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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지법과 비행술

  • 작성일 2022-09-16
  • 조회수 1,540

축지법과 비행술


이미경






등장인물


고진옹(49세 남) - 고공농성 노동자
허수인(49세 남) - 고공농성 노동자
이윤미(43세 여) - 고진옹 아내
도근행(42세 남) – 노조원 동료
안상태(49세 남) – 국회의원
한우근(48세 남) – 미래자동차 사장
서지만(55세 남) – 미래자동차 팀장
홍성호(51세 남) – 고공농성 함께했던 동료

*아래 사람들은 일인 다역 가능
경찰들 / 노조 동료들 (여직원 / 남직원)
국회의원 보좌관 / 기자


무대


굴뚝 위 농성 현장
: ‘노사합의 이행하라!’ ‘노동 악법 철폐하라’ ‘한우근 대표 약속을 지켜라!’ ‘굴뚝 고공농성 ― 372일차‘ 현수막이 굴뚝 밖을 둘러싸 걸려 있고, 굴뚝을 둘러 이들 삶의 공간 위로 천막이 쳐져 있다. 천막 안엔 초라한 세간.


사무실
미래자동차 사장 한우근 사무실 / 국회의원 안상태 사무실 / 고진옹 사무실
: 간단한 탁자와 의자, 특정 장소를 나타낼 수 있는 패널을 활용하여 장소 구현.


구치소


미래자동차 정문 앞 추모 공간




1장


75m 높이의 굴뚝 위, 고진옹과 허수인


조명 들어오면
초라한 상 위에 소주 한 잔과 향이 꽂힌 쌀그릇이 놓여있다.
허수인, 상 앞에서 두 번 절을 한다.


고진옹은 왼손으로 빨간색 조끼 목덜미를 잡고 오른손으로 조끼의 끝자락을 잡은 후, 북쪽을 향해 조끼를 흔들면서 소리친다. 초혼1)을 부른다.


고진옹미래자동차 홍성호, 복! 복! 복!


빨간색 조끼에 붙어 있는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폐, 노동 3권 쟁취’라는 표어가 흐느끼듯 나부낀다.


오른쪽에 귀신이 된 홍성호가 밝게 웃으면 예전 모습 그대로 굴뚝 위로 돌아온다.
홍성호, 고진옹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빼앗으려 하자, 고진옹 안 뺏기려 한다.


고진옹내 건데.


홍성호난 죽었잖아.


고진옹, 핸드폰 쥔 손에 힘이 풀린다.
홍성호, 핸드폰을 가져가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로보트 태권V> 노래를 튼다.
옛 만화영화 <로버트 태권V> 주제가, 바로 그 노래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홍성호, 노래에 맞춰 축지법 쓰듯 잰걸음으로 굴뚝 위를 돌아다닌다.


홍성호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온 이상, 뭐라도 해내야지. 그러려면 열정적으로다가, 열정적으로다가 움직여야 해. 절대 지치면 안 돼. 이곳에서 축지법과 비행술 수련한다 생각해.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잰걸음으로 돌아다니며) 75m 상공 위에서 비행하는 거지.


고진옹과 허수인, 홍성호의 모습을 그리워하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진옹(울컥하며) 형님.


홍성호뭐 하는 거야?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날아다녀. 비행술을 익히라고.


홍성호가 고진옹을 잡아끌면, 고진옹과 허수인 마지못한 듯 일어나 움직인다.
홍성호는 나름 제법 빠르지만, 그를 따라 하는 고진옹과 허수인은 다소 우스꽝스럽다.


1)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윗옷을 갖고 지붕에 올라서거나 마당에 서서, 왼손으로는 옷깃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 부분을 잡은 뒤 북쪽을 향하여 ‘아무 동네 아무개 복(復)’이라고 세 번 부른다.



홍성호더 빨리 움직여. 더 빨리 날으라니까. (발에 맞춰 리듬을 타며 노래를 부른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고진옹과 허수인, 탑돌이 하듯 코믹하게 굴뚝 안을 돈다.


홍성호이 손바닥만한 굴뚝은 세상을 축소했다 생각해. 비행술로 덴마크 가서 치즈 사 오고, 미국 가서 햄버거 사 오고. 축지법으로 한국에 돌아와 식사한다. 오늘 10시에 올라오는 식사는 햄버거일 거야. 덴마크산 치즈 끼운 미국 햄버거. (손바닥을 비비며 소년처럼 웃는다) 기다려지네.


고진옹과 허수인, 걸음이 느려진다.


고진옹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허수인고생만 하고.


홍성호뭐 해? 달려. 달리라고. 달려. 가만있으면 못 버텨. 몸이 굳어.


노래 커진다.
고진옹, 홍성호를 따라 열심히 달리다가 주저앉으면.


홍성호축지법과 비행술! 우린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세상 위를 나는 거야.


고진옹축지법과 비행술? (헛웃음 흘리고) 얼마나 답답했으면.


홍성호이제 노동운동도 시대에 맞춰 트랜디하게 해야지. 우중충하게 기타 치고 <아침이슬> 부르고. 에이, 구려! 감각적으로다가 감각적으로다가 해야지. 김 박사가 그랬지. 로보트 태권브이 완성되는 날, 지구의 평화가 완성될 수 있다! 하하하! 우리가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싸워야 우리의 평화가 완성될 수 있다! 우하하하하! 우하하하하!


홍성호, 양팔을 벌리고 비행기처럼 날며 노래한다.


홍성호‘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홍성호, 악당을 물리치러 떠나는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비행술에 능통한 것처럼 날아간다, 사라진다.


고진옹과 허수인, 노래를 이어 부른다.
부르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신나는 음악인데, 구슬프다.


고진옹, 허수인‘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허수인형님이 하도 틀어놔서 입에 붙었네.


고진옹양팔을 벌리고 비행기처럼 날아다니던 모습이 선한데.


허수인정말 비행기처럼 날아갔네.


고진옹철없어 보였지만 순수하고 자유로운 사람이었어.


허수인용감한 사람이었고.


둘은 먼 곳을 응시한다.


허수인우린 해고를 철회할 때까지 절대 내려가면 안 돼.


사이.


고진옹결국 성호형처럼 끝나려고?


허수인이 고진옹 쳐다보면.


고진옹형님은 알고 있었을 거야. 곧 죽을걸. 그래서 저 애들 노래를 계속 부른 거야. 두려우니까. 두려운데 극복이 안 되니까. 정의로 뭉친 주먹이다,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멋지다 신난다 하면서.


허수인고진옹!


고진옹가끔은 성호형이 저 노래 부르면서 울컥하는 거 몰랐지?


허수인형님, 아팠잖아. 고혈압도 있었고, 허리디스크도 있었잖아.


고진옹그렇다고 굴뚝에서 내려간 지 일주일 만에 죽어? 고혈압으로 디스크로 사람이 죽어?


허수인, 고진옹의 멱살을 잡고 한 대 치려다 만다.


허수인그만해! 약해빠진 새끼!


허수인이 멱살 잡은 손을 풀며 고진옹을 냅다 뒤로 던진다.


고진옹성호형, 이 좁은 굴뚝에서 병 걸린 거야. 비행기병, 우울병, 불신병, 사람병, 세상병.


착잡해진 허수인, 마른세수한다.


고진옹그만할래.


허수인 멈칫.


고진옹이제 그만 내려가자.


허수인성호형이 죽었어!


고진옹처음엔 기자들이 구경이라도 했잖아. (아이패드를 가져다 화면을 넘기며 보여준다) 이젠 신문에도 뉴스에도 어디에도 우리 얘길 찾아볼 수 없어. 우린 투명 인간이 된 거야. 노조에서도 교섭이다 협상이다 운 뗀 지 한참인데, 조용하잖아.


허수인성호형 추모제 하면서 다시 상기되겠지.


고진옹상기시키려고 몇 명이 죽어야 하는데? 벌써 19명인데, 관심받으려고 계속 죽어 나가야 해?


허수인넌 도대체 그런 정신으로 왜 올라온 거야?


고진옹불면증으로 하루 세 시간도 못 자. 눈 붙이면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굴뚝에서 떨어지는 악몽을 꿔.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도 쫓겨나는 꿈을 꾼다고.


허수인오늘 약 먹었어?


고진옹신경안정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난 요즘 솔직히 서운하다 못해 억울해. 아래에선 이 고통을 알기나 알까? 센 바람에 굴뚝이 휘청하면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데. 조금만 더 버티라고 쉽게 말하잖아. 날 걱정하기보다 이용하는 데 급급한 것 같아.


허수인말도 안 돼! 오해야.


고진옹오해? 도대체 아래에선 뭘 하는데? 도대체 왜 협상을 못 하고 1년을 넘기는데? 왜 성호형이 죽어 나가도록 놔뒀는데.


허수인사쪽이 어떤 사람들인지 까먹은 건 아니지? 과로에 사망하고, 추락해 사망하고, 폭발해서 사망해도 산재를 안 해주는 사람들이야. 회사에 인생 바쳐도 필요 없으면 먼지 털 듯 털어버리는 사람들이라고. 그런 사람들이랑 협상하는 게 쉬울 리 없잖아.


고진옹내 말이 그 말이야. 회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여기 있어 봤자 희망 고문만 당하는 거야.


허수인약한 소리 집어치워!


고진옹난 사실 며칠 전부터 내려가고 싶었어.


허수인성호형을 위해서라도 접으면 안 돼!


고진옹, 반응이 없고.


허수인미안하다. 내가 또 욱해서.


고진옹지상에서 75m야. 여기 유기견이 있어도 이렇게 무관심하진 않을 거야. 차라리 유기견이었다면, 떨어질까 얼어 죽을까 걱정할 거라고.


허수인너 불쌍하다는 소리 듣고 싶어? 동정받고 싶어 징징대는 거야?


고진옹이제 아무도 못 믿겠어.


허수인, 고진옹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흔든다.


허수인정신 차려! 너 지금 성호형 죽어서 힘든 거야.


고진옹, 허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고진옹성호형 이혼한 거 알았어? 성호형 고시원에서 죽은 거 들었어? 뭘 위한 건데? 우리가 이러는 게 뭘 위한 거야? 가족이랑 헤어지고 고시원에서 죽기 위해 고공농성을 1년 넘게 하는 건 아니잖아. 난 다 같이 복직하려고 올라왔는데. 난 가족들이랑 잘살아 보려고 올라왔는데, 여기 갇혀버렸어.


허수인조금만 힘내. 다 왔어.


고진옹지부에서 생계비 대주는 것도 말이 많대. 애도 고3인데 학원 하나 못 다니고. 윤미는 생활비 대느라 온종일 뛰어다니고.


허수인다 어렵지. 해고된 사람 중에 너만한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어?


고진옹도대체 왜 그렇게 잘난 척해?


허수인…….


고진옹날 제일 힘들게 하는 건, 바로 너야!


허수인우리 이러지 말자.


고진옹안 힘든 척, 안 흔들리는 척하는 거, 재수 없어.


