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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꿈: 길가메시 서사시」 외 1편

  • 작성일 2022-09-23
  • 조회수 1,111

[아르코문학창작기금 - 수필]






영생의 꿈: 길가메시 서사시



유서연




ㅇ 1999년. 어린 시절 이 숫자는 언제 보아도 내게 서늘한 공포를 안겨다 주었다. 몇백 년 전 프랑스에서 살았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의 유명한 예언자는 1999년이 지구 종말의 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텔레비전이나 소년 잡지를 통해 접한 1999년 지구 멸망의 해는 그 종말에 알맞은, 9가 세 개나 겹쳐 있는 숫자만큼 내게 너무 아득하고 멀면서도 너무 가까워서 섬뜩했다. 그때까지 나는 살아 있을까? 그때까지 나는 연애나 결혼은 해 보고 죽는 걸까? 아마도 가족, 친척을 포함해 인류 모두가 함께 사라지는 것이니 혼자서 죽는 것보단 좀 덜 무서울 수도 있겠지. 한편으로는 나와 가족, 친구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소중한 터전인 지구가 모두 날아가거나 폭파돼버리는 상상은 혼자 죽는 상상보다 더욱 끔찍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는 1999라는 년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 무서운 숫자가 임박하지 않도록 시간이 거꾸로 흐르거나 아주 천천히 흐르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시간은 결코 역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늘 앞으로 앞으로 1999라는 숫자에 가깝게 전진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1999라는 숫자는 애써 억누른 무의식 속에서 항상 의식 안으로 솟구쳐 오를 수밖에 없던 중, 1999년은 오고야 말았다. 그해 여름 나는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며 파리의 한 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 당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이자 자칭 예언자인 파코 라반이 1999년 8월의 어느 날 미르 위성 정거장이 추락해 파리가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이미 일가친척과 자신의 회사 직원들을 파리에서 철수시켜 지방으로 안전하게 피신한 후였다.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태생이 겁보였던 탓에, 파코 라반이 지정한 그 날짜에 어학원을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어학원 선생님도 8월 어느 날 오후에 파코 라반이 파리가 화염에 휩싸일 것이라고 예언했다는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그날 수업시간에 우리 교실도 화염에 휩싸일 텐데? 하며 지나가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언급을 했던 차였다. 나는 고민했다기보다는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위성이 떨어지건 말건, 파리가 화염에 휩싸이건 말건 간에, 시험 준비를 위해 어학원을 나가야 했으므로, 나는 바로 그 정해진 날 오후에 강의실에 새파랗게 질린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안심을 하긴 했지만 일말의 실망감도 있었던 것 같다. 파코 라반이고 노스트라다무스고 예언가들의 말은 믿을 수 없는 헛소리인가?
그리고 그 다음해 1월, 파리의 전철에서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고를 목격했다. 바로 1999년 지구 멸망을 예언해서 나와 여러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초상화 이마에 변기 뚫기가 박혀 있는 사진이었다. 불경스럽고 질 낮은 유머. 어이, 노스트라다무스 선생.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한다 했는데, 지금 2000년이 됐어. 이거나 먹어, 라는 오만하고 조롱스러운 서구인의 어퍼컷.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해가 몇 해 오차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이들 파리 광고쟁이들은 어쩌자고 저렇게 선 넘은 유머로 존재할 수도 있을 영적인 존재를 조롱하는 것일까? 그것은 지구 멸망으로 인해 ‘나’라는 작은 개체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공포,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한 점 먼지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나라는 개체가 지닌 자의식과 개성이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한순간에 멸절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넘어서는 어떤 불쾌하고 기분 나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났고, 나는 서울 주변의 한 도시에 위치한 우리집, 작업방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돌이켜 보니, 그때 무신론자였던 내가 지녔던 불쾌한 감정의 정체가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외경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현재적 시점에서 말하자면 그 감정은 우리 눈에 항상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항상 그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조롱할 때 느끼는 기분 나쁜 정서와 맞닿아 있다. 자본주의 개발의 논리에 의해 아파트를 짓기 위해 깎이고 파괴되어 가는 산을 바라볼 때 느끼는 슬픔, 기후 변화로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져 북극의 빙하는 녹아서 해수면은 상승하여 머지않은 시점에 대륙의 많은 부분이 물에 잠길 것이라는 미래가 예측될 때의 절망스러운 마음, 나날이 뜨거워지는 폭염이 지나고 잡히지 않는 대규모 산불을 바라볼 때의 공포감은 아무래도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고 돌봐야 할 집인 지구와 지구 생태계에 대한 외경심과 동떨어져 있는 정서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 혼자서 플라스틱과 비닐을 덜 쓰기 위해 노력하고 옷을 덜 소비하기 위해 노력해도, 우리 지구는 조만간 플라스틱과 옷 쓰레기로 넘쳐날 것이라는 전망, 그리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소비하는 집의 전력과 난방 등에 필요한 도시가스, 내가 이용하는 대중교통인 버스를 움직이게 하는 석유 등의 화석연료를 나 역시 쓸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현실 속에서 나는 1999년의 나와는 또 다른 종류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 화석연료 사용과 무차별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이 야기한 기후위기 시대, 이대로 가다간 인류가 멸종하는 것이 자명하다는 사실에서 나는 절망과 공포, 그리고 우울함을 느낀다.
