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룹이 되어
- 작성일 2024-09-04
- 좋아요 0
- 댓글수 0
- 조회수 437
슈룹이 되어
변명희
“저어~ 거기요, 조심하세요. 위험해요.”
일행 중 한 남자가 뛰어오더니 내게 던진 말이다. 친구들과 장난하며 강변 둑길을 걷고 있었다. 물에 빠질 수 있으니 안쪽으로 걸으라는 것이었다. ‘무슨 간섭이람.’ 생각하면서도 꼬리를 내리고 조신하게 걸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모종의 작정이라도 했던 것일까.
1983년 겨울 어느 날, 그는 공식적인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 얼마 후 외국에 나가 살면서부터는, 그 나라의 관습대로 내 이름 뒤에 그의 성(姓)을 붙여서 썼다.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심리적으로도 의존적 존재가 되는 것 같았다. 점차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고 자신감도 떨어졌다. 언어소통의 어려움도 있는 데다, 빵 한 봉지 우유 한 팩의 찬거리나 옷가지를 살 때도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녀야 했다. 철저하고 섬세한 성격의 그는 내가 운전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 못했다. 어쩌다 내가 운전을 해도 쉬지 못하고 신경을 쓰니 점차 나는 운전석에 앉는 일이 뜸해졌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미국 중부에서 캐나다에 다녀올 때도 그는 지도를 외워서 혼자 운전했다. 하루는 16시간 가까이 운전하면서도, 맥도날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시 피로를 풀고는 다시 출발할 정도였다.
방향감각이 둔한 길치이다 보니 나는 여전히 동네 기사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까지는 혼자 외출하면 그가 지도를 그려주며 설명을 곁들이고, 수시로 확인을 했다. 지금까지도 기차표든 비행기 표를 내가 구입해 본 적이 없다. 터미널에서도 공항에서도 그는 표를 사고, 나는 뒤만 따르면 되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는 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컴맹에다 기계치인 내게 해결사 역할은 당연하였다. 노심초사하는 그의 성격 탓에 완전 바보가 되었노라 불평도 하며 그럭저럭 살다가는, 얼마 전 느닷없는 태풍을 만났다.
그가 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병원에서 주는 보호자 명패를 내가 목에 걸었다. 눕고 일어나는 그를 부축해주는 것이 낯설었다. 며칠 동안 간이 침상에서 잠을 자는 것도, 링거 줄을 매단 걸대를 끌며 걷는 그의 옆을 지키는 것도 사뭇 어색하기만 했다. 물이나 휴지를 찾는 그를 보조하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고목에 붙은 매미지만, 이번에는 매미의 위세가 고목의 그것을 능가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다 퇴원하는 날에는 원무과에서 정산은 그가 하고, 나는 보퉁이를 챙기며 서 있으니 역시 그편이 자연스러웠다. 제자리로 돌아온 풍경이었던 게다.
부산행 열차가 가을 벌판을 달리고 있다. 스륵스륵 지나는 황금색 조각 논들이 비단결이다. 2박 3일 일정의 업무상 여행을 계획하며 내게는 묻는 둥 마는 둥, 그이 혼자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무조건 함께 가자는 뜻으로 보였다. 뜻밖이었다. 가끔 동행하는 경우에는 먼저 내 의사를 묻고, 결정 장애를 가진 나는 이랬다저랬다 몇 번씩 번복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오래전 예정되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함께 길을 나섰다. 그의 속내를 묻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수술하고 이제 겨우 3주밖에 안 됐다는 생각에.
멀리 두 줄기 레일이 태화강 남천을 휘돌아 간다. 자늑자늑 흔들리는 억새의 은빛 왈츠와 물비늘 반짝이는 강물이 평온한 배경이 된다. 문득 저렇게 나란히 동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무량한 방패막이가 되어주던 그를 대신해 때로는 내가 우산을 들고 함께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무탈하고 평범했던 일상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기적인가. 꿈에서도 다시 접하고 싶지 않은 지난 몇 달간의 악몽은 앞으로의 삶을 리셋하라는 신호인지 모른다. 일찍이 발견한 덕에 커다란 암초는 비켜섰지만, 그것은 나에게 순항의 깃대를 바로 잡으라는 바람이었지 싶다.
그런데 어쩌랴.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갑자기 앉은 자리가 버겁다. 수술을 받고 퇴원하던 날에도 마지못해 조수석에 앉아서는 “왼쪽, 왼쪽으로 붙는 게 좋아.”하며 미덥지 못한 나를 이끌어주지 않던가. 애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가 선두 지휘하는 편이 나을 거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습관처럼 오늘 역시 숙소도 교통편도 모른 채 그저 따라가고 있다. 지도와 일정표를 들여다보던 그가 안경을 콧등에 걸고는 자울자울 졸고 있다. 물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큰소리치던 호기는 간데없고, 근육이 빠져나가 주름진 손등에는 핏줄이 튀어나왔다.
저 손으로 또 가방을 끌 것이고. 나는 언제나처럼 쫄랑쫄랑 따라갈 것이다. 마음만은 홍시 빛 슈룹1)이 되어.
