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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소리」 외 1편

  • 작성일 2023-04-07
  • 조회수 1,309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그림자 소리

김순이

안개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밤이다. 숲속을 잠식한 어둠이 창문 틈으로 쑥쑥 밀고 들어와 어느새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 조심스레 다가가는데 발밑으로 뭔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커다란 바퀴벌레다.


산 중턱의 도서관, 이 층에 있는 자료실은 삼백 평은 족히 넘어 보인다. 지금은 밤 아홉 시, 사람들은 여섯 시에 다 나갔다. 건너편 사무실도 오래전 불이 꺼져 캄캄한 복도엔 내 발소리만 건물을 울린다.

지난주에 미뤄둔 업무를 오늘은 모두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삐거덕 삐거덕….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시간이 갈수록 반복되니 신경에 거슬린다. 분명 이용자들이 모두 나간 걸 확인했었다. 이 시간이면 건물 양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도 이 층에선 멈추지 않는다. 비상구 철문도 단단히 잠갔는데 누굴까? 자료실 전등을 구역마다 켜고 한 바퀴 돌았다. 아무도 없다.

지난번엔 누군가 숲 쪽으로 난 창문을 자꾸만 두들겼다. 무서워서 그냥 퇴근했는데 다음 날 보니 산비둘기가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어쩌다 야근하는 날이면 책이 빼곡히 실린 서가가 조금씩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하다고 몸을 비트는지 탁, 탁, 널빤지 갈라지는 소리를 내기도 했었다. 오늘도 이상한 조짐이 보인다.

귀 기울여 듣는 걸 알아챘나? 잠시 조용해졌다. 자판을 두드리며 컴퓨터 화면에 몰두하는 사이 잊었던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삐거덕 삐거덕…. 나 말고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집에서 출퇴근하는데 그는 아예 상주하는가 보다.

조용할 때면 그는 불쑥불쑥 소리로 다가온다. 가끔은 붕- 하고 도서 검색용 컴퓨터가 절로 부팅되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한낮에도 식별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존재를 알리기도 한다. 언젠가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나서 발원지를 찾아다녔다. 폭이 크지 않은 길고 가느다란 신호음이었다. 한참 만에 찾고 보니, 뜻밖에도 독서 중인 할아버지의 보청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오늘은 그 소리가 아니다.

집에는 구매한 지 십 년 넘은 의자가 있다. 널찍하고 편해서 세 개나 샀는데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통에 두 개는 일찌감치 갖다 버리고 한 개만 컴퓨터 앞에 두었다. 그런데 나사가 달아났는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났다. 의자는 집에 있는데 소리만 도서관에 왔을까? 혹시 대만 여행에서 본 유택(幽宅)에서 혼이 따라온 걸까. 스마트폰에 줄줄이 담아 온 무덤 사진 속에 끼어 왔다가 이곳에 자리를 틀었는지도 몰라. 이 생각을 하는 중에도 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희미하게 들릴 듯 말 듯 삐거덕 삐거덕….

이곳에서 주말 근무하던 직원이 말했었다. 퇴근 시간 후 남아 일하다 이상한 느낌에 서둘러 집에 갔다고. 갑자기 덜컹, 하더니 바람이 쏴-하고 들어온다. 머리털이 곤두선다. 돌아보니 숲 쪽으로 난 창문이 열려 있다. 살금살금 다가가 쾅, 하고 닫았다. 강심장이라고 자부했는데 오늘은 왠지 불안하다. 녀석들은 내 허락도 없이 넓은 공간을 휘젓고 다닌다. 저 소리들은 보이지 않은 그림자를 가졌나 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참, 소리는 소리로 퇴치한다던 말이 생각났다. 컴퓨터에서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음악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이제 녀석들은 독 안에 든 쥐다!”

