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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굴뚝 유골함

  • 작성일 2022-09-30
  • 조회수 2,413

복도 굴뚝 유골함
undocumented


김연재







등장인물


건축사진사
타일공
건축사진사의 조모
이거포
식물화석연구자
영구차 운전사
한인마트 사장
간병인
스튜어디스
백인 남자
소년
승객


병원 직원1, 2
주민센터 직원
법원 직원1, 2
우체국 직원
떠도는 미장이 가족



연표


1939이거포 황해도 출생

1950한국전쟁

1951간병인 부산 출생

1962마포아파트 건설

1965세종로 이순신 동상 건설

1970이거포 결혼

1972영구차 운전사 서울 출생

1974간병인 미국 이민

1980이거포, 영구차 운전사 가족 LA 이주

1988서울 올림픽

1992LA 폭동

1993이거포 남편 피살

1994건축사진사 서울 출생, 식물화석연구자 LA 출생

1995타일공 서울 출생

2017트럼프 제45대 미국 대통령 당선

2020이현실 혹은 이현아 혹은 이현경 피살

2021건축사진사의 미국 방문


“네가 여행자, 중개인, 다양한 아나운서 등 메신저에 천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해가 돼. 그러다 보면 심지어 세계의 흐름이나 파동…… 심지어 비행기에조차 그러겠네!”


-미셸 세르, 『천사들의 전설』


“비합법적 처형, 정치적 살상, 시위대를 향한 공격을 기록했을지도 모를 이미지가 그 사건들을 보여줄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자체적인 주변화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 이미지의 빈곤은 결여가 아니라, 내용보다는 형식에 대한 정보의 추가적인 층위이다. (……) 빈곤한 이미지는 자신의 물질적 구성을 통해 재현의 영역을 훌쩍 넘어서 사물과 인간, 삶과 죽음, 정체성의 질서가 유예된 세계에 도달한다.”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1막.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1. 뼈


붉은 흙밭에 타일공 서 있다.
봄비가 내린다.
타일공 뒤로 멀찍이 버스가 도착한다.
일꾼들이 줄지어 버스를 탄다.
비에 젖은 시골길을 구르는 버스의 바퀴 소리.
모두 떠난다.
침묵.
이따금 새소리.
타일공의 발치에 흰 뼛조각 튀어나와 있다.
타일공의 발이 붉은 진흙 속으로 빨려든다.
그는 몸을 굽혀 뼈에 묻은 진흙을 걷어낸다.
뼈가 모습을 드러낸다.
타일공의 발부터 종아리 절반까지 진흙 속에 빠져든다.
마치 흙 속에 심어진 것 같다.
뼈는 떠오르고 타일공은 가라앉는다.



2. 천사


요양원.
회칠된 흰 벽이 있다.
정오의 환한 햇빛이 들어온다.
침대 위, 건축사진사의 조모가 몸을 곱게 접어 자고 있다.
그 옆에 건축사진사, 앉아서 조모를 바라본다.
긴 사이.
조모, 몸을 뒤척인다.


건축사진사할머니?


사이.


건축사진사할머니, 저 왔어요. 너무 늦었죠.


사이.


건축사진사화나신 건 아니죠. 더 늦기 전에…… 보러 왔어요.


사이.


건축사진사이런 말 하면 화내실 수도 있는데.


건축사진사, 심호흡을 한다.


건축사진사저랑 동생이 할머니 집에 버려지기 전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조모, 벌떡 일어난다.


건축사진사아니에요, 할머니. 취소할게요.


조모,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무언가에 귀를 기울인다.


조모이 소리 들려요?


조모, 자신의 양쪽 귀를 살살 때린다.


조모내 귀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데.


건축사진사어떤……?


조모쉿. 이 소리.


사이.


건축사진사어떤 소리요?


조모(신경질적으로)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사이.


조모다들 조용히 좀 해요!


조모, 다시 몸을 누인다.


조모지금요. 안 들려요?


사이.


조모누가 낮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반복적으로.


사이.


조모비행기 소린가?


긴 사이.


조모엄마, 천사가 있을까요?


건축사진사, 조모를 바로 바라본다.


조모천사는 어떻게 생겼죠?


사이.


건축사진사제가 지금 증조할머니 역할을 하면 되나요.


조모내 생각엔 인간처럼 생기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사이.


조모눈 코 입 같은 게 필요 없겠죠. 멘스를 하거나 오줌똥을 싸거나 팔다리 가슴이 늘어나고 부풀 필요가 없겠지요.


건축사진사천사 그림을 보면 아주 무섭던데요.


조모날개가 달렸을까요?


건축사진사공룡의 피부에도 깃털이 나 있었다는데.


조모난 천사가 무서워요. 무서울 것 같아요. 아아, 무서워!


조모, 흰 깃털을 상상하며 꽥꽥거리는 오리 울음소리를 따라 하더니 입으로 바람을 내뿜고는 다시 잠이 든다.
건축사진사, 침실을 나선다.



3. 방문들


번호표 기계 한 대 놓여 있다.


건축사진사산부인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병원 직원1이쪽입니다. 얼마나 되셨어요?


건축사진사알게 된 지는 일주일 됐어요.


병원 직원1축하드립니다.


건축사진사축하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병원 직원1오, 임산부가 아니시군요.


건축사진사당연히 아니죠. 저 임신 안 했어요.


병원 직원1죄송합니다.


건축사진사임신했을까 봐 두렵네요, 갑자기.


병원 직원1산부인과에는 무슨 일로…….


건축사진사생시를 알고 싶어서요.


병원 직원1그거 알아서 뭐 하시게요?


건축사진사내 엄마가 정말 죽었는지 점쟁이한테 물어보려고요. 잘 보는 데 아세요?


병원 직원1저 교회 다녀요.


건축사진사예수님은 염소자리예요.


병원 직원1, 나간다.
건축사진사, 번호표를 뽑는다.


병원 직원2무슨 일로 오셨어요?


건축사진사출생증명서를 보고 싶어서요.


병원 직원2몇 년 생이세요?


건축사진사94년생이요.


병원 직원299년 이전 자료는 전산화되어 있지 않아서 우리 병원에서는 확인이 어렵습니다.


건축사진사다 폐기됐나요?


병원 직원2출생등록지 관할 가정 법원에 문의해 보세요.


건축사진사출생등록지가 어디인지 어떻게 알죠?


병원 직원2등본 떼셔야죠. 앞으로는 이런 일로 오시면 접수 안 돼요.


건축사진사, 번호표를 뽑는다.


건축사진사지문을 인식할 수가 없대요.


주민센터 직원그것참 안 됐네요.


건축사진사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주민센터 직원번호표 뽑고 기다리세요.


사이.


주민센터 직원아직도 안 가셨어요?


건축사진사(등본을 내밀며) 출생등록지가 뭘까요?


주민센터 직원출생등록지요? 그런 건 없는데.


건축사진사네?


주민센터 직원등록기준지요? 그건 기본증명서를 떼셔야죠.


건축사진사아.


주민센터 직원다시 번호표 뽑고 기다려야겠는데요.


건축사진사여섯 시네요.


주민센터 직원내일 다시 오세요.


건축사진사, 번호표를 뽑는다.


건축사진사법원 한번 들어오기 되게 어렵네요.


법원 직원1검찰이랑 같은 건물을 쓰거든요.


건축사진사출생증명서를 보고 싶어서요.


법원 직원13층으로 올라가세요.


건축사진사떨리네요.


건축사진사, 번호표를 뽑는다.


법원 직원2무슨 일로 오셨나요.


건축사진사출생증명서를 보고 싶어서요.


법원 직원2신분증 보여주시고요.


건축사진사, 신분증을 내민다.


법원 직원2사유는요?


건축사진사생시를 알고 싶어서요.


법원 직원2그리고요?


건축사진사그게 다예요.


법원 직원2출생증명서에 안 적혀 있을 수도 있어요.


건축사진사네?


법원 직원2병원에서 등록했으면 적혀 있을 거고 나중에 등록했으면 안 적혀 있을 거예요.


건축사진사제 것에는 적혀 있나요?


법원 직원2저희도 모르죠.


건축사진사지금 알 수 없나요?


법원 직원2증명서 찾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립니다.


건축사진사오늘 바로 알 수가 없다고요?


법원 직원2전산화 안 되어 있어서 일일이 찾아야 해요.


건축사진사어디 있는데요?


법원 직원2창고에요.


건축사진사무슨 일주일씩이나 걸려요?


법원 직원220세기 서울 서부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출생증명서가 쌓여 있는 창고를 상상해 보세요.


건축사진사무덤 같네요.


법원 직원2법원으로 와서 찾아가시겠어요, 아님 우편으로 받아 보시겠어요?


건축사진사우편으로요.


법원 직원2우편 요금 별도로 들고요, 법원 1층 우측 끝으로 가시면 우체국 있고요. 거기 가셔서 규격 봉투랑 우표 사 오시면 되고요.


건축사진사, 번호표를 뽑는다.
우체국 직원, 나온다.


우체국 직원뭐 보내세요?


건축사진사규격 봉투 하나랑 우표 주세요.


우체국 직원부칠 건 없으시고요?


건축사진사네.


우체국 직원여기 있습니다.


건축사진사, 우편 요금표를 한참 읽는다.


건축사진사항공우편을 보내면 배 타고 가나요, 비행기 타고 가나요?


우체국 직원항공우편은 비행기로 가는 우편이고요, 배로 가는 우편은 선편우편입니다.


건축사진사처음 듣는 말이네요, 선편우편.


우체국 직원요즘은 거의 안 쓰죠.


우체국 직원, 나간다.
무대 위 건축사진사, 봉투와 우표를 들고 서 있다.
무대 어두워진다.
따뜻한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캐럴풍의 잔잔한 음악이 들린다.
건축사진사, 벽장 속에 앉아 우표를 모은 작은 앨범을 넘겨 본다.


사이.


건축사진사, 숨을 죽인다.
문을 박차고 나간다.
겁에 질려 문을 하나씩 열어젖힌다.
그러다 유리창 앞에 선다.
김이 서린 유리창을 손으로 조금 닦고 밖을 내다본다.
눈이 내리고 있다.
다시 사방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책상 밑으로 들어가 숨는다.
커다란 책상 밑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본다.
손가락으로 책상의 밑면을 두드린다.
시계 초침 소리 들린다.
고요하다.
괘종시계가 울린다.
시계 속 뻐꾸기가 튀어나와 운다.
고개를 기울인 채 놓여 있는 석고상이 움직인다.
홀린 듯 석고상을 바라본다.
괘종의 잔음이 엷게 남는다.


건축사진사의 조모,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익숙한 비닐봉지 소리에 신비롭고 두려운 적막이 깨진다.
조모, 책상 아래에 누워 있는 건축사진사를 발견한다.


조모얘, 너 거기서 뭐 하니?


건축사진사, 책상 아래 거꾸로 누워 조모를 바라본다.


건축사진사할머니, 나는 왜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어요?



4. 최초의 기억


타일공그날 언니가 창밖으로 본 게 뭔데?


건축사진사사람들, 집들, 그리고 성당.


타일공그랬는데?


건축사진사주먹을 쥐고 손바닥의 가장 두툼한 부분으로 김 서린 창문을 슥슥 밀어 닦고 그곳으로 밖을 내다본 거야. 눈이 녹고 있었어. 검은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뒤늦게 미사당에 들어가고 있었어. 우리 집 담벼락 너머에 연립주택이 한 채 있었잖아.


타일공그랬지.


건축사진사흰 벽 가운데 한 집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어. 그 집의 불빛이 우리 집까지 들어왔어.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어. 오카리나 소리가 흘러나왔어. 제목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익숙한 멜로디였어. 잠시 침묵이 찾아왔어. 그 순간 나는 그 집에 사는 누군가 죽었다는 걸 알았어.


타일공그걸 어떻게 알아?


건축사진사모르겠어.


타일공확인해 봤어?


건축사진사아니.


타일공내 기억에는 그런 일 없었어. 대체로 사람은 병원에서 죽어.


건축사진사침대에 오래 누워 있던 노인이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어. 낡은 육신을 빠져나간 자신의 영혼이 길을 잃어 잘못 안착하지 않도록.


타일공그래서?


건축사진사울었어.


타일공왜?


건축사진사누군가의 삶이 영영 저물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타일공언니는 좀 과해.


건축사진사아, 뭐가!


타일공남자 꼬실 때 이런 말 하지?


건축사진사아니!


타일공신비로워 보이려고.


건축사진사아니거든!


사이.


건축사진사너는 어때?


타일공우리 집 난간에 페인트칠하던 날.


건축사진사난간에 페인트칠을 했어?


타일공응. 검정색이었는데 칠이 다 벗겨져서 난간을 붙잡을 때마다 비릿한 쇠 냄새가 났어. 그래서 인부들이 찾아온 거야. 머릿수건을 쓰고 페인트통과 사다리를 번쩍번쩍 옮기는 사람들. 여자 둘, 남자 둘, 그들과 함께 온 꼬마 하나. 나는 페인트칠을 하는 동안 종일 꼬마와 놀았어. 온 마당에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고 해가 질 때쯤 되자, 떠도는 미장이 가족이 집을 나서려고 했어.


