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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의 시간

  • 작성일 2023-03-31
  • 조회수 1,809

유령들의 시간


조현주



등장인물


강민형

강소정: 강민형의 여동생

강민수: 강민형의 남동생

강윤: 강민형의 아들

한미주: 강소정의 딸

그 외 네 명의 배우: 각각 사슴, 두 마리의 코뿔소, 종을 든 소년을 연기한다.


공간적 배경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외진 시골 마을이다. 한창때는 50여 가구에 200여 명이 살았지만 지금은 10여 가구에, 주민은 13명이 전부다. 남성이 3명, 여성이 10명이며, 모두 70대 이상이다. 가장 고령자는 95세의 여성.

이 마을은 수십여 년 전의 정전(停戰) 이후 강씨 일가가 모여 살게 된 집성촌이다. 그들은 성실한 노동으로 험난한 시기를 함께 이겨내면서 대를 이어 자식들을 키워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자식들은 도시로 떠났다. 나이 든 이들이 마을을 지키다 고령으로(대부분이 그랬다), 사고사로 혹은 예상치 못한 병으로 사망하면서 마을에는 점차 빈집이 늘어나게 되었다. 간혹 도시 생활에 지친 자식들이 부모 곁으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잠시 머물렀을 뿐, 정착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이 시골 마을은 부모들의 공간인 것이다.

무대는 마을의 서편 산등성이 아래에 드넓게 펼쳐진 땅이다. 밭으로 활용하기에는 모든 조건이 최악인 탓에 누구도 관심 두지 않았고, 그로 인해 오래도록 폐허로 남아 있었다. 주변의 논과 밭을 일구면서 옮겨 온 바위와 자갈과 온갖 폐기물들로 가득했던 곳이다. 반년 전 강민형이 이 폐허를 사고, 매화나무를 심겠다는 결심을 하기 전까지는.


무대 설명


무대의 양옆은 빼곡하게 자란 나무들로 채워져 있다. 이 나무들 사이사이로 배우들의 등·퇴장이 가능하다. 황량하고 광활한 폐허가 무대 뒤쪽에 펼쳐져 있고 멀리 산등성이가 보인다.

무대 위에는 등받이 없는 의자 둘, 낡은 소파 하나, 낡은 소파에 걸쳐 있는 담요들 말고는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오직, 그리고 여전히 폐허뿐이다.


시간적 배경


현대, 봄날의 어느 날.


제1막

정오 무렵


제2막

1막의 해 질 무렵


제3막

1막의 밤


제4막

3막에서 일주일이 지난 후의 저녁


†극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며 시간, 장소, 분위기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23개의 장으로 구분된다.

†〈//〉표시가 있는 부분은 그 지점부터 대사가 겹친다.





제1막


1장


멀리에서 들려오는 산새 소리.

잔잔한 음악이 깔린다.

희미한 조명이 무대의 벽면을 비춘다.

사슴 등장. 산책하듯 천천히 걷는다. 사슴은 이따금 무대 안으로 들어오지만 잠깐일 뿐, 대부분 숲 저쪽에 있다.

잠시 후 그림자 곁으로 강민형이 등장한다. 여든을 넘긴 노인. 지쳐 보이지만 표정에는 초연한 느낌이 어려 있다. 강민형은 마치 사슴 곁을 지키듯 무대 벽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강민형 어련히 알아서 들어갈까 봐, 뭐 한다고 또 나왔어. (잠시 멈춰 서서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본다) 날이 좋기는. 구름 한 점 없으면 볕만 따갑지. (다시 걷는 다) 오후에는 풀부터 좀 뽑아야겠어. 왜 그 당숙모 묘 가는 길목에 불룩하니 솟은 땅 있잖아. 그래, 풀 무성하고. 거기 가운데에 바위 하나가 죽은 두꺼비마냥 콱 박혀 있더라고. 땅을 파 봤더니 풀뿌리 때문에 바닥이 보이지도 않아. 풀부터 걷어내고 그놈을 치워야겠어. (사이) 임자, 내가 평생을 이 두 팔, 이 두 다리로 살아온 사람이야. 그깟 놈의 바위, 일도 아니지. 일도 아니라니까. 못 옮기면, 깨부수면 되고. 고작해야 조금 큰 돌멩이잖아. (장난스럽게) 근데 말이야, 임자, 솔직하게 말하면, 나, 옮길 수 있어. 에이? 에이? 이 사람이 남편을 허깨비로 보나. 아까는 못 든 게 아니라 안 든 거라니까. 풀뿌리가 땅속에서 그 바위 놈을 꽉 붙잡고 있어서 그래. 그것만 뽑아버리면 그 돌멩이 놈, 밑 빠진 독처럼 쑤욱 하고 들릴걸? 그럼 슥 들어서 휙 하고 던져버리면 되지. 봐 봐, 내가 이따 임자 앞에 떡 하니 꺼내서 보여 줄 테니까. (웃는다) 나만 믿으라니까.


걸음을 멈추고, 감회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폐허를 구석구석 둘러본다.


이제야 제법 쓸 만한 땅이 됐어. 여긴 죽은 땅이 아니었어. 잠깐 말이지,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있던 거야. (사이) 임자, 자네 말이 맞았어. 그래, 임자 말이, 항상 맞지. 내가 언제 틀렸다고 한 적이 있나? 뻔뻔하기는? 이 사람이 이제 늙었다고 대놓고 남편 괄시를 하네. (웃는다) 내가 약속했지 않은가. 자네 소원 들어주겠다고. 다음 달에는 나무를 심자고. 내년 이맘때쯤에는 꽃이 필 거야. (사이) 그래, 그때 같이 꽃 구경을 하세. (사이) 맨날 그놈의 약속 타령은. 알았어, 약속할게, 약속한다니까. (흐뭇하게 웃으며)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매번 헤’하고 웃고만 있는지.


천천히 무대 가운데로 나오다가 갑자기 멈춰 선다.


윤이 놈 얘기가 왜 나와? (사이) 손을? 그놈한테 무슨 손을 빌려? (화가 난 듯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치워. 그놈 얘기는 두 번 다시 하지 마. 어허, 이 사람! 치우라니까. (갑작스러운 통증에 배를 움켜쥐며 쓰러질 듯 걸음을 옮겨 소파에 겨우 몸을 묻는다. 거친 숨을 몰아쉰다)


무대, 서서히 밝아진다.

사슴 역시 서서히 사라진다.

강민형, 통증이 잦아드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변한다.

깊은 눈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2장


무대에 따스한 빛이 감돈다.


한미주 (목소리) 삼촌.


강민형, 환청을 듣는 듯 반대편 숲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한미주 (목소리) 삼촌!


한미주, 무대로 등장해 다가온다.


강민형 미주구나.

한미주 네, 또 미주랍니다. (의자에 털썩 앉는다)

강민형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냐? 미안하다 매번.

한미주 삼촌이 미안하실 게 있나요?

강민형 내 이번에는 네 엄마에게 진짜로 한소리하마.

한미주 소용없는 거 아시잖아요. 태어난 순간부터 쭉 삼촌 바라기였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바뀌겠어요?

강민형 걔가 내 말이라면 잘 들으니까.

한미주 네, 너무 잘 들으시죠. 두세요, 그냥. 저만 또 잔소리 들을 게 뻔해요.

강민형 그놈의 황소고집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하지가 않아. 애 귀찮게 하지 말라고 백번을 얘기했는데, 한 번을 안 들어.

한미주 그게 강씨 집안 내력이자 매력이죠, 모두가 진저리치는. 괜찮아요. 별로 귀찮지 않아요. 엄마랑 마주 보고 말씨름하는 것보다 훨씬 덜 피로하고요.

강민형 아니다. 내가 확실하게 말을 하마.

한미주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강민형 따끔하게 얘기하면 저도 〈//〉 알아듣겠지.

한미주 삼촌.

강민형 응?

한미주 (정색하며) 두시라고요, 그냥. 아무 말 하지 마세요.

강민형 (사이) 그래, 알았다.


침묵이 흐른다.


한미주 건강은 좀 어떠세요?

강민형 몸이야 늘 똑같지.

한미주 병원은 꼬박꼬박 가시는 거예요?

강민형 병원은 어디가 아파야 가는 곳이야.

한미주 아프기 전에 가는 곳이기도 해요.

강민형 우리 때는 안 그랬다.

한미주 시대가 변했어요.

강민형 내가 안 변하는데 그까짓 게 무슨 상관이냐? (웃는다)

한미주 (사이) 엄마가 많이 걱정하세요.

강민형 네 엄만 평생을 그리 살았다. 어렸을 때는 말이다, 집 천장이 무너진다고 매일 밖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피웠어. 구멍이 숭숭 뚫린 천막 안에서 말이야. 어른들이 어르고 달래고, 울려도 봤지만 소용없었지. 고작 다섯 살짜리 꼬맹이를 아무도 못 이겨. 그래서 네 엄마가 잠이 들 때까지 내가 늘 옆에서 안아 줘야 했지.

한미주 엄마도 이제 일흔여섯이세요.

강민형 (웃으며) 그래, 그렇지. (여전히 웃으며, 혼잣말처럼) 그래, 이젠 꼬맹이가 아니지.

한미주 엄마가 얘기했다면서요?

강민형 응? 뭐를?

한미주 (사이) 거기, 제가 잘 아는 곳이에요. 일반적인 호스피스 병원과는 달라요. 말 만 가족처럼이 아니라 진짜 가족처럼 보살펴 줘요. 직원들이 4교대로 24시간, 365일 환자를 케어하고요. 예전에 제가 변호했던 분 어머님께서 운영하는 곳인데, 정말 믿을 만해요. 제가 보증해요.

강민형 네 엄마에게 들었겠지만, 나는 괜찮다.

한미주 괜찮지 않은 것 같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강민형 다른 사람 말 하나 믿을 것 없다.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파, 나는. 아픈 데가 없는데, 병원이 뭐고 호스피스가 뭐냐. 다 쓸데없는 짓이지.

한미주 (사이) 정말이세요?

강민형 정말이지. 자, 이게 아픈 사람 팔뚝처럼 보이니? (팔근육을 뽐내듯 내보인다)

한미주 네. 많이 아픈 사람처럼 보여요.

강민형 솜씨 좋은 변호사라더니.

한미주 저 유능한 거 맞아요. 민사소송 승소율 백 프로.

강민형 (흐뭇해하며) 그래. 넌 네 엄마를 닮아서 잘할 거야, 뭘 하든.

한미주 (사이) 삼촌, 저 친탁이에요. 완전 아빠 판박이. 평안 강씨 아니고 김제 한씨. (사이) 22대손 둘째 아들, 삼 남매 중 둘째 딸.


새소리, 요란하게 들린다.



3장


강소정, 분주하게 등장한다.


강소정 엉덩이가 아주 천근만근이지?

한미주 여기 오셨네요, 평안 강씨 18대손 셋째 따님.

강소정 아주 지긋지긋하다, 그놈의 게으름은 정말이지. 세월아 네월아. 왜, 너도 여기에 아예 눌러앉지? 볼만하겠다, 야. 늙은 삼촌이랑 말만 한 조카가 오순도순, 이런 허허벌판에서 사이좋게 땅 파면서, 얼마나 호기로워.

한미주 보세요, 삼촌. 이 앞뒤 없이 거침없고 논리도 없는 공격성. 제 어디가 이분을 닮았나요?

강소정 사람 둘 데리고 오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그렇게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야?

한미주 누가 들으면 몇 시간 지난 줄 알겠어요.

강소정 국 식는 데 5분이면 충분하다. 말을 했으면 빨리빨리 들어 처먹어야지.

한미주 사랑하는 늙은 오빠분께 물어보시죠.

강민형 그래, 미주 탓 아니니까 목소리 좀 낮춰라.

한미주 들으셨죠? 전 잘못 없다시네요.

강소정 오빠가 늘 이렇게 싸고돌아서 애가 어른 말을 쥐콩으로 듣잖아요.

한미주 쥐똥이겠죠. 〈//〉 쥐콩은 무슨.

강소정 좋겠구나 너는, 어미가 무식해서.

한미주 그게 마냥 좋지만은 않아요. 나랑 크게 상관은 없는 일인데도.

강소정 망할 년.

한미주 네, 전 언제나 망할 년이었죠. 열아홉 살 이후로 쭉.

강소정 그 주둥이 좀 다물고 있으면 안 되겠니?

한미주 삼촌, 제가 제 입 가지고 〈//〉 얘기도 못 해요?

강소정 (소리친다) 어디 가요? 〈//〉 밥 먹으라니까.

한미주 깜짝이야. 조용히 좀 말해요. 어디 저 멀리 있어요 삼촌이?

강민형 먼저 들어가.

강소정 아, 어디 가냐니까요?

강민형 소피 좀 보고.


강민형, 퇴장한다.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강소정 아니, 이 오빠는 멀쩡한 집 화장실을 두고 자꾸 왜. (소리친다) 아주 자연인 나셨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려는 한미주를 붙잡고는) 넌 또 어디 가?

한미주 다른 한 사람 찾으러 가야죠.

강소정 (폐허를 쓱 훑고는) 얘는 또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한미주 저 어딘가에서 자고 있겠죠.

강소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 (조심스럽게) 얘기해 봤어?

한미주 이거 좀 놓고. (팔을 주무르며) 노인네가 힘만 세 가지고.

강소정 내가 골골대면 퍽이나 좋겠다. 부모 건강한 것도 자식 복이야 이것아.

한미주 네, 네. 오래오래 사셔야죠.

강소정 낫으로 물을 베지. 네가 뭘 알겠냐? 천지 분간도 못 하고. 나이는 장식으로 처먹었어, 아주. (혀를 찬다)

한미주 그만 좀 하세요.

강소정 뭘 그만해, 그만하길.

한미주 딸이라고 다 참아 줄 수는 없는 거예요.

강소정 네가 뭘 그렇게 참아 줬어? 못 참으면 네가 어쩔 건데?

한미주 어쩌긴요, 법대로 하는 거지.

강소정 하! (코웃음 친다) 법, 법 하는 인간치고 내 평생 제대로 된 것들을 못 봤다. 법? 어디서 씨알도 〈//〉 안 먹힐 이야기를.

한미주 계속할 거예요? 그럼 나 갑니다.

강소정 (사이, 노려본다) 얘기해 봤냐고?

한미주 (사이) 해 봤죠.

강소정 (반색한다) 했어? 잘했다. 뭐래? 좋다지? 가겠다지? 언제 간다던?

한미주 싫으시데요.

강소정 싫다고?

한미주 안 아프시데요.

강소정 안 아프다고?

한미주 하나도 안 아프시데요. 안 아픈 사람이 왜 자꾸 병원에 가고, 또 호스피스 치료를 받느냐고 그러시네요.

강소정 …….

한미주 (폐허를 가리키며) 봐요, 진짜 아픈 사람이 이런 걸 혼자 할 수 있겠어요? 못해요.

강소정 네가 변호사지 의사야? 사람 아픈 걸 어떻게 알아?

한미주 그러니까, 내가 변호사지 의사냐고. 의사한테 데려가라 그러세요.

강소정 그럴 수 있었다면 천 번, 만 번도 했을 거다. (사이)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는데?

한미주 정말 안 아프시냐, 정말 괜찮은 거 맞으시냐? (점점 심각해지는 강소정을 눈치 챈다) 왜? 아니, 그럼 내가 더 무슨 말을 해요?

강소정 매정한 년.

한미주 그렇죠? 제가 좀 많이 매정했죠? 삼촌 바짓단이라도 잡고 매달려서 막 울고불고 했어야 했는데. 그렇죠?

강소정 변호사라는 게 사람 마음 하나 못 돌리고.

한미주 말했죠. 저는 그냥 변호사일 뿐이라니까요.

강소정 너는 이게 장난 같지? 세상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고작 몇 달밖에 못 산다고 하니까, 거짓말 같지? 웃기지 아주?

한미주 그런 거 아니에요.

강소정 네 얼굴에 다 써 있어.

한미주 점쟁이 나셨네요.

강소정 아니면,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 아무 때나 가도 괜찮다는 거야?

한미주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어른이셔. 나보다 어른이시라고.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강소정 예의가 아주 발랐구나 우리 딸이. 이 엄마는 왜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까?

