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 작성일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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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런 이유만은 아닐 테지만 유독 친구들과 수영장이나 대중탕 가는 일을 꺼렸다. 아예 갈 생각도 안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몸에 있는 흉터쯤은 지나온 삶에서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오드리 헵번은 사각턱의 단점을 자신 있게 올림머리로 드러내 자신의 헤어스타일을 만들었고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어쩌면 단점은 스스로 포장하고 숨기느라 극복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내 정강이 흉터를 누가 자세히 볼 일도 없으련만, 감추고 다니느라 반바지도 제대로 못 입었던 어린 시절이 돌이켜보면 상처보다 더 아픈 일이다.
상처를 꿰매고 치료하는 일은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그 상처를 성나지 않게 다독이며 사는 일은 전적으로 내 몫이란 걸 늦게서야 알게 됐다. 이제라도 내 상처를 보듬고 아껴줘야지. 움푹 팬 흉터를 바라보다 크림을 듬뿍 발라준다. 오늘은 페북의 그도 부자유스런 앞니 두 개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다.
세잔의 사과가 되고 싶다
아침마다 사과를 반쪽씩 먹은 지도 꽤 오래됐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기도 하지만 저장성이 좋아 사계절 먹을 수 있어 매일 챙긴다. 이렇게 습관처럼 먹다가 세잔의 사과를 생각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세잔의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사과는 여느 그림과 다른 점이 있다. 일정한 방향을 갖지 않고 어느 시선에도 자유롭다. 그림 속 다양한 사과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 얼마나 한 방향에 치우쳐 살아왔는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또 나를 바라보는 많은 시선이 늘 같은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해 불편했던 사실도 떠올린다.
관심 밖의 일에 대해 유독 무심했던 것은 어쩌지 못하는 내 성향이기도 하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니 상대를 살뜰히 챙기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먼저 다가가는 일이 없으니 말 붙이기 어려운 면도 있어 누군가에겐 차갑게 느껴졌을 것이다. 세상일에 대해 대부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하니 쉬이 어울리기 또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에겐 날카로운 면만 도드라지게 되었나 보다.
보이지 않는 면이 말랑하고 부드럽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알 일이다. 예민하고 치밀할 것 같은 겉과 달리 속이 텅 빈 사실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렇다저렇다, 또 그렇지 않다고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보는 것은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사람을 성급하게 판단한 적이 꽤 많다. 좋게 본 사람에 대해선 금세 맹목이 돼, 뜻하지 않게 상처를 입기도 했다.
나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한 방향의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내가 먼저 편견을 버릴 일이다. 얼마 전부터 내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 대해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 면만 줄곧 바라보던 시선을 바꾸려고 노력한 결과다. 장점 한 가지만 바라보는 맹목도 벗고 단점 한 가지로 멀리했던 사람들에게도 좋은 면을 보려고 애쓴다.
세잔의 사과가 피카소의 입체화로 확장됐듯이 편견에서 벗어나면 관계성도 마땅히 개선될 것이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한 방향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제 난 세잔의 사과가 되기로 했다. 세잔의 그림에서 다양한 사과의 점과 선과 면이 살아 움직이며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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