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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벼룩시장

  • 작성일 2022-10-14
  • 조회수 1,011

21세기 벼룩시장


오태영







등장인물


노 철학자(노철, 90세)
노 시인(노시)
노파
광대
청년1
청년2
숙녀
사이보그(여)
사이보그(남, 경찰)
안경 쓴 약장수
경찰




1장. 벼룩시장


좌판을 벌여놓고 앉아 있는 몇 명의 초라한 노인들.
첫 번째 노인의 좌판에는 몇 개의 뼈와 해골.
그 옆 노인은 몇 장의 헌책과 종이 뭉치.
옆 노파는 약간의 낡은 의상과 손수건, 그리고 붉은 천 몇 점.
노인들 뒤에 진열대 대용의 철창이 보인다.
노파의 천 조각들은 철창 구조물에 빨래처럼 걸려 있다.
팔러 나온 상품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무대 옆은 노점 음식점.
젊은이들이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먹고 마시며 유쾌하다.
그리고 무대 뒤쪽에 CCTV 화면이 작동되는 수상기 4대.


노철(소리쳐 손님을 부른다) 싸요, 싸. 구경들 하세요!


노시다시는 못 볼 물건, 21세기 마지막 유물.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유산!
싸게 팝니다! 싸게 팔아요!


노파구경들 하세요. 날이면 날마다 나오는 물건이 아닙니다! 구경들 하세요!


노철(힘이 빠진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노시(힘없이) 에이, 아침부터 소리쳐 목만 쉬었어.


노파포기하지 마세요, 힘을 내요. 목소리도 높이고.


노시글쎄, 목이 쉬었다니까. 목이 팅팅 부었소.


노파(힘을 내서) 싸요, 싸. 구경들 하세요. 다시는 못 볼 물건, 21세기 마지막 유물!


노파, 의욕적으로 손님을 부르는데, 북소리가 들려온다.


노철(더욱 절망적) 또 시작이군. 또 시작이야.


노시(맥이 빠진다) 저놈이 손님을 다 빼앗아가지. 있지도 않은 우리 손님을.


북을 치며 광대가 등장한다.


광대쥐약 있어요, 이약. 성 기능 촉진제 비아그라가 왔어요. 효과가 있다 없다, 떠들지 말고 그냥 먹어만 봐. 한 알이면 벌떡, 두 알이면 벌떡벌떡, 세 알이면 사망이야 사망!
(북을 칠 때마다, 바지 앞이 즉 성기가 벌떡벌떡 일어난다)
이놈 봐라, 이 버릇없는 놈. 아줌마도 벌떡, 할머니도 벌떡, 개를 봐도 벌떡!


구경꾼들이 몰린다.


노시망했어. 오늘 장사 다 글렀다고.


노철3천 년 전 어느 날 자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왔소. 인류를 구제하기 위한 뜨거운 열망을 안고. 그때 나타난 게 바로 저런 광대 놈이었지. 줄을 타는 어릿광대 놈!


노시북을 치든 줄을 타든 다 같은 광대지요.
민중은 우매하고 광대는 환영받고.
(한숨) 세상은 절대로 바뀌지 않아요.


노파아뇨, 그렇지 않아요. 100년 전 레닌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알잖아요?
그날 그 광장에서? 우리는 광대를 밟아 죽였어요.


노시어쨌든 그 100년 뒤 광대가 레닌을 다시 끌어내렸소. 바로 그 광장에서.
민중은 우매한 법이오. 어느 시대든 똑같아요.


노파그렇지 않아요. (노파, 곧장 광대한테로 간다)
썩 꺼져! 이 멍청이 어릿광대 놈아. 저리 비키지 못하겠니!


광대(북 치며 놀리듯) 두 알을 먹으니 벌떡벌떡! 할망구를 보고도 벌떡벌떡!
할망구 마침 잘 만났소.


노파에끼 이이…… 버릇없는 광대 놈. 그 대가리를 뽑아버릴 테다!


광대아하, 이건 안 되지. 자 그럼 자리를 옮겨 아줌마들 앞으로 전진!
(북을 치며 퇴장한다. 구경꾼들 낄낄거리며 광대 뒤를 따른다)


광대와 구경꾼이 빠지자 무대는 썰렁하다.
세 명의 노인, 다시 손님을 부르기 위해 소리친다.


노철(소리쳐 손님을 부른다) 싸요, 싸. 구경들 하세요!


노시다시는 못 볼 물건, 21세기 마지막 유물.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유산!
싸게 팝니다! 싸게 팔아요!


노파구경들 하세요. 날이면 날마다 나오는 물건이 아닙니다! 구경들 하세요!


노철(힘이 빠진다) 소용없는 짓이야,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아.


노파(힘없이) 저기 아이스크림 가게만 불티나네요. 젊은것들은 아이스크림만 핥고 있어요. 저렇게도 좋을까? 핥아먹는 게! 혓바닥을 길게 늘이고.


노철(비판적이다) 저게 뭐냐? 혓바닥의 진화라는 거요.
핥아먹는 세대들의 새로운 등장. 자연스럽게 어금니는 퇴화했지.


노파그래도 저들이 인류의 꿈을 이어갈 거예요.


노철인류의 꿈? 저들이? 믿음이 안 가. 희망이 없소. 앞이 캄캄해.


노시희망이 있든 없든 중요한 건, 저들이 아니라 우리요. 우리!


노파우리 문제라고요? 저 젊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고요?
인류의 꿈을 이어갈…….


노시우리요 우리! 현실을 똑바로 봐요. 배고픈 우리!


노파하지만…… 우리야 살아갈 날이 며칠 안 남았지만…… 저들은…….


노철어쨌든 우리요. 당장 배가 고프잖소!


노파그래요, 배가 고파요.


노철어제도 허탕만 쳤소. 하나도 못 팔고.


노파하지만 하늘을 보세요. 오늘은 날씨가 좋아요.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노시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군. 왜 그게 내일은 아니오?


노철지나간 시절, 19세기 대화법이지. 포탄이 쏟아지는 참호 속에서 죽어가는 전우의 눈동자를 여다보며 속삭이던 마지막 대사. “내일은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낭만적이었지. 눈물 나도록 희망이고. 그러나 내일은 없었지.


노파그래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유행했어요. 열병처럼 유행했지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솟아오를 거야.” 저는 그 뜨거운 위안, 숭고한 정신이 21세기에도 살아남기를 바라요, 간절하게.


노시(버럭) 할망구, 당신 시인이야? 아니잖아!


노파네, 아니에요.


노시시인은 나야! 20세기 마지막 시인! 20세기 마지막 위대한 시인이 오늘 이렇게 길거리로 내몰렸다구!


노철(한숨) 20세기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가 이렇게 빌딩 숲 길거리로 내몰리고.


노시혁명의 시대는 가고 우리는 길을 잃었소.
풍요로운 시대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어.


노철길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렸지. 이 풍요로운 과학 만능의 21세기에.


노파(빠르게) 저기 사람들…… 사람들이 와요.


노철(손님 맞을 준비로 돌변) 싸요, 싸. 구경들 하세요! 다시는 못 볼 물건.


노시(손님을 모으려 소리친다) 21세기 마지막 유물. 인류가 이룩한 위대한 유산!
싸게 팝니다! 싸게 팔아요!


노파구경들 하세요. 날이면 날마다 나오는 물건이 아닙니다! 구경들 하세요!


젊은이들이 유쾌하게 떠들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노파저 봐요, 들리죠? 저 맑은 웃음소리!


노철자, 어서 오세요. 물건들 보세요. 귀중한 물건. 싸게 팝니다.


노시(거든다) 구경하시오, 구경만 해도 됩니다.


노파(거든다) 구경만 해도 배울 게 많아요.


청1쓰레기장이 따로 없구만. 그런데 이게 뭐지?


청2(커피를 마시며) 뭐요, 이거? 이 개뼉다구 같은 거!


노철아, 이 물건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건 북경원인의 턱뼈고, 이쪽 이건 크로마뇽인의 오른쪽 무릎뼈고…….


청1하하하, 뼈다귀래. 뼈다귀!


청2하하하, 크로마뇽이라. 난 개뼉따군지 알았지.


노철(마지막 자존심, 그리고 위엄) 큰일 날 소리. 개뼉다구라니. 아니오, 젊은이.


청2이걸 팔아먹겠다고 들고나온 거요? 이거 해도 너무한 거 아니오?


청1이 양반들 정신이 있는 거야? 아무리 벼룩시장이라 해도 그렇지…….


노철모르는 소리. 이건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유산이요.


청2우린 지구에 관심이 없수다, 역사에도 관심 없고. 이제 지겹지도 않아요?


노철하지만…….


청2지구는 늙고 병들었어요. 희망이 없지, 대안이 없어요. 추한 몰골의 당신들처럼. 거울에 비쳐 보세요. 그게 지구고 역사라는 거요, 당신들이 말하는.


청1우리는 말이요, 다음 주 여행을 떠나요, 어디로 가느냐?


청2목성. 어디선지 들어 봤죠? 목성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별?


노파(놀랍다) 오, 위대한 인간의 꿈이 드디어 우주로까지…….


청2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세요?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


청1그리고 우주 한복판에도 불안과 우울함이 있다는 사실. 그 아름다운 우주 한복판에도 초조함이라 할까, 우울함이라 할까, 그런 것들이 순간순간 안개처럼 몰려오고 지나가고.


노시(끼어들며) 우주 한복판에도 우울함이 있다고……?


청1기분 엿 같죠. 씁쓸하다고나 할까, 배신당한 것처럼. 우주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우울의 정체, 이건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우주 공간의 바이러스 탓인가, 아니면 인간 본연의 숙명적인 유전자 탓인가? 우리한텐 그런 게 중요하지 개뼉다구 같은 지구 역사,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이겁니다!


노파(혼잣말처럼) 우주가 왜 우울할까?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지만.


