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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구 행복동」외 1편

  • 작성일 2023-10-06
  • 조회수 764

낙원구 행복동

권민정


   조세희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에 걸린 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작가가 꿈꾸던 세상.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고, 사랑으로 이웃을 대하고, 사랑으로 일하는,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하는 세상을 그리며 눈을 감았을 것 같다. 그가 쓴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00쇄를 찍었던 해, 그는 “한 작품이 100쇄를 돌파했다는 것은 작가에겐 큰 기쁨이지만 더 이상 ‘난쏘공’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320쇄를 돌파하고 누적 발행부수가 150만 부에 이르는 현재의 사태를 본다면 그는 뭐라고 말을 할까? 

   나는 2008년에 발행된 106쇄 소설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작소설 12편 중 네 번째 발표된 작품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처음 읽은 것은 1976년 겨울이다. 한 문예지에 발표된 그 소설을 읽으며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그 이야기는 일 년 전에 내가 직접 겪고 경험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난쏘공’ 이야기 속, 바로 그때 현장에 있었다. 그 동네 교회에서 운영하던 어린이집 교사를 했었고, 철거가 시작된 후에는 지역조사 담당직원으로 일했다. 청계천 판자촌은 하천을 따라 수만 채의 판잣집들이 들어서 있던 동네였는데 한양대학교 뒤편, 송정동 지역 판자촌이 1975년 6월부터 먼저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 주민들은 정말 갈 곳이 없었다. 

   소설 속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난장이네 집이 있는 곳은 낙원구 행복동이다. 그 집은 방죽가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이지만 좁은 마당도 있고, 그 마당에는 팬지꽃이 핀 꽃밭도 있다. 집을 지을 때 난장이와 그의 아내는 도랑에서 돌을 져 와서 그것으로 계단을 만들고 벽에는 시멘트를 쳤다. 세 명의 아이들이 그 집에서 자라났고, 방 한 칸은 세를 주었다. 선거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떼를 지어 동네를 돌며 동네 사람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그들은 개천에는 다리를 놓고 도로를 포장하고, 동네 집들은 양성화시켜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동네에 무허가 건물 철거 명령이 떨어졌다. 아파트 입주 권리가 주어졌다. 분양아파트는 50만 원, 임대아파트는 30만 원만 내면 된다. 시에서 주는 이주 보조금은 15만 원이다. 임대아파트의 경우 15만 원만 더 있으면 아파트 주인이 된다. 그러나 난장이네는 이주 보조금 15만 원을 받으면 세든 사람에게 그 돈을 내주어야 한다. 15만 원에 세를 놨으니까. 오롯이 30만 원이 있어야 임대아파트라도 들어갈 수 있다. 낙원구 행복동에 사는 주민들 대부분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다. 난장이네 가족 5명도 모두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난장이는 수도 고치는 일, 아내와 이제는 장성한 아들들은 공장에서, 딸은 빵집에서 일한다. 그러나 박한 임금 탓에 아직 모아 놓은 돈은 없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입주권을 팔 수밖에 없다.

   이 내용들은 소설 속 허구가 아니라 바로 사실 그대로였다. 그때 잠실 아파트 입주권이 집주인에게 주어졌는데 입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집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투기꾼의 손에 딱지로 팔려 나갔다.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거기 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하지만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때, 마치 돈키호테 같았던 목사님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혼자서 넘어진 것을 함께 뭉쳐서 일어나자’고 외치며 절망한 그들에게 엑소더스(Exodus)의 꿈을 심어 주었다. 

   그때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에 갓 간척을 끝낸 땅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그곳에 가서 살게 해 달라고 정부에 탄원했다. 그러나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다.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무능하고 나태하다는 인식이 뿌리 깊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런 중에도 정부를 설득하며 귀농 사업을 추진했다. 수많은 귀농 신청자가 몰려들었다. 그중 우선 1차로 100세대를 선정했다. 그들이 귀농하여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는 증명 자료가 필요했다. 100세대 실태조사는 지역조사 담당자인 내가 맡았다. 조사 결과는 좋았다. 엄마는 행상으로, 아빠는 막노동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서울로 오기 전에는 대부분 농민이었다는 사실도 희망적이었다. 조사 결과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정부에 제출하고, 개발도상국 지역개발 활동을 돕는 서독의 기독교 단체에도 보내 후원을 요청했다. 간척한 땅에서 소출이 나기까지 생활비, 개발비 등이 비용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해 여름이 끝나갈 무렵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교회에서 원하던 남양만 간척지를 정부가 청계천 사람들에게 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곳이 지금의 남양만 두레마을이다.

   교회와 100세대 귀농자가 남양만으로 떠나갈 때 나는 그곳에 따라갈 수가 없어 어린이집 교사를 하기 위해 휴학했던 학교로 복학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조세희의 소설을 읽은 것이다. 

