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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와 마젠타

  • 작성일 2022-10-21
  • 조회수 2,129

구와 마젠타


조제인







무대


신이문에 위치한 옥탑, 원룸. 장마철 잦은 비로 덥고, 또 습하다.
이곳의 장점은 신이 노하더라도 물에 잠길 위험은 없다는 것이고 단점은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집주인이 집 관리에 다소 소홀하다는 것이다.
소정과 민서가 이사 올 때부터 지붕 틈 사이로 전봇대 전기선이 조금씩 보이지만 두 사람은 이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주의사항


소정과 민서의 원룸에는 아날로그 3 : 4 화면비의 티브이 대여섯 대가 큐브와 섞인 채로 배치되어 있다. 민서가 동네에서 하나둘 주워 오던 것들이다. 극 중 이 티브이 화면을 통해 이미지나 텍스트가 송출된다.
무대에 송출되는 텍스트와 이미지는 희곡 내에서는 분홍색으로 작성되어 있다.


무대 위 소정과 민서는 큐브와 티브이를 가구 대용으로 사용한다. 그 위에서 밥을 먹거나, 잠을 자기도 한다.
그 외 공간은 모두 사실적인 사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조잡한 페인팅으로 가득 찬 파란색 가벽들과, 쓰레기를 꽉꽉 채워 야무지게 묶은 이문동 전용 쓰레기봉투 더미, 송골매 신곡 모음 레코드판, 작은 자개 문짝 같은 것들. 하지만 2부 전까지는 조명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등장인물


소정 그리고 민서.
두 사람은 서로를 끔찍하게도 아끼고 의심한다.




1부


1장


소정, 라디오를 앞에 두고 있다.
지직, 지지직, 지지직.
라디오가 장마철 폭우처럼 울며 드문드문 소리를 뱉어낸다.


라디오 소리[신이문역…… 이문2동의 재개발을…… (앞두고―는 묵음 처리) 도시재정비…… (위원회―는 묵음 처리)는 노후, 불량 건축물이 밀집해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이 필요한……]


소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몇 번 때리거나 높이 들어 올려 신호를 잡아 보려 한다.


소정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아이 캔 두잇.


소정은 의자 위로 올라가 발을 힘껏 딛고 라디오를 최대한 위로 올린다.
기적처럼 다시 신호가 잡힌다.


라디오 소리[최근 주식 시장에 격변이 불어오며 남녀노소 다소 충동적인 투자를…… 정부는 이에 대해]


소정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소정, 있는 힘껏 라디오를 때린다.


라디오 소리[꿈을 포기한 사람들, 작가, 철학가, 영화인……]


소정됐다!


라디오 소리[소설가, 수필가, 사업가, 극작가, 지식인,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나는 내 젊은 날의 꿈을 서른 번도 넘게 배반했다 말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신 영화, 〈방가방가〉의 육상효 감독님이 하신 말이 기억나는데요. 꿈이 바뀐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운 건 꿈이 없어진 것이고, 더 부끄러운 건 꿈을 핑계로 삶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옥섭 감독님의 단편 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에 나오는 내레이션이죠. 감독님은 올해 신진 예술가 지원 사업을 하고 계시죠. 꿈을 포기한 사람들에서는 저번 주 사연 신청을 받아 감독님에게 전달했습니다. 감독님이 이번 주 사연 당첨자를……]


쾅 소리가 들린다.
소정, 놀랐지만 침착하고 빠르게 의자 위에서 내려와 라디오를 구석에 밀어 숨긴다.


라디오 소리[선정하여……]


소정(소정, 라디오를 발로 차며) 잠시만요!


소정, 달려가 문을 연다. 아날로그 티브이를 안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민서.


민서도와줘…….


소정이마가 빨개.


민서부딪혔어…… 이것 먼저…….


소정, 민서 힘을 합쳐 티브이를 올린다.


민서어때? 쓸 만하지? 옆옆 건물 할아버지한테 허락받고 가져왔어.


소정, 기억이 잘 안 나는 눈치다.


민서왜, 우리 옛날에 콩국수 먹으러 간 날. 하얀색 러닝셔츠 입고 집 앞에 앉아서…….
(소정 보고) 아니다. 어쨌든 다음 주에 나가신다길래.


소정어따 쓰게?


민서봐서. 잘 고치면 당근마켓에 팔 수 있을지도 몰라.


소정저걸 다?


민서다는 아니더라도. 버리면 아깝잖아.


소정너는 꼭 저런 거에 집착하더라.


민서저런 거?


소정오래되고, 조금 낡고, 추억 같은.


민서마음 아프잖아.


민서, 옷을 벗어 걸고 앉는다. 소정, 삐죽 튀어나온 라디오 끝을 발로 자연스럽게 밀어 넣고 민서 옆에 쪼그려 앉는다. 민서, 가방을 끌어와 비닐봉지 하나를 꺼낸다.


소정뭐 가져왔어?


민서, 비닐봉지에서 초록색 청경채를 꺼낸다.


소정꿔바로우가 좋은데…….


민서나도 그래.


소정사장님한테 얘기해 봤어? 난 꿔바로우가 좋다!―하구 당당하게.


민서했는데, 알바가 꿔바로우를 가져가는 건 좀 사치래.


소정저번 주엔가 한 번 줬으면서.


민서너무 자주 그러면 버릇 잘못 든대.


소정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민서내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오늘 일 하는데 사장이 와서 나한테 코딩 배워 볼 생각 있냐고 그러더라?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코딩을 배운대. 옆집 사는 초등학생도 코딩을 배우고, 회사원도 배우고, 주부도 배우고, 심지어는 대학 가서도 코딩은 배운다는 거야. 소정아, 진짜 대학 가면 코딩 배워?


소정글쎄…….


민서근데 알고 보니까, 사장 아들이 학원 연대. 코딩 학원. 수강생 유치, 그런 거지.


소정헐.


민서게다가 달에 얼만 줄 알아? 삼십오만 원이래.


소정양심 없는 새끼.


민서세상 사람들은 내가 바본 줄 아나 봐. 코딩 그런 거 배워서 어디에 쓰겠어.


소정아니야, 그건. 분명 배워두면 어딘가 쓸 데는 있을 거야. 우리 좀 봐.


소정, 벌떡 일어나 한쪽 발로만 선다. 중심을 잡으며.


소정모두가 쓸모없다고 했지만, 요가랑 공중곡예 배운 거 잘 쓰고 있잖아.


소정, 손으로 발을 잡고 위로 든다.


소정자취할수록 스트레칭이 중요하다고. 신문에서 봤는데, 특히 원룸에 자취할수록 척추뼈가 자주 으스러진대. S자로 휘어버리거나, 아니면 다리가 굳어버리거나.


민서그럼 공중곡예는?


소정그것도 분명 어딘가 쓴다. 기다려 봐.


소정, 옆으로 쓰러진다.


소정뭐든, 배워두면 도움이 되는 거야.


민서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민서, 소정을 일으켜준다.


민서그럼, 나 코딩 배워?


소정배우고 싶어?


민서한 달에 사백만 원을 벌 수 있으면 배우고 싶을 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계산하며) 지금은 사십만 원을 버니까…… (고민하다) 배우기 싫다.


소정아직 때가 아닌 거야. 기다려 봐.


두 사람, 어느새 마주 보고 바닥에 누워 있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사이가 존재하지만 방이 좁은 탓에 멀리서 보면 아주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서고생했어.


소정뭐가?


민서원래 집에서 작업하는 게 제일 힘든 거래. 프리랜서 같은 거.


소정, 대답 없다.


민서너, 살바도르 달리 알지? 그 사람, 유학파야?


소정그럴걸.


민서어쩐지. 그 사람이 그랬다며. 나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다…… 그래서 그 가시를 떼고, 아니 가시를 뗄 수 있나? 뽑고? 여하튼. 떼거나 뽑고 병에 보관하는 일은 귀찮기 때문에 매일매일 그림을 그린다. 매일매일 그려야 매일매일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가 있다…… 기억해놨다가 너한테 얘기해줘야지, 했어.


소정그런 건 또 어디서 봤어?


민서우리 집. 책장에 있던데.


소정맞아…… 그랬지.


민서오늘은 뭐 그렸어?


소정, 고민한다. 아주 오래.


소정……베르나르 앙리 레비를 그렸어.


민서나도 보여주라.


소정아직 덜 그렸어. 사실, 거의 그리지 않은 것과 비슷해. 그리고, 미완 작품은 누구 보여주는 거 아니야.


민서그럼 얼른 완성해라, 응? 그리고 제일 먼저 나한테 보여줘.


소정완성하면.


소정, 뒤 돈다.


소정넌 너무 좋은 애야.


민서나 별로 좋은 애 아닌데.


소정나 못 믿어?


민서믿어야지. 난 네가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해도 믿을 거야.


민서, 소정의 등을 껴안는다.


민서조금만 기다려. 내가 아주아주 부자가 되어서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 해줄게.


소정(아주 작게) 안 그래도 되는데…….


민서나는 좋은 애. 넌 멋있는 애. 이렇게 나눠 하자. 우린 환상의 룸메이트야.


민서 웃으면 소정 따라 웃는다. 소정, 웃다가 멈추고.


소정달리 죽여 버리고 싶어.


민서(놀라서) 헐.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어?


[사진 하나가 어두운 화면에 뜬다. 민서의 손바닥을 찍은 듯 보이는 사진이다. 수성펜으로 쓴 살바도르 달리- (발음 잘하기), 머나시아 항공이라는 글씨, 그리고 붉은색 화살표. 땀에 조금씩 번져 있다]




2장.


바닥에서 깜빡 잠이 든 두 사람 옆에 작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다.
천장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고인 아주 작은 물웅덩이.
소정이 먼저 잠에서 깨 이마를 만진다. 물이 튄 이마가 온통 축축하다.
정, 현관에서 우산을 가져와 펼치고 민서 옆에 둔다. 쪼그리고 앉아 민서를 바라보는 소정.


소정민서야.


민서, 대답 없다.


소정민서야.


민서, 대답 없다.


소정바보.


민서바보 아닌데.


소정뭐야, 안 자네.


