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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국

  • 작성일 2023-03-24
  • 조회수 1,934

율도국


신은수


등장인물


홍인형, 홍길동, 양삼봉, 여진, 꽃비, 배덕성, 장오출, 옹말석, 김처선


배경


1506년(연산군 11년) 조선.


사옹원(司饔院)1) 분원(分院),

어소(漁所)2)의 집무실 안.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공간 주변으로, 문서들이 놓여 있는 책장들.

그 옆 편엔 넓지 않은 마루방 공간이다.

굴비 등의 생선들이 볏짚에 엮여 매달려 있으며, 작은 옹기들이 주변에 놓여 있다.


잔잔한 파도 소리.



1.


어전(漁箭)3)을 살펴보는 홍인형,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의 바닷가.


홍인형 ······.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 도포 차림에 갓을 쓴 김처선이 다가와.


김처선 쌀쌀하구먼, 그래.

1)사옹원(司饔院): 임금과 대궐의 식사 공급을 위해 설치된 기관.
2)어소(漁所): 궁궐에 생선 등의 어물을 공급하던 곳.
3)어전(漁箭):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속에 둘러 꽂은 나무 울.


예를 갖추는 홍인형.



홍인형 이른 아침부터 나오셨습니까.

김처선 어전에 뭔가 많이 잡혔는가.

홍인형 그래 봤자······ 배에서 올리는 것보단 미비하죠.

김처선 요즘 같은 철엔······ 조기들은 많겠는데······.

홍인형 잘 알고 계시는군요.

김처선 평생 수라를 책임졌던 사람일세.

홍인형 진상해 올리는 것에 혹여 흠이라도 있나, 늘 걱정뿐입니다.

김처선 전하께선 별말 없으시네.

홍인형 다행이로군요.

김처선 예부터 이 연안엔 늘 어족이 풍부했지.


어전에 모인 물고기들을 살펴보며.


김처선 밀물에 몰려온 고기떼들이 썰물 때 나갈 물살을······ 저렇게 나무 울로 막아버리고선 잡는식이로구먼.

홍인형 상선(尙膳)4) 어른······.

김처선 뭐든 망설이지 말고 말하게.

홍인형 근래 어획량이 줄어 용왕제를 지내려 하는데, 어떠십니까.

김처선 미신은 나라에선 금하는 것이네만.

홍인형 이것마저 막는다면 동요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김처선 조선팔도 어디든 어렵긴 마찬가지라네.

홍인형 날씨에 따라 바뀌는 어촌은 앞일을 알 수 없는지라, 대책 없이 이대로 겨울에 이른다면, 굶어 죽는 자들이 늘어갈 것입니다.

김처선 조정의 대책을 기다려 보세나.

홍인형 용왕제라면 어쨌든 동요는 잠재울 테니, 제 처벌을 각오하고라도······.

김처선 사옹원과는 별개로······ 어민들이 벌인 것으로 하게.

홍인형 상선 어른을 믿고, 그럼 행하겠습니다.

김처선 미신이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김처선 따지고 보면······ 전하의 처용무도 그런 것인데 말일세······.

홍인형 길동의 일은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세상에 알려진다면 혹여 전하께 누가 될까 두려워······ 우선은 숨기는 것에만 급급하였습니다.

김처선 왜 다시 조선 땅에 돌아온 건가.

홍인형 본인 입으로 차차 말씀드릴 것입니다.

김처선 알게 된 이상······ 전하껜 고할 수밖엔 없겠어······.

4)상선(尙膳): 종2품의 내시부 수장. 기본적으로 임금의 수라를 책임진다.


사이.


김처선 지금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홍인형 온 날부터 백정 촌락에 잡아 뒀습니다만······.

김처선 남의 눈을 피하긴 십상이겠구먼.

홍인형 저녁쯤이라면 만나 보실 수도······.

김처선 이 길로 입궐해야만 해서, 내 며칠 있다 다시 옴세.

홍인형 어떤 왕언을 내리실까요.

김처선 슬슬 자네 집안 복권도 기대해 봐야 하잖겠나.

홍인형 서출(庶出)5)이었다고는 하나, 팔도를 뒤흔든 도적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났다 하여 어찌 장자(長子) 된 입장으로 용서받길 바라겠습니까.

김처선 한직으로 이리 몇 년을 돌았으면, 이젠 됐지 않나.

홍인형 오히려 이 사옹원 봉사(奉事)6)직이 제겐 잘 맞는 듯싶습니다.

김처선 불효일세, 자네 부모한텐.

홍인형 ······.

5)서출(庶出): 첩의 소생.
6)봉사(奉事): 조선시대 종8품의 직급.


갈매기들의 울음.


김처선 무리들을 데리고 나가, 그동안 뭘 했다 하던가.

홍인형 본인 말로는······ 먼바다 너머 어느 작은 섬에다······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더군요.


사이.


홍인형 그 나라를 율도국이라 하였답니다.


잔잔한 파도 소리.



2.


어소의 집무실 안, 잔잔한 파도 소리가 이어지고.


장오출 그게 사실이라고?

양삼봉 어디 쉽게 화살 몇 발에 절명하겠습니까.

장오출 덩치가 엄청났던가 봐?

양삼봉 웬만한 황소만 한 크기였죠.


집무실의 마루방 공간에서, 활과 화살을 손질하며.


양삼봉 순간 범과 마주치면 누구나 오금이 굳게 마련입니다.

장오출 대체 얼마나 박아야 잡는단 거야?

양삼봉 활이란 건 그저, 힘을 빼놓는 수단인 거고······.

장오출 뭐가 또 있어?


활을 몇 번 당겨 보고는, 내려놓는 양삼봉.


양삼봉 대충 손질은······ 이럼 다 된 듯싶은데······.

장오출 더 얘기 좀 해 봐, 뭐로 잡는가.

양삼봉 지쳐 행동이 둔해지면 쇠몽둥이로 머리를 치는 것이죠.

장오출 값어치가 떨어지겠는데, 가죽이 상해.

양삼봉 이런 대대로 잡아 왔던 방식 말곤 모르겠군요.

장오출 범 가죽이 얼마나 돈이 되는데.

양삼봉 직접 팔아 본 일이 없어······ 값어치가 얼마건, 사람한테 해가 돼서 잡는 건데······.

장오출 남한테 갖다 바치기나 했으니 알 리가 없지.


양삼봉은 활을 건넨다.


양삼봉 진짜로 한번, 당겨 보시겠습니까.

장오출 이런 걸 생전······ 해 봤나, 내가······.

양삼봉 그물 끌어 올리는 힘이 비하면 쉽죠.

장오출 이리 줘 봐.


당겨 보지만 쉽지가 않다.


양삼봉 자꾸 해 보면 요령이 생길 겝니다.

장오출 아······ 아이고!


순간 어깨를 잡고 뒹군다.


장오출 삼봉이······ 이 사람아······! 나 죽네······.

양삼봉 괜찮으십니까.

장오출 지금 괜찮아 보이는가.


홍인형이 들어오면, 나와 예를 갖추는 양삼봉.


홍인형 무슨 일 있는가.

장오출 아닙니다, 아무것도.


옷을 털며 일어나.


장오출 봉사 어른, 용왕제는 어찌 될까요.

홍인형 막 현감을 뵙고 온 길일세. 허락하셨네.

장오출 아니, 어떻게 이리도 쉽게요?

홍인형 이미 상선께 고했다고 하니, 어쩌시겠는가.

장오출 그 어른은 언제 다녀가셨습니까.

홍인형 아침 일찍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셨어.

장오출 어쨌거나, 잘됐군요.


홍인형, 문서들을 살펴보며.


홍인형 제물이 들어오는 대로, 일을 좀 해주게.

양삼봉 마땅히 소인 같은 백정이 나설 일이죠.

장오출 요즘 죽은 소가 쉽게 구해질까요.

홍인형 구해 보시겠다니, 현감 어른을 믿어 봐야지.

장오출 원래 용왕제엔······ 즉석에서 잡은 소 대가리라야 좋은 건데······.

홍인형 어쩔 수 없잖은가, 정해진 국법이 그러한데. 아, 돼지머리로 해 보는 건 어떻겠나. 말과 소만 빼곤 도축해도 상관없으니깐.

장오출 물하고 돼지는 상극이라······ 안 되죠.

양삼봉 그럼 노루나 다른 산짐승들 같은 것은요?

장오출 소가 아니면 안 된다 할 거야, 고기잡이들이. 오랜 관습인데 어디 그리 쉽게 바뀌겠어? 정착해 농사는 안 짓고, 왜 백정들은 밖으로만 돌아?

양삼봉 그렇군요. 옳은 말씀입니다.

홍인형 바뀌려면 누군가 먼저 나서야지.


고른 문서들을 챙겨 놓으며.


홍인형 작은 돌멩이가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듯이······.

양삼봉 혹시, 범이라면 어떨까요.

장오출 진짜로 잡을 수가 있단 거야?

양삼봉 그러니 이렇게 여기도 들락거리고 있는 것이죠. 소머리보다야, 모두 용왕께 바치기엔 낫다하겠죠.

장오출 말이라고 하나, 이 사람! 영물인데.

홍인형 그래, 무슨 흔적이라도 보이던가.

양삼봉 아직은······ 아무것도······.

홍인형 큰일이로세. 근방에 호환(虎患)7)의 피해가 생겨났다니······.

양삼봉 맡겨 주십시오. 대대로 사냥에 능한 것이 백정들이니까요.

7)호환(虎患):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禍).


홍인형, 문서들을 들고 나서면.


장오출 어디 또 나가십니까.

홍인형 다시 현감을 뵈러 가 봐야 해서.

장오출 더 잘 말씀 좀 해주십시오.

홍인형 이미 허락하셨잖은가.

장오출 압니까, 뭐라도 더 해줄지.


홍인형, 나간다.


장오출 사옹원에 뭔 물고기 먹으려 올까, 범이?

양삼봉 그래 다른 산짐승들이 몰려들 터라, 자연스레 사냥하러 오는 것일 테죠.

장오출 여기가 아주 위험한 데구먼.

양삼봉 처형이랍니다. 소를 밀도살(密屠殺)8)하면, 국법엔.

8)밀도살(密屠殺): 허가 없이 가축을 잡음.


젊은 옹말석, 들어온다.


장오출 봉사 어른, 금방 가셨다.

옹말석 요 앞에서 뵙고 인사드렸습니다.

장오출 말석아, 오늘은 참조기가 꽤 잡혔다.

옹말석 내일 중에 다 절여 놓을 모양이던데······.


어깨가 아픈 듯 주무르고.


장오출 소금은 얼마나 실어 왔냐.

옹말석 지게로 두 가마니요.

장오출 그걸로 될까 모르겠다.

옹말석 모자라면 내일 더 갖다 놓아야죠.

장오출 요즘 더 고되지? 염전 쪽도 일손도 줄고······.

옹말석 어쩌겠습니까, 늘 하던 건데요.

장오출 그래, 좀 차도는 있으시냐.

옹말석 아버지야, 계속······ 그렇게 계시죠.


양삼봉, 옹말석에게 다가가.


양삼봉 어디 좀, 보여 봐.

옹말석 괜찮습니다, 어르신.

양삼봉 나이 들어 고생하기 싫음, 얼른 치료해야 한다.

장오출 아, 장인어른 말씀하시는데 들어.


얼굴이 붉어진 옹말석.


장오출 꽃비는······ 어쩌고 있나······?

양삼봉 요즘엔 신났죠, 제 또래 하나가 생겼으니.

장오출 그 처자······ 기억은 돌아왔대?

양삼봉 어찌 압니까.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시죠.

장오출 꽃비한테 뭔 얘기 못 들었나 해서.

양삼봉 돌아오면 다행이고, 못 돌아오면······ 다 그것도 자기 팔자인 걸 테죠.

장오출 떠내려온 차림새가······ 양반집 규수인 거 같잖아?

양삼봉 어쨌건 살았으니 다행이지만.


옹말석의 옷섶을 풀고, 어깨를 보며 만져 보는 양삼봉.


양삼봉 쯧쯧, 이런 데 지게를 졌어?

장오출 그냥 견딜 만했습니다.

양삼봉 언제부터 아팠냐.

옹말석 며칠 됐는데······ 엎어질 때 잘못됐나······.

양삼봉 좀만 참아 봐라.


힘주어 어깨를 누르면.


옹말석 으악!


사이.


양삼봉 뼈는 상하지 않은 듯하니, 너무 걱정 말거라.

장오출 삼봉이 자넨, 세상 모르는 게 없네, 그려.

양삼봉 늘 뼈 살만 만지며 살아선지, 감이 생긴 듯싶습니다.

장오출 소나 사람이나 매한가진 게로구먼.

양삼봉 결국엔 다 흙으로 가는 것이죠.

장오출 혼례는 여름쯤이 좋겠다!


수줍게 옷섶을 묶는 옹말석.


장오출 그땐 염전 일도 쉴 때잖아?

옹말석 예······ 장마철엔 쉬고, 가을부터 다시 하긴 하는데······.

장오출 쉴 때 딴 거 말고, 요번엔 촌락 따라가 소 돼지 자르는 거나 열심히 배워 놔.

양삼봉 아, 염간(塩干)9)이 귀한 소금 안 만들면, 남들이 욕합니다.

장오출 배워 둬야지, 자네가 나중 뭔 일 생길지 어찌 알아.

양삼봉 일손도 없다는데 빼 와서야 됩니까.

장오출 인제 장인이니 올해엔 가 좀 도와주던가.

양삼봉 천한 백정 놈이 감히 소금밭을 더럽혀서야······ 안 될 일이죠.

옹말석 염간도 천역(賤役)10)이긴 매한가진데요.

양삼봉 남들이 꺼려 할 게다.

9)염간(塩干): 조선시대 염전에서 소금을 만들던 사람.
10)천역(賤役): 천한 일을 하는 사람.


술병을 든 배덕성, 취해 들어온다.


배덕성 밖에 지게는 뭐야.

옹말석 잠깐 놨는데······ 잘못됐나요······?

배덕성 이놈아, 내 발이 걸려 자빠질 뻔했다.

장오출 오늘 만선이라 술맛 좀 나나?

배덕성 봉사 나리는요?

장오출 계셨는데, 좀 전에 나갔어.

배덕성 긴히 할 말이 있어 왔더니만.


테이블에 술병을 놓고 앉는다.


배덕성 이 짓도 인젠 못 해 먹겠소.

장오출 해야지 어떡해, 배운 게 고기잡인데. 도적질하며 살래?

배덕성 남는 게 없는데 뭔 고생들이요. 많이 잡으나 적으나, 늘 배 한 척당 반 이상을 떼 가는 식인데 만선이면 뭐 하오. 흥이 나야지.

장오출 아, 상선 어른이 왔다잖아. 자네가 대표로다 오시면 얘기해 봐. 예전처럼 매달 기준량으로 되돌려 달라고.

배덕성 일찌감치 거시기 떼버리고, 내시나 헐걸 그랬나.

장오출 뱃일이 천직 사람이 뭔 소린가.

배덕성 났을 때부터 정해진 거구먼.


자조적으로 웃는다.


장오출 기껏 종8품 봉산데 뭔 힘이 있어. 가까이 임금 모시는 상선이야.

배덕성 나라님이 광병(狂病)에 걸리셨다던데, 누구 말인 듯 듣겠소?

장오출 입조심해! 이 사람, 그러다 큰일 나.

배덕성 세상이 다 아는 얘기요.

장오출 목숨이 두 개야?


배덕성은 병째로 마시고선, 손으로 입을 닦으며.


배덕성 속 시원히 말은 못 해도, 내 입 갖고 마시는 건 뭐라 안 하겠지.

장오출 혹시, 여서 올리는 생선 탓에······ 그리되셨나······?

배덕성 임금 광병이? 용왕께서 우리 원망 듣고 벌을 내리셨나 보구나.

장오출 그랬으면······ 우리한테 뭔 죄라도 물을까.

배덕성 우선은 봉사 나리가 잡혀갈 테지.

양삼봉 복어 같은 독이라면 몰라도, 생선에 광병이 생겼단 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니 안심하게들.


깔보는 듯한 배덕성의 시선을, 양삼봉은 슬쩍 피한다.


배덕성 백정한테까지 이젠 충고받는 신세구먼.

장오출 그래도 연장자한테 그럼 쓰나.

배덕성 우린 좋아 사대부들한테 굽실거리오? 엄연히 계층과 계급이 있는 세상에, 나이 먹은 게 뭔 대수요?