수메르 민족의 설화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다 보면, 인류 멸종을 앞두고 내가 느끼는 공포와 우울증을, 시대와 환경이 완전히 다르지만 아주 예전의 고대인들 역시 느끼고 있음을 확인한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대략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르크를 다스린 왕 길가메시의 삶과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메르 신화에 등장하는 대홍수는 성경의 노아의 방주를 연상하게 하는 사건인데, 이 대홍수 이후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르크의 제5대 왕이 길가메시다.
이 서사시에 따르면, 신들은 길가메시를 창조할 때 그에게 완전한 육체와 아름다움, 그리고 용기와 거대한 들소 같은 강한 힘을 주었다. 따라서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르크에서는 그의 힘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방자함은 끝이 없어, 그는 노역을 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빼앗아 가고, 도시의 딸들과 아내들을 뺏어 색욕을 만족시켰으므로, 우르크의 백성들에겐 불평이 끊이지 않았다. 신들은 그들의 호소를 듣고, 창조의 여신 아루루에게 길가메시에 대적할 만한 짝, 두 번째 자아를 만들도록 종용했다. 여신은 우르크의 신인 고집불통 아누의 모습에 따라 진흙으로 형상을 만들어 엔키두가 태어나도록 했다. 거친 몸뚱이에 긴 머리칼을 갖고 있는 엔키두는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 길가메시에게 대적할 만했다. 어느 날 우르크의 한 곳에서 결혼식이 치러졌고, 신부가 신방에 앉아 신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길가메시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신부를 겁탈하기 위해서 신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엔키두는 길 한복판에 막아서, 다리를 벌리고 그를 못 들어오게 했다. 엔키두와 길가메시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황소처럼 싸움을 시작했으나, 그 싸움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길가메시는 그의 어머니 닌순이 예언했듯 엔키두에게 “마치 여인을 사랑하듯” 끌렸고,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서로 끌어안았고, 이렇게 그들의 우정은 싹트기 시작했다. 이렇게 그들의 브로맨스의 여정이 시작된다.
그들은 함께 향나무 숲속으로 모험을 떠나, 그곳을 지키고 있는 난폭한 거인 훔바바를 죽이기도 하고, 길가메시에게 사랑을 거절당한 여신 이시타르가 복수심에 불타 우르크에 보낸 하늘 황소를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엔키두는 훔바바와 하늘 황소를 죽인 대가로 신들의 노여움을 사, 병이 들어 죽게 된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엔키두가 죽자 큰 충격과 비탄에 휩싸인다. 그리고 아무 거리낄 것이 없이 살아오던 그도 비로소 죽음의 공포,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들이 모두 피해 갈 수 없는 멸절의 공포와 깊은 절망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그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즉 뺨은 여위고 얼굴은 어두우며 가슴에는 절망을 품고 긴 여행을 마친 자의 피곤한 얼굴을 한 채, 영생을 얻기 위해 대해를 건너 영생을 얻은 한 사람, 우투나피시팀을 만난다. 우투나피시팀은 대홍수 직전에 배를 만들어 살아남았고, 신의 축복 하에 그와 그의 아내는 강들의 입구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 우투나피시팀은 신들의 비밀인 대홍수 사건에 대해 길가메시에게 설명해 주고, 그를 다시 인간세계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인간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길가메시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영생을 얻은 우투나피시팀이 길가메시에게 이야기해 준 대홍수 사건, 신들의 비밀이다. 그에 따르면,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슈루르팍이란 도시가 있는데, 그 도시를 주관하는 신들이 세상 사람들의 소란함과 시끄러움에 지쳐서 그들을 모두 홍수로 쓸어내리는 계획을 세우고, 대기와 폭풍우의 신 엔릴이 이 일을 맡았다. 그런데 물결과 운하를 다스리는 신인 에아가 우투나피시팀의 꿈에 나와 신탁을 통해 이 일을 알려 주게 된다. 그리고 큰 배를 만들어 살길을 찾되, 배에 모든 생물의 종자를 실을 것을 그에게 명한다. 