건축사진사미장도 했어?


타일공아닐걸. 중학교에 들어가서 미장이라는 직업을 알게 된 후로 나는 그 사람들을 떠도는 미장이 가족이라고 불렀어.


건축사진사그랬는데?


타일공나랑 종일 온 집 안을 어질러놓은 꼬마가 그냥 가려는 거야. 하나도 치우지 않고. 그래서 억울했어. 그래서 울었어. 울면서, 나 혼자 이거 다 치울 수 없다고 소리 질렀어.


건축사진사그때부터 옹졸했구나.


타일공그런데 그 미장이들 중 여자 어른 한 명이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내 눈을 들여다봤어. 그러면서 내 이름을 불렀어. 가만히, 부드럽고도 위엄 있게.


건축사진사네 이름을 그 사람이 어떻게 알아?


타일공그게 미스터리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내 엄마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그 이후로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그 미장이의 얼굴을 떠올렸어.


건축사진사어떻게 생겼어?


타일공눈 코 입이 차지하는 면적보다 얼굴 여백의 면적이 더 넓었어. 베이지색 머릿수건을 쓰고 진분홍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남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어. 지금 보니 언니랑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사이.


건축사진사정말 엄마였을까?


사이.


건축사진사집 난간에 페인트칠한 적 없어.


타일공칠했었어. 초등학교 때.


건축사진사집이 아니라 학교였겠지. 방학 즈음이면 늘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어.


타일공집 난간이었어.


건축사진사고작 집 난간을 칠하는데 페인트공 남녀 두 쌍이 온다고?


타일공창틀도 칠했나 보지. 정말 왔었어.


건축사진사집 난간을 칠하는 날 왜 집에 아무도 없었어? 엄마가 미쳤다고 집에 찾아올 생각을 하겠어? 그러다 할머니한테 들키면?


타일공머릿수건으로 가렸겠지. 궁금하고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걸 거야.


건축사진사말도 안 돼.


긴 사이.


타일공영사관에서는 뭐래?


건축사진사1년쯤 전에 한인마트에서 총격 사건이 한 차례 있었지만 피해자가 신원 미상자여서 신원 미상자 묘지에 묻혔대. 미국 입국 기록만 있고 출국 기록은 없대. 미국 내 불법체류 중인 한인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영사관ID를 발급하고 있는데, 엄마는 그런 것도 발급받지 않았대.


타일공메일 다시 읽어줘.


건축사진사당신의 엄마 이현아 앨리스가 피살되었다. 1월 20일 오전 1시 20분경. 815 S Ardmore Ave suite b, Los Angeles, CA 90005 USA에서. 이것뿐이야.


타일공답장했어?


건축사진사응.


타일공뭐라고?


건축사진사나의 엄마 이름은 이현아가 아니라 이현실이다. 당신의 정보를 믿기 어렵다. 당신은 그와 무슨 관계였나?


타일공뭐래?


건축사진사일주일 넘게 답장이 없어.


타일공메일을 왜 그렇게 늦게 읽은 거야?


건축사진사초등학교 때 만들어놓고 한 번도 안 들어갔던 메일이야.


타일공갑자기 왜 들어갔어? 아예 평생 안 들어갔으면 좋았잖아.


건축사진사싸이월드 부활한다고 해서, 비밀번호 찾다가. 이메일을 연동해놨더라고.


사이.


타일공이게 다 싸이월드 때문이네.


건축사진사싸이월드가 우리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냐? 너는 그 메일 내용을 믿어?


타일공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건축사진사엄마에 대해 알려줄 사람이 정말 없을까?


타일공할머니.


건축사진사할머니가 나보고 엄마라고 불렀어.


타일공가망 없어.


건축사진사이 메일이 진짜라면 1월 20일이 제삿날이네.


타일공제삿날은 죽은 날 전날 아닌가.


건축사진사너 1월 20일에 뭐 했어?


타일공일했겠지. 끝나고 집 왔겠지.


건축사진사새벽 한 시 이십 분에는 뭐 하고 있었어?


타일공집에 있었지, 그냥.


건축사진사너, 나랑 같이 미국 갈래?


사이.


타일공아니. 이제 그만 가줄래.



2막. 네 친구가 누구지?


5. 입국심사



어두운 방.


건축사진사당신은 이 나라에 무슨 일로 왔지?


사이.


건축사진사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사이.


건축사진사무슨 일을 하러 왔지?


사이.


건축사진사친구를 만나러.


사이.


건축사진사네 친구는 어디에 살지?


사이.


건축사진사LA 한인타운.


사이.


건축사진사얼마나 머물 예정이지?


사이.


건축사진사칠일.


사이.


건축사진사일주일 뒤에 예약한 항공 티켓을 보여달라.


사이.


건축사진사네 친구가 누구지?


긴 사이.


건축사진사늑대, 여우, 유령들!1)


1)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배수아 옮김, 한길사, 2018, 223쪽 인용.




6. 사진기


이거포의 집 지하실.
문에서 바닥으로 난 계단을 따라 얇은 철제 난간이 이어진다.
작은 창문 하나 나 있고 창문을 통해 빛이 든다.
밝고 노란 전등이 하나 달려 있다.
마구 쌓인 물건들 위로 먼지가 쌓였다.
건축사진사, 이거포를 따라 계단을 내려간다.
난간을 손으로 쓸어 본다.


이거포화장실 갈 때만 올라오더라고. 하루에 딱 두 번.


건축사진사방광이 꽤나 자유로웠나 보네요.


이거포작은 유령 같았어.


건축사진사키가 작아요?


사이.


이거포작지.


건축사진사이름을 기억하세요?


이거포이현아, 앨리스.


건축사진사이현실이 아니고요?


이거포이현아랬어.


사이.


이거포어느 날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기에 불시검문에 걸린 줄 알았지. 트럼프 당선 후에 불법체류자들이 많이 돌아갔어.


건축사진사, 지하실을 둘러본다.


이거포뭐 가져갈 만한 게 있어요? 현아 씨가 안 들어오니까 여기에 내 짐, 남편 짐, 애들 짐까지 다 쌓아놨어. 뒤죽박죽되어 있어서 뭐가 누구 건지 모르겠네.


건축사진사, 뒤집힌 액자를 하나 발견한다.


이거포남편 거예요.


건축사진사마포아파트네요. 시공 직후.


이거포그래요? 나는 잘 몰라요. 별별 사진이 다 있어요.


건축사진사부군께서 군인이셨어요?


이거포신문사 소속 비행사였어요.


건축사진사아.


이거포항공촬영 때마다 헬기를 몰았죠. 그때는 높은 건물이 없을 때니까. 어디 지방에 속보 낼 일 있어도 몰고. 헬기에 탄 기자에게 부탁해서 늘 사진을 인화해 걸어뒀어요.


건축사진사사진이 더 있어요?


이거포그 안에 봐요.


건축사진사, 상자 속 액자들을 꺼내 본다.


건축사진사한강맨션, 외인 아파트…… 이건 어디 산불 현장인가 봐요.


이거포본인은 비행기를 몰면서도 비행기에 탄 사진사들을 부러워했다니까. 신랑이 찍은 사진들은 유별났어. 뭉개지게, 아주 가까이서, 아니면 내려다보면서 찍었어. 사물의 정체를 알 수가 없게끔.


건축사진사이 사진들 엄청나네요.


이거포이렇게 액자에 끼운 건 다 전문 사진사들이 찍은 거야. 자기가 찍은 사진은 부끄러워했거든.


건축사진사왜 미국에 오셨어요?


이거포역마가 단단히 낀 거지, 늘 비행기 타고 날아다니니까. 자기는 절대 한국에서 못 살겠다고, 땅에 붙어 있는 걸 답답해했어요.


건축사진사언제 오셨는데요?


이거포직장 다니다 애 놓고 왔으니까 80년.


건축사진사직장 다니셨어요?


이거포이화 대학 졸업하고 중앙청 다녔지. 우리 엄마가 계를 잘했거든. 곗돈 모아서 나를 끝까지 공부시켰어. 아버지는 나 공부하는 거 반대했는데 아무튼 끝까지 했어. 결혼을 잘못해서 그렇지. 신랑 인생에 낀 대단한 역마 때문에.


건축사진사신랑이라고 부르시네요.


이거포왜? 이상해요?


건축사진사아뇨. 좋아 보여요.


이거포93년도에 죽었어. 우리가 큰 편의점을 했거든. 아유, 말도 못 했지. 거기 카운터를 보다가 총을 맞았어. 우리 엄마가 결혼도 이민도 그렇게 반대했는데. 신랑한테는 애까지 딸려 있었거든. 부모가 하지 말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건축사진사그러셨어요?


이거포그런데도 나는 그런 남자를 가만히 놔둘 수가 없더라고.


사이.


이거포얼굴과 몸이 긴 남자. 수줍고 괴팍하고 아름다운 남자들. 밥을 먹이고 싶잖아. 그건 끊어낼 수가 없는 거야. 안 그래?


이거포, 건축사진사, 웃는다.


이거포교회 다녀요?


건축사진사아뇨.


이거포여기는 다 교인들이에요. 교회 안 다니면 한인들이 살기가 어려워.


건축사진사저희 엄마도 교회에 다녔어요?


이거포아니.


건축사진사선생님은요?


이거포나도 안 나가. 천천히 둘러봐요.


이거포, 나간다.
건축사진사, 조명 아래에 서서 지하실을 둘러본다.
몇 개의 상자를 끄집어내 열어 본다.
공구들, 농구복, 낡은 옷과 신발들, 사진 앨범, 고장 난 조명이 들어 있다.
건축사진사, 오래되어 해진 부츠를 한 켤레 꺼내 신는다.
낡은 양복을 꺼내 입어 본다.
건축사진사, 커다란 남자 양복을 입고 부츠에 담긴 듯 서 있다.
주머니에 작은 필름 카메라가 하나 있다. 캐논 ql17이다.
부츠를 질질 끌며 벽에 달린 선반으로 다가간다.
선반 위 말라비틀어진 칫솔을 발견한다.
칫솔을 꼼꼼히 살피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다 입 안에 넣어 본다.


선반 위 먼지 쌓인 라디오를 본다.
까치발을 서서 재생 버튼을 누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긴 침묵.


건축사진사,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며 가만히 지하실을 살핀다.
타일공, 나타난다.
지하실의 한구석에 쪼그려 앉는다.
그러고는 벽돌 하나를 조금씩 밀어 넣었다 빼기를 반복한다.
아주 천천히, 반복적으로 움직인다.
건축사진사, 그런 타일공을 보고 있다.
암전.


7. 편지 뭉치


밤, 지하실.
밝고 노란 전등 아래, 영구차 운전사 앉아서 무언가를 수리하고 있다.
건축사진사, 지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
건축사진사, 타일공이 앉아 있던 벽에 가서 벽돌을 밀어 본다.
아무 벽돌도 밀리지 않는다.
건축사진사는 돌아다니며, 이곳에 살았던 엄마의 살아생전 움직임을 상상하며, 쪼그려 앉았을 때 손이 닿는 높이의 벽돌들을 하나씩 밀어 본다.


영구차 운전사뭐 찾아요?


건축사진사모르겠어요. 하지만 중요한 걸 거예요.


영구차 운전사좀 더 일찍 오지 그랬어요.


사이.


건축사진사내가 올지 어떻게 알았어요?


사이.


건축사진사당신이군요.


영구차 운전사뭐가요?


건축사진사당신이 메일을 보냈죠.


영구차 운전사메일이요?


건축사진사우리 엄마가 죽었다고, 메일을 보냈잖아요.


영구차 운전사내가요?


건축사진사봐요. 맞네. 왜 답장 안 했어요?


영구차 운전사나는 메일 보낸 적 없어요.


건축사진사잡아떼지 마요. 당신이 이렇게 썼잖아요!


건축사진사, 핸드폰으로 메일 내용을 보여주려다 멈춘다.


건축사진사아, 잠깐만. 명함 있어요?


영구차 운전사왜요?


건축사진사명함 한 장 줘요. 메일 주소가 같은지 보게.


영구차 운전사시험에 들기 싫어요.


건축사진사봐요. 당신 맞잖아요.


영구차 운전사나는 여기 자주 왔어요. 뭘 수리해야 할 때마다. 이현아 앨리스는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한인마트에서 캐셔로 일했죠. 일요일만 빼고요. 일요일에는 나가서 어디든 돌아다녔어요. 퇴근길에 몇 번 만나 태워다줬지요. 우리는 차를 타고 멀리 나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어요. 연극이나 연주 공연을 보기도 했죠. 거리낌 없이 내 차에 타는 사람은 이현아 씨가 유일했어요. 나는 영구차를 운전하거든요. 이현아 씨가 총에 맞아 죽었을 때, 내 영구차에 태워서 죽은 것만 같아서, 힘들었어요.


건축사진사내 엄마랑 사귀었어요?


영구차 운전사이현아 씨와 나는 친구였습니다. 길게 대화해 본 적은 없지만요.


건축사진사그럼 어디 양지바른 곳에라도 묻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이 고생 하지 않고 자식 된 도리상 묘비에 소주나 부어주고 떠날 수 있었을 거 아녜요.


