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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머니의 결혼식

  • 작성일 2023-08-18
  • 조회수 773

내 할머니의 결혼식

김하나


나오는 사람

 

문  식 세진의 아버지

세  진 문식의 딸. 교사

빛  나 세진의 제자. 학생





현재, 여름





장소


벤치가 있는 공원





1장



공원



빛나가 공원 한쪽 풀숲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초록색 이파리에 붙어 있던 달팽이를 억지로 떼어내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장난을 친다.

통화를 마친 세진이 다가오자 빛나는 콘택트렌즈 통 안에 달팽이를 급하게 숨긴다.

빛나, 벤치로 와서 앉고 그 곁으로 세진이 다가온다.


세진

미안. 통화가 좀 길었지. 우리 아빠 잔소리 엄청 심해. 아직도 날 어린애 취급한다니까. 

빛나

쌤은 아빠한테 반말을 쓰네요.

세진

어릴 때부터 습관이 돼서. 

빛나

다 큰 어른이 그러는 거 신기해요.

세진

고쳐야 하는데 잘 안 되네. 

빛나

왜 고쳐요?

세진

남들 보기 좀 그렇잖아.

빛나

남들이 뭔 상관이에요? 아빠랑 쌤만 좋으면 됐지.

세진

그런가. 넌 아빠한테 안 그래?

빛나

전 아빠랑 안 친해요.

세진

그렇구나. 요즘은 딸바보가 대세던데.

빛나

우리 아빤 그냥 바보 같던데.

세진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빛나

내가 반말하면 가만히 안 둘걸요?

세진

아버지가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보네.

빛나

예의는 지랄. 우리 오빠한테는 안 그래요.

세진

정말?

빛나

아빤 오빠만 예뻐하거든요. 나는 늘 벌레 보듯이 하고.

세진

이상하네. 이렇게 예쁜 딸한테 왜 그러실까.

빛나

몰라요. 재수 없어. 꼰대.

세진

어?

빛나

들었으면서 왜 못 들은 척해요?

세진

잘 못 들었어.

빛나

거짓말.

세진

진짜야.

빛나

내가 뭐 하나 말해줄까요? 쌤은 거짓말하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요.

세진

어떻게?

빛나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떨려요.

세진

진짜?

빛나

몰랐어요?

세진

응.

빛나

원래 사람은 자기 자신은 잘 못 보는 법이니까.

세진

넌 가끔 보면 열일곱 같지가 않아.

빛나

저도 또래 애들이랑은 수준이 안 맞아요.

세진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였는데.



빛나, 세진의 농담에 웃는다.


빛나

아빠랑 친한데 같이 살지 왜 자취를 해요?

세진

음······ 진짜 어른이 되고 싶어서? 제대로 된 정말 어른 말이야.

빛나

아빠가 무조건 지지해주셨어요?

세진

말도 마. 처음 자취한다고 했을 때 우리 아빠 장난 아니었어.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녔다니까. 그 도시락을 날 먹여가면서 말렸지만. 지금은 거의 포기 반, 인정 반 그런 상태.

빛나

아빠하고 친한 딸들은 딱 보면 티가 나요.

세진

어떻게?

빛나

예뻐요. 거침없이 당당하고 자기를 무진장 사랑하거든요.

세진

뭐야. 딱 니 얘기잖아.


빛나, 세진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빛나

쌤. 사람 볼 줄 모르죠?

세진

어머, 아니야. 내가 얼마나 사람을 잘 보는데. (곧 인정하며)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나?

빛나

암튼 부럽다.

세진

뭐가 그렇게 부러운데?

빛나

아빠랑 친한 것도, 혼자 자취하는 것도, 진짜 어른인 것도 모두 다.

세진

요즘 고민이 많구나.

빛나

고민 없는 청소년도 있어요?

세진

그런가.



빛나, 공원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운동화 끝으로 땅을 툭툭 찬다.


빛나

우리 아빠 누군지 알아요?

세진

얼마 전에 들었어, 애들한테. 