   철거 당시, 그곳은 전쟁터 같았다.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쳐 판잣집을 부수면 주민들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다시 철거반원들에 의해 그것마저 부숴지면 거기 남은 판자와 천막으로 다시 집을 지었다. 부수면 다시 짓고, 또 부수면 다시 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전쟁터 같은 판자촌을 헤집으며 슬프고도 살벌한 전투를 지켜보았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난쏘공’을 읽으며 울고 또 울었다. 왜 그렇게 가슴이 미어졌을까.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하니 그것이 문학의 힘이었다.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정서적 울림, 조세희의 소설은 독자에게 그것을 준 것이다. 

   조세희 작가가 꿈꾸던 세상을 생각하며, 사랑의 세계는 이 땅에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인지 생각에 빠진다.






제주의 색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해안 마을에서 잠시 산 적이 있다. 대문 밖을 나서면 밭들이 펼쳐져 있고, 큰길을 건너면 가까이 바다가 있었다. 새벽에 수탉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잠을 깨곤 했는데 제주에서도 특히 바람이 센 지역이라 바람 소리에 잠을 깬 적도 많았다. 서울에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습관도 바뀌어 제주에서는 아침 일찍 산책을 나가 올레길을 걷곤 했다. 마을에는 할머니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부지런함에 매번 놀랐다. 커다란 모자 위에 세수수건을 걸치고 헐렁한 바지에 낡은 셔츠 차림으로 농사용 엉덩이 방석을 깔고 밭에 앉아 아침 일찍부터 일하고 있는 제주 할망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꾸불꾸불한 밭담과 그 속에서 자라는 작물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곳, 현무암 검은 돌과 초록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비 오는 날 올레를 걷다 보면 평소에는 조금 거무튀튀하게 보이던 현무암이 비에 젖어 새까맣게 윤을 내고, 시원한 빗방울에 식물들은 더욱 싱싱해져 짙은 초록을 띠고 있다. 검은색과 초록의 조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나에게 제주의 색은 초록과 검정이다. 사람마다 제주의 색에 대한 이미지는 다르겠지만 유채꽃의 노랑, 바다의 초록과 파랑 때문인지 대체로 초록, 파랑, 노랑이다. 그런데 이번 제주 여행에서 뜻밖의 색을 발견했다. 황갈색이다. 하늘도 바다도 섬도 온통 황토 빛이다.

   굵은 줄로 얽은 초가지붕, 태풍으로 쓰러질 듯한 바닷가 주변의 초가, 무너질 것같이 구멍 듬성한 현무암 돌담, 조랑말, 돌담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 그림 속 풍경은 분명히 제주다. 제주 밖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인데 화폭은 전체가 황갈색으로, 형태는 검은색으로 묘사되어 있는 제주의 풍경들, 서귀포시 기당미술관에서 만난 변시지의 그림이다. 눈부신 태양, 아열대 식물의 싱싱한 풍광, 반짝이는 바다, 현란한 색조로 넘실대는 제주에서 어떻게 이런 황갈색의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 변시지의 그림을 보고 느낀 첫 번째 의문이었다.

   그는 20대에 벌써 일본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고, 30대에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그 후 김환기 등 한국 화가들의 해외 진출 붐이 있을 때 유럽으로 가지 않고 변시지는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6세 때 떠난 제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하고, 독창적인 자신만의 그림을 위해 몸부림치다 황갈색과 먹의 색조를 만났다고 한다. 

   “아열대 태양 빛의 신선한 농도가 극한에 이르면 흰빛도 하얗다 못해 누릿한 황토 빛으로 승화한다. 나이 오십에 제주의 품에 안기면서 섬의 척박한 역사와 수난으로 점철된 섬사람들의 삶에 개안했을 때 나는 제주를 에워싼 바다가 전위적인 황토 빛으로 물들어 감을 체험했다.”

   그가 유레카를 외치며 했던 말이다. 

   한라산이 가까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기당미술관 2층에는 변시지 그림 25점이 상설 전시되어 있었다. 철사처럼 가늘고 긴 인간 형상을 만들어 ‘걸어가는 사람’을 조각한 자코메티의 조각을 봤을 때와 같은 감동이었다. 자코메티는 전쟁이 남긴 폐허와 상흔, 허무와 불안을 딛고 인간 본연의 실존과 마주하며 뚜벅뚜벅 걷는 형상을 만들었다 자코메티가 더 이상 걷어 낼 것 없는 인간 형상을 만들었듯이 변시지 역시 불필요한 것은 지워 나가는 작업을 한 듯하다. 그의 그림은 선과 형태가 아주 단순하다.

   20대 일본에서, 30대 서울에서 그린 그의 그림은 제주의 그림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20대에는 인상파적인 화풍으로, 30~40대에는 나뭇잎 하나하나를 세듯 극사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의 제주 그림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더 잡다한 디테일로부터 초월하여 대상의 정수만을 과감히 표출하고 있다. 

