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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짖는 소리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415

개 짖는 소리


이민구






등장인물


하준
마람
유영
춘식
노숙자
보민
남자(1인 다역)
여자(1인 다역)


무대


무대는 고시원이 뒤에 있고 커다란 개집이 하나 있다. 덩그러니. 고시원 창문은 전부 방범창이 달려 있다. 고시원에는 ‘경축! 재개발 확정!’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0.
프롤로그


하준미사일처럼 올랐습니다. 피슝! 부동산마다 미사일 발사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내 통장에는 찍혀 본 적도 없는 숫자들이 연일 고공행진을 했습니다.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숫자들을 보면 머리가 아득했습니다. 투표장이 있었습니다. 75%가 목표라고 합니다. 역시나 높은 숫자들은 저의 동의 없이 멀리멀리 날아갑니다. 전 분명히 반대표를 던졌는데, 제 표가 의미가 있었을까요? 저 미사일이 언젠가 펑 하고 터져 불꽃놀이처럼 하늘을 수놓을까? 내 두 손에 있는 것은. 펄떡펄떡. 펄떡였습니다.


1.
무대의 조명 하나.
등장하는 하준. 하준은 무언가의 목을 조르고 있다.


하준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였나 자유시장경제 체제였나. 아무튼 자유가 중요한 단어처럼 여겨지는 그런 내용의 시간이었습니다. 자유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들었는데 그게 윤리 시간이었는지 사회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수학 시간이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죠. (선생님 성대모사) “대한민국에서 자유란 가치는 숭고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죠. 그러니까 꿈을 가지세요.” 저는 손을 번쩍 들고 말했습니다. 큰 집을 가지는 게 꿈이 될 수도 있나요? 주변에서 키득거리며 “저 병신.”, “뭐래.” 따위의 소리가 들려서 괜히 주눅이 들었죠. 하지만 선생님은 달랐어요. 진지한 얼굴로 (선생님 성대모사) “그럼! 대한민국에서는 무엇이든 꿈이 될 수 있단다.” (깊은 한숨) 씨발! 그때 그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면 안 됐죠! 하여간 선생들은 이게 문제야. 어린 애들한테 솔직하지 않은 거! 그건 네가 가지기에는 존나게 큰 꿈이라 턱도 없어! 이게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면 그냥 세상에는 다른 꿈들이 많단다. 집은 그냥 사는 곳이잖니? 이렇게 동화 같은 유치함을 심어주기만 했어도! 그럼 난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대 조명 둘.
등장하는 마람. 히잡을 쓰고 있다가 벗는다. 마람은 무언가의 목을 조르고 있다.


마람한국이 지도 어디에 있는지 몰랐어요. 지도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겠네요. 여자들에게 뭘 가르쳐주지 않거든요. (히잡을 들며) 이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증거예요. 아빠는 내가 모른다는 걸 자랑으로 여겼어요. 대신 제가 샤이는 기가 막히게 타거든요. 아침에 집에서 나가기 전에 제가 만든 샤이를 꼭 드셔야 했죠. 전 주로 박하 잎을 탔어요. 아침에 마시면 개운하거든요. 그날은 왜 박하 잎이 없었을까요? 그걸 얻으러 나갔다가 와르다가 BTS를 알려줬어요. 코리아? 그게 어딘데? 잘생겼는지도 모르겠어. 그날, 아버지는 샤이를 마시지 못하고 나가셨어요.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의 말.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 누가 쓴다고? 정말로 이 요상한 발음, 가, 나, 다, 라. 이렇게 말을 한다고? 도대체 왜? 나는 이걸 왜? 폭탄도 그렇게 떨어졌어요. 도대체 왜? 내가 와르다한테 한국어를 배우지만 않았어도, 와르다가 BTS를 보여주지만 않았어도. 그게 그렇게 재밌지만 않았어도. BTS가 그렇게 잘생기지만 않았어도. 그럼 난 이 자리에 없었을 수도 있어요.


남자 등장. 남자 전화를 건다.


하준(목을 조르며 전화를 어깨에 끼고) 제가 좀 바빠서요.


남자은행입니다. 이의 신청 결과 알려드리려 전화드렸습니다. 서류는 전부 제출하셨더라고요.


하준네! 필수 서류 전부.


남자연봉이 얼마나 되세요?


하준제 연봉은 왜요?


남자얼마나 되세요? 구체적인 금액이요. 확인 절차도 필요하고요.


하준그쪽 연봉은 얼만데요! 그 금액이 왜 필요합니까?


남자네?


하준굉장히 기분이 나쁜데, 그래도 필요하다면 얘기를 할게요. 그게 왜 필요한데요?


남자몰라요.


하준네?


남자몰라요. 그냥 필요해요.


하준갑자기 재개발을. 난 하는 줄도 모르고 여기 들어왔다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안 나간다니까 이렇게 전셋값을 올리는 게 어디 있어요. 당신이 생각해 봐요! 벼락을 피할 수 있어요? 그냥 쾅! 우산인 줄 알았던 게 피뢰침이었다고 생각을 좀 해 봐요! 제발. 이봐요, 이봐요! 이게 모른다고 할 일이야!


남자 퇴장. 여자 등장. 여자는 가만히 서서 마람을 본다.


마람말라크를 찾고 있어. 아니야. 나는 그냥 말라크, 내 여동생만 찾으면 돼. 키는 너보다 조금 작고 이제 11살이야. 아직 애를 만들 수도 없어. 남자아이나 다름이 없지. (사이) 잘 기억해 봐. 너 저 집에서 나왔지? 저게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야! 나도 저런 집에서 살아. 여기 멀쩡한 집이 어디 있겠어.


여자(총을 드는 시늉)


마람아니야! 정말 나는 그냥! 대통령? 그게 뭔데. 우리 가문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여자 퇴장.


하준쉬이. 너 집이 좋구나. 나보다 낫네.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배가 고픈 거야? 소시지라도 챙겨올 걸 그랬다. 자. 쉬, 쉬.


마람그거 나도 들어 봤어. 나도 알아. 어쩔 수 없이 들었잖아. 그러니까 내려놓을 수 있어.


하준아냐, 아냐. 괜찮아. 쉬이. 조용히, 우리는 함께할 수 있어.


마람쏜 적이 있어?


컹컹! 개 짖는 소리와 탕탕! 총소리. 하준과 마람 손아귀에 더욱 힘을 준다.


하준제발.


마람제발!


하준뜨거웠습니다.


마람손이 데일 것 같았어요.


하준두근두근. 아니지, 펄떡펄떡에 가까웠습니다.


마람손에 문신처럼 깊게 파일 것 같아요. 제가 샤이를 끓이는 주전자도 맨손으로 잡았는데,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준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깊고.


마람고요한 눈.


하준눈이 펄떡거렸습니다.


마람도대체 나는 왜. 아버지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어요. 나도 그러려고 합니다. 난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하준은행 직원들이 그런 말을 해도 됩니까? 조만간 컴플레인을 넣을 생각입니다. 고객한테 모른다는 말을 당당히 하다니. 이래서 대통령을 잘 뽑았어야 합니다.


2.
개집에 들어가려는 하준. 춘식이 카메라로 하준을 찍는다. 눈치챈 하준.


하준(춘식의 멱살을 잡으며) 사진 찍었어?!


춘식얼굴은 안 찍었어요.


하준사진 찍었냐고 묻잖아!


춘식저는 그냥.


하준너도 이렇게!


춘식(하준의 얼굴을 보며) 하준 씨? 하준 씨 아니에요? 해골부대에 있던.


하준(황급히 얼굴을 가리며) 아니에요. 사람 잘못 봤어요.


춘식맞네! 저예요! 그때 전쟁 50주년이라고 막!


하준아니라고!


춘식인터뷰했었는데. 간이 의자 다리가 반쯤 부서져서 하준 씨가 새 의자 창고에서 꺼내주고 그랬는데. 기억 안 나세요? 하긴, 제가 좀 평범한 얼굴이라.


하준그냥 가.


춘식기억나죠? 그렇죠! 그때만 해도 제가 바빠서 하루에 다섯 탕씩 뛰고 그랬다니까요. 거기가 어디더라. 그래, 철원! 부산에서 바로 올라가느라 추운 줄도 모르고 반팔을 입고 내렸더니 막 팔에 소름이! 그게 사실은 제가 살던 집에 옷 방이 두 개였는데, 하필 여름옷 방에서 가방을 챙겨 나와서.


하준제발 가달라고! (사이) 왜!


춘식여기 살아서. 지나가야지, 들어갈 수 있어서.


춘식이 하준을 지나 고시원 문으로 향한다.


춘식여기 개가 새벽 2시마다 짖어요.


하준뭐?


춘식공무원 시험으로 유명하거든요. 여기서 다들 책상에 대가리 박고 망부석처럼 앉아 있어요. 그러다가 개가 짖어야 자요. 개밥을 누가 주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요.


하준나보고 개처럼 짖으라고?


춘식도와줄까요?


하준꼴이 우스워?


춘식내 꼴이요. 지금은 부산에서 철원은커녕 고시원 밖도 3일 만에 나왔어요. 아는 사람은 2주일 만에 겨우 만났고요. 당신은 내 최고의 작품이었어요! 그 시절이 내!


하준그때가 나는!


춘식대출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요새는 빚도 능력이에요! 전세자금 대출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다 알려드릴게요. 그쪽에 친구들도 좀 있고.