빛나

아무튼 이 학교는 비밀이 없어요. 소문 하난 진짜 빠르다니까.

세진

학교에 와서 교장 선생님 만나고 가셨다며.

빛나

쌤. 이번 선거 때 절대 그 사람 찍으면 안 돼요.

세진

왜?

빛나

그런 사람이 정치하면 이 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해질 거예요.

세진

엄청 젠틀하고 스마트해 보이시던데?

빛나

진짜 사람 볼 줄 모른다. 그거 이미지메이킹 한 거예요. 다 만들어낸 거라고요.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 웃음, 행동 그거 다 구라거든요. 서민을 위한 정치? 웃기고 있네. 지하철 요금이 얼만지도 모르는 주제에. 쌤······ 설마 선거 때 후보 생긴 것만 보고 투표하고 그러는 사람 아니죠?

세진

나 지성인이야. 지난번 티브이 토론회 때 보니까 그렇게 안 보이던데. 공약도 괜찮고.

빛나

답답해. 다 대본대로 하는 연기고 쇼라고요.

세진

아빠한테 쌓인 게 많은 보구나.

빛나

존나 가식적인 인간을 싫어할 뿐이거든요. 전 투표권이 없잖아요. 저 대신 소중한 한 표를.

세진

사춘기 땐 그럴 수 있지. 나도 학교 다닐 땐 아빠랑 엄청나게 싸웠어.

빛나

암튼 찍지 마요. 절대.



세진, 빛나와의 대화에 피식 웃으며 말을 돌린다.


세진

딴 얘기 하자.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빛나

영화요. 보셨어요?

세진

그때 추천해 준 그 영화. 괜찮더라.

빛나

입술이요.

세진

입술 뭐?

빛나

또 떨려요.

세진

미안.

빛나

미안할 것까진 아니고. 쌤은 그런 스타일 영화 별로 안 좋아하죠?

세진

아냐. 좋아해.

빛나

구라.

세진

내가 많이 바빴어.

빛나

이것도 구라.

세진

솔직히 말하면 보다 말았어. 조금 불편하더라. 팝콘 먹으면서 편하게 볼만한 영화는 아니잖아? 넌 그 영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빛나

그거 은근히 유명한데. 빨간 안경 쓰고 다니는 기자 아저씨 알죠? 그 아저씨가 별 다섯 개나 줬잖아요. 칸 영화제도 가고 그랬는데.

세진

아 그래? 난 왜 몰랐지? 나 대학교 때 영화 동아리였거든. 왕년에는 내가 말이야 극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는데 말이야. 그놈의 임용 시험이 뭔지 영화 한 편을 맘 놓고 볼 시간이 없어요.

빛나

쌤은 좀 다를 거라 기대했는데.

세진

다르다니?

빛나

나하고 말이 좀 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진

그 영화가 왜 그렇게 좋아?

빛나

특별하잖아요.

세진

너는 그 사람들이 그러는 게 이해가 되니?

빛나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세진

아름답다······.

빛나

그 영화 말이에요. 작가의 실제 경험담이래요.

세진

그럼 작가가 레즈비언이야?

빛나

정확히 말하면 레즈비언 성향을 가진 양성애자인 거죠.

세진

뭐가 그렇게 복잡해?

빛나

원래는 소설이었는데 영화1)로 각색한 거예요. 그 책이 쓰인 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이었거든요? 그때는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취급당했대요.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도 말이에요.


1) 영화 <캐롤>, 2015년


세진

너 영화 잡지야 뭐야? 맞다. 꿈이 영화감독이랬지?

빛나

기억하네요?

세진

물론이지.

빛나

암튼, 그 작가는 자기가 가진 동성애 성향을 치료받고 싶었나 봐요.

세진

그랬겠다. 정신병으로 취급받을 정도였으니 살기 힘들었겠지.

빛나

그래서 심리치료 비용을 마련하려고 일주일에 두 번 백화점 장난감 가게에서 알바를 해요. 그런데 거기서 두둥! 모피코트를 입은 매력적인 여성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죠.