청2어쨌든 목성 도착과 동시에 뭘 하느냐? 일단 지구를 바라보며 할 일이 있지. 그 끝없이 넓은 우주 공간에다 보란 듯 좌악, 하하하 오줌을 좌악 깔기는 겁니다.


노시아니, 오줌이라니?


노철왜 하필 오줌을…… 그 미개척 새로운 세상에…….


청1정말 몰라요? 왜 오줌을 깔기는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 아닌가요?


노시(노철을 바라보며 모르겠다는) …….


청1저절로 그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죠. 본능이랄까, 무의식이라고나 할까?


청2다시 말해 영역표시라는 거요. 일종의 말뚝이죠. 그냥 여기저기 때려 박는 거요. 하하 수컷의 변하지 않는 DNA. (물건에 전혀 관심 없다) 계속 뼉다구나 주무르고 계슈, 야, 가자 가!


노파(붙잡는다) 이봐요 젊은이, 개시예요, 첫 손님. 그냥 가면 서로 손해라우.
다른 물건도 많아요. 가격은 아주 싸게 잘해드릴 테니까…….


노시(적극적으로) 그럼, 그럼. 한창 배워야 할 젊은이들이 손해지.


청2지금 우릴 가르치겠다는 거야, 이 꼰대들이?


청1야, 이거 착각을 해도 유분수지, 늙고 병든 지구의 잔해 속에서 뭘.
하하 더 이상 뭘 우리한테?


노파(아부) 그래도…… 우린 아직 개시도 못했다우. 어제부터.


청1그러니까 장사치 맞죠? 우리한테 뭘 가르치겠다는 게 아니고.


노파(눈치 빠르게) 그럼요, 장사치죠. 장사꾼. 저희처럼 늙은것들이 뭘 알겠어요.
다만 우린 배가 고파서…….


청1할망구 솔직하네. (먹던 아이스크림 주며) 자, 이거나 핥아요.


노파(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슬프다. 한 입 핥는다. 자존심이 무너진다, 슬프다)


노철(다시 시작한다) 젊은이들, 방금 DNA라 했는데, 역사가 말하는 말 없는 정보를 아시오?


청1와, 또 나온다, 역사 타령.


노철(진지하다) 과거를 보면 미래를 아는 법이요. 미래를 예측하는 눈이 생기는 법이지.


청2미래를 본다니? 야야, 이 늙은이 봐라, 이 늙은 광대.


청1(조롱) 눈깔이 없는데 뭐를 봐요? 눈깔이 빠졌잖소. 그 해골에 눈깔이!
(자리를 옮기려 한다) 가자, 가.


노철 (다급하다) 저저 이봐요, 젊은이. 눈깔은 빠졌어도 미래를 말해주는 정보는…….
나는 역사학자요. 역사 이전 선사 시대부터 연구했소.
철학 박사학위에 인류학까지…… 세 개의 박사학위를.


청1와, 이거 웃기네. 철학이란다, 철학!


청2하하, 미래를 그렇게 잘 알면서 자기 앞은 왜 못 보시나?
박사학위 세 개면 뭐 할 거요? 당신 거지나 다를 바 없잖소? 가난뱅이 노숙자!


청1오죽하면 이 꼴로 벼룩시장에 나와 썩은 해골통을 팔고 계시나!


노철방금 우주 한복판에 우울함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말이요, 우주 공간에 우울함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에…… 인간의 DNA에 있는 거요.


청1(관심 없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요?


노철그러니까 크로마뇽 해골은 미뤄 놓고, 이쪽을 보시요. 이건 좀 특별한 품목으로 역사적 가치는 떨어져도 인간 본연의…….


청1(가려 한다) 됐어요. 그까짓 해골통 삶아 먹지도 못할 것 뭐에 써먹겠소?


노철(잡으며) 이건 소크라…… 소크라테스의 해골이오.


노파(거든다) “너 자신을 알라” 알지요? 너 자신을 알라!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 그분의 머리통, 진품이라우, 진품.


노철이건 석가모니의 두개골이고. 금이 가고 조금 찌그러지긴 했지만 진품이요.
바로 이 두개골들 안에 인류 유산의 위대한 사상이 담겨 있었소.


청2이 영감 정말 진드기네. 어이 영감, 소크라테스가 이 시대에 왜 필요해?


청1영감, 철학은 집어치우고 춤이나 한번 춰 봐!


노철춤이라니……?


청2어릿광대춤. 어차피 광대 아니오?


노철(슬프다. 힘없이) 철학자를 너무 조롱하지 마시오. 나는 배가 고프오. 소크라테스가 싫다면, 여기 이분 이거. 소크라테스보다는 골동품적 가치가 떨어지지만.


노시(다른 해골을 집어 들며 거든다) 마르크스도 있고 프로이트의 해골도 있소.


노철이분이 프로이트요. 염가로 드릴 테니…… 집에는 병든 마누라가 기다리는데 우린 오늘 저녁 밥값이 없소. 벽걸이 장식품으로 걸어놔도 좋을 겁니다.


청1우릴 식인종으로 아슈? 해골바가지를 장식품으로 쓰다니…….
(너무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좋아요, 얼마요?


노철(안심, 기대감) 단돈 1만 원입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청1(놀랍다) 아니, 1만 원 때문에 징징거렸단 말이야? 겨우 1만 원에?


청2할망구, 그 아이스크림 그거 얼마짜린지 알아요? 2만 원이오.


노파(슬프다) 인류의 위대한 정신, 그 위대한 유산이 아이스크림 하나보다 못하다니…… 핥으면 녹아 없어질 아이스크림이.


청1자자, 두 개 주쇼. 하나는 내 거, 하나는 너 가져.


노철(고맙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마르크스? 아니면 프로이트?


청1마르크스든 소크라테스든 상관없고, 그냥 대갈통 큰 놈으로 주쇼.


청2(돈을 꺼내 픽 던지듯 준다. 아주 쉽다) 킥킥, 같은 값이면 큰 놈이 좋겠지. 짱구라도 상관없고.


노철(해골을 두 개 내주며) 자 여기…… 소크라테스와 프로이트요.


노시탁월한 선택입니다. 좋은 재산이 될 거요, 기념비적인.


노철(미안해하며) 포장지가 다 떨어져서…… 이거 포장지가 없어 죄송합니다.


청1어차피 포장지 그런 거 필요 없수다.


청년1, 해골을 받아 그중 하나를 청년2에게 준다.
해골을 건네는 과정에서 실수로 해골이 땅에 떨어진다.


노철(놀라) 저…… 저, 저런.


노파(엎드려 집으려 한다) 아이고, 소소소…… 소크라테스…….


청2…….


청1자식, 그거 하나 제대로 못 받냐?


청2어차피 이거 하려고 산 거 아냐? 아작.


청1아작?


청2그래 아작!


청년2, 그냥 발로 콱 밟아버린다.
소크라테스의 해골이 너무 힘없이 박살 난다.


청2그냥 콩가루네, 소크라테스. 난 그래도 발에 밟히는 맛이 있을 줄 알았지.


노철(털썩 주저앉는다) 이…… 이럴 수가.


노파(절망) 바바 박살이 났어요. 인류의 저…… 저…… 정신적…….


분노와 절망감, 그러나 아무런 힘이 없다.
때마침 북소리와 함께 광대가 들어선다. 구경꾼들이 뒤따른다.


광대왔어요, 왔어요. 비아그라 왔어요. 벌떡벌떡 일어나는 비아그라!


청1어이 광대! 프로이트 골통은 너나 가져라! (해골을 던져준다)


광대(받아) 프로이트?


청1그래 프로이트.


광대하하, 이놈이 프로이트의 대갈통이렷다? 이놈도 죽어서 구멍이 뻥뻥 뚫렸구나. 자 그럼 비아그라의 시범을 보시라. 오른쪽 구멍에 한 번, 왼쪽 구멍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엔 아가리에 틀어박고…….


청1하하, 맞아 바로 그 작자야. 그자가 떠들었어. 인간의 꿈과 정신이 어쩌고, 억압된 욕망과 성욕이 어쩌고저쩌고.


광대(장난감 성기를 쑤셔 넣는다) 억압된 성욕? 억압된 성욕이라니! 미친 대갈통에 무슨 말은 못하겠니, 이놈! 거기다 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지 애비를 때려죽이고, 지 에미랑 헐레벌떡 색색색색, 이거, 이거(시늉) 상피 붙고 싶다? 에이, 이 빌어먹을 놈, 이것이 바로 섹스라는 거다, 비아그라의 힘, 파워! 해골도 깨져나가는 이 위대한 힘. 보시라, 무지막지한 비아그라의 파워!


노철(대노, 새파랗게 질려) 저, 저놈…… 광대, 광대 놈이!


노시(대노, 펄펄) 저, 저런, 인간의 정신을 최초로 해부한 선배님을…….


노파(잡으러 쫓아가며) 욕보여도 유분수지, 이 벼락을 맞아 죽을 놈! 이놈!


광대(살살 도망치며) 이놈, 미친 해골통 이놈, 맛 좀 봐라! 우지지직 깨져나가는 이 위대한 힘, 무지막지한 비아그라님의 파워를!


구경1우와, 해골이 깨진다!


광대(과장) 아이구, 아야, 이놈이 이빨로 잘근잘근 씹네, 씹어!


구경2아하하하, 광대의 아랫도리 힘에 프로이트 골통이 박살 난다!


구경꾼들으하하하!


세 명의 노인들 경악과 절망감,
광대의 익살과 떠들썩한 구경꾼들 소음 속에 암전.




2장
벼룩시장 (같은 장소)


좌판 앞에 힘없이 앉아 있는 세 명의 노인.


노철나는 눈을 뜨고 있었어, 눈을 감은 적이 없지. 그런데 이 찬란한 21세기에 길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렸어.