허수인여기 올 때, 그만한 각오 안 했어? 힘들 거, 몰랐어? 왜 툭하면 징징대는데. 지금 내려가면 뾰족한 수가 있어? 오히려 더 불리해져. 무슨 일이 있어도 합의를 끌어내야 해. 그때까진 못 내려가!


고진옹왜 이렇게 늘 차가운데?


고진옹, 뒤로 천천히 걸어간다.


고진옹왜 위로를 못 해주는데?


고진옹, 울컥하며 몸을 돌려 굴뚝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본다.
고진옹, 휘청하는데, 이때, 핸드폰이 울린다.
고진옹, 전화를 받지 않고 양손으로 굴뚝을 잡고 다리를 들어 굴뚝 위에 올라서려고 한다.
이상함을 감지한 허수인, 달려가 고진옹을 뒤에서 안는다.
허수인, 고진옹을 냅다 굴뚝 안으로 던진다.


허수인차라리 누워서 자!


고진옹왜, 왜 날지도 못하게 하는데? 그렇게 오래 비행술을 배웠는데, 왜?


계속 울리는 핸드폰.


허수인받아. 근행이가 식사 바구니 올릴 모양이다.


고진옹, 두 무릎을 잡고 웅크리고 있다.


허수인힘든 내색하지 마. 우리가 흔들리면 그대로 무너지는 거야. 우린 억지로라도 씩씩해 보여야 해.


핸드폰 벨 소리, 멈춘다.
허수인, 밧줄을 고진옹 손에 쥐여주며.


허수인당겨! 이렇게 식사를 챙겨주는 게, 우릴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야.


허수인은 고진옹이 흔들던 홍성호 조끼를 천막에 건다.
조끼가 깃발처럼 나부낀다.


허수인형, 성호형. 진옹이 좀 지켜줘. 조금만 더 견딜 수 있게.


고진옹, 줄을 잡아당겨 식사 바구니를 올린다.
고진옹, 굴뚝 아래에 있는 도근행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이때, 다시 고진옹 핸드폰이 울린다.
고진옹, 전화를 받지 않는다.
허수인,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고 고진옹 손에 들려준다.


고진옹바구니 잘 받았어. (사이) 마지막 식사? 뭐? 정말이야? (사이) 알았어. 수고했다.


고진옹, 전화를 끊고 허수인을 바라본다.
허수인에게 다가가 강하게 끌어안는다.


허수인왜 그래? 무슨 일이야?


고진옹, 느닷없이 함성을 지른다.


고진옹복직시켜주는 데 합의한대.


허수인, 고진옹을 쳐다보면.


고진옹정리하고 내려와서 해단식 하는 게 어떠냐고.


허수인근행이가 그래?


고진옹이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다시 뜨겁게 끌어안다가 제자리에서 뛰다가 소리를 지른다.
둘은 천막에 걸려 있는 조끼를 본다.


허수인수고했어, 미시타 옹! 오늘 네가 버틴 결과야.


고진옹고맙다.


고진옹, 홍성호 조끼를 가져다 입고 가슴을 두드리며.


고진옹형! 성호형! 우리가 해냈어!


고진옹과 허수인은 마음이 통했는지 홍성호가 했던 행동처럼 주먹을 앞으로 뻗고, 축지법 하듯 잰걸음으로 날 듯이 왔다 갔다 하며 노래한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를 위해 키운 로보트 태권 / 이 세상에 당할 자 있을까 보냐~~‘
암전.


어둠 속에서 <로보트 태권V> 노랫소리 크게 들린다.
‘평화의 사도 사명을 띠고 /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2장


굴뚝 아래, 땅 위.


땅에 내려온 고진옹과 허수인.
고진옹은 홍성호의 조끼를 입고 있다.
둘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들고 있다.
함께 해고당했던 동지들이 서 있다.
그들은 고진옹과 허수인에게 열렬한 호응과 박수갈채를 보낸다.
고진옹과 도근행이 뜨겁게 포옹한다.


고진옹근행아, 고맙다.


고진옹, 아내 이윤미 손을 잡고.


고진옹당신도 고생 많았어.


이윤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허수인, 마이크를 잡고.


허수인1년이 넘는 하늘살이를 마치고 동지들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격려의 박수 소리.


허수인굴뚝은 헐벗은 공간이었습니다. 태풍이 보금자리를 날리고, 혹한은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습니다. 아찔했습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죽어도 좋다, 죽더라도 이 투쟁은 완수시키겠다는 마음으로 버텼습니다. 해고노동자의 고통을 이 세상에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노동자를 무시하는 세상은 적어도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수 소리.


허수인372일 동안 함께해준, 연대와 노조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통의 시간들은 우리를 더 견고하게 만들려는 신의 은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홍성호 형님의 희생이 합의에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모든 해고노동자는 복직하는 것에 합의하기로 했습니다.


열렬한 박수 소리.
도근행이 꽃기린 화분을 고진옹 앞에 내민다.


도근행꽃기린이에요. 성호 형님이 고시원에서 키우던 놈이에요.


이윤미한겨울에도 예쁘게 꽃이 피었네.


도근행예수님의 가시면류관처럼 가시가 있어서,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래요. 1년 내내 꽃을 피우는 기특한 놈이죠.


고진옹, 화분을 받아들고 잠시 쳐다본다.


고진옹성호형이랑 똑같은 놈일세.


도근행성호형도 같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순간, 느닷없이 경찰들이 들이닥친다.
경찰들, 마구잡이로 고진옹과 허수인을 연행해 가려 한다.
고진옹과 허수인, 강하게 저항하고.


고진옹근행아.


경찰체포영장입니다.


도근행뭐 하는 짓이에요? 사쪽에 연락을 취하세요. 분명히 합의하기로 해서 내려왔어요.


경찰명예훼손, 업무방해, 공무집행방해로 체포합니다.


허수인(강하게 저항하며) 합의하기로 해서 내려왔다잖아요.


경찰대표님이 고소하셨습니다.


고진옹과 허수인, 순간 눈이 마주치고 동시에 도근행을 쳐다본다.


도근행말도 안 돼.


허수인, 경찰들과 몸싸움 벌인다.
허수인의 날렵한 몸놀림에 경찰들 떨어져 나간다.
경찰들 더 많이 허수인에게 들러붙는다.
고진옹은 경찰에 팔이 잡혀 있고.
노조원들과 도근행, 이윤미가 경찰들을 막는다.


이윤미무슨 잘못을 했는데요?


대답 없이 경찰은 고진옹과 허수인을 강제 연행하는 데 집중하고.
저지하는 노조원들과 경찰과의 몸싸움 일어난다.
도근행도 합세하며 저지한다.


도근행제가 팀장님으로부터 똑똑히 들었다고요. 사장님이 합의한다고 전달하랬다고요. 협상테이블로 데려오라고.


경찰들은 저항하는 고진옹과 허수인을 강제로 낚아챈다.


허수인이게 뭐 하는 건데?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경찰들, 저항하는 고진옹과 허수인 팔, 다리를 잡아들고 경찰차에 태우러 끌고 가다시피 데려간다.


허수인너희들이 민중의 지팡이냐? 민중의 곰팡이지. 놔, 놓으라고. 이 나쁜 놈들아!


고진옹이 들고 있던 꽃기린 화분을 놓쳐 뒹군다.
고진옹, 화분을 주우려 하나, 경찰에 막혀 줍지 못한 채, 끌려간다.
도근행이 달려가 화분을 줍는다.


도근행(화분을 꼭 안고 울분에 차) 성호형.


이윤미가 필사적으로 고진옹에게 달려가자 경찰들이 가로막는다.
고진옹과 허수인은 경찰차에 태워져 보이지 않는다.
이윤미, 벽처럼 막아서는 경찰 가슴에 머리를 찧으며 울부짖는다.


이윤미비켜요. 비켜. 제가 부인이에요.


흔들림 없는 경찰들 모습.


이윤미오늘은 안 돼요. 우리 미시타 옹, 372일 만에 만났어요. 따뜻한 밥 한 끼 먹여야 되잖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남편이랑 같이 있게 해줘요. 당신들도 부인이 있잖아요. 당신들도 가족이 있잖아요.


경찰들, 저지하는 사람들을 밀치고 떠난다.
이윤미, 주저앉고.


이윤미이게 무슨 일이래요? 1년 만에 내려온 남편, 얼굴도 못 보게 하고. 세상이 이래도 되는 거래요? 전쟁 난 것도 아닌데, 왜 가족을 갈라놓는대요. 도대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은 거래요?


나가떨어진 노조원들 망연자실하고.
도근행, 눈물범벅으로 선창한다.


도근행노동자도 사람이다!


노조원들노동자도 사람이다!


도근행합의를 이행해라!


노조원들합의를 이행해라!


도근행(노래를 시작한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노조원들, 울며불며 따라 부른다.


도근행, 노조원들‘정의를 위해 키운 로보트 태권 / 이 세상에 당할 자 있을까 보냐 / 평화의 사도 사명을 띠고 /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씩씩한 노래, 서글프다.
암전.



3장 – 일주일 후.


구치소 면회실.


면회 온 이윤미.
이윤미 앞에 고진옹 앉아 있다.


이윤미회사에서 손해배상 가압류 소송을 50억대로 하겠대. 노조에서 이걸 안 받아들이면 다른 어떤 합의도 없을 거라고 압박하나 봐. 앞으로 농성에 참여하거나 파업하면 개별적으로 손해배상 청구하겠다고 통보도 했대. 세상이 온통 미친 거 같아.


고진옹, 큰 한숨.


이윤미여보.


고진옹, 고개도 들지 않는다. 이윤미 잠시 망설이다가,


이윤미당신 앞으로 5천 5백만 원 손해배상소송 통보가 날아왔어.


고진옹, 대꾸가 없다.


이윤미사람들이 휘청거려. 회사에서 회유하는 움직임도 보이고. 노조에서 나가면 소송에서 빼주겠다느니, 사표 쓰면 빼주겠다느니. 이러다 노조가 와해될까 봐 걱정돼.


고진옹개새끼들!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어.


이윤미당신이 뭐라도 메시지를 내야 하지 않을까?


고진옹(비웃음) 누가 내 메시지를 들어주기라도 한대? 손해배상소송 철회하라고 몸에 기름 붓고 분신자살이라도 할까? 아님, 굴뚝으로 다시 올라가?


이윤미미시타 옹!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고진옹방법이 없어.


이윤미당신, 왜 이래? 왜 이렇게 뾰족해?


사이.


고진옹내가 굴뚝에 올라간 게 최후의 선택이었어. 그런데 그 죗값으로 교도소에 가게 됐고 수천만 원 물어내게 생겼는데, 뭘 더 해 보겠어?


이윤미미안해. 지금 많이 힘들고 예민할 텐데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봐. 그래도 당신이 지부장이니까 사정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고진옹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이윤미힘내! 나도 있고 준호도 있잖아.


고진옹당신도 준호도 볼 면목이 없어. 가장으로 해준 것도 없고, 고생만 시켰어. 준호 고3인데 남들처럼 뒷바라지도 못 해주고. 좋은 부모 만났으면 좋았을걸.