옹말석, 양삼봉을 이끌며.


옹말석 그만 가시죠, 어르신.

배덕성 네 소금 탓일 수도 있다, 임금께서 미친 게.

옹말석 무시하다 나중 버······ 범한테 잡혀가면······ 살려 달라 마쇼.

배덕성 여서 백정들이 범 잡는 거 실제 본 사람 있나, 응?

장오출 얘기야 옛날부터 많았잖아.

배덕성 거짓 소문인지 어떻게 아오.


조용히 활과 화살을 챙기는 양삼봉.


배덕성 빌붙어 보려 떠돌던 저놈들이 냈던 걸 테지. 우리 고을도, 그래 옛날에 불러들였던 게 아니오. 어릴 때 기억이 생생한데.

장오출 그 후론 여서 누가······ 범한테 당했단 얘길 들어봤나.

배덕성 관아에서지, 백정들 덕이겠소? 그게.

장오출 지금 관아에서 나서냐.

배덕성 그깟 범이야, 우리가 해치우면 될 거 아니오!

장오출 옛날 일을 몰라······ 자넨······.

양삼봉 그만들 하십시오.


나서서 공손하게.


양삼봉 천한 백정 놈이 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 받아 주신 덕에 제법 오랜 세월 정착해 우리끼리촌락을 이뤄 살게 된 것이죠. 그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본래가 북방서 사냥이나 하며 살던 이민족 후손들인지라, 범 사냥엔 제법 재주가 있습니다. 계속 보답할 기회를 주십시오.


홍인형, 들어온다.


홍인형 마침 있었구먼. 바쁜가, 지금?

배덕성 뭔 일입니까, 또.

옹말석 ······.


가라앉은 분위기에, 어리둥절해하는 홍인형.


양삼봉 아, 옛날 어렵던 시절 얘기를 풀다 보니······.

홍인형 나도 이 고장에 온 지, 벌써 다섯 해가 돼 가는구먼.

배덕성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홍인형 같이 얼음 창고에 좀 가세나.

배덕성 어디가 샙니까.

홍인형 아닐세. 내일이나 모레쯤, 얼음들을 빼고 새로 채워 넣을까 해서. 젊은 고기잡이들은 자네가 이끌고 있으니, 살펴보고 쓸 만한 사람들 좀 보내줬음 해.

배덕성 상선 어른, 요새 시찰이라도 오시는가 보군요.

홍인형 약주 좀 했는가.


미소 짓는다.


홍인형 저번 달 해 놨어야 하는 걸, 여차저차 미룬 것일세.

배덕성 저장고가 하나 더 있어야겠던데요.

홍인형 고민해 봄세. 웅어11)는 인제 철이 다 지나가는 건가.

장오출 살도 없고 뼈도 억세, 앞으론 잡으나 마나죠.

홍인형 계속 수라에 올리라니 일단은 잡아 오게.

장오출 제맛이 안 날 텐데······.

배덕성 나라님께서 웅어에 맛 들이셨나 보네.

홍인형 그렇게들 전달해 주게나.

11)웅어: 봄이 제철인 청어목 멸치과 바닷물고기. 수라상에 자주 올랐다.


홍인형과 배덕성, 함께 나간다.


양삼봉 ······.


사이.


장오출 저놈은 옛날 일을 몰라······ 안 그런가······?

양삼봉 따라가 보십시오. 취해 제대로 되겠습니까.

장오출 그래야겠구먼······.


놓인 술병을 들고 나간다.


양삼봉 나을 때까진 지게는 두고, 봉사 나리께 말씀드릴 테니 여 달구지로 옮겨 날라라. 쑥 찜으로 부기부터 빼게 한가할 때마다 들르고.

옹말석 어찌 어른께 저럴 수 있단 말입니까.

양삼봉 맨정신도 아닌데, 뭐가 분해.

옹말석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미소 짓는 양삼봉.


양삼봉 다 살기가 힘들어 저러는 것인데, 어찌 탓할 수가 있냐.

옹말석 오히려······ 사대부들보다도 더한 듯합니다.

양삼봉 저들은 또 얼마나 세상서 차별과 멸시 속에 살고 있겠어······ 그래, 자기들보다 못한 백정들한테서 잃은 자존감을 찾는 것이지. 그게 인간 본성이니깐.

옹말석 어르신······.

양삼봉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


꽃비, 들어온다.


꽃비 아직도 안 끝났나요?

양삼봉 다 끝내고 얘기 나누며 쉬던 참이란다.

꽃비 놓고, 얼른 와서 진지 드세요.

양삼봉 뭔가 맛난 것이라도 구했냐.

꽃비 산나물을 잔뜩 뜯었어요.

양삼봉 잡풀인지 나물인지 어떻게 알고?

꽃비 벌써 그 정도는 안다고요.

양삼봉 기특하구나.


옹말석을 바라보면, 수줍음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양삼봉 음! 어디, 남한테 시집보내도 굶지는 않겠는데?

꽃비 자꾸 그런 말씀 마세요.

양삼봉 봉사 나리껜 말씀은 드리고 가야지.

꽃비 금방 오실까요.

양삼봉 조금 기다려 보자.


옹말석에게 손짓하며.


양삼봉 누추하네만, 같이 가 한술 뜰 텐가.

옹말석 무슨 낯으로······ 제가 따라간답니까······.

양삼봉 아픈데 싣고 오느라 욕봤잖은가.

옹말석 그야, 늘 하던 일이고······.

양삼봉 저리 숫기가 없어서야, 원······.


옹말석을 멀뚱히 바라보는 꽃비.


양삼봉 이리 와 활이라도 배워 볼 텐가, 당기진 말고.

옹말석 제 주제에 무슨······ 그런 걸······.

양삼봉 범하고라도 마주치면 써먹을 수도 있지.

옹말석 그야······ 도망치면 될 텐데······.

양삼봉 어찌 사람 발이 짐승보다 더 빠르겠는가.

옹말석 본래 제가 발은 빠릅니다.


순간 피식 웃는 꽃비, 옹말석은 어쩔 줄 몰라 한다.


양삼봉 아시면, 나라님도 놀라시겠구나. 범보다 빠른 사내라니.


홍길동, 들어온다.


홍길동 어르신, 계셨습니까.

양삼봉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꽃비 만정 오라버니랑 같이 온 건데요, 뭘.

양삼봉 남들 눈에 뜨이기라도 하면 어쩌려 그러나.

꽃비 요즘, 아버진 자주 오가시면서.

양삼봉 나야 쓰일 때가 있어 그런 것이고, 진상하는 곳에 백정이 드나들면 좋을 게 없어. 혹여 남한테 미움 살 수도 있고 말이야.

홍길동 봉사 나리 부름 때문이니, 상관없습니다.

양삼봉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나.

홍길동 그런 건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

꽃비 세상도 이젠 옛날 같지 않다고요.

양삼봉 남의 눈이 제일 무서운 것이네. 늘 도적 취급받는 것이 백정이고, 양반이면 넘어갔을 잘못도 백정한텐 목을 칠 일이 된단 말일세.

홍길동 명심하고 있습니다.

꽃비 뭘 둘러보시다 오셨어요?

홍길동 멀리······ 바다 너머에 있는 세상······.

꽃비 또 그 말씀이네.


옹말석, 일어나 밖으로 향하며.


옹말석 그만 가 보겠습니다, 어르신.

양삼봉 이따 꼭 들르거라.

옹말석 애쓴 산나물을 제가 어떻게······.

양삼봉 얼마나 캐 왔냐, 입 하나 보태도 되겠냐.

꽃비 예, 오셔도 될 거예요.


의자에 걸려 넘어지는 옹말석.


양삼봉 저런, 칠칠치 못하게······.

옹말석 어깨는 더 안 다치고, 멀쩡합니다.


배시시 웃으면서 나가면, 흐뭇한 표정의 양삼봉.


양삼봉 누군지 아느냐.

꽃비 염간 어르신 아들이잖아요.

양삼봉 기특하게도, 착하고 바르게 자랐다.

꽃비 이젠 전부 물려받아서 하나 보죠?

양삼봉 병환 중이시라, 아마도 더는 힘들게야.

꽃비 자식이 배워 둬 그래도 다행이네요.

양삼봉 두어 살 너보단 어려도, 훨씬 어른스럽지 않냐.

꽃비 아직 풋내기 같은데요, 뭘.


홍길동, 놓인 활을 집어 들고.


홍길동 고을엔 아직 피해는 없는 것이군요.

양삼봉 대비해야지, 생겨서야 되겠는가.

홍길동 호환의 피해를 막는다면······ 백정의 이로움을 사람들이 깨닫게 될 테니, 범이 요즘 출몰한단 건 좋은 기회일 수도 있겠습니다.


힘주어 활을 당겨 보는 홍길동. 내려놓으며 앉는다.


홍길동 조선 단궁보다 휨이 다른 게, 북방의 이민족들의 것 같군요.

양삼봉 활에 대해 잘 아는구먼.

홍길동 아주 예전에 다루어 봤습니다만.

양삼봉 옛날엔 나라서 벌목을 금해 범이 많았네만, 요즘처럼 산림이 풍성치 않은 때 범이 지역에 자주 출몰한단 것이 기이한 일이야.

홍길동 산신께서 인간을 벌하려는가 보죠.

양삼봉 한낱 미신일세.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고.


양삼봉 해가 전보단 길어졌구먼, 그래.

꽃비 내 정신 좀 봐, 뭐 하고 있는 거야.

양삼봉 밤에 다니면 범한테 잡혀간다.

꽃비 여진이 기다리겠네.

양삼봉 일찍 들어가라.


꽃비, 나간다.


홍길동 여긴 미신이 신앙인 자들이 사는 곳이잖습니까.

양삼봉      고기잡이들은 바다에 생사를 걸고 사는 사람들이라, 예측할 수 없는 상대를 상대하려니······ 그리될 수밖에······.


홍길동, 등잔의 불을 켠다.


양삼봉 함부로 그리 손대면 어쩌나.

홍길동 어차피 켤 텐데요, 어두워 가는 때에.


주변이 환해진다.


양삼봉 세월만큼이나 낡았구먼, 그래.

홍길동 줄곧 써 왔던 등잔이었던가 보군요.

양삼봉 고래기름을 먹이며 불을 냈던 때도 있었다네.

홍길동 그 귀한 걸 말입니까.


바람에 파도의 소리는 더 세졌다.


양삼봉 예전엔 죽은 채로 고래가 제법 떠밀려오곤 했지. 그 기름을 짜서 파는 일이 고을의 큰 수입이기도 했는데······.

홍길동 왔던 동안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것 같군요.

양삼봉 고기잡이들이 몰래, 바다로 다시 밀어 넣고 있을 게야.

홍길동 이젠 나라의 소유물로 돼, 얻는 것 없이 일거리만 늘어나서일 테죠.

양삼봉 알고 있구먼, 그래.

홍길동 언제부터 그린 된 것입니까.

양삼봉 임금이 바뀐 후부터이지.

홍길동 어르신께선, 왜 제게 복종하는 삶을 주의시키시는 것입니까.

양삼봉 그저 고래 얘기를 했을 뿐인데, 뭘.

홍길동 요즘 들어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양삼봉 만정이, 자넨 앞으로 어쩔 건가. 여기 정착해 살려는가. 봉사 나리의 부탁으로 내 자네를 거두었네만······ 주로 고을 밖으로만 나돌고 있어 하는 말이네.

홍길동 정착하려면 복종해야 한단 말씀이시군요.

양삼봉 신분과 차별은 바뀔 수 없는 것일세.

홍길동 짐승들끼리도 그러한답니까.

양삼봉 큰 화를 입게 될 게야.

홍길동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법입니다, 마땅히 바꿔야 할 것이라면.

양삼봉 나리께서도 아까, 그런 말을 하시더니만······.


홍길동, 큰 소리로 웃는다.


양삼봉 소리 좀 낮추게나.

홍길동 어째 관리가 신분제를 부정한 것인지요.

양삼봉 아니, 용왕제 제물 일일세.

홍길동 왜요? 소머리에 무슨 문제라도?

양삼봉 여의치 않아 노루 같은 걸로 해 보잔 거네만.

홍길동 옳은 지적이군요. 내 당장 올가미를 놓지요.

양삼봉 고기잡이들이 어쩔지 모르니, 지시가 있을 때까진 기다리게.

홍길동 입으로만 뱉지, 문제 생길 일은 실제 행하진 않는 분이란 걸 모르시는가 보군요. 붉은 천을 올가미에 매면, 홀린 듯 다가올 겁니다.

양삼봉 어디 그런 미신이 있었던가.

홍길동 바다 너머의 세상엔······.


배덕성, 들어온다.


양삼봉 벌써 일은 다 보셨습니까.

배덕성 등잔은 누가 켰는가.

양삼봉 오실 때 환하게, 미리 해 둔 것입니다.

배덕성 함부로 손대지 말게.

홍길동 고래기름이랑 얼마나 다른지, 한번 붙여 봤소.

배덕성 누구야, 저 사내는.

양삼봉 촌락에 흘러온 자인데······ 쓰임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배덕성 저것도란 말인가. 망할 범 하나 잡겠다, 백정 소굴이 다 됐구먼.

양삼봉 얼른 인사 안 드리고 뭐 하는가.


무시하는 홍길동의 태도에, 위협적으로 다가가는 배덕성.


양삼봉 고을 고기잡이들의 우두머리시네.

홍길동 백정도 국법엔 엄연히 양인인데, 어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단 말이오.

배덕성 건방진 놈!


내려친 손을 잡아 막는 홍길동.


배덕성 이······ 이놈이······!


점점 배덕성의 힘이 밀리고, 홍길동은 피식 웃는다.


양삼봉 봉사 나리께서 보실까, 염려스럽습니다.


두 사람을 떼어 놓으며.


배덕성 네놈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양삼봉 잘못 가르친 탓이니······ 저를 탓하십시오.

배덕성 가축보다도 못한 게 백정임을, 언제 똑똑히 가르쳐 주지.


홍인형, 들어온다.


홍인형 고생했네, 그만 들어가 보게나.

배덕성 바람이 불안정해······ 내일 바다엔 못 나갈 듯싶군요······.

홍인형 그물은 걷어 앞에다 널게.

배덕성 그래야겠습니다.


분한 듯 나가버리는 배덕성, 양삼봉도 따라나서며.


양삼봉 이만 저도 가 보겠습니다.

홍인형 덕성이 저 사람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양삼봉 사소한 말다툼을 못 풀고 나가버렸군요.

홍인형 아직 취기가 안 가셨으니, 주의하시게.

양삼봉 예, 봉사 나리.


밖으로 나간다.


홍인형 만선이라 좋아했더만, 계속 날이 저러면······.

홍길동 관리다움이 제법 몸에 밴 듯 보이는군요, 형님.

홍인형 목소리 낮춰라, 누가 들으면 어쩌냐.

홍길동 도적에서 이젠 백정인 동생이 부끄러우십니까.


문을 열어 밖을 살피는 홍인형, 다시 문을 닫고 오며.


홍인형 아직, 고을에 발설돼선 안 된다.

홍길동 방금 사내 말을 들으니, 서자 차별 같은 건 사치더군요. 백정은 가축보다 못하다니······ 조선은 어째 구석구석 이 모양인 것입니까.

홍인형 가까이 두고 숨기려니, 거기밖엔 없었다.

홍길동 옳은 판단이셨습니다. 그 덕에 찾은 것들이 많으니까요.

홍인형 또 뭔 일을 꾸미려는 게냐.

홍길동 어쩐 일로 오라 부르셨습니까.

홍인형 보여 줄 것이 있다.


책장 구석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종이를 펼치면 ‘窮寇莫追’란 글이 쓰여 있다.


홍인형 며칠 전, 누가 이 문 앞에 붙여 놨더구나.

홍길동 궁구막추라······ ‘피할 곳 없는 도적을 쫓지 말라’는 뜻이군요. 궁지에 몰린자를 압박하면, 달려들어 자신이 해를 입기 쉬울 테니.

홍인형 너를 아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홍길동 어찌 이 대상이, 홍길동이라 단정하시는지요.

홍인형 사옹원에 도적이 웬 말이냐.

홍길동 진상품을 빼돌리는 자도 있을 테고.

홍인형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홍길동 봉사께서야 당연히 그리 말하시겠죠.

홍인형 내 목이 날아갈 일인 것이야.