민서우산은 뭐야?


소정너 비 맞을까 봐.


민서, 일어나 우산을 접으려다가, 티브이 더미에 씌워둔다.


민서티브이 가져오길 잘했다. 밖에 있었으면 고장 났을 거야.


소정밖에 비 많이 왔나?


민서그러면 천장에서 북 두드리는 소리 나잖아. 그냥 고이기만 많이 고인 것 같아.


민서, 소정 함께 천장을 바라본다. 검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구멍이 있다.


소정(구멍의 크기를 헤아리며) 좀…… 심하지? 그래도 이제 좀 있으면 장마철 지나니까, 괜찮지 않을까?


민서우리는 괜찮지만. 티브이 주워 온 것들은 고장 나지 않을까?


소정아. 맞네…….


민서어떻게 하지? 예전에 이것 때문에 주인 할아버지한테 전화해 봤는데.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거든.


소정어이없다.


민서주인이, 이 근방에 집이 두 챈가 더 있대. 그래서 바쁘다고 그랬어.


물방울이 계속해서 떨어진다, 규칙적으로.


민서구멍이 작년보다 더 커진 것 같애, 그치.


소정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민서긍정적으로…….


민서 소정, 함께 웅덩이를 바라본다.


민서집만 아니었으면 꽤 예쁜 것 같기도 하고…….


소정호수라고 생각하자. 부자들 집 중앙 정원에 있는 인공호수 같은 거.


사이.


소정이런 걸 꿈꿨었는데. 백화점 VIP, 멧 갈라에 초대받고 빌 게이츠랑 저녁 식사하는 그런 건 너무 부담스럽고. 소소하고 소박하게 정원 잔디 깎고, 인공호수 옆에 테이블 만들어서 너랑 꿔바로우 먹고…….


민서유학도 가고?


소정, 하하 소리 내어 웃는다.


소정유학이 소박한가?


민서빌 게이츠보단…….


소정맞아. 그렇네. (사이) 응. 유학도 가고 싶었지.


민서, 무어라 이야기를 하려다 만다.


소정민서야, 눈 감아 봐. 보여줄 거 있어.


민서, 눈 감는다. 소정, 말없이 침대 밑에서 상자 하나를 꺼낸다. 먼지를 쓱 털고 뚜껑을 연다.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고 또 다른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상자가 있다.


민서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정베르나르 앙리 레비 말하는 거지?


민서베르나르 앙리 레비 말하는 거지?


안에는 물감 튜브가 여럿 들어 있다.
소정, 물감 튜브를 한가득 쥐고 다시 상자를 침대 밑에 넣는다.


소정이제 눈 떠도 돼.


소정, 물감 하나를 꺼내 민서에게 내민다.


민서이게 뭐야.


소정물감이잖아.


소정, 민서 물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소정소박하게. 집에 인공호수 꾸미는 것부터 하는 걸루.


민서(물감을 받아 들어 튜브 옆면의 글자를 읽는다) 아쿠…… 아쿠아 그린…….


소정파란색이야, 그냥.


민서아쿠아는 물이고. 그린은 초록색이잖아.


소정파란색으로 퉁친 거야.


민서파란색이면 안 되는데…….


소정왜?


민서그런 게 있어.


소정그럼 무슨 색이 좋은데?


민서빨간색.


소정없는데…… 그리고 (웅덩이를 가리키며) 호수를, 빨간색으로?


사이.


소정너한테 중요한 거야?


민서응!


소정, 물감 튜브를 헤아리다가 하나를 더 민서에게 내민다.


소정빨간색은 없고. 대체품은 있어. 그것도 괜찮아?


민서아쿠아 머시기보다 뭐든.


소정(물감 내밀며) 자.


민서, 물감을 받아들고 옆면을 읽으려다, 고민한다.


민서마젠타네.


소정이 색 알아?


민서이 색을 잊을 수가 있어?


민서, 물감 튜브를 들어 올려 관찰한다.


민서미쳐버린 분홍색이잖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소정, 잠시 생각한다.


소정아…….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본다. 마음이 통한 것처럼, 일사천리로 좁은 방 안을 뒤진다.


민서(청경채가 든 봉투를 들어 올리며) 청경채도 올릴까?


소정그래. 부자들은 나무도 가져와서 심으니깐. (서랍을 열어 이면지 뭉치를 꺼내며) 종이배 올릴래?


민서나, 종이접기 자격증 있어.


민서, 종이를 접는 동안 소정은 청경채를 물웅덩이 주변에 둥글게 세운다.
어느새 민서가 접어둔 종이와 인공정원의 뼈대가 완성된다.


민서잠깐만.


민서, 마젠타 물감을 숭고하게 들어 올린다. 인공호수에 한 방울, 두 방울을 풀어내고 물감이 퍼지는 동안 성호를 긋는 민서.


소정소원 빌지, 너. 무슨 소원이야?


민서나중에 이뤄지면 말해줄게.


두 사람은 인공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민서역시. 이 색깔, 참 이상하다.


소정나도 잘 안 써, 이건.


민서처음 봤을 때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땐 더 심하게 생각했어. 진짜 못생겼다고.


소정봉사 갔을 때 말하는 거지?


민서그래. 벽화 봉사 갔을 때. (사이) 지금은 이 색 좋아. 이상한데 좋아서 더 기묘해. 네 그림 덕분인 것 같아.


소정그때 내가 (사이) 꽃 그렸던가.


민서응. 마젠타색 장미를 그렸었잖아, 완전 더러운 벽이었는데, 네가 그림을 그리고 나니까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는데. 대충 그렸는데도 장미 꽃잎 같은 게 막 살아 있고. 아직도 그 미쳐버린 분홍색이 눈앞에 아른거려. 천재 같았는데, 너. 아니, 천재라고 생각했어.


소정그런 건 아무나 다 해.


민서천재라고 생각해.


사이.


소정넌, 그런 거 기억 잘하더라, 보면.


민서나한테 제일 좋았던 기억 중 하나니까. 이 색이 행운을 가져다줄 거 같아. 그때처럼.


소정민서야.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그때 소정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요란한 벨 소리에 소정이 핸드폰을 꺼내 든다.
[푸푸 아트 아카데미]
소정의 표정이 좋지 않다.


소정민서야,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민서누군데 그래?


소정,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다.


민서통화 여기서 하지…….


소정은 호수 옆에 웅크리고 앉는다. 민서도 핸드폰을 꺼내고 손바닥을 펴 번갈아 확인한다.


[화면에 마젠타색 그래프가 요동치고 있다.]
[또 다른 화면에는 소정의 옆모습이 뜬다.]
[단조로운 컬러링 음악이 울리고 고민하던 소정은 전화를 받는다.]
[소정이 듣는 라디오 디제이의 목소리와 똑같은, 차분한 음색의 전화를.]
[또 다른 화면에는 푸― 푸― 아카데미 홍보 영상이 연속 재생되고 있다.]
[웃는 학생들, 합격자 명단, 외국 대학교 교정의 모습,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뒷모습.]
[다시]
[웃는 학생들, 합격자 명단, 외국 대학교 교정의 모습,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뒷모습.]


화면이 나오는 동안, 계속해서 대화가 진행된다.


[안녕하세요, 작년 미국, 캐나다, 벨기에, 프랑스, 독일 미대 총 오십 명의 합격자를 배출한 에프오유에프오유, 푸― 푸― 아트 아카데미입니다. 김소정 학생 본인 맞으실까요?]


소정네. 제가 김소정인데요.


[문의해주셨던 포트폴리오 1회 무료 첨삭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소정지금은 구월이잖아요. 이월에 연락드렸던 건데.


[학원 규정상 선착순으로 연락을 드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된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포트폴리오 상담은 부원장님이 진행하시고 있는데 전화를 바꿔드려도 괜찮으실까요?]


소정, 대답 없다.


[전화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다시 한번, 단조로운 컬러링 음악이 이어진다.


민서(심각하게) 무슨 일 있나? 나가 볼까?


[안녕하세요, 부원장 김연서입니다.]


민서(손가락으로 번갈아 세며) 소정이 사생활을…… 지켜준다, 만다…… 지켜준다, 만다…….


[학생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소정김소정입니다.


[아, 김소정 학생…… (종이를 넘기며) 그림 배워 본 적 있어요?]


민서지켜준다…….


소정입시 미술 했었습니다. 옛날에 잠깐…….


소정의 표정이 굳어 있다. 목소리가 빠르게 지나간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보내준 포트폴리오도, 기본기는 있어요. 살짝 어색하긴 한데, 구도나 비례 같은 건 사실 학원에 와서 한두 달 하면 금방 잡히는 거니까. 그리고 사실 요즘 외국 대학이 원하는 건 본인만의 스타일이지, 한국 입시 미대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야. 그쵸? 근데 본인은 입시 태가 너무 많이 남아 있기는 한데, 개성이야 학원에 와서 많이 그려 보면서 만들면 되니까. 학원에 오면 충분히 잡아줄 수 있는 스타일이다……. 그런 말을 하고 싶고. 근데 문제는, 이 그림 있잖아, 구의 증명, 이라고 이름 붙인 이거. 왜 흰색을 중앙에 올리다가 말았어요?]


소정의 옆모습, 뭔가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겨우 한마디를 꺼내는 소정.


소정저기, 근데요. 대체 왜 이제 와서 전화하셨어요? .


[소정의 옆모습과 학원의 홍보영상이 꺼진다. 마젠타색 그래프는 계속 요동치고 있다. 옆, 어두운 화면에 동영상이 뜬다. 소정과 민서의 인공호수에 띄워둔 종이배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빠르게 식어가는 패스트 모션 영상이다.]




3장.


민서, 소정이 들어오는 소리에 급하게 핸드폰을 집어넣는다.소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온다.


민서무슨 일이야?


소정별거 아니야. 그냥, 학원에서 오래.


민서학원? 설마, 미술 학원?


민서, 소정에게 달려온다.


민서네가 보냈던 그림 봤구나! 드디어! 뭐 보냈어? 뭐라고 해? 왜 오라는 거야?


소정, 대답하지 않는다.


민서제대로 유학 준비하려는 거, 맞지?