이윤미괜찮아. 내가 벌잖아.


고진옹손해배상청구액이 5천만 원 넘게 나왔다며. 씨발놈들!


이윤미미시타 옹 이상하다. 씩씩하고 용감하던 로보트 태권브이 어디 갔어? 찌그러져서 깡통 로보트가 된 거야?


고진옹농 칠 기분 아니야.


이윤미준호, 대학 안 간대.


고진옹, 이윤미를 똑바로 쳐다본다. 침통하다.


이윤미일단 취직하고. 나중에 여유 되면 간대. 우리 준호, 철이 빨리 들었어.


고진옹왜들 그래? 정말 왜들 그래?


이윤미우리 걱정하지 말라고.


고진옹차라리 나한테 투정을 부려. 차라리 욕을 해. 다들 착한 척 이해하는 척하지 말고.


이윤미…….


고진옹그게 말이 돼? 요즘 세상에 돈 없어서 대학을 못 가는 게 말이 돼?


이윤미못 가는 게 아니야. 천천히 가는 거지.


고진옹당신 왜 아닌 척해? 법원에서 날아온 통지서에, 대출기관에서 날아온 독촉장에, 가압류한다는 소송까지. 감당 안 되지? 질식할 것 같지? 당신 지금 미쳐버릴 거 같잖아. 아니야?


이윤미그만해! 당신, 지금 힘들어. 힘들어서 자꾸 시니컬해져.


사이.


고진옹세상이 무서워. 내가 병신 같아서 더 무서워.


이윤미당신, 전에 내가 준 신경안정제라도 복용해. 나오는 대로 상담을 받는 게 좋을 거 같아.


이윤미, 고진옹 손등을 문질러주며.


이윤미당신 무너지면 안 돼.


이때, 들어오는 경찰.


경찰중요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급히 면회를 요청하셔서. (이윤미에게) 그만 가주셔야 합니다.


이윤미, 일어난다.


이윤미갈게.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자.


이윤미 가려다 돌아서서.


이윤미노조 사람들 다 떠나도 당신은 거기 있어.


고진옹…….


이윤미당신은 상징이잖아.


경찰이 이윤미와 함께 나간다.


고진옹(혼잣말) 왜 하필 난데? 왜 하필?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
허수인 들어온다.


허수인누가 왔는데 이렇게 시끄러워?


고진옹,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다.


고진옹차라리 다른 여자들처럼 비명을 질렀으면 좋겠어. 강한 척하는 게 날 더 숨 막히게 해.


허수인행복에 겨운 소리 한다.


고진옹날 이해하는 것 같지만 조금도 이해 못 하는 거 같아.


사이.


고진옹노조가 와해될 것 같대. 회사 압박도 심하고. 손배송이랑 가압류로 숨통을 조일 모양인가 봐. 사람들이 흔들린다고.


허수인,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친다.


허수인구심점이 없어서 잠깐 그런 거야.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하는데.


고진옹나가면 뭐가 달라지는데?


허수인달라지게 만들어야지. 자본주의 생태계가 얼마나 잔인한지, 회사가 얼마나 사람들을 개만도 못한 취급을 하는지 환기시켜줘야지.


고진옹소용없어.


허수인고진옹! 또 약해진다.


고진옹약해질 필요 없어. 우린 강한 적이 없었으니까. 땅에 내려왔으니 그들은 이제 아쉬운 것도 없겠지.


허수인또 올라가. 백번이고 천번이고 또 올라가.


고진옹아니, 그런 일 없을 거야. 지옥이었어.


노크 소리.
고진옹과 허수인, 문 쪽을 보면.
경찰들과 보좌관이 안상태 국회의원을 모시고 들어온다.
그들은 앞서 달려가 의자까지 빼주며 극진하다.
경찰, 일어나지 않는 고진옹과 허수인에게 눈치 준다.


경찰안상태 국회의원이십니다.


고진옹과 허수인, 느닷없이 나타난 안상태가 의아하여 쳐다본다.
안상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경찰일어나세요.


고진옹과 허수인, 어정쩡하게 일어나고.


안상태아니, 됐습니다. (보좌관에게) 자리 좀 비켜줬으면 좋겠는데.


보좌관의원님에게 시간을 좀 주십시오.


경찰충분히 쓰세요.


보좌관이 경찰에게 같이 나가자는 제스처를 취하고.


경찰(깍듯이 인사하며) 말씀 나누세요.


모두 나가고.


안상태앉지.


안상태, 담배 두 개비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안상태피워.


고진옹여기서?


허수인국회의원 면책특권 불체포특권에 흡연특권이 추가됐나 보네.


허수인이 담배 한 개비를 가져다 손으로 두 동강 내고 던져버린다.


안상태그래, 그래야지. 강성 노조 자존심은 그 정도 돼야지.


고진옹왜 왔어?


안상태이제 그만해.


허수인굴뚝에서 내려오니까 박수 치러 왔어?


안상태세상이 바뀌었어. 최루가스 뚫으면서 돌 던지던 시대가 아니에요.


고진옹알아. 그래도 네가 우리 사정 잘 아니까 도와줘야지.


안상태그럼, 그럼.


고진옹사측에서 손배송을 50억이나 했대. 노동자들한테 50억이 말이 돼? 그런 걸 왜 입법하지 않아?


안상태바로 그게 시대착오라니까. 옛날처럼 너도 못 살고 나도 못 살아서 ‘우리도 인간이다’ 하면 응원해주던 시대가 아니에요. 이제 국민들은 노조를 싫어해.


허수인뭐?


안상태노조를 싫어한다고. 아주 싫어해.


허수인너 국회의원 맞지? 노동운동 했다는 훈장으로 노동자와 약자 대변하겠다고 표 구걸하던 안상태 맞지?


안상태국민들 정서가 그래. 월급도 많고 상여금에 퇴직금도 탄탄한데 툭하면 파업하니까. 귀족노조라고 손가락질해요. 게다가 수천만 원 주고 차 샀는데 불량과 결함 많지, 근무 태만으로 노동시간에 스마트폰 한다는 소문 돌지, 기업 발목 잡아 주식도 떨어지게 하지.


고진옹상태야. 나 여기서 일한 지 30년 됐어. 30년 됐는데 나가래. 내 인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야. 그런데 가만히 있어?


안상태그래, 그 맘 알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 해. 30년 일했으면 됐다고 생각하지. 공무원도 아니고. 고용주 마음이지.


허수인,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나 거칠게 의자를 밀어내고.


허수인우린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로 고생하는데, 배에 기름 두르고 훈장질하려고 나타났냐?


안상태, 개의치 않고 차분하게 자기 말을 이어간다.


안상태사람들 지지를 받으려면 경영진 입장도 생각해 봐. 경영진은 노동자들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아요. 바이어들과 가격협상 해야지, 환율 따져야지, 이산화탄소 배출 절감도 모색해야지, 공장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도 생각해야지. 게다가 파업으로 영업 손실이 엄청나면 그건 또 어떻게 메꾸겠어. 머리가 터질 일이지.


허수인, 안상태에게 다가가 윽박지르듯.


허수인너 한우근이랑 대학 선후배라더니, 앞장서서 빗질해주겠다고 약속했냐? 그래서 우리 설득하려고 온 거야?


안상태, 참 뻔뻔하고 얄밉게 자기 의견만 피력한다.


안상태잘 생각해. 미래자동차 재정적으로 힘들다. 부도나면 모두 끝이야. 지역경제며 협력업체 하청업체 연쇄 부도지. 좀 더 멀리 봐. 회사부터 살려야, 일자리가 유지되지. 공장에서 조립만 하니 전체가 안 보여 이러지.


허수인, 분노가 터져 나와 큰소리로 따진다.


허수인도대체 그렇게 되도록 회사는 뭘 했냐? 나라는 뭘 했고, 잘난 국회의원은 뭘 했어?


고진웅, 진정하라는 듯, 허수인 손등에 손을 올린다.


안상태세상이 급변하는데, 노조는 너무 그대로야. 고집스럽고 답답하고 맹목적이고.


안상태, 넥타이를 정리하고 양복을 매만지며 일어날 기미를 보인다.


안상태그래도 옛정 생각해서 들렀어. 변호사도 선임해줄게. 굴뚝에서 내려왔으니 이제 협상카드도 없잖아. 마음만 정하면 구치소에서 바로 나갈 수 있어. 복직도 될 거고. 노조만 접으면 돼. 한우근이 맘고생 좀 했나 봐. 특별히 나한테 부탁하더라.


안상태, 일어난다.


안상태결정은 빠를수록 좋아.


허수인미친놈!


안상태네 아들 준호 고3 아니냐? 우리 승진이랑 같은 나이잖아. 준호 대학도 보내야지. 아들, 신경 좀 써라.


안상태, 미소 짓고 인사하듯 오른손을 들어 보이고 나간다.


허수인권력이 좋긴 좋나 보네.


그대로 앉아 있는 고진웅.


고진옹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허수인저런 놈이 잘못된 거지. 노동 현장에 잠깐 걸친 걸 프로필 삼아 국회의원 해먹질 않나. 지가 회사와 노조 협상의 귀재처럼 거들먹거리질 않나.


허수인, 침울해 있는 고진웅을 쳐다보다가,


허수인놀아나지 마. 뒷배가 되어줄 돈줄 때문에 저러는 거야. 저놈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알잖아. 국민? 나라? 개가 웃을 일이지. 오로지 다음 선거밖에 없어.


고진옹내가 너무 작아. 이 작음이 견딜 수 없고, 수치스러워.


허수인쓸데없는 생각 한다.


고진옹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사장이 되었는데, 난 고작 같은 자리에 앉아 부속품만 끼워대고. 그것도 그만하라고 쫓겨나고. 그런데도 기어이 다시 들어가겠다고 매달리고.


허수인비교하지 마. 넌 충분히 열심히 살았어.


고진옹멍청하게 열심히만 살아서 이렇게 쉬운 인생이 된 거 같아.


허수인왜 네 가치를 밟아?


고진옹착하다, 성실하다, 정직하다, 그런 게 미덕인 줄 알고, 그렇게 살면 잘 사는 건 줄 알고. 병신같이.


허수인병신 아니야. 잘 살았어. 착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고진옹그렇게 말하지 마, 제발! 그렇게 날 세뇌시키지 말라고. 더는 당하고 싶지 않아.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허수인약속을 안 지킨 건 그들인데, 왜 네가 자책을 해?


고진옹우린 그들을 이길 수 없어. 우린 늘 불리했어.


허수인결국 이길 거야. 결국 다 정규직 되고 다 복직되고 다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고진옹그런 날은 오지 않아. 모두 알고 있지만 서로 속이고 있을 뿐이야.


허수인흔들리지 마.


고진옹너도 날 속이고 있잖아!


허수인그만해!


고진옹그래, 그만할 거야.


사이.


허수인(의미를 알고) 미쳤어!