영구차 운전사왜 그렇게까지 무섭게 말하는 거예요.


건축사진사엄마는 할머니 집에 나와 동생을 버리고 갔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겠어요.


영구차 운전사화장까지 속전속결이었어요. 시체보관소의 전기도 아깝다는 듯이. 코로나 환자들로 영안실이 북적였을 테니 가장 먼저 방을 빼줘야 했겠죠. 한인들은 거리에 나가 시위를 했어요. 하루가 멀게 동양인들이 맞아 죽던 날들이었어요. 경찰은 범인이 잡히지도 않았는데 수사를 종결했어요. 그들에게 이현아 씨의 죽음은 그냥 사고였던 거예요. 이 나라에는 이등 시민의 죽음을 파헤칠 정치적 동기가 완전히 부재해요. 내 어머니는 이현아 씨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몰라요. 아버지 일로 총기사고를 극도로 두려워하시거든요. 이거 지켜줘요.


건축사진사내가 아는 엄마의 이름은 이현실이에요, 이현아가 아니라. 나는 짤막한 메일 한 통 때문에 장장 열두 시간을 날아왔어요. 무급휴가까지 썼다고요. 그런데 이현실은 어디에도 없고 사람들은 전부 이현아 앨리스 이야기를 하네요. 조용하고 자그마한 동양인 여자. 동양인 여자는 미국인들이 보기에 대체로 조용하고 자그마하지 않나요. 그러니 이 말은 누구도 특정하지 않으며 그가 아무도 아니었다는 뜻과 다름없죠. 이현아가 이현실이 아니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지구 어디에선가 핏줄로 이어진 누군가가 죽으면 손톱 거스러미라도 뜯어질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현아 앨리스가 죽었다는 그날 밤에 나 뭐 하고 있었는지 알아요? 엽떡 먹고 있었어요. 배민 기록에 다 남아 있어.


사이.


영구차 운전사엽떡이 뭐예요?


건축사진사됐어요.


벽돌 하나가 밀린다.
건축사진사, 짧은 함성.


영구차 운전사뭐가 있어요?


건축사진사, 벽돌 사이에서 편지 뭉치를 꺼내 보인다.


건축사진사심장이 떨려서 못 열어 보겠어요.


건축사진사, 편지를 연다.


건축사진사나한테 쓴 편지예요. 계속 공부를 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군요. 내가 대학원에 간 것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았지?


영구차 운전사내가 좀 봐도 돼요?


영구차 운전사, 느릿느릿 손을 뻗어 편지 봉투의 뒷면을 본다.


영구차 운전사뉴욕 빙엄턴 대학 기숙사로 부치려다 만 편지들이에요. 우표도 안 붙어 있어요. 뉴욕에 있었어요?


건축사진사나는 오늘 미국에 처음 왔어요.


영구차 운전사빙엄턴 대학 기숙사에 사는 당신에게 보낸 편지인데요.


건축사진사나는 빙엄턴 대학에 다닌 적이 없어요.


영구차 운전사그치만 당신 이름이 적혀 있는데요.


사이.


영구차 운전사벽돌 사이에 편지가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사이.


건축사진사모르겠어요.


사이.


건축사진사정말 모르겠어요.


긴 사이.


건축사진사(기억 속 이미지를 더듬더듬 설명한다) 커다란 창고의 기둥이 썩으면서 무너졌어요. 기둥이 놓인 쪽 벽을 파헤쳐서 벽돌을 다시 쌓아야 했어요. 그 벽에는 회반죽을 칠하는 대신 모르타르를 발랐어요. 엄마는 나와 동생을 십오 분에 한 번씩 창고 안으로 데려갔어요. 그리고 벽돌을 1센티미터씩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어요. 천천히, 신중하게. 엄마는 창고 안에서, 나는 창고 밖에서, 십오 분에 한 번씩, 벽돌을, 1센티미터씩, 열 번씩, 움직였어요. 그렇게 하니 그 벽돌은 모르타르가 다 마른 뒤에도 움직일 수 있게 됐어요.2)


사이.


건축사진사아……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 장화 신은 발이 진흙 속으로 푹푹 빠지고…… 그리고 아주 높은 것.


영구차 운전사높은 것?


건축사진사연기가 나는.


긴 사이.


건축사진사그러니까…….


사이.


건축사진사굴뚝.


2)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2005, 75쪽 참고.



8. 테이프


이거포의 집 거실.
이거포, 새 옷을 입고 나온다.


이거포잘 어울려?


건축사진사멋지신데요.


이거포, 거울에 몸을 비춰 본다.


이거포이 나이에도 이런 거 잘 어울리지? 입고 나갈 데가 없어서 그렇지.


건축사진사식당에라도.


이거포나는 밖에서 밥 안 먹어요. 지하실은 지낼 만해요?


건축사진사겨울에 왔으면 입 돌아갈 뻔했어요.


이거포꼭 내 손녀 같아.


건축사진사손녀가 있으세요?


이거포아니.


건축사진사저희 할머니도 선생님과 연배가 비슷하세요.


이거포건강하셔?


건축사진사저보고 엄마라고 하시던데요. 요양원에 계세요.


이거포저런. 형제는 어떻게 돼요?


건축사진사동생 한 명 있어요.


이거포무슨 일 하는데?


건축사진사저요?


이거포둘 다.


건축사진사저는 친구 카페에서 일을 도와요. 동생은 타일 해요.


이거포남동생?


건축사진사아뇨. 여자예요.


이거포한국은 많이 변했죠?


건축사진사가게들이 들어왔다가 빠지고, 도로를 갈아엎고, 고장 나거나 빈 것을 가만두질 않죠.


이거포중앙청 앞이 어떻게 됐나. 95년도에 부쉈다데.


건축사진사저 그때 태어났는데.


이거포이순신 동상 있지, 나 중앙청 다닐 때 세운 거예요. 아직도 기억이 나. 68년도. 사월이었지. 세종로, 태평로를 완전히 막아서 자가용은 세워두고 버스를 타고 갔어. 미어터졌지. 대통령이 왔다더라고. 동상이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나 뭐라나. 일본으로부터 오는 액운을 막는다나 뭐라나. 책상에 앉아 한참을 일하는데 갑자기 어둑하게 그림자가 지더라고. 고개를 돌리니 눈앞으로 손이 천천히 날아가. 보니까 동상의 손이야. 탄피를 녹여 만들려다가 불순물이 많아서 나중에 다 뺐다데. 선박 해체한 거랑 놋그릇이랑 녹여서 만들었다데. 거대한 손 뒤로 벚꽃이 와르륵 떨어졌어. 나 그렇게 커다란 손은 생전 첨 봤어.


건축사진사신기해요.


이거포전쟁 끝난 지 10년밖에 안 됐을 때예요. 뭐를 좋아해요?


건축사진사네?


이거포뭐를 좋아하냐구.


건축사진사어떤 종류요?


이거포아무거나.


건축사진사먹는 거…… 잘 먹어요.


이거포잘됐네. 나는 먹이는 거 좋아해요.


영구차 운전사, 라디오를 들고 들어온다.


영구차 운전사배터리 고쳤어요.


이거포둘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거야?


건축사진사틀어 봐요.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대화가 재생된다.
음질이 좋지 않아 대화의 내용을 알 수 없다.
정적 속에서 테이프가 한참 돌아간다.
잡음이 흐르다가 소리가 튀며 요란하다.
음악이 2초가량 흐른다.
라디오의 재생 버튼이 딸깍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거포이게 뭐야?


영구차 운전사지하실에서 발견했어요.


이거포그건 나도 안다, 이 녀석아.


건축사진사, 재생 버튼을 다시 누른다.
같은 소리가 흐른다.


건축사진사누가 대화하는 거죠?


이거포, 재생 버튼을 다시 누른다.
대화 소리가 나오는 구간을 몇 번 반복해 듣는다.


이거포한 남자가 여자에게 소리치고 있네. 모국어는 한국어야. 경상도 억양이 섞였네. 경북이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여자가 식탁을 차리는 모양이야.


이거포, 다시 라디오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정적 구간을 듣는다.


이거포들려?


건축사진사아무 소리도요.


이거포, 테이프를 앞으로 감아 정적 구간을 다시 재생한다.


이거포대화가 끝나고 다른 소리. 천장에 달린 커다란 팬이 돌아가고 있네. 그리고 발소리. 두 걸음 정도.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어서 소리를 다 흡수해. 뒤꿈치 닫는 소리가 안 나. 뾰족구두를 신었네. 전형적인 미국식 이층집이지.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2층의 천장에서 팬이 돌아가고 왼쪽이나 오른쪽 문을 열면 응접실로 이어지는 집이야. 그리고 그 뒤에는 음악이 깔려 있어.


사이.


이거포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실황이야.


영구차 운전사와, 엄마!


이거포네 아빠 죽고 내가 경비견이 되다시피 했잖니. 아들아, 침묵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단다. 네가 데이트를 하고 싶다면 더더욱.


9. 수첩


지하실 조명 아래 테이블에 라디오, 편지 뭉치, 낡은 사진기, 수첩이 놓여 있다.
건축사진사, 수첩에 쓰인 말을 읽는다.


건축사진사밤나무, 복숭아나무 숲, 소리, 파도, 일출, 장미, 동물원, 완자무늬, 당나귀.


사이.


건축사진사밤나무, 복숭아나무 숲, 소리, 파도, 일출, 장미, 동물원, 완자무늬, 당나귀? 시라도 쓴 건지.


사이.


건축사진사뉴욕 빙엄턴 대학교, 굴뚝, 미국식 이층집의 침묵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실황이 녹음된 테이프,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쓰인 수첩…… <런닝맨>에 나오는 개그맨이 된 기분이네요. 아님 끝나지 않는 방 탈출 게임 중이거나.


영구차 운전사굴뚝은 당신 기억 속에 있죠.


건축사진사네.


영구차 운전사그럼 한국에 있는 곳일 테죠. 굴뚝을 맨 앞에 둡시다. 그리고 이 테이프는 미국에서 녹음된 거죠.


건축사진사네.


영구차 운전사그리고 빙엄턴 대학에 다니는 당신에게 쓴 편지.


건축사진사다시 말하지만 나 빙엄턴 대학 다닌 적 없어요. 유학 갈 돈도 없고요, 집세 낼 돈도 없어요.


영구차 운전사대체 뭘까요?


건축사진사엄마가 이 편지를 보내려고 했던 기숙사 건물은 재작년에 신축됐어요. 공부를 더 하게 됐다고 말하는 걸 보니 수신인은 대학원생이나 연구원일 거예요. 혹시 몰라 학술지 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해 봤는데 빙엄턴 대학에 소속된 연구자들 중에 한국 이름을 쓴 사람을 몇 명 발견했어요. 지리학, 고생물학, 신소재공학, 영문학, 교육학, 한미외교관계…….
물론 이 편지들의 수신자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엄마의 망상이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요.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내 이름으로 불렀거나, 망상 속 인물이거나, 아님 동명이인이겠죠.
아무튼 엄마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편지까지 썼다는 데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래서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자면 이렇게 돼요. 한국의 한 굴뚝, 미국에 온 뒤에 녹음한 테이프, 재작년에 쓴 편지 뭉치. 그리고 이 사이 어딘가에 수첩이 있겠죠.


영구차 운전사빙엄턴 대학은 유대인 재학생 비율이 높다네요. 유대인 전용 식당이 따로 있을 정도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게이와 유대인의 디바이고요. 어쨌든 백인들한테는 미움을 받아요.


건축사진사모든 게 계시인 것 같네. 지금 저 문이 저런 각도로 열려 있는 것까지도. 모든 것을 다 기억해야 할 것만 같아요. 어제의 지하실과 오늘의 지하실이 미묘하게 다른 것 같아요. 사물들이 정렬된 순서를 외워야 할 것만 같아요. 접어도 끝이 없는 지도처럼 세계가 평평하게 펼쳐진 것 같아요. 규칙도 반복도 조직된 패턴도 없이 오직 나열만 되는 암기하기 어려운 시구처럼. 지구 평평설을 믿는 사람들이 이제야 이해가 되네.


영구차 운전사어떤 사람이 처음 가 보는 도시에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어요. 이 사람을 에이라고 하죠. 만나기로 한 사람이 공항에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죠. 이 사람을 비라고 할게요. 에이는 게이트 앞에 서서 한참을 기다립니다. 같은 항공편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그다음 항공편에서 내린 사람들까지 다 사라졌는데도 비는 나타나지 않아요. 공항 직원이 다가옵니다. 비가 죽었다는 거예요. 에이가 도착하기 일곱 시간 전에. 시계를 보니 목요일 오전 여덟 시예요. 에이는 목요일 오전 네 시 비행기를 타고 열두 시간 비행했지만 고작 네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죠. 에이는 목요일 오전 여덟 시부터 여덟 시간을 다시 한번 더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그러자 에이는 어딘가에 비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에이가 도착하기 일곱 시간 전에 비가 죽었다면, 적어도 에이가 다시 한번 살게 될 여덟 시간 안에서 비는 한 시간가량 더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에이는 이런 궤변을 떠올리고는 웃습니다. 그러나 이윽고 굳게 믿게 돼요. 어쩌면 시간은 무수하게 다른 경로로 흐르고, 자기의 시간 속에서는 비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에이는 그 한 시간을 비를 찾는 데 온전히 쓰기로 합니다.