노시이 풍요로운 과학 만능의 21세기 한복판에서.


노철유사 이래 이처럼 풍요로운 시대는 있어 본 적이 없건만.


노파저 하늘을 보세요. 희망을 가지세요. 우리가 희망을 잃으면 다음 세대가 뭘 배우겠어요?


노철(한숨) 알겠다니까요. 다음 세대를 위해 억지로라도.


노시슬픔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깊이깊이 감추고.


노파그럼요, 슬픔은 이 세상에 존재한 일이 없었어요.


노철처음부터, 한 번도.


노시거대한 거짓의 금자탑을 세우고.


노철죽는 순간까지 거대한 거짓에 봉사자로서…….


광대의 북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노철저 봐, 저 봐 또 시작이다.


광대가 들어선다.


광대쥐약이 왔어요, 이약. 강력 접착제가 왔어요.


노시(버럭 화를 낸다) 너 이놈 아직도! 우리랑 원수진 일 있냐!
이 못된 광대 놈아!


광대아하, 상부상조. 서로 돕고 삽시다요. 사이좋게.


노철서로 돕게 생겼냐, 이놈! 위대한 철학자를 욕보인 발칙한 놈 같으니!


광대노여움 푸세요. 저도 알고 보면 슬픈 광대입니다. 차라리 순수한 시대에 순수 광대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요. 어쩌다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나, 자본주의 시대의 광대가 되어 장사치로 전락한 슬픈 광대. 너그럽게 용서하십쇼.


노파용서하게 생겼냐, 이놈! 아무리 슬픈 광대라도 그렇지, 우리 손님 몽땅 뺏어가는 이 도둑놈아!


광대(연민) 그게 어떻게 내 탓입니까? 어차피 먹고살려면 팔릴 물건을 들고나와야지. 이런 쓰레기를 누가 삽니까, 이 시대에.


노철쓰레기라니, 이 발칙한 놈!


광대(공손하게 해골통을 내민다) 노여워 말고 자, 이거나 받으세요.


노철이 이건……?


광대(금방 광대 짓) 두드리면 목탁 소리 나는 프로이트 대갈통. 금 가고 쪼개진 거, 강력 접착제로 붙였습니다. 강력 접착제! (다시 공손하다) 이빨이 두 개 빠져 도망갔는데, 그래도 거의 감쪽같잖아요. 받으세요. 그리고 다시 팔아서 세 분 맛있는 거 사 드세요. 이 광대 놈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


노철(감사해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


광대(북을 치며 퇴장한다) 강력 접착제가 왔습니다. 조각난 대갈통, 구멍 난 해골통, 찢어진 오줌통, 살짝 발라만 주세요. 강력 접착제 왔어요!


노철(감사하지만 처량하다) …….


노시알고 보니 그래도 착한 광대군.


노파(위로한다) 그래요. 양심에 꺼릴 거 없어요. 그냥 놓고 파세요.
가짜가 아닌 진품이잖아요, 접착제로 붙이긴 했지만.


노시하루 더 연명하라는 뜻이니, 그날까진 희망을 붙들고 있습시다.


젊은이 둘이 다가온다. 아이스크림을 든 젊은 여자 한 명을 동반했다.


청1저기야, 내가 말했지? 그 웃기는 늙은이들.


숙녀하하, 마르크스 대갈통이 단돈 1만 원?


청2아이스크림 하나보다 싸다니까


청1야, 1만 원도 비싸. 이 시대에 지구의 쓰레기, 그까짓 게 왜 필요해?
우리 아버지 땅 산 거 알지? 시리우스별에.


청2(해골통이 또 있는 걸 보자) 아니, 이거 뭐야?


숙녀(팔아야 한다) 이 해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정신분석이란 위대한 분야를 개척하신 프로이트 선생의…….


청2그럼 이거 가짜 아냐? 사기! 프로이트 대갈통은 광대가 작살냈잖소! 바로 어제.


노철하지만 접착제로 붙여서…… 접착제…….


노파사기라니요. 천벌을 받지요, 하늘에 맹세코 진품이라우. 치아만 두 개 없어졌을 뿐예요.


청2이빨만 두 개?


숙녀하하, 그럼 치과에 들려 틀니라도 끼워드리지 그랬어요?


청1하하, 해골에 번쩍번쩍 틀니라.


숙녀하하, 임플란트!


젊은이들, 킬킬거린다.


숙녀(웃다가 좌판을 보며) 이쪽 이건 뭐지? 썩은 휴지 같은 게?


노시아, 어서 오십시오. 이 물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위대한 시인의…….


숙녀시인……이요?


청1뭐, 옛날에 그런 게 있었대. 크로마뇽인 시대에.


청2광대도 아닌 것이 배우도 아니면서, 노래도 아닌 것을 중얼중얼하는 미치광이들. 인류를 위해 전혀 쓸모없는 밥버러지들이.


노시시인은 광대가 아니오, 미친 것도 아니고. 인류의 영혼을 위해서요. 병들고 지친 영혼. 그러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어 보시오, 젊은이들 인생에 가장 고귀한 시간으로 기록될 거요.


숙녀어머, 그래요? 내 인생의 가장 고귀한 시간은 섹스하는 순간인데. 섹스 타임.


청1그렇지, (시늉) 이거, 이거. 셋이서 이거, 이거.


숙녀정말 우리 우주선 안에서 할 거지? 초록별 지구를 바라보며?


청2뿐이냐, 우주정거장에서도 해야지. 무중력 상태에서.


노시(빵을 위해 참아야 한다) 물론 섹스도 중요하지만, 들어 보시오. 젊은이들.
(목소리를 가다듬어 낭송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숙녀뭐야? 삼류 코미디도 아니고?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이런 건 없소?


청2야, 가자, 가. 영혼이 밥 먹여주냐!


노시(붙잡는다) 바빠서 귀 기울일 시간이 없다면, 여기 이거 육필 원고를 사시오.


청1아, 이 노인네 정말. 영혼인지, 시인지…… 그거랑은 (섹스 시늉) 이거, 이거를 할 수 없잖소!


노시젊은 지성들이 밤을 새워 읽으며 눈물을 흘리던…….


노파(돕는다) 그럼요, 애절한 사랑의 시. 촛불을 밝히고…… 촛불도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오.


청1아니, 크로마뇽 시대에도 젊은 지성인이 있었다는 겁니까?


숙녀어머머, 그 원시 시대에도 지성인이 있었대?


청2어쨌든 우린 필요 없수다. 가자.


노시(다급하다) 제발, 빵 한 조각 살 돈이면 되오. 우린 배가 고프오. 나는 펜 대신 뼈를 깎아 펜촉을 만들었소. (옷을 벗어 보인다) 여기 갈비뼈를 보시오. 여기 뼈를 뽑아 펜촉을 만들고, 잉크 대신 피를 찍어, (낡은 원고지를 보인다) 이거 보시오. 피로 쓴 시요. 피의 잉크! 이쪽 것은 눈물을 찍어 쓴 시고.


노파(낭송한다) “그 총탄은 너무 무거워, 나는 산 아래 쓰러졌네, 훈장은 가슴 위에서 녹슬어가고, 무당벌레의 앞발이 나를 누르네.” 전율이 흐르죠? 얼마나 감동적이유?


노시뼈를 깎아 만든 펜으로, 아시오? 피를 찍어. 심장의 피를 찍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그러나 오늘날엔 이 지경이 되어…… 빵 한 조각 값이면 됩니다.


숙녀(귀찮다) 아 듣기 싫어, 그놈의 빵 한 조각! 주세요. 얼마예요!


노시고맙습니다. (낡은 원고지 몇 장을 준다)


숙녀(돈 쉽게 꺼내 준다) 만 원이면 되죠? 제발 징징거리지 마세요. 늙은것들 우는 소리 소름 끼치니까.


노시감사합니다.


숙녀(받은 원고지로 뭘 할까 잠시 생각…… 핸드백을 닦는다)


노파…….


숙녀(뒤이어 구두를 닦는다. 그리고 가볍게 집어 던진다)


노시내 시를……? 젊은 날 밤을 새워 쓴…….


숙녀왜요? 이까짓 휴지, 그럼 돈으로 닦으란 말예요?


노시(절망스럽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젊은이들, 자리를 옮기려 하자 노파가 나선다.


노파어딜 가요, 이리 와요. 내 물건 구경들 해요. 좋은 거 많아요.


숙녀글쎄, (마지못해) 이건 뭐지? 이 넝마 같은 거.


노파(철창의 깃발을 떼어낸다) 10월 혁명에 휘날리던 깃발이라오. 혁명 아시지, 혁명! 이건 그 유명한 프랑스 혁명 때 깃발이고. 요쪽 요거는 5월 혁명의 깃발! 순수하게 붉은. 이봐요, 태양보다 붉고 피보다 진하지 않아요? 앵두가 붉다 해도 이보다 더 붉겠어요? 피로 염색을 한다 해도 어림없지. 싸요, 사세요. 혁명의 깃발.


숙녀(고개 젖는다) 피의 잉크, 피의 깃발, 뻑하면 피구만. 뻑하면 피야.


노철그게 역사라오. 피의 흔적, 피의 발자취. 이 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20세기 마지막 혁명의 따님이요. 20세기를 관통하며 줄기차게 피 흘려온.


숙녀됐거든. 나도 한 달에 한 번씩 줄기차게 피 흘리거든. 나 그것 때문에 유감 많은 여자거든.


천 조각들을 떼어내자 비로소 철창은 철창으로 분명한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젊은이들, 노파의 물건에 관심이 없다. 대신 철창에 관심을 보인다.


노시(빠르게 눈치채고) 이 물건이 마음에 드시오?


노철아, 당연히 관심이 갈 거요. 이것이 무엇이냐. 인류는 이 위대한 기구를 발명, 최초에 뭘 했느냐. 놀라지 마시오, 여기다 새 한 마리를 잡아넣었소.