고진옹그래, 그동안 내가 미쳤어. 미쳐서 날뛰었어. 미쳐서 저 꼭대기에 날 가둬놓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일하게 해주세요, 제발 일하게 해주세요, 등신처럼 썩은 동아줄을 붙잡고. 내가 그랬어. 내가 미쳐서 그랬어


허수인진옹아, 이러지 마. 네가 이러면 안 되잖아. (울컥한다) 우리가 상징이 되기로 했잖아.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횃불이 되자고 했잖아. 성호형이랑 같이 맹세했잖아.


고진옹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아. 그저 미끄러질 뿐이야. 그저 늙고 병들고 성호형처럼 사라질 뿐이라고. 이제 우리도 현실적이 되어야 해.


허수인노조를 접겠다는 거야? 아니지?


고진옹, 대답 없고.


허수인372일이야. 37일이 아니라 372일이라고. 1년 넘도록 굴뚝에서 버텼는데. 이제 와 접겠다는 거야?


고진옹, 침묵.
허수인, 고진옹 멱살을 잡고 흔든다.


허수인제발 정신 좀 차려.


고진옹, 허수인을 거칠게 뿌리치고.


고진옹이제 그만 괴롭혀. 의로운 척, 대담한 척, 꿋꿋한 척, 그만 좀 해! 나한테 강요하지 마. 난 안 하고 싶어.


허수인진옹아.


고진옹준호도 고3이야. 내가 뭐라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아버지가 되어서 그놈 미래를 가로막진 말아야지.


허수인핑계 찾지 마.


고진옹핑계라도 좋아. 준호는 적어도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진 않아.


고진옹, 홍성호 조끼를 벗는다.
홍성호 조끼가 바닥에 떨어진다.
암전.



4장


한우근 사장실


팀장 서지만과 사장 한우근 앉아 있고, 반대편에 고진옹 앉아 있다.
고진옹, 사인한다.
서지만은 사인한 서류를 정리한다.


서지만사장님, 1년 넘게 굴뚝에서 농성하던 고진옹 씨입니다.


한우근사인했지?


서지만, 한우근에게 계약서를 보여준다.
한우근, 고진옹에게 손을 내밀고, 둘은 악수한다.


한우근잘해 봅시다. 안상태 국회의원이랑 오래된 사이라고?


고진옹…….


한우근그만한 백이 있는데, 참 힘들게 사시네.


서지만약속한 대로 정규직으로 다시 복직됐습니다.


고진옹감사합니다.


한우근노조 활동은 확실히 끊은 겁니다.


서지만계약서 내용에 정확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한우근통닭도 다 로봇이 튀기는 시대에 무슨 구닥다리 노조야, 노조는. 자동차도 로봇이 만드는 세상이 안 올 거 같아? 사람들 일자리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든 세상이 오는데, 주제 파악들이 안 돼.


서지만그렇습니다.


한우근이제 계약서에 합의한 사람은 얼마나 되나?


서지만많습니다. 지금이 복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죠. 회사 이미지에 먹칠한 것도 봐줬는데.


한우근안상태 의원 말로는 고진옹 씨가 실추한 회사 이미지 회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던데. 노력 좀 해줘요. 아무래도 영향력이 있을 테니.


서지만걱정 마십시오. 언론사 인터뷰도 다 잡아놓았습니다.


고진옹이 서지만을 쳐다보자,


서지만고진옹 씬 운이 좋아. 사장님이 특별히 인사팀 팀장을 부탁하셨어.


고진옹, 말이 없자,


서지만별로 달갑지 않나?


고진옹감사합니다.


한우근노조 한다고 어울렸으니, 그 누구보다 사람들을 잘 알겠지.


서지만그럼요.


한우근우리 회사는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해. 외국기관들 투자 조건이 20% 구조조정이야. 생산 공정에 문제가 생겨 리콜도 많고, 툭하면 파업해서 영업 손실에 신제품 출시도 늦어졌고. 재정상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서지만답답한 일입니다. 이렇게 희망퇴직 받는 회사가 요즘 어딨어요. 그냥 정리해고시키지.


고진옹, 몸이 굳는다.


한우근회사 운영에 문제가 없으면 왜 정규직 전환을 안 시키고, 왜 복직을 안 시키겠어. 나도 책임자로 힘든 일이야. 그동안 일자리 주고 월급 줬는데도 죄다 날 나쁜 놈이라고만 하니.


서지만밑에서 일만 하고 위에서 운영은 안 해 봐서 그렇죠.


한우근세상 흐름을 봐야 하는데. 로봇 프로세스에 인공지능이 오는 시대인데, 노동자들 인권 문제 따위로 발목을 잡으니. 그 잘나가던 코닥이 왜 망했어? 디지털 세상이 판치는데 필름에 안주하다 그대로 사라졌잖아. 보증 서주거나 빌려준 돈 떼이는 건 그래도 나아. 손실이 작으니까. 시대를 못 따라가면 사라져요. 모두 쓸어간다고. 에휴, 이런 현실을 알아야 말이 통하지. 협상이니 뭐니 하자고 앉으면 그저 속 좁게 자신들 이득만 따지고.


고진옹, 앉아 있기 괴롭다.


한우근그래서 그동안 협상이 안 된 거예요. 고진옹 씨.


서지만그래도 늦게나마 합의서에 사인했으니, 느끼는 게 있겠죠.


한우근이 일어나자 서지만도 따라 일어난다.


한우근이번 업무부터 잘해주세요. 원래 강성 노조들이 성실하지. 안 그런가, 서 팀장?


서지만그럼요.


한우근아, 미안해요. 이제 노조는 아니지. 아무튼 집념을 왜 쓸데없는 데 써. 일하는 데 써야지.


한우근이 나간다.
서지만, 깍듯이 인사하고, 고진옹도 일어나 따라 인사한다.


서지만인수인계 받고 바로 근무 들어가면 돼. 한 번 더 주는 기회니까 실망시키지 말고.


고진옹, 고개 숙인 채, 멈춰 서 있다.
서지만, 고진옹 어깨를 툭툭 치고 나가려 한다.


고진옹팀장님.


서지만, 멈춰 선다.


고진옹계약서에 사인한 사람이 정말 많나요?


서지만사인하든 안 하든 그게 뭐가 중요해. 자네가 할 일은 20% 맞춰 감축만 하면 돼.


고진옹전 그냥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은데요.


서지만,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고 고진옹에게 다가간다.


서지만(단단한 목소리) 고진옹! 당신 덕분에 1년 넘게 회사가 악덕 기업처럼 욕을 먹었어. 사장님이 뭐가 고맙다고 당신을 고용하겠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진옹,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아찔하다.


서지만이젠 보답을 해야지.


서지만, 나간다.
정적, 무겁다.
고진옹, 그대로 주저앉는다. 착잡하다.
잠시 후, 허수인 들어온다.
허수인, 들어오자마자 고진옹에게 달려든다.


허수인사실이야?


고진옹, 대답이 없다.


허수인사실이냐고?


고진옹그래.


허수인고작 이러려고, 고작 이러려고…….


고진옹…….


허수인너 잊었어? 성호형이랑 저 지옥 같은 굴뚝에서 했던 말. 전기도 끊기고 물도 얼어서 내일 눈뜰 수 있을까 두려울 때. 여기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무서울 때. 네가 그랬잖아. 포기하지 말자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고.


고진옹그래! 그래! 그랬어! 그땐 그랬어. 그러면 뭔가 될 줄 알았어. 사람이 바뀌고 회사가 바뀌고 세상이 바뀔 줄 알았어. 적어도 그 어두운 터널만 뚫고 나오면 합의도 되고 모두 정규직도 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았어.


허수인순진한 척하지 마.


고진옹그땐 순진했어. 적어도 그땐.


허수인다시 돌아와. 당장은 힘들어도 꼭 좋은 때가 올 거야.


고진옹훗. 사장이 그러더라. 개인한테 당하면 몇 푼 잃지만, 시대에 뒤처지면 전부를 잃는대. 내가 세상을 못 읽었던 것 같아. 인권이 중요한 시대가 아닌데. 뒷방 늙은이처럼 돈 버는 데 혈안이 된 세상에 대고, 다 같이 잘 살자고, 다 같이 일하게 해달라고. 우습다. 그치? (씁쓸한 웃음)


허수인그래서 너 혼자 잘 살아 보려고?


고진옹성호형 죽고 자식들한테 빚만 남겼어. 우리 준호, 그놈 공부 잘하는 게 윤미 유일한 낙인데 대학도 안 간대. 그렇게는 안 하고 싶다. 잘 살진 못해도 얼마 안 남은 인생, 뭔가 가족한테 도움 되다 가고 싶다.


허수인뭐가 그렇게 조급해? 너 정신과 상담 좀 받아. 오랫동안 굴뚝에 있어서 지금 갈피를 못 잡는 거야.


고진옹난 너랑 달라. 너처럼 계산 없는 사람이 아니야.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해. 내가 굴뚝에 올라간 것도 내가 의롭다는 걸 보여주려 했는지도 몰라. 고작 공장에서 일하지만, 적어도 난 정직하다, 난 의로운 인간이다, 그걸로라도 생색내고 싶었나 봐. 내세울 게 그것밖에 없어서.


허수인자학하지 마. 굴뚝에서 긴 시간 동안 견딘 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야.


고진옹무슨 의미? 헛된 희망이었지. 바닥까지 가 보니 알았어. 그 밑에 더 캄캄한 심연이 있다는 거. 헛디디면 그대로 끝이라는 거. 이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갈 거야. 돈도 벌고 권력도 생겨야 뭐라도 바꿀 수 있어.


허수인, 단념한 느낌.


고진옹굴뚝에서 소리쳐 봤자 밥 달라고 징징대는 애 취급밖에 못 받아.


허수인무슨 말을 해도 다 변명이야.


고진옹변명이라 해도 내 선택이야.


허수인난 너 이해 못 하겠다. 굴뚝에서의 고통이 널 변화시킨 건지, 네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고진옹이제야 철이 든 건지도 모르지.


허수인, 고진옹을 바라본다.
고진옹,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대로 일어나 나간다.
암전.



5장


고진옹 사무실


고진옹,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서류가 든 파일이 쌓여 있다.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와 고진옹 앞에 앉았다 나간다.
남직원 들어온다.


남직원지부장님.


고진옹이제 지부장 아니야.


남직원지부장님으로 돌아오십시오.


고진옹이 서류를 내민다.


고진옹여기에 사인해. 사직서 제출로 인정이 될 거야. 권고사직으로 퇴사 월까지 일한 급여, 퇴직금, 근속기간 동안의 연차수당을 다 받을 수 있어. 재취업 전까지 실업급여도 받고.


남직원(서류를 밀어내며) 맘대로 하십시오. 해고를 시키든, 말든.


고진옹내가 1년 넘게 굴뚝 위에서 깨달은 게 뭔 줄 알아?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이 방법은 틀렸다. 그들에게 더 이상 이용당하지 말고 우리도 그들을 이용해야 한다.


남직원고작 돈 몇 푼 받고 순순히 물러나주는 게 이용하는 겁니까?


