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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짝이 있는 집」외 1편

  • 작성일 2023-09-15
  • 조회수 512

삽짝이 있는 집

정영태


   생각만으로도 그리움이 샘솟는다. 잊을 수 없는 고향마을, 이젠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초가지붕 위에는 하얀 박이 주렁주렁 달리고 싸리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대문. 살아가면서 좋지 않은 기억은 지워지고 행복했던 추억은 그리움이 되어 나이가 한 살씩 보태질수록 삶에 크나큰 지탱이 된다. 

   정겨움이 묻어나는 사립문, 지금은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따로 없다. 현관문을 닫으면 끝이다. 그 옛날 다정했던 이웃사촌은 어디로 갔는지 옆집도, 앞집도, 누가 사는지 모른다. 어쩌다 사람을 만나도 어디 사는지 묻기는커녕 눈만 멀뚱멀뚱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문은 드나드는 역할을 한다. 아파트가 생겨나고부터는 문 닫으면 외부와 차단이다. 닫힌 문만큼이나 이웃 간의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다. 

   어릴 때 우리 집 대문은 사립문이었다. 어른 허리 정도 높이에 옆으로는 소달구지가 다닐 수 있을 만큼이었다. 사립문은 일 년에 한 번, 가을 추수가 끝나고 겨울이 오기 전에 싸리나무로 촘촘히 엮어 만들었다. 새 문을 만들어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불면 삐걱 소리가 나고 문을 닫아도 개나 고양이가 틈새를 이용해 기어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일 멋있는 풍경은 겨울철 눈이 내려 사립문에 소복이 내려앉았을 때다. 그 풍광은 지금도 눈 내리는 날에는 문득문득 떠오른다.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지붕에서 슬레이트 또는 기와지붕으로 바뀌고는 사립문도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어린 눈으로 본 아버지는 언제나 일을 하셨다. 가을 추수가 끝나도 여전히 쉬지를 못했다. 추위가 오기 전 겨울 채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햇살 바른 양지쪽에 앉아 가을에 추수한 볏짚으로 초가지붕을 이을 마름을 엮는다.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용마루를 비롯해 이엉이 마무리되면 동네 사람들과 품앗이로 돌아가며 초가지붕을 단장했다. 새로운 짚으로 올린 지붕은 내년 가을까지는 끄떡없이 잘 지낼 수 있다. 

   초가지붕까지 꾸미고 나면 한 해 일은 마무리된 셈이다. 이제부터는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준비를 한다. 늦은 아침을 먹고 지게에 낫을 끼워 산으로 간다. 가족들이 춥지 않게 지내도록 땔감을 하는가 하면 어떤 때는 싸리나무를 한 짐 해 왔다. 싸리나무 용도는 다양하다. 지게에 올리는 바지게를 만들기도 하고 거름을 나르는 삼태기와 농사일에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었다. 싸리나무를 해 온 주된 목적은 대문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다. 사립문은 여름철 모진 태풍과 비바람에 일정 기간 사용하고 나면 허술해져 넓은 틈까지 생긴다. 추위가 몰아치기 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 꺾어온 싸리나무로 대문을 새로 달았다. 

   우리는 언제부터 대문을 달았을까. 고대광실 좋은 집이야 도둑이 겁나서 높은 담과 대문이 있어야겠지만 서민들은 대문 없이도 잘 살았다. 예로부터 제주도는 삼다(三多) 삼무(三無)란 것이 있다. 삼다는 돌, 바람, 그리고 여자가 많다는 뜻이고 삼무는 거지와 도둑. 그리고 대문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만큼 서로 믿고 살았다는 뜻이다. 대문은 통나무 세 개를 걸어 놓았다. 세 개 모두 빠져 있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하나 걸어놓으면 잠시 후 돌아온다는 뜻, 두 개 걸어놓으면 옆 마을로 외출 중, 세 개 걸려있으면 하루 종일 집을 비운다는 뜻이란다. 이것 말고도 우리는 여러 종류의 문이 있었다. 

   먼저 사찰로 들어가려면 먼저 일주문을 만난다. 일주문은 양옆으로 두 개의 기둥이 한일(一)로 되어 있기에 일주문이라 부른다. 일주문을 넘는 순간 세속에서 쌓였던 번뇌가 없어지고 평온해진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문이 있다.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숭례문(남대문)을 비롯해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 북대문(숙정문)이 있다. 묘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붉은 화살이란 뜻으로 홍살문이 있고, 마을마다 한두 곳은 있음 직한 열녀문, 효자문도 있다. 수백 년을 지내오면서 서민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문은 싸리로 엮어 만든 사립문이다. 사립문은 내 마음의 고향이요, 아버지 손때가 묻어있는 흔적이다. 

   사립문에 얽힌 웃지 못할 추억이 있다. 학창 시절에 친구 생일이라든지 특별한 날이면 자주 가던 곳이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산모퉁이에 빈집이 있었다. 갈 때는 못 마시는 술이지만 막걸리도 준비하고 밥을 해 먹을 쌀과 김치도 가져갔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도 여러 가지 준비해 남자들은 먼저 가고 여자들은 한참 후에 도착했다. 남자들은 일찍 가서 밤에 춥지 않게 장작을 준비해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뜨뜻하게 해 놓아야 했다. 