숙녀날아다니는 새요?


노철그렇지요, 하늘을 나는. (노 시인에게 빠르게 눈짓)


노시(철창 안으로 들어가 새를 흉내 낸다) 바로 이렇게, 나는 한 마리 날지 못하는 새요.


노철그다음엔 곰, 그다음엔 원숭이.


노시(철창 안에서 원숭이를 흉내 낸다)


노철그다음엔 뭘 잡아넣었겠소?


숙녀난 알아, 미친놈! 맞죠?


노철맞습니다, 사람! 드디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넣기 시작했습니다.


노파(급히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나도 갇혀 있었다우. 10년 넘게.
(철창을 흔들며 소리친다) 자유를 달라! 자유가 아니면 죽여라, 죽여!


노철시인도 잡아넣고, 광대도 잡아넣고, 감옥은 그렇게 서서히 비대해져 마침내 거대한 고층 빌딩으로 발전했소. 바로 이 물건이 감옥의 변천사를 말해주는 휴대용 감옥이요, 단돈 1만 원.


청년2여기다 원숭이 대신 우주인을 잡아 가두라는 건 아니시겠지!


노철(주춤한다) 아, 아니오, 꼭 사라는 게 아니라 인류 역사의 아킬레스건 같은…….


청년1(수상기를 가리키며) 그러니까 저런 거 아니요? 기분 나쁜. 24시간 감시체제의 CCTV. 그런거 말고 뭐 산뜻한 거 없어요? 우중충한 거 말고.


노파(급히 철창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이거. (붉은 스카프를 찾아 숙녀 목에 걸어준다) 그렇지 이거 어때요, 붉은 스카프.


숙녀(벗어주며) 됐거든요 할머니. 나 싫어, 붉은색 혐오해. 피 묻은 스카프.


노파(팔 물건이 없다, 그러나 적극적이다) 어쨌든 내 나이 아흔 살, 나는 세 살 나이에 세례를 받았다오. 피의 세례. 그리고 곧장 다섯 살부터 혁명에 뛰어들었다오.


노시이미 다섯 살 때 이 스카프를 두르고, (깃발을 찾아) 여기 이 깃발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서, 유모차도 없이.


노파유모차는 없었지, 그러나 무엇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아시겠소, 젊은이?
민주주의? 그리고 거룩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청2그런데 혁명의 깃발이 왜 이 모양이오? 비 맞은 개처럼 후줄근하잖아!


노파(어떻게 해서든 팔아야 한다) 그거야 흔들면 되지요. 힘차게. (깃발을 흔든다)


노철(동조해 큰 깃발을 흔든다) 이렇게 흔들었소. (그러나 기력이 없다)


청1(조롱한다) 하하, 잠자는 깃발이여!


숙녀혁명의 파김치여!


마침 광대가 들어선다.


노파(요청한다) 어이 이리와 우리 좀 도와줘. 깃발, 깃발 좀 흔들어줘.


노철도와주게, 광대 선생.


광대하하, 나도 쓸모가 있구만.


노파(간절하다) 그래, 광대 선생. 깃발을 힘차게, 깃발이 무언지 한번 보여줘요!


광대, 북을 치며 깃발을 흔든다. 보란 듯 행진한다.
노 철학자가 그 뒤를 따른다. 어기적거리는 발걸음. 비틀거리는 깃발.


노파봤죠? 나부끼는 붉은 깃발, 혁명의 북소리. 심장이 뛰지 않아요?
여기 『혁명의 이론과 실제』라는 책도 있어요. 단돈 1만 원.


숙녀글쎄, 우린 책 안 읽는다니까요.


노파저 혁명의 북소리…….


청1됐다니까요.


노파싸게 해드릴 테니…… 빵 한 조각 값이면 되오. 저 가슴 뛰는 혁명의 북소리를 들어 봐요. 깃발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이 물건을. (폭탄을 집어 든다)


청1치워요! 그따위 고철이 왜 필요해! 정말 못 말리는 꼰대들이네.


광대손님, 이건 고철 덩어리가 아니라 폭탄이요. 폭탄.


청2폭탄?


노파자살 특공대라고 들어 봤지요? 바로 그 성스러운 폭탄이라오, 테러용.
이쪽 것이 여성용인데…… (시범을 보인다) 여기 수류탄 두 발. 이걸 가슴에 차는 거라우. 붕긋한 처녀 젖가슴처럼. 소위 말하는 부레저용 자살 폭탄이라는 거유.


청1와 살벌하구만, 20세기!


광대그리고 이건 가랑이 사이, 여성 그곳에다 삽입하는 폭탄. 이렇게 안전핀을 제거하고 이곳에 집어넣지. (가상 폭탄을 가랑이 사이에 넣는 시범을 보인다)


숙녀어머, 짜릿짜릿하겠다.


노시열다섯 꽃다운 나이, 여전사가 떠나는 날 우린 두 손 모아 기도를 했소.
“그대 어린 딸, 그러나 혁명의 누이여, 어머니여,
국가와 민족이 너를 부른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가시밭 순교자의 길.
그 길은 죽음이 아니야. 하느님의 이데올로기.
꽃잎 지면 저 하늘에 별이 되리라.
그대 어린 딸, 그러나 혁명의 누이여, 어머니여,
영원히 빛나는 밤하늘의 별이여”


광대기도가 끝나면 치마를 내리고 길을 떠나지. 독재자의 성으로.


광대가 시범을 보인다.
폭탄이 터지지 않게 살살 걷는 시범. 궁둥이가 실룩댄다.


광대(연기해 보이며) 스텝을 가볍게 조심조심, 엉덩이를 흔들며 조심조심, 섹시도 좋지만 조심조심, 지나치게 흔들면 안전핀이 빠져서 펑!


노파(극중극) 독재자는 치마를 들치고 우리 몸을 더듬지. 우리 꽃다운 혁명의 처녀들은 징그러운 그 손에 몸을 맡겨요.


광대(연기) 이러지 마세요, 독재자님. 입술만은 돼도 입술만은 돼도 그것만은 안 돼요, 안 돼요, 하다가 꽝!


노파그렇게 꽃처럼 산화했지. 우린 그렇게 투쟁했소. 성스러운 저항정신으로, 자유를 위해 세계 평화를 노래하며.


청1(조롱하듯) 자유와 경제와 하느님, 그리고 세계평화 기타 등등을 위해?


노파그럼요, 기타 등등이지요. 그러나 오늘은 빵 한 조각에…….


청2좋소, 빵 한 조각 때문이라면 할 수 없지. 그런데 말이요, 넝마 쪼가리 같은 혁명의 깃발, 혁명 교본, 이따위 건 걷어치우고…… 혁명인가 투쟁인가, 그거 한번 직접 봅시다. 실제상황으로!


청1와 그거 볼만하겠다? 실제상황.


광대(놀라) 실실…… 실제상황이라뇨?


청2우리 영화 많이 봤어요, 혁명 팔아 돈 챙기는 순 사기 할리우드식 영화.


숙녀맞아, 〈혁명아 드라큘라〉. 이게 말이나 돼? 드라큘라 백작이 혁명을 위해 뱀파이어와 손잡고.


청1혁명을 위해 뱀파이어와 손잡아?…… 와 죽인다.


숙녀그래, 뱀파이어와 손잡고 피를 쪽쪽 빨아먹고 끝내 성공하는 거야, 혁명에.
이게 말이나 돼! 사기지!


청1또 있어, 〈혁명 소녀 신데렐라〉. 신데렐라가 빨간 구두를 벗어 들고 뛰는 거야, 혁명의 현장으로. 사랑하는 체 게바라를 구하기 위해. 거기서 체 게바라가 왜 나와? 사기를 쳐도 적당히 쳐야지.


청2들었죠? 이 수준이에요. 우린 볼 때마다 짜증 나요. 그러니까 라이브로 보자는 겁니다. 리얼하게!


노파아유, 안 돼요, 그건 위험하지요.


숙녀할머니 한 번만. 라이브. 혁명 팔아 사기 치는 혁명 쇼 말고.
할머니는 혁명정신의 순수성을 그대로 간직한 증인이잖아.


청1와, 이건 필히 봐야지. 내가 지구를 떠나기 전, 내 인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노철그건 무리한 요구요.


노파지금은 혁명의 시기도 아니고, 유혈을 초래합니다. 다시 피 흘릴 이유는 없잖아요.


청1하하, 왜 이러시나? 어차피 혁명은 유혈 아니오?


청2그리고 당신들 배고프다며?


광대(절충점을 찾았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혁명은 광대에게 맡겨주십시오.
노래와 춤을 곁들인 뮤지컬로 살짝 바꿔, 따끈따끈한 뮤지컬을 선사하겠습니다요. 광대와 노파의 혁명 뮤지컬!


노파(희망적이다) 그래요. 내가 20세기 최고의 무용수였소. 혁명의 춤을 춘 몸이라오. 혁명의 춤, 투쟁의 춤. 총칼이 번쩍이며 탱크가 달려오는데, 바스티유 광장 단두대의 시퍼런 칼날 아래서…… 혁명의 춤을.


광대지금은 빵 한 조각, 그러나 그때는 온 인류의 꿈이었소.


청1(조롱하듯) 뮤지컬은 됐고요, 우리가 원하는 건 라이브요, 리얼한.


검은 안경의 약장수가 조심스럽게 등장한다.


안경(슬쩍 접근하며) 좋은 약 있습니다. 신종 마약, 홍콩 엑스타시.


청1(관심) 홍콩 엑스타시?


안경쉿,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슈퍼 카타르시스도 있소.


숙녀(귀가 번쩍) 슈퍼 카타르시스?


안경쉿!


광대(막아서며) 안 돼, 위험해. 뮤지컬, 뮤지컬, 따끈따끈한 뮤지컬.


안경약이요 약, 천국의 문턱.