고진옹돈 몇 푼 못 받고 쫓겨난 채 끝날 수 있어. 성호형처럼.


남직원 일어난다.


고진옹제발 퇴직금이라도 받고 재취업하는 방법을 찾아.


남직원친구랑 마누라는 그렇게 말할 수 있죠. 하지만 지부장님이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죠.


고진옹널 위해서야. 진심이야.


남직원저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제 딸이 이런 부당한 세상에서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고진옹, 할 말이 없다.


남직원저도 진심입니다.


고진옹과 남직원, 잠시 서로를 쳐다본다.
남직원, 고진옹의 따뜻한 눈빛을 피하고, 나간다.
고진옹, 쌓여 있는 파일을 바라본다. 착잡하다.


고진옹 사무실 조명 나가고 다른 장소에 있는 서지만에게 조명 들어온다.
서지만, 매우 화가 나 있다.


서지만고진옹 팀장. 사장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 도대체 며칠 동안 한 일이 뭐야? 여기가 무슨 상담소인 줄 알아? 회사에서 백번 양보해서 퇴직금까지 준다는데, 단 한 명 사인도 못 받았다는 게 말이 돼?


사이.


서지만이런 식으로 하면 회사에서도 방법이 없어. 합의고 뭐고 없다고. 퇴직금이고 뭐고 한 푼도 안주고 끊어내는 수밖에. 막말로 회사가 어려워져서 사람 줄이는 게 불법이야?


사이.


서지만회사 이미지 쇄신하려고 베푸는 것뿐이야. 하지만 인내심에 한계가 왔어. 마지막이야. 더 이상은 안 돼. 당신에게도 더 이상 기회를 줄 수 없어.


서지만 있는 곳 조명 나가고, 고진옹 사무실에 다시 조명 들어온다.
고진옹, 마른세수를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쉰다.
노크 소리 후, 여직원이 들어와 앉는다.


여직원고씨 아저씨.


고진옹은 시종일관 친근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진옹소식은 들었지?


여직원설마 저도 구조조정 대상인가요?


고진옹20% 감축으로 합의가 이루어져서 12,000명이 대상자야.


여직원합의한 적 없는데요.


고진옹(서류를 내밀며) 여기에 사인하면 사직서 제출로 인정이 될 거야. 퇴사 월까지 일한 급여, 퇴직금, 근속기간 동안의 연차수당을 다 받을 수 있어. 재취업 전까지 실업급여도 받고.


여직원거부하면요?


고진옹, 대답 없다.


여직원고씨 아저씨가 부당해고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고진옹그래서 이런 절차를 밟는 거야. 안 나가겠다고 버티다가 퇴직금 수당도 못 받고 쫓겨날까 봐.


여직원왜 저죠? 영혼을 비우고 열심히 일만 한 것도 해고 사유가 되는 건가요?


고진옹(서류를 보며) 1년 동안 조퇴 17번, 휴가를 5일 썼어. 외출도 잦았고.


여직원정말 그만두게 할 작정이군요.


고진옹미안하다. 이게 널 위한 최선이야.


사이.


여직원아이가 아파요. 돌 지난 애가 배밀이도 못 하고 청력 문제로 인공와우 수술을 두 번 했어요.


고진옹알아. 들었어. 퇴직금이 도움 될 거야.


여직원아픈 애 키우는데 앞으로도 계속 돈이 들 거예요.


고진옹…….


여직원고씨 아저씨, 저 혼자 애 키우는 거 아시잖아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고진옹퇴직금, 수당 다 챙기고 다른 일 찾는 게, 현재로서는 제일 좋은 선택이야. 괜히 복직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품고, 시간 낭비하지 마.


여직원다른 방법은 없나요?


고진옹(고개를 끄덕인다)


여직원아저씨도 다른 방법은 없었어요?


고진옹, 침묵.
고진옹, 사인할 부분을 여직원 앞에 내밀고, 펜을 둔다.
여직원, 망설인다.


고진옹지금 이 기회 놓치면 병원비 못 구해. 빚을 언제까지 질 거야? 명심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아이부터 챙겨.


여직원, 고진옹에게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데.


고진옹회사도 노조도 네 편이 아니야.


여직원아저씨가 그랬잖아요. 다 같이 일하는 날까지 뭉쳐야 한다고.


고진옹낭만적인 개소리였어.


여직원, 머뭇대다 결국 사인한다.
여직원, 나간다.
노크 소리.
바로 도근행 들어온다.


도근행형.


서류 정리하던 고진옹, 움찔하나 고개 들지 않는다.
도근행, 고진옹에게 바짝 다가가 앉는다.


고진옹구조조정 대상이야.


도근행미쳤어? 형, 왜 이래?


고진옹20% 감축으로 합의가 이루어져서 12,000명이 대상자야.


도근행그거 막자고 고공농성 했잖아.


고진옹사측이 널 찍었어. 나도 어쩔 수 없다.


고진옹, 잠시 망설인다.
고진옹, 사무적 태도로 서류와 펜을 내민다.


고진옹여기에 사인하면 권고사직으로 퇴사 월까지 일한 급여랑 퇴직금, 근속기간 동안 연차수당을 다 받을 수 있어.


도근행, 서류를 밀쳐버리고.


도근행3백여 일 동안 형 음식과 형 배설물을 날랐어.


고진옹알아. 이게 네가 살 길이야. 진심으로 널 위해서야.


도근행형 이러는 거, 형수님도 아셔?


고진옹…….


도근행새벽부터 형 음식 장만하고 하루 종일 형 더울까 추울까 조마조마하고 죽도록 고생만 한 형수님도 아시냐고?


고진옹네 생각만 해.


도근행형, 많이 힘들었다는 거 알아.


고진옹아니, 넌 몰라.


도근행, 차가워진 고진옹이 낯설고 무섭다.


도근행그 사람들 믿을 수 없는 인간들이야. 형 굴뚝에 있을 때, 불법 점거했다고 소송 건 사람들이라고. 형 내려오게 하려고 합의한다고 해놓고 말 바꾼 사람들이야. 설마, 그런 사람들한테 들러붙은 건 아니지?


고진옹합의는 왜 못했는데? 자유롭게 두 발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왜 1년 넘게 아무것도 못 했는데?


도근행(놀란 눈으로) 형〜.


고진옹다른 뜻 없어.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야.


도근행원망하는구나.


고진옹, 서류를 도로 도근행 앞에 내밀고.


고진옹사인해. 너 고생한 거, 나중에 내가 다 갚을게.


도근행갚을 거 없어. 사인할 일도 없고. 형, 우리한테 서운할 순 있는데, 오해야. 우리 정말 최선을 다했어.


고진옹그래.


도근행지금 형이 이러면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도 다 무너져.


고진옹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도근행왜 이러는데?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데?


고진옹갑자기 아니야. 굴뚝에서 내내 고민했던 거야. 그리고 찾은 출구야.


사이.


도근행미안해. 갈게.


도근행, 일어난다.


고진옹납품업체에서 돈 받은 거, 횡령이야.


도근행,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 멈칫.
천천히 고개 들어 고진옹 빤히 쳐다본다.


고진옹회사에서 이미 알고 있어. 그나마 내가 막은 거야. 밝혀지면 퇴직금이고 수당이고 없을 테니까.


도근행(비아냥거리는 말투) 형, 무섭다.


고진옹세상이 더 무서워. 너도 이제 네 살길 찾아.


도근행성호형이 마지막까지 형 걱정 제일 많이 했는데, 형이 이럴 줄도 모르고.


고진옹살아 있으면 좋았잖아. 가족도 잃고 직장도 잃고 돈도 잃고 목숨도 잃고.


도근행아니. 성호형은 죽지 않아. (손을 가슴에 얹고) 아직 여기 살아 있어.


고진옹정신 차려! 넌 아직 너무 낭만적이야. 현실을 직시해! 너 납품업체에 부품 몇 개 빼돌린 거 소송 걸리면 인생 쫑나. 그러면 아픈 홀어머닌 누가 모실 거야? 아무도 우리한테 관심 없어. 우린 그저 좆나 가난하고 좆나 무식하고 좆나 시끄러운 존재라고 생각해. 성호형, 너, 나, 다 착각한 거라고. 정의로 뭉친 주먹이다, 용감하고 씩씩하다,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애들 노래 불러가면서 계속 착각 속에 산 거야.


고진옹, 도근행 손에 볼펜을 쥐여주며.


고진옹그나마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거야. 사인해. 부탁이다.


도근행, 고진옹을 밀어내고 볼펜을 던져버린다.
도근행, 일어나 뒤로 물러난다.


도근행그 부품, 우리 조 신참이 실수한 거 덮느라, 하청업체에서 더 받은 거야. 신참 엮지 말고 나 횡령으로 넘겨도 상관없어.


고진옹바보 같은 놈!


고진옹, 볼펜 주워 와, 서류 위에 올려놓는다.


고진옹사인해, 여기에 사인하라고!


도근행형, 그래도 난, 성호형이랑 형이랑 그 노래 부를 때가 제일 행복했다. 우리 언젠가 자동차부품
으로 로버트 태권브이 꼭 만들자고…….


도근행, 울컥하여 말을 잇지 못하고 나간다.



고진옹근행아, 도근행!


어느새 들어온, 홍성호. 1장과 같은 모습이다.
홍성호, 한껏 웃으며 들떠 있다.


홍성호열정적으로다가, 열정적으로다가 움직여. 절대 지치면 안 돼. 여기 올라와서 축지법과 비행술 익힌다 생각해. (잰걸음으로 돌아다니며) 75m 상공 위에서 우린 늘 비행하는 거지. 날아다니는 거야.


홍성호, 고진옹에게 손짓한다.


홍성호뭐 해? 생각보다 더 외롭고 더 씁쓸하지? 그럴 땐, 노래를 크게 불러. 시름을 다 잊을 정도로 크게.


홍성호, 탑돌이 하듯 돌면서.



홍성호‘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고진옹, 홍성호를 보며 미소 짓는데, 울컥한다.


홍성호‘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고진옹형, 이제 오지 마.


홍성호, 고진옹 손을 잡으며 일으켜 세운다.


홍성호달려, 달리라고. 달려. 가만있으면 괴로워. 자꾸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노래 커진다.
해맑은 홍성호, 고진옹 손을 잡고 비행기처럼 날며 노래 부른다.



홍성호‘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고진옹, 거칠게 홍성호 손을 뿌리치고 주저앉는다.
홍성호, 움직임과 노래 뚝 멈추고.


고진옹다신 오지 마. 제발.


암전.



6장


한우근 사장실 / 안상태 국회의원 사무실
(간단한 소도구와 조명으로 번갈아 가며 두 장소를 이동한다)


한우근 사장실


한우근, 화난 모습으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한다.
서지만, 어쩔 줄 몰라 쩔쩔매며 서 있고.


한우근미쳤군, 미쳤어. 회사 그만두라는 한마디에 자살을 해?


서지만원래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고 합니다.


한우근직원들 우울증까지 우리가 어떻게 책임지나, 원.