세진

직접 영화 보는 것보다 니가 해주는 이런 얘기가 더 재밌다.

빛나

그래요? (더 신나서) 그 작가 취미가 뭐였는지 아세요?

세진

뭐였는데?

빛나

달팽이 집사였대요.

세진

우엑.

빛나

무슨 반응이에요?

세진

징그러워. 끈적거리고 흐물거리잖아.

빛나

요즘은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도 많은데.

세진

난 사양할래. 상상만 해도 끔찍해. 그래서 달팽이 집사는 어떻게 됐는데?

빛나

파티가 있을 때면 달팽이 백 마리가 든 가방을 들고 가서는 테이블 위에 달팽이를 꺼내 놓고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대요.

세진

엄마야, 나 소름 돋은 것 좀 봐,



세진, 일어나 온몸을 긁어대기 시작한다.

빛나, 그런 세진을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빛나

달팽이가 자웅동체인 건 아시죠? 

세진

그 정도는 기본이지. 나도 학교 땐 공부 좀 했어, 왜 이래. 생물 시간에 배우잖아. 달팽이. 달팽이과에 속하는 연체동물. 암컷과 수컷이 한 몸에 있다. 달팽이가 서로 짝짓기를 할 때는 자기 몸에 있는 암수 중 하나만 선택한다. 짝짓기가 끝나면 다시 원래의 자웅동체로 돌아온다. 그런데 왜 하필 달팽이를 키웠을까?

빛나

자기가 달팽이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달팽이의 단단한 껍데기가 부러웠거나.

세진

껍데기가 왜 부러워?

빛나

달팽이는 그 껍데기 속으로 언제든지 숨을 수 있잖아요.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하고 비난했겠어요.

세진

그랬겠지. 아마도.

빛나

닮고 싶어요.

세진

그 작가?

빛나

달팽이요. 단단한 껍질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잖아요.

세진

아무래도 그렇지.



빛나, 세진의 표정을 살피더니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다.


빛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진

달팽이?

빛나

그런 사람들이요. 바이섹슈얼.

세진

글쎄. 나랑은 너무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네.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예 없어.

빛나

진짜요? 

세진

그런 애들은 있었다. 나 여고 나왔거든. 왜 그런 애들 있잖아. 여잔데 남자같이 하고 다니는 애들. 머리 짧게 자르고, 옷도 크게 입고, 여잔데 여자한테 인기 많은 애들. 학교에 한 명씩은 꼭 있었지. 너 주변엔 그런 사람 없어? 바이··· 바이 뭐라고?

빛나

저는······.



빛나, 무언가 말하려는 듯 머뭇거린다.


세진

있다, 있어! 걔네! 걔네 있잖아. 그 친구들 어떻게 됐니? 3반 여자애들. 반장이랑 부반장이었던가?

빛나

걔들 전학 간대요.

세진

결국 그렇게 됐구나.

빛나

학부모들 민원이 장난 아니래요. 반장은 지방으로 이사 간다는 소리도 있던데.

세진

이사까지 갈 필요 있나.

빛나

걔네 엄마 성격에 자기 딸 레즈라고 소문난 동네에선 못 살 거예요.

세진

내 기억엔 성실하고 착한 애들이었는데.

빛나

이상해요. 방송반 애들 사건 땐 정학으로 끝났는데 걔들은 퇴학이라니.



세진과 빛나, 한동안 말이 없다.


빛나

방송실에서 그 짓 하다 걸린 남녀커플 애들은 일주일 정학으로 끝났잖아요. 3반 애들하고 뭐가 다른 거예요? 여자애들끼리 키스하는 건 잘못된 일이고, 남녀 간에 섹스는 자연스러운 거예요?



세진, 아무 대답도 해주지 못한다.


세진

어······ 나는 모든 인간은, 누구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고 사랑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빛나

그런 교과서에 나온 말 말고. 개인적인 쌤의 생각이 궁금한 건데.