노철(뼈다귀를 휘두르며 위협) 저리 못 가, 이 더러운 약장수 놈아!


검은 안경, 슬쩍 두어 걸음 물러난다.
그러나 적당한 기회를 노리며 어슬렁거린다.
젊은이들의 관심은 약장수 쪽에 가 있다.


광대(젊은이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자자, 뮤지컬, 따끈따끈한 뮤지컬!


노파(적극적이다) 이봐요, 젊은이. 나도 왕자와 추는 백조의 춤을 출 수 있어요.
(발레, 〈백조의 호수〉를 시범 보인다) 라라라라 라라라.
그러나 이건 투쟁의 춤이 아니오, 노예의 춤이지.


광대암, 유방을 흔들어대는 노예의 댄스.


노파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 그 유명한 캉캉 춤 말이요. 가랑이를 쩍쩍 벌리는…… (시범) 빰빰 빠바바밤 빰빰.


광대이건 예술이 아니지. 권력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창녀의 춤이오, 창녀들의 스트립쇼.


노파(단호하다) 춤이 아니지. 예술이 아니야. 이 몸은 혁명을 노래하고 혁명을 불사른 몸이오. 인류의 꿈을 위한 혁명의 춤. 내 춤을 보여드리리다.


광대자, 오세요, 보세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의 댄스, 혁명의 춤이 왔습니다, 단돈 1만 원!


청1글쎄, 애쓰지 말라는데 이러시네. 우린 연극도 싫고 뮤지컬도 싫어.
실제 혁명의 재연, 그걸 보고 싶단 말이요.


숙녀관람료 100만 원 쏠게요, 됐죠? 100만 원!


노시(놀라운 액수다) 100만 원?


청2관람료, 1인당 100만 원. 세 명이니까 300만 원! 아니면 말고.


안경(틈새로 끼어들며) 약 있어요. 홍콩 엑스타시.


노시(노철과 잠시 눈짓을 주고받는다. 슬픈 결정) 좋소.


노철(슬프다) 하겠소. 나하고 김 시인이 부패한 군사정권 쪽, 광대와 오 여사가 혁명 전사.


노파(힘없이 또한 안타깝다) 우리가 갈라져 싸워야 하는군요?


노시(힘없이 깃발을 집어 노파의 손에 들려주며, 슬프다) 갈라져 싸워야죠.


노철(힘없이) 우린 싸워야 해, 어쩔 수 없어. 뭔지 보여줘야 해


광대(갑자기 돌변) 아뇨, 안 돼요. 선생님 그건 안 됩니다!


노철(진압봉과 방석모 등, 소품을 말없이 챙긴다) …….


광대(진압봉과 방석모를 뺏으며 진정으로) 어차피 저는 광대지만 순수한 그 정신이…… 선생님들에 의해…… 그건 절대 안 됩니다. 혁명정신이 웃음거리로 농락당할 순 없습니다.


노시(힘없는 손으로 진압봉을 다시 빼앗는다) 그거 이리 주게. 우리더러 굶어 죽으란 말인가? 이대로?


노철(방석모를 뺏어 들며, 변명처럼 슬프다) 당장 오늘의 빵을 마련할 수 없다네.


광대제가 있잖아요. 제가! 제가 대신 마련하겠습니다, 제가 마련하겠다고요!


노철우리 빵을?


노시자네가 대신?


숙녀아저씨 광대 맞아? 광대라면 웃겨야지, 쓸데없는 슬픔 연출하고 자빠졌네!


광대(노인들에게 진정을 다해) 쥐약에 이약, 비아그라에 접착제 이것저것 열심히 팔면 하루 빵 네 개는 가능합니다. 네 개를 구하지 못하는 날은 조금씩 나누어 먹으면 되고요.


노시(완강하다) 아니, 그럴 순 없네. 우리가 자네를 얼마나 비웃었는가. 인간으로 취급도 안 했지. 하류 딴따라 광대 놈이라고. 그러던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면목으로…… 후회스럽지만 이미 늦었네. 책 몇 권 더 읽은 게 무슨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을 비웃듯, 우리는 학력 없는 놈들을 비웃었지. 절대 인간 취급하지 않았지.


광대인간 취급은 내일부터 해도 늦지 않아요. 그러니 제발 그 곤봉을…….


노철(완강하다) 나는 내 학문과 내 주둥이로 그들 권력에 봉사하는 나팔이 된 적이 있었다네. 아닌 척 고고하게 나 자신을 속여왔지. 직접 봉사하지 않았다 해도 모른 척 눈 감고 있었지. 그런 우리가 어찌 자네 빵을…….


청1뭐 이렇게 사설이 길어? 할 거요 말 거요!


안경(끼어들며) 약 있어요. 홍콩 엑스타시.


노철(허겁지겁) 해야죠, 합니다. 광대야 빨리 저쪽 편에 서라.


광대(거의 울먹인다) 이건 아닙니다, 선생님.


노시(얼굴을 못 들고) 오 여사, 자 저쪽에서 깃발을 휘날려요. 옛날처럼.


청2(조롱) 아, 눈물 난다, 눈물이 앞을 가려. 혁명은 일단 슬프게 시작되는 거구만!


숙녀그래서 고귀한 거래. 갈라서면 안 되지만 갈라서야 하는 운명! 싸워서는 안 되지만 싸워야 하는 운명.


청1아하, 싸워서는 안 되지만 싸워야 한다? 졸라 철학적이다.


진압군과 혁명군 양쪽 진경으로 갈라선다.


숙녀진압군 두 명에 혁명군 두 명…… 혁명이 뭐 이따구야? 너무 초라하지 않아?


청1거기 구경하는 아저씨, 일당 줄게 출연하시죠.


청2네, 오세요. 거기 아줌마도.


아줌마정말 일당 주는 거죠.


청2물론 출연료 드리죠. 리얼하게만 하세요.


구경꾼과 아줌마도 양쪽에 한 명씩 참가한다.
광대, 깃발을 휘두르며 북을 친다.
노파, 깃발을 휘두른다. 우울하기 짝이 없다.


노철(방석모를 쓰며) 폭도들이 몰려오고 있소.


노시싹 쓸어버려! 기생충들!


구경1폭도들은 해산하라!


노파(거리를 좁혀 들어오며) 독재정권 살인정권! 이코노믹 바이러스!


광대(거리를 좁히며) 물러가라, 물러가라.


아줌마(깃발을 휘두르며) 요구한다, 때려죽여!


노철해산하라. (진압봉을 휘두른다. 힘이 없다)


숙녀이거 뭐야? 시체야, 미라야? 박진감이 없잖아! 박진감!


청2더 거칠게 밀어붙여야지. 화염병 없어? 최루탄!


청1진압봉 뭐 해? 이런 씨발 내리쳐야지. 리얼하게.


지척대는 노인들의 몸짓이 슬픔을 부른다.


청1돈 받기 싫다는 거야, 뭐야? 좀 더 리얼하게!


청2한번 제대로 해봐라, 제대로! 아니면 때려치우고.


노 철학자의 진압봉이 노파의 머리를 향한다.
그러나 손을 멈추고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청2(야유) 내리쳐! 폭력 없이 무슨 혁명?


노파(작은 소리) 괜찮아요. 곤봉을 휘둘러요. 어서요.


노철오 여사, 나는 정말 못 하겠소.


노파빵이 날아가요, 어서요. 내 머리통을 내리쳐요!


노 철학자, 차라리 울고 싶다.


노파어서요!


노 철학자, 어쩔 수 없이 노파의 머리를 곤봉으로 때린다. 물론 힘없이 살살.
노파, 힘없이 쓰러진다.


숙녀이게 뭐야? 시시하게. 피가 안 나잖아. 한 방울도.


청1집어쳐! 때려쳐! 취소, 취소.


청2이따위 걸 가지고 뭐 혁명? 유혈 없이 무슨 혁명?


숙녀돈을 그냥 쌩으로 먹겠다는 거네. 혁명 팔아서.


노철(절망스럽다) 오 하나님.


노시(깨어나듯, 자괴감) 이게 무슨 꼴인고? 우리가 무슨 짓을.


아줌마그럼 뭐야? 돈을 못 받는 거야?


광대(노파를 돌보며) 다치지 않았어요?


노파(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약간 어지러워. 어지러울 정도야. 괜찮아.


노철(미안해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내가 무슨 짓을…….


노파어지러울 정도야 괜찮아, 그런데 우리 빵은…….


안경(절호의 기회다, 끼어들며) 약 있어요, 약. 천국으로 안내하는 홍콩 엑스타시.


숙녀(안달이다) 천국의 경험, 홍콩 엑스타시래.


청1(이미 노파에게서 관심이 떠난다) 가지.


숙녀얼마예요? 홍콩 엑스타시.


노파(다급하다) 젊은이, 제발. 내 춤이 싫고…… 혀…… 혁명에 실망했다면, 이 몸…… 내 몸을 사시오.


청2(귀를 의심하며) 뭐요? 지금 뭐라고 그랬어요?


노철(슬프다, 말리며) 오 여사, 우리가 그렇게까지는…….


노파(들리지 않는다) 내 몸을. 혁명의 춤을 추던…… 그러나 오늘은 빵 한 조각 값.


숙녀이 할망구 미쳤나 봐. 그 몸으로 뭘 하겠다고? 비켜요 저리!


노파(청년2에게 진지하다) 몸은 늙어 이 지경이 됐지만 한평생 혁명을 춤추던 몸.
나는 배가 고프다오. 젊은이 제발 뿌리치지 말아요. 투쟁으로 단련된 화끈한 테크닉, 그러나 오늘은 배고픈 노파라오. 뿌리치면 죄악이지요!


청2(할 말을 잃고,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못한다) …….


노파불꽃처럼 타오르던…… 단돈 만 원. 적선하는 의미에서…….