서지만치매 걸린 홀어머니를 먼저 죽이고 자살했다고 하니…….


한우근어휴, 큰 이슈가 되겠구만. 아주 큰 이슈가 되겠어.


서지만회사 책임이라고 볼 순 없잖습니까? 개인의 선택이죠. 권고사직 들었다고 가족이랑 동반자살 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한우근그렇게 이성적인 상황이 아니야. 언론들이 또 얼마나 자극적으로 쏟아내겠어. 해고 통보에 비관했다고 우리 회사를 쪼아댈 게 분명해. 안상태 의원한테 전화 넣었어?


서지만예. 들른다고 하셨습니다.


한우근아주 망해라 망해라 하는구먼. 고공농성 때문에 구겨진 이미지 이제 만회하는가 싶었더니, 기름을 붓네. 내 참. (뻐근한 듯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아주 자살공장이라고 광고를 해라. 아무튼 사람이 제일 힘들어. 기계야 불만을 토하냐, 데모를 하냐, 조용히 일만 하지.


서지만매각협정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겠는데요.


한우근, 주변을 살피며 엄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은밀한 목소리로 나무란다.


한우근그런 얘기 함부로 꺼내지 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서지만, 실수했다는 듯 지퍼로 입을 닫는 제스처를 취한다.


서지만사장님. 자살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본인만 알죠. 직장은 그 사람 삶의 일부분입니다. 늦은 나이에 결혼도 안 했고, 함께 살던 어머니 치매에 걸려 병원비도 헉헉댔다던데. 게다 우울증약까지 복용하고 있었대요.


한우근그러면 뭐 하나. 누가 그렇게 조곤조곤 헤아리나? 자극적으로 건수 하나 잡아서 회사에 물 먹이려는 인간들만 진 치고 있는데.


서지만그 직원한테 친형만큼 가까운 사람이 있었어요.


한우근누군데?


서지만고진옹. 고공농성 할 때 매일 밥을 올려줬죠.


한우근, 뭔가 되짚어보더니.


한우근이번에 인사팀장 만든 놈?


서지만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우근그러니까.


서지만그러니까 이 척박한 세상에 유일하게 믿던 형이 고진옹이었죠. 그런데 그 고진옹이 도근행한테 해고 통보를 한 거죠.


한우근배신감이 컸겠네.


서지만그렇겠죠, 아무래도.


한우근그래서?


서지만아무래도 그게 이 사건의 빌미가 된 게 아닌가…….


한우근, 함박웃음을 짓는다.
한우근 사장실 조명 어두워지고, 국회의원 사무실 밝아진다.



안상태 국회의원 사무실


안상태가 가운데, 고진옹이 그 옆에 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커다란 지도가 있다. 안상태는 사인펜으로 도로 정비가 될 장소에 표시를 해두고 장난감 자동차들을 세운다.


안상태여기에 도로가 생기면 말이야. 미래자동차에서 만든 차들이 질주를 하겠지.


안상태, 장난감 자동차를 뒤로 뺐다가 손을 놓으면, 자동차가 앞으로 빠르게 나간다.


안상태전기차랑 수소차도 머지않았으니, 회사의 비전은 밝아. 자긍심을 가져.


고진옹내가 이렇게 복직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안상태고생을 많이 하면 거기에 익숙해져. 고생이 숙명인 것처럼 산다니까. 다른 길이 있다는 건, 아예 생각을 안 해요.


고진옹동료들한테 희망퇴직을 받는 게, 잔인한 일 같고.


안상태, 지도 위에 표시된 도로 옆으로 아파트나 숲을 표현하는 미니어처를 세운다.


안상태말 그대로 희망퇴직이야. 그냥 있으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복직도 안 되고 취직도 안 되고 그야말로 시간만 탕진하는 거야. 허송세월 보내기밖에 더 해. 노조들 그러지, 복직 안 돼도 좋다, 저런 악덕 기업 가만두면 안 된다, 복수해서 죗값 치르게 만들겠다. 너도 이제까지 봤잖아? 그렇게 복수한 노조 있었어? 없어. 그저 열패감에 분노의 화살을 퍼붓지만 아무 소용없어요. 그게 세상 이치야. 좀 더 생산성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고진옹정리해고 당하기 전에 챙겨갈 수 있는 모든 걸 얻고 그만둘 수 있게 노력은 하는데.


안상태됐어. 네가 오히려 그들한테 구세주야. 좀 더 큰일 하려면 죄책감이나 동정 따위는 버려.


안상태, 지도 위에 지하철역을 나타내는 미니어처를 세운다.


안상태(떨어진 자동차를 가리키며) 저것 좀 주워줄래.


고진옹, 순간 잠깐 망설이다 자동차를 주워 갖다 준다.


안상태(자동차를 지도 위 도로에 놓고) 이렇게 아우토반 같은 도로가 닦이니, 여기 지하철역 하나 들어오면 게임 끝인데. 진옹아, 국회의원 하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여. (지도만큼 팔을 벌리고) 세상이 생각보다 커. 할 수 있는 일도 많고. 이제 장관도 하고, 대통령도 하면 일이 더 많겠지. (펜을 던지듯 놓고) 너 노조 할 땐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알지? 회사 안으로 들어가 봐. 또 다른 세계가 보일 거야. 더 큰 세계. 너도 힘을 키워야지. 이제 나이도 지천명인데 언제까지 그렇게 쪼잔하게 살 거야.


안상태, 일어나서 창문 쪽으로 걸어가 밖을 보다가,


안상태내가 널 괜히 인사팀에 넣어달라고 한 게 아니야.


고진옹네가?


안상태그럼. 한우근이 눈엣가시 같은 널 왜 고용해? 다 책잡힌 게 있으니까 서로 물고 물리는 거지. (창문 밖을 가리키며) 저기, 딱 저기 역이 들어오면 좋을 텐데.


안상태, 돌아와 앉는다. 두 다리를 책상 위에 올리고.


안상태회사가 경영난 때문에 뭔가 포장한 뒤 매각할 계산이 있는 것 같아.


고진옹, 놀라 쳐다보면.


안상태부도낼 위기 몇 번 막아야 한다고 빌어대서 은행권도 연결해줬어. 그런데 파업이 장기화되니 사장도 죽을 맛이지. 한우근이 괜히 엄살떠는 건 아닐 거야. 어쨌든 그놈이 잘되어야 나도 정치 생활이 편해지니까. 넌 이번 은혜 잊지 말고 기억해라. 내가 부탁할 일이 있을 거야.


고진옹, 생각이 복잡해진다.


안상태내 뿌리가 노동운동 아니냐. 노동자들 지지가 없으면 재선은 어림없지. 여당 거물급 지역구에서 내가 어떻게 당선됐는데. 앞으로도 네 도움이 필요할 거다. 이번 일도 노사 간의 아름다운 합의로 마무리 지어야 해.


이때, 밖에서 노크 소리.


안상태더 할 얘기 없지?


고진옹…….


안상태(문에다 대고) 들어오세요. (일어나며) 내가 스케줄이 꽉꽉 차서.


급하게 들어오는 보좌관.


보좌관의원님, 안 좋은 소식입니다. 미래자동차 도근행 씨가…….


고진옹, 이상함을 직감하고 일어나는데.
보좌관, 계속 말을 해도 될지 안상태 눈치를 본다.


안상태무슨 일인데요?


보좌관자살했다고 합니다. 의원님이 노조와 합의에 엮인 게 아니냐는 추측 때문에 기자들이 인터뷰 요청을 해왔습니다.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고진옹, 그대로 뛰어나가려 하자, 안상태가 팔을 잡는다.


안상태가지 마!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국회의원 사무실 조명 나가고, 한우근 사장실 조명 들어온다.



한우근 사장실


서지만도근행을 후려치는 말을 했겠죠. 신변을 정리하고 싶을 만큼.


한우근모두 조용히 권고사직으로 정리하겠다더니. 사람을 아주 보내버렸구만.


서지만인사팀장한테 악감정 품은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한우근, 뭔가 계획하는 듯하다.


서지만본래 적보다 배신자를 더 싫어하잖아요.


사이.


한우근권고사직 면담했던 사람들 불러서 고진옹 팀장 행태에 대해 따져 물어. 비참하진 않았는지, 자존심 추락시키진 않았는지, 사직 권고할 때 기분이 어땠는지. 할 말들이 많을 거야. <한지일보> 박 기자도 동석시키고.


서지만예.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먹잇감 하나 던져주면 모두 달려들 겁니다.


한우근안상태 국회의원은 뭐야? 농성하는 놈들 중 하나를 인사팀장시키면 정리해고가 쉬워진다더니.


서지만의원님이 진짜 우리 편인지는 곰곰이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한우근훗! 여우 같은 놈.


한우근 사장실 조명 나가고, 국회의원 사무실 조명 들어온다.



안상태 국회의원 사무실


안상태와 고진옹, 서 있다.


안상태너, 알고 있었어?


고진옹, 패닉에 빠진 채, 어쩔 줄 몰라 한다.


안상태여기 온 이유가 뭐야? 저 일 때문이야?


고진옹근행이, 근행이 어떡해? 상태야, 근행이 어떡해?


안상태처음 들었어?


고진옹,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괴로워한다.
손이 눈에 띄게 떨린다.


안상태해고당하고 자살하는 일이 어제오늘 일이냐? 정신 차려! 정신 차리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정리 좀 해 보자. 잘못 엮이면 화살이 쏟아질지 몰라. 너 도근행 언제 만났어?


고진옹, 크게 소리 지르고.


안상태진정해. 혹시 네가 희망퇴직 권유한 직원이야?


고진옹나 때문에, 나 때문에…….


안상태너 때문이 아니야. 너 분명히 내 말 들어! OECD 자살률 부동의 1위가 우리나라야. 다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 아무튼 너 때문은 아니라는 거야. 그러니까 기자가 몰려오든 한우근이 협박하든 넌 발목 잡힐 말은 삼가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고진옹가 봐야겠어.


안상태진옹아. (망설이다) 나 엮지 마라.


안상태, 나가려는 고진옹 잡으며.


안상태입 단속해. 내 이름 튀어나오지 않게.


고진옹, 안상태를 밀치고 나간다.


안상태고진옹!


암전.



7장


미래자동차 정문 앞


도근행 추모식.
‘정리해고는 살인’ ‘사회적 타살’ ‘더 이상 죽이지 마라’ 등의 푯말이 세워져 있고.
가운데는 도근행 사진이 놓여 있다.
동료들이 하얀 국화를 차례로 사진 앞에 놓고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진 앞에 일렬로 서서, 테이프에서 나오는 <로보트 태권V> 노래를 부른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 두 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 적진을 향해 하늘 날으면 /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이윤미, 일어나 추모사를 읽는다.


이윤미근행아. 들리니? 네가 좋아하는 노래야.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항상 다른 사람 위해 싸우던 널, 정작 우리는 안아주지 않았구나. 언제나 열심히 일하고, 동료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하루를 마감하고, 아픈 홀어머니 좋아하는 대봉 사드리며 행복해하던 너. 그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마저 빼앗긴 넌 얼마나 외로웠을까. 동료도 직장도 떠나가는 척박한 현실에서 넌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부디 그곳에선…….


