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성재심간기(聲在心間記)」 외 1편

  • 작성일 2022-09-16
  • 조회수 1,061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성재심간기(聲在心間記)



채선후




성(聲). 소리를 듣는다. 바람 소리에 계절이 흔들리고 있다. 계절의 끝을 떨어뜨리듯 분다. 겨우내 차갑고 센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라 해도 눈 오는 날보다 바람 부는 날이 많았다. 얼마 전에 꽃이 피기 시작하여 봄이 왔는가 했더니 바람에 다 떨어지고 없다. 모든 것이 후다닥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거리도 계절의 풍경을 잊어 가고 있다. 풍경을 대신하는 것은 바람 소리다. 떨어진 꽃잎을 날리고, 여름에 푸릇한 나뭇잎을 흔들고, 마른 낙엽을 날릴 때도, 눈 내리던 날, 거리에 가득 찼던 것은 바람이었다. 오늘 밤도 바람이 분다. 잠은 오지 않고 누워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휙휙. 나뭇잎이 바짝 뒤집어졌다 순식간 펴지고 있다. 바람이 콩 볶듯 나뭇잎을 볶아 대고 있다.


밤은 시간을 태우는 화장터다. 어둠이 회색 재가 되어 날린다. 바람 소리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다. 오늘은 태울 것이 많은가 보다. 밤이 태운 재를 휘몰아 다니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훑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위로 풍덩하게 올라간다. 부-우웅. 울림이 굵다. 한 계절 끝날 즈음에 이런 소리를 종종 들었다. 몇 해 바람 소리를 듣다 보니 이젠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와 끝날 때 아주 작지만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계절이 끝날 때 울리는 공기의 진동이 사뭇 마음에 든다. 바람 소리에서 떨어져 나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후두둑. 이 밤이 세차게 부서지고 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불어라. 불어. 더 세게 불어라. 그래서 천지간 너와 나 사이 달라붙을 것을 다 끊어 내라.


재(在). 쌓여 가고 있다. 살다 보면 무엇이든 달라붙는다. 계절이 오고 갈수록 시간이 살처럼 달라붙는다. 나잇살도 꽤나 두터워져 가고 있다. 어디 달라붙는 것이 시간뿐이겠는가. 당장 쓰다 버려지는 알맹이 없는 문장이 컴퓨터에도, 원고지에도 쌓여 가고 있다. 옷장을 열면 입을 것도 없는 옷들이 수두룩하다. 또, 냉장고 냉동실 문을 열면 먹지도 못하고 있는 먹을 것들로 꽉 차 있다. 창고 문을 열면 어떤가. 상자마다 쓰지도 않는 물건이 고이 모셔져 있다. 아이들 학교 다닐 때 기념으로 모아 둔 물건, 언제고 다시 듣겠지 싶어 모아 둔 테이프, 십 년도 더 된 핸드폰, 모두 다 당장 쓰지 않는 건 버린다고 했다가 다시 주워 담아 제자리에 놓아둔 것이 여러 차례 된다. 모두 버려지지도 못하고 쌓여만 간다. 왜 버리지도 못하고 있는가.


