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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기술」외 1편

  • 작성일 2023-10-18
  • 조회수 449

질문의 기술

신재기

 

   작년 말 출시된 ‘챗GPT’가 전 세계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챗GPT’는 ‘특정 질문에 답변해 주는 인공지능 채팅 서비스’이다. 처음 접하는 순간 놀랄 만한 능력에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저런 주제의 글을 써달라고 주문하자 순식간에 몇 단락의 글을 제시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챗GPT는 머잖아 평생 다듬어온 내 글쓰기 능력을 지워버리고 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허탈하기도 했다. 인류는 문자를 사용하면서 책이란 도구를 만들어 개인이 내장할 수 없는 정보를 책에 담아 보존해 왔다. 책은 과학기술과 문화의 발전을 견인해 온 원동력이었다. 책을 쓰고(지식을 생산하고) 읽는 일로서 ‘공부’ 혹은 ‘학문연구’는 어느 사회에서나 가치 있는 것으로 존중되었다. 그런데 그간의 지식 생산과 소비 방식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낱낱의 지식 덩어리(책)로 분산되어 존재하던 지식은 한곳에 집적되어 인공지능 시스템인 챗GPT와 같은 기술에 의해 소비되는 날이 왔다. 인간은 이 인공지능의 무한한 지식처리 능력에 종속될 것이며, 지식 소비의 편리함에 금방 빨려들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인공지능 시스템인 챗GPT가 내가 무엇을 질문하든 주저 없이 답해준다는 점이다. 내 질문의 합당함이나 수준을 문제 삼지 않고 대답하는 그 태도에서 포용력과 친절함까지 느낀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비가 와서 체육 수업을 교실에서 하는 날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다. 열 살의 어린이가 맹랑하게도 선생님의 설명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손을 들고 “축구가 뭡니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돌아온 대답은 “이 축구 같은 놈아, 축구도 모르냐?”였다. 당시 선생님은 내가 뻔한 것을 장남삼아 질문한다고 생각하고 기분이 상했던 모양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때까지 ‘축구’를 어떻게 하는 운동경기인지 잘 몰랐다. 경기를 본 적도 해본 적도 없었다. 고작 둥근 공을 발로 차는 것쯤으로 인지할 정도였다. 산골 마을에 공도 없을뿐더러 있다 하더라도 축구할 공간도 없었다. 공이 아닌 물건을 놓고 집 마당에서 친구들끼리 발로 차면서 놀았던 것이 전부였다. 그때 담임 선생님의 ‘축구 같은 놈’이란 말이 씨가 되어 아이들은 나를 ‘축구’라고 놀렸다. 당시 ‘축구’는 ‘바보’라는 의미의 방언이었다. 나를 놀렸던 아이들도 대부분 축구를 몰랐을 것이다. 어쨌든 몰라서, 그래서 알고 싶어서  물어보았는데 돌아온 답은 그 답은 ‘바보’라는 야유였다.


   중고등학교 때도 나는 수업 시간에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때 질문으로 상처받은 경험이 있었던 터라 가능하면 질문에 신중했다. 그러다 보니 교과목 선생님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쏠렸다. 앞의 설명과 다르다든가 수학 문제 풀이에서 계산 오류 등이 포착되면 주저 없이 손을 들었다. 이럴 때 선생님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어떤 선생님은 “참, 그러네. 내 실수, 미안.” 하면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편하게 수정하는 선생님이 있는 반면, 얼굴이 붉어지면서 당황하는 선생님도 있었다. 교단 경험을 통해 보면, 정면에서 내 오류를 콕콕 집어내는 학생의 태도가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대학교 강의실에서 나의 질문 공세는 강도를 더해갔다. 1970년대 대학 강의실에서는 강의를 끝내고 수강생들에게 질문을 유도하는 교수는 흔치 않았다. 몇몇 교수가 질문 시간을 따로 줄라치면,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당시 강의실에서 학생은 질문을 일어서서 하는 것이 예의였다). 질문으로 수업 시간을 넘기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럴 때 나는 함께 수강하는 복학생 선배들로부터 욕을 적잖게 먹기도 했다. 교수님들의 깊은 학문 세계를 접하면서 정말로 궁금한 점이 많았다. 이때의 내 질문은 말 그대로 더 알고 싶어서, 그리고 앎에 대한 갈증에서 나온 것이었다.