사이.


영구차 운전사영구차 운전사들 사이에 떠도는 괴담이에요.


건축사진사이 이야기가 갖춘 괴담의 조건이 뭔지 알아요? 에이가 이코노미석에서 열두 시간을 비행했다는 거예요. 에이의 허리와 피부와 입 냄새에 애도를. 인천에서 LA까지 꼬박 열두 시간 걸리거든요. 우리 집에서 인천은 세 시간 걸리고. 게다가 나는 불면증에다 멀미가 심하고요.


영구차 운전사얼굴 좋아 보여요.


건축사진사당신 어머니가 하도 맛있는 걸 많이 주셔서요. 나 지금 오십 시간째 못 자고 있어요. 모든 게 가상현실 같아요.


영구차 운전사생각해 봐요. 에이는 비를 찾기 위해 어디부터 갈까요? 에이에게 주어진 지표는 비가 묵는 호텔, 비의 묘지, 비의 장례식장, 공항이에요.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들.


건축사진사비의 묘지.


영구차 운전사왜죠?


건축사진사영구차 운전사들 사이에 떠도는 괴담이니까. 이 괴담에는 묘지에 관짝을 실어 옮겼는데 웬 이방인이 찾아와 사실 그 사람은 죽지 않았다고 말하는 상황이 전제된 거예요. 산 자처럼 귀환할 죽은 자에 대한 집단적 공포가 반영된 거죠.


영구차 운전사그렇다면 에이는 비가 어디에 묻혔는지 어떻게 알죠?


건축사진사비의 장례식장에 물어봐야겠죠.


영구차 운전사이현아 앨리스는 장례를 치르지 않았죠.


사이.


건축사진사그럼 그전으로. 비가 죽은 곳.


사이.


건축사진사한인마트.


영구차 운전사갑시다.


건축사진사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죠?


영구차 운전사알아야 하니까요.


건축사진사뭐를요?


영구차 운전사내 친구 이현아 앨리스 혹은 당신 엄마 이현실이 누구였는지를.


건축사진사매일 단백질 셰이크를 먹으면 당신처럼 광활한 인류애가 생기나요?


영구차 운전사나는 그 사람의 친구였어요.


건축사진사나는 그 사람에게 버려진 아이였고요.



3막. 메신저


10. 한인마트 사장


천장이 높고 텅 빈 상점.
바닥과 천장, 벽면에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가운데에는 흰 천을 덮은 소파 하나, 그 옆으로 페인트통과 붓들이 널려 있다.
한인마트 사장, 소파 위에 누워 쪽잠을 자고 있다.
천장에서 물이 새는지 바닥에 유리병 몇 개를 늘어놓았다.
유리병으로 물이 똑똑 떨어진다.
건축사진사, 상점의 문을 두드린다.
한인마트 사장, 듣지 못한다.
건축사진사, 다시 문을 두드린다.
한인마트 사장, 소파 아래에 둔 총을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문을 연다.


건축사진사여기 마트 아니에요?


건축사진사, 한인마트 안을 들여다본다.


건축사진사언제 문 닫았어요?


한인마트 사장요즘 문 안 닫는 가게가 있나.


한인마트 사장, 문을 닫으려 한다.
건축사진사, 문을 붙잡는다.


건축사진사왜 문 닫았어요?


한인마트 사장몰라서 물어요?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둬요.


건축사진사네?


한인마트 사장경찰에서 보냈어요? 분명히 말했을 텐데. 불법체류자인지 몰랐다고. 돈이 급해 보여서 바로 일을 시킨 것 뿐예요.


건축사진사돈이 급해 보였어요?


한인마트 사장활동가예요? 오, 그러면 또 당신에게 맞는 답을 해줄게요. CCTV 안 달았어요. 그럴 돈 없어서요. 누가 죽였는지 나도 몰라요.


건축사진사좀 들어가도 돼요?


한인마트 사장아니요.


건축사진사뭘 하고 계셨죠?


한인마트 사장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어요.


건축사진사, 한인마트 사장을 밀치고 상점 안으로 들어간다.


건축사진사좋네요. 볕도 잘 들고.


한인마트 사장가게 내놓을지 알고 온 거예요?


건축사진사그런가.


한인마트 사장누구세요?


건축사진사이 소파는 뭐예요?


한인마트 사장페인트칠하다가 쉬려고 갖다 놨어요. 허리디스크 때문에.


건축사진사원래 마트였다던데.


한인마트 사장그랬죠.


건축사진사계산대가 어디쯤이었어요?


한인마트 사장나가주세요.


건축사진사계산대가 어디였냐고요.


한인마트 사장, 슬금슬금 걸어가 허공에 손짓을 하며 설명한다.


한인마트 사장여기가 계산대였어요.


건축사진사그리고요?


한인마트 사장이 뒤로 담배 좌판이 있었고요. 카운터 밑으로는 사탕이나 젤리, 초콜릿을 진열해놨어요.


건축사진사이현아 앨리스는 어디쯤에서 죽었죠?


사이.


한인마트 사장이현아 앨리스요?


건축사진사이 마트에서 일하다 피살당한 한국인 캐셔요.


한인마트 사장그분 성함은 이현경이에요.


긴 사이.


건축사진사친했어요?


한인마트 사장평범한 노사 관계였죠.


건축사진사여기서 얼마나 일했어요?


한인마트 사장3년 정도.


건축사진사어떤 사람이었어요?


한인마트 사장조용했어요. 조용하고 성실했죠.


건축사진사그뿐이에요?


한인마트 사장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었어요.


건축사진사뭐 특이한 거나…… 없었어요? 쉴 때는 어떻게 쉬었어요?


한인마트 사장쉴 때요?


건축사진사네. 손님 없을 때는 뭘 했어요? 핸드폰을 했어요? 책을 읽었어요? 라디오를 들었어요?


한인마트 사장오. 글쎄요.


건축사진사3년이나 일했다면서요.


한인마트 사장끊임없이 일했어요. 잘 정렬된 물건들을 다시 빼내어 쌓고 칠이 벗겨진 곳을 손보고 뭔가를 빨고 수선하고 기록했어요. 과일을 하도 다시 정리해서, 멍든다고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지난번에 연락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에요?


건축사진사이현경 씨는 팔다리가 긴 편이었나요?


한인마트 사장왜 이러세요.


건축사진사옷 입는 스타일은 어땠어요? 패션 감각이 있어 보였나요? 음악적 재능은 어땠어요? 아, 손가락 생김새는요? 상체가 발달했어요 하체가 발달했어요? 지병은요? 아, 이거 중요하지. 피부나 머리숱은 괜찮았고요?


한인마트 사장유전의학과 의사예요? 아님 소아과?


건축사진사아뇨. 나는 여기에서 죽은 이현실 혹은 이현아 혹은 이현경의 딸인 것 같아요.


한인마트 사장, 건축사진사 앞에 무릎을 꿇는다.


건축사진사저한테 왜 이러세요. 일어나세요.


긴 사이.


건축사진사네? 일어나세요.


한인마트 사장의심되는 사람이 있어요.


사이.


한인마트 사장이현경 씨가 죽고 가게 앞에서 한인들이 시위를 했어요. 꽃이 놓였어요. 나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혼자 마트에 앉아 밤을 새웠어요. 그 사람이 나타나서는 사람들이 놓고 간 꽃을 밟고 침을 뱉었어요. 오른쪽 팔뚝 뒤에 나치 문양 문신을 새겼어요.


건축사진사경찰에 말씀하셨어요?


한인마트 사장바보같이 누가 경찰에 그런 말을 해요.


사이.


한인마트 사장그런데 그 바보 같은 짓을 내가 해 봤어요. 나치 문양과 절 문양도 구분 못 하냐고 하던데요. 중국에는 절이 많아서 그러냐면서, 고 백 투 더 차이나, 라면서. 그 사람, 마트 주변에 나타나 곧잘 서성여요.


11. 그들은 너를 혐오한다.


건축사진사 앞으로 이어폰을 낀 건장한 백인 남자가 지나간다.
Neil Young, <Rockin’ In The Free World> 3) 이어폰 바깥으로 흘러나온다.
그는 음악에 맞춰 노래하며 몸을 까딱이며 건축사진사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3) 2020년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캠프에서 선거 유세를 위해 사용한 곡. 이후 닐 영은 트럼프 대선 후보의 선거캠프를 고소했다.



백인 남자I see a woman in the night
With a baby in her hand
Under an old street light
Near a garbage can
Now she puts the kid away, and she’s gone to get a hit She hates her life, and what she’s done to it
There’s one more kid that will never go to school
Never get to fall in love, never get to be cool.
Keep on rockin’ in the free world,
Keep on rockin’ in the free world,
Keep on rockin’ in the free world,
Keep on rockin’ in the free world.
We got a thousand points of light
For the homeless man
We got a kinder, gentler,
Machine gun hand
We got department stores and toilet paper
Got styrofoam boxes for the ozone layer
Got a man of the people, says keep hope alive
Got fuel to burn, got roads to drive.
Keep on rockin’ in the free world,
Keep on rockin’ in the free world,
Keep on rockin’ in the free world,
Keep on rockin’ in the free world.


사이.


백인 남자Hi. I’ve seen you.


사이.


백인 남자Didn’t you die?


12. 간병인


간병인이 일하는 집의 침실.
침대 위에 누군가 잠들어 있다.
간병인은 잠든 사람을 의식하며 조용히 말한다.
건축사진사, 간병인 어깨 너머로 웅크린 채 자고 있는 이불에 덮인 몸을 흘긋거린다.


간병인노인을 겨우 재웠어. 예전에는 성격이 고약했는데 오랜만에 만나니 그마저도 많이 죽었어. 새하얀 아기 같아. 이 집에서 다시 일하게 된 건 행운이지만 눈치가 보여. 나도 이제 늙었고. 집주인들은 한국이나 멕시코 가정부를 그리 선호하지 않아. 필리핀 여자들을 제일로 쳐. 붙임성 좋고 빠릿빠릿하다면서. 인도네시아 여자들은 참을성과 봉사심이 좋다고 하고. 버마 여자들은 종종 느리다고 타박을 받는데도 기꺼이 노인들의 비위를 맞추거든. 스리랑카, 에티오피아, 필리핀 사람들 때문에 한국인이나 멕시코 가정부는 고가 인력이 되어버렸어.4)


건축사진사선생님이 저희 엄마를 제일 먼저 발견하셨다고.


간병인그거 좋은 차야. 마셔.


건축사진사, 차를 마신다.


건축사진사어떻게 죽었죠?


간병인, 오려진 신문 한 조각을 건넨다.


건축사진사(읽으며) 숲속에서 술을 마신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아내와 친구들은 실종신고를 했고 수색대가 꾸려졌다. 수색대원들이 애타게 실종자의 이름을 부르자 수색대에 있던 한 사람이 “저 여기 있는데요.”라고 대답했다……5) 저도 가끔 통화하면서 핸드폰을 찾아 헤매요.


간병인아니 그 뒷면의 사진을 보라고.


건축사진사아.


사이.


건축사진사현장 사진이네요. 잘 안 보여요.


간병인모자이크 처리돼서 그래. 야. 한 귀퉁이에 아주 작게 보도됐지. 전혀 그럴 일이 아닌데도.


건축사진사, 흑백으로 인쇄된 저해상도 사진을 들여다본다.


간병인내가 네 엄마를 발견했을 때는 죽은 지 네 시간이 지난 뒤였어.


사이.


간병인네 시간 동안 아무도 마트에 들르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 사람들은 분명히 총소리를 들었던 거야. 그래서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거야. 자기도 총에 맞을까 봐. 네 엄마는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의 주목과 침묵 속에서 네 시간 동안 차가운 타일 바닥에 방치되어 있었어.


4) 엘리나 펜티넨, 아니타 킨실레토, 『젠더와 모빌리티』, 최성희 옮김, 부산대학교 출판문화원, 2017, 70쪽 참고.
5) BBC, <터키: 실종자 수색 돕던 터키 남성, 이름 듣고 나서야 “저 여기 있는데……”> 참고.
http://naver.me/xfxSlBNY



간병인, 건축사진사의 안색을 살핀다.


건축사진사더 말씀해주세요.


간병인입구까지 피가 흥건했어. 사과 몇 알이 굴러다녔고 좌판이 1미터가량 밀려 있었어. 경찰이 왔고 테이프가 둘러쳐졌고 구급차가 시신을 실어 갔어. 나는 길가에 서서, 경찰차에서 떨어진 휘발유가 웅덩이 위에 만든 무지개색 기름띠의 흔들림을 바라보고 있었지. 웅덩이에 밤거리가 거꾸로 비쳤어. 골목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어. 경찰 테이프를 넘어 마트에 들어갔어. 너도나도 물건을 훔쳤어. 그 모습을 그냥 보고 있었어. 신라면을 품에 안고 뛰어가는 사람들을.


사이.