한미주 그럼 뭐 어떻게 할까요? 사람들 데리고 와서 막 끌고 가게 할까요? 억압복 입혀서 죄인처럼? 그래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강소정 왜 못해? 해야 한다면 해야지.

한미주 나중에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요.

강소정 그렇지. 네가 생각한다는 게 늘 그 모양이지. 언제나 저밖에 모르고.

한미주 엄마가 할 말은 아니죠 그건.

강소정 어디 가서 내 딸이라 할까 봐 무섭다.

한미주 응, 그래서 나도 가끔 엄마 없이 자랐다고 해요. 뭐, 사실이기도 하고. 나, 언니가 거의 키웠잖아. 기억 안 나요?

강소정 싸가지없는 년.

한미주 행복하시겠네요, 딸이 싸가지가 없어서.

강소정 한마디를 안 지지, 안 져.

한미주 그래야 편하시다면 그렇게 해드리고요. (깍듯하게)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게 뭐든, 다 제 잘못이에요. 부족해요? 늘 하던 대로 무릎, 꿇을까요?

강소정 (기가 차 하며) 안 봐도 훤하다. 사람들을 얼마나 볶아댈지. 그러니 누가 너를 버텨내겠니? 박 서방도 말을 안 했지, 속이 새까맣게 탔을 거다. 세상 어떤 사내가 상전을 모시고 살아. (말을 멈춘다)


침묵이 흐른다.


한미주 엄마.

강소정 …….

한미주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어.

강소정 뭐?

한미주 엄마 평생 안 보고 살 수 있다고 나. (사이) 한 번만 더 영훈이 얘기, 그런 식으로 하면, 나 다시는 엄마 안 봐.


더 긴 침묵이 흐른다.



4장


조명이 다소 어두워진다.

강민형, 다시 등장한다.


강민형 가. 미주야, 가자.

한미주 먼저 가세요.

강민형 왜 같이 가지? (이유를 눈치채고 입을 다문다)

한미주 드시고 계세요, 곧 갈게요. (퇴장한다)


강민형, 물끄러미 한미주가 나간 방향을 바라본다.

강소정, 힘이 빠진 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강민형 왜 앉아, 안 가고? (사이) 또 싸운 거야?

강소정 핏덩이랑 무슨 싸움을 해요? 저깟 게 나랑 상대나 되나.

강민형 그래, 누가 우리 코뽀리한테 대거리를 해? 아무리 조카라도 그건 내가 용서 못하지.

강소정 (기가 차 하며) 기억력도 좋네. 그게 언제 적 이야긴데.

강민형 네가 핏덩이였을 때지.

강소정 오빠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강민형 동생들하고 엄청 싸웠지. 내 코뽀리야, 내 거야 하면서.

강소정 오빠가 나 준 거였잖아요.

강민형 피난길에 주운 거였지. (사이) 언제까지 그걸 갖고 있었더라?

강소정 기억 안 나요.

강민형 (사이) 사실 그때 그 코뿔소 인형, 주고 싶지 않았단다.

강소정 왜요?

강민형 나도 갖고 싶었거든. (미소 짓는다)

강소정 다 늙어서 싱겁기는. 다들 어렸잖아요, 나도, 오빠도.

강민형 그랬지. 어렸지. (강소정 옆에 나란히 앉는다) 그래도 마냥 어릴 수는 없었어.

강소정 (사이) 그때가 아직도 기억이 나요?

강민형 기억은 무슨. (사이) 잊히지가 않아.

강소정 나도 그래요.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 때 기억은 가물가물해.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기도 하고. 근데 겨우 다섯 살이었는데, 그때 기억은 조금 전 일처럼 늘 그렇게 생생할 수가 없어. (사이) 이상하지, 정말. (긴 사이) 이상하지 정말.

강민형 (가만히 강소정을 바라보다가) 너만 생각하고 살아. 자식 걱정 그만하고.

강소정 내가 자식이 어디 있어요? 원수들만 한가득이지.

강민형 그래, 원수들 좀 그만 쫓아다녀.

강소정 오빠, 나도 몇 년이면 여든이에요. 뭔 생각을 하고 살아요. 그냥 사는 거지.


강민형, 강소정의 무릎을 토닥거린다.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강민형 다음 달이면 나무를 심을 수 있을 것 같아. 어제 감골 조가한테 전화했다. 묘목 실한 거로 삼백 개만 준비해 달라고.

강소정 삼백 개.

강민형 사백 개 할 걸 그랬나?

강소정 사백 개.

강민형 왜, 그것도 적은 것 같아? 오백 개는 많은 것 같은데.

강소정 삼백 개도 많아요.

강민형 삼백 개는 많은 건 아니지.

강소정 많아요, 많다고.

강민형 땅이 작아?

강소정 작기는, 커서 탈이지. 그걸 누가 다 심냐고요?

강민형 내가 심지 누가 심냐?

강소정 어느 세월에 해요 그걸, 혼자서.

강민형 쉬엄쉬엄하는 거지, 그게 뭐 어렵다고.

강소정 좀. (화를 누르듯 어르고 달래며) 오빠나 오빠 몸 생각 좀 해요. 제발 좋은 일 아니라고.

강민형 몸 생각했으면 진작 죽었어야지. (웃는다)

강소정 (강민형의 웃음에 어이없어하며) 나만 미친년이지, 나만. 언제나 이 강소정이만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지.

강민형 봐라. (사이) 봐.


강민형, 무대를 천천히 둘러본다.

강소정, 강민형의 시선을 따라간다.


강민형 죽은 땅이라고 했지? 어떠냐, 지금은?


강소정, 여전히 무대에 시선을 두고 있는 강민형을 바라본다.


강민형 그래, 근사하지. 근사할 거야. (사이) 고작 반년이었다, 반년. 이 땅을 되살리는 데 걸린 시간이.

강소정 감개무량하시겠네요, 아주.

강민형 그 돌팔이 의사 놈에게도 보여 줘야 하는데.

강소정 그 양반 명의에요. 티브이 방송에도 나왔고.

강민형 사람 목숨을 숫자로 말하는 인간이 명의는 무슨.


침묵이 흐른다.


강소정 오빤 안 죽어요.

강민형 말해 뭐 해. 저도 내 나이 되어 보라지. 이 나이 먹고 암 덩이 하나 없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

강소정 오빤 안 죽어, 내가 그렇게 안 둬.

강민형 그래.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강소정 내가 그렇게 안 만든다고.

강민형 그래, 그래.

강소정 오빤 안 죽어요.

강민형 …….


해가 구름에 잠시 가려져 무대가 잠시 어두워진다.

두 사람, 그런 하늘을 고개를 한껏 들어 응시한다.



5장


무대 다시 밝아진다.

강민수, 걸어 나온다.


강민수 나 참. 점심 건너뛰자고?

강소정 오빠.

강민형 응?

강소정 (강민수를 바라본 뒤 하소연하듯) 저게 내 암 덩이예요.

강민수 강 여사, 7자 꺾이더니 사람 게을러졌네. 끼니 거르는 걸 무슨 큰 죄라도 짓는 것처럼 평생을 살던 사람이. 변한 거야? 그런 거야? 그럼, 나 속상해.

강소정 나의 가장 큰 죄라면 너의 누나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제껏 이렇게 고행을 해 온 거 아니겠니?

강민수 이왕 해 온 거 좀 더 합시다.

강소정 싫어.

강민수 왜?

강소정 이젠 안 할래.

강민수 곧 떠날 사람이라고 너무 대놓고 괄시하시네.

강소정 한 달 우려먹었으면 그 얘기는 이제 그만 좀 해라.

강민수 자, 그러지 말고, 밥 먹읍시다, 밥. 나 배고파. 알잖아, 배고프면 힘들다고. 일어나요, 형님.

강소정 입만 움직이는 놈이 힘들긴 뭐가 힘들다는 거야?

강민수 당뇨, 혈압, 관절염. 강 여사, 나도 엊그저께 앞자리에 7자 붙었어. 놈은 좀…….

강소정 좀?

강민수 좀, 아니지 않아?

강소정 않아?

강민수 않아요?

강소정 서열은 확실히 해야지. 어린놈이.

강민수 어린놈이라. 왠지 기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뭔가 묘하게 애매모호한데, 기분이.

강소정 난 누나, 넌 동생. 그걸 잊지 마라.

강민수 네, 그래야죠. 지엄한 말씀이세요.

강소정 내가 네 똥 기저귀만 3년을 빨았어.

강민수 또? (과장되게 울상을 지으며) 형님.


강민형, 소리 없이 웃는다.


강소정 내가 고작 다섯 살 때였다. 상상이나 가니? 기저귀를 차도 이상하지 않을 어린 애가 기저귀를 매일같이 빨았단 말이다.

강민수 지금은 1절만 합시다. 배고파. 청국장이 식고 있다고. 그 맛있는 녀석이 무슨 잘못이야?

강소정 평생을, 평생을, 네 놈 뒷바라지만 했어.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또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강민수 알아요, 알아.

강소정 알기는 개코를 알아?

강민수 똑같은 얘기를 수천 번 들어봐요. ‘똥’ 자만 들어도 뒷얘기가 줄줄 나온다고요.

강소정 수천 번은 아니지. (강민형에게) 수천 번은 아니지 않아요?

강민형 아니지.

강소정 들었지?

강민형 괜한 말은 아니야, 막내 얘기가.

강민수 들었지? (사이) 요?

강소정 오빠까지 거들 건 없잖아요.

강민형 사실은 사실이지.

강민수 팩트는 변하지 않아서 팩트지. 그렇죠 형님?

강민형 그럼.

강소정 이 강씨 놈들이 오늘은 세트로 사람 복장을 뒤집네.

강민수 오호, 우리 강 여사님이 형님 험담하는 것도 보고. 진짜 변한 거야, 그런 거야? 그럼 나 속상하다니까.

강소정 그래, 이제 나도 좀 변하고 싶다. 좀 변해 보자. 이 손톱 발톱에 든 흙물이 뭐 때문인 것 같냐? 응? 지워지지가 않아요 아주.

강민수 자랑스러운 영농인상만 다섯 번 수상하신 강소정 여사! 긍지를 가지세요!

강소정 긍지는 얼어 죽을.

강민수 (엉겨 붙으며) 오늘 또 왜 이러시나, 우리 강 여사. 왜? 미주랑 또 한바탕하신 거야?

강소정 안 했다고, 안 싸웠다고.

강민수 했네 뭘.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어, 이 싹수 노란 조카 녀석. 감히 어디, 우리 하늘 같은 누님을 화나게 해?

강소정 네 귀는 이제 장식인 거냐? 떨어져라, 당장.

강민수 이 장딴지! 장딴지가 무슨 고목 같아. 짱짱해 아직도.

강소정 한번 차여 볼래? 그럼 스페인 대신 병원에 가야 할 텐데.

강민수 이 배는 어떻고. 아니, 무슨 할머니가 복근이 있어. 〈//〉 식스팩이야.

강소정 (강민수의 손을 찰싹 때리며) 떼라.

강민수 손아귀 힘도, 아주, 천하의 장사야.

강소정 말을 말지. (강민형에게 등을 보이고 돌아선다) 일어나요. 가.


강민수, 강소정을 와락 안는다.


강소정 그래, 네가 오늘 널 한번 뛰어 보자는 거지?

강민수 사랑합니다.

강소정 망령 나지 마라. 바로 요양원에 보내버릴 테니까.

강민수 사랑합니다.

강소정 지금 갈래?

강민수 (사이) 미안해, 누나.


잠시 정적이 흐르고, 강소정, 강민수의 손을 토닥인다.

무대 좀 더 밝아진다.

강민형의 시선이 따뜻하게 무대를 향한다.



6장


잔잔한 음악이 깔리면서 무대는 다소 어두워진다.

무대 뒷면에 두 마리의 코뿔소가 등장한다.

코뿔소는 앞에서의 사슴처럼 무대 언저리의 숲을 어슬렁거린다. 강민형의 의식 속 코뿔소들은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강민형의 눈에는 현실 세계와 의식의 세계가 중첩되어 존재한다. 강소정과 강민수가 아웅다웅하는 동안 코뿔소의 움직임 역시 경쾌하다. 강민형은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행복감에 젖는다.


강소정 너 말이야.

강민수 네, 누님.

강소정 또, 향수를 뿌렸네.

강민수 향수는 신사의 매너예요.

강소정 과하다.

강민수 과하다니요?

강소정 그 향수가 여기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강민수 향수는 장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소정 그거 아니 동생아?

강민수 뭘요?

강소정 똥 냄새나, 너한테서.

강민수 그럴 리가요?

강소정 (질색하며) 오빠가 뿌린 거름 냄새랑 섞여서. (코를 쥔다)


강민수, 강소정에게서 떨어진다.


강소정 진짜야. (사이) 셔츠는 또 갈아입었구나. 일어나자마자 새 옷을 입는 걸 봤는데.

강민수 눈썰미가 죽지 않으셨습니다. 아침에 입은 것보다 조금 연한 색일 뿐인데.

강소정 냄새가 달라, 미묘하게, 똥 냄새가.

강민수 최고급 이탈리아 향수입니다. 제르조프 〈//〉 그리티아.

강소정 입던 옷은? 빨았니?

강민수 물론! 곱게 빨래망에 넣어 뒀죠. 누님이 손빨래하기 편하시라고 제 것만 따로.

강소정 잘했구나. 안 그래도 불쏘시개가 부족했는데.

강민수 끔찍한 소리 하십니다.

강소정 2시간도 못 입는 옷, 무슨 쓸모가 있겠니?

강민수 실크로 제작한 수제 명품입니다. 세상에 한 벌뿐이죠.

강소정 그렇구나. 작별 인사라도 해 두렴. 내일이면 세상에 없는 옷이 될 테니까.

강민수 자중하시죠 부디.

강소정 그래. 그것들 다 태우고 나면 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겠지.

강민수 근데, 누님. 우리 형님께서 좋아하는 자반은 안 굽습니까?

강소정 내 정신 좀 봐. 꺼내 놓기만 하고 그냥 두고 왔네. (황급히 나가며) 오빠 바로 와요. (강민수에게) 넌 좀 있다 와서 불구경이나 하든가. 하늘하늘해서 활활 탈 것이다.


강소정, 퇴장한다.


강민수 말은. (사이) 하지 마요, 하지 마. (사이) 그랬다가는, 절연이야. 진짜야. (쫓아간다)


홀로 남은 강민형, 무대를 거닐면서 코뿔소들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본다.



7장


음악이 잦아들며, 무대 밝아진다.

코뿔소들, 어슬렁거리다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한미주, 강윤을 부축하며 무대로 등장한다.

강윤, 소파에 앉는다.


한미주 괜찮은 거야?

강 윤 괜찮아. 조금 어지러웠을 뿐이야.

한미주 오빠, 나 바보 아니야.

강 윤 괜찮다니까.

한미주 일어나. 집으로 바로 가.

강 윤 먼저 가. 바로 따라갈게.

한미주 같이 가.

강 윤 (강민형을 보며) 가.

한미주 (강윤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 고집을 누가 꺾어.

강 윤 …….

한미주 (사이) 바로 와.

강 윤 (고개를 끄덕인다)


한미주, 퇴장한다.

강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복부에 통증을 느끼는 듯 다시 앉는다.

강민형, 강윤이 있는 걸 알고 퇴장하려 한다.


강 윤 그쪽, 아닙니다.

강민형 (멈춰 서서) 가는 길은 내가 더 잘 안다.

강 윤 그러시겠죠. 하지만 그쪽은 반대 방향입니다. 아버지 집은 이쪽이죠.


강민형, 말을 무시하고 퇴장한다.

잠시 후 다시 등장해 반대쪽으로 향한다.


강 윤 왜요? 계속 가 보시죠.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언젠가는 도착할 텐데요. (킥킥댄다)


강민형 멈춰 선다.


강민형 언제 올라갈 거냐?

강 윤 (사이) 그거야, 저도 모르죠.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일주일 후가 될지 한 달 〈//〉 후가 될지.

강민형 바로 가라.

강 윤 왜요?

강민형 가, 가라면.

강 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사이) 더 있고 싶어지는데요. (고개를 뒤로 젖혀) 아시잖아요, 저, 아버지 말 듣기 싫어하는 거. 끔찍하게요.