하준근데 왜 너는 여기 살아?


춘식그런 거 있잖아요, 괜히 잘될 것 같은 사람 보면 말이라도 건네 보고 대신 뿌듯한 거. 찌질한가?


하준잘 알아?


춘식당연하죠!


하준거짓말이면!


춘식내일부터 바로 해요!


하준난 당신을 믿는 게 아니라.


춘식지금 2시예요! (사이) 지금 안 짖으면 누가 나올지도 몰라요!


하준난 개가 아니야!


춘식미안해요. 내가 들어갈게요.


춘식 퇴장. 고시원의 불빛이 꺼지지 않는다.


하준(고시원을 한 번 보고) 컹! 컹!


고시원의 불이 꺼진다.


하준컹! 컹! 컹!


고시원의 불빛이 꺼지면서 암전.


3.
하준과 유영. 유영은 커다란 첼로 가방을 메고 있다.


유영결혼식에 데려간 내가 잘못이다.


하준그렇지, 내가 창피하겠지.


유영또, 또 이런 식이지. 그게 그렇게 화가 나는 질문이지.


하준거기 신도시라 엄청 좋다며? 지하철역도 가까워서 집값이 5배나 올랐다는데.


유영그냥 어디 사냐고 물어본 거잖아.


하준재개발이 참 좋아. 진작 그런 걸 알았어야 하는데. 그렇지? 그냥 원래 거기 살았던 거잖아. 걔는 거기 살고 싶어서 살았대? 그냥 거기서 쭉 산 거잖아.


유영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그냥 당신이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하준그게 왜 궁금해! 남의 집을! 왜? 아주 통장 잔고까지 물어보지그래? 아니다, 아예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지.


유영그래, 물어나 보자. 당신 통장 잔고가 얼만데?


하준그만하자.


유영이래서 우리 임대주택에도 못 들어가.


하준임대는 우리 집도 아니잖아.


유영일단 거기라도 들어가야지. 언제까지 각자 원룸에서 살래? 거기서부터 시작해도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우리 엄마 아빠는 숟가락 하나 놓고 시작했대. 한 쌍도 아니라 딱 하나! 옆집에서 빌린 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잖아. (사이) 당신 갑자기 상의도 없이 제대하더니, 1년이 넘도록 놀고만 있어.


하준2개월 전부터.


유영편의점 알바도 직장이야? 그거 노는 거야!


하준그만하자고! (사이) 미안해.


유영뭐가 미안해? 당신이 시작하고 미안하다면 바로 끝이야? 기분 다 잡쳐버린 나는?


하준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미안해.


유영처음 만났을 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눈도 못 마주치던 당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너무 궁금했어. 자물쇠처럼 꾹 입을 닫고 얼음이 다 녹아서 밍밍할 게 분명한 카페라떼를 쭐쭐 빨아 먹을 때. 심장이 쿵쾅거렸다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할까? 자그마치 30분을 끙끙거리던 당신이 겨우 입을 열고서 했던 말이 ‘다음에는 어디서 볼까요?’ 그날 데이트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당신이 꾹꾹 담던 그 말이 항상 기대됐어. 오늘은 제쳐두고 항상 다음을 말했으니까.


하준미안해, 내가 전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절대로 남들이랑 트러블 일으키지 않을게.


유영숨이 막혀! 자물쇠가 당신 입이 아니라 내 가슴에 달린 거 같다고! 이젠 심장이 다 녹아서 줄줄 새. 구멍이 도대체 어디 뚫렸는지도 몰라서 하루 종일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당신만 보면 답답해서 돌아버리겠어! 30분이 아니라 자그마치 1년이라고!


하준그 인간이 예의를 군대에서 좀 배웠으면.


유영무슨 말이라도 좀 하라고!


하준미안하다고 하잖아!


유영당신이 아직도 영웅인 줄 알아?


하준난 한 번도 영웅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사이.


하준당신 공연이 다음 달인가?


유영올 필요 없어.


하준당신 너무 열심히 연습해. 요새 매일 연습한다고 전화도 잘 안 받고. 걱정되잖아.


유영난 괜찮아. 나는 진짜.


하준당신 튤립 좋아하지? 안개꽃이랑 같이 섞어서. 오는 길에 공연 포스터 봤어. 예술극장에서 하는 거. 공연 끝나면 같이 저녁 먹자. (손을 잡으며) 요새 연습을 너무 많이 하지. 손이 전부 부르텄다.


유영(손을 확 빼며) 오지 말라니까! (사이) 미안해.


유영 우뚝 멈추고 인형 같다.


하준그녀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영(이어지지 않고 밝게) 이거 뽕브라다!


하준나한테 그걸 말해도 돼?


유영너니까 말하지. 이건 시선으로부터의 해방이야! 오케이, 나 이 정도면 괜찮으니까 다들 신경 꺼!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자꾸만 쳐다보거든. 그러니까 너한테 말하는 거야.


하준나도 사실은 깔창이야.


유영(장난기 가득) 젠장! 넌 말하지 말라고! (퇴장)


하준그래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4.
하준을 중심으로 좌측은 춘식, 우측은 여자가 있다.


여자어서 와요! 거기 신발은 옆으로 밀어도 돼요. 어서 들어와요. 먼지가 많아 보이지만 이게 다 채광이 잘 된다는 뜻이에요. 요새 건물을 전부 다닥다닥 붙여놔서 해를 못 봐. 그럼 먼지 날리는 것도 하나도 안 보여. 이거 쓰레기 치우고 청소 싹 하면 완전히 새집 같다니까.


하준(콜록거리며) 그러네요. 집은 뼈대가 좋아 보여요.


여자잘 아시네. 요전에 살았던 사람 내쫓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요새 집주인이 더 고생이에요. 임대차보호다 뭐다 해서 이렇게 개떡같이 집을 써도 뭐라 하지도 못하고. 이 근처 전셋값이 전부 올랐는데, 나만 5년 만에 올린 거야. 그것도 3천밖에 안 올렸어. 주변에 전부 1억씩 올리는데. 지금 이 집도 여기 뒤져 봐요. 제일 싸.


하준그런 것 같아요.


여자그렇지? 집 관리도 얼마나 힘든데. 오죽했으면 내가 이렇게 직접 얼굴 보자고 했겠어. 관상이란 게 있잖아. 총각은 인물이 훤해서 좋아. 저번에 그 양반은 꾀죄죄해가지고. 아유, 내가 별소리를 다해. 면접은 그럼 간단하게 질문만. 다 형식적인 절차예요. 태풍 때 창문은 어떻게?


하준창문을 왜?


여자전세 살아 본 거 맞아요?


하준네. 직접 전등도 갈고 보일러도 대충 수리할 줄 알아서 직접 했어요.


여자보일러도 만져요? 그럼 가기 전에 요 옆에 보일러 한번 볼래요? 아무래도 그 집 아가씨가 잘못 만졌나 봐. 자꾸 나한테 고치라고.


하준저는 뭘 잘못 만지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겁이 많아서요. 낯을 가려서 문제가 있으면 스스로 해결하는 편이기도 해요. 반지하라서 곰팡이가 생기면.


여자반지하에 살았어요?


하준왜요?


여자아니, 여긴 1층이니까.


하준똑같이 전세잖아요.


여자됐어요. 가 봐요.


하준아줌마!


하준, 춘식을 보며.


춘식거기다가 왜 화를 내요. 집주인이잖아요!


하준나는 뭔데!


춘식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이런 태도면.


하준집을 못 얻어?


춘식집이 거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제발요!


하준시키는 대로.


춘식항상 밝은 미소와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해요.


춘식이 하준의 사진을 찍는다. 찰칵.


하준제 증명사진이 이래요.


여자예. 직업은.


하준지금은 편의점.


여자현재는 무직?


하준정말 꼼꼼하게 보시네요. 이런 분들이 정말 모든 일 처리를 해주셔야 하는데. 저는.


여자군인이셨네요. 제대하신 지는 꽤 됐고. 실업급여도 끊겼고.


하준제가 회사를 중간에 다니긴 했거든요. 저 일 잘해요. 일 시작하면 금방.


여자이자가 문젠데.


하준부탁드립니다. 십자가네요? 저도 교회 다닐게요, 앞으로. 그럼 다 같은 하나님의 자식 아닙니까? 형제나 다름이 없죠.


여자나라에서는 전세자금 대출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연 이자율 12%로 대출 가능합니다.


하준감사합니다! 제가 일 다니면 열심히 갚을 수 있어요. 연체도 절대로 안 하고요.


여자전세금의 70%만 대출이 가능하신 거 알고 계시죠? 나머지 30%는 자기 부담입니다. 군 생활도 오래 하셨는데.


하준30%면 그게.


하준 다시 춘식을 본다.


춘식그것도 없어요?


하준이 나이에 그 돈 있는 놈이 어딨어!


춘식지금 나한테 소리쳤어요?


하준다른 방법이 있겠죠? 분명히 알고 계시죠?


춘식하아. 방법이라. 일단 사진이나 좀 찍읍시다. 시키는 대로 했죠?


하준그럼요. 미소와 칭찬.


춘식요새 임대주택이 진짜 많아요.


하준그건 내 집이 아니잖아요!


춘식요새 다 그렇잖아요. 주민등록증도 나라에서 발급하는데, 우리 것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다 빌려 쓰는 거지. 내가 말했잖아요, 빚도 능력이라고.