간병인원래대로라면 그날 내가 일했어야 했어. 손주들 학교에서 캠핑이 있었어. 운전해서 데려다줘야 했어. 나를 대신해 네 엄마가 출근했어.


사이.


간병인내 손주들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았다고.


건축사진사언제부터 엄마를 아셨어요?


간병인2002년도.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리던 해라 기억이 나.


건축사진사어떻게 아셨죠?


간병인내가 일하던 가게로 매일 장을 보러 왔지. 보모로 일하고 있었거든.


건축사진사언제까지 일했어요?


간병인2010년도. 생각해 보니 그해에도 월드컵이 있었네. 결과는 처참했지만.


건축사진사왜 그만뒀죠?


간병인그 집 부모가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어. 네 엄마가 그 집 딸과 각별했거든. 친모의 질투를 부추겼지. 처음 보모 일을 시작하는 여자들은 집주인의 아이를 자기 자식같이 헌신적으로 키우는 것을 제일의 미덕이라고 생각해. 그거 조심해야 돼. 까딱하면 애를 사랑하게 되고 그 애가 머무는 따뜻한 침실이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게 되거든.


건축사진사엄마가 그랬어요?


간병인그 집 딸을 데리고 사라졌어.


건축사진사얼마나요?


간병인네 시간. 부모가 실종 신고를 했어.


건축사진사그동안 뭘 했죠?


간병인나도 몰라. 그 집 부모가 캐물었는데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 그래서 쫓겨난 거야. 마트에 갔다고 거짓말이라도 하지. 보모들은 낮에 가끔 땡땡이를 치거든. 애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으니 애들을 데리고 몰래 친구를 만나고 남자도 만나고 그래.


건축사진사쫓겨난 다음에는 뭘 했어요?


간병인일을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 나를 찾아왔어. 하루 재워달라고 해서 우리 집에 데려갔지. 며칠 못 잔 사람처럼 깊이 잠들었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양말을 던졌어. 머리맡에 양말을 벗어놓으면 악몽을 꾼다면서. 그리고 다음 날 평소처럼 조용히 인사하고 나갔지.


건축사진사무슨 꿈을 꿨다고 했어요?


간병인그런 것도 다 기억하면 내가 여기 앉아 있게? 저기 백악관 가 있지.


건축사진사그리고요?


간병인그 뒤로는 만날 일이 없었어. 그러다가 한인마트에 면접 보러 가서 다시 만난 거야. 거의 20년 만에.


건축사진사한국에서 낳은 아이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나요?


사이.


간병인아니.


사이.


간병인한국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했어.


건축사진사왜요?


간병인여기 온 여자들은 그래. 결혼에 실패하고 가족에게 미움을 받은 여자들.


건축사진사선생님은 왜 이곳에 오셨어요?


간병인나도 그런 사람이지 뭐.


건축사진사한국에서 뭘 하셨어요?


간병인장사.


사이.


간병인피엑스 물품을 시장에다 내다 팔았어. 남대문 지하상가, 부산 국제시장, 대구 교동시장, 대전 양키시장…… 지금도 있나?


건축사진사대전 양키시장은 처음 들어 봐요.


간병인외제 물건을 단속하던 시절이어서 가방을 두 개 들고 다니면서 바꿔 메고 그랬어. 그때 만난 미군 따라와서 보니 가정이 있는 남자더라고. 성정이 나약해서 나를 떼놓지 못한 거야. 그냥 혼자 살았어. 돌아갈 수가 없었어. 외국인이랑 결혼한다고 아버지가 나를 안 보려 했어. 혼자 살다 보니 남자는 필요할 것 같아서 한 명 붙잡고 의지하고 살았어. 한국 사람들 상대로 침놓고 뜸 떠주는 침술사였는데 잘못해서 환자 한 명이 실명됐어. 다음 날 보니까 짐 싸갖고 도망갔더라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찾으러 다녔어. 피해보상 하느라 일을 많이 했어. 혼자 애 키우고 손주 키우고…… 지겨운 이야기지. 이래서 나이 들면 어떻게 살았는지 말을 하면 안 돼. 봐, 이렇게 젊은이의 유감스러운 표정을 마주하게 되잖아. 내 나이 여자들 팔자는 대체로 젊었을 때 잘못 만난 남자들 때문에 꼬이는 거야. 차 마셔. 그거 좋아.


간병인, 가방에서 비닐에 싸인 옷을 꺼낸다.


간병인죽던 날 입었던 옷이야.


건축사진사, 옷을 받아 든다.


간병인쑥대밭이 된 마트 창고에 이 옷이 걸려 있더라고. 네 엄마는 유니폼을 입고 죽었어.


건축사진사제 생김새가 엄마와 닮았나요?


간병인, 건축사진사의 얼굴을 뜯어본다.


간병인미안하구나.


건축사진사뭐가요?


간병인그냥. 말버릇이야.


건축사진사의 귓가에 Neil Young, <Rockin’ In The Free World>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13. 옷


타일공, 타일을 시공하고 있다.


건축사진사, 옷을 벗는다. 거울에 자신의 나체를 비춰 본다.
가정부에게 받은 엄마의 옷을 입는다.
몸에 비해 옷이 작다.
옷을 다 입고 거울에 몸을 비춰 보고는 지하실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간다.
영구차 운전사, 다급하게 들어온다.
건축사진사를 찾아서 그가 나간 곳으로 쫓아간다.
건축사진사, 엄마의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 벽 뒤로 숨는다.
전화벨이 울린다.


건축사진사(간병인에게 받은 기사 사진을 들여다보며 속삭인다) 곧 돌아갈게. 곧 돌아갈 거야. 엄마는 끔찍하게 죽었어. 도대체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어떤 한국말도 찾을 수가 없어. 언제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곧 돌아갈 거야. 조금만 있다가. 돌아갈 거야. 몸조심하고.


건축사진사, 전화를 끊는다. 다시 지하실로 돌아간다. 옷을 갈아입는다.


건축사진사나랑 이름이 같은 사람을 알게 됐어. 뉴욕의 빙엄턴 대학에서 식물화석을 연구하는 사람이야. 엄마가 이 사람 집의 보모였대. 엄마가 이 사람을 키웠대! 너랑 나 대신 이 사람을 키운 거야. 우리의 삶이 시궁창에 처박혀 있었을 때, 학교에 준비물을 가져가지 못하고 선생이 우리에게만 벌을 주고 속옷과 양말을 빨아 가지 못했을 때, 해 질 녘 운동장에 혼자만 남아 손등이 쩍쩍 갈라질 때, 그때 엄마는 이 사람의 머리를 빗겨주고 로션을 발라주고 손바닥만 한 팬티에 생리대를 붙여주고 심지어 그리워하면서 편지까지 썼던 거야. 접근금지 명령까지 받은 거야!


건축사진사, 지하실 불빛 아래 앉아 형광등이 내는 지이잉 소리를 듣는다.
라디오의 소리를 계속해서 재생한다.


건축사진사있잖아, 엄마가 이상한 사람이었으면 어떡하지. 엄마가 질 나쁜 사람이었으면 어떡하지. 엄마가 남자 없이는 못 사는 여자였으면 어떡하지.


타일공, 묵묵히 타일을 자르고 붙인다.
타일공, 나간다.
영구차 운전사, 들어온다.


영구차 운전사엄마가 쓰러졌어요.


사이.


건축사진사구급차.


영구차 운전사코로나 환자 아니면 안 된대요.


건축사진사병원까지 얼마나 걸려요?


영구차 운전사차로 삼십 분.


사이.


영구차 운전사영구차에 실을 수는 없어요.


건축사진사내가 같이 탈게요.


14. 복도


병원.
건축사진사, 앉아 있다.
영구차 운전사, 들어온다.


건축사진사뭐래요?


영구차 운전사색전 때문이래요. 뇌졸중일 수도 있대요.


건축사진사, 영구차 운전사의 등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한인마트 사장, 누군가에게 맞아 잔뜩 망가진 얼굴로 들어온다.


한인마트 사장당신이 병원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건축사진사누가 그래요?


한인마트 사장옆집 사람들이.


건축사진사틀렸어요. 나 여기 없어요.


영구차 운전사왜 그렇게 무섭게 얘기하는 거예요.


건축사진사얼굴은 왜 그러세요?


한인마트 사장범인을 잡은 것 같아요.


사이.


한인마트 사장그자가 학교로 들어가더군요. 냅다 뒤에서 덤볐어요. 보다시피 나는 한주먹 거리였고요. 덕분에 지문을 충분히 얻었죠. 곧 감식 결과가 나올 거예요.


사이.


한인마트 사장이 이야기를 해주려고 왔어요.


한인마트 사장, 나가려 한다.


건축사진사저기요.


한인마트 사장, 돌아본다.


건축사진사고맙습니다.


한인마트 사장, 나간다.


영구차 운전사범인이 잡히면…… 어떻게 할 거예요?


건축사진사변호사를 선임해야죠.


사이.


영구차 운전사엄마는 아버지가 죽던 날에 나와 동생이 집에 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은 아니에요.


사이.


영구차 운전사동생과 놀고 있는데 한 히스패닉 남자가 다가왔어요. 한참 같이 축구를 했어요. 해가 질 때쯤 되자 우리에게 집이 어디냐고, 집에 부모님이 계시냐고 물었어요. 우리는 부모님이 마트에 있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길을 안내하라고 했어요. 다리를 마구 떨었어요. 우리는 왜 다리를 떠냐고 물었어요. 자기는 긴장하면 다리를 떤다고 했어요. 자기 형이 죽었다고 했어요. “모든 죽음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러고는 침묵. “미안하구나.” 동생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냥 집에 가자고 귓속말을 했어요. 나는 동생의 손을 억지로 쥐고 그 사람을 계속 따라갔어요. 막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때, 내가 손을 들어 마트를 가리켰어요. 저기가 우리 가게예요. 그 사람 빨리 걷기 시작했어요. 뛰기 시작했어요. 마트에서 손님 한 명이 나오면서 우리에게 눈인사를 했어요. 그 사람이 마트에 들어가 총을 꺼내 들었어요. 문이 열린 틈으로 상자를 든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어요. 우리는 마트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엄마는 그때 지하실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고요. 총성이 울렸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돌아 뛰었어요.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어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엄마의 부탁을 받고 옆집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어요. 텔레비전에 그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나왔어요. (사이) 동생은 일찌감치 집을 떠났고 어머니는 집 밖에 나가지 않았죠. 지금도 가끔 그 사람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요. 그 사람과 같은 이름과 닉네임을 가진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블로그에 글과 사진을 올려요. 그걸 읽어요.


긴 사이.


건축사진사눈 좀 붙이세요.


영구차 운전사, 몸을 접어 병원 의자에 모로 눕는다.
건축사진사, 그를 바라본다.


15. 굴뚝


허름한 창고.
창문이 끼워져 있지 않다.
폐창고 같기도 하고 아직 시공 중인 집 같기도 하다.
천장의 회칠이 벗겨져 뚝뚝 떨어진다.
타일공의 발밑으로 잘게 부서진 회반죽들이 깔려 있고 사다리가 벽에 기대어 서 있다.
창고의 한가운데 작업복 차림의 타일공 서 있다.


타일공같이 일하는 외벽도장공 아저씨가 있어. 그 아저씨는 전국을 돌면서 아파트 외벽과 굴뚝에 글씨를 썼대. 제일 많이 쓴 글자는‘목욕탕.’ 그때는 지금 같지 않게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 굴뚝에 올라가면 하늘과 구름밖에 보이지 않았대. 아파트 외벽에 커다란 이응을 그릴 때는 중앙에 못을 박고 낚싯대 끝에 매직을 달아서 컴퍼스처럼 돌렸대. 지금 아저씨는 지하에서 일해. 신축 아파트들은 글자 디자인이 다 정해져 있고, 높은 굴뚝은 더 이상 지어지지 않잖아. 나는 이곳에서 욕실 타일을 시공해. 아저씨는 지하 주차장 바닥과 벽과 기둥에 숫자를 그려. 아저씨에게 언니가 그린 굴뚝 그림을 보여줬어. 언니 기억 속의 커다란 원통형 굴뚝은 다량의 연기가 빠져나가는 소각장이나 공장에 있는 굴뚝이래. 흙 위에 벽돌로 지어진 창고가 있는 거로 봐서 서울은 아닌 것 같대. 제조 및 공정과 재료 보관을 겸하는 중부 내륙지방의 한 경공업 공장일 거라더라. 엄마가 그 공장에 다녔을까……?6)


6) 강예린, 윤민구, 전가경, 정재완, 『아파트 글자』, 사월의눈, 2017, 74〜78쪽 참고.




4막. 화석들


16.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 숲


뉴욕.
흙이 파헤쳐진 넓은 공터에 펜스가 둘러 있고 주위로 학생들이 모여 서 있다.


