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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지문」 외 1편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120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물의 지문



이남희




물난리가 뭔지도 모를 때였다. 골목을 지나 마당으로 들이닥친 물줄기가 순식간에 부엌을 삼켰다. 황토물이 툇마루를 넘보자 아버지와 엄마는 허둥지둥 옷가지와 이불을 다락에 밀어 넣었다. 들이친 물길이 급하게 걷어 올린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아 내리며 넘실넘실 방을 점령하더니 차츰 수위를 높여 갔다.
무서운 날이었다. 겁에 질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수재민이 되어 학교 강당 마룻바닥에 담요를 깔고 물 젖은 새처럼 작아진 몸을 웅크려 엄마 옆에 누웠다. 나는 잠들지 않고도 가위눌렸는지 숨이 찼다. 물에서 빠져나왔는데도 여전히 물에 잠긴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눈을 감은 채 엄마 가슴께로 머리를 박았다.
장마는 물의 상처를 남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걷히었다. 한강 둑 밑에 사는 탓으로 해마다 겪는 일이었다. 모처럼 해가 떠서 일어났지만 몸은 무겁고 마룻바닥의 냉기가 등짝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흙탕물이 고인 부엌살림을 꺼내어 수돗가에서 헹구고 닦는 일을 반복했다. 방의 물기가 가시고 바닥이 매끄러워지자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다락에서 이불을 꺼내어 방바닥에 깔았다. 이불은 다행히 젖지 않았다. 축축함이 남아 있는 방에 몸을 눕혔다. 방이 말라 갈수록 벽 얼룩은 벽지의 무늬를 지우며 선명하게 덧무늬를 씌웠다. 물의 지문이었다.
오래된 일이지만 등짝에 남은 마룻바닥의 냉기는 지금도 내 몸 구석구석을 배회한다. 그 시절 새처럼 작아졌던 나는 어른이 되었어도 그날의 냉기가 떠나지 않는 것 같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는가. 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 물의 상처를 잊었다고 행복한가. 물속을 빠져나오던 그때처럼 삶에서 허우적거린 날도 많았다. 쓸려 간 하루가 어둠에 묻힐 무렵이면 방 벼락의 얼룩 같은 슬픔이 해거름에 언뜻거린다. 그 시절 물에 잠긴 집을 빠져나오던 날처럼.
세월이 물 같이 흘렀다. 나는 마치 연어처럼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그때 친구가 보내온 봄 편지를 다시 읽는다. 꽃피우지 못한 봄날의 고뇌가 강에 빠져든 듯 유랑한다. 나의 분신 같았던 친구는 졸업 후 불투명한 앞날의 심산한 마음을 적고 있었다. 난 그때 이미 결혼하여 울산에 살았고 첫아이를 가진 채 시아버님 간병으로 서울과 울산을 오갈 무렵이었다. 그 일을 핑계로 친구의 아픔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책이 물색없이 올라온다. 편지의 서두에서 친구는 어릴 적 낯선 동산에 버려진 후, 문둥이에게 쫓기다가 철조망에 갇혀 공포에 떨던 자신의 꿈 얘기를 전했다. 자기 집을 문둥이들이 들끓는 철조망 둘러진 동산이라 묘사했다. 내가 물에 쫓기듯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물씬했다.
친구는 철조망을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때부터 친구는 술과 물에 중독되었던 것 같다. 냉혹한 현실에 던져진 자신을 가치 없는 미물로 단정해 버린 20대 후반의 고뇌가 가시처럼 돋아나 있다. 그즈음 친구는 서울을 떠나 시골로, 또 다른 도시로 떠돌았다.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의 방황이 마치 겨울날의 억새밭처럼 푸석거린다.
친구에게 베풀던 나의 위로는 오히려 친구의 염증을 더 깊어지게 한 것인지 모른다. 친구가 방황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왜 짐짓 입과 귀를 닫았을까. 어린 시절 물에 베인 기억 때문이었을까. 집 안으로 들이닥치던 물길처럼 회한에 잠긴다. 친구는 15년 전 낯선 도시에서 기어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내 슬픔에만 열중한 나는 속울음만 삼켰었다. 그 후로도 나는 희망 없는 봄, 꽃 피울 수 없는 봄을 호소하던 친구를 섣불리 잊었다. 나의 두려움은 끝내 비굴하였고 내 아픔을 가리는 옹졸한 회피였다.