강민형, 물끄러미 강윤을 바라보다가 나가려 한다.


강 윤 그런데 말이죠, 궁금해서 묻는 건데, (사이) 이 짓을 왜 하시는 거예요?

강민형 (발끈하며) 이 짓?

강 윤 네, 이 짓이요. (사이) 왜요, 뭔가 어감이 불손했나요? 표준어인데. 짓, 몸을 놀려 행동하는 동작, 〈//〉 이라는 의미의.

강민형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가서 짐이나 싸라.

강 윤 제가 여기에 있는 게 굉장히 신경이 쓰이시나 보네요.

강민형 네가 어디에 있든 내 상관할 바 아니다.

강 윤 그러니까요, 순간 감동할 뻔했어요. 한 20년 못 보는 사이에 혹시라도 어디가 고장 나신 건가 싶어서.

강민형 가라. 그만 가.

강 윤 뒤에 이 말을 붙이셔야죠. “가라.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


침묵.


강 윤 기억 안 나시나 보네요. 아버지가 제게 했던 말인데. (일어나 주머니에서 씨앗 같은 걸 꺼낸다) 혹시 가시박이라고 아세요? 주로 강변이나 습지에 퍼져 산다는데, 사실 어디에서도 잘 자란다고 하네요. 생명력이 아주 질겨서. 원래는 병충해에 강해 오이나 호박 접목용으로 사용하려고 수입한 제품이죠. 모르시죠? 당연히 모르시겠죠. 저도 얼마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세상에 이런 풀이 있다는 걸.

강민형 …….

강 윤 그런데, 이 가시박이 말이죠, 독이 있어요. 다른 식물들을 집어삼켜요. 잎이 굶주린 악어 아가리만큼 넓은 데다 빈 데 없이 촘촘하게 펼쳐지면서 자란다죠. 다른 풀들이 아예 햇빛을 못 받게. 나무 같은 것들은 덩굴처럼 칭칭 감아 올라가 숨도 못 쉬게 고사시키고요. 이 녀석들이 퍼진 땅에서는 몇 달 후면 다른 식물들을 볼 수 없다네요. 근사하지 않아요?

강민형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

강 윤 엄청난 생태 교란종인데, 이 왕성한 번식력을 억제할 방법이 없다더라고요. 어떤 약도 소용없고. 유일한 방법은 매일매일 뽑고 뽑고 또 뽑는 거죠.


강민형, 무대 밖으로 나가려 한다.


강 윤 이 녀석 씨앗을 여기에 뿌렸습니다.

강민형 (멈춰 서서) 뭐?

강 윤 혹시나 궁금해하실까 얘기하는 겁니다. 제가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지.

강민형 뭘 했다고?

강 윤 많이 뿌렸습니다. 몇천? 아니, 몇만 개 정도 되려나? 엄청나게 뿌렸어요. (씨앗을 하나 무대 뒤쪽으로 던진다) 지금 하나 더 뿌렸고요.

강민형 말도 안 되는 소리!

강 윤 땅을 잘 골라 놓으셔서 잘 자랄 겁니다. 상상해 보세요, 한 달 후면 이 녀석들로 온통 푸릇해지는 겁니다, 폐허 같은 이 땅이 말이죠.

강민형 거짓말하지 마라.

강 윤 (사이) 저는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진실만을 말했죠.

강민형 (사이) 지금 와서 그 얘길 다시 하자는 거냐?

강 윤 얘기를 해 본 적은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강민형 네 인생이다. 네가 알아서 살아, 남한테 폐 끼치지 말고.

강 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했던 고백이 아버지에게는 폐가 됐지요. 안 그런가요?

강민형 (사이) 묻어 둬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살다 보면.

강 윤 묻어 둔다? 누굴 위해서요?

강민형 모두를.

강 윤 역시 아버지! 당신은 여전히, 괴물이세요.

강민형 …….

강 윤 모두가 불행해졌는데 모두를 위해서였다니.

강민형 …….

강 윤 아! 아버지는 행복하셨다는 거죠? 그리고 또 한 분, 그분, 아버지 절친, 그 이름이 뭐였죠? 황, 황 …….

강민형 그 입 다물어라!

강 윤 (분노를 담아) 황익구! (짧은 사이) 황익구, 황익구, 황익구! 그 개새끼!


짧은 침묵.


강민형 몇 년 전에 죽었다.

강 윤 아, 그래요? 죽었어요? 몇 년 전이라면, 그래도 꽤 사셨네요?

강민형 …….

강 윤 서운하셨나 봐요. 얼굴에 그늘이 지시네요.

강민형 헛소리하지 마라.

강 윤 (웃으며)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강민형 다 끝난 일이야.

강 윤 네, 그렇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끝난 일이겠죠. 그러니까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저는 저대로, 각자 할 일 하면서 계속 가 보자고요. 아버지는 뽑고, 저는 뿌리고.

강민형 (폐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강 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믿는 거예요? 다 끝난 일이라고? 그래요?

강민형 …….

강 윤 좋아요. 뭐, 그러시다면. (씨를 몇 개 더 뿌린다)

강민형 (강윤을 노려본다)

강 윤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으세요. 바쁘게 사시겠다니 제가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뿐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그냥 부지런히 사시면 됩니다. 이제까지처럼, 앞으로도 쭉.

강민형 (힘없이) 뭘, 원하는 거냐?

강 윤 (크게 웃으며) 그런 거 없어요. (사이, 정색하며) 말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강민형 말해라.


강윤, 강민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강 윤 죽어 버리세요.

강민형 …….

강 윤 아무것도 이루려 하지 말고, 아무것도 남기려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최대한 빨리, 1분, 1초라도 서둘러서 그냥 죽어 버리세요. 이따위 웃기지도 않는 짓 하지 말고요.


깊은 침묵이 흐른다.


강소정 (목소리) 이 화상들아, 점심 먹으라고!


강윤, 강민형을 지나쳐 천천히 걸어가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강민형,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강윤이 사라진 쪽으로 퇴장한다.



제2막


8장


어스름한 저녁.

서편 하늘이 검붉게 물들어 있다.

무대, 밝아진다.

강민수, 천천히 걸어 나와 멈춰 서서 누군가를 찾듯이 폐허를 둘러본다.

잠시 후 한미주, 뒤따라 등장한다.


한미주 있어요?

강민수 아니.

한미주 그럼, 숲 안쪽에 있을 거예요.

강민수 어디?

한미주 찾아봐야죠.

강민수 (사이) 짐승들이나 숲에 숨는 법인데.

한미주 …….

강민수 저기 있는 건 누구냐?

한미주 누구요? (사이) 큰외삼촌 같은데요.

강민수 눈이 아주 쌩쌩하구나. 저 멀리까지 보이고.

한미주 저라고 보이겠어요 저게? 큰외삼촌 말고는 여기에서 저러고 있을 사람이 없으니까.

강민수 그렇구나. 윤이는 아니고?

한미주 오빠가요? 절대 그럴 일 없죠.

강민수 (한미주를 빤히 바라본다)

한미주 왜요?

강민수 윤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냐?

한미주 네?

강민수 뭐냐?

한미주 없어요 그런 거.

강민수 말해 봐. 혹시라도 내가 도울 일 있나 싶어서 그래.

한미주 아시잖아요, 윤이 오빠 그런 거 질색하는 거.

강민수 아니까 너한테 묻고 있지.

한미주 저도 불편해요. 그냥 삼촌이 직접 물어보세요.

강민수 내가 불편한 게 아니고?

한미주 네?

강민수 네가 날 좋아하지 않는 거 알고 있다.

한미주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삼촌 존경하는데요.

강민수 존경하는 거랑 좋아하는 건 다르지.

한미주 …….

강민수 그 침묵은 꽤 아픈데.

한미주 솔직히 삼촌, 싫지 않아요. 그런데, (사이) 좋지도 않아요.

강민수 우리가 남이냐?

한미주 가 볼게요. 엄마 성질 아시잖아요. (중얼거리듯) 이 오빠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강민수 그때 일 때문에?

한미주 네?

강민수 그때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서? (사이) 알잖니, 그땐 그럴 수밖에 〈//〉 없었다는 걸.

한미주 삼촌.

강민수 그래.

한미주 지금 그 얘기를 왜 하시는 거예요?

강민수 그때 이후 네가 변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살가웠던 조카가 말이다.

한미주 …….

강민수 그때는 뉴욕으로 가야만 했어.

한미주 알아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강민수 나 같은 광고쟁이에게는 더할 수 없는 제안이었지, 기회였고.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었어.

한미주 저 이 이야기 안 하고 싶은데, 그만 가면 안 될까요?

강민수 미주야. 나는 곧 이 나라를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고. 그곳에서 죽겠지.

한미주 …….

강민수 나는 내가 바라던 모든 걸 이뤘다. 전 세계인이 내가 만든 광고를 봤어. 내가 만든 15초의 영상에 환호하고, 울고 웃었다. 황홀한 세계야, 광고라는 건.

한미주 …….

강민수 그런데 너는, 내가 이룬 모든 영광이 하찮다는 듯, 아니, 나라는 존재가 너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는 듯 나를 외면했어.

한미주 제가 삼촌한테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어요?

강민수 너는 내 조카다. 안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니?

한미주 (긴 한숨을 쉬며) 삼촌.

강민수 그래.

한미주 삼촌이 무슨 생각을 하시든 저는 상관 안 해요. 그러니까 삼촌도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하지 마세요. 그러면, 삼촌도 편해지실 거예요.

강민수 (발끈하며)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거냐 네게?

한미주 잘못하신 거 없어요. (사이) 그냥 전 알아버린 거예요.

강민수 뭘 말이냐?

한미주 그날 그러셨잖아요. 세상을 쉽게 보지 말라고. 고등학생이 됐으면 이젠 응석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고.

강민수 그건 다 널 위해서.

한미주 저희 엄마를 위해서였겠죠.

강민수 …….

한미주 왜 다들 그러는 거죠? 왜 모두들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서는 널 위해서라는 둥, 진심은 그렇지 않다는 둥. 삼촌은 그때 대체 뭘 그렇게 절 위해 주셨을까요? 그때 제가 필요했던 건 위로와 위안이었어요. 그리고 어른으로서, 제가 믿고 있던 단 하나뿐인 제 편으로서, 삼촌이 엄마를 설득해 주기를 바랐어요. 미주는 머리가 좋으니 공부를 계속 시켜라. 그런 말 한마디만 해줬으면 됐잖아요. 삼촌 말이라면 엄마는 어쨌든, 들어줬을 테니까. 그뿐이었다고요.

강민수 (당황하며) 나는 몰랐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했을 줄, 네가 그렇게 절박했을 줄.

한미주 (고개를 흔든다) 아셨잖아요, 제가 얼마나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겠죠. 그때 삼촌은 자기 인생 말고는 아무 관심도 없었으니까.

강민수 그건 오해야.

한미주 기억하세요? 몇 년 후에 어른이 되면 뉴욕으로 오라고 하셨던 거. 모든 걸 준비해 두겠다면서.

강민수 …….

한미주 웃기지 않아요?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구명보트가 아니라 어딘가에 있는 보물섬을 알려 준다는 게.

강민수 네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네가 잘못되기를 바라지 않아. 네 〈//〉 엄마는…….

한미주 그만하세요. (사이) 엄마 얘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요.

강민수 …….

한미주 삼촌, 설령 제가 오해를 했다 하더라도요, 저 정말 더 듣고 싶지 않아요. 아주 오래전 일이잖아요.

강민수 미주야.

한미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달라질 수도 없고요. 너무 멀리 왔어요, 되돌아보기에는.

강민수 …….


한미주, 처연한 표정으로 폐허를 바라본다.


한미주 근데, 삼촌, 봐요. 여긴, 정말, 황량하네요. 꼭,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지 않아요?


강민수, 한미주의 시선을 따라 폐허를 응시한다.



9장


조명, 따스한 빛깔로 바뀐다.


한미주 들어가세요. 윤이 오빠 찾아서 저도 들어갈게요.

강민수 미주야.


한미주,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바로 퇴장한다.

강민수,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다.

잠시 후, 강윤 등장한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걷고 있다. 그러나 강민수를 발견하고는 몸을 추스른다.

강민수, 강윤을 발견하고 놀란다.


강민수 기척 좀 하고 다니자.

강 윤 목에 방울이라도 달고 다닐까요?

강민수 (지친 듯) 방울이 아니라 이미 가시를 박았구나.

강 윤 가시라니요? 제가 거슬리는 것 같아 드린 말씀인데요.

강민수 내가 왜 너를 거슬려 하겠냐?

강 윤 (능청스럽게) 아니었어요? (사이) 아니었다면 사과하고요. 사과할까요?


강민수,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강윤을 바라보다 의자에 앉는다.

강윤, 무대를 가로질러 나가려 한다.


강민수 오다 미주 못 봤냐? 너 찾으러 숲으로 들어갔다.

강 윤 (숲을 바라보고는) 돌아오겠죠, 애도 아니고.

강민수 다시 찾으러 갈 거 아니면 여기에서 기다리기라도 해라.

강 윤 대신 전해 주세요. 피곤해서 먼저 집으로 갔다고.

강민수 나는 네 아버지를 데리러 갈 거다. 그러니 네가 여기에 있도록 해.

강 윤 (사이) 그러죠.


강윤, 천천히 걸어와 소파에 앉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강민수 어디가 아픈지 말해 봐.

강 윤 소화불량이죠. 강씨 집안 내력이요.

강민수 참새보다 적게 먹던데, 그 정도도 소화 못 시키면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거다.

강 윤 제가 알아서 합니다.

강민수 (사이) 회사는? 팀장이 이렇게 회사를 비워도 돼?

강 윤 인생 짧다, 할 수 있을 때 있는 힘껏 엔조이해라. 삼촌 입버릇이셨잖아요?

강민수 (사이) 왜 그만둔 거냐?

강 윤 (긴 사이) 은퇴하시더니 많이 한가하신가 봐요.

강민수 네 회사 전무이사가 내 후배다. 넌 몰랐겠지만.

강 윤 알죠, 광고계 바닥 좁은 거. 그래도 참 대단하시네요. 아직까지 그렇게 돈독하시다니. 한때 뜨거우시기라도 했었나요? (킥킥댄다)

강민수 회사에서 휴가를 제안했다던데. 거절했다면서?

강 윤 그 늙은 코요테가 그래요?

강민수 정말, 어디가 안 좋은 거면 병원에 가라. 아는 친구가 병원장이다.

강 윤 (말을 자르며) 그 인맥 참 부럽네요. 근데, 필요 없습니다. 너무 건강해서 탈이니까요.

강민수 네 몰골을 봐라, 누가 그 말을 곧이 믿겠는지.

강 윤 (사이) 언제 제 꼴이 못마땅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요? 신경 꺼 주시죠.

강민수 (버럭 성질을 내며)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냐?

강 윤 …….

강민수 (사이) 너, 미주, 미혜, 민우. 고작 넷뿐인 조카 녀석들이 나를 마치 유령 취급하고. 이젠 정말 마지막일 텐데, 나가기 전에 보자고 했더니 하는 말이, 볼 수 있으면요,라더라, 미혜가. 볼 수 있으면요,라니. 민우 녀석은 전화를 받지도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며) 뭔가 단단히 꼬이기는 한 모양이구나 다들. (한숨을 내쉬며) 인생, 참 허망하다.

강 윤 평생을 새처럼 자유롭게 사셔 놓고 이제 와서 뭐가 아쉬워지셨어요?

강민수 자유롭게 산 게 잘못이었다고?

강 윤 그럴 리가요. 삼촌이 행복하셨으면 됐죠.

강민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강 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삼촌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건 저뿐일 겁니다.

강민수 (사이) 그래. 나도 너만큼은 좋아지지 않았다.

강 윤 새삼스러울 것도 없죠.


강민수, 강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기다, 다시 멈춰 선다.


강민수 최필립이라고?


강윤, 동요한다.


강민수 아니지?

강 윤 그 회사에 아직도 헛소문이 도나 보네요.

강민수 그럼 회사는 왜 그만둔 건데?

강 윤 삼촌만큼이나 그 코요테가 싫었거든요.

강민수 (사이) 그러면 됐다. (혼잣말처럼) 그래, 그러면 안 되지, 안 되는 거야.