홍길동 이 구석진 고을서, 옛 도적의 얼굴을 어찌 알아봤을까요.

홍인형 누군가······ 네 무리 중에 있던 자였는지도······.

홍길동 무리라 하면······ 그때 전부 배에 태워 데려가, 모두가 지금은 새 나라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잘 살고들 있는데요?

홍인형 어째서 전부 버리고 왕 혼자 돌아올 수가 있는 것이냐.

홍길동 버린 것이 아닙니다······ 뜻이 있어서이지······.


세진 바람에 거친 파도 소리.


홍길동 ······.


사이.


홍인형 난,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홍길동 명망 있던 사대부 집안이, 도적이 된 서자 탓에 풍비박산(風飛雹散) 나고······ 그 바람에 부친께선 병환에 죽고······ 형께선 한직으로 도니 어찌 왕이 됐다 한들 평온할 수 있었겠습니까.

홍인형 이미 상선껜 모두 다 말씀드렸다.

홍길동 제가 와 있었단 걸 말입니까.

홍인형 마침 직무로 와 계셨던 터라······ 그때 많이 애써 주시지 않았느냐. 전하께도 고해 보신다고 하셨다.


홍길동은 웃는다.


홍길동 그간 옥체 무탈하신가 모르겠군요.

홍인형 분명, 외면하실 게다.

홍길동 다시 서로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죠.

홍인형 그때랑은 처지가 달라.

홍길동 어쩌다 폭군이란 소문까지 도는 지경이 된 건지······.

홍인형 예전 나약한 임금이 아니시다.

홍길동 저도 율도국이란 나라의 왕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잔불.


홍인형 대체 거긴······ 어디에 있는 것이냐······.

홍길동 류큐왕국(琉球王國)12) 가까이, 남쪽의 작은 섬나라이죠. 본래는 류큐에 조공을 바치던 폭군이 다스리던 곳을, 무리들과 제압해 몰아내고 새롭게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홍인형 데려간 무리라 해 봤자, 채 백이 넘는 정도였는데······.

홍길동 어쩌다 표류해 닿은 섬이었는데······ 이미 거긴 오래전 표류로 흘러온 조선인들이 꽤나 정착해 있더군요, 하늘의 뜻이었던 거죠.

홍인형 머릿수를 늘렸다고 어찌 가능한 일이었겠냐.

홍길동 원주민들까지······ 모두가 제 편이었으니까요.

홍인형 무엇으로, 이방인인 네가 민심을 얻었단 것이냐.

홍길동 범이 출몰한다니 어떻습니까, 백정들이 그 덕에 좀 활개를 펴게 됐죠?

홍인형 그네들 도움이 필요한 것일 뿐이야.

12)류큐왕국(琉球王國): 일본 오키나와현에 있었던 옛 왕국.


홍길동, 놓인 활을 매만지며.


홍길동 벌채로 수풀이 많이 사라진 상황에 범이라······? 대체 누가 봤답디까.

홍인형 이미 근방엔 소문이 무성하다.

홍길동 공포심이 담긴 거짓은, 역시나 확산이 빠른 것이군요.

홍인형 사실이 아니란 말이냐······?

홍길동 호환이란 두려움 앞에, 제법 사람들은 차별 없이 힘을 모으고 있지 않던가요? 관리로선 다스리기가 쉬워졌을 테고요.


웃음 짓는 홍길동.


홍길동 형님 물음에 답해드렸습니다.

홍인형 대체 또 무슨 일들을 꾸미는 게야!

홍길동 그리 소리치시면 다 들립니다.

홍인형 !


주변을 살펴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등잔불.


홍길동 모른 척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십시오.

홍인형 어찌 됐든······ 다시 일을 꾸민다면, 이번엔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게다.

홍길동 심려 마십시오.


미소 지으며 등잔을 살핀다.


홍길동 이젠 돌아갈 곳이 있으니깐.



3.


노을 진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앉아 피리를 부는 여진.


꽃비 ······.


다가오는 걸음에, 멈추고 바라보는 여진.


꽃비 아름다운 소리네······.

여진 다 끝낸 거야? 많이 팔렸어?

꽃비 장터야 늘 그렇지, 뭐.


다가와 옆에 앉는다.


꽃비 이런 재주도 있었구나.

여진 이건······ 바다랑 함께 부는 거야. 소리가 바다에 실릴 때만 아름답고, 홀로 불면 이런 고운음은 나지를 않아.

꽃비 넌 분명 사대부집 아가씨였나 보다.


조심스럽게 피리를 만져 보며.


꽃비 이리 고급진 걸······ 이리도 재주 있게 다루니······.

여진 아마도 똑같은 건 조선 땅 어디에도 없을 거야.

꽃비 기억이 돌아온 거니?!


고개를 가로젓는 여진.


여진 희미하게 이 피리에 관한 것만······ 파도에 떠밀려 와, 몸에 지닌 건 이것뿐이었으니깐······ 나한텐 무척이나 소중한 거였나 보다.

꽃비 부는 걸 안 잊어버린 것도 신기하네.

여진 몸이 익힌 건 저절로 돼.


사이.


여진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든······ 날 싫어하지 않을 거지?

꽃비 말도 안 돼, 백정보다 천한 게 어디 있다고······.


잔잔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쓸쓸히 고개를 묻는다.


꽃비 우린 북쪽 오랑캐 후손이라서 그렇대.

여진 이 땅에선 뭐든······ 적통이 아니면 안 되는 거니?

꽃비 시집갈 땐 가마도 못 타고, 비녀도 못 꽂고······.

여진 정말! 이젠 꽃비도 혼례 할 나이구나.

꽃비 아버지가 슬쩍······ 얘기하시더라······.

여진 좋은 배필하고 맺어지면 좋겠다.

꽃비 보나 마나 그저 그런 양인 사낼 테지, 내 고를 수도 없는 건데······ 차라리 서로 잘 알던 백정 사내가 더 속 편할지도 모르겠다.

여진 어르신한테 그리 말해 봐, 그럼.

꽃비 같은 백정끼리는 못 해, 국법이 그렇대.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꽃비 저런 새보다도 못한 신세야······ 난.


양삼봉, 다가오며.


양삼봉 저녁 바닷바람이 차다.

꽃비 답답해 속 좀 뚫어 보려 나왔어요.


여진과 꽃비가 일어난다.


양삼봉 몸은 점차 회복돼 가는 게냐.

여진 돌봐 주시는 분들 덕에, 이젠 괜찮습니다.

양삼봉 언제 사옹원 나리께 찾아가 인사라도 드리거라.

여진 조만간, 그리하려던 참이었어요.

양삼봉 그럼 뭔가 일거리라도 주실지 모르잖냐.

여진 근본도 모르는 계집한테, 가당키나 할까요.

양삼봉 뭐든 가능한 한 애써 주실 게다.


멀리 홍길동을 발견하고선, 손을 흔드는 꽃비.


꽃비 아, 만정 오라버니다.

양삼봉 귀찮게 하면 안 된다, 일이 많으니깐.

꽃비 이따 또 모이세요? 요즘엔 거의 매일마다네.

양삼봉 백정 촌락이 오랜만에 활기가 도는구나.

꽃비 대체 뭔 모의들을 하는 거예요?

양삼봉 끼고 싶으면 가 봐라, 너도.


홍길동이 다가오면, 놀라 슬쩍 피해버리는 여진.


양삼봉 정말 올가미를 놓고 온 겐가.

홍길동 산언덕, 마땅한 데가 눈에 띄더군요.

꽃비 잔인해요, 목이 걸리면 졸라 죽이는 건데······.

홍길동 이 세상 뭐는 안 그렇겠냐.

양삼봉 시장할 테니 얼른 가세나.

홍길동 갖바치13)

들은 얼마나 있습니까.

양삼봉 우리 촌락엔, 네다섯 정도 될까······.

홍길동 모자랍니다. 딴 고을에서라도 더 불러들이십시오.

양삼봉 가죽신장이가 왜 그리 필요한가.

홍길동 이따 말씀드릴 겁니다.

13)갖바치: 조선시대 가죽신을 만들던 사람으로 천인 신분이었다.


나서는 여진.


여진 난 이만 가 볼게.

꽃비 갑자기 어딜? 꽃 따러 가자더니.

여진 오늘은 너무 늦었잖아.

양삼봉 며칠 내로 꼭 찾아가 인사드려라.

여진 예, 어르신.


급히 도망치듯 가는 여진을, 홍길동은 바라보고.


꽃비 같이 가, 나하고!

양삼봉 어두워지면 다니지 마라.

꽃비 범한텐 안 물려가요.


여진을 쫓아간다.


홍길동 여전히 밤마다 살피고들 다닙니까.

양삼봉 범의 흔적조차 안 보이는 게, 이상하구먼.

홍길동 슬슬 나올 때도 됐죠. 갖바치들의 솜씨는 어떻습니까.

양삼봉 연로해도······ 모두 숙련된 자들이라네.

홍길동 그들이 가르쳐 늘려 가야겠군요.

양삼봉 가죽신을 많이 만들어 뭣 하려는가.

홍길동 그저 믿고 따르시면 됩니다.


사이.


양삼봉 이따 더 이야기해 보세나.

홍길동 아까 전······ 들려온 피리 소리······.


바람에 거칠어진 파도 소리.


홍길동 분명······ 류큐 땅에서 듣던 것이던데······.



4.


노을빛이 사옹원 집무실에 스며들고, 다소곳이 앉은 여진.


여진 몰랐던 얘깁니다.


홍인형은 문서들을 살핀다.


홍인형 왜, 오뉴월 밴댕이14)라는 말도 있잖느냐.

여진 그땐, 뭔가 다르단 것입니까.

홍인형 본시 변변치는 못하나, 때를 잘 만났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여진 오뉴월이 제철인가 보군요.

홍인형 보통 젓갈로 해 먹는 일도 많다.

여진 젓갈로도 진상하는가요?

홍인형 그래, 그걸 담그는 것도 사옹원의 일이란다.

14)밴댕이: 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문서를 펼쳐 들여다보며.


홍인형 아마도 네 과거의 삶은, 바다와 가까웠을 듯싶구나.

여진 더 많은 걸 기억할 수 없어······ 송구합니다, 나리.

홍인형 어찌 네 탓일 수 있냐. 시간을 두고 더 기다려 봐야 하겠지.

여진 허수아비를 용왕제 때 태운 것은, 어떤 의미인 것입니까.

홍인형 이곳의 액운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다.

여진 흥미로운 볼거리였습니다.

홍인형 그랬음에도 바다가 며칠째 계속 불안하니 큰일이다. 쉬는 날이 이어지면, 고기잡이들이 술렁일 텐데······ 천벌이라도 내렸다 여길 테지.

여진 여긴 진상품까지 잡아야 하니, 더 고되겠군요.

홍인형 대신 잡역이나 군역서 빠지는 거다만.


마주해 앉고서는, 문서를 앞에 펼쳐 놓는다.


여진 불쑥 찾아와 방해가 됐습니다.

홍인형 아니다, 신경 쓸 거 없다.

여진 나리의 근심이 크실 것인데······.


씁쓸히 미소 짓는 홍인형, 붓을 들어 문서에 기입하며.


홍인형 그때보단 얼굴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구나.

여진 여러 보살펴 주신 덕입니다.

홍인형 본래 사람이란 선한 것일 게다.

여진 무언가, 이곳에 보답하고 싶습니다만.

홍인형 사옹원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여진 꺼리는 일이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홍인형 좀 고민해 봐야 하겠는데······.

여진 한 가지 청이 있사온데······.

홍인형 그래, 뭐든 말해 봐라.

여진 버들가지로 광주리를 만들어 파는 백정의 여식이 있는데, 상황이 예전 같지 않아······ 어류 손질이든 젓갈 담그는 거든, 사옹원에도 계집 손이 쓰일 곳이 있을듯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홍인형 누군지 안다, 꽃비 말이구나.

여진 꼼꼼하니 분명 잘할 것입니다.

홍인형 넌 어찌할 생각이냐.


붓을 내려놓으며.


홍인형 혹시라도······ 영영 옛 기억을 못 찾는다면 말이다.

여진 마음 닿는 곳에 정착해······ 살아가야 하겠죠.

홍인형 애써 볼 테니 기다려 보거라.


배덕성, 봇짐을 메고선 들어온다.


배덕성 인사 올립니다, 나리.

홍인형 그래, 양식은 좀 많이 구했는가.

배덕성 어느 고을이든 어렵긴 매한가지군요.

홍인형 마침 잘 왔네.


일어나 여진에게.


홍인형 얼른 인사드려라. 널 발견해 옮겨온 분이다.


배덕성에게 공손히 머리 숙이는 여진.


여진 이 은혜를 어찌 갚겠습니까.


배덕성, 슬쩍 외면한다.


배덕성 떠밀려 온 사체는 얼른 치워야 해서.

홍인형 혹시, 주변에 뭔가 함께 밀려온 거라도 있었던가.

배덕성 살펴볼 세나 있었겠습니까. 이러다 겨울을 날 수나 있을까 모르겠군요.

홍인형 내······ 조개나 미역 채취를 늘려, 곡식이랑 바꿀 방도를 마련해 봄세.

배덕성 대체 현감께선 뭘 하고 봉사께서······.


봇짐을 풀어서 정리하며.


배덕성 용왕의 노여움을 산 것은 아닐는지요?

홍인형 제까지 잘 올리고 무슨 소린가.

배덕성 수군거리고들 있어서요. 용왕제서 무슨 불경스러운 짓이 있던 건 아닌가 하고······소머리에 말들이 많더군요, 병들어 죽었던 걸 내놓은 게 아니냐고.

여진 ······.


배덕성, 봇짐을 다시 짊어지며.


배덕성 어쨌든 대책이 있으시다니, 물러가 전하겠습니다.

홍인형 그래 찾아온 것이로구먼.

배덕성 나설 자가 저 말고 없으니까요.

홍인형 상선께도 한번 청해 보겠네.

배덕성 가 보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근심 쌓인 표정의 홍인형.


홍인형 용왕께서 계신다면······ 참 모진 분이신가 보다······.

여진 뱃사람은 어디든 다르질 않군요. 그네들한테 바다란······ 신앙 이상의 것입니다.


문득 펼쳐진 문서를 보고는.


여진 계절마다······ 진상할 양을, 달별로 나누고 계신 것입니까.

홍인형 아녀자인데······ 글자를 아는 것이냐······?


기쁜 마음의 여진.


여진 미흡하나, 수고를 덜어드릴 수도 있겠습니다. 어획량이 적은 달의 못 채운 양을,가늠해 넣고 계신 것이로군요.

홍인형 진상할 양은 어쨌든 채워 보내야 한다만.

여진 소녀가 방도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홍인형 됐다. 내 할 일을 누구한테 맡기겠냐.

여진 계집이 붓을 드는 것이 싫으신 것입니까.

홍인형 난 아무렇지도 않다만.

여진 맡겨 보십시오.

홍인형 세상의 눈이 신경 쓰이는 거다.


사이.


홍인형 인습이 그러하니, 꽃비까지 드나든다면 말들이 많겠지.


양삼봉, 들어온다.


홍인형 어서 오시게.

양삼봉 마침 함께 계셨군요.

홍인형 이제 살피러 가는 건가.

양삼봉 뭔 흔적이라도 찾아내야 할 텐데요.

홍인형 조심하게나.

양삼봉 저······ 말씀드린 저 처자의 일거리 말입니다.

홍인형 마침, 그 얘길 나누던 참이었네.

양삼봉 영민해 뭐든 잘할 겝니다.

여진 계집이 설치면······ 시선들이 곱질 않겠군요.

양삼봉 나리께선 신경 쓰지 않는 분이시다.


문밖을 향해서.


양삼봉 뭐 하고 서 있냐, 넌. 안 들어오고.


꽃비도 조심스럽게 들어와.


꽃비 여진아, 아직 멀었니?


홍인형을 발견하고선, 급히 예를 갖춘다.


꽃비 함께 갈 데가 있어서요······.

홍인형 들어오지 뭣 하고 밖에 있던 게냐.

여진 자주 드나들면 남들이 수군댈 테니까요.

양삼봉 요즘 같은 땐 자꾸 돌아다니지 마.

꽃비 이따 저녁에, 만정 오라버니 모임에요.

여진 제가 가 보고 싶다 했어요.

꽃비 어둑해지기 전에 얼른 먼저 가 있자.


여진, 홍인형에게 예를 표하고선.


여진 가 보겠습니다, 나리.