민서, 모른 척하는 소정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민서갈 거지?


소정, 모른 척한다. 민서, 끈질기게 따라간다.
좁은 집에서 술래잡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민서와 소정.


민서(헉헉대며) 갈 거지?


소정(헉헉대며) 안 가. 돈 없어.


민서겨우 그런 이유야?


소정겨우 아니야. 큰 이유야.


민서학원비가 얼만데?


소정말 안 할래.


민서, 소정을 잡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 가볍게 실랑이를 하고, 소정은 마지못해 귓속말로 금액을 이야기한다.


민서내가 줄게, 금방 버는 거야 그거. 안 되면,


본인의 입을 벌리고 진지하게 묻는 민서.


민서근니라도 파라서 주께. (금니라도 팔아서 줄게.)


소정몇 개 있는데?


민서둔 개. (두 개.)


소정택도 없을 것 같애.


민서치…….


사이.


민서가 보기만 하면 안 돼? 너 쭉 상담받고 싶어 했잖아.


소정과 민서, 한참을 마주 보고 있다. 소정, 고개를 끄덕인다.


민서(소정을 안아주며) 잘 생각했어! 언제, 언제 오래?


소정통화 끝나고 오랬으니까…….


민서옷 뭐 입고 가야 하지?


민서, 급하게 일어선다. 옷더미를 뒤지며 하나씩 냄새를 맡아 보는 민서.


민서이건 마라탕 냄새가 나. 이건 살라미 햄이랑 올리브 통조림 냄새가 심하고, 저건 너무 낡아 보여. 어떤 게 좋을까……. 깔끔하게 입고 가야 하잖아, 알바 면접 갈 때보다 더. 맞지?


민서, 본인이 입고 있는 티셔츠를 벗어주고, 자신은 목 늘어진 티셔츠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 옷더미에서 말끔한 바지와 블레이저를 찾아내 함께 소정에게 건넨다. 소정, 받아 들어 입는다. 양팔을 벌리고 민서에게 보여준다.


소정어때?


민서괜찮은데.


소정없어 보이진 않지?


민서왜, 누가 없어 보인데?


소정, 발을 꼼지락거린다.


소정양말에 구멍 났어.


민서다른 양말 없어?


소정없어.


민서괜찮아. 양말은 아무도 신경 안 써.


소정신경 안 쓰다가 이 꼴이 된 건데…….


민서아, 그러면. 이걸 쓰고 가서,


민서, 스카프를 꺼내온다.


민서백화점에서 산 거야, 이거.


그리고 스카프를 본인의 목에 아주 요염하게 감쌌다가 내려두고, 감쌌다가 내려두길 반복한다.


민서사람들의 시선이 스카프에 집중되도록, 이렇게 쉭.


소정, 스카프를 건네받고 따라 한다.


소정쉭.


민서좋아.


소정(계속 움직이며) 양말에 집중돼? 집중되냐고.


민서아니.


소정좋아!


민서잘하고 와. 원래 하던 것처럼 하고 와.


소정그냥 상담만 받고 오는 거야.


민서상담받으면 할 수밖에 없을걸.


소정, 대답하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만 한다.


소정다녀올게.


소정, 쉭쉭 거리면서 방에서 나간다. 민서,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다가 퍼뜩 무언가 기억나 달려 나간다.


민서소정아!


소정쉭?


민서그 그림도 꼭 보여줘. 벽화 봉사 때 그린 장미! 나랑 있을 때 그린 거라고, 네 역작이라고 해!


소정, 분명 민서의 말을 들었지만 계속 쉭쉭 거리기만 한다.
소정의 뒤로 파란색 가벽이 보이고, 소정은 그 벽을 가로질러 무대 밖으로 빠져나간다.
민서는 소정이 아예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소리친다.


민서나는 말이야! 아직도 그 그림이 생생하단 말이야, 마치 생화를 본 것처럼! 그런 게 진짜 그림 아니야?


민서, 뿌듯하게 자리에 앉는다.


민서틀리지 않았어, 내가 틀리지 않았다니까!


사이.


민서소정이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갈 거야. 히. 비엔나소시지도 많이 먹겠지?


민서, 진지하게 주저앉아 성호를 긋는다. 방향이 살짝 틀린 성호다.


[화면에 소정의 꼼지락대는 발가락이 보인다. 정확하게는, 구멍 난 양말이.]


민서사랑하는 하느님. 우리 소정이 잘 돌보아주세요. 자신감을 가지고 보고 올 수 있게요. 소정이가 가진 재능을 마음껏 보여주고 올 수 있게 해주세요. 사실 기도 반영이 늦다고 생각해왔는데 드디어 제 차례가 왔나 봐요. 제 주식도, 빨간색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시죠? (손가락 위로) 쭉쭉…… 올라가게…… 소정이를 위해 쓸 거예요. 저를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을게요.


[소정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계속 나오는 동안, 옆에서는 선글라스를 낀 예수 동상이 튜브에 앉아 붉은 급류타기를 하고 있는 영상도 보이고 있다]


민서, 두 손을 다시 모은다.


민서나무관세음보살……. 부처님도 도와주세요. 너무 속세적인 소원이라고 지나치지 마시고…… 부처님은 왕자님 출신이시라 이런 거 이해 못 하실 수도 있지만요. 저는 정말 간절하거든요. 오늘 소정이 오면 딱 보여줄 거예요. 너 유학 가도 된다고. 그럴 자격 있다고. 이거 좀 보라고.


[소정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계속 보이고 있다. 정확하게는, 구멍 난 양말이.]


소정이 듣고 있는 학원 원장의 목소리가 무대 위로 들려온다.
민서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관객들이 들을 만큼은 또렷하다.


[기본기가 있어요. 기본기는 있는데 왜 전반적으로 탁할까? 여기도 봐, 유화라는 게, 물감을 두껍게, 아끼지 말고 올려야지. 지금은 임파스토를 하려다가 작가가 겁이 나서 웨트 온 드라이로 튼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아끼지 말아야 돼요, 미술을 하려면. 조금 세게 이야기하면 지금 이 그림, 순수 회화로 밀고 나가기에는 트렌디하지 않단 얘기거든. 널렸어, 홍대 졸업한 친구들은,]


민서부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소정이가 유학 갈 수 있을 정도로만……. 이번 일이 잘 풀려서 소정이 유학 가면……. 하느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거 할게요, 전도! 부처님한테는 백팔 배!


민서, 비장하게 핸드폰을 꺼낸다.


민서저, 지금 봅니다? 볼 거예요. 그러니까 두 분 다,


민서, 하늘 본다.


민서제가 영, 하면.


사이.


민서차 해주시는 거예요, 아셨죠. (작게) 영,


사이.


민서영,


사이.


민서영,


사이.


심호흡을 하며, 화면을 확인하는 민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비가 많이 올 때만 들린다는 둥, 둥, 둥, 북소리도.


번개가 친다. 화면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진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민서는 비명을 지르다 쓰러지고 만다.


다시 학원 원장의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이 년만 학원에서 빡세게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도 늦지 않아, 재능 있는 작가는.]


[화면 모두 꺼진다.]




4장.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소정, 편의점에서 산 삼천 원짜리 우산을 털고 문 앞에 선다.


소정나 왔어.


대답 없다. 소정,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민서를 발견한다.
소정, 놀라 민서 옆으로 간다.


소정무슨 일이야!


민서최선을 다했어. 돌아올 수 있는 강만 골라서 건넜고 징검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넜어.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서 팔았어, 사기 전에 라마즈 호흡을 했고 왜냐면 너무 들떠 있으면 안 되니까. 이런 게 다 마약 같은 거랬어. 수면 내시경 하는 것처럼 깰 수 있는 선에서만 하는 거랬고 그래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소정민서야!


민서밤마다 꼬리를 자르려고 했는데…… 그랬더니, 그리고 사라졌어…… 그래서 제때 팔지를 못한 거야…….


소정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민서야!


[상단에 주식 호가를 표기해둔 유튜브 스트리밍 화면이 송출되고 있다. 흰 와이셔츠(윗 단추를 두 개나 풀었다―)를 입은 남자가 빠른 속도로 말한다.]


[여러분 저는요, 아직도 매일 아침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확인해요. 삼십 년 가까운 투자 기간 동안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반복했어요. 물론 이쯤 되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어요.]


민서내 실수야.


[근데 주식 투자할 때 이 고비는 무조건 넘겨야 돼요.]


소정대체 얼마를 넣었는데 그래?


민서, 대답 없다.


[그래야 돈을 벌 수가 있어요.]


소정오십만 원? 백만 원?


[그래야 성공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민서육백만 원…….


소정이 바보야! (잠시 말 없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줄게, 나중에. 꼭 만들어줄게.
취직하면 금방 버는 거야, 그거. 한 이 년 정도만 바짝 일하면 돼. 이 년 금방 간다?


민서의미 없어.


소정없긴 왜 없어.


민서네가 가야 돼, 유학. 그러려고 넣은 거야.


소정, 이해가 안 되는 얼굴이다.


소정왜?


민서하고 싶은 것도 있고 아는 것도 많으니까.


사이.


민서그리고 더 알고 싶다니까…… 더 하고 싶다니까…….


민서, 비틀비틀 일어나서, 책상에 엎드린다.


민서가고 싶지? 너도…… 학원도, 유학도.


소정, 말없이 민서를 바라보고만 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만다.


민서미안해…… 내가 다 날려서.


소정, 민서 맞은편에 엎드린다.


민서소정아.


소정왜 불러.


민서원래 이래? (사이) 네가 나보다 세 살 많잖아. 삼 년 후에도 이렇게 힘들어?


소정아―니.


민서그래?


소정나 힘들어 보여?


사이.


소정이 정돈 된다.


민서삼 년 뒤에…….


소정그래, 삼 년 뒤엔.


화면에 글씨가 송출된다. [일주일 후]


두 사람,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민서의 핸드폰 소리.
민서가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낸다.


소정왜?


민서마라탕집.


소정무슨 일인데?


민서버릇 잘못 들었대. 근성도 없고.


소정우리 더러?


