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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외 1편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191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그날이 오면



민혜




난만한 봄 햇살 속에서 한 유명 연예인의 기사를 읽는다. 계절과 대척되는 죽음에 대한 사연이다. 그는 2019년 뇌졸중 수술을 받은 뒤 스위스에서 지내며 안락사로 마감하길 바라고 있다. 세기의 여심을 흔들었던 프랑스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 얘기다.
알랭은 평소 안락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드러냈다고 한다. 안락사는 가장 논리적이며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특정 나이나 시점부터는 인간이 생명 유지 장치를 거치지 않고 조용히 떠날 권리가 있다고 본 것이다. 마음 정한 그날이 오면 그는 소망대로 스위스에서 생을 마치게 될 것 같다.
내가 안락사란 말을 처음 꺼낸 건 생명이 짙푸르던 시절이었다. 의대생인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죽음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그날 나는 난치병에 걸린 환자가 고통이 극심하여 더 이상 희망이 없을 때, 그리고 자신이 가족들의 짐이 되어 삶을 지탱하기 힘든 상황이 되면 안락사를 하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친구는 대번에 내 말을 잘랐다. 독실한 크리스천인지라 인간이 생명을 좌지우지한다는 게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생의 모든 고통 역시 신의 뜻이므로 감내해야 한다는 거였다. 더 이상 논쟁을 하기가 싫어 그 정도로 일단락을 지었다. 앞일은 알 수 없어도 우린 청춘이었고 죽음이란 저 멀리 있는 추상적 느낌이 더 지배적인 때였다.
죽음 문제에 대해 나는 조숙했던 편이었다. 중학생 시절, 의대생이던 이종사촌 오빠 방에서 봤던 해골의 영향이었을지 모른다. 오빠가 자기 방에 가보라기에 무심히 창호 미닫이를 열었더니 해골이 나를 보고 웃고(해골은 간혹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있었다. 살점이 사라지고 안구가 빠져 버린 섬뜩한 흉상 앞에서 처음엔 충격을 받았지만 나는 이내 말랑거리는 내 살 속에 저런 해골이 내장되어 있음을, 저 형상이 내 미래의 모습임을 깊게 새겼다. 때문인가 삼십 대 이후부턴 여행을 떠날 때면 혹시 모를 유고를 대비해 가족들에게 남기는 유언장을 써 놓기도 했었다.
세월은 흐르고 황혼기에 이르러 남편의 죽음을 맞았다. 남편은 말기 위암으로 사망하기 전 20여 일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지냈다. 입원 당시 의사는 남은 생존을 3개월로 예단했다. 하지만 입원 20일 만에 심정지가 발생했고 수순대로 심폐소생술을 마친 후 인공호흡기를 장착시켜 놓았다. 이런 의식불명이 몇 달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몰라 나는 몹시 애를 태웠다. 퇴원하여 가족 품에서 임종을 맞게 해 주고 싶었으나 그게 불가능했다.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들자 남편의 몸에선 욕창의 증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와 나눴던 옛이야기가 절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생명 유지를 하는 게 과연 신이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생각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저 입장이 된다면 인공호흡기를 거부하겠다고. 미리 그런 조치를 해 두겠다고. 그건 자살이 아닌 최소한의 품격 있는 죽음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데 알아보니 그것도 불법이라는 거였다. 그래도 천동설의 철벽을 지동설이 깨뜨린 것처럼 언젠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한 견해가 바뀌리란 기대를 놓지 않았다.
그 후 10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나라도 존엄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나는 서둘러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을 마쳤다. 앞으로 남은 건 안락사 문제인 것 같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대부분은 병과 함께 장수하다 생을 마감한다. 중환으로 고생하면서도 끝까지 살고 싶은 환자도 있지만 그와 반대되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양쪽 모두 존중돼야 할 것이다. 안락사는 워낙 찬반 논쟁이 뜨거운 이슈라서 어떤 방향으로 결론 날지 모르겠으나 이 문제 또한 점진적인 합의점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안락사 문제를 두고 상충했던 의사 친구를 얼마 전에 만났다. 나는 또 죽음 얘기를 화제에 올렸다. 청춘기엔 막연히 던진 얘기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가 10년 후쯤엔 떠나고 싶다며 희망 연도를 밝히자 친구가 웃음을 날렸다.
“빠르지 않아? 넌 아직 건강하니 좀 더 살아도 될 텐데.”
“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충분히 살 수 있길 원해. 장담할 순 없지만 기왕이면 의식이 비교적 또렷하고 몸도 웬만할 때 집에서 눈감길 희망하고.”
그때에도 몸이 정정하면 어쩔 거냐고 친구가 다그쳤다. 나는 ‘스콧 니어링’*처럼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스위스는 몇 안 되는 안락사 허용국이다. 안락사엔 적극적 안락사와 조력자살이 있는데 전자는 의사가 치사 약을 환자에게 주입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사가 처방해 준 것을 환자가 자기 몸에 주입해 사망하는 거라고 한다. 이 두 가지가 다 허용되는 나라가 있고 한 가지만 되는 나라도 있는데 스위스는 조력자살만 가능하다.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오랜 숙고 끝에 결론을 내린 거라 죽음의 집 ‘블루 하우스’로 들어가는 환자들의 표정은 대체로 평화롭다고 한다. 반면 유가족들은 고인의 죽음 이후 심한 고통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언젠가는 부딪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개개인의 죽음관과 종교관이 결정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나는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알랭 들롱처럼 죽고 싶지는 않다. 적당한 시점이 되고 결심이 서면 스콧 니어링 같이 의사 없이 집에서 서서히 단식하다가 죽음의 과정을 느끼며 생을 마치고 싶다. 하느님께 감사하며,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추억하며 떠나갈 수 있기를 원한다. 이별은 힘들지라도 또 다른 순환의 여정이기에 아무도 울지 않기를 바란다.
하늘 향해 눈부신 하얀 빛을 뿜던 목련이 어느새 맥없이 지고 있다. 이젠 그런 광경도 담담할 뿐이다.


