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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시간이 있는가?: <화차>

  • 작성일 2022-09-23
  • 조회수 1,39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그녀에게 시간이 있는가?: <화차>



유서연




8억 원의 생명 보험금을 타기 위해 2019년 6월 경기도 가평의 계곡에서 내연남과 짜고 남편에게 고의적으로 다이빙을 시켜 익사하게 한 혐의를 받았던 이은해. 그녀와 그녀의 내연남은 2021년 12월 1차 검찰 조사를 받고 그대로 도주했다가 4개월만인 2022년 4월 경찰에 검거된다. 이후 이은해의 과거 행적이 세간에 드러났는데, 그녀는 신분을 바꿔 가며 여러 남자와 결혼을 하고, 전남편들은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은해는 2022년 1차 검찰 조사를 받은 후 잠적하여 공개 수배가 내려지자, 성형 수술을 받아 페이스오프를 도모했다고도 한다. 혹자는 이은해를 이름도 가짜, 신분도 가짜, 얼굴도 가짜인 여자의 삶과 살인을 다룬 영화 <화차>의 주인공에 빗대기도 했는데, 이 비교의 과정에서 팜므파탈이라 불리는 여자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의 공포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들에게 이은해와 <화차>의 여주인공은 모두 이해 불가한 희대의 악녀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이해와 비교가 합당한지, 그리고 이 비교가 영화 <화차>를 잘 이해한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묻고 싶다. 자발적인 ‘가짜’의 인생과 비자발적인 상황에 내몰려 산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서의 ‘가짜’가 어떻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영화 <화차>는 선영과 문호가 결혼을 앞두고 남자의 부모님 댁에 인사드리러 내려가던 중 휴게소에 잠시 들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커피를 사 가지고 온 문호 앞에는 텅 빈 자동차만이 남아 있다. 선영의 휴대폰은 꺼져 있고, 서울에 있는 급하게 나간 듯한 선영의 집은 텅 비어 있다. 문호는 약혼녀인 선영을 찾기 위해 강력계 형사 출신의 사촌 형 종근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그들은 선영의 은행 잔고가 모두 인출되었고, 그녀가 살던 집의 지문까지 지워져 있음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문호는 선영의 고향인 제천에 내려가,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녀의 동창들의 도움을 받아 선영의 졸업사진을 확인하지만, 사진 속의 선영은 문호가 알던 사람과는 다른 인물이다.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어머니가 실족사를 하고,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 5,000만 원을 들고 사라진 ‘진짜 선영’은 왜 자취를 감추었을까? 그리고 선영의 행세를 하던 ‘가짜 선영’의 정체는 무엇일까?
문호의 사촌 형 종근은 ‘가짜 선영’이 살던 집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그녀의 물품을 집주인으로부터 건네받고, 그중에서 아토피에 좋은 기능성 화장품을 발견한다. 그는 곧장 화장품 회사로 달려가, ‘가짜 선영’이 그 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고, 고객 명단의 일부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회사 관리자를 통해 가짜 선영이 결혼한 적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차경선’. 아버지가 IMF 때 진 빚 중 사채가 있었고, 그로 인해 차경선의 집은 풍비박산이 난다. 차경선은 고아원에 맡겨졌고, 거기서 나온 후, 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남자와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경선을 찾아온 사채업자들의 횡포로 식당은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없었고, 결국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된다. 이후 차경선은 사채업자들을 피해 도망 다녔지만, 결국 붙잡혀 신체 포기 각서를 쓰고 사창가에 팔려 간다. 그리고 1년 후 사창가에서 도망 나와 아이를 낳지만 아이는 사산된다. 이것이 가짜 박선영인 차경선의 과거의 퍼즐을 맞췄을 때 나오는 대략적인 그림이다.
이후 화장품 회사에서 잠깐 일했던 차경선은 고객 명단을 빼돌려, 어머니를 잃고 가족도 친구도 친척도 없이 홀로 사는, 그래서 홀연히 사라져도 누구 하나 의심할 리 없는,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진짜 박선영에게 접근한다. 그녀가 탄 사망 보험금과, 무엇보다도 누구 하나 찾아올 리 없는 그녀의 처지와 신분이 자신에게 걸맞은 그럴듯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경선은 같이 여행을 하자고 진짜 선영을 유인하여, 여행지의 숙박업소에서 선영을 살해하고, 그녀의 시신을 저수지에 유기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박선영의 신분을 도용하여, 지긋지긋한 사채업자들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가짜 박선영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일도 하고, 동물병원 원장인 문호를 만나 결혼까지 꿈꾸게 된 것이다.
