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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얼룩을 스캔하다

  • 작성일 2023-10-13
  • 조회수 238

삶의 얼룩을 스캔하다

이애현


   모처럼 나선 길에서의 마지막 일정, 며칠 쨍하던 날씨가 무색하게 일기는 사나웠다. 도랑이라도 만들 것처럼 비는 두텁고 질기게 내렸다. 짧은 거리임에도 뛰는 동안 비에 젖은 얼굴을 닦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한 전시실 앞에 멈춰 섰다. 어느 여류 설치미술가의 영상작품이 오래된 시간, 깊이로 잠재웠던 생각의 꽁무니를 잡아 끈다. 생각은 녹슨 소리를 내며 재생된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러닝머신 위로 쥐 한 마리가 기계의 움직임 따라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어 달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반복되며 돌아가는 기계 위로 음식이 쥐 앞에 놓이면 짧은 시간, 아주 잠깐 그것을 핥아먹는 동작이 쉬는 시간의 전부였다. 어찌 보면 그것은 쉰다는 것보다 먹기 위한, 먹으려는 본능적 욕구에 따른 처절한 노동인 셈이다.

   기계는 제 할 일에 충실 하느라 한 치 오차 없이 같은 시간, 같은 속도로 반복하며 돌고 돈다. 그 위를 달리는 쥐. 먹이에 대한 강한 유혹과 기계의 흐름 따라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속도에 몸을 실었다. 힘겹다.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엷은 현기증마저 일었다. 끊임없이 돌고 도는 기계의 속도감이 그랬고, 쥐의 작은 혓바닥에 먹이가 닿는 순간, 먹이를 취하기 위해 모든 생을 걸어야 하는 지친 모습의 영상 또한 그랬다. 그걸 보는데 피로감이 엄습했다. 순간 멀리하려고 애쓰던 의식 하나가 핏발 선 모습으로 청하지 않은 객이 되어 바쁘게 소환된다.

   운명은 순순히 따라가지 않으면 끌고라도 간다는 말이 있다. 깊고 긴 불면의 시간들로 육체는 물론, 정신세계를 옥죄며 삶을 엎어놓았던 지난한 시간. 젊은 날, 삶에 한 획을 그으며 의지와 상관없이 감당하기 힘든 시간과 마주해야 했다. 상실의 아픔은 몸과 마음 어느 한 곳 온전하게 놔두질 않았다. 

   불면과 무기력을 앞세워 육신을 패대기치듯 짓누르더니 시시껄렁하게 생각했던 운명이란 이름은 운명처럼 다가와 운명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확인시켰다. 맹렬했다. 그것은 한 치 인정도 없이 시간을 담보 삼으며 고통이란 이름 속으로 거칠게 삶을 몰아세웠다. 온통 나락으로 밀어내는 바람에 더는 버틸 힘도, 가눌 정신도 없었다. 그런 날이면 달도 빛을 잃고 밤새 지치게 울어댔다. 

   그렇게 시간이 더딘 걸음을 뗄 때다. 몸 안에 있던 모든 에너지는 다 소진되고 방전되어 꼼짝달싹하기가 어려웠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겠다. 눈꺼풀이라고. 잠을 못 이룬 탓에 육신의 무게감은 바윗돌에 눌린 것처럼 버거웠고, 먹는다는 본능마저도 덩달아 힘겨웠다. 그런 시간들 사이사이로 이 무슨 대책 없는 감정의 행패란 말인가. 물물이 그립다는, 순간순간 보고 싶다는 곡진함이 마음 한 구석에 저항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힘으로 심신을 후비며 파고들었다. 

   마음이 힘드니 몸도 따라 지쳐갔다. 그렇게 시간을 밟던 날, 사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인지 초등생과 중학생이던 아이들마저 눈과 의식의 밖에서 방치되고 있음을 알았다. 새끼에 대한 동물적 본능마저도 작동이 힘든 상태였다.

