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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콘 군상」 외 1편

  • 작성일 2023-03-24
  • 조회수 1,26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라오콘 군상

『라오콘』-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남상숙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진실을 고백한다. 글로 쓰지 못할 이야기가 없듯 그림으로 그리거나 형태로 만들지 못할 대상도 없다. 자연물이나 상상의 산물이나 시공간에서는 모두 조형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 삶의 방식이며 유희라고 할 수 있으니 피조물은 저마다의 표정과 몸짓으로 공존한다. 욕구에서 비롯한 표현의 흔적은 문화를 이루면서 문명이 발달하였으니 인간사 사유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라오콘』 첫 페이지를 펼치자 라오콘과 두 아들이 팔뚝만 한, 두 마리 바다뱀에 칭칭 감긴 채 괴로워하는 ‘라오콘 군상’ 조각 사진이 나왔다. 트로이 왕자이며 아폴론 신관인 라오콘이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남긴 목마가 간계였음을 알아내어 신의 노여움을 사서 뱀의 공격을 받는 모습이다. 일그러진 표정과 온몸에 불끈 솟은 근육의 생동감을 점토로 만든다 해도 이렇게 섬세한 조형은 어려울 듯싶다.

이 책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의 예술이론서이며 문학비평서이다. 독일의 문학평론가인 그는 라오콘 조각 군상을 보고 『라오콘』을 저술했다. 부제가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인 이 책은 문헌에서 찾은 이론을 근거로 제시하며 문학(시)과 미술(조각), 두 예술의 경계와 차이점을 근본적으로 규명했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에는 고대미술사에 권위 있는 빙켈만이 「회화와 조각에서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관한 생각」에서 라오콘 군상 조각품의 우수성을 언급하며 예술에서는 어느 분야보다 조각작품이 우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레싱은 그의 주장에 의구심이 들어 관련 서적을 탐구하면서 반박했으니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다. 견해를 주장하려면 그 분야에 관해 학문과 식견이 합당해야 한다. 나는 두 예술 분야의 논거에 관심이 가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

레싱은 미술이나 조각작품이 사물의 서사를 한순간만 표현한 것이므로 전체의 내용은 별도로 설명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했다. 문학은 글을 읽으면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지만, 라오콘이 뱀에 감겨 온몸의 근육에 불거지도록 괴로워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각작품의 일별만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과 벌인 십 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을 문학은 상세히 서술하고 느낌과 감정까지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술보다 문학이 위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공고히 하려고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라오콘’ 시를 인용했다. “… 뱀들은 곧장 라오콘을 공격한다/먼저 가냘픈 그의 두 아들을 하나씩 칭칭 감고/이빨로 불행한 자들의 몸을 갈기갈기 물어뜯는다/아들을 돕기 위해 창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오는/라오콘을 붙잡아서 거대한 똬리를 틀어 칭칭 감는다 …” 시 앞부분의 트로이 전쟁 서막도 실감 나고 바다뱀의 공격을 일부분만 서술해도 자연히 눈을 감게 된다. 그 외 이아코부스 사돌레투스의 「라오콘 입상」 등 여러 시인의 시와 글을 인용했다.

“미술가가 어떤 현상을 상징으로 장식하면 단순한 형상을 드높은 존재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이런 미술 장식을 사용하면 드높은 존재를 인형으로 만드는 것이다. (…) 삶이 회화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 같이 시인은 화가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이 레싱의 주장이었다.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라오콘 군상은 기원전 1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 로도스 섬 출신의 아게산드로스, 폴뤼도로스, 아테노도로스 셋이서 공동으로 제작했다. 이는 1506년 로마의 어느 포도밭에서 우연히 발견되자,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인간 몸(근육)의 움직임과 파격적인 조형미에 환호했다. 이후 조각에 관한 다양한 관점이 생겨났으니 라오콘은 미술이론의 중심에 섰다. 그렇다면 신화 속 인물 라오콘과 두 아들을 조형물로 세워서 그리스 조각가 세 사람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인간이 혐오하는 뱀이 어린 자식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에 취한 아비의 극적인 행동일까. 단말마를 지르며 최후를 맞는 인간의 고통을 포착한 것일까. 모두 맞는 말이지만 예술작품으로서 역동적인 근육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빙켈만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서 레싱이 다른 이들의 이론과 학설을 다양하게 인용하며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주의와 사상에 목소리 높여도 서로 화해하면 관계가 좋아지듯 미술과 문학도 그렇다고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판단은 독자가 하라는 뜻이었을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조각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관점을 도출하고 이면의 문제까지 유추했다. 견해를 개진하는 일도 넓은 사유 안에서 자유롭게 풀어야 건강한 토론이 이루어질 것이다. 레싱의 작품이 그 시대 이론문화의 범위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면 학문적으로도 소득이다.

나는 빙켈만의 주장대로 예술 분야에서 조각품이 상위라는 생각도, 레싱이 반박한 것처럼 문학이 우위라는 견해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문학이나 조각작품은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서열의 개념이 아니라 창의력의 소산이므로 그대로 가치 있다. 예술은 인간이 이상을 꿈꾸도록 도와주고 사고의 지평을 확장하고 진실을 규명하고 역사를 증언하기에 고귀한 것이다.

품격 있는 예술가들이 고군분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기에 고마운 것이다. 인간의 한계성을 절감하며 삶을 성찰하고 타인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기에 창조주에 버금가는 존재들은 아닐까. 영감에 사로잡혀서 ‘잡은 꿩 놓아주고 나는 꿩 잡으려 한다’지만 그들은 적어도 숙고하는 삶을 지향한다.