꽃비와 여진, 밖으로 나간다.


양삼봉 범 같은 건 이젠 두렵지도 않은가 봅니다. 당한 자도 봤단 자도 없으니, 점점 무신경해져 가는 것이겠죠.

홍인형 더는 지키러 와 주지 않아도 되네.

양삼봉 혹여, 제가 오가는 게 거북스러우신 겁니까.

홍인형 말벗이 돼 주는데 싫을 게 뭐가 있나.

양삼봉 마음 놓을 수야 없죠, 임금님한테로 보낼 것들인데.

홍인형 자네들이 번거롭지 않은가.

양삼봉 백정들이야, 범한테 오히려 고맙죠. 그 덕에 쓰임이 더 생겼으니.


마루방에 앉으며.


양삼봉 솔직히······ 젊을 때 범 사냥에도 많이 끌려다녀도 봤지만, 이상합니다. 본 자가 없더라도 흔적은 있을 텐데, 당한 멧돼지나 노루 사체도 보이질 않잖습니까.

홍인형 누군가 퍼뜨린 거짓 소문이겠는가.

양삼봉 오해였을 수도 있겠죠, 잘못 본 게 어쩌다 퍼졌던가.

홍인형 일부러 퍼뜨린 거라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양삼봉 이것으로 이득 보는 자이겠죠.


다소 거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양삼봉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홍인형 일단은 아무 말 마세, 하던 대로 해주게.

양삼봉 나리께선 그러실 순 없는 것입니다.

홍인형 무슨 해를 입은 일도 없잖은가. 얘길 꺼내면 술렁일 것이 분명하니······ 당분간은 더 지켜보세나.


노을빛이 점점 어둠으로 변해 가면.


양삼봉 무슨 들은 얘기라도 있으신 겁니까.

홍인형 아닐세······ 혼란이 염려되는 것뿐이라네.


등잔에 불을 붙인다.


양삼봉 거짓을 진실로 만들려 하면······ 진실이 거짓이 돼야 할 텐데요.

홍인형 그저 더 지켜보고 있자는 것 아닌가.

양삼봉 후에 큰 화를 불러올까, 늙은인 걱정스러운 겁니다.

홍인형 내가 책임질 것이네.


사이.


양삼봉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흠뻑 젖은 장오출을 업고서, 옹말석이 급히 들어와.


옹말석 봉사 나리!

홍인형 무슨 일인가.

옹말석 바다에 빠졌습니다.

양삼봉 이보시오! 정신 좀 차려 보오!


의식이 없는 장오출.


양삼봉 우선 바르게 좀 눕혀 봐.


장오출을 마루방에 눕히면, 눈꺼풀을 열어 보고 맥을 짚는 양삼봉.


옹말석 괜찮겠습니까.

양삼봉 뭐······ 별 탈은 없겠어.

홍인형 필요할 게 있으면 말하게.

양삼봉 괜찮습니다.


힘주어 장오출의 배를 누르면, 입에서 고래 등처럼 물이 솟아 나온다.


양삼봉 바닷물을 많이 먹었구먼, 그래.


장오출, 기침하며 깨어난다.


옹말석 정신이 드십니까, 어르신.

장오출 여기가······ 어딘가······?

옹말석 사옹원 안입니다.

장오출 왜 여길 온 건가, 저승은 아니지?

홍인형 무탈해 천만다행이네.


옹말석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키는 장오출.


장오출 봉사 나리, 폐가 됐습니다.

홍인형 염라대왕께 문안드릴 뻔했구먼.

장오출 고기들이 얼마나 들었나······ 앞에 어전에 가 들춰보다가, 그만······.

홍인형 어차피 매일 거둬 올릴걸, 뭣 하러.

장오출 그거로라도 많이 잡혀야 살죠.


추운 듯 몸을 떤다.


홍인형 밖에 거적이라도 덮겠는가.

옹말석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홍인형 얼음 창고 앞에 널려 있을 게다.

옹말석 예.


급히 밖으로 나간다.


양삼봉 바닷물 먹은 거 말곤, 괜찮을 겝니다.

홍인형 마침 그대가 있어서 다행이네.

장오출 고마워, 삼봉이.

양삼봉 전 한 게 없습니다.


거적을 들고 옹말석이 들어오면, 장오출이 몸에 두른다.


양삼봉 말석이가 얼른 안 건졌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죠.

장오출 네 덕분에 살았구나.


옹말석, 쑥스러운 듯.


옹말석 봤는데······ 어떻게 지나친답니까······.

장오출 딸을 못 둔 게 오늘따라 한스럽구먼. 당장 내 저걸 사위 삼았을 텐데.

양삼봉 제 것인 걸 탐하시면 어쩝니까.


사람들이 웃으면, 옹말석은 어쩔 줄 몰라 한다.


홍인형 꽃비는 뭐라 하던가.

양삼봉 전에 슬쩍 얘긴 꺼내 봤습니다만······.

홍인형 말석이랑, 둘이 언제 자리를 마련해 봐.

양삼봉 상대가 누군진 아직은 모릅니다.

장오출 진작 용왕제 때맞춰 올렸으면 좋았잖아.

양삼봉 고을 분위기도 좋지 않고 해서요······ 넌 사옹원 쪽엔 무슨 볼일이 있어 온 거냐.

옹말석 당산15)서 모여 하는 얘기나 들어볼까, 가던 길인데······.

양삼봉 백정 말고도 제법들 가 보는 모양이구먼.

옹말석 그래도 전부, 천역의 천민들인데요.

장오출 만정인가 하는 백정 입심이 그렇게도 좋은가.

양삼봉 알고 계시는가 보군요.

장오출 오며 가며 듣긴 했지.

홍인형 천인들을 모아 놓고서 뭔 얘기를 하던가.

양삼봉 뭐, 신세 한탄 같은 것일 테죠.

홍인형 요즘엔 어느 정도 모여들던가.

양삼봉 신경 쓰실 일도 아닙니다.

홍인형 ······.

15)당산(堂山): 마을의 수호신이 있다는 언덕이나 산.


장오출, 순간 가슴을 움켜쥐며.


장오출 아이쿠!

양삼봉 왜요, 뭔 일입니까!


저고리 속에 손을 넣고선, 펄떡이는 물고기를 꺼내는 장오출.


장오출 놀래라······! 갑자기 뭔가 했네······.

양삼봉 들어가 있던 줄도 몰랐습니까.

장오출 움직이지도 않았어.


옹말석이 짚신을 벗어 내려치면, 파닥거림을 멈춘다.


장오출 죽었냐?


홍인형, 나서며.


홍인형 여기들 있게.

양삼봉 갑자기, 어디 나가십니까.

홍인형 혹여 내 늦거든, 적당할 때 나와 그대 볼일 보게나.

양삼봉 밤새도록이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십시오.

홍인형 그렇게 있진 않을 걸세.


모두가 홍인형에게 예를 표하려 하면, 밖으로 나간다.


장오출 말석 아비는 보니깐 좀 어떻던가.

양삼봉 거동은 여전히 힘드신가 봅니다.

장오출 네가 마음고생이 많겠다.

옹말석 조금씩 좋아지시는데요, 뭘.

양삼봉 늘 신세 지던 차에, 별안간 사돈을 맺자 하셔서······ 그 고마움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백정의 여식을 선뜻······.


사이.


양삼봉 좋은 약초도 많이 구해 뒀으니, 더 지켜보자.

옹말석 애써 주신 은혜, 갚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삼봉 이제는 남이 아니지 않냐.

장오출 이리 나와서 춤이나 한 수 배워.

양삼봉 배워 뭣에 쓰라고요.

장오출 혼례 땐 원래 신랑이 한 자락 해야 멋이 나는 거다.


옹말석을 앞으로 데리고 나와.


장오출 하는 거 보고 잘 따라 해 봐, 구해 준 값이니깐.


춤이 시작되고.


장오출 얼씨구, 좋다!


사이.


장오출 얼쑤.


김처선, 들어온다.


김처선 이보게들.


춤을 멈추는 장오출, 김처선의 차림새를 살펴보고.


장오출 나리께서는 뉘신지요?

김처선 봉사 홍인형을 보러 왔네만.

장오출 무슨 일이신데 찾으시는데요?

양삼봉 방금 전 나가셨는데, 오시면 전하겠습니다.

김처선 무슨 별일들은 없는가.

양삼봉 항상 그렇습니다. 뭐라 전해드릴까요.

김처선 됐네. 조만간 또 올 것이니······.

양삼봉 먼 데서 오셨으면, 묵고 계신 곳이라도 알려 주시죠.

김처선 현감 댁에 있다고만 전해 주게나.

양삼봉 그리하겠습니다.


김처선은 나간다.


장오출 혀······ 현감······!

양삼봉 지체 높은 분이신가 보군요.

장오출 말석아, 슬쩍 따라가 봐라.


옹말석, 밖으로 나간다.


장오출 어쨌든 현감보단 높단 거잖아.

양삼봉 뭔 일인지, 조급해 보이기도 하던데.

장오출 내······ 금방, 뭔 실수라도 했나.

양삼봉 없었습니다.


옹말석, 들어온다.


장오출 보니까 어떻더냐.

옹말석 말을 타고 오셨던데요.

장오출 거봐, 확실히 지체 높은 사대부야.

옹말석 수행하는 자들도 몇 데려왔고······ 상선 어른이라던데······.

장오출 뭐야······! 상선!


놀라 입이 딱 벌어진다.


양삼봉 직접 오셨으니, 큰일이로군요.

옹말석 뭐 하는 분이신데······ 그러시는가요?

양삼봉 전하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시다.

장오출 봉사 나리가 뭔 잘못을 저질렀나.

양삼봉 상선이 수라는 총괄한다니, 시찰로 오신 것일 테죠. 얼른 나리를 모셔 와야 할 텐데······ 제가 한번 나가 보죠.

장오출 어디로 가신 줄 알고?

양삼봉 아마도, 백정들 모임에······ 그쪽 길로 쫓아가면 계실 겝니다.

장오출 범 나올지 몰라. 잘 살펴봐.

옹말석 다녀오십시오.


양삼봉, 밖으로 나간다.


장오출 너는 꽃비가 마음에 드냐.

옹말석 들고 말고 할게······ 어딨습니까······.

장오출 백정의 사위가 될 텐데, 아무렇지도 않아? 평생 그날부턴 어디 갈 때 갓 대신에 패랭이16)만 써야 하고, 남들 입는 넓은 소매 옷도 못 입고 아무리 돈 있어도 백정 사위라 비단옷은 절대로 못 입고 못 사. 그래도 할래?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천한 자의 사위야, 네가 이젠! 자식들도 쭉 다!

옹말석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장오출 쉬운 것만 물어, 머리 아픈 거 말고.

옹말석 어째 각시 신분이 신랑한테로 가는 건지요.

장오출 예전부터 백정의 사위는 그랬다, 나라 법으로.

옹말석 양반 사대부도 그리되는 것인가요?

장오출 어떻게 백정이랑 혼례가 돼? 기껏해야 첩이지.

옹말석 천민들 수를 늘리려······ 사대부나 임금께서, 그리 정한 것입니까.

장오출 몰라, 나중에 상선 어른한테나 물어봐.

옹말석 그깟 뭐로 살면 어떻습니까······ 한세상 사는데······.

장오출 확실히 마음이 있구먼, 그래. 자꾸만 꽃비가······ 내 여식 같아 하는 말이다.

16)패랭이: 댓개비로 엮어 만든 갓의 일종. 신분이 낮은 사람이 썼다.


씁쓸히 웃으며.


장오출 꽃비가 죽은 제 어미를 쏙 빼닮았어. 내가 네 나이쯤 됐을 땐가, 고을서 범 잡겠다고 백정들을 불러들였는데······ 그때 처음 봤다, 양삼봉이랑 꽃비 애미를. 백정들끼리만 혼인할 때라서······ 양삼봉이가 참 그땐 미웠는데 말이지.


들려오는 파도 소리.


장오출 이젠 젊음도 다 가고······ 돌림병에 처자식도 없고······ 꽃비를 보면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좋아. 어쨌든, 네 놈은 복 받은 거다.


일어나 나서며.


장오출 잘 살아라, 잘해 주고.

옹말석 어······ 어르신.


홍길동과 양삼봉, 들어온다.


양삼봉 아니, 가시려고요?

장오출 목숨 건졌는데, 가 용왕께 뭐라도 해야지.

양삼봉 몸에 뭔 이상 있음 오십시오.

장오출 그럼세.


홍길동을 스쳐 나간다.


홍길동 언제 왔다 갔습니까.

양삼봉 얼마 안 됐어.

홍길동 멀리는 못 가셨겠군요.

양삼봉 현감 댁에 머물 거라 하셨네.

홍길동 뭐, 이 밤에 한양으로 가긴 힘들 테니······.

양삼봉 꽃비가 얼른 쫓아갈 게야.

홍길동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양삼봉 봉사께 얼른 알려야 하지 않겠나.

홍길동 상선께서 그 때문에 오신 건 아닐 테니까요.


의자에 앉고서는.


홍길동 너도 염전 일 관두고 가죽신 배우러 올 테냐.

옹말석 요 근래, 백정들만 하는 거 아닙니까.

홍길동 상관없다. 천인이면 누구든 사내든 계집이든, 다 와도 돼.

옹말석 우리 쪽도 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양삼봉 아까 당산에 가 볼 거라면서, 왜.

옹말석 뭐, 겸사겸사······ 그냥······.

홍길동 그래, 이따 와 봐라. 새롭게 눈이 트일 게다.

옹말석 눈먼 봉사도 아닌데······ 무슨······.

홍길동 고되고 고된 게 염간들인 걸, 내 다 안다.

옹말석 어쩌겠습니까, 팔자려니 살아야지.

홍길동 소금만큼 세상에 귀한 것도 없다만, 네 노동은 누구를 위해서냐. 팔자라 생각 마라. 인간이 어찌 소 돼지랑 같을까. 젊은네들이 깨어 있어야지, 벌써 세상 다 산 것마냥 그럼, 뭔 희망이 있어.

양삼봉 천지개벽(天地開闢)이 나지 않는 한, 처지가 바뀌겠는가.

홍길동 혹시 전쟁이라도 나 뒤집힐지 또 압니까.

양삼봉 그건 있어선 안 될 일일세.

옹말석 바뀔 수 있었으면 진작 바꿨을 테죠.

홍길동 그렇담 다른 세상으로 떠나면 되지 않겠냐.

옹말석 ······.


거칠어진 파도 소리.


홍길동 바다 너머엔······ 팔자가 바뀌는 곳이 있단 말이다.

옹말석 차······ 참말입니까.

홍길동 사람들을 더 모아라, 오늘 그 얘기를 해줄 테니깐.


사이.


양삼봉 댈 가죽이 없는데 기술자만 늘려 어쩌려는가.

홍길동 구해 올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양삼봉 몰래 소를 잡으련 거면 아예 말게, 밀도살은 큰 죄이니.

홍길동 잘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


꽃비가 들어오면, 옹말석은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고.


양삼봉 어찌 됐냐.


상기된 얼굴로 양삼봉의 눈을 피하는 꽃비.


양삼봉 봉사 나리 뵙고서 전했어?

꽃비 몰라요. 당산에······ 직접 가 찾아보세요······.

양삼봉 얼른 갔다 와야지, 널 시킨 게 잘못이다.

홍길동 얘기했다시피, 괜한 헛수고 마십시오.

양삼봉 어찌 됐건 말씀은 드려야지.

옹말석 다녀······ 오십시오······.


양삼봉, 밖으로 나간다.


홍길동 나보다 사옹원 봉사를 더 믿으시는가 보구먼.

꽃비 고을선 신망이 두터운 분이니까요.

홍길동 왜 그리 울상인 게냐, 넌.

꽃비 아니에요, 아무것도.


점점 울먹이는 꽃비.


꽃비 계집 신세가······! 정말 처량해서요······.

홍길동 앉아 차분히 얘기해 봐라.

꽃비 상대가 염간이라고, 한마디씩 보는 사람마다 하던데······ 평생에 한 번 치루는 일, 꽃가마에 연지곤지 찍고 원하는 사내랑······ 이런 혼례는 못 하는 거겠죠?

홍길동 눈 맞아 첩으로 데려가면 모를까, 이 땅의 혼례야 어른들 시키는 대로이니······.

꽃비 차라리 첩이래도 그쪽이 낫겠어요.

옹말석 ······.


조용히 힘없이 나가는 옹말석, 문을 열어 둔 채로.