숙녀저리 비켜! 혁명이라니! 개 똥구멍만도 못한 늙은 매춘부 년 같으니!
(청년2를 잡아끈다) 구역질 나, 빨리 와!


안경약 있어요, 약. 홍콩 엑스타시.


청년2를 서로 잡아끌며 노파와 숙녀가 실랑이한다.


숙녀손 놔! 그 더러운 손!


노파제발, 적선하는 셈 치고.


노 철학자, 견딜 수 없는 슬픔과 분노. 동물 소리 같은 비명을 지른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동병상련, 자기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다.
노 철학자, 발작을 일으키듯 붉은 깃발을 찢는다. 깃발을 찢는다.
찢은 깃발을 들고 미친 듯 나무 밑으로 향한다.
발판을 놓고 오른다. 깃발을 찢어 만든 긴 천(밧줄처럼)을 나무에 묶는다.
목을 매려는 것이다.


노시저저…… 저…….


청1뭐야? 저 노인네 왜 저래?


광대안 돼! 안 돼요!


목을 매려는 일촉즉발의 순간, 당혹과 혼란의 무대.
그때 무대 밖으로부터 환한 빛이 쏟아진다.
그 빛 속에 아름다운 미녀가 등장한다.
갑자기 넋을 잃고 모두 그녀를 바라본다.


사이버그건 옳은 선택이 아니에요. 그만 멈추세요.


모두(침묵) …….


사이버(부드럽다) 선생님이 갖는 고뇌, 그리고 시대적 슬픔 충분히 알아요, 끈을 풀고 내려오세요.


노철…….


사이버내려오세요. 자, 여기 제 손을 잡아요! (손을 뻗는다)


노철(손을 잡고 발판에서 내려온다) …….


사이버(노파에게) 늙은 여인이여,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그 손을 놓아요.
혁명은 잠들고 그날은 갔어요. 다시 오지 않아요.


노파(힘없이) 혁명의 시대는…….


사이버갔어요. 다시 오지 않아요.


노파(청년을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


노시(작게) 저 여자 뭐지? 대체 누구야?


노철눈이 부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청1(황홀하다, 감탄) 믿어지지 않아.


사이버거기 그 누추한 뼈다귀와 붉은 깃발도 땅속 깊이 파묻어요.


노시묻으래, 땅속 깊이. 이 뼈다귀들.


노시우리의 스승 니체와 마르크스 형님을……?


사이버거기 검은 안경의 약장수 아저씨. 당장 버려요. 중독성이 강한 그 몹쓸 죽음의 약.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우중충한 기억의 철제 감옥 내다 버리세요. 이젠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노철그래, 치워, 없애요.


광대그래요, 이 몹쓸 철창!


노 철학자, 노 시인과 광대와 함께 철창을 내다 버린다.


노시(돌아오며) 그런데 저 여자 뭐야? 천사?


광대맞아요, 천사, 천산가 봐요!


사이버(고개 살짝 숙여 예의를 표한다) 천사는 아니고, 내 이름은 사이보그.


광대그럼 복제…… 복제인간?


사이버아뇨. 결함 있는 DNA를 거듭거듭 복제해 봤자 제자리걸음이죠. 미래의 희망이 없고, 아무런 대안도 없는. 인간 복제 프로젝트는 이미 폐기처분됐답니다. 동물 복제 수준에서…….


여럿(각자 수런수런)


사이버놀랄 거 없어요. 내 이름은 인조인간. 이미 예측되었던바 저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태어났어요. 온 인류의 뜨거운 열망과 끈질긴 기다림의 결과물. 제가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렇게 당신들 곁에 왔어요. 모든 생명은 진화하는 법, 우주 시대를 열며 새롭게 창조된 나, 사이보그. 인간의 새로운 희망과 무한한 가능성, 그리고 무한 쾌락을 위해 만들어졌답니다.


청1(청년2를 돌아보며) 무한 쾌락?


노파그럼 우린?


노시이제 무덤으로?


사이버(위로한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서 제가 왔잖아요.


광대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내 머리통 어디 갔나? 당신이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노시(조심스러운 희망) 설마 그 사람…….


노파(조심스러운 희망) 설마…… 구, 구, 구세주는…… 아닐 테죠?


사이버구세주라니, 아니에요. 하지만 서로 손잡고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는 일, 그건 어려울 게 없어요. 전혀 어렵지 않아요.


노파(강한 희망) 어려울 게 없다고?


사이버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어려울 게 없어요. 하나도.


광대아이쿠, 내 머리통은 여기 있고, 내 모가지 어디 있냐, 모가지 조심하자.


사이버제가 대신 몸을 팔아 할머니의 빵을 마련할 거예요.


여럿(믿어지지 않는 놀라움) ……?


노파처, 처, 처녀가…… 대신?


사이버네,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요. 거기 두 분 노동력이 없는 노인의 몫까지.


노철아니, 처녀가…… 우, 우리의 빵까지?


사이버새로 개발된 사랑과 헌신과 자기희생의 유전자를 장착하고 태어난 사이보그.
그게 제 운명이랍니다.


광대그럼 천국이 지상에서 실현되는 거네. 천국이 지상에서 (하다가 입을 막는다) 아니 난 그런 말한 적 없어. 아이쿠, 내 모가지.


노철거짓말이야.


노파거짓말예요?


노철거짓말이지. 왜 불가능하냐? 인간이 갖는 이기적 유전자, 그 흉악한 모순덩어리는 변하지 않았어, 인류 탄생 이후 한 번도!


노시(격하게 동조한다) 맞아,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 오면서도 끝내 그것만은 변하지 않았소! 마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듯.


노철그런데 헌신의 유전자, 자기희생의 유전자라니!


사이버안타깝도록 지긋지긋했죠. 유전자 정보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 바로 그 슬픈 DNA, 그 사슬을 살짝 끊어냈답니다. 아주 간단하게. 과학의 힘을 빌려.


청1와, 과학의 힘.


숙녀과학, 그래서 우리는 도시락 싸 들고 섹스 여행을 떠나는 거야.


청2늙고 병든 지구를 버리고 팽창하는 우주로!


사이버그렇다고 누구 특별한 존재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랍니다. 나를 탄생시킨 건 바로 당신들의 꿈, 그리고 당신의 손.


노시맞아, 꿈을 꾸었지. 그건 우리 꿈이었소.


노철(긍정한다) 우리 꿈은 간절한데, 왜 그 꿈을 이룰 수 없는가, 우린 안타까웠지. 나는 평생 안타까워했소.


노시하지만 우리 손으로 만든 건 아니오. 나는 꿈을 꾸며 평생 시만 써왔소!


노파나도 아가씨 같은 딸을 만들고 싶었다오. 하지만 능력이 없었지. 나는 그런 재주가 없어 평생 춤만 췄다오. 혁명의 춤, 투쟁의 춤!


사이버할머니의 춤도 인류의 꿈이었어요. 할머니의 춤과 선생님의 시가 그들을 감동시킨 거죠. 바로 당신의 아들인 과학자, 여러분의 손자며 사촌인 생물학자, 그리고 성직자의 마음을…….


노철(긍정한다. 기쁘다) 맞소, 맞아요, 내 자식은 아니지만 아들놈의 친구가…….


광대(기쁘다) 하하, 나도 있지. 우리 사돈에 팔촌에 처삼촌이 핵융합을 연구했어요. 광대의 가문에도…….


노철(기쁘다) 아하,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거야! 우리의 꿈이었던 신인류의 탄생을.


모두, 기쁘다. 또한 자랑스럽다.


청1아하,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첫 번째 사업으로 타인의 빵을 위해…….


청2(농도가 짙어진다) 이 아리따운 육체를 팔러 나오셨다?


사이버네, 새로운 상품. 거부할 수 없는 구매욕.
(자신의 몸을 홍보한다) 이 살결을 보세요. 인간의 피부보다 더 부드럽고 탄력 넘치는…… 잠시 스킨십을 허락하죠. 만져 보세요. 괜찮아요. 만져 보세요.


청2(만져 본다. 그리고 팔을 목 부분에 얹어 본다) 와, 환상이다, 환상.


청1(입술을 목에 대어 본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와, 죽인다.


숙녀(열 받아 거칠게 뜯어내며) 지금 뭐 하는 거야! 지저분하게!


청1지저분한 게 아니지, 이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광대숭배의 대상이지. 평생을 두고.


사이버그리고 여기, 아홉 개의 단추가 보이죠? (팔뚝 부분에 계기판이 보인다)
제1번, 청순한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향수. 2번, 이별을 예고하는 슬프고도 애절한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향수. 오직 동물적 욕정이 필요한 고객은 3번 단추를 눌러주시고, 에덴동산을 아시나요? 에덴동산에서의 섹스 체험을 원하신다면 4번 단추를 살짝 눌러주세요. 이렇게 다양한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향수, 즉 약물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안경약물이라면……?


사이버그러니 당신의 원시적인 마약은 폐기 처분하세요. 자, 그럼 실험을 위한 무료 서비스가 있겠습니다. 누구든 좋아요, 첫 번째 단추를 눌러 보세요.


광대(나서며) 여기 이거? 1번?


광대, 단추를 누른다. 사이보그의 가슴에서 부드러운 스프레이가 분사된다.
모두 코를 들어 스프레이 향수를 맡는다.
젊은이들은 물론 노인들까지 부드러운 사랑의 감정에 싸인다.
황홀하다. 또한 갑자기 평화롭고 행복하다.


광대할머니, 나랑 춤이나 한 곡.


청2(끼어들며) 저 아리따운 노부인 저와 가벼운 산책이나 할까요?


노파원하신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 사랑을…….


노철(숙녀한테) 우리 같이 아이스크림이나 핥으러 갈까요? 아가씨?


숙녀좋아요, 선생님 한입 나 한입, (노 시인한테 어깨동무) 그리고 선생님 한입 나 한입.