민서나 더러. (사이) 그렇게 살지 말래.


소정나쁜 놈…….


민서이번 달 월급은 못 준대. 대타로 들어온 알바생한테 줄 거래.


소정코딩 이야기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런 거 사실 하등 쓸모도 없거든…….


민서맞아, 꿔바로우 안 줄 때부터…….


소정(사이) 누워 있는 거, 며칠째지.


민서일주일…… 아마…….


소정비가 그치면 일어나려고 했는데.


민서장마가 왔나 봐.


소정하늘이 노했나 보지.


민서그 얘기 당분간 하지 마. 하늘 얘기 같은 거.


소정왜?


민서척지고 있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줬거든.


소정같이 울까? 울어줄까?


민서울어서 해결되는 게 있을까?


소정없을 것 같아. (사이) 울지 말자.


민서안 울면 또 하늘이 오해하면 어떻게 해? 이 정도는 감당할 만하다,고 생각하면.


소정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 장면을 보고도 오해할 수가 있나.


민서시퍼렇다는 이야기도 당분간 하지 말자.


소정미안해…….


민서어쨌든, 우는 건 에너지 낭비겠지?


소정그래.


민서혼자 해결해 보려고 한 게 문제였어.


민서, 핸드폰을 확인한다.


민서도망가고 싶다.


사이.


민서도망가고 싶다, 우주로. 소정아, 돈 많은 사람들은. 다 우주로 도망가고 싶어 하겠지? 지구가 없어지거나, 운석이 충돌하려고 하거나, 뭔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왔을 때……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오려고 할 때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도 데려갈까?


소정안 데려가겠지.


민서난 코딩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너는 그림도 그릴 줄 알고.


소정그 정돈 테슬라도 그릴 수 있겠지.


민서테슬라가 그려? 걔가 누군데?


소정그래. 인공지능 자동차. 걔는 혼자 운전도 하잖아. 그림이라고 못 그리겠어?


민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민서엘런 마스크!


소정일론 머스크?


민서그래, 그 사람!


소정그 사람이 왜?


민서연락하자!


소정그니까, 그 사람이 왜?


민서원래 우주를 노리는 사람이 진짜잖아. 왜냐하면 우주는 진짜 진짜 넓을 텐데. 거기에 진짜 진짜 돈을 많이 쏟아붓고 있는 거잖아. 무한한 공허에 돈을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부자라는 거잖아. 게다가 내가 얼굴을 아는데-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작게) 소박하고 소탈해 보였어.


[일론 머스크의 얼굴이 보이고 있다. 해맑게 웃으며 설거지를 하고 있는 일론 머스크.]


민서정확하게 기억나. 마라탕을 포장하고 있었거든. 적당히 매운맛, 마유 조금, 청경채를 빼주시고, 빼주지 않으면 리뷰 평가 기대하고 있으라고 했고, 땅콩 소스 많이 달라고, 꿔바로우 큰 거 하나를 추가한 주문이었어. 그 주문을 포장하고 있는데 뉴스에서 나오더라니까, 자기 주식의…… 10퍼센트를 팔겠다? 아니지 팔겠다가 아니라 기부하겠다고…….


소정그런 말을 했어?


민서그렇다니까. 내가 원래 뉴스 같은 거 안 듣는데. 그날은 귀에 딱 들어왔어.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겠어?


소정그래. 운명이 맞는다면, 대체 어떻게 연락할 건데?


민서그걸,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 돼.


민서, 일어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민서SNS? SNS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진심을 잔뜩 담아서.


소정(타이르듯) 민서야, 그 사람은 그런 메시지를 하루에 이십만 개도 넘게 받을 거야.


민서하지만 우린 진짜 진심이야!


소정그래, 너는 그렇겠지만, 알다시피 문자 메시지란 게…… (고민하다) 그래, 이건 마치 마라탕에서 벌레가 나왔을 때, 네가 문자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거야. 진심이지, 진심일 수 있는데,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


민서아…… 그러니까…… (헤아리듯) 내가 벌레…… 유학이 마라탕…… 손님이 엘런 머스크…….


소정(수정해준다) 일론 머스크.


민서손님이 일론 머스크, 유학이 마라탕, 내가 벌레…… 아! 내가 벌레…… 내가 벌레구나! 그렇구나…… 그런 거구나…….


소정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자. 방법이 있을 거야. 합리적인 방법이.


민서, 소정의 어깨를 잡는다.


민서너 정말 유학 가고 싶은 거 확실하지! 정말이지! 세상이 두 쪽으로 갈라지더라도!


소정난 (사이) 네가 불행하면 유학 안 가도 돼.


민서난 네가 유학 가야지만 행복해!


소정그런 게,


민서행복. 삼 년 후,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야.


소정(사이) 가고 싶어.


민서하나님 감사합니다…….


화면에 영상이 송출된다.
[비행기가 날아오르다가 떨어지고 마는 모습]과 [머나시아 항공]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민서(비장하게) 옛날에 봤는데, 미국에 도시 괴담이 있대. 라디오를 틀어놓고, 금니가 있는 사람이 식초를 잔뜩 머금고…… 전파가 흐르는 곳으로 가서 잘 조준만 하거든, 라디오에 접속할 수가 있다…… 우리의 진심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거야, 그것도 실시간으로.


소정(소리치듯) 너 그런 걸 믿어?


민서의 핸드폰 알림음이 계속 울리고 있다. 민서가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하자, 소정이 낚아챈다.


소정이제 핸드폰 같은 거 보지 마!


민서믿어.


소정응?


민서믿는다. 삼 년 뒤에.


소정, 고민한다.


소정그래…… 하자. 해 보자고.


민서, 소정을 안아준다.


민서우리는 환상의 룸메이트야.


민서, 소정을 꽉 끌어안은 다음, 놓아준다.
그리고 소정이 라디오를 숨겨둔 곳으로 가, 라디오를 꺼낸다.


소정거기에 라디오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민서난 너에 대해서 모르는 거 없어.


소정,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만다. 민서는 라디오를 튼다. 라디오가 지지직거린다.


민서라디오, 준비. 금니 (입 안을 만져 보며) 준니(준비). 식초, (가져온다) 준비. 전파,


민서, 소정 동시에 위 올려다본다. 구멍이 뚫린 천장을 올려다본다.


민서전파 준비. 준비 만땅.


민서가 라디오를 옆구리에 끼고 식초를 주머니에 넣는다. 두 사람, 티브이를 딛고 올라선다.
소정의 어깨 위로 올라가는 민서.


민서코딩 배울까 봐. 정말 배워둔 건 다 쓸데가 있네. 공중곡예도 이렇게…….


민서, 잠시 기우뚱하지만 집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엔 성공한다. 하지만 아직 구멍까지 완전히 닿기에는 부족하다.


소정안 닿을 것 같아! 좀 짧지? 우리 이제,


민서소정아, 내가 영 하면, 차 해! 영!


소정어?


민서차! 하라고!


소정차!


민서영!


소정차!


소정이 차! 하면서 발끝을 뻗어 올리면 민서, 아슬아슬하게 천장 구멍 쪽에 닿는다.


민서올랐다! 드디어 올랐어!


민서, 주머니에서 식초를 꺼내 입에 잔뜩 머금고, 또 삼킨다. 그리고 금니를 드러내기 위해 입을 벌린다. 라디오는 계속 지지직거리고 있다. 민서는 라디오를 위로 치켜든다. 소정 위에 민서가, 민서 위에 라디오가.


라디오 소리[오늘은 2021년 7월 24일입니다. 신이 공 굴리듯 비가 오고 있네요. 빗길로 서부간선도로 정체가 예상되오니 출근하시는 분들은……]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린다. 번개도 치고 있다. 민서에게 짜릿짜릿하고 미세한 전기들이 느껴진다.


라디오 소리[밝고 활기찬 아침이죠. 날씨만큼이나 다정한 사연들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네, 그쵸. 또 이렇게 상품이 준비가 되어 있거든요. 맞아요, 김치냉장고, 백화점 상품권, 그리고 날씨만큼이나 다정한 목욕 시간을 만들어줄 스페셜 샴푸 세트가 또 이렇게,]


민서으아아아아아악.


소정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려오자.


민서괜쟈나― 괜쟈나―! 계속해!


[화면에 보이는 라디오 영상이 들어온다. 꿈을 포기한 사람들.]


소정,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나오자 당황한다.


[오늘은 사연을 보내주신 김진섭 씨에게 위로와 애탄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할까 하는데요. 유미주의자로 유명한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썼던 편지를 일부분 인용하겠습니다. 신들은 내게 거의 모든 것을 주었지. 천재적인 재능과 저명한 이름, 높은 사회적 지위, 빛나는 재기, 지적인 대담함 모두를……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죠. 신은 우리에게는 어떤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김진섭 씨, 포기하고자 하는 용기를 얻으셨나요? 그렇다면 기쁘겠습니다.]
[라디오 DJ, 민서와 소정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소정, 민서 씨도요?]


천둥 번개가 친다. 잠시 번쩍― 하는 무대.


모든 화면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일론 머스크, 우주, 비행기 시승식, 소정이 그린 것 같은 그림(너무 짧고 빠르게 돌아가 알아볼 수는 없다) 등등이 반복되다가 끊긴다.


두 사람, 그대로 떨어져 내린다.


소정아파.


민서아프…….


소정바보야.


민서나 바본가 봐.


두 사람, 기절한다.
암전.




Killing Time


엎드려 있는 민서와, 옆에 앉아 있는 소정.
두 사람은 서로, 아주 가깝게, 거의 붙다시피 있다.


소정우리는 축축한 방바닥에서 일어났다.


화면에 힘겹게 글씨 하나가 뜬다.


[삼 년 후]
[ ? ]
[삼 일 후]


그리고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곧 사라진다.


소정삼 년 후였다면 좋았겠지만. 그날 이후로 삼일 정도를 내리 기절해 있었던 거다. 우리를 발견한 건, 한 번도 방세를 밀리지 않았던 민서가 날짜를 밀려버린 것을 재빠르게 눈치챈 집주인이었다.
재개발이 본격화되고 우리가 집세를 내지 않고 야반도주라도 했을까 걱정되었던 집주인은 몇 번 방문을 두드려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마스터키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민서를 마구 흔든다)


민서응?