   저녁이 되자 여자들도 도착했다. 낮에 충분히 데워 놓은 방에 둘러앉아 밥과 준비해간 음식을 먹으며 재미있게 놀았다. 밤이 이슥해지니 다시 추워져 낮에 준비해둔 장작을 아궁이에 넣어 방을 뜨뜻하게 데웠다. 두어 차례 하다 보니 새벽이 오고 장작은 모두 동이나 버렸다. 날이 밝아옴과 동시에 다시 추위가 몰려와 하는 수 없이 싸리로 만든 대문을 헐어 아궁이에 밀어 넣어 불태웠다. 순간은 따뜻했지만 뒷일이 걱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 햇살이 번지자 집주인이 덜컥 나타났다. 산에 나무하러 온 김에 집에 들렀던 것이었다. 우리는 사립문을 불태운 죄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주인은 문이 없어진 것을 들어오면서 알고 있었다. 우리는 밤에 추워서 태웠다고 했더니 크게 꾸지람하면서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된다며 한 시간 가까이 훈계를 들었다.

   정겨운 사립문, 봄이면 진달래를 꺾어와 대문에 꽂아 두곤 했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증표로 사립문을 밀쳐놓기도 했다. 옛 생각에 잠기다 보면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 소꿉동무와 뛰놀던 뒷동산에 가고 싶고 여름날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그곳이 그립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는데 마음은 여전히 삽짝에 걸려있다. 






감사하면 행복하다


   결실의 계절이다. 지난여름 불잉걸 삼복더위에도 아랑곳없이 꼿꼿하게 서 있던 벼가 서서히 고개를 숙인다. 그만큼의 알맹이가 차 있다는 뜻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혈기 왕성한 기운으로 사리 분별 못하고 나대던 사람도 나이가 한 살씩 보태지면서 성급하던 성격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점잖아진다.

   뉴스에 갑질이란 말이 종종 등장한다. 갑질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경제적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하는 행위이다. 갑질을 하는 사람은 자신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비근한 예로 편의점에서 가끔 벌어지는 폭행이다. 술에 취한 고객이나 평소에 이런저런 사유로 불만에 가득한 사람이 물건을 구매하러 왔다가 사소한 일에 시비가 벌어진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순간적인 충동으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종업원에게 화풀이해 버린다.

   버리면 행복하다. 마음을 비우지 못하니 자신에게 불만이 생기고 이것이 밖으로 표출되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다. 예전에 이름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는 대기업 회장이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 자식이 맞고 왔다고 자신의 경호원과 용역업체 직원을 데리고 가서 보복한 사건이다. 또 다른 사건은 고위 공직자 자녀가 부모님의 후광을 믿고 날뛰는 경우다. 누구라고 거론하기조차 입에 올릴 가치가 없지만 그들은 자신의 갑질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남 탓을 하며 자신의 떳떳함을 내세우고 있다.  

   모든 원인은 욕심에서 비롯된다.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지나친 과욕은 화를 부르게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거만한 행동을 하거나 경제적 부를 더 축적하기 위해, 아니면 오직 내 자식만 잘되기 위해 끝없는 허세를 부린다. 이러다 보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조금은 나약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갑의 입장에서는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말 한마디 자존감이 무너지고 서러움이 가슴속 뼈저리게 파고든다.

   우리가 태어나면 먼저 아버지. 어머니 얼굴부터 익히게 된다. 자라면서 서서히 서고 걷고 말을 배우게 되며 예닐곱 살이면 글을 배우러 학교에 간다. 이제부터는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든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공부에 스트레스 받으며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란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한 다음에는 취직 걱정이다. 십 년 넘게 공부해서 얻은 것은 일자리다. 우리가 받는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좋은 직장을 얻는 것도 좋겠지만 나이가 들어 한 발 물러나 뒤돌아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교육의 목표는 인성을 가르치는 과정이다. 인성이란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과 구별이 되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의 특성에서 그 사람의 인품과 성품, 사람 됨됨이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질’이라 적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릴 때부터 과도한 학업 경쟁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실정이다. 인성, 즉 인격 형성에는 뒷전이 되고 오로지 공부와 일등만 강요한다.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보니 학교 폭력이 생기고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따돌림을 해 버린다. 이에 따라 자의적이든 타의든 다른 사람에게 갑질을 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부단한 노력을 한다. 우선은 종교를 가지는 사람이 많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아니면 유교, 도교 등 자신의 마음과 상통하는 종교를 선택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불교 즉 절에 다녔다. 불교의 기본 교리는 자비다. 자비는 사랑하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며, 사랑과 연민으로 이기적인 탐욕을 벗어나고 넓은 마음으로 질투심과 분노의 마음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을 닦는 종교이다. 

   불교의 좋은 사상이 있음에도 난 실천에는 옮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사상이나 교리를 떠나 반세기 이상을 사찰에 다니면서 얻은 것은 타인에게 배려와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으로 교리를 실천하는 종교다. 어두운 곳에 빛을 밝히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한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다. 이웃을 사랑하며 베풀며 살자는 의미인데 현실 세계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 모양이다.

   감사와 행복,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살아가면서 사람과 부딪히는 것은 일상사다. 여기서 내 탓이요 라고 생각하고 한발 뒤로 물러나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게 마련이다. 인간관계에서 기본은 인성이라고 생각한다. 인성이 부족하면 주변 사람들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다. 어찌해서 일자리를 얻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가끔은 현재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생각해 본다.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니 매사에 홀가분하다. 어디를 가나 마음을 내려놓는다. 쓸데없는 자존심도 내려놓고 얕은 지식으로 잘난 척하지도 않는다. 쉽지 않은 생각이라고 여기지만 전혀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언제나 행복하다.

   가을이 점점 깊어져 간다. 거리의 가로수는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아파트 콘크리트 숲 사이로 자란 들국화가 노랗게 얼굴을 내밀었다. 좋은 계절에 내 마음도 하늘색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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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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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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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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