* 스콧 니어링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 80대 중반에 자신의 죽음 방식을 정하고 100세가 된 1983년 음식물을 끊어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았다.









서랍






서랍은 외양이 늘 반듯하다. 오만 잡것을 품고도 시침 떼고 있으니 의뭉하다 해야 할지. 온당치 못한 물건을 숨겨 놔도 발설치 않는 걸 보면 고해사제를 닮았다고 해야 할지.
서랍엔 특정 물건을 넣기도 하나 대부분은 잡동사니가 함께 끼어들게 마련이라 그 속은 미지의 세상이요 수수께끼다. 묵언하는 그 통속을 어찌 알 것인가. 분명 내 손으로 넣었어도 상자의 내용물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건 칠칠치 못한 내 탓만은 아니었다. 사춘기 시절엔 가족들이 내 일기를 훔쳐볼까 봐 책상 서랍에 넣었던 걸 빼내어 옷 서랍 안에 숨겨 놓기도 했었다. 옷가지를 넣은 데다 다른 것을 꿍쳐 넣어도 서랍은 뱃구레가 거늑하여 다 받아 주었다. 서랍은 아나키스트. 서열을 따지지 않고 서로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국경 없는 작은 공화국이다.
서랍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다. 각처에서 사용되는 서랍들이 반기라도 일으켜 저장물을 토해 내면 인간은 혼돈을 넘어 정신 착란 상태가 되어 뭉크의 그림 <절규>의 주인공과 같은 표정이 되고 말 것이다. 서랍이란 잘 정리하여도 예외적인 뭔가가 쟁여져 있다가 이따금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우리 집 가구에도 많은 서랍들이 있는데 어쩌다 그 속을 뒤져 보면 평소 찾던 물건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 얼굴을 내밀곤 했다. 필요할 땐 그렇게 뒤져도 안 보이던 옷핀이며 봉투에 넣어 두고 깜빡했던 비상금, 삼십 년도 더 전에 받은 지인의 손 편지와 카메라 사진들…. 그럴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서랍 세계의 방대한 포용력과 융통성에 감탄한다. 그 내용물들은 소소한 것이든 대단한 것이든 나와 연관되어 있어 거기에 얽힌 시간 속으로 회귀시킨다.
카메라 사진은 1995년 7월 유럽 여행 중에 파리에서 찍은 것인데 앨범들을 없앤 것이 오래전의 일인데도 몇 장이 서랍 속에 숨죽인 채 있었다. 이십여 년 만에 그곳에서 해후한 첫사랑과 세느강 변에서 찍은 사진들. 그것이 나를 잠시 그 시절 그 장소로 데려갔다. 그는 콤비 스타일의 양복을 입었고 나는 까만 바탕에 자잘한 흰색 물방울무늬가 있는 미디 길이 민소매 원피스에 단화를 신었다. 파리 거리에 바람이 불 때면 내 원피스는 폭 너른 플레어스커트 자락을 원 없이 펄럭이며 춤을 추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국의 정취를 한껏 만끽하던 그날의 기억이 영상으로 덮치며 어른거린다. 저 의상을 낙점하기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드레스 숍을 헤매었던가.