세진

그러니까 나는 말이야. 솔직히 잘 모르겠어. 뭐가 좋다 뭐가 나쁘다 말하기가 좀 그래. 일단 나한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니까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게 나쁜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그걸 무조건 찬성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일단 나는 교사니까 말이야. (결심한 듯 말한다) 에이, 그냥 좀 불편해. 나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니까.

빛나

다른 사람들이라고요?

세진

그렇지 않나?

빛나

걔들도 쌤을 불편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자기들하고 쌤은 다른 사람이니까?



세진, 분위기를 전환하려 애쓴다.


세진

원래 그 나이대 여자애들 한 번쯤 그런 생각 해보잖아? 사춘기 땐 여자친구들끼리만 붙어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까 자기가 그런 성향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어. 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던 거 같거든. 학창 시절에 친구한테 느끼는 감정을 진짜 심각하게 생각하고 말이야. 근데 지나고 나면 사실 그 감정이 그런 게 아니거든. 아마 대학 가면 3반 걔들도 동성보다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또 달라지고.

빛나

정말 그렇게 될까요?

세진

그래. 졸업하면 또 달라져. 아직 니네 나이가 성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잖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 그런 거 그거 다 한때야, 한때.

빛나

한때······.

세진

다 지나간다니까.

빛나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세진

뭐가?

빛나

아니에요. (가방에서 대본 꾸러미를 꺼내며) 이거 읽어봐 주실래요? 제가 이번에 쓴 건데 청소년 영화제 내보려고요.

세진

너 시나리오도 직접 쓰니? 대단한데?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이런 거까지 쓰는 거야?



세진, 빛나에게 받은 시나리오를 한참 쳐다본다.


빛나

상금이 꽤 세더라고요. 이제 가야 해요. 아빠가 선거 끝날 때까지는 집에서 꼼짝도 말랬는데. 오늘도 몰래 나왔거든요.

세진

그래. 얼른 들어가 봐.

빛나

오늘 상담 고마워요, 쌤.

세진

나도 재밌었어. 방학 잘 지내고 학교에서 보자.

빛나

쌤도요.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세진이 빛나를 부른다.


세진

참! 버스 타지 말고 전철로 가. 오늘 그쪽 버스 안 다녀. 거기 광장에서 도로 다 막고 축제 한대.

빛나

축제요?

세진

그런 축제 있잖아. 퀴어문화축제랬나? 그런 걸 꼭 사람들 많이 다니는 광장에서 해야 되나? 어린 애들도 지나다니면서 다 볼 텐데 말이야. 자기들끼리 좋아서 하는 거면 저기 지방 같은 데서 조용히 할 것이지.

빛나

방금 전에 모든 인간은 존중받고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면서요. 이런 발언은 차별 아니에요?

세진

아까 여기 올 때 교통 통제되는 바람에 되게 불편했거든. 그래서 열 좀 받았어.

빛나

저 진짜 가요. (가려다 말고) 그런 사람들 말이에요. 원래 그렇게 태어난 걸까요? 아니면 살다 보니 그렇게 변해버린 걸까요?



세진, 빛나의 질문을 이해 못 하는 눈치다.

빛나, 세진에게 다가온다.


빛나

쌤, 손 좀 펴보세요.



빛나, 렌즈 통 안에 들어 있던 달팽이를 꺼내 세진의 손 위에 내려놓는다. 세진의 손바닥 위에 놓인 달팽이. 세진, 깜짝 놀라 달팽이를 털어낸다.


세진

놀랐잖아. 이게 뭐야.

빛나

깜짝 선물이었는데. (달팽이 보고) 많이 아팠겠다.



빛나, 바닥에 떨어진 달팽이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린다.


빛나

정말이네. 이렇게 높은 데서 떨어졌는데도 안 깨졌어. 진짜 이 단단한 껍질 때문인가 봐요.



빛나, 달팽이를 풀숲 쪽에 가져다 둔다.


세진

(미안한 마음에) 시나리오 이거, 꼭 읽어볼게.

빛나

네.



빛나, 인사하고 나간다.


세진, 달팽이가 손바닥에 남긴 감촉의 여운이 남는지 몸을 움츠린다.