여기서 진짜 박선영과 차경선의 삶은 묘하게 오버랩된다. 천애 고아인 그들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짜 선영’에 대해 몇몇 단편적인 기억을 갖고 있던 그녀의 고향 마을 사람들은 왜 선영을 찾지도, 찾을 생각도 안 하고, 그저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잊어버렸을까? 함께 나눈 과거를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차경선을 알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화장품 회사의 인사부 직원은 그녀를 어린 나이에 이혼하여 사람들과 특별히 관계 맺고 싶어 하지 않는 조용하고 경계심 많은 젊은 여성으로 기억한다. 차경선의 전남편의 기억 속에 차경선이란 사채업자들의 폭력적인 추심 행위로 인해 ‘지긋지긋하게’ 벗어나고 싶은 여자일 뿐이다. 사채업자들의 눈에 차경선은 그녀의 과거와 미래엔 전혀 관심이 없고 돈을 뜯어내기 위해 철저하게 이용하고 팔아먹어야 할 물건과 같은 존재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죽음이란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시공간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기억을 한다. 그가 죽어서 우리 공동의 시공간 속에서 사라져 버리면, 적어도 내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는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쉰다. 그러나 그러한 기억조차 사라져 버렸을 때, 그 사람이 한때 이 시공간 속에서 존재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행적이 묘연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묘지도 명패도 없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진짜 박선영의 삶은 몇 년 후 저수지에서 그녀의 시체가 들어 있는 가방이 떠올랐을 때에야 비로소 뉴스 한 토막에서 조명받는다. 그 가방 속의 시체는 그녀에 대해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한때 살아 숨 쉬던 생명이 아니라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화차>의 두 여성에게 시간이 있는가? 진짜 박선영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억을 포함해 몇 안 되는 주변인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며 어느 정도 자기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타인들에게 그녀는 그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존재, 없어도 되는 존재일 뿐이다. 진짜 차경선에게는 시간이 있는가? 그녀는 자신의 지긋지긋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지워 버리고, 박선영의 기억과 신분을 도용해 다른 정체성,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녀는 박선영인가, 차경선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보증해 주는 차경선의 기억이 지워진 자로서, 그녀는 단지 현재를 살 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기억이라는 자기 정체성, 자기 동일성을 통해 체험적 시간의 문제를 다룬 베르그손의 철학을 통해 화차의 주인공 차경선의 시간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현대 프랑스 철학을 연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은 물리학적이고 객관적인 시간, 즉 시계의 시간처럼 측정 가능하고 공간화된 시간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체험적인 시간을 제시한다. 과학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우리의 내재적 의식 속에서 흘러가며 실제적으로 체험되는 시간을 베르그손은 지속(la duré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내적인 의식의 지속은 연속성이라는 본성을 갖는다. 우리의 심적 상태는 질적으로 매 순간 변화하는 동시에, 그 변화는 시간 안에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시간의 도상에서 흐르면서, 마치 “눈 위에서 구르는 눈사람처럼” 점진적으로 불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내적인 의식이 지속한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연속되면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의식 존재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갖는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 속에서 연속적으로 불어나는 과거를 포함한다는 것, 즉 의식 속에서 쉬지 않고 쌓여가는 과거를 보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부풀어 가는 지속은 각 개인이 가진 고유한 체험들의 축적인 순수기억으로 보존된다. 이처럼 매 순간 눈덩이처럼 끊임없이 쌓여 가며 보존되는 순수기억은 늘 새롭고 차이가 있는 현재를 생성한다. 즉 “뒤이어 오는 순간은 항상 앞선 순간 위에다가, 그 앞선 순간이 남겨 놓은 기억을 포함”하고 있기에, 즉 매 순간 “현재 안으로의 과거의 보존과 축적”이 일어나기에 현재는 끊임없는 질적 변화를 겪으며, 늘 새롭게 생성되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과거 전체, 즉 지속의 두께를 지닌다.