광대(숙녀한테) 아가씨, 나랑 춤이나 한 곡. (그러나 소외된다)


안경(청1의 손을 살며시 잡는다) 나는 늘 남성다운 근육을 숭배해왔소.


청1아, 숭고하며 지고한 동성의 사랑이여.


안경과 청년1, 살며시 얼굴을 비비는 스킨십.
그리고 드디어 입술과 입술이 마주한다.
부드러운 사랑의 감정들이 오고 간다. 행복하다.


광대(소외되어 우울, 초조하다가, 사이보그를 보고 환하게 접근한다) 아하, 정작 아가씨 사랑은 내 차지가 됐구만. (노래)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오. 영원히, 영원히.


사이버아저씨는 참으세요. 자기 역할을 잃어버리면 안 돼요. 아저씨 역할은 광대예요.
착한 바보 광대.


광대광대라고 사랑 못 하란 법 있소? 내 사랑 당신을 위해 북을 둥둥 울려줄 테요.
평생 업고 다니며 어화둥둥 내 사랑, 노래할 거요.


사이버한번 광대는 영원한 광대. 주머니는 빈털터리 돈도 없잖아요?


광대사랑을 하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단 말이오?


사이버나는 당신처럼 헐벗은 빈털터리 인생과 천대받는 창녀들, 그리고 저기 노동력이 없는 노인들을 위해 빵값을 벌어야 해요.


광대천대받는 창녀들을 해방?


사이버그 여자들 수치심과 모멸감은 내게 넘기고…… 그들은 구제돼요, 새 사람으로.
타인의 빵을 위해 내 몸을 대신 팔아야 하는 헌신적 운명. 그렇게 태어난 21세기 사이보그. 그게 새로운 세상의 내 역할이에요.


광대(감격스럽다. 무릎을 꿇어 존경의 뜻을 표한다) …….


사이버그리고 무료 서비스, 그것도 약물에 의한 사랑의 감정이 몇 분 지속되겠어요? 불과 5분, 이미 그 시간이 끝나가고 있어요.


사이보그, 광대에게 무언가를 설명한다.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사랑을 전하듯
광대, 추종자로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스크림을 핥고 춤을 추던 노인과 젊은이들, 사랑의 감정에서 벗어난다.
약효가 지속되는 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청1(약효에서 깬다) 이거 뭐야, 내가 이 도둑놈 같은 자에게 입술을 준 거야?


숙녀(놀라) 말도 안 돼, 이렇게 추한 늙은이와…….
(아이스크림을 던진다) 함께 핥은 거야? 이걸!


청2아니, 내가 이 할망구를 끼고…… 와 미치겠네.


노파(아쉽다) 하지만 그 순간은 황홀했지. 눈에 콩깍지가 쓰인 것처럼.


노시잔인하군. 꿈이라면 깨지 말 것을…….


숙녀(그런데 아쉽다) 모를 일이야, 이렇게 추한 늙은이와 아이스크림을 핥으면서 행복했다니…… 꿈길처럼.


사이버어떠셨나요?


청1어쨌든 대단하구만. 이 구역질 나는 남자 입술을 빨면서 짜릿했다니, 당신 호모지? 게이!


사이버그 감정과 그 감각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답니다.


광대(나선다) 보세요, 오세요. 이 상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 은하 세계에서 도래한 이 신비의 사이보그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사랑도 원하는 상대가 있는 법. 황진이 사랑이냐, 클레오 파트라 사랑이냐, 아니면 양귀비냐, 조세피나냐, 인어공주 버전에 백설공주 버전, 아라비안나이트 버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이보그, 가슴의 스위치를 누른다. 화면에 동서고금의 미녀 사진이 떠오른다.


광대골라, 골라, 골라들 보세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들이 총출동 드라마틱한 상황의 시나리오를 입력, 숲속의 섹스, 우주 공간에서의 섹스, 천국에서의 섹스, 4차원 무중력 상태에서의 섹스, 특별한 취미를 가진 고객을 위해 지하 묘지에서의 섹스까지 다양한 체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청1와! 천국에서의 섹스.


광대여기 스위치를 누르면 빨간 알약 하나와 함께 언제라도 천국으로 모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노시아가씨, 나는 양귀비랑……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만, 가격이……?


광대(빼낸다) 저리 빠져요. 결정적으로 돈 없잖아요. 돈!


노파(면박) 아이고 눈치가 있어야지. 저 아가씨가 누구 때문에 몸을 파는 건데? 바로 당신과 내 빵을 위해 대신 나선 거잖아요. 눈치 좀 있으라고요!


노시(아쉽다) 하지만 양귀비는…… 죽어도 여한이…….


청1좋아, 아가씨. 크레오파트라와 아니, 시바의 여왕과 4차원 무중력 상태에서…….


숙녀(기가 막히다, 거칠게)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럼 난 뭐야? 나 있는데 왜 이 여자한테 껄떡대!


청1야, 니가 크레오파트라냐? 니가 황진이야? 아니잖아.


청2넌 그냥 발에 차이는 보통 여자잖아! 그리고 네가 이 여자보다 예쁘냐?


광대그리고 또 한 가지, 이런 말까지 안 해도 되지만…… 혹시 괄약근이라고 아시는지?


청1(이미 이성을 잃었다) 아, 알지 괄약근!


안경(이미 이성을 잃었다) 괄약근 그거 죽이지.


광대이 고혹적인 사이보그의 괄약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수심 5천 미터 바다 밑 해면체와 화성의 특수 광석 나노암몬에서 뽑은 최첨단 재질을 합성…….


청1(숙녀에게) 야 봐라, 최첨단이래잖아! 최첨단!


청2(숙녀에게) 우리가 네 괄약근 모르냐? 너 최첨단 아니잖아!


숙녀에이 저질, 개놈의 새끼!


청1그리고 니가 천국 보내냐? 기껏해야 홍콩 정도지.


청2야, 홍콩은 무슨 홍콩, 인천도 못 보내더라.


노철그래요, 아가씨가 이해해야지.


숙녀기가 막혀, 이해라니, 그게 할 소리예요? 20세기 마지막 철학자란 사람이!


노시그럼 누가 이해할 거요? 패기만만한 젊은이 둘이 우주여행 떠나기 전에 특별한 경험을 하겠다는데 아가씨가 이해해야지.


노파아가씨가 자꾸 태클 걸면 우린 굶어요. 우리 세 늙은이 빵이 날아간다우.


숙녀아냐, 난 못 참아. 너 이 더러운 년!


노파(꾸짖는다) 더럽다니? 저 여자 저 먹자고 나선 거 아냐! 저 여자 배 안 고파. 배고픈 건 우리야, 우리 세 늙은이와 이 슬픈 광대. 혁명 1만 년 역사에도 저런 여자는 없었어. 타인의 빵을 위해 대신 나선 사람은! 뭘 좀 알고 떠들어!


노철없었지, 혁명 5만 년 역사에도. 단 한 명 없었지. 눈을 까뒤집고 봐도. 모두 내 빵을 위해 싸웠던 거야!


노시내 빵. 오로지 내 빵! 그것이 속보이니까 구호를 살짝 바꾼 것뿐이야. ‘우리의 빵’으로.


광대구호만 살짝 바꿨지. “빵을 달라, 빵을 달라, 우리에게 빵을 달라!”


노철타인의 빵을 위해 대신 나선 사람은 이 사이보그 처녀가 최초요.


노파자, 총각들 준비하셔. 누가 먼저 할 것인지.


청1얼마요? 크레오파트라와 에덴동산 버전으로.


청2야야, 내가 먼저. 난 천국의 계단에서 한 번 하겠어. 악마처럼 뜨겁고 코카인처럼 화끈한 섹스 오브 화이어!


숙녀(잡아끌며) 정말 이럴 거야? 추잡하게.


청2(밀쳐내며) 야야, 넌 빠져.


광대크레오파트라와 에덴동산에서의 섹스는 2백 2십만 원, 선금 되겠습니다.


청2알았어, 카드 결제되는 거죠?


숙녀(뜯어내며) 너 정말 미쳤어! 그럼 난 뭐야?


청2야야, 비켜. 너 최첨단 괄약근 아니잖아!


숙녀(저주) 이런 더러운 새끼! (저주의 화살이 옮겨간다) 그래 너 더러운 년, 내 가슴에 못을 박고…… 너 두고 보자. 온 세상 여자들이 널 저주할 거다. 네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게 해줄거야! (살벌하게 퇴장한다)


노시이상한 여자군. 새로운 세상 21세기에 낡은 도덕에 매달려 있다니!


노철암, 소크라테스 대갈통을 박살 내며 얻어낸 세상인데…….


광대자 그럼 첫 번째 고객부터.


사이버(부드럽게) 그럼 따라오시죠, 옥타비아누스 황제여.


배경 막에 에덴의 동산이 투사된다.
사이보그와 청년1, 에덴동산으로 들어간다.


노파(기쁘다) 빵이 해결됐으니 그럼 우린 뭐를 하죠?


노철계속 역사를 연구해야지.


노시나는 시를 쓰고.


노파그럼 저는…… 계속 혁명에 몰두하나요?


노철혁명은 필요 없지. 천국이 도래했는데 혁명이 왜 필요하겠소?


암전된다.




3장
벼룩시장 (같은 장소)


노파, 혼자 초조하게 서성거린다. 목을 빼 무대 밖을 살핀다.
노 철학자가 급히 들어선다.


노파(걱정되어 급히) 어떻게 됐어요?


노철(걱정되어) 피를 흘렸데.


노파피요?


노철매를 많이 맞아서. 너무 많이 맞아서.


노파믿어지지 않아요. 혁명의 시대는 갔는데 또 피를 흘리다니…….


노철전 세계의 창녀들이 들고일어났다지 뭐요? 기존 이데올로기의 권력이 기존 이데올로기의 신앙인들과 결탁해서.