양손에 짐을 잔뜩 든 문식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온다.


문식

먼저 들어가 있지 않고.

세진

주인 없는 집에 먼저 들어가 있는 건 예의가 아니지.

문식

이럴 때 보면 세상 정떨어져. 저 집이 남의 집이야?

세진

이제 내 집은 아니잖아? (문식의 짐을 받으며) 뭘 이렇게 많이 사와?

문식

오랜만에 오는 딸 대충 먹여 보내?

세진

무슨 중대발표길래 집까지 오래 그냥 전화로 말하지.

문식

전화로 대충할 말이면 진작했지. 집에 좀 자주 와. 이런 거 아니면 이젠 딸 얼굴도 못 보는 거야?

세진

뭔데? 무슨 얘긴데 이렇게 뜸을 들여. 그냥 말해.

문식

저녁 먹으면서 말할 거야.

세진

아 답답해서 숨넘어가. 지금 말해. 당장 말해. 안 그럼 나 밥 안 먹어.



세진, 문식을 억지로 벤치로 앉힌다.

문식의 입가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세진

어허. 아빠 좀 이상해.

문식

뭐가 이상해?

세진

왜 그래 뭔데 그래?

문식

너 아직도 혼자 맞지?

세진

나 혼자 맞지. 외동인 거 티나?

문식

너는 누굴 닮아서 그렇게 위트가 부족하냐. 그런 얘기가 아니라 솔로냐 이 말이야. 애인 아직 안 생겼지?

세진

나 밥 안 먹을래. 그냥 간다.



세진, 갑자기 일어나 집 반대 방향으로 몸을 튼다.


문식

야, 어딜 가?

세진

안 해. 나 안 해. 나는 선 같은 거 안 본다고.

문식

오버하지마.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리고 너는 애가···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선이 웬 말이냐.

세진

그럼 남자친구 얘긴 왜 물어보는데.

문식

이런 모질이. 아이고 반푼이. 뭐하냐 너는. 그 나이 먹도록 연애도 안 하고.

세진

아빠 자꾸 이럴래?

문식

잘 들어라. 우리 집안 큰 경사 치를 거 같다. 인륜지대사.

세진

우리 집안 누구? (크게 놀라며) 아빠? 아빠 결혼하려고? 마음에 드는 아주머니라도 생긴 거야? 진짜? (문식의 손을 잡으며) 그래. 잘 생각했어. 하늘에 있는 우리 엄마 이젠 좀 쉬게 해주자. 맨날 아빠 걱정하느라 잠도 편히 못 잘 텐데. 그래서 누군데? 양 권사님? 아니면 혹시······ 둘리분식 사장님? 맞지 미영 이모.

문식

너는 참······ 사람 볼 줄을 몰라. 그래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냐. (자신의 행색을 가리키며) 이게 연애하는 사람 몰골이냐?

세진

맞네.

문식

나 말고.

세진

그럼 누구? 답답해 빨리 말해.

문식

우리 엄마.



정적이 흐른다.


문식

니 할머니.

세진

할머니? 성북동 친할머니?

문식

성북동은 왜 갖다 붙여? 니가 할머니가 둘이야 셋이야?

세진

할머니가 결혼을 한다고? 결혼? 우리 할머니가?

문식

몇 번을 물어봐?

세진

아니 누구랑?

문식

누구랑 하긴 누구랑 해? 사람이랑 하지?

세진

오늘 만우절이야? 아닌데. 혹시 이거 몰래카메라야?

문식

야. 샘 안 나냐? 넌 한 번도 못 해본 걸 할머니는 두 번이나 하시는데.

세진

나이 80에 결혼을 한다고?

문식

결혼에 나이가 어딨어. 좋으면 하는 거지.

세진

황당하네. 아빠는 만나 봤어, 그 결혼하실 분?

문식

당연히 봤지.

세진

어떻게 된 거야? 어디서 만나신 거래? 어떤 사람이래?

문식

정신없어. 하나씩 물어봐.

세진

빨리 얘기 좀 해봐.