하준내 집을 갖고 싶다니까요.


춘식평생 개집에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여자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주거환경부담 개선을 위해 나라에서는 청년 세대에게 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하준대출금이 필요한가요?


여자저희는 청년들을 응원하기 위해 임대주택에 입주하실 만한 청년들을 직접 찾아 주택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돈이 문제인가요? 자소서 3장을 제출하시면 됩니다!


하준자소서요?


여자공동 주택인 만큼 공동체 생활에 익숙하고 미래지향적인 청년들을 찾으려는 아주 건전한 목표입니다!


하준 다시 춘식에게.


하준그게 중요해요?


춘식당신한테 도대체 뭐가 있어요?


하준내 집도 아니잖아요! 내 것도 아닌데, 나를!


춘식자기 PR이 얼마나 중요한 시대인데요. 다들 돈을 주고서라도 더 예쁜 사진을 찍어요. 막상 비교해 보면 사진이랑 당사자랑 아예 다르다니까. 똑같은 건 사람이라는 사실밖에 없는 사진도 자기라고 우기는 세상이에요. 누가 요새 네 거, 내 거를 따져요. 빌리는 것도 능력이에요.


하준나는.


춘식잘할 수 있어요. 내가 아는 그 하준!


하준도저히 나는.


춘식(하준의 따귀를 때리며) 도대체 그런 정신으로 뭘 하겠다는 거예요! 군인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그따위 정신으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군인정신!


하준, 여자를 보며.


하준나는 영웅입니다.


춘식(사진을 찍으며) 더 크게!


하준북한에서 지뢰 심는 것을 발견하고 사살했습니다. 나는 영웅입니다!


여자국가의 안보에 이바지한 분께 임대주택을 내어드릴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대기 번호 1번입니다! 현재 임대주택은 전부 배정이 완료된 상태입니다. 한 분이 빠지시면 그때, 입주 가능하십니다.


5.
하준과 춘식 양옆에 남자와 여자가 서 있다. 춘식이 자신이 찍은 사진을 하준에게 나눠준다.


춘식학원 선생도 선생이야?


여자(활짝 웃으며) 얘들아, 제발 말 좀 들어. 누가 선생님한테 그런 말하래. 어, 어! 싸우지 말고. 오늘은 챕터 8을 할 차례에요. 다들 조용, 조용! 얘들아 조용! 아니야, 소리 지른 거. 그냥 말한 거야. 부모님께 얘기하지 말고. 알았어, 미안. 미안해, 선생님이.


춘식어때요?


하준왜 표정이.


춘식이야, 난 또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네.


남자이번에 하시면 완전히 돈 버는 거라니까. 혜택을 이렇게 드릴게. 공짜 폰이나 다름이 없어요. 게다가 요 앞에 보이죠? 선풍기랑 라면, 쌀 전부 드릴게. 아유, 아들내미도 다 이런 거 쓴다니까. 에헤이, 또 그런다.


춘식대한민국이 이렇게 개인주의가 깊다니까. 노인 공경 이런 거 없잖아요. 하긴 노인들이 전부 지하철 1호선에 모여 탑골공원으로 향하는 통에 교통체증이나 생겼지. 무슨 쓸모가 있나.


하준이 사람도 표정이.


여자그럼요, 고객님! 신용카드 1주년 기념 특별 이벤트입니다. 1년에 한두 번씩은 이가 시리잖아요. 그때마다 목돈이 나가면 얼마나 부담이 커요. 이번 치과보험은 한 달에 20만 원 이상 사용하는 카드에 30%를 적립해주는 상품입니다.


춘식누구로 할 거예요?


하준표정이 왜 다 저래요?


춘식당신 표정도 비슷해요. 빨리 하나 정해요.


하준아니, 나는 그냥 기다리다가.


춘식잘도 순번이 빠지겠다. 개집이 그렇게 좋아요? 쟤들은 뭐 그냥 들어간 거 같아요? 봐요! 쟤들이 저길 어떻게 들어갔나.


여자와 남자는 자신들의 대사를 반복해서 읊는다. 계속해서 활짝 웃는 표정.


춘식아이고, 성인군자 납셨네. 이럴 거면 진작 좀 잘하지 그랬어요.


하준이게 내 탓이에요?


춘식태어날 때 가난한 건 당신 탓은 아니죠. 부모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탓할 이유가 수천 수백 가지는 돼요. 근데 지금은? 당신 지금까지 살면서 수천만 번의 기회를 만났을걸. 지금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게 적어도 다섯 가지는 될 거 아니에요.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그게 전부 당신이 짊어져야 할 멍청함이라니까! 어떻게 당신 탓이 아니에요. 지금 이것도 전부 당신 탓이라니까요. 젠장, 초등학생도 아니고 내가 얼마나 자세히 알려줘야 해요? 매일매일 곱씹으며 이 자리에 이 상황을 추억처럼 그릴래요? 손자가 있는 게 당신 미래에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할아버지가 사실은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도 있었단다.’ 하면서 추억이나 팔래요?


하준내가 할 수 있을까요?


춘식당연하지! 당신이 못하는 게 어디 있어! 당신은 영웅이잖아!


하준내가?


춘식다시 영웅이 되는 거야! 전쟁에서 남을 죽이고 이기는 건 당연한 거야. 희생당하는 게 병신이라고! 차렷!


하준할 수 있습니다!


춘식누굴 죽일 거지?


6.
어둠을 헤매는 마람.


마람말라크! 말라크!


남자 등장.


남자마람?


마람누구세요?


남자마람 맞지? 언덕 너머 세 번째 골목에 있는 집에 사는.


마람폭격으로 전부 무너졌어요. 저쪽 아래 천막에서 지내요. 지금도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남자(물을 건네며) 나는.


마람(물을 다급하게 받으며) 감사합니다! (벌컥벌컥 마신다)


남자그래. 나는 요 아래 개천가 옆에. 아니다. 우리 집도 다 부서져서. 얘기는 들었다. 아버지는?


마람집이랑 같이.


남자왜 히잡을 안 쓰니?


마람(황급히 히잡을 쓰며) 동생을 찾는데 방해가 돼서. 죄송해요.


남자다 큰 처자가 이럴 때 더욱 조심해야지. 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마람혹시 말라크, 요만한 어린아이 못 보셨어요? 여자아이긴 한데 아직 아이를 가질 수도 없어서 남자아이나 진배없어요. 총을 든 시커먼 사람들한테 전부 다. 이제 엄마 아빠도 없어서 저한테는.


남자너 혹시 한국말을 할 줄 아니?


마람조금요. 그런데 와르다가 더 잘해요. 저도 걔한테 배웠거든요.


남자그 집에서 오는 길이다. 저쪽쯤이 아마도 그 집이었을 게다. 오늘은 어디서 잘 거니?


마람모르겠어요.


남자너를 도와줄 만한 곳을 알고 있단다.


마람돌아보니 온통 폐허였어요. 도저히 잘 곳이 없었어요. 날 비난해도 좋아요. 당장 총 가진 놈들이 눈에 보이는 게 없으면 좋다고 방아쇠를 당기는 통인데. 해는 하늘 끝에 걸려 있었고 나는 선택권이 없었어요.


남자(함께 걷다가 개집을 가리키며) 여기서 자.


마람개집 아니에요?


남자천막이나 개집이나.


마람감사합니다.


남자내일 한국으로 갈 거야.


마람네?


남자살아남은 가문들마다 장손들이 탈 비행깃값을 모았어. 원래 와르다가 통역을 하기로 했는데. 네가 해줘야겠다.


마람그게 무슨. 저는 말라크를!


남자여자아이라며.


마람그게 왜요?


남자가문의 대는 이미. 알라가 주신 축복을 올바른 곳에 사용해야지.


마람한국어는 알라가 아니라 와르다가!


남자그래서 와르다는 알라 곁으로 갔잖아! 너도 알라의 인도를 따라야 해.


마람저는 알라가 아니라 말라크를 찾고 있어요!


남자알라를 찾는 길이 말라크를 찾는 거야. 한국에 가야 말라크를 찾을 수 있어.


마람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 줄은 아세요?


남자말라크를 찾는 방법은 브로커뿐이야. 그 시커먼 남자들이 데리고 갔다며. 도대체 시커멓지 않은 남자를 어디서 찾을 수가 있니! 돈을 벌어서 브로커를 사야 해.


마람나는 히잡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녀요. 아마 말라크도 마찬가지겠지요. 벌써 시커멓게 변했을까요?


남자일단 자라. (퇴장)


7.
새벽. 혼자 두리번거리며 망설이고 있는 하준. 시계를 보며 한숨을 쉬는 하준. 마람 등장. 하준은 마람이 지나가길 기다리지만 마람도 서성인다. 그러다 개집 가까이 가는 마람.


하준당신 뭐야!


마람개집이 비어 있어서.


하준예, 정말 어려운 걸 맞추셨네요. 가세요.


마람그냥 좀.


하준가라니까!


마람이 서성인다.


하준당신 머리카락이 왜 그래? 이봐요.


마람아니에요.


하준당신 불법체류자지?


마람내 피부색이 보여요?