1) 슈룹: 우산의 순우리말
추천 콘텐츠
튤립 축제, 그 후 이혜숙 봄은 해방군처럼 온다. 차갑고 무거운 겨울의 압박 아래 숨죽여 기다린 끝에 머지않아 그들이 당도할 거라는 은밀한 전갈이 바람결에 퍼지기 시작한다. 남쪽부터 입성했다더라, 하루에 몇 킬로미터씩 좁혀 올라온다더라, 여기저기서 승전고가 날아온다. 봄 여왕을 호위하는 꽃 부대의 군화 소리는 얼마나 당당하고 경쾌한가. 무혈입성! 동토에서 해방을 맞은 사람들은 밖으로 뛰어나와 팔 벌려 환영한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고 무엇이라도 해낼 것 같은 의욕이 넘친다. 꽃 부대의 행렬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사람들은 먼저 마중 가기도 한다. 꽃구경이 그것이다. 도시의 가로수가 새순을 틔어 봄이 왔음을 알리지만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은 더 강한 꽃 세력에 끌려 길을 나선다. 꽃도 많이 모여 있어야 더 빛나고 눈길을 끌기 때문에 군락을 이룬 꽃들을 ‘꽃 세력’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열 평보다는 백 평에, 백 평보다는 천 평에, 아니 만 평에 세력을 부린다 한들 그 정복을 마다할까. 우리가 꽃을 보면 저절로 허리를 굽히게 되는 것도 자발적 항복이 아닐까. 내가 꽃 세력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은 것은 재작년 ‘튤립 축제’에서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유채꽃을 놓치지 않으려고 4월 초에 제주도로 날아갔다. 가시리의 녹산로에 끝없이 이어진 유채꽃과 그 위에 넘실대는 벚꽃 구름을 보았고, 마침 ‘튤립 축제’를 한다는 곳이 있어서 찾아갔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니 축제 기간은 전날까지였단다. 수만 평의 정원에서 만난 튤립 군락, 과연 대단한 위세였다. 튤립은 봄 여왕으로 가장 어울리는 꽃이었다. 꽃송이 왕관에 잎사귀 검을 찬, 더구나 황금 주머니는 뿌리에 묻어 두었으니 부(富)까지 겸비한 막강한 군주일 터. 그 넓은 정원을 유유자적 걷자니 기분이 꽤 좋았다. 그 시간만큼은 내가 네덜란드 귀족이었다. 300여 년 전의 귀족들은 튤립 구근 하나에 집 한 채 값도 아끼지 않았다는데, 나는 수만 평을 채운 튤립에 둘리어 있으니, 집 한 채가 대수인가. 도시를 넘어 나라 하나를 통째 살 수도 있을 게다. 가늠할 수 없는 화폐를 세면서 거만한 걸음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아주머니 몇이 부지런히 튤립을 뽑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축제는 끝났지만 아직 한창인 꽃을 잡초 뽑듯 걷어 내는 것이었다. 한껏 들떠 있던 감상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아주머니, 멀쩡한 꽃을 왜 뽑아요?” “다음 주부터 다른 꽃 축제가 있어서 치워야 한답니다.” “어디다 보관하나요?” “웬걸, 다 버리는 거지.” “이 많은 걸 다요?” “그러게 말이요. 이게 다 돈지랄들이지.” 빨강, 노랑의 원색뿐 아니라 분홍, 보라, 흰색, 흑자색의 각가지 색 튤립들이 무참히 쓰러져 있는 현장을 보니 처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ldqu
- 최고관리자
- 2024-11-04
바람이 사람을 세운다 이혜숙 며칠 만에 제주도에 내려왔다. 공항버스 종점에 내리자마자 바람이 양팔 벌려 맞이한다. 앞을 막고 포옹하자 하고, 한 걸음도 못 걷게 발목을 휘감는다. 격해도 너무 격한 환영 인사. 휘청대는 걸음으로 주차한 자동차에 도달해서 문을 여니, 이번엔 문짝을 뜯고 들어와 앉을 기세다. 양손으로 힘껏 끌어당겨 겨우 닫자 차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큰소리로 외친다. “나 보고 싶었으면서 왜 보자마자 내빼려고 해?” 마음을 들킨 것 같지만 보고 싶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상대. 마주 서려 해도 뒷걸음질 치게 하는 존재. 나보다 기가 센 사람을 만나면 피하기부터 하는데, 제주의 바람이 그렇다. 그러니 숨 막히도록 달려드는 바람을 피해 차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바람을 피하자 비로소 바람이 느껴진다. ‘역시 제주 바람!’ 용인 집에 있는 동안 왠지 자꾸 가라앉는 기분이 그거였다. 바람이 불지 않아 움직이지 않는 나무며 풀이 시르죽어 보였던 것. 걸어 다니는 사람조차 축 처져 보였다. 나도 생기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무슨 일을 해도 의욕 없이 하는 기분이었다. 왜 그랬는지를 제주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어느새 제주의 바람이 익숙해졌음을. 그러면서도 강풍이 부는 날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안에서 보기만 했다. 나무를 사정없이 흔드는 바람, 바닥에 떨어진 비닐을 하늘 높이 올려 버리는 바람, 구름을 흩뜨리는 바람, 밤에 들으면 파도 소리로 착각하게 하는 바람···. 육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바람이었다. 두려우면서도 역동성에 감탄하곤 했다. 