“불쾌할 정도로 화사한 봄날, 이곳에서는 다행히 개나리 진달래가 만개한 봄날을 직접 느끼지 못해 견딜 만하다. 새로 이사 온 집이 남자 중학교 바로 밑이라, 쉬는 시간을 알리는 음악 종소리 〈엘리제를 위하여〉가 한 시간 간격으로 들려온다. 떠들어 대는 아이들의 소리가 짜증 나도록 무료하다. 건강한 사고를 하는 이들은 봄이 희망적이라 좋다고들 하지만 난 봄이 싫다. 무료해서 싫다. 화창해서 싫다. 배신당해서 싫다. 스물일곱 해 동안 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건강한 희망에 부풀어 작은 청사진을 그리곤 했지만, 번번이 먹칠을 당하곤 하였다. 올봄부턴 아무런 계획 없이 텅 빈 가슴으로 묵묵히 바다처럼 흐르다 날 사랑하는 갯바위를 만나게 되면 외로움을 나누리라.”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청춘의 방황과 체념이 각인된, 꽃피지 못하고 떠난 친구의 유서 같은 봄날을 읽는다. 푸른 바다의 갯바위는 말없이 파도를 끌어안는다. 파도는 때론 사납게 갯바위를 때리지만 부드럽게 갯바위를 품기도 한다. 갯바위는 아주 작은 섬이고 파도는 바다의 외침이다. 거칠게 몸을 부수어 허옇게 쏟아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 엄숙하게 화답하는 삼인칭 ‘그’의 위안이 들린다. 끝까지 걸어가야 보이는 곳, 걸어서는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곳, 그곳에 발끝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면 그물 벗어난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진다. 살아온 삶과 살아가야 할 삶이 파도에 출렁인다. 신의 손길처럼 가난한 몸을 일으켜 주고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그’를 만날 수 있는 곳, 물의 나라에 눈물을 보태며 친구는 속으로 젖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무는 해를 바라본다. 석양빛을 받은 강이 고요하다. 모든 고뇌는 저 강물처럼 차갑고 거칠게 흐르다가 가지런해지는 속성이 있다. 세상을 비추는 강물은 누군가의 마음으로 흘러들다가 눈물처럼 슬픈 영혼을 베기도 한다. 영혼이 마르고 갈라져 황폐해지면 마음속은 작은 바람에도 흙먼지 나뒹구는 사막이 될 것이다. 울음을 터뜨리지 못한 슬픔이 숨어 사는 곳. 거기서 몇 방울의 빗물을 기다려야겠다. 너의 오래된 상처를 다시 읽는 저녁, 물에 베인 나의 기억과 몸에 깃들었던 냉기가 석양에 눕는다.









난설헌, 달꽃으로 피다






바다 앞에 섰다. 바람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눈이 얼얼해지더니 파란 풍경 위에 구름이 내려앉듯 시야가 뿌옇다. 알 수 없는 감정에 오라졌던 기억이 흐려지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더니 경계가 사라진다. 얼보이는 눈앞의 파랑이 선명해진다.
가을을 흠모한 하늘이 묘지 위에 푸르다. 바닷가에서 파랑에 몰두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광릉의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가 푸른 난새(상상의 새)는 구름과 숨바꼭질하며 낮달과 어울린다. 광릉 숲이 마음껏 가을을 환대하고 있다. 싸늘한 달빛 아래 숨져 간 초희의 서러운 삶이 터를 잡은 곳. 삶이 그대로 별이 된 그녀의 사람들, 환대받지 못한 그들을 불러낸다.
스물일곱 해를 살다가 하늘로 오른 초희가 낮달로 나온다. 비취 옥빛 하늘나라에서 애끓던 눈물 거두고 슬픔 없을 곳에서 소요하라 염원하던 동생 허균의 통곡이 잠든 곳. 꽃다웠던 그녀의 오래된 슬픔이 묘지 위에 울타리를 친다. 오른쪽 옆에는 껴안기듯 나란한 두 아해의 무덤이 애처롭다.
난설헌 초희는 시집간 지 삼 년 만에 친정아버지의 객사 소식을 접한다. 스승 같았던 아비를 잃은 다음 해에 어린 딸을 떠나보내고 이듬해 20살에 아들 희윤이 마저 돌림병으로 잃어야 했다. 나지막한 쌍무덤 위에 그녀의 피눈물이 엉겅퀴로 피어났던가. 뼈만 남은 꽃자리에 늦가을엔 서리꽃이 피고 겨울이 오면 눈꽃이 시리게 피어날, 그녀가 묻힌 땅을 내가 밟고 서 있다.
“슬프고 슬픈 광릉 땅이여! 두 무덤이 마주 섰구나, 어린것들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고 있겠지.” 초희의 글에는 자식 잃고 눈물로 쓴 어미의 마음이 새겨 있다. 초희의 죽음과 아해의 죽음을 애도하던 곡비 소리가 광릉 땅에 꺼져 들 때 초목마저 눈 못 뜨고 아파했을 터다. 희윤이를 보내고 난 7년 뒤 자신마저 두 아해의 무덤 윗자리에 누웠다. 강렬한 비애가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조선의 여자로 태어난 게 죄였던가. 묵객이 된 것이 죄 이런가. 15살에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지만 남편은 과거 공부를 핑계로 밖으로 돌고 공방으로 지새는 날이 많았다. 그런 밤에 글을 읽고 님 그리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삭였다. 혹독한 시가살이와 가시에 눌린 듯 고통스러웠던 열두 해를 부여안고 그녀는 달이 뜬 밤 찬 서리에 붉게 졌다. 초희는 안동 김씨 문중 땅에 묻혔으나 그녀의 바람이었는지 의연하게 홀로 묻혔다. 남편 김성립은 초희의 무덤 위쪽에 재혼한 부인과 함께 묻혀 있다. 그녀의 봉분을 쓸어 본다. 달빛이 키운 풀들이 보드랍다.
달로 향하는 발길, 달빛은 길을 열어 그녀를 달 궁에 들였나 보다. 달은 초희와 그녀의 아해를 하염없이 품으며 수많은 날을 빌어 왔으리라. 달 궁에서의 삶을 이미 예견했던가. 어린 시절인 8살 때 광안전 백옥루 상량문을 썼다. 초희는 자신의 상상대로 걱정 없이 달 궁에서 빛으로 내려와 광릉 땅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이슬 속을 노닐고 있을 것이다.