하준그쪽 나라를 가 봤어요. 직업 군인이 되기도 전인데, 쌀국수가 맛있었지. 참 친절했어요. 내가 2천 원짜리를 5천 원에 샀거든. 그래도 되는 기분이라 참 좋았는데. 지금은 내가 그럴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에요.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난 원래 좋은 사람이에요. 알아들어요?


마람난 당신이 갈 수 없는 나라에서 왔어요.


하준상관없어요. 그럴 기분도 상태도 아니라는 게 중요하니까. 거기도 쌀국수를 팔기는 하잖아요. 안 그래요? 난 좋은 사람이니까 좀 가요.


마람좋은 사람, 나쁜 사람. 그것보다 손에 뭘 들고 있느냐가 중요해요. 다들 손에 뭘 쥐지 못해 안달이 났어요. 총이든 칼이든.


하준그러니까 난 손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좋은 사람. 제발 좋은 사람 말 좀 들어요!


마람(새총을 꺼내 당기면서) 전부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좋은 사람들이라고.


하준기껏 든 게 그거요?


춘식 등장.


춘식준비 다 했죠? 어?


마람(황급히 얼굴을 가리며) 갈게요.


하준왜 벌써 나와요? 내가 신호하면.


춘식외국인이에요? 어디서 왔어요? 불법체류자? 어디 봅시다. 얼굴이 좋네요. 볼이 핼쑥하다. 밥은 먹었어요? 새벽에 문 여는 식당이 어디 있나. 근데 다른 나라에서는 히잡을 안 써도 돼요?


마람전쟁이 나서요. 다들 그럴 정신이.


춘식난민이에요? 진짜 전쟁? 내가 어렸을 때 세계 2차대전을 책으로 보고 얼마나 설렜는지 알아요?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건 낭만이에요. 이제 그럴 수 없다는 게 비극이고요. 폭격 소리는 어때요? 아니지, 사람이 정말로 죽어요? 일단 사진부터 좀 찍을게요.


마람(새총을 꺼내 당기며) 사람은 진짜 죽어요.


춘식(사진을 찍으며) 잠깐만. (하준을 마람의 옆에 세우며) 이렇게 좀 서 봐요.


하준저기 시간이.


춘식움직이지 말고요! 거기 딱!


마람진짜 죽일 수 있어!


춘식방금 그거! 다시 한번만 해 볼래요?


마람진짜 죽는다고!


춘식너무 좋아요! 얼굴이 너무 좋잖아. 이름이 뭐예요?


마람마람.


춘식마람. 마람. 이름도 너무 좋다. 얼굴이 너무 좋아요. 좋다는 게 그러니까 예쁘다, 뭐 이런 느낌은 아니고. 진짜 좋아요.


마람히잡을 안 썼는데?


춘식이 좋은 걸 왜 가려요! 둘 다 얼굴이 똑같잖아요. 이게 예술이라니까요.


하준이제 곧 2시예요.


춘식진짜 좋다.


하준곧 2시라니까요! 임대주택은요? 우리 결정했잖아요.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전부 내 탓으로.


춘식좀 닥쳐요! 이게 당신 집을 만들 길이니까. 여기 왜 왔어요?


마람그게 중요해요? 내가 히잡을.


춘식오늘 왜 자꾸. 내 말에 대답을 좀 해요.


마람동물원에 가려고요. 코뿔소 뿔을 자르려고요.


춘식코뿔소 뿔이요?


마람아직 뜨끈뜨끈한 김이 나는 뿔. 뿔이 나는 정말 무서웠어요. 분명히 책상에 놓여 있었는데 그 밑으로 코뿔소가 달려올 것 같았거든요. 근데 코뿔소 대신 자루가 튀어나왔어요. 엄청나게 큰 자루. 그 안에는 돈이 가득 들었어요.


하준얼만데요?


마람이 하준과 춘식에게 귓속말을 한다. 충격을 받는 둘.


하준집을 살 수 있다.


고시원 창문들이 일렁인다.


마람왜 이래요?


춘식2시다. 하준 씨. 얼른.


하준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춘식.


춘식아직 한 번도 못 찍었어요. 빨리 좀 해 봐요.


하준카메라 치워요.


춘식이대로 전부 들키고 쫓겨날 거예요? 곧 사람들이 짜증 나서 밖으로 나올걸요. 저 사람들 이것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겨우 잠 좀 자나 했더니 개가 안 짖잖아.


마람사람들이 나와요?


하준카메라 치우라고.


춘식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잖아요. 당신은 군인이잖아요!


마람날 신고하면 어떡하죠? 사람들이 전부 쳐다봐요. 가만히 걷기만 했는데도 전부 쳐다본다고요!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어요? 아니면 히잡을 안 써서 그런가요?


춘식(카메라를 내리며) 다음번에는 꼭 보여줘요. 마람. 사람들 나오기 전에 숨어요.


마람과 춘식 퇴장.


하준난 군인이 아니야. 난 개가 아니야. 난!


암전. 개 짖는 소리.


8.
하준과 마람은 삽을 들고 열심히 참호를 판다.


하준괜찮아. 전쟁터도 아닌데 뭐. 그냥 예전에 전쟁을 했던 곳.


마람여자가 총을 쏴도 돼요?


하준그게 왜 안 돼?


마람배우는 건 잘하는 편이에요.


하준공부해도 아무 소용없어. 여기가 지뢰밭이라고는 하는데,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거 아니냐. 밟는 놈이 병신이지, 뭐. 너 병신이야?


마람착한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집도 없는데 어디서 잘 거냐고. 어쩔 수 없잖아요. 말라크를 데리고 노숙을 할 수도 없고. 아직 남자애나 다름이 없는 아이예요. 그래도 여기서 밥은 먹잖아요. 다 섞은 꿀꿀이죽이긴 해도.


하준저기서 북한군도 봤어. 생긴 게 우리랑 똑같더라니까. 삽질하다 눈이 딱 마주쳤는데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냥 씩 웃었어. 걔들은 10년 이래, 10년! 어쩔 수 있나. 웃고 말아야지. 나야 이게 직업이라서 그렇지, 너는 내년에 또 사회로 나가야지. 대학은? 난 그냥 지방대. 할 거 없어서 왔지 뭐. 요새 할 게 있나. 몰라, 터진 적이 없어서. 지뢰니까 엄청 소리가 크겠지.


마람소리가 안 나요. 휙, 아니면 췩! 아무래도 새총이니까. 죽기는 죽겠죠? 아니요, 새총은 좀 마음이 편해요. 총보다 차갑지가 않아서.


하준잘 파네! 삽질 좀 했나 봐?


마람우리 집 개가 매일 땅을 팠어요. 이름이. 기억도 안 나네요.


하준그래, 개들이 굴 파듯이. 시골에서 살았나 봐?


마람그 쬐깐한 곳에서 눈을 감은 녀석 표정이 왜 그랬는지, 이제 알겠어요.


하준몸을 욱여넣는다는 것은 고정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


마람이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허벅지에 온몸이 닿아서 따뜻해요.


하준허벅지에 근육이 제일 많은 거 알지? 거기서 열을 온몸으로 보내잖아. 엄마 배에서 하던 자세랑 비슷해. 등이 좀 아프긴 해도 나쁘지 않아. 특히나 이런 훈련 도중에는.


마람편안하다. 왜일까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잠을 청해 본 적이 없는데. 배가 따뜻해요. 아이를 가져 본 적이 없는데도 자세가 뭔가 익숙해.


하준이게 집이지. 내가 집이 어디 있어. 부대에서 준 막사가 전부지. 그래도 조금만 더 있으면 관사가 나온다니까.


마람기억도 나지 않아요. 우리 집, 옆에 있던 와르다의 집, 골목길 건너에 있던 집. 전부 폭격으로. 집이라는 게 있었는지조차.


하준여기도 있을 건 다 있어. 여긴 부엌, 여긴 안방, 그래, 거긴 손님방 해라.


마람편안하면 안 되나요? 계속 웅크려 있었더니 배가 아파요.


하준지금? 웅크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저기 오른쪽으로 쭉 가 봐. 지뢰는 무슨. 나도 여기 올 때마다 저기서 쌌어. 어제도 내가 저기서 쌌잖아. 그래, 거기로 쭉!


개 짖는 소리와 폭탄 떨어지는 소리! 쾅쾅! 컹컹!


하준어?


마람어?


하준아니야, 왜 그래. 장난치지 마. 거기 지뢰가 왜?


마람제 동생이 왜 저 버스를 타고 있어요? 먼저 다른 마을로 가는 거죠? 왜 출발하는 거죠?


하준제발요! 아니, 지금 살릴 수 있잖아요! 부대 밖이면 119를 부르면 되잖아!


마람제발 저 차에 태워주세요! 제발, 저 차에! 동생은 아직도 울면 인형부터 찾는다고!


하준아직 펄떡이잖아요! 의무병! 의무병!


마람말라크! 말라크! 여기 좀 봐!


하준얘가 어떻게 북한 사람이에요! 훈련 중이었잖아요! 감옥이요?


마람저걸 왜. 저걸 왜 입어요?


하준아니요, 아닙니다.


마람저는.


하준저는.


하준과 마람 참호 속에서 총을 겨누는 듯이 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소리와 함께 춘식 등장.


춘식좋다! 얼굴이 너무 좋아!


하준새총으로 코뿔소를 잡는다고? 이게 맞아요?


마람개집에 살면서 못 믿을 것도 많네요.


춘식촬영 끝났으니까 가 볼게요. 두 분 다 파이팅!


