오늘 내 감정은 궂은 날씨보다 더 우울하다. 우울함 5단계!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일, 내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 대해 조금은 너그러워져야겠다고 마음먹어본다. 그냥! 이 한마디로 모든 일을 눙치는 일을 가장 싫어하면서도 내 감정에 대해 그냥 지나쳤던 일이 너무 많았다. 가장 애매한 대답만큼 모호한 것도 없다. 확실하게 말하라고! 아이들을 닦달하며 채근했던 지난 일들이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래, 내가 그랬지. 내가 나도 모르고서 상대에게만 명확한 답을 얻으려고 했다니···.
우울한 마음을 떨치려 창밖을 보니 단풍을 이고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잔가지를 흔들고 있다. 가을은 이처럼 아름답게 깊어가며 저를 봐 달라고 하는 듯하다. 나는 아침부터 깊숙이 감춰둔 내 감정을 들춰내느라 씻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내 감정이 아무리 소중한들, 누군가와 함께할 수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결국, 나를 위한 감정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기 위함일 뿐이다.
그래, 지금까지 잘 참았다. 이제부터 좋은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고 표현하는 거다. 내 감정이 너무 많이 안에서 묵히고 쌓여 포화상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내 입을 통해 덜어내고 비워야겠다. 나무가 가을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미련 없이 잎들을 털어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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