고진옹, 꽃기린 화분을 들고 터벅터벅 들어온다.
뒤따라 허수인도 들어온다.


이윤미외롭지 마라.


이윤미, 고진옹을 보고 말을 서둘러 맺는다.
고진옹, 꽃기린을 도근행 사진 앞에 놓고 무릎 꿇는다.


고진옹꽃기린이야. 예수님의 가시면류관처럼 가시가 있어서, 꽃말이 ‘고난의 깊이를 간직하다’라고 했지. 이놈은 기특해서 1년 내내 꽃을 피운다고. 이런 식물도 이렇게 환하게 꽃을 피우는데, 넌, 넌, 왜 그랬어? 바보같이 왜 그랬어?


허수인몰라서 물어?


동료들, 고진옹을 향한 시선 차갑다.
어디선가 고진옹에게 달걀이 날아온다. 고진옹을 비껴가 떨어진다.


이윤미당신, 오늘은 그냥 가는 게 좋을 거 같아.


고진옹, 일어나지 않고.


허수인근행이가 널 형처럼 따랐잖아. 누가 1년 넘게 매일 밥 올려주고 똥 치워줘? 널 그만큼 좋아했으니까, 널 그만큼 존경했으니까.


고진옹근행아, 미안하다.


허수인너에 대한 신의가 그렇게 두터웠는데. 그런 네가 사람들 정리하고 나서니 충격, 아니 그 이상이었겠지. 세상이 무너졌겠지.


동료(비아냥대며) 인사팀장님, 그만 가시죠. 인원 감축하느라 바쁘실 텐데.


고진옹, 일어나서 동료들에게 말한다.


고진옹우린 너무 뒤처졌어. 우리가 너무 구닥다리 방식으로 투쟁하니까 이렇게 계속 당하는 거야.


허수인무슨 헛소리야?


동료오늘은 자숙합시다.


고진옹세상이 발전하면서 더 교활한 방식으로 우릴 옥죄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하잖아.


허수인그래서 안 당하려고 인사팀장 맡은 거야?


동료지금 잘잘못 따질 분위기가 아닙니다.


고진옹언제까지 죽을 건데. 언제까지 이렇게 등신같이 죽을…….


동료, 달려와 고진옹에게 주먹을 날리고.
이윤미, 말린다.


이윤미당신, 오늘은 이만 가.


고진옹놔.


고진옹, 이윤미를 거칠게 뿌리치고.


고진옹여러분, 전 충분히 고통받았습니다. 고공농성 372일 하면서 몸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졌습니다.


허수인네 핑계 듣고 싶은 사람 한 명도 없어.


고진옹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더 이상 고통받아선 안 된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된다. 아무것도 안 바뀌는데, 우리는 왜 이 고통을 되새김질합니까? 우린 그럴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동료집어치워!


고진옹제가 1년 넘게 고공 위 십자가에 묶여 있는 동안 당신들은 뭘 했습니까? 당신들이 저에게 이럴 자격이 있습니까?


허수인자소서요?


동료피해의식에 쩔었군.


고진옹우린 졌습니다. 패배를 인정하고 최대한 안전한 퇴각을 마련해야 합니다. 제가 그걸 해주려고 한 거라고요.


허수인아무도 네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아.


‘시끄러워!’ ‘잘났다!’ ‘조용히 해!’ ‘정도껏 해라!’ ‘꺼져!’ ‘뻔뻔하다!’ 비방과 욕설들 난무하고. 달걀도 날아온다.


동료아름다운 배신은 없어!


고진옹배신? 난 배신한 적 없어.


허수인넌 분명히 알고 있어! 네가 지금 뭔가 켕긴다는 걸.


고진옹지금 내가 근행이를 죽이기라도 했다는 거야? 왜들 이러는데.


동료죽을 만큼 힘들게 했겠지. 아니라고 할 수 있어?


고진옹뭐라고?


고진옹이 동료에게 달려드는데 이윤미와 사람들 말리고.


고진옹난 아니야! 난 정말 근행이를 위한 생각이었어.


이윤미당신 가!


고진옹윤미야, 너마저 왜 이래? 넌 내 진심 알지?


이윤미…….


고진옹윤미야.


고진옹이 동료에게 달려드는데 이윤미와 사람들 말리고.
이때, 안상태 국회의원 들어오고. 보좌관은 기자를 데리고 들어온다.
안상태, 고진옹을 봤다. 허나,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모인 사람들을 둘러본다.
보좌관 서둘러 마이크를 준비하고.


보좌관안상태 국회의원이십니다.


보좌관, 마이크를 안상태에게 넘긴다.


안상태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가슴 아픈 소식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참담합니다. 사죄드립니다.


안상태, 도근행 사진 앞에서 큰절한다.
보좌관과 기자, 안상태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사진에 담는다.
안상태, 동료들을 향해서도 큰절한다.


안상태여러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서 먼저 간 자들의 원한을 풀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세대에 이런 비극을 전달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자 여러분, 힘내세요! 우리가 돕겠습니다. 농성으로 인해 빚어진 손해배상청구소송이 각하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동료들(환호하듯) 안상태! 안상태! 안상태!


고진옹거짓말!


고진옹, 안상태에게 다가가나 보좌관이 잡는다.


안상태여러분이 모두 복직되고 모두 정규직 되는 날,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그날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동료들안상태! 안상태! 안상태!


고진옹안상태! 이 꺼삐딴리 같은 놈!


안상태여러분, 진정하십시오. 흥분하지 마세요. 지금은 추모하는 시간입니다.
(고진옹을 가리키며) 저분은 일단 밖으로 내보내세요.


보좌관이 고진옹을 내보내려는데, 고진옹 저항한다.


고진옹여러분, 저 말을 믿습니까?


순간 어디선가, 고진옹에게 달걀이 날아온다.


동료꺼삐딴리는 너지. 기회주의자!


더 많이 날아오는 달걀 세례.
고진옹, 달걀 세례가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알아채고 충격을 받는다.
그대로 주저앉는다.


허수인(고진옹에게) 무슨 말을 해도 변명이라고 했지.


안상태감정이 격해지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늘은 차분하게 동료를 보내야 합니다.


고진옹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윤미 다가와 고진옹을 부축해 데리고 나가려 한다.
계속 들려오는 동료들의 비난 속에 고진옹 억울함이 비어져 나온다.


고진옹이건 아니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암전.



8장


한우근 사장실 / 고진옹 집 / 안상태 국회의원 사무실
(간단한 소도구와 조명으로 번갈아 가며 장소를 이동한다)


한우근 사장실


한우근과 서지만 앉아 있고, 고진옹 서 있다.


한우근고진옹 씨, 제가 기회를 한 번 더 드렸잖아요. 고진옹 씨가 사람들 희망퇴직에 사인하고 조용히 정리하게 만든다고 약속했잖아요.


서지만회사 밖에서 난리가 났어요. 기자들이 소설을 『천일야화』처럼 쏟아내고 있습니다. 어쩔 거예요?


고진옹저는 회사 규정을 전달하고 그들이 빨리 정리하게끔 조언만 했습니다.


한우근조언을 듣고 자살하나요? 조언을 듣고 가족과 동반자살을 해요?


고진옹지금 제 탓이라는 건가요?


서지만, 서류를 고진옹에게 내밀며.


서지만고진옹 씨와 면담했던 사람들의 증언이에요.


고진옹, 서류를 가져다 넘겨 본다.


서지만보면 알겠지만, 하나같이 고압적 태도였다, 위압적인 말투였다, 배신감에 괴로웠다, 그날 이후로 불면에 시달렸다 등등. 당신 면담에 불만이 차고도 넘쳐요.


고진옹말도 안 돼.


서지만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지라도 상대방은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진술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고진옹지금 이러는 이유가 뭐죠?


서지만회사를 그만뒀으면 합니다.


고진옹예?


서지만해고입니다.


한우근실추된 이미지를 복구하는 게 아니라, 먹칠에 덧칠을 했어요. 우리 인연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한우근 사장실 조명 어두워지고 무대 한쪽―고진옹 집―에 조명 들어온다.



고진옹 집


이윤미, 의자에 앉아 있다.


이윤미잠깐 떨어져 지내자.


고진옹왜?


고진옹, 이윤미에게 다가간다.


이윤미다가오지 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고진옹너도 다른 사람이랑 같은 생각이구나.


이윤미혼란스러워.


고진옹너까지 왜 그래? 너 변했구나.


이윤미아니. 난 안 변했어. 변한 건 당신이야.


사이.


이윤미당신, 근행이 자살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어?


고진옹난 근행이 위하는 길을 생각한 거야. 믿어줘.


이윤미당신 정말 왜 그래?


고진옹난 당신이랑 준호랑 잘 살고 싶었어. 그 마음뿐이었어. 가장으로 미안하고 미안해서, 더 이상 무책임해지지 않으려고 방법을 찾은 거야.


이윤미잘 사는 게 뭔지 몰라? 힘들어도 당신이 굴뚝에 있을 때가, 난 더 잘 살고 있는 느낌이었어.


고진옹그래? 내가 그 지옥 속에 갇혀 있어야 당신은 더 행복해? 당신이 단 하루라도 굴뚝에 있어 봤어? 내가 그곳을 갔다 왔기 때문에 그만둘 마음을 먹은 거야. 왜? 소용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이윤미당신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예전엔 같은 길을 걷는 느낌이었는데.


고진옹왜 날 이해 못 하고, 자꾸 밀어내는데?


이윤미당신은 변하는 시대에 발맞췄고, 난 아직 구닥다리 시대에 머물러 있나 봐.


고진옹윤미야, 가지 마. 제발 내 옆에 있어줘.


이윤미당신, 이해도 안 되고 용서도 안 될 거 같아. 그래서 같이 있기 힘들어.


고진옹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가족이 나한텐 전부야. 제발 이러지 마.


이윤미근행이 폐암이었대.


고진옹, 말문이 막힌다.


이윤미어머니도 아픈데 본인도 아프니 눈앞이 캄캄했겠지.


고진옹, 그대로 무릎이 꺾인다.


이윤미난 근행이한테 평생 속죄하며 살 거야.


고진옹 집 조명 어두워지고, 무대 다른 쪽―국회의원 사무실―에 조명 들어온다.



국회의원 사무실


안상태 앉아 있다.


안상태너 은혜 갚으라고 했지?


고진옹, 안상태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는다.


고진옹네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뭐야? 너 출세하려고 순진한 우릴 이용하기밖에 더 했어?


안상태, 거칠게 고진옹 손을 뿌리치고.


안상태너, 일하라고 돈 벌라고 복직시켜준 거지, 자살 독려하라고 넣어준 건 아니잖아.


고진옹이렇게 일 터지면 나를 방어막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이었어?


안상태너 큰일 났다. 열패감이 크니까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나 봐.


고진옹날 왜 인사팀에 넣었는데?


안상태네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설득할 줄 알았지.