화가의 언어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마르크 샤갈

샤갈의 그림은 밝고 유쾌하다. 화사한 색채와 아기자기한 형체가 오랜 친구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물고기와 말, 연인이나 부부가 손을 잡고 하늘을 떠다니는 장면은 아름답고 몽환적이다. 에펠탑에 그린 사람 얼굴과 붉은 수탉의 모습은 우화적이고 기하학적으로 묘사한 고향 마을은 정겹고 싱그럽다. 초록색 지붕과 파란 집, 비대칭의 빨갛고 파란 얼굴, 밝고 활기찬 거리 모습도 화려하면서 경쾌하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그림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을 보았다. 전시장의 여러 화가 중에서 샤갈의 그림은 이것이 유일했다. 30호 그림에는 흰 꽃병에 청록색 잎사귀와 빨간 꽃 아홉 송이가 불 켠 듯 환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청색 차림의 신랑은 왼쪽 귀퉁이에서 조촐하고 오른쪽 아래 술병과 잔, 과일 접시도 자세히 보아야 찾을 수 있는 숨은 그림 같았다. 청록과 빨강의 보색대비와 쿡쿡 찍은 듯 거친 붓질이 시선을 잡았다.

팔짱을 끼고 그림을 응시하던 여자 관람객은 내가 전시장을 돌고 다시 왔을 때까지 그대로였다. 묵직한 청록색에 침잠했는지, 크고 작게 변화를 준 꽃송이의 투박한 질감에 심취했는지,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하얀 꽃송이를 살피는지, 흰색도 푸른색도 아닌 바탕색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점인가 하면 선 같고, 선의 연속인가 하면 면 같은 색채의 질감은 모호했다. 시각에 따라 다양한 사유가 일어나겠으나 산만한 듯 정연한 청록색과 도발적인 빨간색이 청초했다.

언젠가, 꿈에 청록색 수박을 안았다. 수박을 가르자 선홍빛 속살이 눈부시고 그 안에서 수박이 또 나왔다. 칼을 대자 선홍빛이 쏘는 듯 환한데 또 수박이 뒹굴었다.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린 듯 수박이 자꾸 나오며 선홍색은 비눗방울처럼 사방으로 둥실둥실 떠다녔다. 꿈을 깨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처럼 기분 좋았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잠재된 무의식의 표출이 꿈이라 했는데 내게 웅크렸던 간절한 바람이 줄줄이 쏟아진 것일까, 꿈이 뜻밖의 일이듯 기억도 난데없긴 마찬가지다. 수박의 풍미가 입안을 향기롭게 하듯 둥둥 떠다니던 선홍빛은 기분 좋게 한다.

어느 색이든 원색은 독자적이다. 신호등에 빨간색 불이 들어오면 자체로 아름답고 우선 멈추라는 기호로서 역할을 다한다. 초록빛도 그렇다. 그러나 보색 관계인 두 가지 색을 누가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기대 이상의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꽃다발 그림처럼 당당하고 개별적인 색채를 조합하여 보편성을 지닌 그림으로 완성하는 것은 오랜 수련과 안목에서 나온 작가의 기능과 창의력의 소산일 터다. 조밀한 형태와 구조에 색을 칠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작품을 완성하는 작가의 노고에 환호하는 까닭이다.

집에 오자,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자서전을 다시 읽었다. “그림 그리는 일 말고는 좋은 게 하나도 없다. 아버지처럼 무거운 통을 들 수 없기에 점원이 될 수 없다. 나는 화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파리에서 전시회를 누비고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것들을 어느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못할 것이다.” “예술을 찾으려고 라피트 거리를 배회하며 뒤랑 뤼엘 화랑에서 르누아르, 피사르, 모네의 그림을 수백 번 바라보았다.” “내게 미술은 영혼의 어떤 상태인 것 같다. 땅 위의 모든 인간의 영혼은 성스럽다. 오직 자신의 논리와 이성을 가진 정직한 사람들만이 자유롭다.” 솔직담백한 샤갈의 고백은 진솔하고 순수하며 글과 그림과 사람이 같았다.

샤갈은 가난한 집안 형편과 부모님이 그림을 반대하여 점원이 될까, 생각했으나 빈약한 체력으로 포기했다. 공립학교에서 데생 기초를 마치고 미술 공부를 하려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였어도 정작 그가 배운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렘브란트에 심취하고 쿠르베에 충격을 받았어도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로 다짐했다. 상상의 세계는 광활했으나 이미지를 중시하며 형태를 과감히 생략했다.

예술가는 성장 과정이 작품의 모티프가 된다. 어릴 적 추억과 종교적인 분위기는 영성의 밑거름이 되었으니 그림은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이나 성서 속 인물의 이미지는 동화책 삽화처럼 아기자기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하면서도 고향마을의 풍경, 거리 악사와 서커스단 마술사 등 표현하고 싶은 대상은 충만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에서도 성서를 읽고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빨강, 노랑, 파랑 원색의 풍요로움은 유년의 감성을 소환하고 주황과 진보라, 연록과 자주의 중간색은 세월에 따른 회한의 정서를 동반한다. 선하고 창의적인 샤갈은 단순 소박한 형체와 대담한 색채로 그림에 전력투구했다. 그가 ‘색채의 마술사’라는 찬사와 함께 지금까지 사랑받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 삶에 대한 감사와 자유로운 영혼 덕분이다.

시인이 서사와 심상을 함축과 은유로 표현하여 독자의 가슴을 울리듯 화가는 자신만의 과감한 색채와 개성적인 묘선으로 떨림과 환희를 준다. 샤갈이 표현하는 파격적인 인물 묘사와 색채, 사물의 형태는 다양한 사유를 도출하는 화가의 언어이다.

작가소개 / 남상숙

1988년 <시와 의식> 수필 신인상 당선. 작품집 <아름다움은 필경 선과 통한다> <남빛 사유> <빛나는 수고>가 있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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