심(心). 마음, 마음, 마음 때문이다. 마음은 무엇인가. 내 몸속에 줄어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버려지지도 않는 것이 있다. 떨어지지도 않고 달라붙어 있는 ‘나’라는 생각이다. ‘나’는 고집일 뿐이다. 고집처럼 생각하는 ‘나’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마음이다. 이 ‘마음’이 보이는 것을 조종하고 있다. 마음은 선글라스와 같은 거다. 원래 깨끗하고 맑게 보이던 눈(目) 위에 덧씌워진 색안경인 것이다. 색안경을 걷어 내고 봐야 제대로 된 세상을 보는데 그렇지 못하다.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생각이 바람처럼 여기서 불었다 저리로 불어 간다. 금방 이 생각을 했다가 또, 저 생각이 일어난다는 거다. 모두 다 남는 거 없는 헛된 바람일 뿐이다. 헛된 바람에 자잘한 나뭇잎은 잘 뒤집힌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전이 뜨겁다. 오늘 날짜 지역신문 일면에 기사가 났다. ‘000 군수 후보 확정’ 어제까지 선정이 확실하다고 들었던 모 후보가 선정되지 않았다. 어제까지 다 된 듯 잔칫집이었는데 하룻밤 사이 초상집이 돼 버렸단다. 세상일이 바람에 이리저리 뒤집히는 나뭇잎과 같다. 허망하다. 허망한 생각으로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뒤집히며 들볶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바람이 말한다. 나무를 떠나라고. 그렇지! 어디든 달라붙어 있지 말자. 나무에서 떨어져 훨훨 허공 속을 날아다니자. 나무를 떠나면 되는 거였다. 난 정말 달라붙어 있는 나뭇잎이 되기 싫다. 모든 것을 다 떼 버리고 싶다. 시간이 살처럼 달라붙어 있는 나이도 싫고, 벅찬 생각이 눌러 있는 주름도 싫다. 다 벗어 버리고 싶다. 이 밤을 날아다니는 어둠 속 재가 되고 싶다. 태울 거 없이 남김없이 다 타 버린 재. 얼마나 가볍게 허공을 날아다니는가. 오늘 밤 어둠은 티끌 하나 없는 재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간(間). 떠나보내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버림과 끊음이다. 둘 사이에서는 재가 된다. 그동안 버리지 못하던 짐을 싹 다 태워 가볍게 날아다니는 거다. 무엇을 버린다고 하는가.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사이에 놓인 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차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뾰족하게 튀어나왔던 질투, 성냄, 불만, 미움, 원망 이런 감정을 그때마다 잘라 없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속에서 녹여 없애는 것이다. 어려운 말일 수 있다. 더 쉽게 말하면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사물이 중 어려움 상대가 있다면 이해하고 이해했으면 인정해 주고, 인정했으면 칭찬해 주면 된다. 그러면 마음속 깊이 쌓여 가던 무거움에 불이 지펴져 서서히 타 버릴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마음은 따듯하게 데워지고 내 속은 재처럼 가볍게 날아다닐 것이다.


기(記). 성.재.심.간. 바람 사이를 떠다니던 ‘나’를 쓴 지 벌써 몇 해가 되어 간다. 달력장을 넘기면서 넘기지도 못하고 있는 원고를 원망했다. 내 자신의 한계인가 싶기도 했다. 무엇을 담아야 될지, 어떻게 써야 될지 원고지 넘어가는 소리가 바람처럼 들리기를 바라곤 했다. 성재심간은 어둠 밤 하얗게 태워 버린 한낱 재가 된 지나간 마음일 뿐이다.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면 그뿐인데 작은 마음이 한 켠에 일었다. 혹여 밤을 태우며 쓰고 있는 누군가 있다면 재가 되어 날아가리라.


*이 작품은 옛 산문체인 부(賦)를 잇고자 고심하여 쓴 작품이다. 심전 안중식의 <성재수간도聲在樹間圖>가 주는 감흥과 해마다 듣던 바람 소리가 나무에서 점점 마음을 흔드는 소리가 되어 나를 흔들던 언어들이다. 이를 부(賦)의 창작기법으로 담아내고자 새로운 문체의 시도를 하며 제목 끝에 옛 산문체인 기(記)라 적었다.