고진옹툭하면 말 바꾸는 네 말을 믿으라고?


안상태지금 너 때문에 모든 사람이 골치 아파졌어.


고진옹나 때문에?


안상태나도 머리 터질 거 같아.


고진옹, 답답하다.


안상태그러게 조용히 잘 처리하지. 왜 이렇게 되게 만들어.


고진옹훗! 그래. 결국 다 나 때문이구나. 다.


안상태오해하지 마.


안상태, 태도를 바꾸어서 자못 부드러워진다.


안상태일이 커졌다, 진옹아. 일단 네가 인정하고, 차선책을 모색하자.


고진옹……


안상태네가 도근행 씨한테 제안했던 것들이 큰 압박이 됐을 거라는…….


고진옹, 어이없어 코웃음을 친다.


안상태네 일자리, 준호 일자리, 내가 다 알아봐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고진옹널 믿으라고? 한우근 잡아서 재선 노릴 계산하는 널 믿으라고? 노조 잠잠하게 해준다고 환심 사려고 노력한 널 믿으라고?


안상태날 그렇게 의심했다면, 넌 왜 응했는데?


고진옹…….


안상태난 진심으로 널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야. 네가 잘못해서 사람들 괴롭히니까 이런 일이 터진 거고.


고진옹야~~~~~


고진옹, 소리 지르며 안상태에게 달려드는데.
그때, 보좌관들 들어온다.
보좌관, 놀라며 고진옹 잡아채 말리고.
고진옹, 계속 안상태에게 달려들려 한다.


안상태잘 결정해라. 회사에서 너한테 소송 건다고 준비 중이래. 내가 너 하는 거 봐서 말려는 보겠는데, 사장이 말을 들을지 모르겠다.


고진옹두고 봐. 네 흑심, 내가 낱낱이 밝혀줄 테니까.


안상태네가 동료들 압박하는 녹취록도 나왔어. 들려줘?


고진옹개수작 부리지 마. 난 진심으로, 정말 그들을 위한 말만 했어.


안상태너나 수작 부리지 마. 만약, 아직 네 편이 있다면 그건 나니까.


고진옹이 달려들자 보좌관들이 강하게 막아서고.


안상태내가 충고했잖아. 시대가 바뀌었으니 머리를 쓰라고. 억지만 부리지 말고.


보좌관들, 고진옹 양팔을 잡아 밖으로 내쫓는다.
암전



9장


굴뚝 - 1장 고공 농성하던 장소


고진옹과 허수인이 올라와 있다.


허수인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에 왔구나.


고진옹,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진옹근행이가 저기서 손을 흔들었는데. 멀어서 잘 안 보이는데도 (울컥하며) 이상하게 근행이는 금방 알아봤는데.


허수인하늘에서 성호형 만났겠다.


고진옹성호형이랑 같이 <로보트 태권V> 부를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그게 마지막 말이었어.


허수인관련 문서를 언론사와 경찰에 다 보냈으니 수사가 들어가겠지.


고진옹고맙다.


허수인회사가 누적적자를 왜 방치했는지, 매각하려는 계획이 왜 은밀히 진행되는지 드러나면 갑자기 해고된 사람들의 억울함이라도 풀리겠지.


고진옹넌 흔들리지 않는구나.


사이.


고진옹다 잃었어. 마누라도, 아들도, 집도, 직장도, 동료도. 뭘 위해 살았는지 모르겠어.


허수인네가 제자리에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거야.


고진옹희망이 없어도 노조에 남아 있는 게 맞는 거였을까?


허수인끝까지 함께 복직할 날을 꿈꾸고 투쟁했어야지.


고진옹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게 뻔하다 해도?


허수인그렇게 단정 짓는 순간, 세상에 지는 거야. 오게 해야지. 불가능할 거 같아도 노력해야지. 그게 우리 삶의 이유잖아.


고진옹네가 부럽다.


허수인수많은 만화영화를 봐. 악의 무리는 항상 나쁜 방식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하잖아. 그럴 때마다 의로운 영웅들이 나타나 무찌르고. 그래야 영화도 세상도 제대로 돌아가니까. 하지만 그 영웅들, 죄다 죽을 만큼 고생해.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지. 왜? 악의 무리에게 세상을 내줄 순 없으니까.


고진옹…….


허수인삶이 녹록지 않고, 의로움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너만 억울하게 사는 것 같지?


고진옹, 울컥한다.


허수인그렇지 않아. 다 알고 있어.


고진옹그럴까?


허수인그럼. 그게 이 세상을 나빠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거든. 엄청 깊은 뿌리야. 비록 지금은 약해 보여 낙담할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 너의 의로움이 이어지고 계속 전달되면서 세상이 아주 조금씩 좋아지는 거거든.


고진옹네 말이 다 맞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네 말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사이.


고진옹드문드문 세상이 나한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도 그때마다 네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


핸드폰 울리고. 고진옹 받는다.


고진옹윤미야? 맞아. 다시 굴뚝에 올라왔어. 아래?


고진옹, 아래를 보고 윤미가 서 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든다.


고진옹뉴스?


고진옹이 뉴스를 틀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뉴스


75m 굴뚝 위에서 1년이 넘게 농성을 벌였던 미래자동차 고진옹 씨가 내려온 지 한 달이 지난 오늘, 다시 굴뚝 위에 섰습니다. 고 위원장은 미래자동차 집단해고에 저항하며 홍성호 씨와 함께 굴뚝에 올랐고, 홍성호 씨가 먼저 내려간 후, 홀로 372일 동안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사측이 합의하겠다는 통보를 듣고 내려왔으나 합의가 불발되었고, 최근 사측의 고소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입니다.
고 위원장은 굴뚝에 오르기 전, 여러 언론사와 경찰에 투서를 넣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한우근 사장이 회삿돈을 빼돌리고 적자가 쌓이자 이를 숨긴 채, R&B 회사에 비밀 매각을 시도했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노조를 정리하려 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이 협정을 위해 안상태 국회의원이 R&B 회사로부터 불법 선거자금을 받은 것에 대해 수사를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고진옹, 핸드폰에 대고.


고진옹아니야. 이건 다 수인이 한 거야. (허수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혼자라니? 난 혼자인 적 없었는데. 아니야. 내 앞에 분명히 있어. 허수인. 허수인이 죽었다니? (황당한 웃음) 언론사와 경찰에도 다 이 친구가 제보했어. 난 지금 당신이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했다고? 내가 제보한 거라고? (허수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허수인 때문에 고공농성을 시작했다니. 성호형이랑 수인이랑 나랑 셋이 시작했어. 성호형이 먼저 내려간 후에도 1년 넘게 둘이…… (사이) 아니야. 우린 항상 함께 있었…….


고진옹, 전화 끊고.


고진옹아니지? 윤미가 네가 고공농성 하다 죽었대. 그래서 내가 시작한 거래.


허수인너 혼자 고공농성 할 때 날 불러냈어.


고진옹,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허수인두려움에 날 부른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고진옹넌 항상 당당하고 저돌적이고…… 흔들리지 않고, 그런 모습이었…….


허수인네가 원하는 모습이지. 네가 지키고 싶던 모습. 그렇게 날 만든 거야.


고진옹, 침을 삼키고.


허수인하지만 난 너야. 너의 일부. 네가 버릴 수 없는 너.


고진옹이 허수인에게 다가가려 하자 허수인 뒤로 물러난다.


고진옹수인아.


허수인, 그대로 건물 밖으로 나간다. 허공에 그대로 서 있다.


고진옹말도 안 돼.


허수인이제 날 불러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넌 충분히 단단해졌으니까.


고진옹이 허수인에게 달려가려 하자 허수인 그대로 사라지고.
고진옹을 막고 들어오는 홍성호와 도근행.


고진옹형. 그, 근행아.


고진옹, 도근행을 보고 무릎이 꺾이며 사죄하듯 고개를 숙인다.


고진옹미안해. 너무 미안해. 어떻게 용서를……


도근행, 고진옹에게 다가가 등을 툭 치며.


도근행뭐 해? 굴뚝농성 시작하려면 플래카드부터 걸어야지.


고진옹, 도근행을 쳐다보며 얼떨떨해하는데,
도근행, 고진옹에게 플래카드를 쥐어주고. 함께 플래카드를 내건다.
커다란 플래카드가 굴뚝 아래로 펼쳐진다.
‘미래자동차 누적적자, 은밀한 매각협정 수사를 착수하라.’
‘국회의원 안상태 불법 후원금 수수혐의 조사하라.’


고진옹(플래카드 보며) 낭만적인 개소리지?


도근행왈왈왈왈왈~ 세상을 지키는 개소리지.


고진옹형, 수인이가, 같이 있던 수인이가……


홍성호다 네가 불러들이는 거야.


고진옹, 홍성호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한다.


도근행지옥 같아도 형이 여기 있는 이상, 우리도 사라지지 않아.


홍성호자, 자, 일어나. (도근행과 고진옹을 모으며) 사내대장부가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왔으면 뭐라도 얻어내야지. 그러려면 열정적으로다가, 열정적으로다가 움직여야 해. 절대 지치면 안 돼. 여기 올라와서 축지법과 비행술 수련한다 생각해.


홍성호, 고진옹과 도근행에게 자세를 잡아주며.


홍성호기억하지? 더 빨리 움직여. (발에 맞춰 리듬을 타며 노래를 부른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 정의로 뭉친 주먹 로보트 태권 / 용감하고 씩씩한 우리의 친구.’ 노래도 부르고.


고진옹, 머뭇대다 노래를 따라 한다.


홍성호더 크게.


고진옹, 도근행, 홍성호 함께 노래 부른다. 노랫소리 커진다.


홍성호축지법과 비행술! 우린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나는 거야.


어느새 셋은 칼군무처럼 똑같은 동작을 하고 있다.


홍성호김 박사가 그랬지. 로보트 태권브이가 완성되는 날, 지구의 평화가 완성될 수 있다! 하하하!


도근행우리가 로보트 태권브이처럼 싸우는 날, 우리의 평화가 완성될 수 있다!


홍성호우하하하하! 이렇게 나는 거야.


앞질러 가던 홍성호와 도근행, 비행기가 이륙하듯, 빠른 걸음 뒤 비행술로 날아간다. 사라진다.
고진옹, 굴뚝 위에 혼자 남아 그들과 같은 동작을 하는데, 씩씩하다.
점점 몸이 뜨는 것 같다.
조명 점점 어두워지고.


고진옹형, 몸이 점점 뜨고 있어. 나도 드디어 비행술을 익혔나 봐.


암전.
어둠 속에 고진옹을 응원하듯 노래 신나게 울려 퍼진다.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
정의를 위해 키운 로보트 태권
이 세상에 당할 자 있을까 보냐
평화의 사도 사명을 띠고
악의 로보트 때려 부순다
멋지다 신난다 태권브이 만만세
무적의 우리 친구 태권브이


막.











이미경
작가소개 / 이미경

2011 신작희곡페스티벌, 2013 《조선일보》로 등단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이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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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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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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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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