우투나피시팀은 7일 만에 큰 배를 만들게 되고, 그의 소유물, 금과 짐승들―길든 것이나 길들지 않은 것이나 가리지 않고―가족과 친척, 그리고 일꾼들을 태워, 예정된 날 배를 띄웠다. 마침내 예정된 날부터 엿새 낮과 엿새 밤 동안 폭풍우와, 태풍 그리고 홍수가 일어나 지상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지만, 우투나피시팀과 그의 배에 탄 사람들과 동물들은 무사했다. 이레째 되는 날, 물이 빠지자 우투나피시팀은 모든 것을 사방에 풀어 놓고 땅 위에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그러자 폭우와 홍수로 인해 인간들이 절멸당한 것을 보고 두려움과 후회에 떨던 신들이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제상에 모여드는 파리들처럼 몰려들었다.” 이후 인간들을 홍수로 쓸어 버린 일을 맡았던 신 엔릴은 대홍수를 피하게 해준 신 에아의 설득 하에 우투나피시팀의 꿈에 나와 우투나피시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한 후, 그와 그의 아내가 강들의 입구에서 영원히 살 수 있게 했다.
이 대홍수 설화는 수메르어로 구전되다가 기원전 2,000년 전 수메르인이 셈족에게 정복된 이후 셈족의 ‘학식 있는 언어’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성경보다 2,000년 앞서 기록된 것으로 노아의 방주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판독한 N.K. 샌더즈에 따르면,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3,000년경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대홍수와 대홍수 직후의 시기는 “신 대신 인간이 도시 국가의 왕좌를 차지하던, 설화와 역사의 초창기인 선사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이것은 고대 수메르 문명의 시대였다.” 인류가 기억하는 이 대홍수 시기가 어느 연대까지 올라가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빙하기와 간빙기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다, 약 1만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로 접어든 것을 보자면, 인류의 문명과 농경사회가 시작된 그 시점까지 올라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수메르의 신화와 성경의 노아의 방주에 나타나는 대홍수 설화는 알래스카와 그린란드를 비롯해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1만 년 전에서 기원전 3,000년 전 사이라고 추정되는 한 시기에 인류 공통이 경험했던 대홍수가 있었고, 여기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대를 이어 인류가 번창했던 것은 아닌가 상상해 본다.
샌더즈는 이 서사시에서 발견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인간과 삶과 세계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는 빈번한 가뭄과 홍수, 외세의 침공 등 그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힘과 권력을 가졌던 길가메시도 친구 엔키두의 죽음에서 삶에 대한 비관적 태도를 가지게 되며, 죽음의 공포와 이로 인한 우울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한 때 끝 간 데 모를 것 같이 뻗쳐오르던 야망 어린 영웅도 결국 인간이며, 인간의 야망은 죽음이라는 종말 앞에 모두 헛되고 헛된 것이라는 세계관이 이 서사시를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길가메시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간 바닷가에서 만난 술 만드는 여인이 한 충고대로,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밤낮없이 춤추며 잔치를 벌이고, 어린 자식을 낳고 배우자를 품에 꼭 안아 주는 등 삶을 즐기는 것이 길가메시를 비롯해 죽음을 향한 모든 인간이 삶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다. 정말로 과연 그러할까?
나는 고대 수메르인들이 가졌던 비관적인 세계관과 죽음 앞에서의 절망감이 혹시 대홍수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헨리 프랭크포르트가 서술한 대로 “언젠가는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이 인간 사회를 멸망시키려는 공포 분위기”에 따른 불안과 공포감은 대홍수로 인해 인간과 동물들이 멸종 직전의 상황까지 갔었고, 이로 인해 자연 앞에 섰을 때 인간이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갖게 되는 경외심과 슬픔과 우울함이 아닐까 한다.