강 윤 (사이) 뭐가 안 된다는 말이에요?

강민수 순리, 섭리라는 게 있는 거니까.

강 윤 볼트는 너트에 끼워야 한다, 뭐 그런 이야기요?


강윤의 표정에 경멸감이 서린다.

강윤, 웃기 시작한다.

웃음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가 어느 순간 흐느낌처럼 들린다.

그러다 웃음이 갑자기 뚝 끊기고, 강윤, 절규하듯 큰소리를 지른다.


강민수 (절망적으로) 윤이, 너, 어쩌다가 이렇게 변해버린 거냐?

강 윤 어쩌겠어요? 태생부터 천박한 반편이었던 걸.

강민수 아니다, 넌 아니야. 내가 기억하는 너는 네 어머니를 위해 헌신하고 〈//〉 희생하고.

강 윤 (순간적인 분노를 억누르며) 돌아가신 분을 이 이야기에 끌어들이지 마세요.

강민수 네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네가 〈//〉 이래서는 안 돼.

강 윤 (흥분하며) 삼촌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어머니를 입에 올려요? 평생을, (사이) 평생을 어머니를 벌레 보듯 해 온 사람이.

강민수 그게 무슨 말이냐?

강 윤 무시하고 피하고 경멸하고.

강민수 내가 네 어머니한테 그랬다고?

강 윤 단 한 번이라도 불러 본 적 있으신가요, 형수라고?

강민수 …….

강 윤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일수록 나쁜 기억은 깊은 우물 속에 가라앉혀 둔다죠. 잘 생각해 보세요.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르실 겁니다.


침묵이 흐른다.

그사이 한미주 무대 한쪽에 모습을 드러낸다.

강민수, 천천히 다른 쪽으로 걸어간다.


강 윤 그런데요, 삼촌.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지금껏 저를 천박하다고 생각해 본 적, 정말 한 번도 없으세요? 그냥 궁금해서요. (사이) 단 한 번도 제게 손을 내밀어 본 적 없으시잖아요. (신경질적으로 킥킥댄다) 어쩌나요, 이렇게 부끄러운 조카여서.


강민수, 괴로운 표정으로 강윤을 바라보다가, 퇴장한다.

강윤, 강민수가 사라지자 웃음을 뚝 그친다.



10장


조명이 조금 어두워진다.


강 윤 (멀뚱히 서 있는 한미주를 보고는) 앉든가, 가든가.

한미주 가야지. 엄마한테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한미주, 천천히 강윤의 옆자리에 앉는다.

무대 뒤쪽으로 천천히 석양이 짙어진다.

한미주,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본다.


한미주 옛날 생각난다, 오빠. 기억나? 나 스무 살 땐데.

강 윤 기억이 나겠니? 지금 네가 서른다섯인데.

한미주 거기 이름이 뭐였지? 우리 자주 가던 이태원 펍? 뭐였더라, 뭐였더라.

강 윤 비사이드.

한미주 그래, 비사이드. 그 이름이 생각이 안 나니. 나도 참.

강 윤 그게 뭐 좋은 기억이라고.

한미주 거기 참 신기한 사람들 많았는데. (빤히 자신을 보는 강윤을 발견하고는) 아! 미안. (웃으며) 그래도 그때 좋았어 나.

강 윤 너만 좋았겠지. 네 주정 받아 주던 나는 힘들었어.

한미주 거짓말.

강 윤 진짜로.

한미주 쳇.

강 윤 그때 너 업고 다니느라 나간 허리가 아직이다.

한미주 내가 그때 술을 조금 마시긴 했지.

강 윤 조금?

한미주 조금 많이.

강 윤 아주 많이. 굉장히 많이. 엄청 많이.

한미주 뭘 또 그렇게 많이 마셨다고 내가. 그래서? 이젠 나랑 안 마시겠다고?

강 윤 오빠 술 끊었는데.

한미주 나 마시는 동안 옆에 있어 줄 수는 있잖아?

강 윤 다른 사람 알아봐라 이제. 다 늙은 오빠는 그만 귀찮게 하고.

한미주 귀찮다니. 들려 오빠? 내 마음에서 애정이 막 사라지는 소리?

강 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한미주 (뾰로통한 표정으로) 혼자 마셔야겠다 앞으로는.


한미주, 소파에서 몸을 움직여 다리를 모아 양손으로 그러모으고는 다시 무대 뒤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한미주 다시는 못 돌아가겠지?

강 윤 돌아가고 싶어?

한미주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이) 아니, 그래도 가끔은 그랬으면 싶기도 해.

강 윤 왜?

한미주 그냥. (사이) 생각해 보면 그땐 말이야, 울고 싶을 때 맘껏 울 수 있었던 것 같아.


잠시 침묵이 흐른다.


강 윤 (따스한 표정으로) 미주야!

한미주 응?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강 윤 괜찮아질 거야, 넌.

한미주 뭐야, 갑자기?

강 윤 괜찮을 거라고.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한미주 (울컥해진 표정으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강윤의 시선을 피한다) 뜬금없게. (가만히 무대 앞을 응시한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 뭐야 이게. (웃으며 눈물을 닦아낸다) 갑자기, 이게 무슨. 별일도 다 있다 오빠. 이런 일도 있네. 웃기다.


강윤, 옆으로 다가가 미주의 어깨를 팔로 감싼다.


강 윤 행복해질 수 있어. 넌 행복해질 수 있어.


한미주, 강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한동안 말이 없다.

붉은 석양이 짙어지면서 숲의 어딘가에서 동물들의 소리가 커진다. 새의 지저귐, 곤충, 풀벌레 소리, 동물들의 울음소리. 마치 어딘가에서 놀고 있는 자식들을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시 후 진정된 듯, 한미주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든다.

강윤, 한미주의 어깨를 정답게 토닥인다.


한미주 오빠.

강 윤 그래.

한미주 나 오빠한테 할 말 있는데.

강 윤 (사이) 또 뭘 잘못했는데?

한미주 티 나?

강 윤 나.

한미주 화 안 낸다고 약속해 줘.

강 윤 안 낼게.

한미주 낼 것 같은데.

강 윤 그 정도 일이야?

한미주 그 정도는 아닌데, (중얼거리듯) 그 정도 일인 것 같기도 하고.

강 윤 뭔데? 빨리 말해.

한미주 필립 씨.

강 윤 …….

한미주 여기로 지금 오고 있어. 내가 주소 알려 줬어.

강 윤 …….

한미주 오빠도 내 입장이 되어 봐. 그 사람, 하루에 전화를 스무 통 넘게 한다고.

강 윤 죽었다고 하지 그랬어.

한미주 못됐다. 동생한테 할 말이 따로 있지.

강 윤 전화해, 오지 말라고. 오늘 떠났다고 해.

한미주 못해, 난. 하고 싶으면 오빠가 직접 해.

강 윤 …….

한미주 대체 왜 이래? 필립 씨한테 미안해서 그래?

강 윤 그런 거 아니야.

한미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그 이유인데. 그런데 오빠,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강 윤 …….

한미주 그리고 오빠 수술 더 미루면 안 된대.

강 윤 수술 안 할 거야.

한미주 왜?

강 윤 마음이 변했어.

한미주 왜 마음이 사는 쪽에서 죽는 쪽으로 변한 건데?

강 윤 누가 죽어? 나 안 죽어.

한미주 사실은 오빠, 내가 필립 씨한테 와 달라고 했어. 당장 와 달라고.

강 윤 …….

한미주 신장 이식 수술이, 그게 뭐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건 줄 알아? 내가 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을 거야. 그런데 필립 씨가 된다잖아. 맞는다잖아. 이게 보통 인연이야? 대체 뭐가 문제야?

강 윤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 헤어졌어.

한미주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강 윤 헤어졌어.

한미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일 해줄 수 있는 거잖아. 사랑하는 사람한테 신장 받을 수 있는 거야, 오빠. 서로 사랑했잖아. 〈//〉 지금도 사랑하잖아.

강 윤 결혼할 거야.

한미주 뭐?

강 윤 결혼할 거라고. 아이도 낳을 거야. 둘 정도. 여자아이 하나,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둘이어도 좋고.

한미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강 윤 (긴 사이) 아침에 아이가 잠에서 깨면 이마에 뽀뽀를 해줄 거야. 졸음 가득한 눈을 손등으로 비비면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코끝으로 아이의 볼을 비빌 거야. 조그만 수저로 종달새 같은 아이의 입에 밥을 넣어 줄 거고, 유치원 가는 길을 걸으며 함께 낙엽을 밟을 거야. 아이가 울면 내가 더 울고 아이가 웃으면 함께 웃어 줄 거야. 아이가 잠들 때까지 그림책을 읽어 줄 거야. 슬픈 이야기 말고 기쁜 이야기, 놀라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줄 거야. 행복한 꿈을 꿀 수 있게. 하루에 스무 번씩 아이를 힘껏 안아 줄 거야. 그보다 더 많이 사랑한 다고 말해 줄 거야.

한미주 …….

강 윤 이제, 평범하게 살아갈 거야.


침묵이 흐른다.

한미주, 천천히 다가가 강윤을 끌어안는다.


한미주 알아, 오빠. 그거, 필립 씨와 하고 싶은 거잖아.

강 윤 …….

한미주 할 수 있어. 오빠, 할 수 있어. 오빠가 말했잖아. 나, 행복해질 수 있다고. 오빠도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수술부터 받자 오빠.


강윤, 홀로 무대를 거닌다.

한미주,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강 윤 이젠, (사이) 지쳤어.



11장


숲 너머 멀리 몇 개의 가로등이 켜지면서, 무대가 조금 밝아진다.

강윤, 걸음을 옮기려다 통증을 느끼고 괴로워한다.


한미주 (다급하게 강윤에게 다가가며) 괜찮아?


강윤, 손짓으로 한미주를 저지한다.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차츰 안정을 찾는다.

강소정, 무대로 등장한다.


강소정 내 말이 아주 똥이지?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누구 하나 들어 처먹지들 않을 리가 없지.

강 윤 …….

강소정 밥 한 끼 같이 먹는 게 종일 밭 매는 것보다 더 고달파요, 아주. 너는 사람 찾으러 보낸 게 언젠데 지금도 이러고 있어?

한미주 지금 가려던 참이었어요.

강소정 아유, 그러셨어요? 근데 몇 명이 안 보이는데요?

한미주 둘째 외삼촌이 지금 모시러 가셨어요.

강소정 집안 위계가 아주 엉망진창이야. 젊은것들은 설렁설렁, 늙은 인간들만 종종거리지.

강 윤 고모, 저도 마흔다섯이에요.

강소정 그러시군요, 우리 조카님. 난 칠십하고도 여섯이다. 그래서?

강 윤 …….

강소정 내가 네 탯줄 잘랐어. 네가 태어나서 처음 울었을 때 내가 옆에 있었단 말이다. 건방지게 누구 앞에서 나이 타령을. 넌 나한테 영원한 핏덩어리야. 어른 대접 받고 싶으면 다른 데 가서 알아봐.

강 윤 …….

강소정 (한미주를 향해) 집에 가 봐. 곰국 끓이고 있는 거 잘 살펴보고 있어. 불 안 꺼지게.

한미주 네네. 가요 오빠.

강소정 윤이는 잠깐 있어 봐라.

강 윤 …….

강소정 뭐 해, 빨리 안 가고.

한미주 네네.

강소정 대답은 한 번만.

한미주 네네.


한미주, 머뭇거리며 강윤을 바라본다.

강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미주, 강소정을 향해 입을 삐죽인 뒤 퇴장한다.

강소정, 폐허를 돌아본다.


강소정 (소리친다) 아, 어여 좀 와요. 오빠! 민수야! (사이) 안 들리나 보네. (자리에 앉는다) 아휴, 힘들다. 미주가 무슨 얘기라도 하든?

강 윤 무슨 얘기요?

강소정 그냥, 이런저런.

강 윤 …….

강소정 아휴. 팔자도 나처럼 팍팍한 팔자가 있을까. 부모 복 없고 남편 복 없으면 자식 복이라도 있어야지. 그래도 늘그막에 손주들 좀 안아 볼까 싶었는데. (사이) 들었지?

강 윤 네.

강소정 그래, 미주가 너한테 얘기 안 했을 리가 없지. 제 엄마보다 끔찍하게 여기는 사촌오빤데.

강 윤 미주가 고모 걱정 많이 해요.

강소정 걱정은 무슨. 앓느니 죽는다 내가. 이혼이라니. 사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구겨지면 대충 구겨진 대로 사는 거지. 유별난 년 같으니. (길게 한숨을 쉰다) 지겨워, 이 더러운 놈의 팔자.

강 윤 …….


멀리서 쇠로 돌을 내리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한동안 주기적으로 들리다가 어느 순간 멈춘다.


강소정 뭔 소리야 이게? 계속 서 있을 거야? 올려다보는 거 고개 아파.

강 윤 천천히 가고 있을게요, 쉬었다 오세요.

강소정 앉아 봐. 할 얘기 있어.


잠시 침묵이 흐르고, 강윤, 자리에 앉는다.


강소정 엄마한테는 다녀왔어?

강 윤 …….

강소정 아직도?

강 윤 가야죠.

강소정 언제? 너 여기 내려온 지 벌써 한 달이야.

강 윤 조만간에요.

강소정 갈 때 얘기해. 술하고 포 좀 챙겨서 줄 테니까.

강 윤 살아 계실 때 술 한 잔 입에 못 대신 분이에요.

강소정 죽은 사람한테 빈손으로 가는 거 아냐. 그리고 네 엄마, 막걸리는 곧잘 했어. 비 오면 나랑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강 윤 그랬나요?

강소정 그랬어. 뭘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기는. (한탄하듯) 자식새끼들이 이래서 하나 소용이 없다니까.

강 윤 제가 어머니에 대해 모르는 게, 이상해요?

강소정 (사이) 청양고추 숭숭 썰어 넣은 파전도 좋아했다. 갓 딴 쑥에 호박 넣은 부침개도 좋아했고. 고추장으로 간한 가죽전을 특히 좋아했어.

강 윤 그만두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강소정 기억하라고 하는 얘기야. 네 엄마가 그랬다고.

강 윤 허깨비 같은 이야기.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강소정 네 엄마다. 다른 사람 엄마 아니고.

강 윤 놀라운데요. 그렇게 생각한 건 저 혼자뿐인 줄 알았거든요.

강소정 네 엄마를 네가 기억해야지, 누가 기억하니?

강 윤 하지 마세요. (사이) 하지 마시라고요, 그런 말.

강소정 (사이) 안 해, 안 해. 나중에 제발 해 달라고 해도 안 해줄 거야. (일어나려는 강윤을 보며) 앉아, 아직 할 얘기 남았어.

강 윤 어머니 얘기라면 듣고 싶지 않아요.

강소정 앉아, 다른 얘기야. 앉으라니까. (긴 사이) 네 아버지, 호스피스에 모셔야겠어. 황소 같은 고집, 꺾을 수가 없어서 이제껏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저렇게 놔두고 있었는데, 이제 더는 안 되겠어. 그렇다고 강제로 끌고 가면 네 아버지 성격에 혀라도 깨물 거다. 그러니까, 네가 잘 얘기해 봐.

강 윤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지금?

강소정 진통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헛것도 자꾸 보는 것 같고. 저러다 정신까지 놔버리면 어쩌나 싶어 내가 요즘 밤에도 눈이 감기지가 않아. 미주가 잘 아는 호스피스 병원이 있다더라. 네가 좀 설득해 봐라. 아니, 어떻게든 설득해봐.

강 윤 제가, 왜요?

강소정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 얘기는 듣지 않겠니? 사람이 변할 수도 있잖아.


강윤, 허탈하게 웃는다.


강소정 네 아버지, 얼마 못 살아. 사람 꼴이야 저게? 산송장이야 산송장.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긴 사이) 어떻게든 마지막은 안 아프게 해주고 싶어서 그래 내가. 평생을 힘들게 살지 않았니, 네 아버지.

강 윤 그것 때문에 저한테 연락하셨어요?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에도 전화 한 통 안 하셨던 분이?

강소정 (외면하며) 그때는 다들 경황이 없었으니까.

강 윤 그렇군요. 경황이 너무 없어서 상주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군요.