   변시지의 그림 ‘더불어’와 ‘그리움’을 보면 인간 존재의 고독감, 이상향을 향한 그리움의 정서를 느끼게 된다. 그리움이나 이상향을 향한 그림의 화면 색채는 노랑에 가깝다. 짙은 황갈색 화면의 ‘풍파’, ‘폭풍’ 등의 그림은 제주인의 신산한 역사를 보는 것 같다. 한낮의 태양, 구부정한 한 사내, 쓰러져 가는 초가, 사내와 마주하고 있는 조랑말 한 마리, 소나무 한 그루, 휘몰아치는 바람의 소용돌이, 파도치는 바다에서도 꿋꿋이 떠 있는 작은 조각배 하나, 그의 말대로 척박한 역사와 수난의 섬 제주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너무 덧없고 허망하다. 인간은 부서질 것같이 연약하다. 그래도 결코 쓰러지지 않게 단단히 굳은 의지를 다져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자코메티는 조각에서 표현했다. 예술품 경매사상 1,000억이 넘는 값으로 최고가를 경신했던 작품 ‘걸어가는 사람’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일 것이다. 

   변시지는 아무리 바람이 불고 풍파가 닥쳐도 끝까지 떠 있는 조각배처럼 끈기와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제주 사람을 표현했다. 그림에는 없지만 나는 제주할망을 보는 듯했고, ‘살암시난 살아져라’ 하던 할망들의 말도 들리는 듯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다 보면 살아지더라, 그러니 견디며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풍경은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보인다. 나에게 제주는 오래전에는 신혼여행지로, 요즘은 한 달살이 혹은 일 년살이 하는 낭만의 섬이었다. 아름답게만 보이던 제주의 풍경이 화가에게는 이렇게 폭풍과 풍파의 땅으로 보였다. 눈으로만 보던 제주를 그의 그림을 통해 마음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제주는 이웃 사람뿐만이 아니라 조랑말까지 친구 되어 더불어 살아가는 순박하고 평화로운 섬이다. 그러나 바람 많고 척박한 자연 속에서 오랫동안 힘겨운 삶을 살았고, 일제강점기에는 특히 일본군에게 강제 노역으로 심하게 혹사당했으며, 해방 후에는 4・3 사건과 같은 수난의 역사를 겪은 섬이다. 변시지의 황토색에서 보듯, 채도 높은 노랑에 가까운 색부터 검은색에 가까운 황갈색까지 제주의 색은 그 폭이 넓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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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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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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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주는 울림 공화순 페북을 끊은 지 서너 달이 지났다. 가끔 궁금하고 친구요청 알림이 뜨면 어쩌다 휙 눈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낯익은 사람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은 오래된 상처를 쉬이 털어버리지 못할까? 아니, 상처는 왜 쉬이 아물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어릴 적 실수로 정강이에 깊은 상처를 얻었다. 일곱 살 즈음의 일이다. 안마당에 무를 담아놓은 고무 대야가 하필 어린 계집아이 눈에 띄었다. 대야 안에 가득한 무와 함께 커다란 부엌칼도 눈에 확 들어온 건 비극의 서막이었다. 고무 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작은 손으로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무를 잘라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무를 힘껏 내리쳤지만, 힘에 부쳤다. 칼은 무에 박혔고 얼마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뽑았을 땐 순식간에 칼끝이 정강이를 깊이 도려내고 바닥에 떨어진 뒤였다. 눈 깜짝할 새 정강이 살점이 파이고 하얀 뼈가 보였다. 순간 놀란 가슴보다 정강이가 더 놀란 듯, 피도 나오지 않고 시간이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었다. 뒤미처 엄마한테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광목천을 두르고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마 후, 들에서 돌아온 엄마는 다리를 처맨 것을 보셨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병원놀이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처는 아직도 깊숙한 자리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상기시키곤 하는데 상처를 치료했던 기억이 없다. 병원놀이가 며칠째 계속되자, 엄마가 벗겨봤지만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 뒤였다고 한다. 상처를 제때 치료했다면 흉터가 가볍게 남진 않았을까, 뒤늦게 후회도 해봤다. 정강이의 깊은 상처는 사춘기 시절 내내 치마 입는 것조차 신경이 쓰이게 했다. 크도록 짧은 치마를 입는 데 불편을 겪었다. 치마를 입을 때마다 스타킹은 필수요건이 돼버리고 겨울엔 두꺼운 스타킹과 부츠를 신으니 차라리 편했다. 페북의 그도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 앞니 두 개를 잃고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 상처에 붙들려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상처 한두 개쯤 지니고 살기 십상이다. 누군가는 쉬이 상처를 아물리고 다독이며 잘 살기도 할 것이다. 오랫동안 정강이 상처를 의식하고 살아온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50년을 넘게 내 몸에 지녀온 상처인데 한 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몇 년 전, 잡지에서 배에 있는 수술 흉터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찍은 모델 사진을 보았다. 완벽한 아름다움 속에서 상처는 꽤 도드라졌다. 그것이 내게 신선한 도발이었다. 부조화에서 온 변화가 자꾸 눈길을 끌었다. 너무 지루한 고요 속에 쨍하고 금을 긋는 울림 같았다. 고등학교 들어갈 때,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의상실에서 교복을 맞춰 입었다. 학생들 무리에서 몸에 곡선을 매끈하게 빼준 교복 덕에 선배들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다행인지 남들보다 치마 길이가 길게 맞춰져서 정강이 절반 아래로 날씬한 다리만 보이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어쩌다 내 정강이 상처를 발견하면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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