   대학 학부 시절, 시인 김춘수 선생님은 강의가 끝나고 반드시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의 답은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학생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했다. 이 질문 시간이 본 강의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코앞의 문제를 화제로 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허튼 질문에는 가차 없이 제동을 걸었다. 학생들의 앎이 얕고 말하는 기술도 어눌한 터라 질문 요점을 조리 있게 전달하지 못했다.  선생님은 주제나 논리를 벗어난 질문에 대해서는 그 빈틈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었다. 질문 속에 학생의 지적 허영이 감지될 때면, “자네의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학생을 무안하게 몰아붙이기도 했다. 좋은 물음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했다. 동양의 공자, 서양의 소크라테스는 대화술(문답법)로 진리를 전파한 사람이다. 이들은 어떻게 제자의 질문에 답했을까? 공자의 경우를 보자. 『논어』 ‘선진편’ 21장에서 공자는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의 “들으면 곧 행합니까?”라는 같은 질문에 두 사람에게 각각 다른 답을 한다. 자로에게는 부형과 상의하여 행하라 하고, 염유에게는 곧바로 행하라 했다. 이를 지켜보던 공서화(公西華)가 다르게 대답한 까닭을 물었다. 그 이유는 이랬다.  성질이 유약하고 퇴영적인 염유에게는 진취적인 기상을 불어넣으려고 곧바로 행하라 했고, 강직하고 용기가 넘치는 자로에게는 지나칠 우려가 있어 한 걸음 물러서라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제자의 처지와 성격까지 염두에 둔 대답이 아닌가.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손득이 달려 있으면 기를 쓰고 물어서 사실을 알고 방향을 찾으려 한다. 코앞의 문제를 벗어나면 대체로 퇴영적인 태도를 보인다. 특히 교실에서 자기 주도적으로 질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다 못해 학생의 좋은 질문에 가산점을 주는 교수법을 실천한 교수도 있다. 나도 한때 이 방법을 실행해 봤으나 곧 그만두었다. 학생들이 오로지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질문 횟수 늘리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대학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강의에서 자주 질문을 요청하지만 질문다운 질문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현재 내가 전국 수필가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인문학 줌 강의에서도 자진해서 질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질문을 유도하지만 허사다. 마지못해 하는 질문마저도 거의 단답식이다. 이럴 때는 내 강의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기도 해서 의기소침해지거나 허탈해진다. 질문을 제대로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철학자 김영민은 “좋은 질문은 논의와 탐색이 막혔을 때 시야를 밝히고, 새로운 말의 냄새를 불러온다.”(『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늘봄, 2022, 14쪽)라고 한다. 좋은 물음은 말과 정신의 길을 연다는 것이다. 말과 정신의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이 공부라고 한다면, 공부의 길은 좋은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는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예상보다 더 빠르게 인공지능은 인간 생활에 밀착될 것이며, 지식과 정보 생산에 없어 안 될 조력자로 등장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물음을 던지는 기술이 아니겠는가. 인공지능의 활용성은 인간이 AI와 대화(지시 혹은 질문)하는 수준에 달려있다. 최근 신종 직업 중에 ‘프롬프트 엔지니어Prompt Engineer’가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인공지능으로부터 사용자가 원하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문가라고 한다. 만족스러운  답을 얻으려면 내가 던지는 질문이 잘 조직되어야 한다. 모든 글쓰기에서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을 활용할 날이 멀잖다. 그때가 되면 글쓰기의 성패는 질문의 기술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다.