강소정 왜 그랬는지 너도 잘 알잖니.

강 윤 잘 알죠. 고모가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는 오빠분이 원하셨겠죠.

강소정 어쩌겠니, 네 아버지가 그런 사람인걸.

강 윤 참 뻔뻔하세요.

강소정 뻔뻔?


강소정, 빤히 강윤을 바라본다.


강소정 네 엄마가 풍으로 쓰러지고 꼬박 1년을 자리보전했다. 그 수발 다 내가 했어. 너는 그때 뭐 했지?

강 윤 왜 연락하지 않았는데요?

강소정 했으면? 뭐가 바뀌었을 것 같고? 네가 와서 모셔가기라도 했을 거라는 거냐? 불쌍한 네 엄마 버리고 뛰쳐나간 건 바로 너다.

강 윤 …….

강소정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부족하지는 않게 돌봤다, 남들이 봐도 부끄럽지 않게. (사이) 이제 와서 무슨 공치사를 하자는 거 아니고. 해도 해도 부족하긴 했을 거야. 형님이 머리가 부족했지, 심성은 착했으니까. 내 마음이 늘 편치는 않았어. 하지만 네가 나한테 뻔뻔하다는 얘길 하면 안 되지. 그럴 수는 없는 거야. 그건 나를 모욕하는 거야. (사이) 그리고 네 아버지, 이유야 어찌 됐든 너한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보다도 못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세상 하나밖에 없는 오빠야. 우리 오빠, 내가 편안하게 보내주고 싶다는 게, 그게 그렇게 뻔뻔한 일이냐? 이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20년 전에 집 나간 아들에게 탁하는 것밖에 없는데, 그래서 그걸 하겠다는데, 그게 누구한테 손가락질 받을 일이야? 그래?


침묵이 흐른다.


강소정 그래,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너도 맘 편하게 살아오지는 않았고, 그걸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근데 말이야, 윤아. 나는 우리 오빠한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할 수 있어.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들 수도 있어. 진짜야, 그냥 말만 하는 거 아니야. 세상 사람 다 죽어도 우리 오빠만 살아나면,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할 거야. 진짜야. (사이) 뻔뻔하다고? 그래, 나 뻔뻔하다. 그래서 뭐? 어쩔 거냐?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니야?


강윤과 강소정의 눈빛이 마주친다.

긴 침묵이 흐른다.


강 윤 알고 있죠 고모도?

강소정 뭘 말이냐?

강 윤 황익구.

강소정 …….

강 윤 그날 일, 알고 있죠?

강소정 …….



12장


요란한 새소리, 짐승들의 소리가 들린다.

다급하게 강민형을 부축하며 등장하는 강민수.

강민수의 셔츠 소매가 찢어져 있다.

찢어진 소매는 강민형의 머리에 둘려 있다. 피로 붉게 물든 채.


강민수 누나! 119! 119!

강소정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누가 그랬어?

강민수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요? 구급차 부르라고요.

강민형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내려다오.

강민수 바로 집으로 가요.

강민형 잠깐 앉자.

강민수 가요, 바로.

강민형 괜찮아.

강소정 그래, 우선 여기로, 여기 앉혀. 조심, 조심, 조심.

강민수 아, 거참. 비켜 봐요.


강민형, 소파에 깊이 몸을 묻고 숨을 몰아쉰다.

낮고 웅장한 음악이 흐른다.

배우들의 목소리는 음악에 서서히 묻힌다.

무대, 점점 어두워지며 강민형에게만 조명이 집중된다.


강소정 오빠 왜 이래? 어쩌다 이래? 왜 그러냐니까?

강민수 돌 파편이 튀어서. 아, 전화 안 하고 뭐 해요?

강소정 그래, 전화, 전화. 집에 두고 왔는데. 윤아, 전화 없냐?

강민형 괜찮다니까.

강민수 전화 없어 윤아?

강 윤 (물끄러미 강민형을 주시하고 있다)

강소정 (소리친다) 미주야, 미주야!

강민수 윤아!

강소정 미주! 한미주!

강민수 누나, 좀, 〈//〉 조용히.

강소정 내가 뛰어갔다 올게. 있어, 〈//〉 여기.

강민수 뭐라고요 형님?

강소정 왜? 왜?

강민수 네?

강민형 민우야, 유정아.


강소정과 강민수, 당혹해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13장


무대 뒷면으로 조명이 켜지면서 두 마리의 코뿔소가 등장한다.

강민형,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들과 함께 무대를 거닌다.


강민형 민우야, 네 동생한테 그만 좀 재잘대라고 해라. 종달새처럼 종알종알,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그래, 막내는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어. 조금만 더 힘내자. (사이) 그럼, 곧 배불리 먹을 수 있지, 고등어를 구워서 하얀 쌀밥 위에 큼지막하게 얹어서 먹을 수 있지. 약속할게. 형아만 믿어, 오빠만 믿어.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강민형 너희들, 손 꼭 잡아야 해.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놓으면 안 돼. 알겠지? 그래, 착하지 내 동생들. 그래, 우리 민우, 잘한다. 유정이 손 꼭 잡고 있어. 다른 곳에 한눈팔고 뛰어가지 못하게. 멀리 가면 절대로 안 돼, 알겠지? 그래, 그래. 알겠다니까. 민수는 형이 잘 안고 있을 거야, 걱정 마. 착하다 우리 민우. 그래, 민우는 민수 형이니까, 그래, 그래.


고조되는 음악.

낮게 나는 비행기의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진다.

종을 등불처럼 든 소년의 그림자가 무대 뒷면으로 서서히 등장한다.

종은 낮은 소리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울린다.

강민형,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순간 묘한 정적이 흐르고 종소리만이 울린다.


강민형 얘들아, 이쪽으로, 이쪽으로 와. (사이) 민우야, 유정이 데리고 이쪽으로 와. 어서.


폭발음과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동시에 터진다.


강민형 민우야! 유정아!


거대한 소요.

코뿔소들, 뿔뿔이 흩어져 비틀거리다 쓰러진다.

강민형, 무대 앞으로 달려 나와 코뿔소 중 하나를 품에 안는다.


강민형 (절규하듯) 안 돼. 안 돼.


무릎을 꿇고 절망한다.


강민형 (점점 꺼져가는 목소리로) 안 된다. 안 돼. 안 돼.


잦아드는 소요.

코뿔소들 주위로 다가가는 종을 든 소년. 그들에게 다가가 종을 흔든다.

서서히 일어나는 코뿔소들.

소년이 종을 흔들며 앞장서자 코뿔소들, 그 뒤를 따른다.


강민형 거기로 가면 안 된다. 그이를 따라가면 안 돼.


메아리처럼 울리다가 잦아드는 소리들.

그리고 잠시 후 완벽한 어둠이 찾아온다.

강민형의 흐느낌이 길게 이어지다가 점점 멀어진다.



14장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리면서 무대 밝아진다.

강민형, 허망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강소정 오빠, 오빠! 정신 좀 들어요?

강민수 형님, 형님! 안 되겠어. 업혀요.

강소정 네가 무슨. 윤아, 이리 와서 네 아버지 좀 업어라.

강 윤 (순간 움찔하며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선다)

강민수 안 돼요, 윤이는.

강소정 너보다는 윤이가 낫지. 어서, 윤이야.

강민수 안 된다니까요 윤이는. 어서, 업혀요, 업혀.

강민형 (강민수를 밀어내며) 괜찮다. 나 괜찮아.

강민수 형님.

강소정 오빠! 오빠 나 누구야?

강민형 나 아직 망령 안 났다.

강소정 말해 봐요 어서.

강민형 네 누나 왜 이러냐, 민수야?

강민수 정신 들어요?

강민형 정신이 들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나 멀쩡하다.

강민수 아니, 좀 전에 〈//〉 형님.

강소정 누구냐니까?

강민형 얘가 자꾸 왜 이래. 누구긴. 소정이지. 우리 셋째.

강소정 아이고, 조상님들아.

강민수 병원 가요 형님.

강민형 병원은 아픈 사람이나 가는 데야.

강소정 가요, 병원. 오빠 아프다고.

강민형 소리 좀 치지 마라. 사람이 코앞에 있는데 왜 그렇게 악을 써. 귀먹은 사람처럼.

강소정 내가 지금 악 안 쓰게 생겼어요? 초상 치르는 줄 알고 얼마나 식겁을 했는데.

강민형 쓸데없는 소리.

강소정 쓸데없는 소리라니. 피가 이렇게 흥건한데.

강민형 아직은 안 죽는다.

강소정 오빠!

강민형 돌 파편에 좀 긁힌 거야. 수선 떨 거 아니야.

강민수 정말 괜찮은 거예요 형님?

강민형 괜찮다니까.

강소정 괜찮다 괜찮다, 평생을 그 소리지.

강민형 괜찮아.

강소정 그 소리 좀 그만하라니까. 아주 지겨워죽겠어.

강민형 (빙그레 웃으며) 지겨워도 좀 참아. 얼마 안 남았잖아.

강소정 (어이없는 표정으로) 속 뒤집는 소리는 아주, 선수지. (사이) 이놈의 밭뙈기, 내일 당장 사람 불러서 콘크리트로 싹 덮어버릴 거야.

강민형 (무시하며) 옷이 엉망이 됐구나.

강소정 정말이에요, 진짜 그렇게 해요.

강민수 아, 내 명품. 비싼 건데. 돈 줘요, 형님 때문에 그런 거니까.

강민형 그래, 내, 돈 줄게, 새 걸로 하나 사.

강소정 지금 그깟 천 쪼가리가 뭐가 중요하다고.

강민수 어허! 지금 신사들이 긴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레이디는 좀 물러나 주시죠.

강소정 이 화상, 언제 철들어, 대체 언제 철이 들어. (멀찌감치 서 있는 강윤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린다)

한미주 (목소리) 식사들 하세요! 준비 다 됐어요.

강소정 아주 온 사방에 화상들 천지야, 천지. 못 살겠다 못 살겠어.


무대, 어두워진다.



제3막


15장


무대, 밝아진다.

멀리 달이 떠 있다.

부엉이 소리,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장작을 한 움큼 들고 등장하는 한미주. 장작을 내팽개치듯 내려놓는다.

두꺼운 침낭을 들고 뒤따라오는 강소정.


강소정 살살, 살살. 너는 왜 그리 조심성이 없냐?

한미주 엄마. 장작이에요, 나무, 그것도 죽은 나무. 얼마 안 있으면 재가 될 거고요.

강소정 다 너 위해서 하는 소리야. 너 다칠까 봐.

한미주 그렇게 저를 끔찍하게 생각하신다면, 제발 집에서 주무시라고 하세요. 매일 밤마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거예요?

강소정 잠이 오지 않는다잖니, 네 큰삼촌이, 사방 막힌 데에서는. (침낭을 소파에 내려놓는다)

한미주 그게 말이 돼요?

강소정 왜 말이 안 돼?

한미주 엄마는 그게 이해가 돼요?

강소정 뭐가 이해가 안 돼?

한미주 말을 말아야지.

강소정 왜? 계속해 보지.

한미주 됐네요.

강소정 변호사면 뭐 해, 헛똑똑이지 헛똑똑. 사는 게 뭔지 알아 네가?

한미주 (사이) 다 됐죠? 전 갑니다.

강소정 어디를?

한미주 어디긴요? 안 자요 저는?

강소정 불 피워라. 저쪽 가서 마른 가지 좀 주워 와 봐. 지푸라기 같은 것도 찾아서 가져오고.


한미주, 빤히 강소정을 바라본다.


강소정 어서. (사이) 왜? 또 뭐가 못마땅한데?

한미주 아니에요.

강소정 뭐?

한미주 아니라고요, 아무것도.


한미주, 무대 밖으로 나간다.

강소정, 이부자리를 정리하다 멈추고 소파에 앉는다.


강소정 (혼잣말로) 자식이 벼슬이야. (허공을 응시하며) 엄마. 아버지.


강민형, 등장한다.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다.


강민형 뭐 하고 있어?

강소정 뭘 벌써 나와요? 밥 먹은 지 얼마 됐다고.

강민형 정을 두고 왔어. 가서 가져와야지.

강소정 그걸 누가 가져간다고 그래요. 그냥 둬요.

강민형 가져가긴. 녹슬까 그러지.

강소정 고철이 녹스는 게 당연하지.

강민형 잘 쓰면 안 슬지 고철도. 불, 그거 피우지 않아도 된다니까. 더우면 더 잠이 안 와.

강소정 그냥 피우면 피우는가 보다 하고 참고 자요.

강민형 안 내던 성질을 내고. (사이) 어서 들어가. 괜히 감기 걸릴라.

강소정 누가 누구를 걱정해요?

강민형 난 괜찮아.

강소정 또. (나가려는 강민형을 향해) 오빠.


강민형, 되돌아본다.


강소정 병원, 정말 안 갈 거예요?

강민형 (사이. 웃으며) 안 가.

강소정 내 소원이래도?

강민형 다른 데 써 그 소원.

강소정 아니, 대체 왜 안 가는데요?

강민형 (사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침묵이 흐른다.


강민형 그거 그냥 두고 어서 들어가.


강민형, 퇴장한다.

잠시 후, 한미주 나뭇더미를 들고 등장한다.


한미주 큰삼촌 아니에요? 어디 가신대요?


강소정,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다.


한미주 뭘 멍하니 그러고 있어요? 엄마. 엄마!

강소정 시끄러워.

한미주 나 참. 네, 그럼 저는 사라져드릴 테니까, 혼자 계속 계세요.

강소정 불 피우고 가.

한미주 입은 닥치고 불은 피우고. 누가 보면 종이라도 부리고 있는 줄 알겠어요.


강소정, 말이 없다.

한미주, 눈치를 살피고는 장작을 가져와 쌓는다.


한미주 (혼잣말로) 됐나?


강소정, 장작 곁으로 와서 한미주를 밀치고 장작더미를 무너트린다.


한미주 뭐 하는 거예요?

강소정 이렇게 하면 불이 퍽이나 잘 붙겠다. 일하는 거라고는. (장작을 다시 쌓는다)

한미주 손재주 없는 거 알잖아요.

강소정 마음먹고 하면 다 해. 마음이 없으니까 못하는 거지.

한미주 이까짓 장작 쌓는 데도 마음이 필요해요?

강소정 마음도 쏟아 본 사람이나 쏟는 거야.

한미주 난 마음이 흘러넘쳐요.

강소정 너 안 그래. 마음이, 아주 사막이야. 퍽퍽해. 모래뿐이야, 허허벌판, 황무지야.

한미주 그런가? (사이) 엄마 닮았나 보죠.

강소정 (사이) 가서 잠이나 자.

한미주 네, 알겠습니다! (나간다)

강소정 기껏 내려와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제 엄마를 잡지 잡아 아주. 이혼한 게 뭐 유세 떨 일이라고. 사람이 괜히 변해? 변할 만하니까 변하지.

한미주 (다시 들어오며) 나 이혼했다고 유세 떤 적 없는데.

강소정 (사이) 떨었어, 너.

한미주 그런가?

강소정 그놈의 그런가는.

한미주 그렇다면 그건 내가 잘못했네. (사이) 어떻게 떨었는데요? 말해 봐요. 말을 해야 내가 알고, 알아야 또 고치지. 안 그래요? 말해 보라니까요.

강소정 또, 또. 봐라, 이렇게, 무슨 말 한마디 하면 지네 삼킨 닭처럼 쫓아와서 쪼아대고, 비아냥대고. 사람 지쳐 나가떨어지게.

한미주 내가 그래요? 몰랐네.

강소정 너만 빼고 다른 사람 다 알아.

한미주 그런가? 진짜 몰랐네. (사이) 근데 엄마, 내가 괜히 그러는 거 아니잖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이 잘못이지. 같잖지도 않은 말을 내가 계속 들어줘야 해?

강소정 뭐? 같잖지도? (태연한 한미주를 보며) 그럼 얘기를 해. 자세하게, 상세하게, 잘 알아듣게.

한미주 할 수 없는 얘기도 있어요, 그게 아무리 엄마라고 해도.