현재 기후 변화로 인해 지구상 6번째 대멸종 위기를 앞두고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전의 다섯 번에 걸친 멸종이 지각변동과 같은 자연적 원인으로 일어난 것과는 달리, 6번째 멸종 위기는 18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 석탄과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탄소 배출, 그로 인한 지구 온난화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이는 지구의 자원은 무한하여, 화석연료를 비롯해 지구의 온갖 자원을 끝없이 채굴할 수 있다는 근대인의 세계관과 맞물려 있다. 이러한 시대, 해마다 높아지는 기온과 폭염, 높아지는 해수면을 보며 느끼는 인간의 공포감과 우울감은 길가메시가 느꼈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원인이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대로 가다간 해안가는 물론 세계의 대륙들이 많은 부분 물에 잠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단지 예언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을 통해 예견되고 있는 사태이다. 우리는 또 한 번 대홍수를 겪고, 멸종해 갈 것인가?
현재 나타나고 있는 기후 변화 앞에서 사람들이 미래와 희망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절망과 슬픔, 무력감과 우울감, 그리고 불안감이라는 ‘기후 우울증’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기후 우울증을 체험하고 전면적으로 가시화한 인물이 스웨덴의 청소년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이다. 나오미 클라인이 『미래가 불타고 있다』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그레타는 여덟 살 무렵에 책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기후 변화에 대해 배우기 시작하면서, 기후 변화로 인해 다양한 생물종이 사라지고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기후 변화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의 화석연료 사용과, 대량의 육류 소비, 특히 소고기 소비―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넓은 면적의 숲과 나무를 뒤엎어 소 목장이 세워지므로―로 인해 초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그레타는 열한 살 무렵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녀를 슬픔과 무력감에 빠지게 한 것은 지구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어 가지만, 이를 제지할 권한을 가졌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 특히 북반구의 소위 부자 나라들의 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 때문이었다.
먹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 그레타의 병은 점점 더 깊어졌고, 결국엔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게 되었다. 자폐증을 가진 사람들은 특정한 영역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는데, 그레타의 경우, 기후 위기에 대해 배우면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공포감과 슬픔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이 문제에 무관심한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그 공포감과 슬픔은 더욱 깊어져 갔다. 지구가 점점 더 뜨거워지면서 발생하는 극단적인 기상 변화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폭염과 가뭄, 태풍과 홍수, 산불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이제는 그레타 툰베리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기후 위기로 미래와 희망이 사라졌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기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슬픔과 불안의 정서는 아마도 1999년이라는 연도를 떠올릴 때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느꼈던 공포와 불안과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나’라는 개체의 멸절뿐만 아니라 인간종, 생명체들, 더 나아가 지구 멸망의 해라니. 우주의 크기를 가늠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던 내게 거의 전부의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라는 행성이 없어진다는 것이 너무 무섭고도 슬펐다. 자신들의 현재가 영원할 것이라 믿고, 지구의 자원도 무한할 것이라 믿었던 근대인들은 어쩌면 젊은 날의 길가메시처럼 영생과 불멸의 삶을 꿈꾸었는지 모르겠다. 태어남과 병들고 노쇠함, 그리고 죽음이라는 개체의 종말, 더 나아가 인간종과 지구의 종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원을 고갈시키고 많은 생명체들을 멸종에 이르게 한 그들 덕에, 그리고 현재에도 여전히 끝없이 질주하는 사람들 덕에, 우리는 엔키두를 잃고 죽음의 공포와 우울함에 시달리던 길가메시처럼 높아져만 가는 해수면을 바라보며 공포와 슬픔을 느낀다.
그레타 툰베리는 자신이 배운 것과 자신과 가족의 생활방식 간의 간극을 메우고, 실천을 통해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탄소를 다량으로 배출하는 비행기 여행을 자제하고 육류 섭취를 하지 않는 생활상의 실천에서, 금요일마다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라고 쓴 표지판을 들고 스웨덴 의사당 앞으로 가서 1인 시위를 하고, 세계 각지에서 기후 문제에 대해 연설을 하는 정치적 실천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러한 그녀의 실천을 평범하고 겁이 많은 사람인 내가 모두 따를 수는 없다. 1999년 지구 멸망이라는 공포에서는 벗어났지만, 하루하루 숨 쉬며, 아직은 부족하지 않은 식량을 먹으며 살고 있는 것이 기적인 듯 여겨지는 현재, 기후 변화가 주는 우울함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천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 지름길은 영생과 불멸의 삶을 꿈꾸는 대신, 필멸이라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의 조건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살고 죽고 다시 태어났던 지구와 생명의 두터운 시간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리라.