춘식 퇴장. 하준과 마람, 군인처럼 경계하며 수색을 시작.


하준코뿔소 우리가 어디죠?


마람저쪽이에요.


하준왜 문이 다 열려 있죠?


마람애들이 다 다쳤어요.


하준쟤들 표정이 다. 왜.


마람저쪽이 코뿔소 우리인가 봐요.


하준과 마람 빙글빙글 돌다 자꾸만 부딪힌다.


하준왜 자꾸 그렇게 돌아요?


마람그럼 어떻게 돌아요?


하준아니, 이건 당연히 오른쪽부터 수색을.


마람우리 부대에서는.


하준군대를 갔어요?


남자 등장. 마람은 하준을 리드해 바닥에 엎드린다.


마람쉿!


남자(무대를 가로지르며) 아오!(늑대 울음소리) 그러니까 이번에 코인이 한 방에.


하준늑대예요?


마람들키면 죽어요.


남자 퇴장. 마람과 하준 다시 수색을 시작하다 여자 등장.


여자(무대를 가로지르며) 아오!(늑대 울음소리) 이번 신도시가 그쪽이 확실하다니까. 우리 삼촌의 친구 오빠가 국회의원이잖아. 확실하다니까!


여자 퇴장. 마람과 하준 털썩.


하준자연스럽네요.


마람전쟁에서 사주경계는 목숨이에요. 군대 안 갔어요?


하준저희는 뭐 훈련만. 한국에 와서 좀 편하죠?


마람비슷해요. 들키면 쫓겨나니까 숨어 다니느라. 누가 자꾸 쫓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하준전쟁은 왜?


마람몰라요.


하준그런 걸 알아야죠. 전쟁이 왜 났는지, 내가 어느 편에서 총을 들고 있는지. 알아야 쏘기라도 하죠. 눈이 갈색이네요.


마람잘 몰라요.


하준돌아가면 잘 알아봐요. 미안. 안 돌아갈 거죠?


마람탈영했어요. 동생 찾으러. 폭격으로 집이 전부 부서졌어요. 엄마도 아빠도 전부 같이. 도저히 잘 곳이 없어서 시커먼 남자들을 따라갔죠. 거긴 밥도 주고 잘 곳도 줬어요. 삽을 주고 땅을 파면 동생이랑 같이 들어가요. 처음으로 동생이랑 그렇게 가까이 붙어 있었어요. 아직도 동생 체온이 생각나요. (사이) 나도 개집에서 자주 잤어요. 왜 개집에서 자요?


하준몰라요, 나도.


마람개집은 그래도 좋은 편이죠. 삽질을 안 해도 되고, 보통 주인들이 카펫도 깔아놓거든요. 밖에서 안이 안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먹다 남은 소시지를 안에서 줍기도 하는데.


하준갈까요?


하준과 마람이 다시 수색을 시작한다.


하준여기 근처였던 것 같은데.


마람여기예요.


사이.


하준뿔이 다 잘렸어요.


마람역시 우리만 노린 게 아니었어!


하준어? 저기!


마람과 하준은 커다란 코뿔소를 발견한다. 경이로운 코뿔소.


하준코뿔소다.


마람왜 사람을 놀래켜!


하준처음 봐요. 코뿔소.


마람뿔도 따뜻할까요?


하준만져 보죠!


하준과 마람은 고시원 창문의 방범창에 달려든다.


하준문이 잠겼어요.


마람못 열어요?


하준전부 열려 있었잖아!


열려고 애를 쓰는 둘. 늑대 소리. 아오!


마람늑대예요!


하준여기 동물원이에요! 당연히!


마람문이 전부 열려 있잖아요!


코뿔소의 커지는 콧김 소리.


하준코뿔소는 또 왜 저래.


늑대 소리가 커지면 함께 커지는 코뿔소의 콧김 소리.


마람누가 문을 다 열어놓은 거야!


하준빨리 이것부터 좀 열어 봐요.


마람점점 가까이 오나 봐요!


하준제발 좀!


마람, 새총으로 늑대들을 향해 겨눈다.


하준그걸로 쫓을 수 있어요?


마람시도해 보는 거죠.


하준나도 시도나 해 볼게요. 컹! 컹! 컹!


코뿔소의 울음소리. 철이 구부러지는 소리.


마람도망쳤다. 코뿔소가 늑대 소리에 흥분했나 봐요.


하준이게 이렇게 부서져?


9.
하준과 유영, 고시원 반지하 방범창 안에 있다. 유영은 여전히 첼로 가방을 메고 있다.


유영나중에 방범창이 필요 없는 높은 건물에 살자.


하준(손에 뭐가 찔린 듯) 아야!


유영괜찮아? (하준의 손을 살피며) 조심 좀 하라니까! 딱 봐도 날카롭구만.


하준너도 첼로 줄 갈다가 맨날 베이잖아. 쌤쌤이지.


유영피 보는 건 나 하나로 족하거든.


하준여기 어디 휴지가 있었는데.


유영당신은 물건을 좀 버려. 못 버리고 다 모아두는 거, 그거 문제 있는 거래. 전부 이렇게 쌓아두니까 필요한 것도 못 찾잖아.


하준그게 문제라니까. 자꾸 버리는 거. 어떻게 그렇게 쉬워? 그러다가 자기 이름도 버리겠어. 내 이름 붙었던 건 언젠가 생각난다니까. 이렇게 쌓아두다가 갑자기 개똥이 될 수도 있어.


유영개똥?


하준약에 쓸지 누가 알아.


유영으엑. 그 약 나는 사양할게.


하준이게 전부 내 꿈이었다니까. 저건 초등학교 2학년 때 쓰던 축구화. 그땐 분명히 월드컵에 나갈 줄 알았는데. 저건 고등학교 때 쓴 편지. 거의 시인이었다니까. 저걸 다 어떻게 버려. 버리는 게 얼마나 아픈 건데. 그러니까 자기도 절대로.


유영(입을 막으며) 닭살! 거기까지.


하준좀 내려놔. 무겁잖아.


유영꿈을 아무 데나 내려놓을 수 없지.


하준아무 데가 아니라 내 집이거든. 처음 생긴 내 집! 방범창만 제대로 달면!


하준이 볼트를 쇠창살 밖으로 떨어트린다.


유영버린 거야, 저거?


하준아니! 절대. 손이 닿을 거 같은데.


하준이 엎드려서 쇠창살 밖으로 손을 내민다. 유영도 곧 따라 한다.


하준팔다리 긴 게 내 유일한 단점인데.


유영팔은 내가 더 길어.


노숙자 밥그릇을 들고 등장. 하준과 유영 앞을 지난다.


하준저기요!


노숙자저요?


유영내가 가지고 올게.


하준돕고 사는 거지. 거기 그 볼트 좀 주워주시겠어요?


노숙자왜 거기 갇혀 있는 거요?


하준갇힌 게 아니라 여긴 제집이…...


노숙자얼른 나와요.


유영내가 나간다고 했잖아.


유영 퇴장.


하준결국 노숙자는 볼트를 주워주지 않았습니다. 유영이는 반지하에서 남들의 발목을 보는 걸 썩 유쾌해하지 않았습니다. 변태 같다나. 아무래도 전 변태였나 봅니다. 꽤 즐거웠거든요. 발목이 사람마다 그렇게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매주 일요일마다 집 앞을 지나는 노숙자의 발목은 특히나 더 그랬습니다.


노숙자 쩔뚝거리며 걷는다.


하준노숙자는 총에 맞은 노루처럼 쩔뚝거렸습니다. 표정이 늘 똑같았는데, 외국 영화에 나오는 사슴 흉상 같아 더욱 그렇게 느꼈습니다.


노숙자깜빵에 있을 때, 그 좁은 방에 막 6명 7명씩 들어 있어. 인권이란 게 좀 중요해? 방이 좁지는 않은데 문제는 여름인 거야. 더워 죽겠는데 딱 인원수에 맞는 방이니 피부만 닿아도 바로 욕이 나오는 거야. 그건 불가항력이지. 그 욕은 뇌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저기 저 태양에서 나오는 거지. 그래서 다들 몸을 웅크려. 최대한 살이 안 닿게 하려고. 무릎을 이렇게 팔로 딱 감싸서 풀리지 않게. 그러고 자면 밤에 좀 나아. 덜 덥지. 대신 아침에 일어날 때 우두둑 소리가 막 나는 거야. 그럼 이게 그렇게 생각나더라. 족발은 보양식이 아니라 더운 음식이야. 너도 거기서 그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우두둑 소리만 나. 얼른 나와.


하준노숙자는 거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자와 남자 서로 반대편에서 등장. 노숙자가 밥그릇을 두고 옆에 앉는다.


남자(노숙자의 밥그릇을 보고) 여기에 두지 말라니까요!


여자구청에서 다 허락받았다니까.


남자어디 구청이요? 이거 불법 점거물이라고 다 확인하고 나왔는데.


여자당신은 세상 혼자 살아요? 길냥이들도 생명이고 더불어 살아야지. 길냥이들 다 없어지면 쥐들은 누가 잡아요?


남자됐고, 이거 빨리 치워요. 갖다 버리기 전에.


여자어머. 몰상식한 거 봐. 대자연의 섭리 이런 거 안 배웠어요?


남자담비가 멸종위기종인 건 알아요?


여자그럼 그쪽이?