소정일어나.


민서일어나래?


소정방세 내래.


사이.


소정집주인은 집 안 꼴을 보고 우리가 동반자살이라도 시도한 것처럼 굴었다.


민서죄송하다고 말씀드리자.


소정나쁜 새끼.


민서할아버지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저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인 거지. 이를테면 우리 집 천장을 고치는 데는 돈도 시간도 많이 든다. 그럴 땐 연락을 하지 않지만, 집세를 받는 일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찾아온 거지! 저런 게 진짜 어른일지도.


소정민서가 방세를 송금하는 동안, 그리고 송금완료―라고 쓰인 파일을 집주인에게 보여주는 동안 나는 집 앞에 붙은―김치찌개용 돼지 전지를 할인하고 있는 이문동 마트 할인 행사 포스터와, 17,000원 어치 전기세 통지서와, 미안한 마음을 담아, 파격! 30퍼센트 할인! 푸푸 아트 아카데미―라고 쓰인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민서(예의 바르게) 죄송합니다.


소정점포 정리로 김치찌개용 돼지 전지를 할인하고 있는 이문동 마트 할인 행사 포스터와, 17,000원 어치 전기세 통지서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수강료. 30퍼센트. 할인. 파격! 푸푸 아트 아카데미-, 라고.


민서(소정의 머리 누르며) 죄송합니다……. 언니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소정쓰인 핸드폰 문자 메시지. 기간이 지난 건 아니겠지? (확인하고) 다행이다.


민서(소정 보며) 앞으로…… 조심해 달래. 집주인 할아버지가. 그리고, (말하려다 만다)


소정뭔데? 무슨 일인데?


민서아니야. 조금 있다 얘기하자. 일단 집부터 치우면서…….


소정그래.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 다.


소정과 민서는 인공정원을 부수고
우산을 접어 내려놓고 집을 정리한다.
민서, 티브이를 보면서.


민서(소리친다) 고장 났어?


소정(라디오를 옮기며) 고장 났어. 이것도.


민서(소리친다) 진짜 다 고장 났어? 정말이야? 아니지?


민서, 티브이를 때려 보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민서, 가만히 티브이를 내려다본다.
소정은 그런 민서를 바라본다.
민서, 티브이를 옮기려다 입고 있는 옷을 손에 두르고 코드를 뽑는다, 그제야 하나씩 옮긴다.
어느새 두 사람의 집에는 티브이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
두 사람, 다시 모여 앉는다.
잠시 정적.


소정지금 아마 민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민서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다른 건 제쳐두더라도,


소정다 그만두고 싶다, 같은.


민서미안한 건 확실하다고.


사이.


민서그런데, 왜 미안한지, 누구한테 미안한 건지만 고민하면 될 것 같아서…… 그건 아직 모르겠어서…….


민서, 고개를 숙인다.
소정, 안타까운 듯 민서를 바라본다.


민서다 그만두고 싶어.


소정미안해, 내가.


민서돈이 없으니까.


소정우리, 한 번만 더 해 볼까? 일론 머스크한테…… 물어보자. 마지막으로. 주는 거 말고, 빌려주는 거 어떠냐고. 나중에 성공하면, 테슬라만 타겠다고. 자율주행이 잘못되어서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에어백이 안 터지더라도. 아! 광활한 우주여행이라도 가겠다고. 세계 부호들이 가기 전에 먼저. 안전 테스트라도 해주겠다고. 편지 쓰자. 편지로.


민서하고 싶어?


소정하고 싶어?


민서마지막이야.


소정과 민서, 고개를 끄덕인다. 소정, 티브이 위에 종이를 올려놓는다.


민서일론 머스크 씨, 안녕하세요.


소정하이, 일론 머스크.


민서반갑습니다.


소정나이스 투 미츄.


민서그런데, 왜 자꾸 입을 여시나요?


소정와이 유 마우스 돈 셧다운?


민서당신 주식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다고요.


소정아임 쏘 널비어스. 유어 스톡 윌 펠.


민서당신이 돈이 많아야. 아주 많아야 우리에게 줄 거 아니에요.


소정유 해브 투 어랏 오브 머니― 투 기브 어스 머니. 오케이?


민서아니다, 아니에요.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소정유어 하트 고잉 유. 킵 고잉, 킵 고잉.


민서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소정아이 원트 투 서젝트 섬띵…….


민서우주는 아주아주 넓잖아요.


소정스페이스 이즈 베리베리 빅. 와이드, 베리 빅.


민서그리고 당신은 우주에 돈을 계속 계속 쓰잖아요.


소정앤 유 킵 스펜딩 머니 온 갤럭시 어게인 어게인 어게인.


민서물론 쓸 수 있죠,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깐.


소정유 캔 유스 유얼 머니. 오케이. 아이 언더스텐드.


민서그런데 사실 이해는 안 가거든요. 텅 빈 곳에 자꾸 돈을 집어넣고, 집어넣고…….


소정와이 두 유 푸싱 머니 인 더 엠티 스페이스…… 킵킵킵킵…….


두 사람은 점점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민서이제 진짜 돈이 받고 싶은 이유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마치 돈 많은 사람들처럼,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맞다, 도피성 유학!


소정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는데, 정말.


민서소정이는 왜 도피성 유학 가면 안 되냐고. 소정이도 선택지에 그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정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었나. 사실 이젠 아무렴 상관없다.


민서나는 부러운 사람이 꽤 있거든요. 이를테면 소정이. 소정아, 좋아? 꿈이 있어서 좋아? 하고 싶고, 잘하는 게 있으면?


소정옛날 언젠가 즈음에. 정확히 언젠지도 기억 안 나는 그 순간에는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민서이렇게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요.


소정고1 때 미술 학원을 한 달인가 다니고 짐을 뺀 적이 있다.


민서나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다 소정이랑 배운 건데, 요가랑. 공중곡예.


소정선생님이 붙잡아가지고, 너 진짜 갈 거냐고. 네 뒤에 백이십 명이나 있는데 진짜로 갈 거냐고. 열심히 하면, 진짜 이 년 동안 한 달에 이백오십만 원씩만 내면서 열심히 하면 서울 사 년제 회화과 갈 수 있을 텐데 진짜 갈 거냐고.


민서아! 그리고 종이접기. (사이) 해 볼까요?


민서, 색종이 묶음을 꺼낸다.


민서뭐 해 볼까요? 프리지어? 모빌? 고양이? 개구리? 미니카?


소정그래서 집에 돈이 없어서 가야 한다고 했더니,


민서(손 치며) 프리지어보다는 장미가 나을 것 같다!


소정보내주던데. 우리 인연이 거기까지였나 보다. 깔끔하게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그때. 생각도 안 나도록 자근자근 밟아뒀어야 했는데. 적당한 학교에 적당한 과를 맞추어 적당히 살기로 나 자신과 약속을 했으면. 그림이 아니라 토익을 따거나 스터디를 하거나 했어야 했는데. 적어도 벽화 봉사 같은 건 가질 말았어야 했는데. 민서를 만나지를, (사이) 아냐. 이건 아니다.


민서(종이 계속 접으며) 장미를 접을게요. 아무래도 장미에는 로망이 있는 것 같죠. 내가 본 소정이 첫 그림도 장미였어요. 마젠타색 벽에― 봐 봐요. 감명을 받았으니 마젠타, 라는 이름도 안 까먹고 기억하고 있죠. 눈이 쨍해질 정도의 분홍색 벽에, 소정이가 장미를 그렸거든요? 나는 그런 건 정말 처음 봤어요. 울 것 같은 얼굴로. 처음 보는 여자애가 뒤에 서 있는데도, 아무것도 안 들리는 것처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장미를 그렸다니까요. 잎맥 하나하나, 가시 하나하나 안 놓치고. 그때 처음으로 자퇴를 한 걸 후회했어요. 돈을 아끼겠다고 영화관을 가 보지 않은 것, 시간이 없다고 서점에 가 보지도 않은 것이 아까웠어요. 나는 이런 사람들, 이런 그림들을 놓치고 살았다는 생각이 드니까. (사이) 내가 계속 불렀어요, 언니. 언니. 우리 처음 보는 사이인 거 아는데, 언니랑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정확하게는 언니 재능이랑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그렇게…….


소정나를 응원하는 사람보다는 우리 엄마나 아빠를 더 곁에 뒀어야 했는데. 나를 천박한 멍청이로 보는 사람을 옆에 뒀어야,


민서나는 그 이후로 소정이 편이 되기로 했어요. 편이자, 팬.


소정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민서(종이 계속 접으며) 종이를 접으면서, 편지도 쓰고 하는 게 가능한가, 싶을 수 있는데, 제가 멀티가 조금 되거든요. 멀티 플레이. 알바 할 때도 카페 일할 때는 한쪽 손으로는 행주질하면서 한쪽 손으로는 오븐 온도 조절하기. 마라탕집 일할 때는 카운터 보면서 주문 전화 받기. 설거지하다가 문소리 들리면 총알같이 튀어 나가기. 그런데 알바생이 한 명 더 들어온 거예요. 어디 대학에서 드럼 치는 애랬는데. 진짜 멀티가 안 되는 거예요. 손님 왔는데 계속 행주질에만 집중하는 거죠. 혼날 줄 알았는데, 안 혼났어. 사장님이 허허 웃으면서 그러는 거예요. 예술 하는 애라 멀티가 안 되나? 하나에 집중해야 하니까. 아! 싶은 거예요. 아, 예술 하는 멋있는 애들은 멀티가 안 되는 거구나…… 나는 멋은 없는데 멀티는 되는 거구 각자의 장단점이 있구나…… 그래서 소정이가 그때 나를 안 돌아봤던 거구나…… (보여주며) 봐 봐요. 이런 식으로, 벌써 완성. 장미.


사이.


민서는 장미를 티브이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새 종이를 꺼내 다시 무언가를 접기 시작한다.


소정고등학교 3학년 때 쓴 일기에서 발췌하는 것도 괜찮겠다. 진솔함이라는 게 있을 테니.