꽃비 어린애마냥······ 꿈같은 얘길 해버렸네요.


거칠어진 파도 소리.


홍길동 넌 소나 말이 아니야. 당연한 건데, 왜.

꽃비 여기선 이루어질 수 없는 건데요.

홍길동 그런 삶을 원하면, 그런 곳으로 떠나면 되지 않겠냐.

꽃비 그런 세상이 있단 말인가요?!

홍길동 바다 너머엔 네가 모르는 세상이 많아.


문이 열린 채인 탓에, 파도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온다.


홍길동 모두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받는 평등한 세상. 양반도 천민도 없고······ 모두가 매일 세끼를 고깃국에 배불리 먹고, 혼례도 원하는 자랑 치를 수 있다. 조선인도 이방인도 아무 차별 없이 함께 사는······ 그런 지상낙원이 있다.

꽃비 정말······ 꿈같은 곳이로군요······.

홍길동 율도국이란 나라란다.


사이.


홍길동 아직은 누구한테 말하지 말거라.


열린 문밖에 서서, 여진은 그들을 바라보고.


꽃비 믿을 수가 없어요······ 어딘가, 전설 같은 걸 테죠.


홍길동, 자신의 두 손을 내보이며.


홍길동 내 이 두 손이 증거란다. 이 손으로 돌을 옮기고 나무를 베고······ 길을 내고 집들을 세워, 모두가 꿈꾸던 율도국을 만들었다.


꽃비의 뒤에 서서, 귀마개처럼 두 손을 꽃비의 귀에 댄다.


홍길동 저 파도 소리에 실린······ 그곳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니?


사이.


천천히 손을 떼고.


꽃비 만정 오라버니······.

홍길동 나중엔 홍두령(洪頭領)이나 홍가왕(洪家王)으로 부르거라.

꽃비 홍가······ 왕······.


사이.


홍길동 네가 나를 도와야 한다.

꽃비 저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홍길동 촌락 사람들이 널 신뢰하고 있어서다.

꽃비 그럼 율도국으로 데려가 줄 건가요?

홍길동 원하는 자는 모두 데려갈 거다.

여진 얼른 돌아가자.


꽃비, 순간 꿈에서 깬 듯.


여진 바람이 더 세졌어.

꽃비 언제······ 와 있었어······?

여진 안 와서 찾아다녔잖아.

꽃비 아, 만정 오라버니 얘기 듣고 싶댔지?

여진 나중에, 지금은 싫어!


꽃비의 손을 잡아끌고 나가려 하면.


홍길동 이따 당산 앞에서 보자.

여진 계집이 온 걸, 달가워하지들 않을 거라서.

홍길동 계집도 이젠 세상에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여진, 가던 걸음을 멈춘다.


홍길동 인간을 차별할 권리는 인간한텐 없는 거니깐.

여진 사대부들은 싫어할 얘기로군요.

홍길동 계속 모임에 나오거라.


문밖에선 김처선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홍길동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반갑게 김처선에게로.


홍길동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리.

김처선 정말로······ 자네로구먼······.

홍길동 귀신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김처선 ······.


꽃비와 여진을 힐끗 보고선, 김처선은 헛기침을 한다.


홍길동 너희는 그만들 가 봐라.


꽃비와 여진, 밖으로 나간다.


홍길동 얼른 안으로 드시죠.

김처선 얘길 듣고선 긴가민가했다네.

홍길동 이런 누추한 곳서 뵙게 됐습니다.

김처선 사옹원이야, 내시부서 맡는 곳 아닌가.

홍길동 전해 들으시고, 전하께선 뭐라 하시던가요.

김처선 어찌 그걸 알고 있는 겐가.

홍길동 형님께 들었습니다.


김처선, 앉는다.


홍길동 뭐, 마땅히 내놓을 게 없군요.

김처선 신경 쓰지 말게나.

홍길동 그래, 지금은 어찌 됐습니까. 그······ 가짜 홍길동인?


김처선과 마주해 앉는다.


김처선 벌써 오래전 일일세.

홍길동 늘 미안함이 남아 있어서요.

김처선 본래가 죽을 죄인이었다네.

홍길동 처형됐단 얘기시군요. 망나니의 칼이 떨어진 순간까지, 자신은 홍길동이 아니라 외쳤겠습니다. 정체를 이실직고(以實直告) 안 한다 매질은 이어졌을 테고, 안 봐도 눈에 선하군요.

김처선 이보게나.

홍길동 이따 함께 바다 앞에 서서, 명복이라도 빌어 주시죠. 모든 게 상선 어른의 계획으로 생긴 일들이니까요, 제겐 은인이십니다만.

김처선 전하께서 만나고 싶다 하셨네.

홍길동 나를? 참말이십니까.


기쁘게 웃는다.


홍길동 그때의 소년의 모습도, 이젠 많이 사라졌겠군요.

김처선 어찌, 용안(龍顏)을 함부로······!

홍길동 길동에겐 허락하셨던 것을 잊고 계시는군요.


김처선은 헛기침을 하고선, 호패를 꺼내 놓으면.


홍길동 그 헛기침도 여전하시군요.

김처선 받게나. 백정 신분으론 이동이 불편할 테니.

홍길동 전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까.

김처선 아닐세, 자유롭게 다니란 내 배려이네.

홍길동 팔도를 누비던 도적한테, 호패 따위가 뭔 필요 있다고요.

김처선 강화가 돼 예전 같진 않을 게야.

홍길동 근래 궁궐의 피바람은 어떤 연유인 겁니까.


바람에 등잔의 불이 흔들리면, 두 손으로 바람을 막아 감싸는 홍길동.


홍길동 전하의 살육은 진정······ 광기가 불러온 것입니까.

김처선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웃음 짓는 홍길동.


김처선 몰래 그간 궁에까지 출입했었단 건가.

홍길동 뭔 말을 해도 안 믿으실 테죠.

김처선 목숨이 두 개인 줄 아는가! 자넨.

홍길동 이미 세상에 소문이 퍼진 것도 모르고 계셨군요. 사대부들 앞에선 모두 쉬쉬했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등잔에서 손을 떼며.


홍길동 모시고 계시니 아실 게 아닙니까. 정말로 광기인 건지, 예전 같은 연극을 또 벌이고 계신 것인지······ 미친 게 아니라면, 제가 또 필요할 수도 있을 테고.

김처선 어째서 조선 땅에 돌아왔는가.

홍길동 어미의 복수라······ 정말 기가 막힌 설정이더군요, 연극이라면.

김처선 영영 돌아오지 않기로 약조하지 않았나!

홍길동 왕이란 무척 외로운 자리입니다.

김처선 본시 자넨 죽었을 목숨이야.

홍길동 미치기에 딱 좋은.

김처선 나조차 이젠······ 전하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어.

홍길동 연극인 건지 광기인지조차 모른다니, 그러고도 상선이라 할 수 있습니까.

김처선 평생 나약한 소년인 채로인 줄만 아는가.

홍길동 그렇겠군요, 세월이 흘렀으니······ 이젠 장성해 감당키 어려운 지경까지 이른 것이란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예전엔 잘도 조종하시더니만.

김처선 세자 시절부터 강한 임금이 되길 꿈꾸셨네, 그걸 도운 것뿐이야.

홍길동 즉위하자 마침 사대부들과 결탁한 홍길동이란 도적놈이 출몰했고, 이 대도적과의 유착을 구실로······ 정적들을 숙청해 가셨죠.

김처선 뜻을 이루어드리는 게 내시의 본분일세.

홍길동 왕의 힘이 곧 내시의 힘인데······ 왕을 위한 일이었다고요?

김처선 내 부귀영화 따위를 더 누려 무얼 할 텐가.

홍길동 상선 나리, 세상은 꿈과 꿈 간의 대결인 겁니다. 정적들이 사라지니 왕의 꿈이펼쳐졌지요? 욕망이 맞으면 꿈 간엔 또 합해지기도 한답니다. 왕의 꿈과 내시의꿈, 그리고 도적의 꿈······ 셋은 그때 같은 꿈을 꾼 것이죠.

김처선 내 그대를 믿었기에, 전하 앞에 내보였던 것이야.

홍길동 기억이 납니다······ 두 눈을 가린 채 어디인 줄 모르고 끌려간 그곳엔, 붉은 용포(龍袍) 차림의 앳된 소년이 있었는데······ 돌연 제 사주를 물어 따져 보시곤 어찌 된 일인지 살갑게 대해 주셨습니다. ‘너와 나는 같은 사주를 타고났으니,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이니 과인 또한 너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웃으며 처용무를 추기 시작하면, 당황해하는 김처선.


김처선 어찌 그대가······ 이럴 수 있는 것인가.

홍길동 그날 이후, 처용무를 출 때면 제게 명하시길······ ‘거울을 보듯 과인의 춤을 따라 하여라. 주변의 모든 악귀들이 물러갈 것이다······!’ 어느 날부턴 짝을 이루어 출 수 있을 정도가 됐었죠.

김처선 내가 모르던 일들이 있었구먼.

홍길동 상선께서도 사주가 같았다면 좋았을 것을.

김처선 그런 큰 탈을 쓰고, 움직일 여력이나 있겠는가.


처용무를 멈추는 홍길동.


홍길동 무슨 말씀이십니까, 탈이라?

김처선 처용의 탈 말이야. 그런 춤이잖은가.

홍길동 몰랐습니다. 본래가······ 탈을 쓰고 하는 것이었던 게로구먼. 율도국엔 폭우와 강풍이 빈번하여, 왕으로서 진정시키려 늘 춤을 춰 보았으나······ 별 소용이 없던 건 처용의 탈이 없던 탓이었던가.

김처선 전하와도······ 그때도······.

홍길동 용안을 뚫어져라, 거울처럼 바라보며.


헛기침을 하는 김처선, 밖으로 향한다.


김처선 수행하는 자들이 밖에서 기다리니, 그만 가 보겠네.

홍길동 언제 다시 또 전하를 뵐 수 있겠습니까.

김처선 의중을 헤아리고 난 후에 또 이야기하세나.

홍길동 이해해 줄 자는 이 홍길동이밖엔 없을 겝니다.

김처선 몸조심하게.

홍길동 왜적이 침입해 올 거란 소문이나, 팔도에 범이 자주 출몰한단 것도 좋고······ 흉흉한 소문들은 내부의 골치 아픈 것들을 해결해 준다 전해 주십시오.

김처선 무언가 바라는 것이라도 있는가.

홍길동 그때와 같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잔불.


홍길동 싣고 멀리 떠날 수 있는······ 선단이 필요합니다.



5.


등잔불 밑에서, 황급히 글을 쓰고 있는 여진. 궁구막추······.


여진 !


기척에 놀라 글을 치워 두고선, 등잔을 불어 끈다.

취한 배덕성이 들어오고.


배덕성 ······.


구석에 웅크려 숨고선, 두려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진.

배덕성은 능숙하게 등잔의 불을 붙이며.


배덕성 백정 놈들은 범 잡는다 드나들더니만, 설마 계집들도 범 잡으려 그러나.


주변이 환해진다.


여진 소녀가······ 보이셨단 말씀이십니까.

배덕성 본래가 고기잡이들은 밤눈이 밝은 법이라.


여진, 일어나 몸가짐을 고치며.


여진 잠시, 볼일이 있어 왔다······ 깜박 잠이 든 모양입니다.

배덕성 이런 때 돌아다니면, 범이 아니라 백정 사내놈들한테 잡혀갈걸.

여진 만정이란 자 하나만 조심하면 될 일이죠.

배덕성 왜? 뭔 일이라도 있었나.

여진 앞으로 생길 것입니다, 여기 모두한테요.

배덕성 얼른 돌아가, 남이 보기 전에.

여진 절 살리신 은인이시잖습니까.

배덕성 계집하고 같이 있었단 얘길 듣기 싫어.

여진 장정 몇만 모으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실 겝니다.

배덕성 재수가 없단 말이다! 바다 나가기 전에 계집이 붙으면. 만정인가 뭔가 내 알 바아니고 매일매일 난 만선(滿船)으로 올 수만 있으면 돼!

여진 용왕제를 올렸으니, 앞으론 만선일 게 아닙니까.

배덕성 몰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여진 오히려 운수가 좋다 하던데요.

배덕성 뭐라, 계집이 말이냐.

여진 바다 멀리에 있는 다른 세상에선······ 출항 전 계집이 바다와 하늘을 향해 재를 올린다고 하더군요.

배덕성 여긴 조선 땅이잖아.

여진 어디든 그렇다면, 그런 믿음을 신뢰하겠지만······.

배덕성 만정이란 놈도 모두 칭찬만 하니, 네 말을 신뢰할 수가 없겠는데?

여진 그렇지 않습니다.


썼던 글을 꺼내어 내보인다.


여진 보십시오, 이런 글이 왜 자꾸 붙어 있겠습니까. 실체를 아는 자가 모두한테 알리려는 것이지요, 해를 가할 테니 조심하라 말입니다!

배덕성 이게 뭐라 쓰인 건데?

여진 아······!


배덕성, 씁쓸히 웃는다.


배덕성 글을 아는 놈이 고을서 몇이나 된다고.

여진 궁구막추······ 도적이 궁지에 몰리면 바로 해를 가할 테니······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서히 제압하란 뜻입니다. 만정은 포악한 자니까요.

배덕성 계집 주제에도 넌 읽을 줄 안단 거야?

여진 그렇다 말하면······ 믿지 않으시겠죠.

배덕성 대체 넌, 어디서 뭘 하다 왔냐.

여진 편견 혐오에 가득 찬 이 조선이란 데도······ 살기 좋은 땅은 아니로군요.

배덕성 의심스러운 건 만정이 아니라 너야!

여진 분명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배덕성 쳇, 구해 주고 욕만 먹는구먼.


홍인형이 불쑥 들어오면, 예를 갖추는 여진.


홍인형 어쩐 일인가, 이 밤에.

배덕성 나리께선요?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홍인형 바다가 더 잔잔해진 걸 보면, 용왕께서 흡족해하셨던가 보네.

배덕성 어인 일로 예까지 걸음하셨냔 말입니다.

홍인형 자네들은 내게 서운함이 많겠구먼.

배덕성 목이 달아날 게 두려우신데, 어쩌겠습니까.

홍인형 국법은 준엄한 것일세.

배덕성 관리들은 어차피 다 뜨내기들이죠.

홍인형 어찌 고을의 어려움을 모른 척하겠는가.

배덕성 이놈 귀엔 매일 밤 파도가 성난 듯 들리는데, 어째 나리 귀엔······ 차라리 만정이놈한테 붙어, 우리도 백정 놈들마냥 가죽신이나 만들어 파는 게 낫겠습니다.

홍인형 그럼 이 사옹원은 어찌 되겠는가.

배덕성 다 굶어 죽어도 임금의 수라가 더 중요 것이죠.

홍인형 분명 조정서 대책이 있을 것이네, 위에다도 고해 볼 것이니 나를 믿게나.


돌아가는 배덕성, 멈춰 궁구막추란 글을 펼쳐 보며.


배덕성 이 글에서의 도적은, 딴 사람을 말하는 걸 게다.


여진을 향해 미소를 짓고선, 밖으로 나간다.


홍인형 바다 상황이 용왕제 후에도 좋질 못하니······ 고기잡이들이 동요하는 듯하구나. 죽은 소머리를 제물로 쓴 일을 원인으로 여기는 것 같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사이.


홍인형 다시 붙여 놓고 간 것이냐.


손에 들어 글을 보다가, 갑자기 긴장된 얼굴로 자세히 본다.


홍인형 분명, 너의 필체로구나.


순간 거칠어진 파도 소리.


여진 나리······.

홍인형 아니라면 아니라 해라.

여진 소녀가 맞습니다.

홍인형 어째서냐, 어째서 여태껏······ 대체 이 도적은 누구를 말하며, 무엇을 여태 숨겨 왔던 것이냐······.

여진 아직은······ 아무 말씀도······.

홍인형 두려운 것이 있다면, 내 널 지킬 것이다.

여진 때가 되면 숨김없이 고하겠습니다.


사이.


홍인형 그래, 알겠다.



6.


마루방에 쌓인 볏짚, 침울한 표정으로 볏짚을 노끈으로 엮는다.


옹말석 ······.


밖에는 일꾼들의 쇠망치 소리, 장오출이 조기가 담긴 광주리를 들고 오며.


장오출 춥지도 않냐?


몸을 움츠리고. 옹말석의 옆에 앉는다.