남자네! 국립생태원에서 나왔어요.


여자나는 고양이보호협회야!


노숙자 등장. 밥그릇을 들고 가려고 한다.


여자이봐요! 그걸 어디 가져가요?


노숙자네?


남자잘하셨어요. 더러운 거 빨리 가져다 버리세요. 모범적인 시민이시네.


여자누구 건 줄 알고 막 건드려요!


노숙자내 건데. 무료급식 받아오려고.


여자어머.


남자아줌마가 둔 게 아니에요?


여자아니, 다른 맘이. 나 아줌마 아니거든요! 아저씨! 여기서 고양이 못 봤어요? 여기 고양이가 자던 자국인데.


노숙자내 자린데.


여자여기 고양이 집을 좀 놓을게요. 아저씨는 왜 이런 데서 자요. 저기 저런 곳에 좀 들어가서 자요. 입 돌아가.


노숙자깜빵에서 쇠창살이 하나가 뚝 빠진 적이 있었어. 구부린 채로 나가면 쑥 하고 빠질 정도로. 근데 아무도 나가질 않는 거야. 나도 멀뚱멀뚱 보고 있었지. 너무 더웠으니까. 교도관이 그걸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거야. 그러더니 묻더라고. 왜 안 나갔냐고? 그게 할 말이야? 우리 중에 누가 대답을 했더라. 기억도 안 나. 더워서요. 내가 제일 죄질이 가벼워서 막내 비슷했거든. 그 쇠창살을 고치면서 복도에 있는데, 그것도 방이라고 복도가 더 덥더라고. 방 안에서 잔뜩 웅크린 사람들을 보면서 얼른 들어가고 싶더라니까. 미친 거지.


여자아무튼 여기는 안 돼요. 안 그래요?


남자여기서 계속 주무시는 건 좀. 담비들이 물면 어떡해요. 그래도 담비를 다치게 하거나 하면 안 돼요!


여자투표를 합시다. 민주주의잖아. 공정하게.


남자좋아요.


여자아저씨가 여기서 자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남자와 여자가 손을 든다.


여자2대 1이네. 빨리 고양이집이나 가져와야지.


남자아저씨. 제가 잘 아는 쉼터가 있는데.


노숙자어, 저기 고양이.


여자저기 있었네. 아이고, 어떡해. 야윈 거 봐. 어? 어!


남자자꾸 고양이를 여기 부르니까 담비가 도시로 내려오잖아요!


여자저, 저! 아저씨! 고양이를 물잖아!


남자그러니까 고양이한테 먹이를 주지 말라니까요! 담비가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여자집을 지어줘야지. 아저씨! 여기 고양이집 만들 테니까, 만지지도 마요.


노숙자여긴 제…...


여자말 못 하는 것들이 불쌍하지도 않아요? 아저씨는 다른 곳에서 자면 되잖아요! 저, 저! 물어간다! 저 족제비를 당장!


남자담비 건드리기만 해요!


10.
사진전. 고시원의 창문들이 사진으로 바뀐다. 하준의 사진들이다. 하나같이 편안하거나 웃는 표정들이다. 여자와 남자 고급스럽게 사진들을 감상한다.


여자요 앞에 거지 봤어요?


남자엄청 안절부절못하더라.


여자별의별 것들이 전부 돌아다녀요.


춘식 등장.


춘식어서 오세요.


여자어머! 김 작가!


남자사진 너무 좋습니다.


춘식이게 바로 소시민의 표정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의 희망과 환희.


여자너무 대견해요. 장인어른이 갑자기 그렇게 되고 집안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남자고시원에 살았다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단한 예술혼이야.


춘식직접 체험을 해야죠.


여자나는 그래도 그렇게 못 살아. 거기가 사람 사는 곳인가?


남자동물이 따로 없지.


춘식이 사람은 개집에서도 사는걸요!


여자날 바보로 알아? 콘셉트인 거 다 알아.


춘식아하하! 다 아시는군요. 이게 예술입니다!


남자그래도 얼굴이 너무 좋다. 개집에 사는 사람이 없으니까 더 가치가 있는 거 아니겠어?


여자너무 좋아서 뭘 사야 할지 모르겠네.


춘식저기 뒤에 가시면 훨씬 더 흥미로운 사진들이 있습니다. 잠시만요, 팸플릿이.


춘식 퇴장. 하준, 마람 등장.


여자여긴 경비원이 없나? 거지가 막 들어오고.


하준여기가 그.


남자뭔지도 모르는 곳에 막 들어와요? 호기심이 대단하네.


하준저기 가 있을래?


마람 퇴장. 춘식 등장.


춘식(여자와 남자를 끌며) 여기요! 팸플릿 보시고 저쪽으로! 꼭 사고 싶으신 사진들이 있을 겁니다.


여자건물은 이쁜데 보안이 영.


여자와 남자 퇴장.


춘식여길 왜 와요!


하준코뿔소가 집을 부수고 다녀요. 뉴스에 CCTV 영상이 돈대요. 우리가 분명 찍혔을 거예요. 더군다나 마람이 불법체류자라는 게 들키면.


춘식그걸 왜 나한테 말해요?


하준그때 같이!


춘식큰일 날 소리! 난 그냥 사진을 찍었죠. 동물원은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그런 소리 어디서 하면 큰일 나요!


하준아니!


춘식괜찮아요. 이리 좀 와요.


하준, 사진을 본다.


하준내 표정이 왜.


춘식어때요? 죽이죠?


하준내가 왜 저렇게 편안해요? 난 한 번도 편한 적이 없어요! 저 때 분명 비명을 질렀을 거라고!


춘식무슨 상관이에요? 사람들은 정돈된 불행을 먹어요. 어찌나 먹어대는지 불행한 사람이 이렇게도 많은데 여전히 부족하죠. 씹고 뜯고 맛보면 더 씹을 게 부족해져요. 봐요. 장인어른이 멀쩡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내가 고시원 산다니까 득달같이 달려오는 거. 난 고시원에 사는 거 창피하지 않아요. 당신도 개집에 사는 걸 창피해하지 마요. 내가 모델료를 드릴게요. 이거 전부! 집도 살 수 있어요. 이거에 대출까지 받으면 집은 그냥 사죠.


하준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춘식잘해요, 나한테. 더 좋은 거 알려드릴까?


사진들이 마람의 사진으로 바뀐다. 여자와 남자, 마람이 등장해서 사진을 본다.


여자성스러워.


남자종교에 심취한 여자.


여자잠깐만, 무슨 냄새야.


남자무슨 썩은 내가. 우웩.


여자와 남자 퇴장.


춘식불법체류자가 어떻게 모델료를 받아요? 마람은 경찰에 넘기고 마람의 모델료 다 전부 드릴게요.


하준마람 눈이 왜.


춘식당신은 내 최고의 작품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죠.


하준마람 눈은 갈색이에요. 검정색이 아니라.


춘식눈, 뭐요?


하준사진 전부 내려요.


춘식제가 설명이 부족했죠. 그러니까 모델료라는 게 저작권의 개념인데.


하준온 동네에 경찰이 전부 깔렸어요. 마람 눈이 갈색이에요. 100년은 되어 보이는 오동나무 색깔. 그게 얼마나 눈에 띄는 줄 알아요? 이렇게 사진을 잔뜩 걸어두면. 마람 동생이 전쟁터에 있어요.


춘식그런 불행이. 마람 어디 있어요? 사진 좀 찍게.


하준이 사진을 부수기 시작한다.


춘식뭐 하는 거예요!


하준을 말리던 춘식. 하준의 주먹에 나가떨어진다.


하준당장 다 내려요! 내가 왜 영웅인 줄 알아요? 내가 죽였으니까!


하준 퇴장. 춘식은 맞아서 멍든 자신의 얼굴을 카메라로 찍는다. 마람 퇴장.
암전.


11-1.
하준이 개집을 멍하니 본다. 마람 등장.


마람도대체 왜 그랬어요?


하준그러게요. 내가 왜.


마람당신이 겪을 일을 전부 얘기해줄까요? 나도 잘 알아요. 탈영하고 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지!


하준나한테 당신 같은 용기가 있었더라면.


마람한국 군대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쳐줘요? 용기는 군인의 기본이에요.


하준난 뭘 배웠던 걸까요?


마람그런 말을 하려던 건.


여자 등장. 마람은 재빨리 개집에 숨는다.


여자안녕하세요! 말씀 좀 여쭤볼게요.


하준됐습니다.


여자제가 좋은 정보 하나 드릴게요.


하준재개발하는 것들은 이래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여자요 근처에 코뿔소 아시죠? 집을 막 부수고 다니는데. 너무 위험해서 빨리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하준네. 그런데요?


여자요새 TV에 CCTV 화면 엄청 뿌려놨는데. 여자 한 명. 머리는 조금 밝은 편이고 외국인이에요.


하준집에 TV가 없어서요. 요새 외국인이 한국에 한둘인가.


여자그래서 찾기가 쉽지가 않네요. 뭘 물어보려고 해도 전부 외국인인가 봐요. 도무지 대답을 안 해요. 이게 포상금이 어마어마한데 말을 해줄 수가 없어요.


어설픈 개 짖는 소리.


여자개를 키우시나 봐요.


하준외국 품종이에요.


여자많이 짖네요. 물어요?


하준성질이 많이 더러워서. 원래 군견이었어요.