유토피아/디스토피아 속의 시간






4세기 무렵 중국 후난성(湖南省)의 무릉(武陵)이라는 지역에 어부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올라가다 계곡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배를 저어 갈수록 계곡 양쪽 물가에 향긋한 복숭아나무 꽃들이 만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배를 타고 올라가니 계곡물이 솟아 나오는 수원 근처에 작은 동굴이 있었고 안에는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어부는 호기심에 사로잡혀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동굴 밖에는 평탄하고 손질이 잘된 대지와 논밭, 아름다운 연못과 대나무 숲이 있었다. 그리고 잘 닦인 큰길과 큰 집들이 있었고 집안의 뜰에서 개 짖는 소리와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모습도 여느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모두 한가롭고 즐거운 모습이었는데, 그들은 어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며 어디서 왔냐고 묻고,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가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며칠 후 어부가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려 하자, 그들은 이 마을에 대해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어부는 마을을 나와 원래 장소에 있던 배를 타고 자신의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을 관리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이에 관리는 어부와 부하를 동행시켜 마을을 찾으려 했지만, 복숭아꽃이 만발한 그 마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쓴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 즉 중국인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 낙원의 모습이다.
무릉도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세계처럼 금은보화가 넘쳐나거나 화려한 경관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그곳의 풍경은 평화롭고 한갓지며 사람들은 모두 한가롭고 여유가 있다. 노인과 아이들은 있어도 딱히 계급이나 성별, 연령에 따른 상하 관계가 보이지 않는 평안한 곳이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평화롭고 여유로운 공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은 더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다. 선계의 시간에 대한 다른 중국의 설화는 그곳의 시간이 인간 세상의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디게 흐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4세기 무렵 중국 산둥성에 있는 어떤 마을에 사시사철 맑은 물이 솟아 나오고 간혹 참외 잎이 흘러나오는 ‘과혈’이라는 동굴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 동굴로 들어가자 선계가 나왔고, 머리가 새하얀 선인이 두 사람 있었는데, 그들은 이 남자에게 돌아가라고 이곳에 오래 있으면 좋지 않다고 일러 바로 나왔는데, 구멍 끝에 참외가 있었다. 그 참외를 따려고 손을 뻗었더니 참외는 돌로 바뀌었다. 집에 돌아오니 그 남자의 아내가 그가 나간 지 40년이 지났다고 말한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라는 한국의 속담도 이처럼 선계의 시간과 일반 세상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다르다는 중국의 설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떤 구멍을 통해 들어간 나무꾼이 선계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구멍을 통해 이 세상에 돌아와서, 자신의 증손자와 마주친다는 것이 이 속담에 얽힌 얘기이다. 위의 설화들은 아인슈타인에 앞서, 시간은 상대적이며, ‘지금’이라는 시간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간이란 신장성을 가지지 않은 점적인 ‘지금’의 연속이었으며, 수와 관련해서 측량 가능한 것이었다. 즉 이전은 이미 없고, 이후는 아직 없으며, 있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다. 지금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금, 즉 지금, 지금, 지금으로 무한히 계속된다. 시간이란 이러한 지금의 연속이며. 시간을 수로 센다는 것은 수를 통해서 ‘이미 없음’과 ‘아직 없음’ 사이에 있는 지금의 차원에서 지금의 이행을 세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은 운동 및 수와 관련시켜 파악함으로써 시간의 측정을 가능하게 하는 통상적이고 과학적 시간, 자연 시간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부활하여 감각적인 사물이나 운동으로부터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하며, 무한하고 균질적이며, 연속적으로 흐르는 뉴턴의 절대 시간을 낳는다. 그러나 스위스의 베른 특허 사무소에서 기차역들의 시계 조율과 관련한 특허 임무를 담당했던 젊은 날의 아인슈타인은 ‘지금’이라는 것은 상대적일 뿐, 엄밀한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했다. 중력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평지에서의 시간은 중력에 덜 영향을 받는 산에서보다 느리게 흐르며, 더 적은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멈춰 있는 물체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르며, 더 적은 시간이 흐른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제트 비행기에 초정밀 시계를 장착한 결과, 비행 중의 시간이 평소보다 느리게 흘렀음이 확인되었다.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는 우주의 비행선에 탑승한 사람들에게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릉도원은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지는 않을지라도 일반 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곳인가? 이러한 과학적 탐구는 과학적 지식과는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의 주제는 아니다. 다만 무릉도원이라는 선계의 시간은 일상적인 현실 세계의 시간과는 달리 더 느리게 시간이 흐르는 곳임은 확실하다. 선계는 ‘시간의 낙원’인 셈이다.