짧은 사이.


소정엄마. 소정이야. 날이 참 좋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엄마가 대체 아빠의 뭘 보고 결혼한 건지 궁금해서. 얼굴이 양조위도 아니고. 톰 하디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뭘 보고 결혼한 건지 궁금했어. 인격 좋은 거? 그게 대체 얼마나 가겠어. 어차피 돈이 없으면 인격도 없는 건데 지금 아빠 봐 봐. 인격도 없고 돈도 없고 덕분에 나도 인격도 없고 돈도 없잖아. 그래도 나쁜 짓은 안 하고 살지 않았냐구 묻는다면 진짜 할 말은 없다. 나는 얼마 전에 홍대 입구역에 있는 화방에서 쉬민케 유화 튜브 두 개를 훔쳤어. 쉬민케 튜브는 35ml 낱개당 54,820원이야. 궁금할까 봐. 그리고 아빠는 기념일 날만 가는 애슐리 런치바에서 연어를 훔쳐 와서 다음 날 회사 도시락으로 먹었잖아. 이게 나쁜 짓이 아니라고? 조금 기가 차는 것 같기도 한 거야. 나는,


민서(종이를 접으며) 종이가 잘 안 빠지네. 이 틈 사이로, 이렇게, 슉,


소정여기까지는 묵음 처리하기로 한다. 너무 진솔한 것도 별로니까. 이제 진짜 편지로 돌아가서, 다시, (편지 쓰며) 엄마. 소정이야. 날이 참 좋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편지했어. 나 딱 한 번만 해 보려고. 우리 집에 돈이 없어서. 엄마 (민서: 슉!) 탓 아닌 거 알아, 아빠 탓 (민서: 슉!) 아닌 것도 알아. 그것 때문에 불행하지도 않았고 죽고 싶지도 않았고 실패하지도 않았으니까 걱정 안 해 (민서: 마지막 슉!)도 돼. 근데 그냥 딱 한 번만 더 해 보려고. 미술 학원. 근데 엄마, 나 돈이 없어. 한 달 학원비만 부쳐주면 안 될까? 엄마 어깨 아픈 거 아는데 앞으로 더 아플 거잖아. 원래 나이 들면 더 많이 아픈 거잖아. 그 전에 딱 한 달만…….


소정, 편지를 구겨버린다.


민서슉 네 번을 하면, 이렇게 개구리가 완성되는 거죠. 고양이도 해 볼까요. 고양이가 조금 더 고난이도이긴 한데요. 조금 집중할게요.


소정고모부, 건강하시죠? 술 담배 안 하시고, 큰 수술 받으신 적도 없고, 정말 다행이에요. 진심이에요. 다름이 아니라요, 고모부가 모으시는 마블 피규어 말인데요. 그중에서도 아이언맨2 피규어가 진짜 비싼 거라고 하셨었잖아요. 예약구매 걸어놓으시고. 한 일 년 있다가 받으셨다고. 저 기억력 좋죠? 그거 말인데, 나중에 고모부가 자식이 없으니까요. 저한테 물려주신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거 미리 주셔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제가 이번에 유학을…… 그림을 다시 그려 보고 싶어서요. 삼촌이 꾸역꾸역 대학원까지 나온 건…… 학벌에 미쳐서지만…… 저는 사실 그런 거 다 상관없고 정말 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아니에요. 그냥 죽고 나서 주세요. 전 정말이지 고모부가 죽을 날만 기다릴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소정, 이번엔 편지를 잘 접어 주소까지 쓴다.


민서짠. 고양이. 이걸, 보내려구요. 고등학교 때 진로 선생님한테. 그 사람,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사실, 근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했던 말 중에 사실 틀린 말은 없거든요. 뭐라고 했더라― (손가락 접으며) 너가 자퇴하면 아마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지 않을까-? 딱히 하고 싶은 것 없이 할 수 있는 것 없이 허송세월이나 까먹지는 않을까―? 아니, 사실 그렇게만 지내도 다행인 거 아닐까―? 하고 싶은 게 없는 게 정말 다행이지 않을까? 사실 아르바이트를 하면 돈이라도 벌 테니까.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 수라도 있을 테니까.


사이.


민서소정아. 돈을 안 줄 것 같은- 돈이 없을 것 같은 사람한테는 안 쓰는 게 낫지?


소정(편지지 꺼내며) 시간 낭비야. 이렇게 해. (쓴다) 아빠. 아프지만 마. 돈 들어.


소정, 고민하다가 편지를 먹는다.
그리고 경건하게 새 편지지를 꺼낸다.


민서돈을 줄 것 같은 사람…… 진로 선생님……. 아니고, 이 년 전에 알바 했던 샌드위치 가게 사장님……. 날 예뻐하긴 했는데…….


소정유진 언니. 안녕하세요. 완전 오랜만이죠? 제가 일방적으로 연락 끊은 다음에 처음 이렇게…… 안부 전하는 것 같은데. 기분 상하셨으면 푸세요. 저 언니가 저한테 잘해주신 거 알거든요? 가끔 장조림도 해다 주시고. 왜 그 맥도날드에 자두 칠러라고 있는데. 2,200원짜리. 저 돈 없어서 그것만 먹고 다닐 때도 언니가 샌드위치 같은 거 같이 사다 주시고.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그랬는데 알바 그만두는 날 언니가 사실 언니 부자람서요. 아빠한테 달 300씩 받는다 했나…… 알바 그냥 재미로 해 본 거라구. 인생 살면서 경험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근데 300도 좀 부족하다 그랬나…… 위로 있는 언니 오빠들은 더 받았다고. 지금은 가세가 기운 거라고. 저 완전 기억력 좋죠. 다 기억한다니깐요. 그런데 그냥 그거 땜에. 재수가 없어가지고. 그래서 연락 끊은 거거든요. 그냥 네. 그랬어요.


민서(접은 고양이를 먹는다) 마라탕집 사장님…… 중학교 동창 유미…… 모르겠다. 이름이 유미가 맞던가. 유리 같기도 하고.


소정그러니까, 한 달 용돈만 저한테 빌려주시면 안 돼요?


소정나머지 사람은. (더 심각하게) 더 없을 것 같으니까. 말하지도 못한다.


사이.


소정두 달 용돈도 괜찮아요.


민서이래서 혼자 잘해 보려고 했던 건데. (종이 접으며) 그래도 난 자퇴하고 내 힘으로 두 달 치 방세를 마련했어요. 서울에서 이 가격에 이런 방 흔하지 않댔어요, 황금알 공인중개사 사장님이요. 집에서 독립하고 싶었거든요. 그래도 이 집을 얻은 덕분에 운 좋게 소정이도 도와줄 수 있었고요.


소정고맙습니다, 항상……. 소정 씀.


소정, 편지 접어 주소까지 쓴다.


민서나는 후회 같은 거 안 해요. 뭐든. 원망 같은 것도 없어요. 사실 진로 선생님도 골려주고 싶은 거지, 죽거나 차에 치이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거든요. 그냥, 다 사정이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타입. 그래도 조금 아쉽게 생각하는 거는…….


민서, 한참을 고민한다.


민서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 방이 딱 하나만.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엄마랑 내가 조금이라도 떨어질 수 있는 순간이 있었으면. 우리 사이가 더 좋지 않았을까…….


사이.


민서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민다) 모빌도 완성.


소정꿈을 포기한 사람들? (사이) 아냐 됐어.


민서끝.


사이.


민서다 쓴 거 같지?


소정난 하고 싶은 말 다 쓴 것 같아.


민서다행이다. 파파고도 잘 돌아갔지?


소정대충?


민서대충이면 안 되는데…… 이런 건 뉘앙스가 되게 중요한 건데…….


소정뉘앙스 잘 산 거 같아.


민서우리 예의 발랐지?


소정응. 인사도 잘하고.


민서자유의사도 존중하구. 나라면 준다, 이유 없어도.


소정그래?


민서간절하고 마음 아프잖아.


사이.


민서그리고 아까 말 못 했는데. 집주인 할아버지가 조금은. 미리 준비해두면 좋대.


소정뭐라고?


민서여기― 없앤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흔적도 없이 없어질 것 같대.


소정민서야.


민서응.


소정너를 옆에 두지 말았어야, 아니야.


민서무슨 말 하려고 했어?


소정그냥. 마음이 아프다고.


암전
더 이상 티브이에 어떤 것도 뜨지 않을 것이다.
Killing time
END




2부


5장.


1부에 있던 것들이 깔끔하게 치워진 무대. 대신 1부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가득하다. 조잡한 페인팅으로 가득 찬 파란색 가벽들, 쓰레기를 꽉꽉 채워 야무지게 묶은 이문동 전용 쓰레기봉투 더미, 송골매 신곡 모음 레코드판, 작은 자개 문짝 같은 것들. 소정과 민서, 라디오를 앞에 두고 있다. 라디오가 장마철 폭우처럼 울며 드문드문 소리를 뱉어낸다.


그 사이로 드문드문 굴삭기 소리, 공사 소리, 그러니까 뭔가를 부수고 깨는 소리 같은 것들이 들린다.


라디오 소리[신이문역…… 이문2동의 재개발을…… (앞두고-는 묵음 처리) 도시재정비…… (위원회-는 묵음 처리)는 노후, 불량 건축물이 밀집해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이 필요한……]


소정, 세게 라디오를 한 대 친다. 라디오가 뒤로 넘어가면, 민서가 다시 세운다.


라디오 소리[바가 있다고 밝혔는데……요. 이문2동 실 거주인들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향후에 자세히 논의하겠다는……]


소정듣지 말자, 그냥.


민서정보가 있어야지. 그래야 준비할 수 있잖아.


소정난, 진짜 모든 걸 다 알았는데 한 번도 준비한 적 없어. 정확하게는, 준비가 제대로 된 적이 없어.


민서그렇지만,


소정집주인은 뭐래?


민서방 빼라고…… 이번 달까지는…….


소정닦달하지? 그럴 줄 알았어.


민서그래도 확실하게 이야기했어! 문자로도 한 번 더…… 일론 머스크한테 답장은 받아야 하니깐…….