어설픈 개 짖는 소리.


여자못 보셨어요? 외국인 여자. 특이한 얼굴이라 눈에 띌 텐데.


사이.


여자정말 못 보셨어요? 근처에 분명히.


하준못 봤다니까요!


여자혹시라도 보시면 저한테 연락을 좀.


하준좀 가세요! 몇 번을 말해.


여자 퇴장. 슬그머니 나오는 마람.


마람왜.


하준나도 몰라요!


마람정말 몰라요?


하준모르는 게 어디 한둘이에요?


마람내일 코뿔소의 흔적을 찾으러 가요. 부서진 집터에 가 보면 뭔가 있겠죠. 부서진 집들에는 모든 게 남아 있으니까.


하준일단 좀 잘게요.


하준 개집으로 들어간다. 멀뚱한 마람.


하준(고개만 삐쭉) 들어와요. (사이) 싫으면 말고.


하준의 얼굴이 사라지면 부끄러운 마람. 결국 개집으로 들어간다.
암전.


11-2.
개 짖는 소리. 둘은 무대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마람안에 뭐가 엄청 많네요.


하준사는 데 필요한 거 빼곤 다 버렸어요.


마람BTS 노래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하준에이, 지금이 몇 신데.


마람정말이에요! 저는 특히나 <DNA>를 좋아해요. 우리나라에서는 뭘 도통 알려주질 않아서 <DNA>도 그때 처음 알았어요.


하준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마람사랑이 거기 새겨진다는 거죠? 진짜 신기해요. 집이 없어지고 폭탄이 떨어져도 없어지지 않잖아요. 우리 엄마는 아빠 이마를 잘 몰랐어요.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대요. 그래서 아빠한테 모자가 하나도 없었어요. 엄마가 모자를 사준 적이 없으니까. 아빠도 히잡을 쓰면 될 텐데. 안에 화분이 정말 예뻤어요!


하준여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요. 아니 펴요. 딴 남자를 만나서.


마람정말 좋은 타이밍이네요.


하준마람도 여자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마람뭐를요? 이 상황을?


하준아니요! 내 여자친구요. 이름은 유영인데.


마람바람이에요.


하준아직 아무것도 얘기를 안 했어요.


마람확실해요.


하준아니에요, 우리가 벌써 5년을 넘게 만났어요. 왼쪽 네 번째 발가락이 조금 특이하게 생겼는데 어렸을 때 자전거에 깔려서 그렇대요. 오른쪽 엉덩이에는 조금 큰 점이 있는데 그걸 보면 조금 부끄러워해요. 카페에 가면 늘 토피넛라떼를 마시고 튤립과 안개꽃이 섞인 꽃다발을 좋아하는데. 모르는 게 없었는데.


마람우리 아버지는 모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어요. 엄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래도 죽을 때는 엄마 옆에서 죽었죠.


하준하나도 모르겠어요.


마람내일 코뿔소를 찾으러 가요.


암전.


12.
부서진 집터. 사라진 배경 고시원. 마람과 하준 등장.


하준전쟁통도 아니고. 미안해요.


마람익숙해요. 괜찮아요?


하준이런 건 처음 봐요.


하준이 부서진 터를 돌아다니다 뭔가를 발견한다. 다 찢어진 플래카드다.


마람뭐예요?


하준경축 재개발 확정.


하준 분노에 가득 차 플래카드를 당긴다.


하준집을 왜 다시 지어! 왜!


마람무슨 말이에요?


하준저기 남은 테이블 다리, 아마 4인 가족의 안락한 저녁이었겠죠? 저기 검정색 플라스틱 조각은요? 컴퓨터였다면 어린 남매가 서로 하겠다고 싸웠겠죠? 매일 가족들의 옷을 빨던 세탁기였을 수도. 여기 멀쩡히 남은 건!


마람익숙해질 거예요. 전쟁 중에는.


플래카드의 끝에서 유영이 첼로 가방을 메고 등장.


하준유영아.


유영어?


하준여기 왜?


유영아니, 그게. 이거에 걸려서 넘어질 뻔해서. 연습 가던 중이야.


하준옷이 왜 이렇게 더러워?


유영넘어졌어.


하준연습실이 이 근처야?


유영누구야?


하준친구.


마람안녕하세요.


유영안녕하세요.


하준연습 가야 돼?


유영어.


하준바빠?


마람나는 요 앞에 있을게.


남자 등장.


남자이봐요!


유영나 좀 가 볼게!


하준유영아! 잠깐만!


남자지금 어떤지 뻔히 알면서!


하준할 말이 있어. 정말이야.


유영나중에, 나중에.


남자가 얼른 달려와 유영의 손목을 잡는다.


남자코뿔소가 쓰러졌대. 빨리하고 그쪽 동네로 넘어가야 돼요.


하준이 사람이야?


유영아니야, 그런 거.


남자당장 빨리 와요.


하준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유영그런 거 아니야. 가요.


하준뭐가 아닌데!


유영나중에 좀!


남자(유영의 첼로 가방을 뺏으며) 일단 이것부터 내놔요.


하준(남자를 때리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남자 쓰러진다) 이게 유영이한테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유영지금 뭐 하는 거야!


유영이 남자한테 달려간다. 마람은 어쩔 줄 몰라 한다.


하준너는 어떻게 저런 새끼를 만나?


유영뭐?


남자이봐요, 지금 시간이.


하준다 알고 있었어! 전부 다! 내 눈은 쳐다보지도 않지, 공연에는 초대도 안 하지. 매일 손은 부르틀 정도로 연습을 하면서도! 한 번도, 한 번도. 왜 내 손은 잡지도 않아?


유영이 하준에게서 첼로 가방을 뺏는다. 남자 앞에서 첼로 가방을 연다. 가방에는 첼로가 아닌 각종 공구가 들어 있다. 그중에 멍키스패너를 꺼내 남자에게 건넨다.


유영늦어서 죄송해요. 여기 현장은 처음 와 봐서.


남자재개발이라 정신없는 거 알잖아. 누구야?


유영남자친구였어요.


남자빨리 들어와. 오늘 부술 게 많아.


남자 퇴장.


하준첼로는?


유영없어.


하준어디 있어?


유영없어.


하준집에 있지? 저번에 거기 살던.


유영없다고! 집도 첼로도 다 없어! 전셋값을 1억을 올리더라. 어떻게 첼로를 해? 나 고시원 살아.


하준말을 하지!


유영당신은! 당신은 한마디도 안 하면서. 여기 엄청나게 큰 건물들 들어온대. 임대주택이래.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거. 얼마나 고마워. 그걸 내가 짓고 있는 거야. 내가 집을 짓고 있어. 당신은? 고시원 방에서는 첼로를 꺼낼 수도 없었어. 너무 좁거든. 언제부터 우리가 눈을 안 쳐다봤지? 당신 눈이 무슨 색이었어?


하준유영아.


유영헤어져, 우리.


유영 퇴장.


마람코뿔소가 쓰러졌대요.


하준죽었겠죠? 제발.


13.
동물 사체 소각장. 연기가 나는 굴뚝 밑. 신호 사이렌이 굴뚝 밑에 달려 있다.
교복을 입은 보민이 가방을 메고 굴뚝을 보고 있다. 가방에는 BTS 열쇠고리가 달려 있다.


보민너넨 좋겠다. (인기척이 들리자) 어, 어. 왜 벌써.


마람과 하준 등장.


하준안녕하세요. 어른 안 계시니?


보민제가 여기 관리자인데요.


하준네가?


보민왜요?


하준사장님은?


보민잠깐 어디 가셨어요.


마람코뿔소 들어왔나요?


보민코뿔소요?


마람커다란 코뿔소요.


보민저기 사이렌이 울리면 들어오는 건데, 오늘은 아직 한 번도 안 울렸어요.


하준다행이다.


사이.


보민안 가세요?


마람기다려야 해서요.


보민아.


하준넌 학교 안 가니?


보민저도 기다려야 해서요.


마람이렇게 동물을 태우나요?


보민어차피 시체는 일반쓰레기거든요. 쓰레기봉투에 버리느니 이렇게 태우는 거죠. 별 차이 없어요. 비닐에 들어가 땅에 묻히는데요, 뭐. 사람도 그렇게 묻으면 편할 텐데.


마람전부 다 타나요?


보민구조 자체는 사람 화장터랑 똑같아요. 화력도 똑같아서 딱 뼈만 남아요. 입구랑 크기가 좀 작긴 한데, 전 키도 작아서 들어갈 것 같긴 하더라고요.


마람(가방의 열쇠고리를 보고) 아미예요?


보민언니도?


마람네.


보민진짜 외국인들도 좋아하는구나. 전 데뷔 때부터 좋아했어요. 버블도 다 저장해놨는데.


마람버블이요?


보민몰라요? 아이돌이랑 문자 주고받는 거.


마람연락을 해요? 친구예요?


보민(휴대폰을 보여주면서) 팬들이 단체로 보내면 이렇게 답장을 해주는데, 이건 작년 핼러윈에 사진이랑 같이 보낸 거.


마람이 사진 처음 봐요!


보민이건 크리스마스, 이건 새해 축하 문자. 언니 이 사진 본 적 있어요? 너무 사랑스럽죠!


마람한국 사람이라 받아요?


보민돈 내고 구독하는 건데, 별로 안 비싸요. 어?


하준너 집에 안 가니?