이러한 시간의 낙원은 어떤 점에서 보면 미국의 페미니즘 SF 소설에서 종종 제시되는 여성들의 유토피아와 유사하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B급 소설이라는 장르에 속할 수 있는 페미니즘 SF 소설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종류의 소설은 페미니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가정 내에서나 사회 속에서나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경우, 비정상으로 간주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여성, 혹은 가정에 유폐되어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미쳐 가는 여성, 사회가 권유했던 롤모델의 장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 시스템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여성들에게 괴로운 현실을 잊게 해 주는 이상향, 일종의 여성들의 선계인 셈이다. 그 세계는 성별이나 피부색, 나이, 계급에 따른 차별이 없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상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세계를 그리는 소설이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1976)이다.
이 소설은 코니라는 한 여성의 몸을 관통하는 성별, 피부색, 계급, 정신병력 속에서 그녀가 지향하는 이상세계를 날실과 씨실을 엮어 가듯이 촘촘히 보여 준다. 코니는 30대의 하층민 멕시코계 유색인종 여성으로서 남편은 실종 상태이고, 딸이 하나 있지만 그 딸에 대한 아동학대로 조사를 받았으며, 알코올 의존증과 정신 이상이 감지되어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그녀를 특징짓는 모든 조건은 백인 중산층 이성애 중심주의의 당시 미국 사회에서 규정하는 ‘정상’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수감된 정신병원에서 풀려난 코니는 작은 아파트에서 복지국의 생계지원으로 살아간다. 이 소설은 이런 코니에게 그녀의 약혼자에게 폭행당한 조카 돌리가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돌리의 약혼자는 그녀를 성매매로 몰아넣고, 화대를 가로채는 악질 포주이다. 그는 돌리가 코니의 아파트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아파트에 들이닥쳐 돌리를 보호하려는 코니를 폭행하지만, 오히려 코니가 그를 폭행한 것으로 치부돼 코니는 다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한다. 경찰이건, 정신병원 관계자이건, 한 차례 정신병력이 있었던 코니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병원에서 코니는 2137년을 살아가는 ‘루시엔테’라는 미래의 여성과 우연히 접속한다. 루시엔테가 보여주는 ‘메터포이세트’라는 세상은 코니가 살아가는 1970년대 미국의 밑바닥 하층민 유색인종 정신병자 여성이 바라보는 세상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출산은 여성에게 권력인 동시에 차별을 낳는 기제이므로, 모든 아이들은 인공생식을 통해 바다 같은 통속에서 배양되고 길러지며, 태어난 아이들은 성별과 인종이 다른 세 명의 어머니를 갖는다. 남성도 호르몬 조절을 통해 젖을 먹이고 아이를 양육하는 어머니 노릇을 누릴 수 있다. 성별과 인종의 다양함은 지양되지 않고 다양성을 위해 권장된다. 또한 생물학적 출산은 사라지고, 자발적으로 원하는 자에 한해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는 사회이므로, 소위 ‘정인’이라 불리는 애인은 여럿 가질 수도 있다. 배양실에서 태아의 시기를 보내고 성별이 다른 세 명의 어머니에게 양육을 받은 아이들은 사춘기가 오는 12~13세에 독립하여, 먼 정글로 탐험의 길을 나선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은 구분되지 않는다. 루시엔테와 같은 여성은 유전학자이지만 마을의 공동의 노동에 참여하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육체노동이건 정신노동이건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이들은 식당에서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축제나 장례식에서는 공동으로 기쁨이나 슬픔을 나누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에서 그려지는 메터포이세트는 너무 이상적인 사회라서 읽으면 읽을수록 만화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국에 넘쳐나는 그 경쟁적이고 과열된 모성과 한편으론 버려지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 페미니즘 유토피아 사회는 너무 이상적이라서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코니가 접속하는 미래 사회인 메터포이세트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곳에도 생로병사가 있어, 비록 배양실에서지만 아이들은 태어나고 나이든 자는 죽는다. 그러나 이곳의 시간은 도연명의 『도화원기』 속 무릉도원의 시간처럼, 굉장히 한갓지고 여유롭고 느리게 흐른다. 동양 속 선계의 사람들처럼 ‘영생’을 살지는 않을지언정, 경쟁과 비교가 없고 나의 특성이 나의 장점이 되는 그 세계 속에서라면 나는 조금 덜 늙어갈 것만 같다. 타인에게서 받은 모멸감으로 분노하고 나를 잠식할 필요가 없는 세계. 호젓하고 느린 천상의 세계.