강소정 (사이) 네가 뭐가 그렇게 대단해? 넌 날 때부터 변호사였니? 너희 삼 남매 먹이고 키우고 입히느라 죽은 네 아버지랑 내 허리가 휘었어. 그런데 이건 뭐 남 보다 못해. 큰년은 제 아버지 제사 때만 얼굴 비추고, 아들이라는 놈은 생전 먼저 전화하는 적이 없지. 둘째 딸년은, 아휴, 말해 뭐 할까. 이제 와 누굴 탓해, 다 내가 잘못 키운 탓이지.

한미주 나 뭐, 잘못 살고 있어? 로펌 변호사에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이혼한 게 뭐 크게 흠 잡힐 일이야?

강소정 흠 잡힐 일이지 그럼. 세상이 변했다고 사람들도 변하는 줄 알아? 앞에서는 안 그래도 뒤에서는 다 수군거려. 이혼녀 딱지, 그게 무슨 훈장인 줄 알아?

한미주 그럼 안 맞는데 그냥 살아? 평생을?

강소정 살지 그럼. 세상에 뭐 별다른 놈 있는 줄 알아?

한미주 별다른 놈일 줄 알았지.

강소정 네가 죽네 사네 해서 결혼한 놈이야.

한미주 알아요. 그래서 후회하고 있어요. 매일매일 후회하고 있다고요.

강소정 후회할 짓을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지.

한미주 (흥분하며) 그렇게 한심해요? 결혼 잘못한 딸이 여기 와서 죽치고 앉아 있는 게 그렇게 눈엣가시에요?

강소정 한심하다. 부끄럽고.

한미주 (사이) 좋아요. 그럼, 계속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뭘 더 어쩌겠어요?

강소정 박 서방이 그러더라. 자기 정말 그런 거 아니라고. 아주 잠깐 그런 마음이 들었었는데 바로 접었다고. 너한테 부끄러운 짓 안 했다고, 맹세까지 하더라.

한미주 …….

강소정 어떻게든 이혼은 안 하고 싶었는데,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몇 번이고 사과를 했어. 그게 개쓰레기 같은 놈이 할 일이야?

한미주 그래서요?

강소정 기다리겠다고 하더라. 너 기다리겠다고.

한미주 …….

강소정 세상 남자들 별거 없는데, 그래도 박 서방만 한 놈 없다.

한미주 다시 살라고?

강소정 돌아가. 가서 다시 합쳐. 살아 봐. 살다 보면 다 살게 돼.


침묵이 흐른다.

강소정, 불을 붙이려는데 잘 붙지 않는다.


한미주 좋아요.

강소정 (한미주를 붙잡으며) 그래? 정말?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한미주, 강소정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친다.

의아해하는 강소정.


한미주 (망설이다 결심한 듯) 영훈이가 그 여자랑 별거 없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그런데 내 마음이 말이에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이미 물에 빠졌다 나왔는데, 어떻게 젖지 않을 수가 있어요? 한번 의심한 마음은 갈수록 커지더라고요. 커지고 커져서 나중에는 나조차도 이게 누구를 향한 건지 알 수 없게 돼버리고. 영훈이에 대한 건지, 그 여자에 대한 건지,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건지. 그러다 나, (사이) 유산했어요.

강소정 뭐?

한미주 유산했다고요. 그래서 이혼한 거야.

강소정 …….

한미주 돌아갈 일, 영원히 없을 거야. 엄마가 원하는 그런 일,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내 아이에게 용서받을 수가 없어. 나는, 내가 용서가 안 돼요. (사이) 엄마, 그래도 살아? 살아? (사이) 그래?


한미주, 퇴장한다.

강소정, 힘이 빠진 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강소정 어휴, 망할 년. 망할 년. (가슴을 치면서 울먹인다) 망할 년, 망할 년. (다급하게 전화를 찾아 건다) 이 빌어먹을 새끼를 내가 가만히 두나 봐라. 안 받아? 안 받아? (다시 전화를 걸려고 하다 전화기를 떨어트린다. 전화를 주워 가만히 액정을 바라보다가 한미주가 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하이고. 사는 게 뭐 이리, 궁상맞을까.


무대, 다소 어두워진다.



16장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가 들린다.

잠시 후, 강윤이 등장한다.


강소정 누가 보면 나뭇가지가 걸어 다니는 줄 알겠구나.

강 윤 고모가 여기 계신 줄 알았으면 다른 곳으로 돌아갔을 텐데요.

강소정 (눈물을 훔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하는 본새 참 아름답다. 하나뿐인 조카 놈이 남보다도 못하지.


강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린다.


강소정 날 밝으면 올라가라.


강윤, 발걸음을 멈추고 강소정을 바라본다.


강소정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대기만 하는 놈한테 줄 쌀 더는 없으니까.

강 윤 …….

강소정 재워 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고.

강 윤 이젠 제가 필요 없으신가 보네요.

강소정 얘 좀 봐라. 뭘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강 윤 뭘 해야 했나요?

강소정 (한숨을 쉬며 일어난다) 누가 내 속을 알아. 늙은 게 죄지, 죄야. 내 얘기 허투루 듣지 마라. 분명히 얘기했다. 네 고모,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알지?

강 윤 …….

강소정 이 오빠는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불을 계속 붙이려 하지만 여전히 잘 되지 않는다) 이건 또 왜 안 돼? 이리 와서 이것 좀 해 봐라.

강 윤 방금 전 뭐라고 하셨는지 벌써 잊으셨어요?

강소정 노인한테 상냥하게 대해라. 너도 늙는다.


강소정, 물러나서 소파에 앉는다.

강윤, 다가와 불을 피운다.

잠시 후 연기가 나고 불이 붙는다.

두 사람, 가만히 불길을 바라본다.

강윤,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소정 윤아, 정말 안 되겠니? 이 고모 제발 소원이다.

강 윤 …….

강소정 네 아버지가 길에서 쓰러진다고 생각해 봐.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그렇게 가길 바라는 거 아니지 너도?

강 윤 (사이)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강소정 그래. 뭐든 물어봐, 뭔데?

강 윤 그 자식을 왜 용서했어요?

강소정 …….

강 윤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 짐승 같은 놈을?

강소정 그런 적 없어.

강 윤 평생을 함께 살았어요, 그런 일을 저지른 놈이랑, 한 동네에서, 한 마을에서. 어머니가 받았을 고통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요? 우연히라도 마주칠까 조마조마하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 마음을.

강소정 …….

강 윤 솔직히 신경 안 쓰셨겠죠, 고모나 아버지나. 어머니는 장애인이니까. (사이) 바보 천치니까. 마음 따위, 텅 비어 있는 사람이니까.

강소정 (어깨를 움츠리고 불안해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 어떤 일도 없었다고.

강 윤 헛소리 집어치우세요.

강소정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 모르겠다만…….

강 윤 (사이) 그날 제가 거기에 있었어요.

강소정 뭐?

강 윤 아버지가 그 얘기는 안 했나요?

강소정 (사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 하는 거냐 지금?

강 윤 그래요, 몰랐을 수 있죠. 몰랐어도 돼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강소정 이런 얘기 그만하자.

강 윤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언제부터 알고 있었냐고요?

강소정 알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복수라도 했어야 해? 그래?

강 윤 …….

강소정 아무도 몰랐다. 누가 알 수 있었겠니, 한 마을 사람이, 그것도 온전치도 〈//〉 않은.

강 윤 누가 그런 병신 같은 여자를. 그렇죠?

강소정 그런 뜻이 아니야!

강 윤 그래서 그렇게 내버려 뒀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흥분하며) 그 자식이 어머니를 강간했잖아요. 지능이, 지능이 고작 열 살짜리 애에 불과한 어머니를. (배를 세게 부여안고 주저앉는다)

강소정 그런 일 없었어.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누가 그 말을 믿어 줬을 것 같니? 네 엄마가 온전했다면 달랐겠지. 행여나 네 엄마가 먼저 그랬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네 아버지나 나나.

강 윤 그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강소정 너는 모른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떠난 너는 몰라. 우리가 어떤 지옥 속에서 살아왔는지, 윤이 너는 몰라.

강 윤 (비웃으며)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지옥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서걱거린다.

강소정,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소정 적어도 나나 네 아버지는 네 엄마를 끝까지 보살폈어.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마라.


강소정, 무대 한쪽으로 퇴장한다.

강윤,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괴로워한다.



17장


잠시 후 반대쪽에서 강민형이 손에 정을 쥐고 등장한다.

강민형 곁에 사슴이 함께 있다.

강민형, 대화를 나누듯 중얼거리며, 간간이 크게 웃는다.

무대 한쪽에서 강소정이 뒤쫓듯 나타나 이 모습을 망연히 바라본다.

강윤 역시 강민형을 본다.

달이 구름에 가려지면서 옅어진다.

무대, 다소 어두워진다.


강민형 아니, 임자, 내가 그 돌멩이를 한 방에 깨부쉈다니까. 아, 그래, 이놈으로 탁 내리치니까 쩍 하고 갈라졌다고. 말했잖아 이 사람아. 나 아직도 팔팔하다니까.

강 윤 …….

강민형 이깟 상처, 아무것도 아냐. 그래,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쓸데없는 생각은.

강 윤 뭐 하세요?


강민형, 계속 무대를 서성이며 중얼거린다.


강민형 그깟 나무 삼백 개, 금방이라니까. 이 사람, 정신 나갔나,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하고.

강 윤 (결국 폭발한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요!


강민형, 깜짝 놀라 정을 떨어트린다.

강민형, 강윤과 사슴을 번갈아 바라보며 당황해한다.


강 윤 망령이라도 나면 곤란하죠. (신경질적으로 웃는다)


사슴, 천천히 사라지려 한다.

비장한 음악이 깔린다.

강민형, 사슴을 따라 걸어간다.


강 윤 서세요. 거기, 가만히, 계세요.


강민형, 걸음을 멈춘다.

강윤, 자리에서 일어나 강민형 가까이 간다.

사슴, 사라진다.

강민형, 그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본다.


강 윤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네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뻔뻔해질 수가 있죠?

강민형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강 윤 죽은 사람들이라니. (혼잣말처럼) 아냐. 어떻게 보면 유니크하기도 한 것 같고.

강민형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는구나 도통.

강 윤 작은고모, 둘째 삼촌에, 어머니.

강민형 …….

강 윤 친구분들은요? 그분들도 다 돌아가셨잖아요.

강민형 …….

강 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숙부, 당숙, 사촌, 팔촌. 또 누가 있지?

강민형 시끄럽다.

강 윤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져요? 죽은 사람들, 아버지 멋대로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내면, 지나버린 시간이 되돌아오기라도 한대요?

강민형 뭐라고?

강 윤 (강민형을 노려보며) 아버지가 어떻게 사시든, 저랑 상관은 없습니다. 죽은 사람들 붙잡고 넋두리를 하든, 속죄를 하든. 그런데.

강민형 속죄?

강 윤 어머니는 빼 주시죠.

강민형 뭐?

강 윤 잊어버리신 겁니까, 까맣게? 어머니가 아버지를 미워했던걸?


침묵이 흐른다.


강민형 너, (사이) 그만 들어가라. 피곤하구나.

강 윤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을 거예요, 어머니는.

강민형 좀!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라.

강 윤 아버지가 더 잘 아셨을 텐데요.

강민형 네 엄마와 40년을 함께 살았어. 네가 대체 뭘 안다는 거냐?

강 윤 어머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저였습니다.

강민형 네 엄마가 불행했던 건, 너 때문이었어!

강 윤 제가 이렇게 된 건 어머니 탓이 아닙니다.

강민형 우린 가난했다. 풍요롭지는 않았어. 넘쳐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 네 엄마는 해맑은 사람이었으니까. 자주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불행한 건 아니었어. 가난하고 부족해도 남들 사는 만큼, 다들 사는 것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살아갈 거라고.

강 윤 제가 망쳐버렸다고요?

강민형 맞다, 네 놈이 다 망쳐버렸다.

강 윤 (사이) 제가, 평범하지 않아서요?

강민형 …….

강 윤 제가 평범하지 않아서, 두 분의 꿈을 깨버렸다는 겁니까? 제가 남들과 다른 게, 남들 다 사는 것처럼 살지 않아서, 여자를 사랑하지 못해서, 그래서 제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아차렸을 때, (사이) 저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던 거예요?

강민형 멋대로 집을 뛰쳐나간 건 너였다.

강 윤 버려진 개는 거리를 떠돌아야죠.

강민형 네 엄마는 너를, 평생을 기다렸다. 한평생 마음앓이 하면서, 너를 기다렸어.

강 윤 그렇게 만든 건 아버지입니다, 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고지식함이, 아집이, 편협함이 어머니를 외롭게 했죠. 정신도 똑바르지 못한 여자, 반쪽 아들을 낳은 천치 여편네, 낙인을 찍어 두고, 쥐어짜듯, 괴롭히지 않으셨습니까?

강민형 …….

강 윤 정신지체인데다 게이 아들까지 낳았으니 오죽했을까요.

강민형 (단호하게) 네 엄마를 탓한 적 없다, 단 한 번도. 맹세코!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결혼도 하지 않았어. 네 엄마는 아픈 사람이었을 뿐이다. 바보가 아니었어. 부족한 건 오히려 나였지.

강 윤 아, 스스로를 탓하셨군요. 등신 같은 아들을 내쫓고 괴로움에 몸을 떨며 스스로를 학대하셨군요.

강민형 적어도,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강윤, 신경질적으로 웃는다.


강 윤 (웃음을 멈추고 냉담하게) 당신은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야 했어. (사이) 당신은, 누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내도, 자식도, 그 누구도.


침묵이 흐른다.

강윤,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무대에 떨어진 정을 줍는다.


강 윤 사과해.

강민형 뭐라고?

강 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나한테 사과해요.

강민형 이젠 헛소리까지 〈//〉 하는구나.

강 윤 내가 게이라서, 아버지를 피해 이 집을 나간 것 같아요?

강민형 …….

강 윤 (분노하며) 나는, 그날, 그날 이후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다, 복수는 생각조차 못했고. 아, 어쩌면 그렇게 나약한 어린애였나! 이제껏 나는 내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럴 수 없다, 그럴 자격이 없다 나는. 그래서 줄곧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남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에 능숙해지고, 호의를 의심하고, 진심을 호도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세상을 증오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죠. 나는 불구자구나. 나야말로 진짜 병신이구나.

강민형 …….

강 윤 제대로 물어봤어야지, 황익구 그 개새끼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대체 내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왜 묻지 않았던 거야? 왜 어머니를, 오히려 어머니를 죄인처럼 다룬 거야? 왜 침묵하라고 한 거야?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왜, 왜, 밤마다 그랬던 거냐고? (사이) 내가 봤어, 내가 봤다고, 그날, 그곳에서, 속옷을 부여잡고 있는 어머니를, 황익구 그 개새끼를, 그리고,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는 당신을! (정을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강민형 (사색이 되어 몸을 벌벌 떤다)

강 윤 말해 봐, 말해 보라고. 왜 어머니를, 아무 잘못도 없는 어머니를 시궁창에 던져버린 거냐고? 어머니 혼자 어쩌다 빠졌다고 말하지 마요. 밀어 넣은 건, 당신이잖아!


강윤, 정을 내리칠 듯 들어 올렸다가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떨어트린다.

강민형, 놀라며 강윤을 붙잡는다.


강 윤 (강민형의 옷자락을 붙잡고 남은 기력을 쥐어짜서) 당신이 미웠어. (흐느낀다) 하지만, 정말 미웠던 건 나였어. 어머니를, 내가 어머니를 똑바로 볼 수 없어서, 어머니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내가, 견딜 수가 없이 증오스러웠어. 어떻게, 어떻게, 도망치는 것 말고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무대, 천천히 어두워진다.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한 낮고 장엄한 종소리.


강 윤 왜 어머니를 지켜 주지 못했어요? 왜 나를 지켜 주지 않았던 거예요? 마음속으로 그렇게 많이 외쳤었는데, 도와 달라고. 왜 그랬어요? 왜요, 아버지?


강민형,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에 깊이 절망한다.


강 윤 (환상을 보듯) 필립…….


강소정, 뛰어나온다.


강소정 오빠.


강민형, 반쯤 넋이 나가 있다.


강 윤 다시 와 줬구나.

강소정 윤아, 윤아. 정신 좀 차려 봐.