장오출 바람이 차다, 두껍게 입어라.

옹말석 그것만 엮으면 다 끝나죠?

장오출 됐어. 그만하고 놓고 가.

옹말석 제법 소일거리로······ 괜찮네요······.

장오출 이놈아, 이거 할 새가 어딨어.

옹말석 겨울 오는 마당에, 염전엔 할 일도 없는데요.

장오출 이리 내놔라.


노끈으로 엮어 놓은 볏짚에, 조기를 엮는다.


장오출 겨우내 얼지 않게, 바닷물도 채워 놓아야 하잖아.

옹말석 그런 건 금방 합니다.

장오출 땅이 얼기 전에 가신 걸, 그나마 복이라 여겨.

옹말석 애써 주신 은혜들을······ 어찌 다 갚을까요.

장오출 은혜는 무슨, 장례를 혼자서 뭘 어쩌냐.

옹말석 양반 자식들은 3년을 치른다던데······.

장오출 부질없는 짓이야. 네가 열심히 살면 돼.

옹말석 그런다고 뭐가 바뀐답니까.

장오출 아, 계실 때 진작······ 혼례도 치렀으면 좋았잖아.


옹말석, 말없이 볏짚에 조기를 엮는다.


장오출 왜 자꾸 미뤘냐? 뭔 일 있었냐.


사이.


장오출 왜 말을 안 해······.


옹말석이 엮던 것을 빼앗으며.


장오출 그렇게 꽉 엮으면 조기가 뒤틀려, 잘 봐 봐. 이러면 또 헐거워 빠져버리잖아? 쉬워 보여도 쉬운 게 아니야. 이건 큰 거니깐, 힘을 덜 줘서 매듭을 지어야 해.

옹말석 저는······ 제대로 하는 게······ 하나 없군요······.

장오출 언제 해 본 적이 있어야 잘하지.

옹말석 이참에 아주 산으로 갈까요.

장오출 거긴 뭐 하러.

옹말석 스님들은 배는 안 곯죠?

장오출 불효야. 생전에 절을 싫어했다, 네 아비는.

옹말석 안 되겠군요.


땀을 닦으며 들어오는 배덕성.


배덕성 뭘 그런 걸 하고 계십니까.

장오출 엽전 벌려면 뭐든 해야지, 굶을까.

배덕성 쳇, 고래 잡던 기백은 다 어디 가고······.

장오출 옛날 일이야, 넌 평생 안 늙을 거 같지?

배덕성 굶어 죽을지언정, 범은 풀을 안 뜯는 법이죠.

장오출 허세야. 다 쓸데없는 거지. 나중엔 어차피 누구나 병들고 죽어. 임금이나 천민이나······ 이건 차별이 없는 거야.

옹말석 고래도 잡으셨던가요.

장오출 뱃사람이면 젊을 땐 다 그랬어.

배덕성 그래, 내 그 자리서 똑똑히 봤다.


엮던 조기를 내려놓는 장오출, 자신의 팔을 주무르며.


장오출 다음 해부턴······ 더는 배는 못 탈 거 같구먼.

배덕성 어쩐 일로 조정서 품삯을 다 챙겨 준답니까.

장오출 얼른 가 열심히들 해, 말 나오지 않게.

배덕성 출어(出漁)17) 못한 것도 보상해 준다니, 본시 성군(聖君)18)이셨군요.

장오출 나라에 요즘 돈이 넘쳐나나?

17)출어(出漁):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타고 나감.
18)성군(聖君): 어질고 덕이 있는 임금.


홍인형, 들어온다.


홍인형 고생들이 많네.

배덕성 창고 얼음들도 다 빼 뒀습니다.

홍인형 그만들 쉬고, 가서 배들이나 채우게나.

장오출 술도 내놓아야 좋아할 텐데요.

홍인형 빠져서야 어디 될 일인가.

장오출 모인 김에, 우리 배들도 이따 가서 손봐야지?

배덕성 그러려 했습니다.


여진, 들어온다.


홍인형 준비들은 다 해 뒀느냐.

여진 차려 놓았습니다.

홍인형 얼른들 가 보게나.

배덕성 알겠습니다.


밖으로 나간다.


홍인형 같이 가서 한술 뜨지그러나.

장오출 한시름 놓으셨겠습니다.

홍인형 이럼 올겨울은······ 그럭저럭 넘길 테지······.

장오출 삯을 받는다니 열심히들 하네요.


밖의 일꾼들 소리가 멈추면, 장오출도 일어난다.


장오출 나리께선 어떻게······ 잡수신 겁니까.

홍인형 먹었으니 편히 가서 들게.

장오출 그럼 가 보겠습니다.


밖으로 나간다.


홍인형 모자라진 않겠지?

여진 양은 넉넉히 해 뒀습니다만.

홍인형 젊은 뱃사람들이라 많이도 먹을 게다.


옹말석, 말없이 조기를 엮는다.


홍인형 얼른 따라가 먹지 않고 뭐 하느냐.

옹말석 사옹원은 겨우내······ 땔감들은 넉넉한지요?

홍인형 쓸 만큼은 있다만, 갑자기 왜.

옹말석 소금 거둘 때 때던 장작들이 꽤 남았는데, 조만간 싣고 오겠습니다.

홍인형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옹말석 겨울 내내 비워 둘 텐데, 쌓아 둬 뭐 한답니까.


양삼봉, 들어온다.


양삼봉 일들은 다 끝마친 겝니까.

홍인형 아닐세, 밥때가 돼 먹고들 있다네.

양삼봉 말석이도 와 있었구나.

옹말석 예, 어르신. 날이 추워졌습니다.

홍인형 그래, 소가죽은 값은 잘 치러서 받았는가.

양삼봉 예. 점점 물건 재질은 좋아지더군요.

홍인형 그대들 가죽신 수요가 많아 다행이로구먼.

양삼봉 다 만정이 덕이죠. 얼마나 수완이 좋은지, 백정 말고 진작 장사꾼을 했다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여진 나리, 그만 가 도와야겠습니다.

홍인형 아끼지 말고 달라는 대로 퍼 줘라.

여진 그리하겠습니다.

홍인형 이따 가 보마.


여진, 예를 표하고 나간다.


양삼봉 엮는 솜씨가 제법이로구나.

옹말석 허투루 할 수야 없잖겠습니까.

양삼봉 다시 가서 보니, 역시나 풍수가 좋은 곳이다.

옹말석 좋은 묫자리······ 감사드립니다.

양삼봉 너무 심려치 마라.


홍인형은 뭔가 양삼봉에게 말하고 싶은걸, 눈치 보며 머뭇거리고 있다.


양삼봉 아, 나리께 얼른 드려야겠군요.

홍인형 정말 면목이 없네······ 그래도 어쩌겠나.

양삼봉 오늘 중에 받아 가야, 저들도 신이 날 테죠.

홍인형 내 체면 때문이 아닐세.

양삼봉 알고 있습니다.

홍인형 가세나.


먼저 나서고.


양삼봉 늦으면 집어먹을 것도 없다. 얼른 가 봐.

옹말석 예, 어르신.


홍인형과 양삼봉, 나간다.


옹말석 ······.


사이.


옹말석 아······ 비 오는 소린가······?


조용한 빗소리가 들려오고, 점점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옹말석.


옹말석 무식하고, 무능하고······ 세상에서 제일로 한심한 놈 같으니······.


꽃비가 들어온다.


꽃비 말석아.


당황해 시선을 피하며, 얼른 흐른 눈물을 닦는 옹말석.


꽃비 너 울었니?

옹말석 아니야, 울긴 누가 울었다고······.

꽃비 그런 게 뭐 창피해. 하늘도 저렇게 자주 우는데······.


잠시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꽃비 아마도, 이번 가을에 내리는 마지막 비일 거야.

옹말석 어쩐 일로 온 거야, 가서 돕지 않고.

꽃비 너한테 가 보라 해서.


멀리서 뱃사람들의 웃음소리.


꽃비 내가 원망스러워?

옹말석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꽃비 네가 꼭 싫어 그런 건 아니야. 혼례야 으레 그런 거라······ 그래야 하는가 보다 해서 했을지도 몰라. 근데······ 딴생각이 생겼어. 여태 응당 그렇다고 한 게······ 당연한 게 아니었단 생각 말이야.

옹말석 마음 쓰지 말고, 앞으로 자기 할 일이나 잘해.


꽃비, 노리개19)를 내보인다.


꽃비 백정 팔자에, 언제 이런 걸 가져 보겠어.

옹말석 어떤 딴 사내한테······ 첩하라 왔구나.

꽃비 백정 촌락 아낙들은 요새 다 하나씩 있는데?

옹말석 무슨······ 엽전 벼락이라도 떨어졌냐.

꽃비 꿈같은 일이······ 꿈이 아닌 실재야······.

19)노리개: 여성의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다는 장식 패물.


마루방에 걸쳐 앉고선, 자신의 허름한 신을 내밀어 본다.


꽃비 다음엔 가죽 꽃신을 나눠 줄 거래.

옹말석 거짓말 마, 백정이 뭔 사대부인 줄 아냐.

꽃비 전부 다 홍두령이 한 일이야.

옹말석 누군데? 그게.

꽃비 만정 오라버니를 그렇게 불러. 바다 너머 먼 곳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평등히 사는 나라가 있대. 너도 나중에 거기로 가. 거기서 마음에 드는 짝이랑 혼인해 살면 될 거야. 거긴 풍족해 아무도 굶지를 않는댔어.

옹말석 그런 세상이 어딨어, 꿈같은 소리지.

꽃비 절대로 꿈이 아니야······ 실재지······.


노리개를 보며 매만진다.


꽃비 율도국은 그런 곳이래.

옹말석 유······율도국······?

꽃비 아직 남한테 말하지 말라 했는데······.


빗소리가 멎는다.


꽃비 잠깐 가을의 마지막 인사였나 보다.

옹말석 그래서 홍두령이 데려갈 거래? 거기로?

꽃비 너도 함께 가면 돼.

옹말석 백정도 아닌데, 왜 가!

꽃비 여기가 좋아? 뼈 빠지게 일해 착취만 당하는 게 좋아? 천민이라 죄인 취급 받는게 좋냐고? 계속 이러고 살래? 백정 촌락엔 요즘 엽전이 쌓인다. 소가죽으로 신을 만들면 이리 팔릴 줄을 누가 알았어? 홍두령한테 맡기면 돼, 네 소금으로도 크게 벌 수 있을 거라 그랬어.

옹말석 홍두령이 그러라 시켜?


양삼봉이 들어오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는 꽃비.


양삼봉 그래, 얘기 좀 해 봤냐.

옹말석 어르신도······ 그 율도국으로 가시련 생각이신가요? 홍두령이 이끌고부턴 노리개도 엽전도 촌락에 넘쳐나고 있단 말이죠? 홍두령이 모두 다 거기로 데려간답니까!


홍인형, 들어온다.


홍인형 지나가는 비였던가 본데······.

옹말석 그만, 가 보겠습니다.


힘없이 밖으로 나간다.


홍인형 더 기운이 없어 보이는구먼.

양삼봉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이 잘 치러 보냈으니, 됐습니다.

홍인형 내 아무 도움도 못 되었네.

양삼봉 염간 장례에 나리께서 나설 일은 아니죠. 저희들이야, 알고 지낸 세월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정인 예전엔 어떤 자였습니까.

홍인형 갑자기 왜 묻는 겐가.

양삼봉 불쑥 제게 맡기셨던 터라······ 뭐, 그래 궁금하기도 하고······ 본래가 천한 신분은 아니잖습니까.


홍인형, 피하듯 문서를 꺼내 펼치며.


홍인형 내······ 어찌 그대 눈을 속일 수가 있겠나.

양삼봉 짐작했던 일입니다. 아주 재주가 비범한 자니까요. 벌써부터 따르는 무리들이 생겨난 걸 보면······ 세상에 아무 희망도 없고, 하루하루 가축처럼 살던 우리들한테새로운 생각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홍인형 그의 잘못이라면······ 세상을 잘못 만난 것뿐일세.

양삼봉 나리께서도 율도국이란 데를 알고 계신 것입니까. 거긴 어떤 곳인지요.

홍인형 만정이가 얘기하던가.

양삼봉 아, 됐습니다. 더 궁금하지도 않은 일이라······.

홍인형 지금의 전하께서 임금에 오르셨을 무렵에, 홍길동이란 대도적이 있었다네. 권문세가(權門勢家)20)와 어울려 나라를 어지럽혔지.

양삼봉 예······ 어렴풋 알 것도 같군요······.

20)권문세가(權門勢家): 벼슬이 높고 권세가 있는 집안.


도로 덮어 넣는 홍인형.


홍인형 그 홍길동이가 바로 만정이일세.

양삼봉 필시, 처형당했지 않습니까.

홍인형 가짜였어. 무리들과 배를 타고 몰래 조선 땅을 떠났는데······ 몇 년 있다가 불쑥, 이곳으로 날 찾아온 것이네.

양삼봉 나리께서 홍길동과는 어떤 인연이셨기에······.

홍인형 배다른 형이, 바로 나라네.


일꾼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양삼봉 율도국은 그 몇 년간 있던 곳이겠군요.

홍인형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차별 없이 모두가 공평이 나눠 가지는······ 지상낙원 같은 나라를 세웠단 얘길 어찌 믿을 수 있겠나. 망상인지 미친 건지, 뭔 수작을 부리려 하는 건지······ 난 도대체 모르겠네.

양삼봉 본래 거짓을 따르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진실은 두렵고 차가운 거지만······ 거짓은 늘 따뜻하고 꿈을 꾸게 해주니까요.

홍인형 그렇담, 율도국은 거짓이겠는가.

양삼봉 세상엔 존재할 수 없는 나라일 겁니다.


술에 취한 배덕성, 몹시 흥분한 채로 들어온다.


배덕성 우리 품삯을 네들이 댔단 게 사실이냐, 나랏돈이 아니라? 사실이냔 말이다!


다짜고짜 양삼봉에게 달려들며.


배덕성 백정한테 우리가 빌어먹는단 게 말이 돼?

홍인형 무슨 짓인가, 무······ 물러가게······.

배덕성 필시 조롱하려는 수작일 테지, 내 모를 줄 알아?


홍인형을 무시한 채, 쓰러진 양삼봉의 목을 누른다.


배덕성 굶어 죽더라도 그럴 수야 없단 말이다.

홍인형 그만······ 해라. 어서 물러가······.

배덕성 아무리 천만금의 부를 쌓더라도, 네놈들은 백정이란 걸 똑똑히 가르쳐 주마.

홍인형 밖에 누가 없느냐······!


급히 들어온 장오출, 상황에 놀라 배덕성을 떼어내며.


장오출 놔라! 뭐 하는 짓이야!


배덕성의 뺨을 때리면, 행동을 멈춘다.


장오출 네가 죽으려 아주 환장을 했구나!


배덕성을 홍인형 앞에 꿇어 앉히고, 자신도 바짝 몸을 엎드린다.


장오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리.


양삼봉에게로 가서, 살펴보며 몸을 일으킨다.


장오출 이보게나······ 괜찮은 겐가.


양삼봉, 목을 감싸며 기침을 한다.


장오출 정신이 드나? 어디 좀 보여 줘 봐.

양삼봉 전······ 괜찮습니다.

장오출 다 내 잘못일세.


다시 홍인형 앞에 엎드리고, 열린 문밖에서 상황을 보고 있는 여진.


장오출 나리, 덕성이 이놈이 술버릇이 나빠······ 평소에도 일을 저지르고 다니긴 했으나, 여태 사옹원에 바친 공도 있사오니,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쫓아내 버리기라도 하시면, 젊은 고기잡이들이 동요해······ 장악해 부리기가 힘들어질 겝니다.

배덕성 불충함을 범했으니, 아예 죽여 주시죠.

장오출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게야!

배덕성 백정들한테까지 무시 받는 신세, 살아서 뭣 합니까.

장오출 덜 맞아,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배덕성에게 손을 올리면, 양삼봉은 가서 장오출을 말린다.


양삼봉 살면서 실수야, 다 하는 법입니다.

장오출 우리 젊을 땐······ 누가 감히 나리 앞에서 이랬다던가.

홍인형 품삯이 그들한테서 나온 거란 걸, 어찌 알았나.

배덕성 저 계집이 그랬습니다.


여진, 나선다.


여진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홍인형 더 추궁해 따져 뭣 하겠느냐······ 그만 됐다.