보민내 마음이에요. 언니, 우리 어디서 봤어요?


마람아니. 전혀.


하준집에서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보민그놈의 집, 집, 집! 어른들은 할 얘기가 그거뿐이에요?


하준그럼 네가 갈 곳이 거기 말고 어딨어. 복에 겨운 줄 알아야지.


보민빌려서 사는 곳이 어떻게 집이에요? 텐트지. 전부 빌려야 돼. 책도 도서관에서 빌리고 밑줄 친 건 전부 지워서 돌려줘야 돼. 자전거도 따릉이만 타고, 이 교복도! 누군지도 모르는 그 빌어먹을 아파트에서 겨우 받아 입었다고요!


마람그래도 BTS가 문자 보내줬잖아.


보민애들 거 캡처한 거예요. 그럴 돈이 어딨어. 언니, CCTV 그 사람이죠?


마람걔가 스스로 도망친 거야.


보민맞네, 포상금!


사이렌이 울린다. 하준이 보민의 가방에서 BTS 열쇠고리를 뺏는다.


하준가만히 있어! 불구덩이 속에 던져버릴 거야!


마람그건.


하준우린 코뿔소 시체가 오면 뿔만 잘라 갈 거야. 그다음에는 네 마음대로 해. 그때까지만.


보민애들이 내 물건을 빌려 가면 돌려주질 않아요. 처음엔 지우개, 그다음에는 볼펜, 그다음에는 지갑. 돌려달라니까 지들 거래요. 왜 우리 집은 빌려서 사는데 우리 게 안 돼요? 난 한 번도 빌려서 내 걸로 만든 적이 없는데. 화장터 빌리는데도 엄청 비싼 거 알아요? 도저히 엄마 아빠한테 빌려달라고 말을 못 하겠더라. 여긴 내가 빌렸어요. 동물 소각장은 좀 싸길래. 그것도 빌린 거예요. 여기요! 여기 CCTV 그 사람이 있어요! 여기예요!


보민 퇴장.


마람어, 어떡하죠?


하준코뿔소 들어오면 빨리 뿔을 자르고 도망가자.


마람고마워요.


여자 등장.


여자그 학생 말이 맞네. 여기 계셨구나. 한참 찾았어요! 어? 저번에 그?


마람 놀라서 하준의 뒤에 숨는다.


여자마람 씨 맞죠? 다 알고 왔어요. 전부 기록에 있어요. 저 무서운 사람 아닙니다. 내가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얼른 이리 와요. 내가 당신 제주도부터 쫓아왔어요. 이게 다 세금 낭비고 인력 소모예요. 이게 뭡니까?


마람하준 씨. 도와줘요.


하준, 마람에게 BTS 열쇠고리를 건넨다.


하준미안해요.


여자선물 교환식이에요?


하준포상금이 얼마죠?


여자나쁘지 않을 겁니다. 방금 학생이 화장터를 빌릴 돈이 되냐고 묻더라고요. 그 정도는 되죠.


마람안 돼요, 제발요. 도망칠 수 있잖아요.


하준돌아가요. 마람의 나라로. 브로커가 없더라도 동생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거 손에 꼭 쥐고. 여기까지도 잘 왔잖아요.


마람마지막까지 BTS였습니다. 정말 이게 아니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수 있었을까요?


여자마람 씨!


마람내가 달리는 방향은 동생의 버스랑 반대 방향이었어요. 동생이 버스에서 조끼를 입고 있었는데, 조끼 안에 뭐가 잔뜩 들어 있었어요. 내 허리까지 오는 아이들이 버스 가득 똑같은 조끼를 입고 있었어요. 조끼 안에는 폭탄이 잔뜩. 분명히 그다음에는 내가 탈 차례 같아서. 그래서! 나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제발!


하준여자친구랑 살 집이 필요해.


마람거긴 전쟁터라고요!


하준여기도 마찬가지야.


마람이 천천히 여자에게 다가간다.


여자마람 씨 맞죠?


마람네.


여자저분이랑은 어떤 관계죠?


마람아무 관계 아니에요.


여자그쪽은요?


하준아무 관계 아닙니다.


여자네, 알겠습니다. 다행이네요. 한국에 연고지가 있으면 난민 신청이 반려가 돼서. 난민 신청 통과되었고 인도적 차원에서 적응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먼저 자택이 제공됩니다.


하준뭐요?


여자물론 후속 프로그램들을 무사히 이수하신다는 전제하에.


하준자택이라뇨? 집을 왜 줘요?


여자고국에 있는 가족들이 전부 사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부모님과 꼬맹이였는데, 요만한 이름이.


마람말라크.


여자맞아요! 말라크까지 전부 사망 처리되어서 일가족이 모두 몰살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로 인해 명백한 난민 지위를 획득하셨고 그에 맞는 국제법상의 예우를 해드리는 겁니다.


하준저 여자 지금까지 거짓말했어요. 동생이 살아 있어서 구하러 브로커, 브로커를 산다고 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


여자동생이 살아 계신가요?


마람아니요, 죽었어요.


하준코뿔소는! 코뿔소 뿔을 자르려고 왔대요! CCTV 있잖아요! TV에 당신이 막 뿌렸다고 하는 거!


여자공항 입국 CCTV 영상이요? 제가 뿌린 건 그건데. 코뿔소는 동물원에 돌아갔대요. 뿔이 잘려서 지 발로 들어왔다고 하던데.


하준지 발로.


여자마림 씨. 그럼 천천히 나오세요. 그쪽 분도 포상금 받으러 오세요. (전화를 걸며) 찾았어! 몰라, 뭔 소각장. 드디어 출장 끝! 집에 간다!


마람이 하준에게 다가간다.


하준그 집 나한테 팔 수 있을까? 다 봤잖아, 유영이랑 살 집이 없어. 갑자기 전셋값이 오르는 통에 도저히 다른 집을. 재개발이래. 3명 중에 2명이 찬성하면 나가래. 그게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래. 도저히 모르겠어. 월세로 돈을 계속 쓸 수도 없고. 난 분명 시키는 대로 다 했어. 평생을 시키는 대로 살았는데. 도대체 왜. 하나도 모르겠어.


마람집 살 돈은 있어요?


14.
고시원이 다시 멀쩡하다. 개집도 멀쩡하다. 경축 재개발 확정 플래카드도 멀쩡하다. 하준이 있다.


하준여전히 살 수 있는 집이 없습니다. 살 수 있는 집. 살 수 있는 집. 그게 가능한 말이기나 할까요? 어떤 의미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보려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유영과 마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없었을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하게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방법이 없습니다.


춘식이 카메라를 들고 등장. 하준의 따귀를 때린다. 카메라로 찍는다.


춘식차렷!


춘식의 구령에 맞춰 움직이는 하준.


춘식열중쉬어! 차렷! 열중쉬어! 차렷! 얼굴 좋다. 개 짖는 소리 준비!


하준악!


춘식발사!


하준컹! 컹! 컹!


암전.











이민구
작가소개 / 이민구

희곡을 씁니다. 더 재밌는 얘기를 잘 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좋은 연극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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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붉은 여인의 초상

붉은 여인의 초상 황수아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현 국내 유명 화가 미현 현의 애인 여인 정체불명의 여인 선예 현의 아내 상인 미술 학원 원장, 화가 현서 강력계 경찰 상우 패션잡지 에디터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 부장 신문사 문화부 부장 1장 미술관 무대 정면에 커다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색이 선명하고 사실적인 풍경화다. 시골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뒷산과 그 앞을 흐르는 개울 한 가족이 피크닉을 즐기고 애완견이 그들과 함께한다. 동화책 삽화로 나올 것 같은 따스한 그림이다. 현, 두 손을 뒤로 맞잡고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대호, 현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대호 안녕하세요. 작가님. 현 (뒤돌아 대호를 본다.)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이대호입니다. 현 네. 안녕하세요. 대호 전시회 잘 봤습니다. 현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대호 다음 일정이 없으십니까? 현 아내가 오기로 해서요. 대호 아. 그러시군요. 사이 현 (대호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기억나는군요. 아까 기자 간담회 때 저의 근황에 대해 질문하셨던 분이시군요. 대호 네. 그렇습니다. 계속 질문을 드리면 실례일 것 같아 멈췄습니다. 현 제법 곤란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는다.) 대호 더 질문드리면 사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것 같아서요. 현 그림의 연장선상인데 뭐 어떱니까.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대호 그러시다면… 한 가지만 더 질문드려도 될까요.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현 한국신문에서 제 특집 기사를요? 대호 네. 현 고마운 일이죠. 질문하시면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대호 최근 풍경화를 주로 그리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현 근 일 년간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모르던 자연의 풍경에 매료되었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들을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 개발은 너무 빠른 속도죠. 언제 개발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들이니까요. 대호 그런데 원래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작업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의, 아니 백 프로 인물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 발표되지 않은 풍경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대 시절엔 풍경화 동아리도 했었죠. 언젠가 한 일 년 정도는 풍경화 위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안식년을 가지며 여행을 한 게 새로운 발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호 아. 현 또 물으실 게 있나요? 대호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인물화에 흐르던 그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졌습니다. 현 특유의 분위기라뇨? 대호 선생님이 항상 그리던 여인은 눈빛과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비대칭이라 독특했죠. 초기작부터 중기,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 도발적인 느낌은 점점 강해졌습니다만 풍경화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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