소리의 경계






코로나로 거리 두기가 계속되고 있다. 어디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한계치에 도달하고 있는 요즘이다. 공연도 번번이 취소되더니 한계에 이르렀는가. 비대면 공연이라는 것이 생겨 온라인이라는 선을 타고 컴퓨터 화면 속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때 송년특별음악회 소식을 받았다. 물론 직접 공연장에 가서 보는 참여 공연이라 여간 반갑지 않다. 국립남도국악원 진악당에 들어섰다. 잔잔한 강가에 배 한 척이 떠 있고, 뱃사공이 노를 젓고 있는 대형 스크린이 경계가 되어 무대를 가렸다. 스크린에 은은히 번진 먹색 그림을 보니 코로나로 인한 노여움이 가라앉았다. 공연이 시작되려는 듯 조명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몇 해 전 씻김굿을 보았다. 굿마당 공연을 남도석성 한옥 마당에서 멍석을 펴고 했었다. 방송국 촬영까지 할 정도로 제법 크게 펼쳐졌다. 굿거리 한마당이 끝나면 짧게 쉬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동네 주민들이 울금을 넣고 삶은 돼지고기와 김치를 내왔다. 멍석에 풀썩 앉아 김치와 고기를 먹으며 누구는 공연 이야기를, 누구는 동네 어느 집 상(喪)을 당했을 적 이야기를 했다. 또, 누군가는 지난 일을 소회(所懷)하며 누구 장삿날은 날까지 궂어 상여 매느라 고생했던 이야기, 누구는 부모님 장삿날이 생각난다고, 누구는 아부지 보내고 잘해드리지 못한 것이 여직 생각난다고 했다. 모두 멍석에 풀썩 앉아 잔을 주고받으며 저마다 누군가를 저세상으로 보내던 날을 추억했다. 모두 이야기를 들으며 숙연했다가 다시 떠들썩하게 웃었다. 그렇게 망자(亡者)를 보내던 지난 일들과 지금 어느 사이 경계에서 공연은 이어졌다. 어스름하게 시작했던 공연은 어느덧 컴컴한 밤까지 이어졌다. 공연에 모인 사람들도 추임새를 흥겹게 내뱉으며 친해졌다. 굿판은 점점 짙고 애달파졌다. 당골의 소리는 어둠 언저리에 있을 죽은 넋을 초대하는 듯했다. 애잔하게 떨기도 하며 우악스럽게 꺾어지기도 하고, 화통하게 풀어헤쳐졌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소리의 대목이 이야기가 되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당골이 들고 있던 지전이 펄럭일 때는 어둠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환하게 흔들렸다. 마치 죽음이 다시 피어나는 듯했다. 그런 기억이 있어 어둠 속에서 죽음을 승화시키는 당골의 소리가 어떻게 펼쳐지게 될지 기대하며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씻김굿 막이 올랐다. 무대 가운데는 굿청으로 꾸며 놓았다. 병풍 앞에 과일과 떡으로 상이 차려졌고, 병풍 위로 사람 형상의 한지로 만든 넋이 제법 크게 걸려 있었다. 넋이 내려진 무대 오른편에 삼현육각이 앉았다. 주무가 지전을 들고 초가망석부터 펼치기 시작했다. 주무 뒤에는 조무 넷이 앉아서 같이 창을 했다. 초가망석으로 죽은 사람과 먼저 죽은 조상들을 불러들였다. ‘슬피 우는 저 벽궁새야 너는 어이 슬피 우느냐. 죽은 고목이 새순이 나서 가지가지 꽃이 피니 마음이 슬퍼 울음을 우느냐.’ 다음은 손님을 청하는 손굿쳐올리기, 손님굿, 제석굿, 넋올리기, 희설로 이어졌다.


넋올리기는 망자를 달래기 위해 망자 옷을 살았을 때 옷매무새처럼 펼쳐 놓고 지전이나 신칼의 꽃술로 들어 올리면서 무가를 창했다. 희설은 망자가 극락으로 가는 관문을 통과하기를 바라는 축원이다. ‘초제왕은 증광대 왕님이요 명호난 정태봉씨요 탄일은 이월초하루 증광여래 제일이요지옥은 도산지옥 다 지난 경오신미 임신계유 갑술을혜생은 다 초제왕님께 메었으니.’ 이렇게 가창을 하고 씻김으로 이어졌다. 씻김, 고풀이, 길닦음, 액막음까지 이 모든 굿거리가 바로 이어졌다. 출연진들의 제창 소리가 무대를 꽉 채웠다. 삼현육각의 연주는 힘차고 화려했다. 조명도 화려했다. 잠깐 주무자의 대목 소개가 끝나면 굿과 굿 사이 쉼 없이 이어졌다.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다. 공명이라는 것이 있다. 공기의 진동도 원래 가지고 있는 힘보다 더 센 힘이 생길 때가 있는데 바로 공명이다. 공명은 이것과 저것 사이를 비워 두어야 더 크게 진동한다. 감정을 담은 소리도 나아가는 소리와 머무르는 소리가 있다. 나아가는 소리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며, 폭발적이고 앞으로 나아간다. 머무르는 소리는 감정을 포용하며, 감정을 안으로 끌어당기며, 옆으로 퍼진다. 그 둘 사이에 경계라는 것이 있다. 즉 경계와 경계 사이는 공명을 위해 비워 두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잘못 틀었을 때 혹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방향을 틀 때 제대로 잘 틀어 가기 위함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교차점이 막다른 골목에서 차 방향을 돌릴 수 있게 회차(回車) 구역을 비워 두는 것과 같다. 특히 씻김은 경계에 선 소리다. 이승과 저승, 머무름과 나아가는 소리 사이의 경계 말이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육신을 쉼 없이 움직였는가. 또 얼마나 부질없음을 쫓았는가. 씻김의 자리는 쉼 없는 육신을 위해, 부질없음을 멈추게 하는 자리여야 한다.