여진 나리, 어째서 그러신 겁니까. 혹시 만정이란 자의 생각인 겁니까.

홍인형 사옹원 살림은 점점 어렵고······ 조정선 아무 기별도 없고, 고기잡이들은 가으내 쉬는 날이 많았는데······ 백정 촌락엔 다소 여유가 있다 해, 그리한 것이다.

장오출 봉사 나리······.

홍인형 추후 처분을 결정할 테니, 데리고 나가게.

장오출 제발 고을서 내쫓지만은 말아 주십시오.

홍인형 그럴 일은 없을 걸세.

장오출 고맙습니다! 나리.


엎드려 절을 한 후, 배덕성을 데리고 나간다.


여진 모두가 그자한테 속고 있는 겁니다. 본시 백정도 아닌, 그자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결국엔 모두가 현혹돼 불행해질 것입니다!

홍인형 그만 됐다.

여진 나리! 이젠 숨김없이 모든 걸 말씀드리겠습니다.

홍인형 해가 떨어지고 나서······ 듣겠다.

여진 그럼, 그때 오겠습니다.


여진이 밖으로 나가면, 앉아 손에 얼굴을 파묻는 홍인형.


양삼봉 다 삶이 힘들고 지쳐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홍인형 난 무능한 겁쟁이일 뿐이라네.


창밖에선 조금씩 눈이 내린다.


양삼봉 나리······.

홍인형 양반의 체면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네······ 길동이었다면 당장에 때려눕혀 끝냈을 일을······ 사대부의 적자로난 덕에 조정의 녹을 먹으며 연명해 가는 나 따윈······ 도적이었다고는 하나 자기마음대로 세상을 사는, 서자인 길동이보다도 분명 못난 자이네.

양삼봉 늙은 백정 놈 목숨 하나가, 뭐가 가치가 있다고요.

홍인형 사람 목숨에 어찌 천하고 귀함이 있겠는가.

양삼봉 밖의 바람이 찬 듯하니, 일찍 쉬십시오.


문득 창밖을 보고선.


양삼봉 올해의 첫눈이로군요.



7.


여진 소녀(小女)는 류큐인과 흘러와 살던 조선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입니다. 조선의 풍습과 말에 능숙한 건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홍인형과 마주 앉은 그 사이엔, 등잔의 불이 흔들리고.


여진 데려온 무리들과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규합해, 자신을 홍가왕으로 칭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홍인형 본인이 했던 말들이 사실이었단 것이구나.

여진 과정들은 그러했습니다만······.

홍인형 정말로, 지상낙원을 세웠단 것이냐.

여진 거짓입니다.


어두운 저녁,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다.


여진 율도국은 지옥 같은 나라였습니다. 높은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율도국 백성들끼리, 모두가 차별 없는 배불리 잘사는 세상이란 환상에······ 모두 속았던 것이죠. 두 해가 갈 때까진 홍가왕을 믿으며 따랐으나, 가까운 류큐국과의 교역조차 없이 자급자족(自給自足)이란 방침 탓에 백성들은 늘 노역에 시달렸고, 점점 굶어 죽는 자들이 늘어 가자 반발하는 자들도 점차 생겨났습니다. 매일 배불리 먹게해주겠다던 그 약속은 홍가왕과 측근들만이 누리는 일상이었고, 홍가왕은 첩을 늘려 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듯 보였습니다.

홍인형 그럼 어째서 다시 조선으로 온 것이냐.

여진 홍가왕이 쫓겨난 것입니다.

홍인형 민란이 일어났단 말이냐.


여진, 고개를 가로젓는다.


여진 측근에 의해서였습니다.

홍인형 그래서, 율도국엔 새 세상이 왔더냐.

여진 홍가왕 때랑 변한 것은 아무것도······ 그저 왕만이 바뀌었을 뿐······ 사람들은 하나둘 몰래 몰래 어두운 밤 배를 타고 나라를 떠났고······ 소녀도 무리에 섞여 그렇게 율도국을 빠져나오다, 폭풍에 표류하게 된 것입니다.


사이.


여진 혹여, 무슨 화를 당할까······ 기억을 잃었단 거짓을 고하였습니다.

홍인형 백정 무리 속에 있던 홍가왕에 많이도 놀랐겠구나.

여진 필시 세력을 모으려는 수작일 테죠.

홍인형 이제 넌······ 어찌하려느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홍인형 조선 땅은 여인네나 이방인이 살기엔 모진 곳이다.

여진 어쨌든 율도국 같은 곳에서 벗어났으니······ 어디서든 살아갈 수밖엔 없지 않겠습니까.


김처선이 들어오면, 일어나 예를 표하는 홍인형.


홍인형 나리께서 이 밤에 어인 일이신지요.

김처선 급히, 할 얘기가 있어 그러네.

홍인형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자리를 피하는 여진.


홍인형 인사 올려라, 상선 나리이시다.


여진이 예를 표하면, 김처선은 헛기침을 한다.


홍인형 꽃비는 어렵겠으나, 알아보니 너라면 괜찮을 듯도 하던데······ 그릇을 만드는 사옹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

여진 여기를 떠나 있어야 하겠군요.

홍인형 고을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정착해 살아갈 생각이라면, 좋을 듯싶다만.

여진 애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홍인형 이만 가 보거라. 나중에 또 얘기해 보자.

여진 그리하겠습니다, 나리.


밖으로 나간다.


김처선 길동은 어디 있는가.

홍인형 무슨 일인데 그러시는 겝니까.

김처선 밖에 엿듣는 자는 없겠는가.

홍인형 중한 일인 것입니까.

김처선 다시, 가서 살펴봐 주게나.


홍인형, 문밖을 살피고선.


홍인형 안심하셔도 될 듯합니다.

김처선 폐위되셨네.


홍인형, 넋이 나간 표정으로 힘없이 의자에 앉는다.


김처선 전하께서······ 임금의 자리를 잃으셨어······.

홍인형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김처선 박원종21)이 앙심을 품고 모의해, 일을 저질렀어!

홍인형 예?!

21)박원종(朴元宗): 조선 전기의 무신. 연산군과 대립하다 중종반정을 기획한다.


사이.


김처선 오늘,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셨다네.

홍인형 진정······ 사실이란 말씀입니까.

김처선 곧 새 임금을 정해, 세상에 알릴 테지.

홍인형 홍길동이를 왜 찾으시는 것인지요.

김처선 율도국이란 나라는······ 정말인 겐가······.

홍인형 상선 나리!


김처선, 눈물을 흘린다.


김처선 도적이긴 했으나······ 그런 허풍을 칠 자는 아니지 않나.

홍인형 어째서 그런 곳을 꿈꾸시는 것입니까.

김처선 한 줌 꿈이라도 잡고 싶은 게, 지금의 내 심정일세.

홍인형 세상을 어지럽힌 대도적입니다!

김처선 여태껏 일곱 임금을 섬겨 왔네만, 늙은 내가 이제 더 뭘 할 수 있겠나. 이대로라면 영원히 폭군으로만 기억될 텐데······ 이렇게 마무리 짓고 싶지가 않아. 내시의 본분이 무엇이겠나, 이것은 내 오욕일세.


홍길동, 들어온다.


홍인형 길동아.

홍길동 역시나 오셨군요, 상선 나리.

김처선 잘 왔네! 전하께서 지금 자네를 찾으셔.

홍길동 쫓겨난 임금을, 이젠 그리 불러선 안 됩니다.

김처선 어떻게 상황을······ 엿들은 것인가······?

홍길동 성균관22) 제사용 고기를 대러 드나들어, 대궐 일은 이미 훤하죠. 은밀히 홀로전하와 닿아 보려고도 했는데······ 그만 일찍 물러나시게 됐군요.

김처선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홍길동 말씀 올린 선단은 어찌 되었습니까.

김처선 역모가 벌어진 상황에, 지금 전하께서 뭘 할 수가 있나.

홍길동 부탁은 예전에 드렸습니다만······.

홍인형 이제 그만해라.

홍길동 전달은 하셨던 것입니까.

김처선 분명 전하께 고하였네.

홍길동 그래서, 제가 뭘 도우면 되겠습니까.

김처선 아직 강화 유배지엔, 닿기 전일세!

홍길동 빼내 오란 말입니까, 관군에 둘러싸인 분을 무슨 수로요?

김처선 그대라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잖겠나.

홍길동 이젠 예전의 날렵했던 홍길동이 아닙니다.

김처선 전하를······ 자네가 말한 율도국이란 곳으로 모셔가 주게나.

22)성균관(成均館): 조선시대 유교의 교육을 맡았던 관아.


홍길동, 웃는다.


홍길동 다시 왕으로 받들어 모시기라도 하라고요? 거긴 조선이 아닙니다! 백정이나 왕이나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니, 애초 그런 꿈은 버리십시오.

김처선 이보게, 자네를 살려 준 것이 누구였는가.

홍길동 임금 자신을 위함이었지, 어디 저를 위함이었답니까.

김처선 은혜를 저버리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닐세.

홍길동 물 밖의 물고기가 살 수 없듯, 한번 왕좌에 오른 자는 자리서 벗어나선 못 사는 법이죠. 무슨 수로든 다시 오르던가, 아님 제 화병에 죽던가······.


애걸하듯 김처선은, 홍길동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김처선 이······ 늙은이의 소원이네······!

홍인형 상선 어른, 꿈이란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소원이고 희망이나, 허상이고 환상이란 뜻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홍길동 이런 역모가 없었다면, 결국엔 날 살려 뒀을까요.


김처선, 손을 놓는다.


홍길동 권력자가 자기 치부를 드러낼 자를 가만둔다? 애초에 선단 같은 건 기대도 안했습니다. 이미 다 스스로 마련해 뒀단 말입니다.

김처선 거짓말 마! 그럼 뭣 하러, 전하께 돌아온 걸 알리라 했나.


사이.


김처선 자넨, 전하를 믿고 여태껏 기다렸네.


크게 웃는 홍길동.


홍길동 율도국엔 옛 조선 임금이 있을 자린 없습니다.

김처선 이럼 하늘서 천벌을 내릴 게야.

홍길동 모셔가기엔 불가능하니, 대(代)만은 잇게 해드리죠. 조선 땅에선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니······ 데려가 장성할 때까지 잘 보살피겠습니다.

김처선 대신에 왕자를 데려가겠단 건가.

홍길동 후일을 도모해 볼 수도 있을 테고, 나쁘지 않군요.

김처선 숙용 장씨(淑容長氏)의 소생이 적당할까······!

홍길동 아! 아끼시던 그 장녹수 말씀이시군요.

김처선 며칠 내로 가능할 수도 있겠네만······.

홍길동 안타깝게도, 반드시 정실 중전한테서 난 적자(嫡子)여야만 합니다. 미천한 후궁따위한테서 난 자식이 무슨······ 적자 중에서도 기왕 장자(長子)를 데려오십시오.

김처선 세자 저하는 안 돼! 말이 되는 소릴 하게!

홍길동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상선 어른.

김처선 숙용 장씨는 누구보다 가까이 하시지 않았는가, 그 소생일세.

홍길동 서자는 이 조선 땅에선, 하물며 왕의 자식이라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왜 그걸 모르십니까!

홍인형 길동아!


배덕성, 들어온다.


배덕성 홍두령, 언제로 정하실 겝니까.

홍길동 모레 아침에 떠날 걸세.

배덕성 겨울 안개 탓에······ 아마도 출항이 힘들 텐데요.

홍길동 그때의 조류(潮流)가 율도국으로 향하네.

배덕성 그러시다면 그리하죠.

홍길동 준비해 주게나.


밖으로 나가는 배덕성.


홍길동 정 대를 이으시려면······ 세자를 율도국으로 보내십시오.

김처선 분명, 언제고 천벌을 받을 게다.

홍길동 그때 죽이시지 그러셨습니까.


화를 못 이기고 무너지는 김처선.


홍인형 상선 나리!



8.


바람에 출렁이는 바다, 봇짐을 멘 여진은 바다를 향해 피리를 분다.

소리는 바람에 실려 바다로 스며든다.



9.


겨울의 싸늘한 바람.


홍인형 새 전하께선 도미나 우럭을 즐기신다니, 앞으론 봄가을에 출항을 늘려야 할 것이네. 어전은 봄이 오기 전엔 전부 거둬들이게나, 조기엔 흥미가 없다 하시니······. 우선은 담백한 걸 주 로 잡아 진상하고, 추후 지시에 따르면 될 걸세.


문서들을 펼쳐 살피면, 침울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오출.


홍인형 새로 오는 봉사께선 아무래도 파악이 힘들 테니, 잘 좀 도와주게나. 꼼꼼히 적어 뒀으니 의문스러울 땐 펼쳐 보라 전하고.

장오출 정말······ 가시는 것입니까.

홍인형 이 정도면 오래 해 왔잖은가.

장오출 여기에······ 더 계셨으면 했는데······.

홍인형 분명 나보다 더 나은 자일 걸세.

장오출 많은 봉사 나리들을 모셨지만, 이젠 올 사람의 기대보단 떠날 사람의 미련이 크니······ 늙긴 늙었나 봅니다.

홍인형 새 임금이 나면, 이전 임금한테서 녹을 먹었던 자는 응당 물러나는 것이 도리인 것이네.

장오출 가끔은 고을에 찾아와 주십시오.

홍인형 나 같은 자는 빨리 잊게나.


배덕성이 들어오면, 홍인형을 향해 예를 표한다.


장오출 안개는 좀 걷혀 가던가.

배덕성 상관은 없겠는데, 마파람23)이 불 것도 같던데······.

장오출 그럼 출항할 수가 없잖아.

배덕성 좀 더 두고 봐야 알겠는데요?

장오출 살펴보고 와서 또 알려.

배덕성 그러죠.

23)마파람: 뱃사람 말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장오출, 홍인형을 살피고선.


장오출 아, 얼른 나리께 감사 말씀드리지 않고 뭐 해.

배덕성 송구하게도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홍인형 나한텐 마음 쓸 것 없네만······.

장오출 끌려가 최소 장 50대는 맞았을 일이야.

홍인형 삼봉 어르신한테 표해 줬으면 하네. 아무리 신분사회라 하나 엄연한 연장자이지 않나. 그리 하면 그때 일은 더 묻지 않겠네.

장오출 백번 지당하십니다, 나리.

배덕성 뭐, 떠나기 전 가서 전하죠.

홍인형 그 사람은 이 땅에 남겠다 하더구먼.

배덕성 무슨 이유랍니까.

장오출 물어봐, 이따.


양삼봉, 들어온다.


장오출 마침 잘 왔네, 자네 얘기하던 참이야.

배덕성 나가 보겠습니다.


양삼봉을 외면하며,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다.


양삼봉 ······.


사이.


홍인형 어서 오게나.

양삼봉 백정들이 인사를 드리고 싶답니다.

홍인형 모두 준비들은 마쳤는가.

양삼봉 배 앞에 모여들 있습니다.

홍인형 바다로 나가면 더 추울 텐데, 장시간 어떨지 모르겠구먼.

양삼봉 두텁게들 입고 했으니, 잘 버텨낼 겝니다.

장오출 가다 수군(水軍)한테 잡히진 않겠지?

양삼봉 고기잡이로 봐줘야 할 텐데요.

장오출 뭔 대비가 있어야 해. 어로(漁撈) 밖으론 의심할 게야.

홍인형 현감한테 오늘 멀리 가 작업할 거라 해 뒀으니 안심하게나. 상선께 받은 허가서도 있고, 그건 이따 전해 줌세.

양삼봉 고맙습니다, 나리.

홍인형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엔 없구먼.


사이.


홍인형 그동안에 고생들이 많았네.

장오출 오래도록 나리를 잊지 못할 겝니다.


각각 보따리를 들고, 꽃비와 옹말석이 들어온다.


홍인형 안의 옷은 두툼히 입은 게냐.

꽃비 닿을 동안, 얼어 죽진 않을 거예요.

홍인형 먼 바닷길이다.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꽃비 예, 봉사 나리.


홍인형, 슬쩍 장오출에게 눈치를 주며.


홍인형 그럼 가 보겠네.

양삼봉 조금 이따, 저도 가겠습니다.

장오출 난 가서······ 배들이나 좀 살펴봐 줘야겠구나.

양삼봉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홍인형과 장오출, 나간다.


양삼봉 말석아, 정말로 따라갈 참인 게냐.

옹말석 이미 결심한 일입니다, 어르신.

꽃비 왜 마음 약해지게 그래요.