식물화석 연구자2012년, 사암 채석장이었던 이곳에서 나무뿌리 화석이 발견되었습니다. 식물계의 공룡 발자국과 같은 발견이었습니다. 영국의 카이프 대학과 뉴욕 주립박물관, 그리고 우리 대학 연구소로 이루어진 공동 연구팀은 연구에 착수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 숲 지도를 그릴 수 있었죠. 약 3억 8천만 년 전, 이곳은 울창한 숲이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까지 3천 제곱미터나 이어졌죠. 우리는 이 화석들로부터 세 가지 종류의 수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르케오프테리스입니다. 소나무처럼 생겼지만 솔잎이 아닌 종려나무나 양치식물처럼 갈라진 잎을 늘어뜨린 특이한 모습이죠. 포로짐노스펌스는 아르케오프테리스를 감고 기어 올라가며 살았던 지름이 15센티미터나 되는 덩굴식물입니다. 이쪽을 보시죠. 클라독시롭시드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높이는 10미터가량 되었으며 몸통 아랫부분은 부풀어 오른 모양이었고 꼬챙이 모양의 짧은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부채처럼 뻗어 있었습니다. 석송류의 화석도 발견되었죠. 이 식물은 훗날 석탄기에 지구를 지배하게 됩니다.
초기 고생물학자들은 이곳 숲이 습지였을 거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나무뿌리 화석의 발견은 숲이 바닷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죠. 해안 부근 평지에 형성된 숲에 다량의 모래가 퇴적되었고 그것이 숲의 바닥을 덮으면서 화석이 보존된 겁니다.7)


건축사진사, 손을 든다.
식물화석 연구자, 고개를 끄덕인다.


건축사진사어떻게 세계 최초의 숲이 뉴욕에 있나요?


식물화석 연구자질문인가요?


건축사진사뉴욕에는 센트럴파크도 있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있고 자유의 여신상도 있고 타임스퀘어도 있는데 왜 세계 최초의 숲까지 있죠?


식물화석 연구자그게 질문인가요?


건축사진사네.


식물화석 연구자이곳에 펼쳐져 있었던 숲이 세계 최초의 숲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들 중에 최초인 거죠.


건축사진사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더 오래된 화석 숲이 발견되면요?


식물화석 연구자지구 역사의 재조정이 불가피하겠죠.


건축사진사어떻게 재조정되죠?


식물화석 연구자고생물학자들은 공룡의 출현 시기를 숲의 등장을 기준으로 측정했습니다. 최초의 숲이 등장한 지 1억 5천만 년이 지난 뒤인 약 2억 5천만 년 전에 공룡이 출현했다고 보았죠. 하지만 최초의 숲이 형성된 시기가 앞당겨질 경우 공룡이 출현한 시기의 조정 또한 불가피합니다.8) 학생은 이름이 어떻게 되죠?


건축사진사선생님 성함과 같아요.


식물화석 연구자원래 이 수업을 들었나요?


건축사진사아뇨.


식물화석 연구자어디에서 오셨죠?


건축사진사집에서요.


식물화석 연구자저는 이번 주 임시 강사입니다.


건축사진사알고 있어요.


식물화석 연구자흔한 성에 흔한 이름이죠.


건축사진사아뇨. 한국 이름 말이에요.


식물화석 연구자제 한국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건축사진사선생님께서는 선생님과 이름이 같은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세요?


식물화석 연구자오늘 이렇게 만나 뵈었잖아요.


건축사진사오늘 만나기 전까지는 모르셨나요?


식물화석 연구자그럼요.


건축사진사그런데 만나 본 적 없는 숲이 존재했다고 어떻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죠?


7) 이강봉, <가장 오래된 숲, 미국에서 발견>, 2019. 2. 20, The Science Times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a%b0%80%ec%9e%a5-%ec%98%a4%eb%9e%98%eb%90%9c-%ec%88%b2-%eb%af%b8%ea%b5%ad%ec%97%90%ec%84%9c-%eb%b0%9c%ea%b2%ac/
참고 및 인용.
8) 위의 글.



건축사진사그런데 만나 본 적 없는 숲이 존재했다고 어떻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죠?


식물화석 연구자, 웃는다.


식물화석 연구자긴 세월 보존된 화석이 우리에게 말을 걸잖아요?


건축사진사우리가 관계 맺는 건 화석이지 수목이 아니잖아요.


식물화석 연구자화석이 숲의 표식이죠. 화석은 우리가 나기 전의 세계를 추측하고 사유할 수 있게 해줍니다.


건축사진사겪지 않은 것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식물화석 연구자실례지만 수업 마칠 시간이 다 됐네요.


건축사진사존재는 사유됨으로써 드러나는 것일 텐데, 인간이 나기 전에 존재했던 것들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사유할 수 있죠? 내가 관계 맺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사유할 수 있죠?


식물화석 연구자우리 같은 사람들은 수를 다루죠. 수는 경험과 시간을 초월합니다.


건축사진사만약 모두가 정확한 수학적 추론을 한다면 사유의 결과는 동일하겠네요. 바꿔 말해, 동일한 추론 도구를 사용하면 도달하는 결과 또한 같습니까?


사이.


식물화석 연구자오늘은 이 정도로 마치죠. 다음 시간에는 온실에서 이곳에 있었던 거대한 수목들의 앙증맞은 후손들을 살펴볼 겁니다.


학생들, 흩어진다.


식물화석 연구자누구시죠?


긴 사이.


건축사진사이현실 혹은 이현경 혹은 이현아 앨리스를 아세요?


식물화석 연구자글쎄요.


사이.


식물화석 연구자중학교 때 같은 반에 이현아라는 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누구신데요?


사이.


건축사진사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식물화석 연구자저는 그 애를 잘 알지 못했는데요.


건축사진사마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요.


17. 대리자


식물화석 연구자의 집.


식물화석 연구자편하게 계세요.


식물화석 연구자, 건축사진사에게 차를 가져다준다.


건축사진사고맙습니다.


식물화석 연구자중학교 때 앨범이 있을 텐데…….


식물화석 연구자, 앨범을 꺼내 넘긴다.


식물화석 연구자여기 있다. 얘예요.


건축사진사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깊어 보이네요.


식물화석 연구자조용하고 자그마한 애였어요. 학교 행사에서 연극을 한 적이 있는데 주인공을 맡기로 한 애가 갑자기 빠지게 돼서 얘가 대신했어요. 셰익스피어였던 것 같아요. 무슨 작품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굉장했어요. 독백을 읊다가 감정이 북받쳐서 울어버리던걸요. 아, 한 가지 생각이 났어요. 한번은 커다란 플레이보이 토끼 로고가 그려진 맨투맨을 입고 학교에 왔어요. 모두가 그 애를 보면서 킥킥댔죠. 왜 그 애가 웃음거리가 됐는지 모르는 학생은 전교에 단 두 명뿐이었어요. 그 애 그리고 나였죠.9)


9)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노시내 옮김, 마티, 2021, 110쪽 참고.



식물화석 연구자, 앨범을 더 넘긴다.


식물화석 연구자봐요. 목에 사진기를 걸고 있어요.


건축사진사특이하네요.


식물화석 연구자어떤 일을 하세요?


사이.


건축사진사사진을 찍어요.


식물화석 연구자무슨 사진 찍으세요?


건축사진사, 집 안을 둘러본다.


건축사진사건축 사진 찍어요.


식물화석 연구자그래요?


건축사진사네.


식물화석 연구자건축 사진 찍는 건 뭐 하는 거예요?


건축사진사말 그대로 건축 사진 찍는 거예요.


식물화석 연구자카메라 뭐 써요?


건축사진사아이폰.


사이.


건축사진사뻥이에요. 사실 나는 비행사예요. 나는, LA의, 비행기 운전사. 신문사 취재용 헬기를 몰아요.


식물화석 연구자무슨 신문이요?


건축사진사<LA 타임스>.


식물화석 연구자그래요?


건축사진사네.


식물화석 연구자미국에 오래 계셨어요?


건축사진사네.


식물화석 연구자그러기엔 영어가…….


건축사진사지금 그거 혐오 표현인 거 알죠.


식물화석 연구자죄송해요.


건축사진사사실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식물화석 연구자왜 자꾸 거짓말해요?


건축사진사그냥요. 당신은요?


식물화석 연구자나는 여기에서 태어났어요.


건축사진사부모님께서 미국에 오셨어요?


식물화석 연구자아버지가 어릴 때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오셨어요.


건축사진사왜요?


식물화석 연구자할아버지는 군인이셨어요. 미국에서 국가 지도자 교육을 받으셨죠. 조국 재건을 위해서 한국에 돌아가 처음으로 아파트를 지으셨어요. 뭐더라, 마포아파트, 반포주공아파트? 집에 사진을 크게 걸어두셔서 기억이 나요. 나중에는 총재도 지내셨어요. 장관급이었어요.


건축사진사군인들이 정부 온갖 요직에 배치되던 시절이 있었죠.


식물화석 연구자내가 그런 분의 손녀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건축사진사덕분에 뉴욕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겠죠.


식물화석 연구자맞아요.


건축사진사그런데 왜 식물화석이에요?


식물화석 연구자쿨하잖아요.


건축사진사몇천만 년 전에 온기가 사라진 것들이긴 하죠.


식물화석 연구자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그만뒀어요. 내 글에서는 너무 작가가 보인대요. 작가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글을 쓰는 건 쪽팔리고 쿨하지 못하잖아요. 나는 모더니즘 추종자였는데도. 필명에는 한국 이름도 성도 쓰지 않았는데도.


건축사진사논문에는 한국 이름을 넣잖아요.


식물화석 연구자화석은 내 정체성에 하등 영향받지 않을 정도로 이미 쿨하고 단단해요.


건축사진사한국 이름을 누가 지어줬어요?


식물화석 연구자내 이름?


건축사진사네.


식물화석 연구자우리 집에서 일하던 보모가요. 웃기죠.


사이.


건축사진사그게 왜 웃겨요?


식물화석 연구자이름을 부모가 아닌 보모가 지어줬다는 게 웃기잖아요.


건축사진사그런가?


식물화석 연구자부모님은 내가 완전한 미국인으로 살기를 바라셨어요. 한국 이름 같은 건 지어주지도 않았어요.


건축사진사법적 효력이 있는 이름도 아니잖아요.


식물화석 연구자그래도 나는 내 한국 이름 좋아요. 논문 발표하거나 학회 참여할 때는 한국 이름을 중간에 넣으니까.


건축사진사당신 이름 지어준 보모의 이름 기억나요?


식물화석 연구자아뇨.


건축사진사왜 기억이 안 나요?


식물화석 연구자그냥 아줌마라고만 불렀으니까요. 왜 자꾸 물어요?


건축사진사우리 엄마도 보모였거든요.


식물화석 연구자그러세요? 뭐, 좋은 사람이었어요. 보모들이 다 그렇잖아요. 친절하고 가끔은 신경질적이고. 군것질 못 하게 하고.


식물화석 연구자, 웃는다.


식물화석 연구자차 더 드실래요?


식물화석 연구자, 부엌으로 걸어간다.
건축사진사, 일어나 집 안을 서성이다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인 물잔을 떨어뜨린다.
물잔이 카펫 위로 떨어지며 깨진다.
건축사진사, 쪼그려 앉아 유리 조각을 줍다가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와 앨범을 본다.
식물화석 연구자, 찻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다가 유리 조각을 밟는다.


식물화석 연구자아!


건축사진사, 식물화석 연구자를 본다.


건축사진사피 나네요.


사이.


건축사진사약상자 있어요?


식물화석 연구자현관 신발장 위에요.


건축사진사, 한 손에 약상자를 들고 현관의 수납장을 다 열어 천천히 관음한다.


식물화석 연구자(멀리서) 거기 없어요?


건축사진사아뇨.


건축사진사, 약상자를 가져온다.


식물화석 연구자아파요.


건축사진사참으세요.


건축사진사, 식물화석 연구자의 다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고 양말을 벗긴다.
지혈한다.


식물화석 연구자같이 지하철 탔던 기억이 나요.


건축사진사지하철이요?


식물화석 연구자아줌마는 지하철을 좋아한다고 했어요. 지하철을 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동안의 잠깐의 시간에 우리는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거라고 했어요. 신의 왼쪽 손가락 두 번째 마디 주름에 잠시 끼어 있는 거라고 했어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대중교통을 못 타게 했거든요. 스쿨버스 빼고는요. 그래서 아줌마랑 지하철 탈 때가 좋았어요.


건축사진사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식물화석 연구자몰라요. 꽤 최근에 이 말이 떠올랐는데…… 왜 떠올랐더라…… 맞아, 뉴욕 공항에서 집까지 오는 지하철 안에서요. 학회에 참석하고 오는 길이었어요. 주로 유럽에 다녀오죠. 비행기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공항에 들어가요. 넓고 긴 복도가 펼쳐지죠. 무빙워크를 타고 걸어가요. 뉴욕 공항에서 주거지로 뻗어나가는 지하철을 타요. 거기에 사십 분간 핸드폰이 안 터지는 구간이 있어요. 사람들은 물에 젖은 나뭇잎처럼 회색 몸을 접고 앉아 있고요. 나는 그곳에서 극도의 공포감을 느껴요. 검은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빠르게 지나가죠. 거기에서는 순식간에 내가 사라지거나 죽어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예요.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겠죠.


식물화석 연구자, 건축사진사를 바라본다.


건축사진사지혈하는 거예요.


식물화석 연구자한국 사람 만나면 너무 반가워요.


건축사진사당신은 미국 사람이잖아요.