그러나 루시엔테와의 접속이 끝나면 코니에게 돌아오는 것은 정신병원에서의 괴로운 시간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있건 없건, 이 병원이 환자들에게 하나의 절박한 디스토피아의 세계임은 분명하다. 코니를 비롯한 공격적인 환자들은 편도핵 제거 수술을 위해 다른 정신병원에 따로 수감이 되고, 두개골을 뚫는 수술을 받고 일종의 무기력한 멍청이들이 되어 가면서 그 디스토피아는 생생하게 그들 앞에 펼쳐진다. 유토피아는 저 멀리 떨어진 미래 세계에서 펼쳐지지만, 디스토피아는 현실 그 자체이다. 한가롭고 느린 쉼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이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에서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사실 어떤 여성들에게는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 그 자체가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이다. 예를 들어, 2021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을 접수하기 전, 카불 공항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가려고 한 사람들에게 그러한 세계가 펼쳐진 것은 아닐까? 여성들이 외출하기 위해선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를 써야 하고, 여성 단독으로는 장거리 여행이 금지되고, 여성부가 해체되며, 그동안 활동해 왔던 여성인권 운동가는 처참하게 살해되는 상황에서, 아프카니스탄의 여성들이 현실로 맞부딪친 세계는 너무 생생해서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여성이 체험하는 시간과 남성이 체험하는 시간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아프가니스탄 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한국의 경우, 남성에 비해서 눈치를 봐야 하고, 남성보다 더 많은 배려와 돌봄을 강요받으며 자라난 여성의 경험, 같은 강도의 노동을 해도 남성에 비해 더 적은 급여를 받아야 하는 여성의 현실. 거기서 남성과는 다른 여성의 시간 체험이 나온다.
때로는 여성이 체험하는 시간이 남성과 다름을 넘어, 여성에게 과연 ‘시간’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지는 상황이 있다. 아무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의 시간, 자신조차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화차>가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간은 의식이며, 기억이다. 기억이 없다는 것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차>는 이처럼 시간과 기억이 없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서연
작가소개 / 유서연

작가. 작품집으로 <공포의 철학> (동녘, 2017), <시각의 폭력>(동녘, 2021)이 있으며, 공저로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과 위험성> (엘피, 2022)이 있다. <문학사상>, <출판문화> 등의 잡지에 칼럼과 에세이를 수록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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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하는 시간」외 1편

스케치하는 시간 류미월 권태는 새로움을 갈구한다. 그렇고 그런 날이 계속될 때 훌쩍 집을 떠나 낯선 여행지를 걷다 보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긴다. 지루한 ‘코로나 19’ 마스크 시대와 어제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갈 무렵 문뜩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그림 그리기가 생각났다. 유화나 수채화보다는 기초를 다지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연필 스케치를 시작했다. 사각사각 슥슥 연필심이 도화지를 채워나가는 소리가 좋다. 사진보다 섬세할 정도로 잘 그리는 중급반 동호인들을 볼 때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가로, 세로줄 긋기를 통해 감각을 익히고 H, 2H, 3H ... 6H, B, 2B, 3B ... 6B 연필을 사용해서 명암을 조절한다. 원기둥 그리기와 머그컵 그리기까지 끝내고 나니 슬슬 재미가 붙으며 오그라들었던 어깨가 펴진다. 시간이 날 때면 주방과 거실에 있는 사물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기본 스케치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야생화를 보면 정성 들여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하나씩 불러내서 스케치북에 그려본다. 나 스스로 ‘자뻑’하며 만족하는 그림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글 쓰는 맛과는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오늘은 머그컵과 친해지는 날이다. 머그컵을 좌우대칭 정확히 파악한 후 비율에 맞게 스케치하고 짙은 색에서 중간색, 흐린 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스케치를 채워나간다. 가로세로 명암을 넣으며 마지막 완성에 다다를 때는 숨소리도 죽여가며 몰입하게 된다. 머릿속을 하얗게 도화지처럼 비우고 오로지 스케치하는 사물만 생각하며 그린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집중 몰입할 때의 순간이 좋다. 