소정그래서, 집주인이 뭐래?


민서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소정답은 해줬어? 안 나가도 된대?


민서(사이) 바쁘시겠지.


소정난 말이야. 집이 몇 채나 있으면 더 친절해질 거야. 집세가 밀리면, 물어볼 거야. 힘든 일이 있었냐고.


라디오 소리[민원이…… 이어지고…… 이는 곧 싸움으로……]


소정(사이) 미안해.


민서뭐가?


소정예민하게 군 것 같아서. 근데 화낸 거 아니다? (사이) 그냥 난, 약속된 게 하나도 없는 게 이상해서. 집을 언제 나가라는 건지도, 안 나가면 쫓겨나는 건지도 모르겠어서…….


민서조금만 더 기다리자.


소정기다리기만 해?


민서난 기다리는데 고민까지 해야 한다는 게 힘들어.


소정난 기다려야 할 게 너무 많다는 게 벅차.


라디오는 끊겼다, 재생되었다를 애매하게 반복하고 지지직거리는 소리로 이어진다. 그 새로 굴삭기 소리가 들린다. 혹은, 뭔가를 깨고 부수는 소리가 라디오 소리를 덮어버릴 만큼 크다. 소정이 귀를 막는다.


소정그리고 저 소리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아.


민서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소정뭐라고?


민서긍. 정. 적. 으. 로. 생. 각. 하. 자. 고.


소정긍정적으로.


민서응. 맞아.


소정그게 안 돼. 차라리 북소리는 그래도 규칙적이고, 변수가 없잖아. 밥을 먹으러 가지도 않고 저녁때 즈음엔 전부 철수하지도 않고. 운명처럼 왔다가 운명처럼 멈추는데 저 소리는 너무 인간적 변수가 많아. 이번엔 뭔가를 깰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수고. 이번엔 부수겠지, 하면 깨고. 달려가서 미친놈들아! 고소할 거야! 하면 잠깐은 멈춰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내 의지가 반영될 것 같고…… 근데 사실 아니고…… 그게 아주 미쳐버리는 포인트야. 저것 때문에 긍정적인 사고가 안 돼.


민서그거, 정확한 표현이다.


두 사람은 어느새 미동도 없이 엎드려 있다. 요란하던 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소정사실. 얼마 전에, 그림을 그려 보려고 했거든?


민서, 조금 놀란 눈치다.


소정학원에서 문자가 왔어. 수강 관련 문자…… 그러니까 옛날에 그리다가 만 그림 생각이 나는 거야.


민서구의 증명?


소정알아?


민서(사이) 사실 몰래 본 적이 있어. 네가 학원에 그림 모아서 낼 때…….


소정아. 포트폴리오. 그치, 그랬지…… 너도 봤으니까 알지? 미완성 습작인 거.


민서, 아무 말 없다.


소정원래 습작이 다 그런 건데…… 그런 거긴 한데…… 너무 신경이 쓰이는 거야, 텅 빈 부분이. 뭔가를 채워 보자 싶었어. 학원에서도 그랬고,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가 없어서. 근데 그러려면 밑에 흰 바탕색을 깔아야 하거든. 캔버스가 하얀데도 그래. 이상하지? 어쨌든, 난 진짜 채워 보려고 했는데 흰색 물감을 다 쓴 거야 하필. (사이) 그래서 그냥 못 그리게 됐어.


민서다른 색을 쓰면 안 되는 거야?


소정대체할 색 같은 게 없어. 그리고 대체하는 순간 비겁한 사람이 되는 거야.


민서그렇지 않아.


소정그림은 그래. 작품을 위해서는 아끼지 말아야 하거든. 겁 없고 당돌하게 임파스토를…….


민서난 그런 건. 몰랐어.


소정(약간 밝게) 아니다. 흰색이 있었어도 완성은 못 했을 거야.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서…… 다시 그리면 주변 색과 달라져버렸을 거거든. 티가 났을 거야, 저 부분만 다른 걸 보면 이 사람은 그림을 제때 완성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이런 게. 그럴 바엔 완성하지 않는 게 낫지.


민서, 아무 말 없다. 소정은 다시 민서의 표정을 살핀다.


소정안 물어봐?


민서뭘?


소정(장난스럽게) 임파스토가 뭔지.


민서어이없어, 진짜.


소정긍정적으로 생각해. 뭐, 세상엔 증명하지 못해 아름다운 것들도 종종 있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민서노력해 볼게.


소정그래. 그 김에 답장 왔나 확인해 볼까? 아까 혹시 우체부 다녀갔어?


민서몰라. 계단 올라오는 소리 못 듣기는 했어.


소정넌 소리가 제대로 들려?


민서아니. 그래서 신경을 문에 집중하고 있어.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소정나도 앞으로는 그래야겠다.


사이.


소정미친놈.


민서우체부가?


소정아니. 일론 머스크. 쓰레기 같은 놈.


민서욕하지 말자. 듣고 있으면 어떻게 해.


소정이런 걸 들을 수 있었다면 답장했겠지.


민서그치? (짧은 사이) 나쁜 놈. 죽어버려라!


소정이제 이 주가 다 돼 가는데.


민서근데, 해외에서 오는 거니까.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어.


소정해외 우편물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리나?


민서응. 한 달 정도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잖아. 중간에 분실되거나, 다른 나라로 가는 배에 실리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리고, 앨런 마스크도 생각을 해 봐야 할 테니까…… 검토도 해 보고.


소정나는, 그렇게 돈이 많으면 생각할 시간은 하루면 충분하다고 봐. 돈도 시간도 전부 가질 순 없는 거야.


민서그러네. 우리는 돈도 시간도 없어.


소정그러니까 일론 머스크는 비겁한데다 욕심쟁이인 거지. (사이) 확인해 보자. 내가 나가 볼게.


소정, 일어나 문 앞에 선다.


민서조심히 열어―.


소정, 소매로 코를 막고 문을 연다. 먼지가 한 번 인다.


소정(막힌 소리로) 빠르게!


소정, 달려 나간다. 문이 닫힌다. 혼자 남은 민서, 라디오를 만지작거린다. 지지직거리던 라디오에서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흘러나온다.


라디오 소리[오후 두 시, 꿈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이문3동 사시는 김소정 님 연락을 제작진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소정의 이름이 나오자 민서, 집중한다. 소정은 무대를 크게 한 바퀴 돌고 돌아오고 있다.
소정이 올라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라디오 소리[이주 전 김소정 님의 사연으로 오프닝을 열었었죠. 꿈을 포기하기 직전에 놓이신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꿈을 포기한 사람들 측으로 주소, 우편번호 보내주시면요. 저희가 김소정 님께 꼭 필요한 맞춤 선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소정 님을 그리고 소정 님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오늘은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 첫 구절로 라디오를 열어 볼 텐데요.]


소정이 올라오는 소리가 이런저런 소리들과 섞여 희미하게 들린다.
민서는 라디오 소리에 집중하느라, 소정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라디오 소리[오랫동안 헛된 기다림을 기다린 끝에, 나는 당신과 나 모두를 위해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어.]


문이 열린다. 소정이 문을 연다. 다시 한번 자욱하게 노란 먼지가 인다.
먼지 사이에 옷소매로 코를 막은 소정이 서 있다.


라디오 소리[고통은 하나의 아주 긴 순간-]


민서, 라디오를 친다. 라디오가 뒤로 넘어가며 쓰러진다. 소정과 민서, 대치하고 있다.


민서답장, 왔어?


소정안 왔어.


민서(사이) 기다릴 거지?


소정할 수 있는 걸 하자.


민서(비장하게) 그래, 그러면 기다리자.


두 사람, 몇 번 콜록거린다.


민서문 조심히 열라니까.


소정고장 났어, 문도.




6장.


두 사람, 같은 위치에 앉아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전과 똑같다. 단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두 사람이 뒤에 수십 개의 파란색 X자들을 표시해놨다는 것이다. 그것 빼고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시끄러운 소리는 두 사람의 대화 도중, 정말로 시도 때도 없이 들릴 것이다.


소정몇 시지.


민서여섯 시, 십 분 전.


소정우체부는 몇 시까지 일하더라.


민서여섯 시까지.


소정왔어?


민서아니.


소정답장이? 우체부가?


민서우체부가. 그러니까, 둘 다 안 온 거지, 아직.


소정그럴 줄 알았어.


두 사람, 기대 눕는다. 긴 한숨을 쉬며.


민서어제는 옆 동네에 있는 마트에 다녀오다가, 우체부 아저씨를 마주쳤거든? 편지 온 거 있는지 물어보려고 막 뛰어갔는데 나를 위아래로 조금 훑어보면서 그러는 거야. (흉내 내며) 민서 씨. 민서 씨, 맞죠? 외람된 말씀인 거 아는데, 저는 더 이상 이 동네에 오고 싶지 않아요.


소정(기다리다) 그게 다야?


민서(흉내 내며)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소정무슨 뜻인데 그게?


민서우리가 여기서 나갔으면 좋겠다는 거지.


소정말도 안 돼.


민서그게 다였어.


소정그 사람이 뭔데 그런 말을 해?


민서싫다는 거지. 고작 우리 때문에 이 동네를 와야 하는 게…….


소정사명이 없네. 우체부는 아무리 험난하고 지루하고 지난한 동네더라도 묵묵히 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은 간절한 것도 없대? 그런 기본적인 이해도 없는 사람이 편지를 배달한다는 게 말이 돼? 그런 사람이 편지같이 소중한 걸 배달한다는 게.


민서원래 세상은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잖아.


사이.


민서고통은 하나의 아주 긴 순간…….


소정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어?


민서어쩌다 알았어. (사이) 너, 오스카 와일드 알아?


소정알지.


민서유명한 사람이야?


소정그럴걸. 그, 동화 있잖아. 『행복한 왕자』 그것도 그 사람이 쓴 거야.


민서『행복한 왕자』?


소정왜, 있잖아. 외로운 새랑 왕자 동상 나오는 이야기.


민서아, 그러다 결혼하는?


소정아니. 그거 말고. 새랑 왕자가 상부상조해 보려다 서로 사랑해버려서 망하게 되는 이야기 있잖아. 어릴 때 많이 읽는 거.