식물화석 연구자나는 살면서 한 번도 집을 공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건축사진사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식물화석 연구자나는 내가 집이에요. 이동하는 집이에요. 사람이 곧 집이에요.


건축사진사캠핑카 캐치프레이즈?


식물화석 연구자깊이 박혔어요?


건축사진사네.


식물화석 연구자나 자신을 집에서 쫓아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쫓아내는 사람과 쫓겨나는 사람이 같아서 그러지 못해요.


건축사진사퍽 철학적이네요.


식물화석 연구자당신만 못하죠.


건축사진사몇 명이나 넘어왔어요?


식물화석 연구자, 자신의 발을 잡고 지혈하고 있는 건축사진사의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간다.


식물화석 연구자강의하는 나를 처음 봤을 때 어땠어요?


건축사진사죽여 버리고 싶었어요.


식물화석 연구자나한테 끌렸어요, 처음부터?


건축사진사그건 이 짓 다 하고 알려줄게요. 나한테 몸을 보여줘요.


식물화석 연구자, 옷을 벗는다.
건축사진사, 식물화석 연구자의 몸을 만지지 않고 오래 본다.


건축사진사당신 할아버지는 쓰레기야.


식물화석 연구자입 다물어요. 할아버지 얘기하면 성욕 떨어지니까.


18. 타일공의 꿈


타일공의 꿈속이다.
타일공은 가 보지 않은 미국을 상상한다.
건축사진사, 몸에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호화스러운 소파에 앉아 있다.


타일공웨얼 이즈 더 베이커리?


건축사진사고 스트레이트 투 블록스.


타일공웨얼 이즈 더 하스피털?


건축사진사턴 레프트 엣 더 코너.


타일공웨얼 이즈 더 뮤지엄?


건축사진사잇츠 온 유어 라잇트.
잇츠 넥스 투 더 주.


건축사진사, 테이블에 마약처럼 보이는 흰 가루를 쏟아놓고 코로 흡입한다.
모든 게 사라지고 타일공 혼자 남는다.
작업복을 입은 타일공이 걷고 있다.


타일공어둠 속 불 밝힌 주유소, 창고와 헛간, 농가의 불빛과 우사의 할로겐 등, 성인영화를 상영하는 심야영화관, 회칠이 벗겨진 흰 벽,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임시거주지, 어둠 속 오두막, 비탈, 양우리, 덤불, 담장, 과수원, 말뚝, 시공 중인 전원주택, 목욕탕, 예배당, 안개 속 정류장.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도시의 사람들은 폐쇄된 공장 앞을 지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엄마가 일했을지도 모르는 공장에 가고 있어. 청주에 있는 담배 공장이야. 3천 명의 노동자들이 1년에 백억 개비의 담배를 만들었대. 국가기록원에서 공장 설계도와 신문사 항공사진을 찾았어. 68년도에 찍힌 사진이야. 설계도에는 노동자들이 살던 숙소도 있어. 지금은 완전히 폐쇄되어서 낮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 하지만 지금 여기는 밤이고, 나는 담을 넘을 거야. 나는 공장을 향해 걷고 있어.


도시의 소리가 들려온다.
건축사진사, 일어나서 옷을 주워 입는다.
식물화석 연구자는 아직 잠들어 있다.
테이블 위에 엄마의 편지 뭉치를 떨어뜨리듯 놓는다.


타일공, 갑자기 히스테리컬해진다.


타일공언니, 언니는 거기에서 뭘 하고 있어?


사이.


타일공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사이.


타일공돈 내고 시간 들여 탐정 놀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구립도서관에 가서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이나 읽어. 커다란 칼라 달고 정의로운 연기하는 김혜수를 보던가. 그게 여유로운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삶의 대단한 과업을 수행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니? 언니, 언니는 언니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궁금해? 그렇게 자기 자신을 궁금해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그런 건 스무 살 때 끝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부끄러움을 몰라. 언니는 엄마를 닮았을 것 같아. 그러니 그렇게 이끌리듯 찾아 나선 거겠지. 내 생각에는 언니도 엄마처럼 자식을 버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무심코 버리고 엎질러놓은 다음 평생 슬퍼할 확고한 이유를 품고 누군가에게 기댈 구실을 찾아다니겠지.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뭔지 알아? 천진난만함이야. 사람 미치게 하는!


동이 트고 있다.
건축사진사, 휘청거리며 푸른 새벽의 아파트 복도를 걸어 나온다.


떠도는 미장이 가족, 타일공 앞으로 다가온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타일공, 그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빠르게 쫓아가지만 여전히 앞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19. 타일


이거포의 집 지하실.


건축사진사잠은 좀 주무셨어요?


영구차 운전사옷만 가지고 다시 갈 거예요.


건축사진사좀 어떠세요?


영구차 운전사, 고개를 젓는다.


영구차 운전사의사들은 최악만을 말하네요.


사이.


영구차 운전사진전 있어요?


건축사진사관뒀어요.


사이.


건축사진사왜 저한테 메일을 보내신 거예요.


영구차 운전사내가요?


건축사진사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영구차 운전사밤나무, 복숭아나무 숲, 소리, 파도, 일출, 장미, 동물원, 완자무늬, 당나귀. 다 외웠어요.


건축사진사그만둬요.


영구차 운전사대체 뭘까?


건축사진사소용없으니 머리 아픈 생각 그만하자고요.


영구차 운전사생각해 보라고요.


건축사진사싫어요.


영구차 운전사뭔가를 기억하려고 했던 거예요.


건축사진사뭐를요?


영구차 운전사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봐요. 이것들이 한 번에 적혔어요. 같은 종류의 항목들이라는 거예요.


건축사진사어떻게 밤나무와 소리가 같은 항목일 수가 있죠?


영구차 운전사밤나무와 소리와 동물원과 완자무늬…….


사이.


건축사진사꼭 한글 파일 그리기마당 아이콘 제목들 같아요.


영구차 운전사그게 뭐예요?


건축사진사한국의 워드프로세서 같은 거예요.


건축사진사, 생각한다.


건축사진사워드프로세서가 아니라 한글이라는 게 중요해요.


영구차 운전사네?


건축사진사스타벅스 텀블러 이름 같은 거예요. 미국 스타벅스 텀블러에는 뭐 있어요?


영구차 운전사자유의 여신상?


사이.


건축사진사한국에 관련된 이미지 기호예요.


영구차 운전사이현아 씨는 한국에 관련된 이미지 기호를 왜 기록했을까요?


건축사진사이미지 기호를 생산하는 입장이었는지 읽어내는 입장이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영구차 운전사어떨 것 같아요?


사이.


건축사진사생산.


영구차 운전사왜요?


건축사진사만약 어떤 나무가 이미지 기호로 존재한다고 해 봐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미지 기호로 존재하는 나무들은 대체로 종류를 알 수 없는, 실은 세상에 없는 나무의 모양으로 그려져요. 구름 아래에 기둥 모양 말예요. 그런데 여기에 쓰인 말은 밤나무, 복숭아나무, 그리고 완자무늬예요. 너무 구체적이죠. 나는 심지어 완자무늬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관자놀이는 알아요. 나는 만성 편두통 환자니까. 아무튼 이 말들은 그 이미지 기호의 정식 명칭을 알아야 쓸 수 있는 말이에요. 즉 엄마는 이미지 기호의 생산자였던 거죠.


영구차 운전사무엇의 이미지 기호였을까요?


건축사진사밤나무, 복숭아나무 숲, 소리, 파도, 일출, 장미, 동물원, 완자무늬, 당나귀.


사이.


건축사진사밤나무, 복숭아나무 숲, 소리, 파도, 일출, 장미, 동물원, 완자무늬, 당나귀.


사이.


건축사진사밤나무, 복숭아나무 숲, 소리, 파도, 일출, 장미, 동물원, 완자무늬, 당나귀.


사이.


영구차 운전사아까 스타벅스 텀블러라고 했죠.


건축사진사네.


영구차 운전사거기에 뭐가 그려져 있죠?


건축사진사한국 스타벅스 텀블러에는 벚꽃과 탈과 태극무늬와 남산타워가 그려져 있죠. (사이) 기념물들…… (사이) 장소예요.


사이.


건축사진사뭐지? 지방자치단체를 대표하는 이미지인가?


영구차 운전사내가 보기에는 더 생활에 직결된 것 같아요. 마치 전화번호부처럼 이걸 보면서 뭔가를 한 거죠.


사이.


건축사진사지도예요.


사이.


영구차 운전사기차. 기차역의 문양.


사이.


건축사진사아뇨. 기차보다 더 자주 갈아타야 하는…… 지하철. 지하철 역사의 타일 벽화예요. 서울 메트로 홈페이지 들어가 봐요.


건축사진사, 영구차 운전사,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대화한다.


건축사진사밤나무는 왠지 월곡이나 미아사거리일 것 같아요. 당시엔 미아삼거리였을 테고요. 근처에 밤나무골이 있어요.


영구차 운전사미아사거리 맞아요. 밤색 계열의 수직 연속 패턴이래요.


건축사진사복숭아나무 숲은 도곡동인가?


영구차 운전사금호역이래요.


건축사진사소리? 소리는 뭐예요?


영구차 운전사소리를 형상화한 패턴?


건축사진사음악? 음악이 유명한 지하철역 뭐 있지. 홍대는 아니겠고. 종묘제례악…… 종묘?


영구차 운전사녹번이래요. 소리의 파장을 주제로 디자인했대요.


건축사진사파도는?


영구차 운전사수유역 벽화 제목이 물결이었대요. 지금은 사라졌어요.


건축사진사일출은 동대문역. 지금은 사라졌고요. 장미는 숙대입구역. 마찬가지로 사라졌고요. 동물원은 뭐지, 서울대공원역인가? 서울대공원이 어디 있지? 아니, 어디 있었지?


영구차 운전사사당에 있었대요.


건축사진사완자무늬 서울역.


영구차 운전사당나귀도 서울역.


건축사진사서울역. 모든 곳으로 갈 수 있죠.


사이.


영구차 운전사상상해 봐요.


건축사진사이 메모는 타일 벽화의 제목이죠. 엄마는 타일공이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시공 인력이 전문화되지 않았을 테니까 타일만 하지는 않았겠죠. 페인트칠도 하고 미장도 하고 타일 시공도 하고. 이 지하철 벽화들은 88올림픽을 위한 도시 미화 작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어요. 그러면 적어도 84년도에는 공사를 시작했겠죠. 평창 올림픽 때 가리왕산 깎은 거 생각해 보면. 84년도라면 엄마는 스물세 살이었어요. 엄마 고향은 청주였고요.
엄마는 청주에서 나고 자라요. 스물세 살에 이런 일을 했던 걸 보면 대학교는 가지 않았겠죠. 엄마는 청주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요. 어느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을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도시 미화 대규모 공사에 투입된 거예요. 교회나 여성 연합회, YWCA 같은 데서 기술을 배웠을 수도 있겠죠. 엄마는 이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바쁘게 뛰어다녀요. 주로 4호선을 맡았죠. 주어진 타일 도안을 빠르게 찾으려고 이 수첩을 들고 다니고 엄마는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 맞은편에 앉은 서울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옷에 본드와 페인트를 묻히고 지하철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그러다 94년 서울에서 나를 낳아요. 이듬해 동생을 낳아요. 다시 청주로 내려가요. 그곳에 있는 담배 공장에 취직해요. 담배 공장 굴뚝의 연기와 창고의 벽돌과 기숙사의 낡은 문지방이 나의 최초의 기억이에요. 나의 최초의 기억은 앞집 노인의 죽음인 줄 알았는데. 나와 내 동생은 담배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 기숙사에서 자라요. 그리고 할머니 집에 맡겨져요. 이 시점에서 엄마가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죠.
그다음으로는 2002년이에요. 엄마는 LA의 한 부유한 한인 가정에서 보모로 일해요. 그 집에는 나와 동갑인 일곱 살짜리 딸이 있어요. 엄마는 그 아이를 사랑해요. 나와 같은 이름을 붙여주죠. 그리고 어느 날 그 아이를 데리고 어딘가 가려고 하죠. 그러다 실패하고 쫓겨나요. 자, 들어 봐요.



건축사진사, 라디오를 가져와 테이프를 재생한다.


건축사진사응접실에서 집주인 부부가 싸우고 있어요. 남자의 모국어는 한국어지만 영어를 쓰고 있죠. 두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어요. 남자가 화를 내는 상대가 영어 사용자이거나, 누군가에게 대화 내용을 숨겨야 할 때마다 영어를 사용했거나. 우리 할머니도 비밀 이야기를 할 때면 일본어를 썼거든요.
나는 이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누군가 집 안에 몰래 들어가서 응접실을 엿보는 장면을 상상해왔어요. 하지만 발소리를 들어 봐요. 집 안에 들어가는 상황이 아니에요. 나가고 있어요. 녹음 말미에 아주 짧게 야외 소리가 들려요. 게다가 집 안에 들어선 상황이라면 분명 문을 열어주러 누군가 나왔다가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리가 녹음됐을 거예요.
집주인 부부는 지금 엄마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엄마는 자신이 돌보던 아이로부터 떨어지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엄마는 위협을 받고 있었던 거예요. 자신이 해고되던 날의 환경 소리를 녹음해야 할 만큼. 20년이 지나, 자신이 키운 아이의 호의를 되찾기 위해 더듬거리는 영어로 편지를 써야만 했죠.
이때가 2010년이에요. 그리고 한참 공백. 2017년 한인마트에 캐셔로 취직하고 2020년 피살되죠.