볼륨을 끝까지 올리자 악기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역시나 녀석들은 재빠르게 존재를 숨겼다. 서가 틈새에 숨었는지 문틈으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드러내진 않는다. 라디오에선 유쾌한 사회자의 진행으로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고 나는 열심히 자판을 두드린다. 일을 마쳤다. 녀석들과 씨름에서 오늘은 완전한 나의 승리다.

하지만 찜찜하다. 소리는 인간이 추구해 온 편리함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것이 많은데 갖가지 행태의 그것들에 오히려 매몰되는 느낌이다. 나는 소리에서 그림자를 읽는다. 그들은 세상의 소리를 끌고 다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이다. 그들에게 발목을 내줘서는 안 된다. 혹여 나약해지면 그림자는 슬그머니 다가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려 들지도 모른다.

밤은 모든 그림자를 집어삼킨다. 그림자가 끌고 온 온갖 소리까지 꿀꺽꿀꺽 몸속으로 밀어 넣었을 거다. 쉴 곳을 찾아 날아가다 유리창에 부딪혀 생을 마감한 산비둘기의 영혼을 부르는 소리, 미처 말 못하고 떠난 누군가의 마음의 울림소리, 불빛에 잠을 못 잤다고 투덜대는 서가의 소리까지. 주변이 조용해지면 심술궂은 밤은 그것들을 되새김질하다 슬그머니 하나둘 풀어 두고 가기도 한다. 마치 우리를 시험하듯이.

아침이 오면 소리는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태양의 위력에 땅속으로 가라앉거나 백색 소음에 묻혀 버린 것 같다. 하지만 대낮의 활력과 바쁜 일상에 덮여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어둠이 내리면 그림자가 끌고 온 소리는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바라보아야 보이는 사물의 이면처럼,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야 그들을 만날 수 있다.

혼자 있는 밤. 거대한 밤의 되새김질에 비로소 하루를 돌아보고, 스쳐 지나간 눈동자가 보낸 마음의 소리를 알아챈다. 내 생채기만 만지느라 타인의 아픔을 외면했었다. 그중 어떤 소리는 숀탠의 그림책에 나오는 가엾은 매미*처럼 오래 침묵해 온 누군가가 보낸 신호음도 포함해 있으리라. 탁, 탁. 삐거덕, 삐거덕…. 그것은 세상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내는 아픈 소리이다. 나는 이제 소리를 찾아 나선다.


* 매미 : 숀탠의 그림책, 『매미』에 나오는 주인공. 매미는 평생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만 받다가 껍질을 벗고 날아간다.




칼국수 한 그릇



2인실 병실엔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계속되는 장마에 환자가 덮는 이불도 눅눅해 보였다. 가라앉은 공기를 깨우기라도 하듯 갑자기 새 올케와 나 사이에 높은 소리가 오갔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날아왔다.


“거, 조용히들 하시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 죽은 듯 누워 있던 노인이었다. 병세가 위독해서 말할 기운조차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느닷없는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에 병실로 들어온 뒤로 말은커녕 미동도 없었기에 그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노인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의식이 없는 동생 옆에서 새 올케와 불편한 시간을 보내다 상속 문제로 얘기를 나눈다는 것이 다툼이 되고 만 뒤였다. 상황을 알아채고 얼른 노인에게 사과드렸다.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오 분쯤 지났을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누가 또 있겠소? 다 같은 혈육 아니오?”

노인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살아온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세대는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경험한 세대요. 그 시절 이복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구 남매의 맏이로 살았소. 6·25 전쟁 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았을 것 같소? 재물은 있다가도 흩어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요.”

잠깐 노인의 생이 빠르게 스쳐 갔다. 부끄러워 변명하고 싶었지만, 병실에서 소란을 피운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감정만 앞세워 환자가 계신 걸 깜박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우리는 정중하게 사과드렸다.