신문이나 책을 보다가 살림을 하다가 여유가 날 때 차 한잔하며 사각의 백지를 마주하는 순간은 한여름에 순백의 눈 위를 걷는 것처럼 청량하고 순수해지고 차분해지는 나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첫사랑을 떠올릴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림을 잘 그려보겠다는 욕심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운 부분은 더욱 진하게 하나의 빈틈이라도 있을까 봐 여백을 꽉꽉 채우게 된다. 기초 작업인 구성이 잘못됐을 때는 미련 없이 싹 지우고 다시 그려야 오류를 줄일 수 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내가 그린 게 최고인 것 같고 틀림없어 보여서 한번 그린 건 쉽게 지우지 않게 된다. 안쪽부터 채워나가다 보면 기본 구성이 잘못되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연필로 밀도 있게 채워나가는 것보다 잘못 그린 부분을 지우개로 제대로 지우는 것이 최고의 소묘라는 걸 스케치를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어디 스케치 뿐이랴. 우리의 삶도 자꾸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이고 머릿속도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려야 새것을 받아들일 공간이 커지는 법 아니던가. 스케치하는 시간은 힐링과 치유의 시간이 된다. 기분이 불쾌하고 속상하고 슬펐던 감정이 스케치하는 동안 상처가 아물 듯 기분이 좋아진다. 급하고 덜렁거리는 조급함이 산사(山寺)에서 참선을 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스케치하면서 그림을 완성

  • 관리자
  • 2023-11-15
눈 오는 날의 기호

눈 오는 날의 기호 류미월 간밤에 바른 자세로 잠을 못 자고 뒤척인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자 등 쪽이 불편하다. 이럴 때면 인근에 있는 의료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건강 카페에 가곤 한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서 척추 라인을 온열로 집중 관리받고 나면 통증이 줄어들고 온몸이 개운해진다. 체험 비용은 차 한 잔을 주문하면 된다. 체험을 마치고 넓은 창가 탁자에서 차 한잔하는데 정월의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달리는 자동차 위에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는 여인의 어깨 위에도 꿈꾸는 푸드트럭 위에도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린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가 갓 구운 고소한 빵 내음을 흩뿌리고, 한쪽 하늘에선 깃털 같은 함박눈이 춤추듯 내려와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비릿한 슬픔을 뿌리고 간다. 어느 정도 함박눈이 퍼붓고 난 하늘이 맑아졌다. 하늘도 먹먹한 제 무게를 감당 못 할 때는 펑펑 소리 내 울듯 함박눈이 되어 내리는가 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시는데 묵은지 같은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친구도 눈 오는 날 친구가 그리웠나 보다. 느닷없이 먼 옛날 함박눈이 내리던 날 퇴근 후 명동거리를 빙빙 배회하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20대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친구와 명동 골목 식당에서 낙지 덮밥을 먹으며 사는 게 매운 건지 음식에 고춧가루 때문인지 눈물 반 콧물 반을 흘리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고달픈 삶을 서로 토닥이며. LP 판을 틀어주는 음악다방 구석진 자리에서 신청 곡을 메모지에 적어 DJ 박스에 건네곤 그 곡이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듯 감격하며 듣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추억에 빠졌다가 의료기 체험 카페 문을 밀고 나서려는 순간 손을 힐끗 봤다. 거칠고 주름진 손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거리를 걸었다. 눈은 먼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오다 사선으로 흩날리다 소리 없이 내린다. 가로수와 고층 빌딩과 벤치와 로드킬 당한 생쥐 몸 위에 소복소복 말없이 이불을 덮어주듯 내린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미웠던 사람의 얼굴도 불현듯 스쳐 간다. 눈은 묘한 마력이 있다. 눈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멍하게 ‘눈 멍’을 때리고 정지된 화면처럼 있으면 머리를 옥죄던 근심 걱정이 지우개로 쓱쓱 지운 듯 잠시 사라진다. 요즘 들어 집안 살림살이에서도 잘 안 쓰는 그릇이나 옷과 책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를 큰맘 먹고 버리고 있다. 버리고 나니 공간이 넓어지고 마음마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주방을 드나들 때면 그릇장에 남겨진 그릇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집은 좁다고 투덜대며 넓혀갈 생각만 할 일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고 나서 집이 몇 평은 넓어진 느낌이다. 중년에 접어든 삶은 무조건 더하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때로는 빼기를 잘해야 편안한 삶이 된다는 걸 공감하고 있다. 되지 않을 것들을 붙잡고 있으면 에너지가 방전되고 화가 깊어져서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된다. 요즘 들어 아니다 싶은 것들은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물건이

  • 관리자
  • 2023-11-15
「상처가 주는 울림」외 1편

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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