긴 사이.


영구차 운전사진짜 직업이 뭐라고 했죠?


사이.


건축사진사작가예요.


영구차 운전사정말요?


건축사진사아뇨. 탐정이에요.


영구차 운전사정말요?


건축사진사설마.



5막. 그는 그이자 모두인


20. 범인


새벽, 이거포의 집 지하실.
건축사진사의 전화기가 울린다.


건축사진사말씀하세요.


긴 사이.


한인마트 사장그자가 아니래요, 범인이.


사이.


한인마트 사장듣고 있어요?


건축사진사네.


한인마트 사장미안해요.


건축사진사괜찮아요.


사이.


한인마트 사장그런데,


건축사진사네.


한인마트 사장3년 전에 샌디에이고에서 여자를 찌르고 달아났대요.


사이.


한인마트 사장구속됐어요.


사이.


한인마트 사장듣고 있어요?


건축사진사네.


한인마트 사장, 전화를 끊는다.
건축사진사, 침묵 속에 앉아 있다.
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타일공언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21. 이메일


이거포의 집 거실.
스튜어디스, 이거포가 탄 휠체어를 끌고 들어온다.
이거포, 건축사진사에게 품에 든 하늘색 비닐봉지를 건넨다.
영구차 운전사, 그 모습을 바라본다.


이거포먹어, 오늘 뽑은 가래떡이야.


건축사진사감사합니다.


이거포김 싸 먹어도 맛있는데. 갖다줄까?


건축사진사괜찮아요.


이거포옛날에 한국에 있을 때 성당에 가면 새해에 꼭 가래떡을 뽑아줬어.


건축사진사성당에 다니셨어요?


영구차 운전사엄마!


이거포, 영구차 운전사를 무시한다.


이거포잠깐 다녔지. 직장 동료 따라서.


건축사진사아.


사이.


건축사진사세례도 받으셨어요?


영구차 운전사엄마!


이거포그건 안 받았어. 이름 하나 더 생기는 게 부담스러워서.


스튜어디스엄마는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다가도 사람들이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도망쳐요.


이거포내가 좀 그래.


영구차 운전사엄마!


스튜어디스엄마가 퇴원하고 싶다고 했어.


영구차 운전사그러다 또 쓰러지면?


스튜어디스한인교회에서 선교하러 올 때마다,


이거포(영구차 운전사를 가리키며) 얘가 고생했지. 나는 부엌에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교회 아줌마들한테 엄마 없다고 거짓말 시키느라.


이거포, 웃는다.


스튜어디스여행 예약해놓고 당일에 안 가버리고.


이거포나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컨디션에 따라 행동하거든. 장례 당일 날 벌떡 일어나서 다른 묘지로 가자고 할지도 모르니까, 관뚜껑 제대로 닫아라. 지체 없이 화장을 하든지.


스튜어디스엄마가 그래서 내가 미숙한 어른으로 자란 거야.


영구차 운전사엄마!


이거포네가 하도 병원을 지키고 섰으니까 얘한테 연락한 거야.


스튜어디스엄마가 집에 가고 싶댔어.


이거포내 아들은 너무 마음이 약해. 의사가 하는 말 곧이곧대로 듣고.


스튜어디스엄마 딸은 비행 중이었어요. 병원에서 그렇게 전화한다고 바로 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거포아무튼 성당에서 투명한 하늘색 비닐봉다리에 가래떡 두 줄 넣어주면 품에 꼭 안고 집에 왔다고. 네가 내 딸이냐?


스튜어디스, 한숨 쉰다.


스튜어디스엄마도 자기 아쉬울 때만 나한테 연락하잖아.


이거포그거야 네가 평소에 연락 한번 없으니 그렇지.


스튜어디스오빠는 늘 착한 아들이고 나는 늘 무관심한 못된 딸이지.


이거포맞잖아.


스튜어디스오빠는 엄마 피 안 섞여서 착한 거예요.


이거포아니. 내 옆에 붙어살아서 착한 거야.


스튜어디스나는 엄마 피 섞여서 못된 거고.


이거포나 착해. 이 집에서 제일.


스튜어디스엄마가?


이거포또 시작이네. 너 언제 가냐?


스튜어디스알아서 갈 거야.


이거포그거는 잘돼 가냐?


스튜어디스뭐요.


이거포대머리 독수리?


스튜어디스사막의 독수리요.10)


이거포그래, 그거. 얘는 지 엄마 아픈 거는 들여다보지도 않으면서 생전 보지도 못한 국경 넘다 죽은 멕시코 사람들 뼈 주우러 다녀. 네가 마더 테레사냐?


스튜어디스바쁜데 일 빼고 온 거야.


이거포일론 머스크냐?


10) 사막의 독수리(Aguilas del Desierto): 미국 국경을 넘다가 실종된 사람들의 뼈를 찾는 시민단체. 히스패닉계 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튜어디스, 테이블 위에 놓인 라디오를 본다.


스튜어디스이게 여기 있었네.


라디오를 재생한다.
건축사진사가 내내 들었던 소리가 재생된다.


스튜어디스세상에. 나 학교 다닐 때 방학 숙제로 해간 건데.


건축사진사네?


스튜어디스자기가 사는 곳을 배경으로 노래를 만들어 오라는 숙제였어. 한인타운은 삭막하고 회색이고 촌스러운 간판 사이로 차만 쌩쌩 다녀서, 만들 노래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냥 대충 녹음해 갔어. 선생이 성의 없다고 혼내던데.


건축사진사이걸 녹음한 게 저희 엄마가 아니라고요?


스튜어디스, 라디오를 열어 테이프를 뺀다.


스튜어디스응. 이거 내 건데.


건축사진사, 스튜어디스를 마주 본다.


긴 사이.


건축사진사선생님이 저에게 메일을 보내셨죠?


22. 신원 미상자 묘지


신원 미상자 묘지.
봉분 하나 없다.
붉은 흙밭에 건축사진사와 스튜어디스 서 있다.
스튜어디스, 먼저 발길을 돌려 멀찍이 걸어간다.
건축사진사를 기다린다.
건축사진사, 꼼짝없이 서 있다.
봄비가 내린다.
이따금 새소리.
건축사진사, 스튜어디스에게 다가가 지하실에서 발견한 필름 카메라를 건넨다.
그들의 발밑으로 무수하게 많은 신원 미상자들이 묻혀 있다.
긴 침묵.


23. 목격자


영구차 운전사누가 당신을 찾아왔어요.


소년누가 당신을 찾아왔어요.


소년, 주머니에서 손목시계를 꺼낸다.


소년사고 현장에서 주웠어요.


사이.


소년가질 수가 없었어요. 돌려줄 사람도 없었고요.


사이.


소년사람들이 마트에 들어가 음식을 털어갔어요. 저도 음식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주웠어요. 팔까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건축사진사, 시계를 받아 들어 자신의 손목에 채운다.


건축사진사첫 번째 구멍에 고리를 끼웠네요. 남성용 시계라.


건축사진사, 시계를 풀어 소년에게 건넨다.


건축사진사가지세요.


소년네?


건축사진사저는 필요 없어요.


소년사고 현장을 기억해요. 원하신다면 말씀드릴게요.


건축사진사필요 없어요.


소년그 아주머니를 종종 길에서 만났어요. 유튜브를 보는데 그 아줌마를 닮은 사람이 나왔어요. 지하 공연장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 영상이에요.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피아노를 쳐요. 한 시간 반 동안 쉬지 않고 연주해요. 연주자 뒤 객석에 흐릿하게 관객들이 보여요. 관객들이 벽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편안하게 앉아 있어요. 그곳이 고향인 것처럼, 이미 들어 본 소리인 것처럼요.


24. 저해상도


이거포의 집 지하실.
프로젝터가 웅웅댄다.
화면이 켜지고 음악이 시작된다.
Simeon ten Holt 작곡, 손세민 이상욱 연주, <Canto Ostinato>
https://youtu.be/SUWI_g3pd2s
두 명의 젊은 남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사람들이 벽에 기대 연주를 듣는다. 그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거포, 영구차 운전사, 건축사진사, 피아노 연주를 한참 본다.


이거포저 사람인가?


영구차 운전사, 화면을 멈춘다.
앞으로 되돌려 다시 튼다.
같은 장면을 반복한다.


영구차 운전사저 뒤에 벽에 기대선 사람 같죠?


이거포아니, 피아노 가까이 앉은 여자 같은데.


영구차 운전사그러기엔 허리가 너무 꼿꼿해요.


영구차 운전사, 화면 멈추기를 그만둔다.
연주가 계속된다.


25. 비행기


비행기 안.
사람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다.
기체가 구름 속을 지나고 있다.


승객나라면 기내 서비스를 더 제대로 할 거예요.


건축사진사, 옆자리 승객을 잠시 바라본다.


승객볼 수 있는 영화들이 너무 뻔해요.


사이.


승객이쯤 되면 물 한 번 줘야 되는 거 아닌가.


사이.


승객원래 한국 사세요?


건축사진사네.


승객미국에는 왜 가셨어요?


건축사진사친구를 만나러요.


승객즐거운 여행이셨나요?


건축사진사글쎄요.


승객얼마나 머무셨어요?


건축사진사육일이요.


승객왜 그렇게 짧게 머물렀어요?


건축사진사한국에 계신 할머니가 돌아가셔서요.


승객유감입니다. 괜찮으세요?


건축사진사기도해주세요.


승객해 본 적은 없지만 해 볼게요.


건축사진사고맙습니다.


승객뭐라고 기도할까요?


건축사진사글쎄요.


승객누구한테 기도할까요?


건축사진사천사에게.


승객천사에게는 어떻게 기도하는데요?


건축사진사아무 말도 안 하면서.


26. 유골함


장례식장.
건축사진사와 타일공이 만난다.
침묵.


타일공, 건축사진사에게 서류 봉투를 건넨다.


건축사진사이게 뭐야?


타일공언니한테 왔어. 법원에서 보냈어.


건축사진사법원에서 올 게 뭐가 있지?


타일공들어가자.


건축사진사, 짐을 내려놓는다.
건축사진사, 타일공의 무릎 위에 머리를 누인다.


건축사진사너무 피곤해. 계속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낮이 계속됐어. 내가 이 잠에서 깨면 너에게 모든 걸 다 이야기해줄게.


건축사진사의 머리맡에 법원에서 날아온 출생증명서가 우편 봉투에 담긴 채 놓여 있다.
건축사진사, 잠든다.


타일공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몸을 일으키시고는 창문을 활짝 열었대. 요양사가 말해줬어.


에필로그


스튜어디스, 현상된 사진들을 봉투에서 꺼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과하게 가까이서 찍은, 흐릿한 사진들이 여러 장 반복된다.
사진들이 극장 벽에 커다랗게 투사된다.
건물의 이음새, 빛의 번짐, 귀, 손가락 주름, 벽의 표면, 고리, 바닥, 기계 부품들, 간판, 벽지 무늬 같은 것들이다.
그중 간혹 이거포와 영구차 운전사와 스튜어디스의 확대된 신체 일부가 지난다.


막.



[참고자료]


강예린, 윤민구, 전가경, 정재완, 『아파트 글자』, 사월의눈, 2017.
강홍구 외, 『아키토피아의 실험』, 마티, 2015.
리옌첸, 『뼈의 방』, 정세경 옮김, 현대지성, 2021.
미셸 세르, 『천사들의 전설』, 이규현 옮김, 그린비, 2008.
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 모음, 2011.
석준기, 『서울의 지하철』, 2021.
엘리나 펜티넨, 아니타 킨실레토, 『젠더와 모빌리티』, 최성희 옮김, 부산대학교 출판문화원, 2017.
예니 에르펜베크, 『모든 저녁이 저물 때』, 배수아 옮김, 한길사, 2018.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노시내 옮김, 마티, 2021.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박현주 옮김, 마음산책, 2005.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8.
GARM Magazine, 『다섯 번째 재료: 타일』, garm SSI, 2018.


이강봉, <가장 오래된 숲, 미국에서 발견>, 2019. 2. 20, The Science Times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a%b0%80%ec%9e%a5-%ec%98%a4%eb%9e%98%eb%90%9c-%ec%88%b2-%eb%af%b8%ea%b5%ad%ec%97%90%ec%84%9c-%eb%b0%9c%ea%b2%ac/
BBC, <터키: 실종자 수색 돕던 터키 남성, 이름 듣고 나서야 “저 여기 있는데……“>
http://naver.me/xfxSlBNY


잉마르 베리만, <페르소나>, <화니와 알렉산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 아마추어>











김연재
작가소개 / 김연재

극작가. 희곡을 쓰고 연극과 영상을 만든다. 연극 <낙과줍기>,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폴라 목> 등을 썼고 전시 <불완전 운동>, <텍스트 뷔페>에 참여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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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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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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