민서사람들은 어릴 때 그런 걸 읽는구나.


소정어차피 크고 나면 잊고 살게 되니까, 의미 없어.


민서어쨌든 유명한 사람이 맞나 보네…… (짧은 사이) 그 사람도 유학파일까?


소정아마 그렇지 않을까.


민서재수 없다.


소정그런 편이지.


민서(고민하다) 그러면 너는, 제일 필요한 게 뭐야?


소정글쎄…… 집이랑, 생활비랑.


민서그런 거 말고. 누군가 딱 하나만 너에게 선물해준다면 말이야.


소정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 누가 대가 없이 뭔가를 준다는 생각. (사이) 너 빼고는. 내 주위에 그런 사람이 없어.


민서기쁘다. 사실 슬퍼…….


소정그럼 너는? 딱 하나만 선물 받을 수 있다면. 뭘 해달라고 할 거야?


민서난, 우주에 보내달라고 할 거야.


소정왜?


민서우주에는 빅뱅이라는 게 있잖아. 다 빨아들이는.


소정블랙홀?


민서응. 그거. 거의 비슷했는데…… 아깝다. 아무튼, 블랙홀에 들어가면 시간 같은 게 상관없어진대. 먼 미래도 갈 수 있고, 과거로 갈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거기로 빨려 들어가선 과거로 과거로 가버릴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라던가.


소정왜 하필 그때야?


민서그때가 너무 좋아서.


소정(짧은 사이) 바보.


민서나 바보 아닌데.


소정원래 바보들은 자기가 바보인 걸 모르는 거야.


사이.


민서소정아. 너, 유학 가면 꼭 비엔나소시지 먹어.


소정왜?


민서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갈 거잖아…… 칼집도 내달라고 해, 예쁘게…….


소정, 대답 없다.


민서소정아.


소정왜 불러.


민서우리, 같이 호프집에서 일할래? 소시지가 유명한 호프집인데. 주 삼 회 세 시간. 유학 가기 전까지만 같이 소시지 먹는 연습을 하는 거야.


소정(사이) 비엔나에 소시지 안 유명해. 그리고 그 비엔나는 그 비엔나 아니야.


민서그렇구나…… 그 비엔나가 그 비엔나가 아니었구나…….


소정,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다시 무언가를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온다.


민서또 이상한 소리 들린다. 고소하겠다고 해 볼까?


소정그러지 마.


민서너무 낮이고,


소정그래도 아마 안 멈출 거야.


민서소정아.


소정왜 불러?


민서그러면— 어때?


소정뭐라고?


민서(더 크게) 혹시 부대찌개집은 어때? 점심 제공이래.


소정, 대답 없다.


민서유학 가면 물리도록 소시지만 먹어야 하니까…….


소정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민서한식을 미리 많이 먹어둘 수도 있고…….


소정,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다가간다. 창문을 열고 크게 소리친다.


소정이제 제발 그만 좀 해! 우리 안 보여?


소정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들은 들려온다. 소정, 다시 거세게 창문을 닫는다. 민서가 작게 기침한다.


소정봤지? 소용없는 거.


사이.


소정나 그림 그리지 마?


민서무슨 말이야, 그게.


소정너 변했다.


민서나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소정예전 같으면, (사이) 아니야, 미안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사람 같은 게 어디 있겠어.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세상도 변해.


소정, 다시 자리에 앉는다.


소정민서야.


민서응.


소정조만간 나가게 되면, 흰색 유화 물감 튜브 하나만 사다 주라. 퍼머넌트 화이트로.


민서퍼머넌트 화이트…….


소정그래, 그걸로.


민서소정아. 난 한 번도 널 믿지 않은 적이 없어.


소정내가 그 말을 믿었으면 좋겠어?


민서사실이니까.


사이.


민서소정아. 물감, 언제까지 필요해?


소정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민서그러면 얼마나 기다릴 수 있어?


소정기다리기가 싫어.


민서(사이) 그러면, 훔쳐 오는 것도 괜찮아?


소정, 아무 말 없이 민서를 바라본다. 민서도 마찬가지로.




7장.


두 사람, 같은 위치에 앉아 있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고 전보다는 훨씬 익숙해진 모습이다.


민서오늘은 뭘 할까.


소정할 게 있나.


민서기다리는 건 싫다고 했잖아.


소정그러니까. 그것 말고 할 게 있냐고.


민서고민해 보는 거지.


소정답이 나오는 문제야?


민서글쎄.


소정그러면 시간 낭비야.


민서의 핸드폰이 다시 울려댄다. 민서는 핸드폰을 그냥 뒤집어 놓는다.


소정누군데?


민서집주인 할아버지.


소정왜…… 연락 오는데?


민서두 가지 가설이 있는데. 일, 집세를 안 내서. 이, 집에서 안 나가서.


소정받지 않는 게 좋겠다.


두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소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민서왜 그래?


소정들었어?


민서뭘?


소정계단 올라오는 소리― 그리고 (사이) 지금 계단 내려가는 소리.


민서잘 안 들려.


소정과 민서, 뛰어가서 문에 귀를 댄다.


민서맞아. 맞는 것 같아. 나가 볼까?


소정잠깐만!


민서왜 그래?


소정그냥 통지서가 온 거면 어떻게 해?


민서그럼. (사이) 내일 다시 봐야지.


소정그건 싫어.


민서그러면 지금 가서,


소정그것도 싫어. 아니야, 나는 그냥―.


민서, 소정의 손을 잡는다.


민서지금 확인해야 돼. 돌아올 수 없는 강이더라도. 선택해야 돼.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본다. 소정,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간다.
민서, 성호를 긋는다.


민서제발…… 하나님…… 제발…….


소정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여는 소정.


민서편지 왔어?! 왔구나!


소정, 편지와 소포 하나를 들고 있다. 소정, 편지를 꺼내 읽는다. 민서, 옆에서 숨죽이고 기다린다.


소정돈을 대주겠대.


민서일론 머스크가?!


소정식당 일을 하고 있는데,


민서일론 머스크가?!


소정한 달 정도는 가능할 것 같대.


민서(감격에 차) 한 달! (의문스럽게) 한 달?!


소정우리 엄마가. 학원비를 대주겠대.


민서다른 건 없어?


소정뭐가 또 있어야 하는데?


민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우편함을 확인하러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계단을 올라 문을 열고 들어온다. 민서, 문 앞에 서 있다.


민서어머님한테 보냈어 편지를?


소정넌 누구한테 보냈는데?


민서난…… 일론 머스크한테.


소정또?


민서, 고개를 젓는다.


민서물어봤잖아, 내가. 돈 안 줄 것 같은 사람한테 보내는 건 시간 낭비고 종이 낭비라며. (사이) 네가 어머님한테 편지 보내기 싫다고 했잖아. 연락도 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잖아, 나중에, 나중이 되고 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잖아. 내가 못 미더워?


소정우린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민서왜 없어. 넌 그림도 그리고, 나는, (사이) 종이접기도 할 수 있고.


소정내가 유학 가려던 게 문제였어.


민서왜 유학 가고 싶으면 안 되는데? 왜 잘 그리는데도 유학 가고 싶으면 안 돼?


소정, 대답하지 않는다.


민서대답해, 응? 소정아, 왜 안 되는데.


소정나 잘 못 그려.


민서거짓말.


소정나 잘 그리는 거 아니야. 학원에 상담 갔을 때도,


민서아무것도 안 들을 거야.


소정그럼 우린 계속 이렇게 있는 거야. 평생을 기다리면서.


사이.


민서그럼 난 어떻게 해? 네가 아무것도 안 하면.


민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다.


민서네가 아무것도 아니면 나는 어떻게 해? 그럼, 내가 봤던 건 뭐야. 우리 처음 만난 날 내가 봤던 건 뭐야. 그때 네가 그렸던 그림은 뭐가 되는 건데…….


소정그건, 그냥 기억.


민서아무것도.


소정그래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우리만 아는 기억.


민서추억?


소정응. 아무것도 증명되진 않는 추억.


사이.


소정슬퍼?


민서마음이 아파. 너는 슬프지도 않아?


소정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삼 년 전이었으면, 울었을 것 같기도 해. 근데 지금은 눈물이 안 나.


민서삼 년 후에…….


소정나 갈 거야 유학. 갈 건데, 지금 말고. 지금은 일단…… 언젠가…….


소정, 집을 한 번 둘러본다.


소정일단 이사부터. 이사부터 가야지.


소정, 집을 한 번 둘러본다.


소정일단 이사부터. 이사부터 가야지.


민서, 현관에 놓여 있는 박스를 열어 본다.


민서하하…….


소정, 박스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낸다. 소정의 목소리가 떨린다.


소정애청자 소정 님을 위한 특급 선물. 일곱 가지 색깔의 락스 세트……. 역시 인생이랑 투자는 타이밍인가 봐.


소정, 민서의 옆에 앉는다.


소정(사이) 나중에 내가 성공해서. 네가 유학 가고 싶다고 하면, 돈 대줄게. 다-.


민서나는, 유학 가는 거 싫다?


소정정말?


민서소심해서…….


소정다행이다. 삼 년 후에. 나 정돈 되겠다.


사이.


소정아직도 과거로 가고 싶어? 우리 처음 만났던 때로?


민서모르겠어.


소정난 아니야. 난 지금도 좋아. 그래서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부서진 건 부서지게 두고, 찢어진 건 찢어지게 두고…….


민서마음이 아파.


암전.




에필로그


아무도 없는 무대에 민서 홀로 서 있다.
조명이 들어오면 옥상 벽이 보인다. 초록색 가벽이 마젠타 벽으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장미가 그려져 있다. 장미는 민서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민서가 오래 그 벽을 보고 있다.


막.











조제인
작가소개 / 조제인

출생지 정확하게 모름. 내러티브를 기반으로 하는 다매체 작업들을 한다. 《알마의 승부는 엉덩이로부터》, 《쉘 위 댄스, 보사노바》, 《사랑스런 신을 위한 DIY 안내서》 등을 쓰고 만들었다.


《아르코문학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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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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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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