“노을 위의 은빛 창문에서 구만 리 희미한 세상을 내려다보고,
바닷가 문에서 삼천 년 상전벽해를 웃으며 보고 싶다.
손으로 하늘의 해와 별을 돌리고
몸소 구천의 바람과 이슬 속을 노닐고 싶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에 나오는 구절을 나태주 시인이 번역한 부분이다. 달 속에 있다는 전설적인 궁궐 광한전의 백옥루가 그녀의 새 거처가 되었을까. 파란 난새를 타고 구름 속을 날아 백옥루에 앉아 먹을 갈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쓰는 그녀를 그려 본다. 손으로 해와 별을 돌리고 있을 초희를.
노을 위의 은빛 창문은 달의 창문이었을까. 구만 리 먼 곳에서 손으로 해와 달을 돌린다는 아이의 상상! 이 얼마나 우주적인가. 묘지 위에 뿌려지는 별빛은 이미 아이들의 눈빛과 그녀의 눈빛이다. 조카 희윤에 대한 허봉의 애달픔이 묘비명 언저리에 뒤엉켜 있다. 어린 조카의 이름을 부르는 허봉의 목소리가 비파 소리로 감겨들고, 남매의 흐느낌이 파르르 현에 실린다. 희윤의 음성이 작은 무덤 언저리에서 구슬픈 단조를 띠는데 하늘엔 낮달이 형형하다.
어린 자식을 잃은 난설헌은 시 「곡자(哭子)」를 썼다. 두 자식을 연이어 잃은 어미의 통곡과 굴곡진 삶에 저항하는 심정을 아로새겼다. 배 안에 또 아이가 있으나 장성할 날이 있을 것인가 염려하며 피눈물 머금고 노랫소리 삼킨다고 초희는 읊조린다. 예견대로 태중의 셋째 아이마저 지켜내지 못한 탓인지 자신마저 세상을 놓아 버린다. 한 서린 피눈물은 그녀를 베었다. 그녀를 잃은 지 몇백 년이 지났어도 스물일곱 송이 부용꽃이 된 그녀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어미의 원형질이 되었다.
내가 난설헌이 잠든 곳에 이끌린 것은 허균이 쓴 「훼벽사(毁壁辭)」를 접하고 나서였다. 「훼벽사」에는 성정이 현숙하고 문장이 뛰어난 제 누이의 죽음을 접한 황망함과 창자가 뒤틀릴 정도의 아픔이 현현하다. 죽은 누이가 상제의 뜰에서 자유롭길 바라는 허균의 바람이 눈발처럼 날린다. 자기 작품을 다 불태워 없애라는 그녀의 유언이 있었음에도, 허균은 누이의 글을 기억해 내고 찾아서 목판본으로 ‘난설헌 집’을 만들었다. 죽은 사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글에 대한 유언을 남겼다는 것은 사실로 전해진다.


오직 살아 있는 나만이 슬픔 안고서 / 唯生者兮懷悲
높은 하늘 바라보며 창자 뒤틀린다오 / 睇九霄兮回腸
돌아가 소요하소서 / 歸來兮逍遙
상제 뜰 안은 노닐 만하오이다 / 帝之庭兮可以相羊 ”
교산 허균, 「훼벽사(毁璧辭)1)」 중 일부


1) 허난설헌 추모 시.