서랍 중에서 비교적 자주 열게 되는 건 옷장이나 책상 서랍이다. 그 외의 것들은 어쩌다 열어 보게 된다. 며칠 전 나는 살림을 줄이기 위해 서랍 중에 손이 별로 가지 않던 것을 택해 비워 내려 한 적이 있었다. 몇 년씩 열지 않아도 사는 것에 아무 지장 없었으니 미련 없이 버려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일단 방바닥에 큰 보자기를 펼치고 책장 서랍 하나를 빼내어 엎어 버렸다. 순간 별의별 물건이 다 펼쳐졌다. 생각지도 않은 인조진주목걸이, 손수건, 메모장, 연필 묶음, 줄자, 캔디, 아스피린, 팔목시계…. 그 가짓수의 다양함과 수량에 놀라고 말았다.
버리려고 쏟았건만 막상 눈으로 보니 버릴 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남과 나누기에도 마뜩지 않은 것들.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안 봤으면 모를까 보고 나니 선뜻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당장은 아니어도 놔두면 언제고 쓰일 것들 아닌가. 별것도 아닌 것이 미래완료적인 가능성을 내세우며 손목을 잡았다. 나는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길까 저어되어 다른 책장 서랍 하나는 내용물을 보지 않고 지레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에 쏟아부었다. 이리하여 서랍 하나만 비워지고 나머지는 그 많은 잡동사니를 머금은 채 제자리로 돌아갔다. 흥미로운 건 확인 없이 버린 그 물건들이 없어도 내 일상은 잘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어느 날 나는 손이 덜 가던 또 하나의 가구를 택해 불시에 소탕 작전을 벌일지 모른다. 삶의 종점에서 자신이 정리 못 한 서랍은 온전히 남은 가족의 몫이 아닌가.


서랍 정리를 하다 말고 문득 생각했다. 나 또한 서랍이라고. 물질계와 비물질계가 뒤섞여 이루어진 아주 복잡한 서랍이라고. 나의 뇌리와 가슴 속에도 수많은 것들이 내장돼 있다. 쓰고 싶은 작품의 편린들을 비롯해 삶에서 빚어진 온갖 감정과 편견과 욕망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그러니 나야말로 난해하고도 정리 까다로운 거대한 서랍이라고. 많은 서랍이 그러했듯 내 안에도 있으나 마나 한 것들이 수없이 자리하고 있을 줄 안다. 어떤 것은 당장 내다 버려야 할 것들임에도 몸의 군 때처럼 들러붙어 있다. 보이는 것 하나 정리하기도 이리 힘든데 보이지 않는 거야 더 말해 무엇 할까.
생각해 보면 인생이란 서랍을 채우다가 비우는 일 아닌가 싶다. 채우는 세월은 오랜 기간 진행됐어도 버리는 과정은 번개 작전만이 답이다. 되도록 그 안을 기웃거리지 말라. 흘러간 세월을 뒤돌아보지 말라. 너는 소돔 성의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되고 말 것인즉.
이런저런 소회에 젖어 방 안을 서성이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본다. 거울 속의 내 모습 또한 오만 잡것을 품고도 반듯한 서랍처럼 외양이 멀쩡하다.













민혜
작가소개 / 민혜

1992년 《창작수필》로 등단.
저서 : 『장미와 미꾸라지』,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 『어머니의 불』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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