외로워도 괜찮다



   신문에서 책 소개란을 읽던 중이었다.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반갑고 궁금한 마음으로 기사를 자세히 읽었다. 대학 학부 동기가 자신이 재직했던 대학 출판사에서 1,100페이지 분량의 연구서를 출간했다는 기사였다. ‘관점의 전환과 새로운 해석’이란 부제가 붙은 『훈민정음의 문화중층론』이란 책이었다. 책 소개 글과 목차를 훑어보았다. 대작이었다. 놀라웠다. 짧은 기간에는 이룰 수 없는 학문적 성과였다. 중후함과 깊이가 느껴졌다. 학자로서 평생 업적을 결산하는 저서가 아닌가 싶었다. 그는 2년 전 나와 같은 시기에 퇴직하였다. 퇴직 후 몇 번 통화를 하거나 만났지만 이처럼 학문연구의 열정을 이어왔다는 점은 몰랐다. 곧바로 전화를 걸어 연구서 출간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고, 며칠 후 만나 점심을 같이하기로 약속했다.


   식당에서 만나 그의 저서를 건네받는 순간 ‘친구야, 너는 진정한 학자로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존경심이 느껴졌다. 책 출간 후 부모님 묘소를 찾아 학자로서 최선을 다했노라고, 부끄럽지 않게 살았노라고 고했다 한다. 이 말을 하는 그가 자신의 책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구서 출간 과정에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감동적인 것은 이 방대한 책을 두 사람이 완독했다는 이야기였다. 한 사람은 국내 최고의 국어학자인 선배 교수가  2주 만에 완독하고 격려 전화를 보내왔단다.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는데, 비전공자라서 절반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끝까지 읽었다는 것이다. 아마 남편의 평생 업적에 경의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냥 수고했다는 말에 그치지 않은, 그 진정성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도 작년에 세 권의 책을 출간했다. 합해서 1,300페이지에 이르는, 내 나름대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성과였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어차피 돈 주고 내 책을 사볼 사람이 없다는 점을 아는지라, 공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주위 많은 사람에게 책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허탈감에 빠졌다. 새삼 외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책을 받고 축하 전화와 문자를 보내온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보내오고, 어떤 사람은 책을 더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책을 잘 읽었다든가 공부에 도움이 되었다고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의 무반응이 섭섭했다. 이보다 더 맥 빠지게 한 것은 자주 얼굴을 맞대었던 사람이나 가족들의 무관심이었다. 내 책이 흥미 있는 읽을거리가 못 되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책하면서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나 홀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수고했다’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혼자라도 괜찮다면서.


   이야기 가운데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연구 과제가 있는데, 10년만 삶이 더 허락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건강도 문제지만 외로움을 견디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책 읽고 글 쓰는 일로 외로움을 크게 느끼지 않는데, 나이가 더 들수록 쉽겠냐고 여운을 남겼다. 그렇다. 문제는 외로움을 어떻게 견디느냐이다. 나도 퇴직 후 벌써 3년째다. 모임에 참석하거나 지인들을 만나는 일을 최소화하고 일상을 거의 서재에서 보낸다. 퇴직한 교수들 대부분은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을 구호처럼 뱉는다. 운동, 여행, 취미 생활로 눈코 뜰 새 없단다. 그런데 자신의 전공 공부를 퇴임 후 이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의 선택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은퇴 후 삶은 유유자적하면서 몸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니겠는가. 서재에 갇혀 굳이 외로움과 대적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러 회의가 밀려올 때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주위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있다. 나에게 그들을 흡인할 힘과 매력이 떨어졌다는 결과이리라. 처음에는 서운하고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다. 이렇게 적응하다 보면 외로움이란 불청객을 편하게 맞이할 듯싶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남아 내 옆을 굳게 지켜주는 것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외로움의 강적도 너끈히 대적할 정도로 굳건하다. 마지막 나에게 주어진 과제, ‘한국현대수필사’를 집필하는 일이 그것이다. 내가 자발적으로 설정한 과업이기에 부담도 적다. 올해 초부터 그 일을 시작했다. 남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고, 중간에 중단해야 할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서둘거나 조급해하지 않을 생각이다.


   외로움, 그것은 어느 학자의 설명대로 ‘관계를 향한 인간의 뿌리 깊은 지향’이므로  누구에게나 공평한 존재론적 필요조건이다. 주관적 감정이기에 많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외로울 수 있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노년의 삶은 외로움을 충분히 감당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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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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