난설헌의 성정은 솔직함과 당당함이었다. 유학으로 무장한 사림파가 장악하던 미욱한 시대의 자유로운 혜안자로, 억압의 시대에 몇백 년을 관통하여 이상을 실현한 이상주의자였다. 초희는 혼례 후 처가살이가 일반적이던 때 시댁에서 사는 ‘친영제(親迎制)’에 순응한다. 시어머니의 학대로 인한 혹독한 시집살이에서도 남편의 냉대에서 오는 부부 갈등, 남녀 사랑의 감정 표현에는 적잖이 자유로웠다. 그녀는 8살 무렵부터 두보의 시를 섭렵하는 등 습독으로 얻은 해박한 정신세계를 지닌다. 그 정서는 현존의 명제와도 부합하니 그 예지적 선견이 놀랍다.
난설헌의 예술적 감성은 학문을 중시한 집안의 영향이었다. 난설헌은 일찍이 가족은 물론 오빠 친구인 서자 출신 이달에게 학문을 익혔다. 천재적 상상력으로 사물을 은유하고 내면의 정서를 시와 산문으로 경이롭게 표현하였다. 자신이 꿈꾼 이상 세계를 글로 이뤄 낸 것이다. 8세에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어려서부터 두보의 시를 읽고, 『태평광기(太平廣記)』와 같은 책을 즐겨 읽어서 신선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시대는 여성이 학문을 해서는 안 되는 분위기였고, 삼종지도를 내세워 여성에 대한 봉건적 예속이 강화된 시대였다. 하지만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아버지 허엽의 차별 없는 가르침이 난설헌에게 든든한 울타리였다. 그러나 시집간 지 3년 만에 갑자기 부친의 죽음을 맞았고, 그 뒤로 감당할 수 없는 불행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것이 초희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실마리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그녀와 유사한 삶을 산 그 시대의 여인은 여럿 있었다. 허균이 학산 초담에서 이옥봉의 시를 칭송하였다. 그녀는 서녀로 태어나 소실로 살다가 시를 지었다는 것을 빌미로 남편에게 버림받고 차디찬 물속에 몸을 던진다. 기록에 전하지 않는 수많은 여인의 가련한 죽음이 조선의 옹졸한 시대상이었다. 지금도 여성의 앞선 생각이나 정의로운 행동은 남녀를 떠나 권위적인 세력에게 환영받지 못할 때가 많다. 부박한 세상에 맞서 자기 생각을 밝히고 행동하는 일이 여전히 용기가 되고 혁명이 되는 시대라니, 이런 부적한 시대가 언제나 사라질까. 달 지고 우는 꽃은 지금도 보이지 않게 수없이 피고 지는데 “향기로운 난초가 꽃을 피웠는데 그만 시들고 말았습니다. 향기는 여전하지만 이미 생명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향기도 난초와 함께 사라져 갈 것입니다.”
초희 자신을 난초에 비유하며 자기 죽음을 암시한 시구이다. 난초 시와 더불어 「몽유광상산」에도 ‘연꽃 스물일곱 떨기 늘어져 달밤 찬 서리에 붉게 지네’라고 자기 죽음을 암시하였다.
묘 앞에 「곡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비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가을 햇살이 따습다.
신선 세계에 사는 그녀가 낮달로 보인 하루다.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초대받았다고 상상하면서 글을 썼다는 아이, 구름 수레를 타고 궁을 넘나드는 초희, 새처럼 날아오른 그녀를 연모한다. 문인이나 묵객이 죽은 뒤에 상제의 초대로 간다는 천상 누각 백옥루가 그녀가 실제 글로 써서 꿈꾸던 이상향이 아니던가. 붉은 저고리를 입고 아버지인 듯한 선비의 손을 잡고 고개를 한껏 젖혀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는 〈앙간비금도〉 그림 속 소녀가 또렷해진다. “푸른 이무기가 안개를 불어 구슬 나무 궁전을 지었다”는 달 궁 속 백옥루를 자유로이 소요하리라.
그녀를 만나러 달마중 간다. 해가 지고 시려진 하늘 속, 달 창에 등 밝혀지듯 백옥루에 달빛이 들어찬다. 내 눈빛까지 바꿔 버리던 바다와 파랑 하늘이 그날처럼 섞이어 어둠을 받든다. 어둠이 둥근 달을 에워싸니 묵객 그림자 어른거린다. 섬섬한 그녀가 깊은 밤 달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삶을 태워야 피는 꽃이다.













작가소개 / 이남희

2005년 《문예사조》로 수필 등단
2018년도 일신수필상 수상
2019년 찾아가는 북미도서전 위탁도서 선정(『시렁그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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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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