   그때 이것저것 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할 수만 있다면 다 포기하고 싶었다. ‘죽음이 이런 걸까, 다 비워낼 수는 있는 걸까?’하는 의문을 품고 있던 현실적 망상은 생각이라는 공간에서 가지치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노랫말의 한 소절처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신과 밀당도 해 보았으나 미미한 인간의 항변은 하늘에 닿기도 전에 산화되었다. 

   시시때때로 울음 우는 이 붉은 감정이 슬픔의 발로인지, 살을 부대끼며 살았던 연민에 의한 몸부림인지, 아니면 앞으로 전개될 앞날에 대한 불안인지 조차 구분이 모호했다. 어쩌면 그것은 대책 없이 장바닥에 펼쳐놓은 싸구려 물건 같은 칠정 중 하나인 감정의 부스러기였는지도 모른다.

   먹이를 향해 러닝머신 위에서 쉼 없이 달리는 쥐의 모습은 절체절명의 시간 앞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보여 강한 동질감으로 다가왔다. 벼랑 끝에서 삶을 어렵사리 건져 지탱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에 불과한 꼿꼿함도, 방 안 공기 흐름마저도 힘겹다는 생각에 다 포기하고 싶었다. 엎고 뒤집히며 여물지 못한 생각들은 모서리마다 색깔 다른 통증만을 두텁게 덧칠해 내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온통 의식을 지배할 때였다. 

   문득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스가 한 줄기 빛처럼 생각을 강렬하게 당겼다. 끝도 없이 바윗돌을 굴려야 하는 삶이 이런 것일까. 시지프스는 신에 굴복하지 않고 그에 도전했던 인간이라고 하지 않던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시지프스는 커다란 바윗돌을 높은 산꼭대기로 올리고, 이내 굴러 떨어지면 또 올려놓는 영원한 노동의 형벌을 받는다고 했다. 쥐가 움직이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고, 긴 밤을 온통 표백해 놓을 듯 뜬 눈으로 시간을 밟아가던 불면의 밤이 또한 그랬다.

   요즘 신세대들 표현으로 독박 교육, 독박 훈육, 독박 경제 등. 두 아이를 껴안고 어떠한 것도 준비 안 된 상황에서 삶을 꾸려가야 된다는 무게감이 그 바윗돌을 굴리는 형벌과 무엇이 다를까. 아무나 다 꾸려나가는 줄 알았던 일상이라는 이름을 허투루 보았는데 먹는 것에서부터 교육비까지 모든 것이 힘듦의 연속이었다. 

   지치고 힘겨운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만난 내 의식의 또 다른 이면에서의 섬뜩하고 아찔한 생각과의 조우. 신화 속 생각 하나가 절대적 힘으로 본능과 연이 닿았다. ‘살아야 된다’는 절대적 명제는 수척해가던 생각 안에서 긍정의 힘으로 다가와 본능에 탄력을 주며 스스로 일으켜 세웠다. 알베르 까뮈는‘우리네 삶도 고된 일상의 반복만 있다면 살아갈 가치가 없지만, 그 안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 분명히 있기에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내용의 말을 풀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뿐일까. 그는‘눈물 나도록 살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것이 시간이란 말이 맞다. 살아남기 위한 세상 모진 일은 다 만나 본 것 같다. 그랬다. 아이들도 눈비에 젖고, 거센 바람에 휘둘리나 했는데 휘둘림 속에서 삶을 붙잡고 제 몸피만큼씩 생각을 키우고 여물던 것이다. 세월의 햇살은 누구에게나 너그럽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곳에서 빛줄기를 당겨와 버겁던 삶을 벅참이란 단어로 환치해 내고 있었다. 

   슬픔조차도 사치였던 지난한 시간. 힘들었던 삶도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각주 하나 달아 놓았을 뿐, 그 어떠한 것도 소중한 것이었다. 삶이란 얼개에 눅눅하고 얼룩진 시간이었을망정 소중히 스캔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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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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