강 윤 필립. 밤이 깊어졌나 봐, 너무 어두워.

강소정 오빠, 일으켜 세워요. 내가 업을 테니까.

강 윤 다행이야.

강소정 뭐?

강 윤 아직 밤이라서 다행이야. (사이) 나, 빛이 너무 무섭거든.


강윤, 의식을 잃고 늘어진다.

다급하게 강윤을 추스르려는 강소정.

강민형,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본다.

무대 고요해진다.

수많은 그림자들이 어두운 벽면에 투사된다.

강민형, 그 그림자들을 바라보며 무대를 거닌다.

고요 속에 거친 강민형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강민형이 쓰러진다.


강소정 오빠!


강소정, 강윤을 두고 강민형에게 달려간다.

무대가 완벽한 어둠에 휩싸이기 바로 직전, 무대 한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강윤을 향해 뛰쳐나온다.

완벽한 어둠.


최필립 (간절한 목소리) 윤. 강윤! 나 왔어.


완벽한 고요.

암전.



4막


18장


어슴푸레한 조명이 무대를 비춘다.

생기 없는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강민형.

서서히 밝아지는 무대.

잠시 후 강민수 등장한다.


강민수 이젠 저녁에도 제법 따뜻하네요. (공기를 들이마시며) 바람도 안 차고. (주위를 거닌다) 좋다.

강민형 …….

강민수 안 그래요?

강민형 …….

강민수 형님!

강민형 응? 언제 왔어?

강민수 언제 오긴, 백 년 전에 왔지. (웃는다)


강민형, 따라 웃으며 소파로 걸어가 앉는다.

강민수, 연민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런 강민형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강민수 (의자에 앉으며) 봄인가 보네요.

강민형 (하늘을 보며) 봄이지. (자기 곁자리를 내주며) 이리 와 앉아. 거기 앉으면 엉덩이 배겨.

강민수 똥 쌀 때 빼고는 쓸 데도 없는 엉덩이 뭐 아낄 거 있다고요.

강민형 이리 오라니까.

강민수 허리가 아파서 그래요, 푹신한 데 앉으면.

강민형 허리가 왜?

강민수 왜는, 이 나이에 안 아픈 게 이상하지.

강민형 네 나이가 어떤데?

강민수 (사이) 하긴. 일흔이면 아직 어린 나이이긴 하죠?

강민형 봐 봐.

강민수 뭘요?

강민형 허리.

강민수 아유, 됐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예요.

강민형 (다가와 누르면서) 여기야? 여기?

강민수 (피한다) 아, 이 형님이 오늘 왜 이렇게 살가우실까? 괜찮아요, 괜찮아. 정말로.

강민형 (자리에 앉으며) 건강 잘 챙겨라.

강민수 (자리에 앉으며) 형님도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강민수 나무 왔다면서요?

강민형 그래. (행복해하며) 조가가 아주 좋은 걸로 가져왔더라.

강민수 좋아요?

강민형 좋더라. 가지 튼튼하고, 뿌리 실하고. 묘목으로 딱이야.

강민수 아니, 그 말이 아니라,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강민형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그래요, 아주, 좋겠습니다, 나무가 실하고 튼튼해서.

강민형 그렇다니까. 내일부터 심어야지.

강민수 삼백 개?

강민형 사백 개.

강민수 많네.

강민형 안 많아.

강민수 많아요.

강민형 며칠이면 해. 부지런히 하면.

강민수 그럼요, 당연히 할 수 있죠. 젊은 애들 서너 명이면. 아주 부지런한 애들로.

강민형 혼자서도 충분해. 요즘 애들은 매가리가 없어.

강민수 (한숨을 쉰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강민형 (가만히 강민수를 보고는) 괜찮아.

강민수 한 번 더 들으면 백만 번은 되겠네 그 괜찮아 소리는.

강민형 (따뜻한 시선으로) 이 형, 아직 쌩쌩해. 그러니까, 동생은 동생 생각만 하면서 살면 돼. 알지, 형 말, 무슨 뜻인지?

강민수 나 참. (사이) 같이 갈까?

강민형 (사이) 싫어 나는.

강민수 그래요,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에요.

강민형 나는 외국이 별로야.

강민수 외국 나가 본 적도 없는 양반이. 거기도 다 똑같아요, 여기나.

강민형 어디랬지?

강민수 론다. 스페인 론다.

강민형 그래 론다. 이름이 참 멋져.

강민수 수백 번 얘기해도 기억을 못 하면서 무슨.

강민형 언제 간다고?

강민수 내일 새벽 비행기. 저녁 먹고 출발하려고요.

강민형 (사이) 잘 살아. 외국 여자랑 연애도 하고.

강민수 당연한 소리를. 나는 연애 없이는 못 살아.

강민형 뭔 소식 들어도, 돌아오지 말고.

강민수 (사이) 안 와요. (사이) 모르지, 또, 무슨 바람이 불면.

강민형 올 거 없어. 네 누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강민수 (사이) 알아서는 무슨. (사이) 미안해, 형.

강민형 그럴 것 없어. 형한테는 미안해할 것 없어.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본다.

강민수, 강민형의 미소를 보며 따라 미소 짓는다.



19장


무대, 조금 더 따스하게 바뀌면서 강소정이 등장한다.


강소정 정말이지, 징글징글하다.

강민수 오셨습니까 누님.

강소정 솔직하게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당신들, 강씨 남자 놈들. 일부러 이러는 거지? 밥 먹을 때마다 사람 찾으러 오게 하는 거.

강민수 아주 커다란, 오해십니다 누님. 저희 형제, 지금 막 한 몸처럼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강소정 언제부터 그렇게 우애가 좋으셨나 두 형제가?

강민수 두 형제 아니죠. 끈끈한 삼 남매! 아니, 원래는 오 남매!

강소정 그 입을 꿰맬 수는 없겠니? 그래 주면 내가 정말 혈압이 덜 오를 것 같은데.

강민형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강민수 형님, 그런 말씀은 활활 타는 장작불에 기름을 붓는 게 아니겠습니까?

강소정 그 입 좀!

강민수 네, 닥치겠습니다!

강소정 배도 안 고파요, 종일 힘쓰고도?

강민형 별로 안 고프구나.

강소정 그럼 굶으시구려.

강민수 저는 고픕니다, 사정없이 고픕니다. 뱃가죽이 등에 붙은 것 같습니다.

강소정 혼자만 드시겠다? 아름다운 형제애는 어디로 내팽개치고?

강민수 일단 배불리 먹고 나서 다시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죠 형님?


강민형, 고개를 끄덕인다.


강소정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밥 한 끼 때문에 천륜을 저버리게 할 수는 없지. 내가 나쁜 년 되잖아. 그럼 안 되지. 여기에서 형님하고 맛있는 공기나 배 터지게 먹고 들어와.

강민수 (나가려는 강소정을 붙잡고) 왜 이러실까? (강소정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반색하며) 어!

강소정 왜?

강민수 했어?

강소정 뭘?

강민수 갈비찜! (사이) 했지?

강소정 안 했어.

강민수 했는데? 소 아니고 돼지.

강소정 안 했다니까.

강민수 냄새가 나는데. 했네, 했어. (웃으며 강소정을 안는다) 사랑합니다, 강 여사.

강소정 이거 놔. 너 먹으라고 한 거 아니니까 손댈 생각 말아.

강민수 (다시 안으며) 우리 식구 중에 돼지갈비찜 좋아하는 사람 나밖에 없는 거 세상이 다 알아요.

강소정 놓으라니까.

강민수 거 좀 안고 있읍시다, 오늘 지나면 이제 만날 수도 없는데.


잠시 침묵이 흐른다.


강민수 (분위기를 바꾸면서) 자자, 갑시다. 가서 밥 먹자고요. 가요, 일어나요, 형님.

강소정 꼭 가야겠냐?

강민수 또 왜 이러실까? 다 끝난 얘기잖아요.

강소정 갔다 오는 줄 알았지, 가서 안 오겠다는 줄은 몰랐지.

강민수 올 수도 있지.

강소정 언제? 나 죽으면?

강민수 …….

강소정 (사이) 기어이 그렇게 하겠다고? (사이) 가겠다고?

강민수 오래전부터 하려던 일이었어요.

강소정 그러니 기가 차지 안 차?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는 일이 고작 외국 나가서 혼자 살다 죽는 거라니. 세상 어느 형제, 가족이 그걸 이해해?

강민수 성낼 거 없어요. 좋잖아요, 홀가분하고.

강소정 그래서 평생을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산 거니? 홀가분하게 죽으려고?

강민수 어쩌겠어, 이렇게 생겨 먹은걸.

강소정 거기 가서 뭐, 뭐 하려고? 뭐 하고 살 건데?

강민수 그냥 노는 거지. 쉬는 거고.

강소정 여기에서는 못 놀아, 여기에서는 못 쉬어?

강민수 그만해요.

강소정 뭘 그만해? 뭐라고 말 좀 해요. 얘 그냥 가게 둬요?

강민형 가고 싶으면 가야지.

강소정 오빠!

강민형 그러고 싶다잖아. 그렇게 하겠다잖아.

강소정 안 온다잖아요. 거기에서 죽겠다잖아요.

강민형 어쩔 수 없지.

강소정 (사이) 그게 다예요?

강민형 (웃으며) 그래, 어쩔 수 없지.

강민수 (웃으며) 그래, 어쩔 수 없지.

강소정 (기막혀하며) 이 인간들이 같이 정신줄들을 놓으셨나? (힘이 빠져 휘청휘청 소파로 와 앉는다) 아유, 저리 좀 가요. 꼴도 보기 싫어.


잠시 침묵이 흐른다.

따뜻한 조명으로 바뀐다.


강민형 이제 와 얘기하지만, 참 질긴 악연이다 싶었다. 살아가면서 힘에 벅찰 때마다 너희들이 나한테 달라붙은 거머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어. 그냥 어쩌다 조금 먼저 태어났을 뿐인데, 난 늘 너희들에게 줘야 하고, 너희들을 먼저 배 불려야하고. 너희들한테 피를 쪽쪽 빨리는 것만 같았지.


강소정의 뜨악한 표정을 보며 미소 짓는다.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강민형 철없을 때 얘기야. 모든 게 부족했을 때 얘기고. (사이) 언제였더라, 열여덟이었나 아홉이었나. 그게, 읍내 전기하는 사장님 따라다니면서 허드렛일할 때였는데, 이제는 잘 기억도 안 나, 언제였는지, 정확히 어디였는지도. 공장에서 무슨 변압기를 딱 잡았는데, 느낌이 싸한 거야. 뭔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짐승이 내 앞에서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는 것 같았지. 금방이라도 내 머리통을 집어삼킬 것처럼 말이야. 손을 떼려고 해도 이게 안 떨어져. 가죽으로 된 안전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내려다봤더니 장갑이 녹고 있는 거야. 이대로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었다. 가죽 다 녹고 나면 새까맣게 타서 죽겠구나. 없이 산다, 없이 산다 했더니 갈 때도 참 없이 간다, 억울하고 서글펐지. 그래도 살려고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데, 그런데 그때 말이다, 왜 그렇게 그게 생각이 나는지. 그날 아침에 전기 사장님 부인이 너희들 가져다주라고 감자 두 알을 싸 줬거든. 그 감자가 계속 생각나는 거야. 그 보드랍고 포 슬포슬한, 내가 허겁지겁 먹어 치워버린 그 감자 두 알이. 그게 죽는 순간에, 나를 그렇게 부끄럽고, 한스럽게 만들더라. (사이) 어쩌면 그래서 그랬나 봐. 내 입에 들어갈 거 쪼개고 쪼개서 너희들 입에 넣어 준 게. 그런데 말이다, 그게 정말 보잘것없었지. 정말 별 게 없어서, 누구 하나 배 불리지도 못하고. 참 못나고 죄 많은 인생이었다. (긴 사이)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마음 끌리는 대로 살아, 너희는. 나는 정말 그거면 돼. 그거면 미련 없이 갈 수 있어.


강소정, 가만히 손을 뻗어 강민형의 손바닥을 쓸어내린다.

상처와 흉터로 가득한, 검고 투박한 손이다.

강소정, 울컥한다.


강소정 그 손, 참.


강민형, 강소정의 어깨를 쓸어내린다.

강민수, 가까이 다가와 그 둘 앞에 무릎 꿇고 앉는다.

세 사람, 조용히 서로를 포옹한다.



20장


갑작스러운 통증에 신음하는 강민형.


강소정 왜 그래요? 아파요?

강민형 괜찮아. (더 심한 통증에 괴로워한다)

강소정 약 언제 먹었어요?

강민형 괜찮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강민수 형님.

강소정 어디 가요?

강민형 소변 좀. 먼저 들어가.

강소정 이 양반이 진짜. 오빠!


강민수, 강소정을 말린다.

강민형, 무대 밖으로 나간다.


강소정 (한숨을 내쉬며) 평생이 걱정이다, 걱정. 뭔 놈의 팔자가 이리도 드센지.

강민수 걱정할 거 없어요. (강소정의 눈을 바라보며) 다 잘될 거야.

강소정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너랑 무슨 얘기를 하겠냐? 평생을 저 하고 싶은 대로 산 놈이. 누가 내 속을 알아, 누가. (무대 한쪽을 보며) 쟤는 또 왜 나와?


한미주, 등장한다.


강소정 왜?

한미주 뭐 하세요들 여기에서?

강소정 뭐 하는지 관심도 없는 게 물어보기는.

강민수 누나, 딸이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돼요?

강소정 원수 사촌쯤은 될 거다.

강민수 그러지 좀 말아요, 미주한테. 말 좀 부드럽게.

강소정 (무시하며) 왜?

한미주 윤이 오빠 왔어요.

강소정 윤이?

강민수 윤이가 왔어?

한미주 네.

강민수 수술은?

한미주 잘됐대요.

강민수 잘됐다, 잘됐어. 지금 어디 있는데?

한미주 산소 갔어요. 막걸리에 포 챙겨 왔더라고요.

강민수 산소? (사이) 아! 거기, 가는 길이 험한데. 괜찮으려나?

한미주 괜찮아요. 이젠 아주 멀쩡하더라고요.

강소정 같이 왔어?

한미주 네?

강소정 같이 왔냐고, 그 필립이라는…….

한미주 (사이) 네. 같이 왔더라고요.

강민수 그래? 가만, 이럴 게 아니라 내가 가 봐야겠다.

강소정 가서 뭐 하게?

강민수 뭘 하긴. 신장 떼 주는 게, 그게 쉬운 일인가. 가족도 하기 힘들어.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지.

한미주 바로 올라간대요.

강민수 뭐?

한미주 산소만 들렀다가 바로 올라간대요.

강소정 …….

강민수 뭐? 왜? 뭐, 급한 일 있대?

한미주 미국 간대요.

강민수 미국?

한미주 필립 씨네 부모님이 거기에서 사업을 하시는데, 같이 오라고 했대요. 그래서 가기로 결정했다나 봐요. 거기에서는 둘이 결혼도 가능하고. 아이 입양도 할 수 있고.

강민수 (사이) 그래. 결국 그렇게 됐구나.

한미주 잘됐죠.

강민수 그래. 잘됐네. (사이) 잘됐네.


긴 침묵이 흐른다.


강민수 (분위기를 바꾸며) 그럼, 더 저녁을 먹고 가야지. 갑시다, 가요, 누님. 저녁 좀 제대로 좀 차려 줍시다.

강소정 그걸 네가 왜 말하는데? 손 하나 까딱 안 하면서.

강민수 가요. 뭐든 시키기만 해, 다 도와줄 테니까. 가요, 가.

강소정 아휴, 먼저 가. 바로 갈 테니까.

강민수 알겠어, 바로 와요. 미주 너도.

한미주 (사이) 네.


강민수, 대답을 듣고 서둘러 퇴장한다.

강소정과 한미주, 불편한 침묵 속에 각자의 생각에 잠긴다.



21장


한미주, 뒤늦게 따라 나가려 한다.


강소정 거기 서 봐.

한미주 (사이) 왜요?

강소정 너. (사이) 언제 올라갈 거야?

한미주 뭐예요 갑자기?

강소정 언제 올라갈 거냐고.

한미주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참 뜬금없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강소정 올라가.