이처럼 베르그손이 말하는 의식존재로서의 인간 개개인은 각기 다른 시간 체험으로서 과거의 총합인 순수기억을 가지고 있다. 만일 어떤 대상이 의식존재에서처럼 현재 속에서 과거가 존속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그 대상에는 지속의 연속성 대신 순간적인 것의 반복만이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대상이 근대 실증 과학이 상정하는 타성적 물질, 즉 운동의 원인이 외부에서 주어져야 운동할 수 있는 물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인간은 순간적인 것의 반복 속에서 살 것이다. 이는 베르그손의 시간 속 생성하는 주체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차이를 생산하는 생성의 시간 존재론을 제시한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말한 라이프니츠의 ‘순간적 정신(mens momenranea)’에 해당하는 물질의 상태, 즉 차이가 없는 반복과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단기 기억 상실자가 끊임없이 기억을 잃어버리며, 순간적인 현재의 반복 속에서 사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만일 단기 기억 상실자가 끊임없이 메모를 남기며, 한 시간, 두 시간, 혹은 하루면 사라질 기억을 붙잡고자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면, 이는 꼭 맞아떨어지는 예는 아닐 것이다. 마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잡기 위한 강박 속에서 매번 10분 후면 사라지는 기억을 붙들기 위해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은 후 메모를 남기고, 이도 모자라 자신의 몸에 사건의 단서를 찾기 위한 문신을 새기는 것처럼 말이다. <메멘토>의 주인공은 영화 말미에 “현재의 나를 알려면 기억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긴다. 이는 시간 속에서 연속적으로 흘러가고 쌓여 가는 기억이야말로 ‘나’라는 자아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근간임을 내포하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강박에 가득 차 메모를 남기는 <메멘토>의 주인공과는 달리, 박선영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차경선은, 차경선에 관한 어떤 기억도 모두 지우고자 하는 강박적인 의지에 차 있다. 그리고 잠을 자다 꿈속에서 어쩌다 기억이 떠올라 괴로워하는 그녀의 ‘진짜’ 과거는 한낱 악몽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짜이건 가짜이건 차경선과 박선영이 체험하는 시간은 문호와 종근, 그리고 차경선의 전남편이 체험하는 시간과는 차원이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베르그손은 개인이 체험하는 시간의 총체로서의 순수기억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차경선의 시간은 매 순간 끊임없이 보존되며 차이와 생성을 가져오는 순수기억과는 상관이 없다.
순간적인 현재의 반복 속에서 멍하니 동물병원 창 안을 바라보는 그녀의 백치 같은 시선은, 어쩌면 불타오르는 수레를 타고 지옥불로 향하는,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를 잊기 위한 멍함일지도 모른다. 그 멍한 시선에 문호가 반한 것은 예측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앞서 말한 베르그손적 의미에서의 예측 불가능한 생성과 창조로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베르그손과 들뢰즈가 주창한 생성과 창조로서의 주체는 철학이 남성의 전유물이듯이, 남성 철학자들에게 유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실체가 들통나자 도망을 가고, 새로운 피해자를 물색해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고자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간 그녀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 단 하나의 결정된 선택은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시간은 존재했는가?













유서연
작가소개 / 유서연

작가. 작품집으로 <공포의 철학> (동녘, 2017), <시각의 폭력>(동녘, 2021)이 있으며, 공저로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과 위험성> (엘피, 2022)이 있다. <문학사상>, <출판문화> 등의 잡지에 칼럼과 에세이를 수록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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