경계에 있는 소리는 가라앉혀 주는 소리여야 한다. 무엇을 가라앉혀야 하는가. 우리는 본래 가지고 있던 맑은 마음을 허망한 것을 쫓으며, 네 것과 내 것 분별로 얼마나 많이 남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쉼 없는 그릇된 생각으로 먼지처럼 날아갈 덧없는 것만 쌓으며 살지 않는가. 이러한 그릇된 생각과 허망한 생각도 어느 정도 한계에 이르면 가라앉히고 그치게 할 때가 자연적으로 맞게 되는데 그것을 죽음이라면 죽음이고, 쉼이라면 쉼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또 다른 방향을 맞아들이고 멈추고 가라앉히는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경계를 맞게 된다. 나는 씻김을 경계에 있는 소리라 하고 싶다. 경계에서는 잘못, 그릇됨의 방향에서 살았던 이승의 삶을 잘 회차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잘 틀어 다가오는 다음 세계에서는 맑고 좋은 세계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소리에서 경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살면서 이것과 저것, 옳고 그르다, 좋다 나쁘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이 분별하며 사는가. 죽었다고 죽은 것이 아니고 생겼다고 그것이 아예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생김과 없어짐의 소리가 동시에 함께 공존하는 울림이라 하고 싶다. 섞여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소리가 되기 위해 힘이 생겨나는 공간이라 하고 싶다. 마치 공명이 일어나는 곳이라 하고 싶다. 이런 소리는 꽉 차 있으면 안 된다. 적당히 비어 있어야 한다. 씻김처럼 삶과 죽음. 경계와 경계 사이는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없이 멈춰 버린 것이 아니다. 경계와 경계의 비어 있음은 멈칫 서서 다음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준비가 있어야 더 새로운 힘이 생기지 않겠는가.


난 씻김굿 공연에서 지금의 무거움을 털고 다음을 이어갈 수 있는 비어 있음, 멎음의 소리이길 원한다. 씻김굿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둠과 밝음이 주는 두 경계 사이 빔, 멈춤이 공명이 되어 더 세게 잠들어 가는 세포를 깨워 주리라. 주무(主舞)의 하적 소리가 공명이 되어 울렸다.
‘하적이야. 하적이로구나. 가세 가세 베 거둬 가세. 씻김 받고 세왕을 가세. 인제 가면 언제 가요. 동방화개 춘풍시의 꽃이 피거든 오시라요.’ 공연은 끝났다. 돌아오는 길 내내 하적 소리가 귀에서 공명처럼 울렸다. 어둠은 밤의 경계를 감싸기라도 하듯 까맣기만 한 밤이었다. 오는 길에 일행과 저마다 공연에 대해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늦은 밤길 가로등이 길가 경계선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고맙게도.













채선후
작가소개 / 채선후

2013년 《에세이스트》 등단. 2011년 한국불교문학신인문학상, 202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선정
저서 『십오 년 막걸리』, 『문답 대지도론』, 『머뭄이 없는 가르침』, 『마음 비행기』, 『기억의 틀』, 『Mind Glider』, 『Waiting For The First Snow』, 『진도, 바람소리, 씻김소리』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추천 콘텐츠

「스케치하는 시간」외 1편

스케치하는 시간 류미월 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 6H, B, 2B, 3B ...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 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

  • 관리자
  • 2023-11-15
눈 오는 날의 기호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