한미주 그렇게 말씀 안 하셔도 저도 조만간 올라갈 생각이었거든요?

강소정 내일 날 밝으면 바로 가.

한미주 제가 알아서 해요.

강소정 가라면 가.

한미주 알아서 한다고요.

강소정 가. 네 밥해 주는 거, 이제 지겹다.

한미주 뭐 엄청난 거 해주시나 봐요?

강소정 밤낮 하는 거 없이 빈둥거리는 꼴도 보기 싫고.

한미주 (사이) 알았어요. 엄마가 가라면 가야죠.

강소정 네가 언제 날 엄마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든?

한미주 그게 제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거였어요?

강소정 그럼,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냐?

한미주 기브 앤 테이크?

강소정 엄마라고 늘 퍼 주기만 해야 할까.

한미주 그럼, 뭐, 숙박비라도 드릴까요? 밥값이라도 드려?

강소정 안 줄 생각이었냐? 다 줘. 네가 지난 한 달 동안 쓴 방값, 밥값, 물값, 전기세, 다 내놓고 가.

한미주 네, 알겠어요. 낼게요, 현금으로, 깔끔하게 드리고 갈게요. 우리 엄마 부자 되시겠네.

강소정 싹퉁머리 없는 년 같으니. 어디 가서 내 딸이라고 하지 마, 앞으로는.

한미주 (사이) 엄마. 엄마는 뭐가 그렇게 당당해요, 나한테, 항상?

강소정 뭐?

한미주 엄마가 나한테 뭘 그렇게 해줬는데?

강소정 뭘 해줬냐니?

한미주 기억 안 나요? 엄마, 나 고등학교 안 보내려고 했잖아. 큰언니처럼 공장가서 일하라고, 엄마가 그랬잖아.

강소정 …….

한미주 대학 붙었을 때도 생각해 봐요. 꼬박 사흘 동안 밖에도 못 나가게 문 걸어 잠근 사람, 엄마예요. (웃으며) 아니, 무슨 사람이 그렇게 무식할 수가 있어? 말 해봐요, 엄마. 그때 큰언니가 와서 나 안 데려갔으면 정말 평생 나 방 안에 가둘 셈이었어요?

강소정 지금 네 꼴을 봐라. 뭐가 잘한 일이고 잘못한 일인지. 그때 내 말 들었으면 평생을 고마워했을 거다.

한미주 (정색하며)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은 큰언니랑 윤이 오빠예요. 나 고등학교 보내 주고, 대학 보내 주고, 고시 뒷바라지해 준. 자기들 안 먹고 안 입고 나한테 다 퍼 줬다고요.

강소정 넋 빠진 것들.

한미주 그만해요. 그나마 얼마 없는 정도 다 떨어질 것 같으니까.

강소정 네 맘대로 해. 정을 떼든 말든, 네 맘대로. (사이) 고마운 것도 모르고.

한미주 뭘 그렇게 고마워하라는 거예요 대체?

강소정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니?

한미주 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강소정 내가 널 낳으려고 아홉 달을 견뎠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나는 자격이 있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너한테서, 〈//〉 자식들한테서.

한미주 그만. 그만 말하세요.


침묵이 흐른다.


한미주 (나가려다 멈춰 선다) 엄마는, 자격 없어요.

강소정 내가 왜 없어?

한미주 난 행복하지 않았으니까.

강소정 (사이) 내가 너 불행하라고 등 떠밀었니? 다 네가 자초한 거야.

한미주 이유가 궁금하진 않아요?

강소정 그것도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한미주 아뇨, 불행하다면 그건 제 탓이겠죠. 제가 선택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에요, 난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내겐 선택지가 늘 정해져 있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모르겠죠, 엄만 아무것도 모르죠. 언제나 그랬어. 자기가 파 놓은 구멍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커다란지,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해.

강소정 알아들을 소리를 해야지.

한미주 구멍이요, 구멍. 엄마의 그 헛된 욕심으로 그득한 새까만 구멍들!

강소정 …….

한미주 난 거기에 빠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어야 했어요.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뎌 거기에 빠져버리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왜냐하면 난 강한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언제나 나는 구멍 사이로 난 아주 좁고 좁은 길만을 선택해야 했어요. 다른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고요. 그 순간순간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엄마는 알지 못해요.

강소정 …….

한미주 왜 그랬어요? 왜 나를 항상 엄마 마음대로 하려고 했어? 왜 단 한 번도 내 등을 밀어주지 않았어?

강소정 그런 적 없다.

한미주 그랬어, 그랬어, 그랬다고, 엄마가 그랬어. 내 꿈을 짓밟으려 했다고. 나를 죽이려고 했어.

강소정 그런 적 없다 나는.

한미주 내가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불행했다고, 행복하지 않았다고,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거잖아요.

강소정 내 말 들었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거다.

한미주 그랬을지도 모르죠. 나는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도 몰랐을 거예요. 아마 미쳐버렸을 테니까.

강소정 (사이) 그게 그렇게 잘못됐다는 거냐?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하지 못해서? 낳고 키우는 걸로는 부족했던 거냐?

한미주 모든 부모가 그렇게 해요.

강소정 아니! 모든 부모가 그렇지는 않아. 그렇게 못해. 어떤 부모는 아이를 지키지 못해.


침묵이 흐른다.


한미주 그 얘기를, 꼭 나한테 했어야 해요?

강소정 …….

한미주 가겠어요.

강소정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을 망치려고 할까? 다 널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한미주 엄마를 위해서였겠죠.

강소정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미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아는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을 사지로 몰아?

한미주 엄마는 지금도 하나 변한 게 없어요.

강소정 너는 그냥 내가 미웠던 거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는 게 벅차서 매일매일 허덕이는 내가, 너는 싫었던 거야. 그래서 날 떠난 거고.

한미주 …….

강소정 하지만 너를 키워냈다 나는. 몸이 약해서 큰 수술을 세 번이나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긴 너를, 애가 끓게 키워냈어.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날 원망할 수 없을 거다. 아무렴. 나는 너한테 큰소리칠 수 있어! 널 지켜냈으니까. 네가 못 가게, 너를 내 옆에 붙들어 둘 자격이 나한테는 있었다. 자격이 있어!

한미주 …….

강소정 나를 위해서? 나한테 지금 뭐가 남았는데? 누가 날 봐주고 있는데? 난 혼자다. 이렇게 혼자서, 늙은 채로, 하루하루 더 늙어 가고 있을 뿐이야. 내일 더 늙을 걸 아는 내가 이렇게 홀로, 혼자서. 불행하다고? 행복하지 않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널 위해서 내가 뭘 희생했는지 봐라. 날 봐!

한미주 엄마는 끝까지 엄마 생각만 하지.

강소정 너는? 너는 아니니?

한미주 자식은 엄마, 자라면 떠나는 거예요. 부모는 지켜봐 주는 거고요.

강소정 싫다! 나는 그런 부모 안 한다.

한미주 (사이) 엄마, 앞으로 우리 보지 마요. 엄마 보는 거, 숨이 막혀요.

강소정 …….

한미주 갈게요. 나도 잘 살 거니까, 엄마도 건강 잘 챙겨요. (나간다)


강소정, 휘청휘청 걸어와 소파에 앉아 지친 듯 눈을 감는다.



22장


무대 다소 어두워진다.

잠시 후 강윤, 우산을 들고 등장한다.

눈을 뜬 강소정, 강윤을 바라본다.

강윤, 말없이 의자에 앉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강소정 좋아 보이는구나.

강 윤 좋아요. 보이는 것 이상으로.

강소정 잘됐다. (사이) 웬 우산인데?

강 윤 비가 온다고 해서 가져왔는데, 안 오네요.

강소정 (하늘을 본 후) 뭐가 내리긴 내리겠네.


침묵이 흐른다.


강소정 (일어나며) …….

강 윤 어머니에게 다녀왔어요.

강소정 (다시 앉는다) …….

강 윤 막걸리도 한 잔 따라 드렸어요.

강소정 간만에 우리 형님, 목 좀 축이셨겠네.

강 윤 목련이 벌써 졌더군요.

강소정 그게 벌써 졌나?

강 윤 치울까 하다가 그냥 뒀습니다. 이불처럼 묘를 덮고 있길래. 예쁘기도 하고.

강소정 …….

강 윤 좀 더 따뜻해지면 고모가 치워 주세요.

강소정 (퉁명스럽게) 네 엄마 묘를 내가 왜 치워?

강 윤 그러면 그냥 두시던가요.

강소정 그냥 둘 거다.

강 윤 네, 그러세요.


약한 빗소리가 들린다.

강윤, 우산을 펼쳐 강소정 옆으로 간다.


강소정 치워. 성가셔.

강 윤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강소정 나이 먹었어도 이깟 비, 비도 아니야. 아, 치워.

강 윤 젖는 건 매한가지죠. 가랑비든 소나기든. (우산을 접는다)

강소정 잠깐이다. 마르고 나면 다 그게 그거야. 지나면 잘 기억도 안 나, 비가 왔었는지, 구름만 꼈던 건지. 어느 구름에서 비가 오는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야.

강 윤 그런가요?

강소정 그래. (허공으로 눈길을 준다) 그런 거다.

강 윤 (사이) 고모.

강소정 응?

강 윤 고마워요.

강소정 (당황해한다) 뭐가?

강 윤 엄마, 잘 보내주신 거요.

강소정 …….

강 윤 많이 늦었죠, 인사가? (사이)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강소정 그러지 마라.

강 윤 고모. 나는 말이에요. 죽는 게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사는 게, 사는 게 정말 별거 없었거든요. 쭉 그랬어요. 쭉. 살아오는 내내 그랬어요. 어머니를 원망하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나를 경멸했어요.

강소정 …….

강 윤 너무 오래 걸렸어요. (사이) 고모 말이 맞아요. 마르고 난 비 같은 거, 지나고 나면 잊어버려야 했는데. 언제까지나 비만 내리는 거 아니라는 걸, 먹구름 같은 거 바람에 흘러가버린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어요. 너무 많이, 내 인생을 낭비했어요.

강소정 …….

강 윤 제가 다르게 살아가겠다고 해서 다르게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강소정 …….

강 윤 전 달라지지 않아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저는 저일 거예요. 세상도 마찬가지겠죠. 달라지지 않겠죠. 예고 없이 비를 뿌릴 거고. (사이) 그렇지만, 괜찮아요, 이젠 괜찮을 거예요. 비가 내리면 우산을 씌워 주고, 비에 젖으면 마를 때까지 함께 기다려 줄 사람이 있거든요.

강소정 (사이) 잘됐구나.

강 윤 네. (긴 사이) 행복해지고 싶어요. 마음을 다해 웃으며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고 싶어요.


강소정, 말이 없다.

강윤, 강소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강 윤 그만 갈게요.

강소정 저녁 먹고 가야지.

강 윤 아뇨. 그냥 갈게요.

강소정 그냥 간다고?

강 윤 네.

강소정 (사이) 안 보고 갈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강 윤 (사이) 오래전에 그랬어야 했어요. 그렇다면 저나 아버지나,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너무 서로를 붙들고 있었어요. 아버지와 저는 너무 시간에 관대했어요.

강소정 보고 가, 그래도.

강 윤 보고 싶지 않아요.

강소정 보고 가.

강 윤 …….

강소정 보고 가. (울먹이며) 윤아.

강 윤 …….

강소정 미안하다, 미안해. 네 엄마 그렇게 된 거, 불쌍하고 마음 아프고, 그런데, 그랬는데, 네 아버지가 어떻게 될까 봐, 그게 더 겁이 났다. 그날 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그날 밤, 처마 밑에서 칼을 쥐고 있는데, 자루가 아니라 날을 쥐고서는, 손바닥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당장이라도 그, 황 영감 그놈을 죽이러 갈 것 같은 살인자 눈을 하고는 숨을 몰아쉬는데. 그런 네 아버지를 내가 부둥켜안고 사정했다. 제발 잊어버리라고, 묻어버리라고,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라고, 내가, 내가 같이 옆에서 그 죄 같이 짊어지고 평생 네 엄마한테, 형님한테 속죄하며 돌보겠다고. 내가 그랬다. 내가 그랬어. (사이) 나한테 고마워하지 마라. 그러지 마. 나를 용서하지 마라.


강윤, 괴로운 마음을 억누르는 표정으로 강소정을 응시한다.

다소 어두워지면서, 강민형이 무대 뒤쪽에서 걸어 나온다.

그의 주변에는 사슴과 코뿔소가 함께 있다.

강윤과 강소정, 강민형을 바라보지만 강민형은 홀로 딴 세계에 있는 듯하다.

강윤, 물끄러미 강민형을 바라본다.


강 윤 (강소정에게 시선을 돌리며) 갈게요, 고모.

강소정 윤아…….


강윤, 우산을 들고 가려다 바닥에 두고는 빠르게 무대를 빠져나간다.



23장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강소정, 무대를 걷고 있는 강민형에게 다가간다.

강민형, 강소정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

강소정, 손을 맞잡는다.

코뿔소들과 사슴, 무대 안쪽으로 들어와 강소정이 반가운 듯 주변을 떠나지 않으면서 활기차게 움직인다.

강민형, 잠시 멈춰 그 모습을 기쁘게 바라본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강소정에게 코뿔소를 가리키는 강민형.

강소정이 자신을 바라보자 마치 어린 시절의 그녀를 다루듯 어른다.

강소정, 슬픔을 누르는 미소로 강민형에게 화답한다.

두 사람, 무대를 걷고, 걷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강소정만이 그림자들과 함께 걷는다.

강민형, 힘에 부친 듯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는다.

음악이 잦아들면서 무대가 조금씩 밝아진다.

새벽빛에 서서히 사라지는 밤의 어둠처럼 그림자들 역시 천천히 무대 뒤로 사라진다.

홀로 서 있는 강소정, 무너지지 않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다.

잠시 후 천천히 소파로 다가오는 강소정.

강민형이 손짓하자 그 옆에 나란히 앉는다.


강민형 저녁은 먹었니?

강소정 이제 먹어야죠.

강민형 아직도 안 먹고 뭐 했어? 벌써 한밤중인데.

강소정 한밤중은, 이제 막 해 졌는걸요. 그리고 같이 먹어야지. 배도 안 고파요?

강민형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먹으라고 했잖니?

강소정 또 그 쓸데없는 소리.

강민형 (소리 없이 웃으며) 나는 배가 안 고파. 정말이야.

강소정 그래도 먹어야죠.

강민형 그렇지? 살려면 먹어야지?

강소정 그래요. 먹어야죠 살려면.


침묵이 흐른다.

짧게, 종소리가 울린다.

강민형, 무대 뒤쪽의 폐허를 둘러본다.


강소정 왜요?

강민형 (사이) 좀 더 일찍 심을 걸 그랬어.

강소정 (사이) 그랬으면 좋았겠네요.

강민형 근사하겠지, 매화가 활짝 피면?

강소정 꽃이 다 꽃이지. 안 예쁜 꽃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강민형 (사이) 네 말이 맞지, 맞아. 안 예쁜 꽃이 어디 있어.


짧은 종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낮게 들린다.


강민형 우리 동생도, 고왔지, 수선화처럼.

강소정 노망났네 이 오빠가. 이제 그만 들어가요.

강민형 고마웠다. 늘 고마웠어.

강소정 어디 아파요?

강민형 아니, 이상하게 하나도 안 아프구나.

강소정 …….

강민형 정말 하나도 안 아파.


빗소리가 들린다.

무대, 천천히 어두워진다.

무대 뒤편으로 소년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종소리가 길고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강소정, 우산을 들어 펼친다.


강소정 일어나요, 더 쏟아지기 전에.

강민형 잠깐, 잠깐만.

강소정 왜요?

강민형 이상하게 오늘따라 너무 졸리구나.


강소정, 강민형을 바라본다.


강민형 너무 졸려.


강소정, 직감적으로 강민형의 꺼져 가는 생명의 끝자락을 예감한다.

강민형, 스르륵 쓰러지듯 강소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종소리와 빗소리가 뒤섞인다.


강소정 오빠. 나 팔 아파. 오빠가 우산 들어주면 안 돼? 응?


무대, 서서히 어두워진다.

종소리와 빗소리만이 남는다.

완벽한 어둠과 함께 소리들도 서서히 멀어져간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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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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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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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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