용인 집과 제주의 거처를 오가면서 며칠만 지나면 산소 부족이기라도 한 듯 답답하다가 제주에 도착한 순간 결이 다른 바람에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감당할 자신이 없는 상대에게 알게 모르게 끌리듯이···. 다음 날 종달리에 갔다. 수국 철이면 해안도로 양쪽에 파랑, 보라, 분홍의 수국이 수국수국 피는 곳이다. 제주의 여름이 종달리 수국에서 시작하기라도 하듯. 우도 가는 선착장 가까이에 있는 ‘오늘 종달’이 내가 자주 가는 카페다. “오늘만 살 작정으로 지은 상호 같네요.” 내가 농담을 건네자 주인 여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오늘 하루 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지나간 어제도 오지 않은 내일도 오늘 없이는 있을 수 없을 터. 주인의 강단 있는 성격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날 우리는 바람에 관해 이야기했다. “제주에서 오십 년 산 사람이 서울로 이사 가서 가장 먼저 느낀 게 풍경이 죽은 것 같더래요. 바람이 바람 같지 않다더니,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하겠어요.” “섬 바람이 다르긴 다르죠. 사방이 바다라 막아 줄 무엇도 없으니. 센 날은 세게 부는 대로 약한 날은 약하게 부는 대로 바람을 따를 수밖에요.&rdqu
- 최고관리자
- 2024-11-04
어머니의 손 조원희 승전보를 알리는 아군의 깃발 같다. 고통도 잊어버린 손가락 끝마다 허연 반창고가 붙었다. 물밀 듯이 밀려온 고난과 시련도 모성애의 힘으로 거뜬하게 물리친다. 적군의 성벽 위에 필사적으로 오르는 아군의 함성처럼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감동의 소용돌이. 곱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너무도 곱고 아름다운 손이다. 볼수록 민망하고 안쓰럽다. 크고 두툼한 손이 손가락마저 굵다. 손등과 손바닥 살결이 오랜 가뭄에 지친 논바닥처럼 갈라져 노송(老松)의 껍질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랑을 만든 손가락 끝마다 피가 새어 나온다.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허연 반창고로 갈라져 피가 새어 나오는 손가락 끝을 대충 땜질하고는 생활 전선을 종횡무진 누빈다. 마치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부러뜨리고 비장한 각오로 적진으로 달려가는 용감한 장수를 보는 듯하다. 갈퀴 같은 손이 장사(壯士)의 힘을 지녔다. 열 개의 손가락이 소나무 뿌리같이 꿈틀거린다. 치열하게 살아온 손임을 누구라도 알아채겠다. 분투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한 뼘의 손에 모였다. 감출 수도 없는 손. 도저히 여자의 손이라고 할 수 없는 투박하고 큼직한 손은 막일꾼 장정의 손보다 억세다. 희고 고와야 할 손은 아니더라도 부드럽게 가꾸어야 하는 게 여자의 손이건만 그런 손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어머니는 가난한 어부의 아내였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은 약을 올리듯 늘어났다. 아버지가 생선을 잡아 오면 어머니는 동네 아낙 서넛과 함께 생선을 머리에 이고 새벽이든 밤중이든 가리지 않고 팔러 나갔다. 생선을 빨리 팔아야 했기에 세상을 밝음과 어둠으로 나눌 겨를이 없었다. 버스와 시계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가난한 시골에는 버스도 시계를 가진 자도 드물었다. 어머니는 먼 길을 걸어 걸어서, 고을고을 집집마다 다니며 생선을 팔았다. 나는 언제나 버릇처럼 해가 중천을 넘어서면 마을 어귀로 어머니 마중을 나갔다. 그곳에서 어머니가 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렸다. 어둠살이 내려도 개의치 않았다. 여섯 살 터울 여동생을 등에 업고 생선을 보리쌀로 바꾸어 이고 올 어머니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여동생은 내 등에 오줌을 싸고도 따개비처럼 찰싹 붙어서 꼼짝을 안 했다. 뜨뜻한 오줌이 버젓이 등을 차지하면 등의 반기가 만만찮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중이 더 중요했기에 망부석이 되어 앙버티었다. 어머니가 보리쌀을 머리에 이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기다림으로 지쳐 있던 얼굴이 제일 먼저 환호성을 질렀다. 내게 개선장군보다 더 당당하고 위대해 보였던 어머니. 어쩌면 나는 어머니보다 든든하게 내 배를 채워 줄 보리쌀을 더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구수한 밥으로 부풀어진 배를 쓰다듬으면 하루의 임무를 완수한 것 같아 뿌듯했다. 가난은 모성애도 무용지물로 만든다. 그토록 자식을 지키려 애를 썼건만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아홉 살 터울 큰오빠는 중학교를 끝으로 머구릿배1) 선원이 되었다. 아직은 투정 부릴 나이에 눈물을 훔치며 험난한 바다로 나가는 아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 최고관리자
- 2024-11-04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