양삼봉 네 아비가 떠나기 전······ 약속한 게 있다······.

꽃비 사내대장부, 한입으로 두말 안 하는 법이에요.

옹말석 심려 마십시오, 좋은 세상으로 가는 것인데요.

양삼봉 널······ 아들처럼 돌봐 주겠다 했단 말이야······.

옹말석 어르신, 조선은 본래 시작부터가 잘못된 세상이랍니다.

양삼봉 만정이 그놈이 그러더냐?

옹말석 도축을 금했으면서, 정작 임금과 사대부들은 매일 소고기를 먹고······ 가죽신이 마음에 드니 더 만들어내라 도축까지 묵인해 줬다던데, 양반들한텐 국법마저도······.

양삼봉 그런 막연한 증오심은 도움 될 게 없다.

옹말석 태어난 것으로 신분 차별을 정한단 건, 생각해 보면 너무 이상합니다.

양삼봉 차별 없는 세상이 정말로 존재할진······ 난 잘 모르겠다.

꽃비 홍두령 얘길 들으세요, 깨어나셔야 해요!

양삼봉 꽃비야, 인간도 결국엔 짐승이다. 아비가 사냥하고 소 잡으며 한평생 살며 느낀 게 그거야. 짐승 무리 속에도 엄연히 계급과 차별이 있다. 무리를 이뤄 사는 데에는 어디든 없을 수가 없어······ 거짓에 속으면 안 된다.


눈물을 쏟으면, 두 손을 꼭 잡는 꽃비.


꽃비 그런 얘기 관두세요, 무슨 마음인진 아니깐.

양삼봉 정말로, 배를 타려는 거냐······?

꽃비 있어 봤자, 어차피 변하는 건 없어요. 설사 그게 거짓이라도······ 꿈을 꾸고 싶어요.

양삼봉 고집불통인 것도······ 꼭 네 어미 모습이로구나.

꽃비 살아계셨다면 분명 떠나라 하셨을 거예요.


미소 짓는 양삼봉.


양삼봉 아비 역시······ 부디 그곳이 꿈이 아닌 실재였으면 싶다.


사이.


양삼봉 차별을 벗고, 행복히 살기만을 기원하마.

꽃비 꼭 모시러 돌아올게요.


들어오는 배덕성.


배덕성 부녀 생이별이 참, 서글프오.

양삼봉 이······ 주책스럽게도, 눈물까지 쏟고······.

배덕성 봉사께선 자릴 비우셨구먼, 그래.

양삼봉 배 앞에 가 계실 겝니다.

배덕성 백정들은 뭔 짐들이 그리도 없소?


마루방에 걸터앉으며.


배덕성 말석이 너도 가냐? 염전 소금은 이제 어쩌냐.

옹말석 염간이 어디, 세상에 나밖에 없답니까.

꽃비 백정들이 떠나 좋으시겠군요.

배덕성 그래, 좋구나. 진작에 홍두령이 나섰다면 더 좋았잖아.

양삼봉 떠날 때도 됐죠. 본래가 떠돌이였던지라······ 30여 년 고을서 받아 주셨는데, 우리는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꽃비 가장 미천했던 자들이 가고 나면, 당신네들이 이젠 그 자리를 대신하겠군요.

양삼봉 무슨 말버릇이냐.

배덕성 마음껏 떠들게 두시오.


무심코 걸린 볏짚에 엮인 굴비를 집고선, 천장을 향해 눕는다.


배덕성 네들도 죽어서 볏짚에 엮이던 신세도 이젠 끝이겠다. 새 나라님께선 조기를 싫어하신다 하더라. 말석아, 어째 임금이 바뀌니 걷어 가는 게 더 많아졌다······ 살기가 앞으론 더 힘들 거 같지?

옹말석 같이 율도국으로 떠나시죠.


배덕성, 일어나선 웃는다.


배덕성 여길 왜 떠나야 하냐.

옹말석 세상에 늘 불평불만이었잖습니까.

꽃비 홍두령은 백정이라도 무시 않는군요.

배덕성 본래가 양반집 서자라 했다.

꽃비 그래, 배들까지도 내놓으셨나요?

배덕성 겨울엔 어차피 일도 없고······ 봄에 다시 사면 되니깐. 네들이 떠나고 나면 가죽신벌이를 우리한테로 준다 했으니, 따라야지.


꽃비와 옹말석을, 문 쪽으로 모는 양삼봉.


양삼봉 이제, 그만들 나가자.

배덕성 마파람이 불 듯해, 길이 만만치 않을 듯하오.

양삼봉 남풍 말씀이십니까.

배덕성 조류와 반대 방향의 바람이 불면······ 배가 어찌 되겠소?

양삼봉 이런 상황일 땐, 뱃사람들은 어찌합니까.

배덕성 절대로 바다에 띄우지 않지.

양삼봉 출항을 멈춰야 하겠군요.

배덕성 또 불지 않을 수도 있고······ 하늘의 조화를 사람이 어찌 알겠소. 그저 경험상······이 상황엔 반반이오.


황급히 들어온 여진, 숨이 차오른다.


배덕성 어쨌든 난 전했소이다.


마루방에서 일어나, 황급하게 밖으로 나간다.


양삼봉 ······.


꽃비, 반갑게 여진을 맞는다.


여진 다행이다, 아직 안 떠나서.

꽃비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잖아, 일부러 와 준 거야? 왜 며칠째 소식도 안 전했어?

여진 일이 너무 많았어······ 정말로 저 배를 탈 거니?

양삼봉 잠깐, 얘기들 나누고 있어라.

꽃비 어디 가시게요?

양삼봉 아무래도 봉사 나리를 봬야 하겠다.

꽃비 정말 저 사람 말을 믿으세요?

양삼봉 바다에 관해선 누구보다 잘 아는 자야.

꽃비 못 가게 백정들을 묶어 두려는 수작이에요.

양삼봉 가다 진짜로 화를 당하면 어쩌려고!

꽃비 아버지!


양삼봉이 나가면, 따라 나가는 옹말석.


꽃비 왜 자존감도 없는 사람마냥······ 늘······.


사이.


여진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꽃비 이미 정해버렸어, 걱정 안 해도 돼.

여진 열흘 이상이나 걸리는 먼 뱃길이야. 무사히 닿을 진 아무도 장담 못 해······ 왜 위험한 길을 가려는 거야, 죽을지도 모르는데!

꽃비 백정들 대부분이 그곳에 가려고 나왔어. 설사 도중에 죽더라도······ 인간답게 살수 있는 델 찾고 싶은 거야.

여진 모두가 홍두령한테 속고 있어.

꽃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우리한테······ 꿈을 준 사람이야······.


거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여진 옛날을 다시 꿈꾸는 거야, 그때처럼 무리를 이끌고 왕이 됐던 때를! 구슬려 자신의 무리로 만들기엔 백정들이 쉬워 보였겠지······ 네가 꿈꾸는 율도국이란 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홍인형이 들어와, 잠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다.


꽃비 넌······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여진 잘 들어, 꽃비야. 내가 그 율도국에서 도망쳐······.

홍인형 그만 됐다.

여진 !


사이.


홍인형 사람들이 찾던데, 넌 서두르지 않고 뭐 하냐.

꽃비 이제 배가 떠나려 하나요?

홍인형 아마도 그럴듯하더구나.

꽃비 그럼, 얼른 가 봐야겠어요.

홍인형 이따 배웅하러 나가마.


보따리를 손에 들고 나서는 꽃비, 여진은 슬프게 바라본다.


꽃비 미안해······ 이 땅에서라도 행복하길 바랄게.


밖으로 나간다.


여진 왜 제 말을 막으셨습니까.

홍인형 떠나겠다는 마당에 더 말해 무엇 하겠냐.

여진 제 율도국 얘기들을 믿지 않으셨던가 보군요.

홍인형 그런 것이 아니다.


사이.


홍인형 여태껏······ 난 저들의 저런 표정들을 본 적이 없다. 꿈에 부푼 저들한테······ 어떻게 그런 얘기를 꺼낼 수가 있겠느냐, 난 할 수가 없구나.

여진 거짓에 빤히 속으라고요? 나리께선 해선 안 될 일입니다.

홍인형 율도국의 존재 자체가, 거짓은 아닌 것이니······ 바뀔 수도 있지 않겠냐.

여진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무엇이 바뀐단 것입니까!

홍인형 홍가왕 말이다······ 다시 왕에 오를 땐······.

여진 남의 재산을 빼앗고, 아이들마저 공동 양육이라며 빼앗았습니다. 모든 게 공동소유라야 차별 없는 세상이 될 거라면서, 재산과 가족이 생기면 방해될 거라면서!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서야······ 거짓에 속았단 걸 모두가 알았습니다.

홍인형 이젠 자신도 깨닫고 있을 게다.

여진 봉사께선 홍가왕을 모르십니다.

홍인형 난 그와는 한 피의 형제이다.

여진    !


들어온 양삼봉, 멈춰 서서 조용히 바라본다.


홍인형 그것이 이 고을에, 그가 머문 이유였던 거다.

여진 절 여태껏 속이셨단 것입니까.

홍인형 처음엔 그도 모두와 같은 꿈을 꿨을 게다. 실패와 잘못을 이제는 깨달았을 거다. 사람은 짐승과 다르다, 분명 변할 것이라고······ 난 믿는다······.

여진 모든 걸 빼앗기고 죽은 제 아비와······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모르는 제 가족들의 비참함은 무슨 이유 때문이고, 그 책임은 그럼 누구한테 물어야 한단 것입니까!


오열하며 무너진다.


홍인형 ······.


사이.


양삼봉 네 부모의 명복을 늘 함께 빌마.


홍길동, 들어온다.


홍길동 뭔 소란인지, 시끄럽구먼.


여진, 홍길동에게 침을 뱉는다.


여진 분명, 넌 천벌을 받을 것이다.


사이.


양삼봉 됐으니, 그만 가자.


여진을 다독이며 함께 나간다.


홍길동 이제 보니 류큐 혼혈 계집이로군요.


덤덤히 침을 닦으며.


홍길동 큰 눈에 저런 갈색 피부는 전형적인 류큐인인데, 조선말도 잘하니······ 어쩌다 이런 데로까지 흘러 들어왔을까······.

홍인형 아무렇지도 않느냐, 넌.

홍길동 액땜한 것은, 떠나기 전 좋은 징조이죠.

홍인형 홍가왕에 관해 잘 안다 했다.

홍길동 거짓일 겝니다.


닦은 손을 힐끗 보면.


홍길동 계집 혼자선 닿을 수 없는 땅입니다.

홍인형 지금의 이 굴욕을······ 평생토록 잊지 말아야 한다.


들려오는 파도 소리.


홍인형 이제 그만 떠나거라.

홍길동 율도국으로 함께 가시죠.


사이.


홍길동 그곳에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십시오.

홍인형 부귀영화라니? 율도국은 만인이 평등한 세상이라 하지 않았더냐.


홍길동, 웃으며.


홍길동 모두가 공평히 부귀영화를 누리는 땅이죠.

홍인형 길동아······ 부친께선 청룡의 꿈을 꾸고 낳은 아들이라며, 서자이기는 했으나 늘 네게 기대를 품고 계셨다. 네 재주에 이 형이 어찌 비할 수 있겠냐, 뜻을 제대로 펼 수 없었던 건 세상의 탓이니······ 주변의 누구도 원망해선 안 된다.

홍길동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던 때의 기억은 무척이나 소중하여······ 정신이 나태해질 때면 내 태생적 운명은 항상 발버둥 치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단 걸 잊지 않게 해줬습니다. 헌데 임금을 만나고 나서부턴······ 내 사주에 얽힌 서자 신분 따윈, 아무 일도 아닌 것이었단 걸 알게 됐죠.


웃으며 처용무를 춘다.


홍길동 이 땅에 돌아와 궁궐서 엿보았던 임금의 모습은······ 마치 거울처럼, 지난날 율도국에서의 제 모습이더이다. 이 처용 춤은 말입니다, 자신에게 씌워진 악귀를 몰아내는 의식이죠. 임금이 죽으면 지난날의 나 또한 죽는 것이니······ 악귀의 탈을 벗고 다시······ 새로이 꿈을 꿀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형님이 눈에 밟혀 그러니······ 길동과 함께 율도국으로 떠나십시다.

홍인형 조선의 태조께서도 건국 전엔 고려의 반역자였지 않느냐. 성군이 되면 지난 허물 같은 건 누구도 묻지 않는 법이니······ 믿고 따른 자들을 잘 보살펴라.


춤을 멈추는 홍길동.


홍길동 진정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홍인형 난 조선 땅을 떠날 수가 없어.

홍길동 백정들이 형님을 많이들 따르더군요. 뭔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저를 도와주십시오.

홍인형 부친의 묘소는 누가 돌보겠냐.


사이.


홍인형 내 바람은 부귀영화 따위가 아니다. 제사를 모시며 자식의 도리를 하면서, 하루하루 마음 편히 살면 된다.

홍길동 서출인 난 할 수가 없겠군요.

홍인형 네겐 너의 꿈이 있지 않냐, 우린 그저 그것이 다를 뿐인 것이야.

홍길동 그럼, 그리 알고 떠나겠습니다.


쓸쓸히 밖으로 나간다.


홍인형 ······.



10.


도포 차림에 갓을 쓴 홍인형, 봇짐을 멘 채로 산언덕을 오른다.


홍인형 ······.


멈추고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면, 다가오는 양삼봉.


양삼봉 좀 쉬시겠습니까.

홍인형 벌써부터 숨이 차니, 큰일이로세.

양삼봉 산행이 익숙지 않으시니 그렇죠.

홍인형 그래, 올가미에 뭔가 있던가.

양삼봉 아무래도 범은 없는 듯하니······ 하나하나 걷어내야겠군요. 사실,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죠. 시기나 환경을 보면 범이 다닐 리가 없는데······.

홍인형 왜 그럼 여태껏 열심히 잡으려 했는가.

양삼봉 백정이 뭔가 고을에 보답해야 한단, 그런 강한 바람이 진실을 볼 수 없게 한 것일 겝니다. 진짜로 범이 나타나길 고대했으니······.


함께 풍경을 바라본다.


양삼봉 멀리서 바라보시니, 어떻습니까.

홍인형 사이사이 작은 섬들이······ 저리도 많았구먼.

양삼봉 사람이 살진 않겠으나, 가던 배가 잠시 쉴 곳은 되겠죠.

홍인형 저럼 열흘 넘는 뱃길도 무리는 아닐 걸세.

양삼봉 무탈했다면 지금쯤엔 닿았겠군요.

홍인형 우린 가던 길이나 가세나.

양삼봉 봉사 나리께서 떠나시는 길에, 눈이 쌓이지 않아 다행이로군요.

홍인형 사직한 상황에 봉사라 하면 어쩌나.

양삼봉 입에 오래 붙어버렸습니다.


사이.


홍인형 홀로 남아, 이제 어찌 지내려는가.

양삼봉 사냥이랑 약초도 캐며, 그렇게 살아야죠.

홍인형 함께 한양으로 가겠는가.

양삼봉 늙은 백정이 가 뭣 하겠습니까.

홍인형 물러났어도 김처선 어른은 세도가일세, 모른 척 안 하실 게야.

양삼봉 새 나라님으로, 한양도 떠들썩하겠군요.

홍인형 그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네만.

양삼봉 여기 남으렵니다.


조금씩 눈이 내리고.


양삼봉 꽃비가 데리러 온다 해서요.

홍인형 율도국을 믿는 것인가.

양삼봉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여식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죠.


활짝 웃는다.


양삼봉 생이 다하기 전, 확인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군요.

홍인형 그들이 닿은 그곳이······ 진정, 꿈꿨던 율도국이었기를······ 나 역시 바라고 있네.


세차게 내리는 눈.


양삼봉 쌓이기 전에 얼른 가셔야겠습니다.

홍인형 이제부턴 혼자서 갈 테니, 여서 그만 헤어지세나.

양삼봉 산 너머까지만이라도 배웅하겠습니다.


사이.


홍인형 혹여, 여진의 소식을 알면 내게 전해 주게.

양삼봉 사내들보다 나은 아이이니, 어디서든 잘 살아갈 겝니다.

홍인형 눈이 더 쏟아지겠구먼, 얼른 가세나.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막.


참고문헌.


『홍길동전의 비밀』, 설성경 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 이희근 저, 책밭, 2013.

『조선전기의 司甕院』, 송수환 저, 고려사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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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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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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