노파아니, 몸 파는 년들이 감사해야지, 지들을 수치심에서 해방시켰는데? 빵까지 해결해주고.


노철(분노) 제 버릇 개 못 주는 거지!


노파어머 안 돼요. 타인의 빵을 위해 대신 나선 최초의 사이보그, 거룩한 여인이여!


노철(깊은 분노) 세상은 변하지 않아. 역사는 변하지 않아! 왠지 아슈? 그놈의 유전자! 바로 그 개 같은 DNA!


노파맞아요, 그래요. 그 몹쓸 DNA 사슬을 끊어낸 최초의 인간인데…….


북소리가 들려온다.
광대가 북을 치며 들어선다.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이다.


경찰(바로 뒤를 따르며) 더 신나게 두드려! 더 크게 울리도록!


광대(북을 친다, 힘없이) …….


경찰더 크게. 만천하에 울리도록!


광대(북을 친다.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노파와 눈이 마주치자 외면한다) …….


청년1과 시인과 약장수가 들어온다.


노시와요, 와. 저기…… 매를 맞으며.


무대 밖에서부터 웅성거림이 다가온다.
사람들, 철창을 밀고 들어선다.
철창 안에 사이보그의 모습이 보인다.


구경1죽여라!


안경이년, 이거 흉측한 년이요. 약장수!


숙녀니 눈에서 피눈물 흘릴 날 있다고 경고했지! 내 사랑 작살낸 년!


사이버이건 아냐, 내보내줘. 이건 코미디야, 슬프고 추한 코미디. 당신들은 자신이 행하는 짓이 무언지 몰라.


경찰(채찍) 시끄러!


창녀사람들을 홀렸어! 세상의 온 남자들한테 가랑이를 벌리면서!


사이버새로운 21세기. 당신들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어! 내보내줘!


경찰내보내달라고? 그렇지 않아도 여기서부터는 네 발로 걸어야 해.


경찰과 사이버경찰이 철창에서 그녀를 거칠게 끌어낸다.
뒤이어 십자가가 들어온다.


경찰자, 이제부턴 이걸 지고 네 발로 걸어라.
(사이보그 경찰과 함께 십자가를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는다)


경찰자, 이제 네 발로 걸어.


사이경찰(채찍으로 내리친다) 걸어, 빨리!


십자가를 멘 사이보그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사이보그 경찰이 채찍을 가한다.


안경꼴좋다 약장수 년! 뭐 중독성이 강한 홍콩 엑스타시를 버리라고!


창녀온 세상을 음란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년! 내 고객을 훔쳐 간 년!


사이경찰(채찍질) 똑바로 걸어!


비틀거리는 사이보그.


노파(곁으로 가 십자가를 받쳐주려고) 그 짐을…… 십자가를.


경찰(밀어내며) 비키지 못해?


노철 (다가서며) 날 주시오, 내가 지겠소!


경찰(발로 찬다) 저리 비켜!


노철(발에 차여 넘어진다) 에구구, 에구구.


광대(북을 내리고 십자가로 뛰어온다) 불쌍한 사이보그님, 날 줘요. 내 어깨에 얹어요!


경찰(발로 차며) 넌 북이나 쳐!


사이경찰(심한 채찍질) 북을 치란 말이다! 북! 북을!


광대, 심하게 구타당하고 북을 집어 든다. 북을 친다.


안경이년이 천국을 팔았소. 지상에 천국이 왔다고!


창녀사람들을 홀렸어! 세상의 온 남자들한테 가랑이를 벌리면서!


청1(변호처럼) 아니오, 저 여자가 말한 천국은…….


안경분명 말했어, 천국! 지가 무슨 구세주인 양.


창녀감히 몸을 파는 사이보그 주제에 타인의 빵? 에이 퉤! (침 뱉는다)


사이경찰(채찍질) 너는 너무 오버했어! 사이보그 주제에!


안경마약을 팔면서…….


숙녀(사이보그의 머리채를 쥐며) 너 이년, 꼴좋다.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이 그날이야!
언젠간 피눈물 흘리는 날 있다고 경고했지.


청2우주가 팽창하는 시대에 이런 돌연변이 같은 년이 왜 생겨나는 거야?
돌로 내리칠까요?


숙녀돌로 내리쳐, 아작을 내!


경찰그럴 필요 없소. 돌보다 더 무서운 고통의 십자가 형벌이 기다리니까!


안경매달아, 못 박아!


경찰여러분! 유죄를 원하시오? 아니면…….


창녀유죄요!


숙녀당연히 유죄죠!


경찰자, 그럼 판결은 끝났소. 십자가를 세우는 데 도우쇼!


여럿 달려들어 십자가를 세운다.
못질이 가해지고
사이보그의 몸이 십자가에 매달린다.


안경(야유) 자, 거기서 천국을 약속하시지!


숙녀더러운 년, 사이보그 주제에, 뭐 타인의 빵!


창녀타인을 위해 몸을 팔아? 우리 대신?


노파새 세상을 이끌어갈 새로운 희망, 신인간이 태어났는데, 오 이럴 수가…….


청1(철학자한테)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같아요. 이런 일이 언젠가 또 있었나요?


노철있었지. 비슷한 일이.


노파비슷한 일이 아니라 똑같은 일이…….


청1이해할 수 없네요. 어처구니가 없어. 인간의 영역이 우주로 팽창해가는 시대에 이런 모습이 재현된다니…….


십자가에 매달린 사이보그, 갑자기 웃는다.


모두(각자 놀란다) …….


숙녀저 여자가 웃어요. 저…… 저년이.


사이경찰감히 십자가에 매달려서까지…….


경찰(겁먹은) 우리를 비웃듯.


사이경찰감히 우리를 (신경질적으로 채찍질) 우리를 비웃어!


사이보그, 채찍이 가해질 때 잠시 고통스럽다.
때리다 지쳐 채찍이 멈추자 사이보그 다시 웃는다.


안경(겁먹은) 저 여자 왜 저래? 기분 나쁘게


숙녀(겁먹은) 아직도 반성할 줄 모르고…… 소름 끼치네.


사이버(웃으며)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코미디가 있을까? 당신들은 이 상황이 우습지 않나요? 인조 인간 사이보그 나 혼자 느끼는 감정인가요? 거기 당신, 사이보그 경찰관. 당신이 한번 말해 봐요.


사이경찰(외면하며) 나한테 말 시키지 마. 나는 명령에 따를 뿐이오.


사이버명령 알아요. 하지만 당신도 나처럼 새로운 DNA를 장착하고 태어난 신인류 아니던가요?


사이경찰(외면한다) …….


경찰(상급자답게 사이보그 경찰을 보호하며) 말 시키지 말라잖아! 근무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애송이야!


사이버그 대목은 약간 슬프군요. 당신의 역할이 있을 줄 알았는데…….


사이경찰(외면한다) …….


광대(사이보그 경찰한테) 말해 봐요. 새로운 인간으로 무슨 역할이……?


노파(사이보그 경찰한테 간절하다) 그래요, 당신은 필시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그렇죠? 맞죠? 저기 십자가의 여자 사이보그처럼.


광대(간절하다) 우리는 믿어요, 당신과 다름없는 신인류, 저 여자를 못 박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지 않소?


사이경찰(외면하며) 비켜요.


경찰(광대와 노파를 밀어내며) 시끄러! 공무집행 방해다, 조용히 못 해!


노파말해 봐요. 당신의 목적, 당신의 역할.


사이경찰…….


사이버그래요. 2천 년 전 어느 날 당신들은 젊은 남자 한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았어요. 미숙하나마 헌신적 사랑을 실천하려던 젊은이를.


노철그랬지. 우리들의 이기심이. 빵을 더 취하고 권력을 더 취하려고.


노시그 질서를 허무는 게 두려워서…….


사이버그리고 오늘, 지구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듯, 달과 화성에서 떠오르는 초록별 지구를 보게 되는 우주 시대의 개막. 그 찬란한 우주 시대를 여는 이 시점에 당신들은 그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있어요. 아니, 2천 년 전보다 더 치명적인 실수를. 나 사이보그는 당신들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결함을 개조한 신인류랍니다. 그리고 나를 탄생시킨 건 바로 당신들의 꿈과 이상.


청1우리의 꿈과 이상이…… 당신을?


노철우리가 진정으로 염원하던…… 우린 끝내 할 수 없었지.


노시우리보다 한층 높이 이타적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이버바로 당신들의 꿈을 당신들 스스로 땅에 묻는 겁니다. 슬픔도 당신들 몫.


광대하지만…….


사이버부활이요? 나는 그냥 죽어요. 부활을 약속하지 않아요. 기다리지 말아요.


사이보그, 고개가 툭 떨어진다. 너무 쉽게 죽는다.


광대안 돼!


노파(작은 흐느낌)


경찰죽은 거 확실하지?


사이경찰네 간단하게. 오래 끌지 않는 죽음, 그게 우리 사이보그 운명입니다.


경찰그년 마지막 대사 매우 불쾌하구만! 부활을 약속하지 않는다, 기다리지 말아라, 이런 씨팔!


안경마치 저주를 뿌리듯…… 가죠.


숙녀그래요, 뭔지 불쾌하죠. 상당히.


경찰갑시다.


세 노인과 광대만 남고 모두 무대를 떠난다.
무대는 어두워지고.


노시(작게) 우리의 꿈이 만들어낸 소녀를.


노파(작게) 우리의 손으로.


노철(작게) 역사는 바뀌지 않아. DNA는 바뀌지 않아.


광대가 북을 친다. 조용히 느리게.
십자가 뒤로 반짝이며 우주선이 난다.
광대의 북소리가 구슬프다.

막이 내린다.











오태영
작가소개 / 오태영

7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빵, 임금알, 통일 익스프레스 등 발표. 2000년 이후 통일 연극 시리즈를 발표해오고 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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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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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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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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