노인은 위암이라고 했다. 팔순이 가까운 노인은 입을 닫은 채 종일 말 한마디 없었고 필요할 땐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간병인이 노인의 수발을 들었고, 가끔 가족으로 보이는 육십 대 후반의 여자가 와서 간병인과 수다를 떨다 갔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인이라고 하기엔 드물게 얼굴을 내밀었고 남매라고 하기엔 그리 애틋해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연세와 병명으로 미루어 마음의 준비를 했거나, 환자를 배려해서 일부러 밝은 분위기를 연출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날이 아니면 병실의 분위기는 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에 노인은 사흘도 못 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가 병실을 들를 때마다 몸이 점점 호전되는 것 같았다. 다음에 갔을 때는 노인은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그러나 코로 연결된 호스를 통해 영양공급을 받고 있어 밥을 못 먹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쯤 후엔 호스 줄마저 치워졌다. 대신 수액이 침대 옆에 매달려 있었다. 그날 노인 옆엔 주말을 맞아 문병을 온 젊은 남자가 있었다. 처음 보는 방문객이었는데 손자나 조카쯤으로 보였다. 노인은 그날따라 몸 상태가 좋았는지 오랜만에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복도에서는 식사를 마친 환자 가족들이 식판을 정리하는 소리가 났다. 아침을 늦게 먹고 나왔는데도 시장기가 느껴졌다. 노인이 식사하는 걸 못 보았기에 말을 걸었다.

“어르신, 뭐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제가 사다 드릴게요.”

뜻밖에도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드시고 싶냐고 재차 물으니 따뜻한 칼국수 국물이 먹고 싶다고 조용히 말했다. 조카를 시켜 칼국수 한 그릇을 사 오게 했다. 그때 말없이 서 있던 남자가 조카를 따라 나갔다.

젊은 남자가 포장된 음식을 들고 왔다. 그는 침대 탁자 위에 그것을 펼쳐 놓고 그릇 뚜껑을 열었다. 구수한 해물 칼국수 냄새가 온 병실에 퍼졌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국물 한술을 떠서 맛을 보더니 칼국수를 몇 점 건져서 천천히 삼켰다. 다음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연거푸 후루룩하며 입으로 넣었다. 바지락을 건져서는 조갯살을 까느라 얼굴에 땀까지 맺혔다. 오래 누워 있던 환자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칼국수 한 그릇에 노인의 얼굴이 환하게 펴진 것 같았다. 그 상태라면 노인은 며칠 안에 퇴원해도 될 것 같았다.

칼국수를 좋아하던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입맛이 없을 때면 칼국수를 자주 해 드셨다. 엄마도 위암이었는데 병원 치료가 가망이 없자 마지막 시간을 언니 집에서 보냈다. 주말을 맞아 뵈러 갔을 때, 부엌에선 마침 압력밥솥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배가 고팠는지 엄마가 머뭇머뭇하다가 간신히 입을 떼셨다.

“밥 냄새가 솔솔 나는구나.”

하지만 엄마는 그 솥의 밥을 한술도 뜨지 못했다. 음식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날도 앰뷸런스에 실려 가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고는 링거 주사를 맞는 것 외엔 아무것도 들지 못하고 누워만 있다 세상을 뜨셨다.

다음 주말에 병원에 들렀더니 옆 침대가 비어 있었다. 침구도 정리되어 있기에 할아버지는 퇴원하셨느냐고 물었다. 내가 다녀가고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날 식사한 게 병세를 악화시킨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한편으론 먹고 싶던 칼국수로 마지막 식사를 하고 떠나셨으니 다행이라고도 생각되었다. 노인이 살아 있을 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당당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어쩌면 그도 외로웠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힘들었을 그의 생도 연민으로 다가왔다.

비 오는 날 칼국수 집 앞을 지날 때면, 문득 노인이 했던 말이 유언처럼 떠올라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게 된다.

“누가 또 있겠소? 다 같은 혈육 아니오?”라던.

올케와 헤어진 지 다섯 해가 지났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올케를 불러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다.

작가소개 / 김순이

어머니에 대한 부채로 글을 씁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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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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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박정옥
    공감합니다

    사람 사는이야기 공감합니다.

    • 2023-08-11 11:26:33
    박정옥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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