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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수

  • 작성일 2023-04-07
  • 조회수 1,482

누수

김순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집을 옮기고 두 해쯤 지났을 때였다. 언제부턴가 작은방 벽면과 천장 곳곳에 얼룩이 생기고 곰팡이가 자리 잡더니 퀴퀴한 냄새가 집안 전체를 사로잡았다. 관리소에 알아봤더니 아파트가 오래되어 외부 벽 이음새에 문제가 생겼거나 누수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윗집에 알렸더니 할머니는 자기 집은 이상이 없다며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관리소에 외벽 수리를 부탁했다. 돌아온 답은 수리 기간이 도래하지 않아 예산이 없어 공사를 할 수 없단다.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불러 우리 집과 위층의 외벽을 수리하고 도배까지 마쳤는데 나아지지 않았다. 장마철이라 그런가 싶어 옥상 아래 두 개 층의 외벽 공사를 추가로 했다. 벽에 딸린 붙박이장과 벽을 세제로 청소하고 한 달 동안 말려서 다시 도배했지만, 곰팡이는 새로 피어올랐고 붙박이장에 가득 채워둔 옷마저 얼룩져서 다 버려야 했다.

관리소 직원은 천장으로 지나가는 수도 배관에서 냉온수가 지나갈 때 온도 차이로 생기는 결로라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수도 업체 사람을 불러와도 윗집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중 허리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받았다. 집에서 요양할 때 곰팡이 냄새는 참기 힘든 적이었다. 안방 화장실 천장 안을 수도 없이 들여다보다가 윗집에 올라가 비용을 댈 테니 수리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안방 화장실은 사용한 적조차 없다며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이후엔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답답한 날들이 해를 넘겨 지나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누수 전문가를 불러와 안방 화장실과 작은방 사이의 벽을 허물었다. 마침내 화장실 천장과 맞닿은 벽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그래도 위층에서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누던 할머니는 자리를 피하거나 안면을 바꾼 지 오래였다. 여기저기서 들은 정보로 내용증명을 만들어 보내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찾아와 한바탕 큰소리가 났다. 소득 없이 또 몇 달이 지나고 두 번의 내용증명을 보낸 후에야 할아버지가 남편을 만나 집을 수리해 주기로 약속했다. 할머니가 완강히 반대해서 몰래 해 주는 것이라 했단다.

긴 인내를 요구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건강을 추슬러야 했고, 내가 의지하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투병하다 혼수상태로 접어든 시기였다. 90년대 말, 어머니의 치매와 IMF 경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동생의 가정은 깨졌었다. 이후 십여 년을 혼자 살던 동생은 새 올케와 뒤늦게 인연을 맺었지만, 두 해도 살지 못하고 병원에서 두 달의 여명(餘命)을 선고받았다. 조카들을 위해서 동생은 내게 재산상속 일을 맡긴다는 사실을 유서로 남겼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중에 쓸 학비를 따로 준비한 통장과 인감도장 등을 큰조카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새 올케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펄펄 뛰며 생사람 잡는다고 날을 세웠다. 몸도 불편한데 또 넘어야 할 산이었다. 두 조카가 살아갈 일이 걱정되었다. 어쩌지도 못하고 매일 불면의 밤을 보냈다. 그때는 두 손이 뒤로 묶인 것처럼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세상에 대한 믿음과 사람에 대한 신뢰가 마치 누수처럼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일 년 넘게 투병하던 동생이 떠나고 유산 분배가 끝났을 때 새 올케는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예전처럼 빈손으로 쫓겨날까 봐 겁이 났었다고 했다. 재혼 전의 경험이 아픔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할머니는 나를 보자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을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일하던 주민센터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는 신분증을 잃어버려 인감증명을 떼지 못했다. 담당자는 절대 안 된다고 거절했지만 나는 담당 직원을 설득하여 내 도장을 찍고 서류를 발급해 주었다. 같은 아파트에서 이십 년 가까이 살았으니 본인인증을 해 줄 수 있었고 노인들이라 돕고 싶었다.

몇 년 후 치매를 앓던 할머니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다는 말이 들렸다. 할아버지를 만나 병문안을 가고 싶다고 했더니 이미 요양원으로 옮겼다며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집을 팔고 이사한다며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들겼다. 아들 집으로 가신다고 했다. 그사이 할아버지는 건강이 안 좋아졌는지 몰라보게 말라 있었다.

참외와 수박 한 통을 사다 드렸다. 조금 있으니 할아버지는 수박을 도로 가지고 와서 자를 힘도 없다며 참외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수박 반 통을 잘라서 플라스틱 통에 담아 다시 갖다 드렸다. 그러고 나니 지난날 새어 나갔던 마음이 어느새 채워진 듯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분이라곤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십몇 년 전 일인데 그사이 집만 낡은 게 아니라 사람도 갑자기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지난날 두 해의 시간은 길고도 길더니 이후 십몇 년은 눈 깜짝할 새 지나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생각하면 내가 예전에 흘려보낸 것은 물이 아니라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럽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날들을, 넘어야 할 산이 아니라 내가 살아 낼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했다면 좀 나았을까. 천변의 억새가 바람결에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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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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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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