문식

할머니 구청 문화센터에 시 배우러 다니는 거 너도 알지?

세진

알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나가셨잖아.

문식

거기서 만나셨대.

세진

우리 할머니 능력자네.

문식

그렇지? 주름에 가려져서 그렇지 우리 엄마가 얼마나 반듯한 얼굴이라고. 아빠가 할머니 꼭 빼닮았잖아. 듣고 있는겨?

세진

시 배우러 다니시는 양반이면 사는 형편은 괜찮으신가 보네. 건강은? 우리 할머니가 그 연세에 노인네 수발들어야 하는 거 아니지?

문식

나이 80에 건강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관절 불편하신 거 빼고 지병은 없으시대.

세진

그쪽 가족들은 만나봤어? 이상한 사람들하고 잘못 엮이는 거 아냐?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 왜. 재산 보고 달려드는 인간들.

문식

혈혈단신. 엮일 만한 가족 친지 하나 없더라.

세진

상처(喪妻)하셨나 보구나.

문식

그건 아니고. 내가 알기론 아예 처음부터 처가 없었지 아마.

세진

독신?

문식

그렇지. 평생을 혼자 지내셨대.

세진

와. 최근에 들은 소식 중에 제일 쇼킹하네. 아니 근데 왜 이제야 말해줘. 결혼 얘기 오고 간 거면 그래도 꽤 됐다는 얘긴데. 섭섭하네 정말.

문식

그래서 지금 하잖아. 집에 한 번 오랄 때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나간 게 누구더라.

세진

그건 공부한다고. 그런데 아빠 결혼을 꼭 해야 해? 그냥 두 분이서 같이 사시면 되잖아. 그 연세에 결혼식이 큰 의미가 있을까?

문식

나이 먹어도 사람은 다 같은 거야. 젊은 사람들한테 의미가 있는 거면 노인들한테도 똑같은 거라고. 늙으면 좋은 의미도 같이 희미해질까 봐?

세진

그런 말이 아니고.

문식

아빠가 제대로 식 올리자고 그랬어. 니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시집올 때 결혼식이 다 뭐야··· 한복 한 벌 못 얻어 입으셨대. 기왕 하는 결혼식 멋지게 해드릴 거야. 예식장도 좋은 데로 잡고, 일가 친척들한테 연락 싹 돌려서 말이야. 참, 대구 가는 전세버스도 알아보려고 그런다.

세진

두 노인네 예식 때 입장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라나 몰라.

문식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촬영 나올지도 모르지?



문식, 이야기하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세진

아빤 뭐가 그렇게 좋아?

문식

갑자기 효자 된 것 같아 그런다.

세진

할머니 결혼시켜 드리는 게?

문식

아빠가 어렸을 때 할머니 속 엄청 썩인 거 알지?

세진

할머니 반지 훔쳐서 몇 달씩 집 나가고 그랬다면서. 왜 그랬어?

문식

나도 몰라. 철이 없었어. 이제야 철이 좀 드네.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처음으로 효도다운 효도 한번 해보려고 그런다. 큰 건 아빠가 다 준비 할 테니까 작은 건 니가 좀 도와줘. 마침 방학이니까 시간 좀 되지?

세진

돕는 거야 어려운 건 아닌데. 내가 뭘 도울 수 있을까?



문식, 옷 안쪽에서 명함 하나 꺼내 세진에게 건넨다.


문식

여기 한복이 요즘 청담동에서 제일 유명하대. 당장 두 분 모시고 여기 좀 다녀와. 돈 아끼지 말고 제일 고급으로 해드려. 부탁한다.

세진

알았어요.

문식

(일어나며) 덥다. 들어가. 수육 좀 삶고 시원하게 콩국수 말아먹자.



문식, 집 쪽을 향해 먼저 걸어간다.

명함을 받아든 세진, 아직 어이가 없고 당황스럽다.


세진

아빠, 같이 가.



세진, 아빠를 따라가다 멈춰서서 달팽이가 있는 자리 쳐다보고 나간다.


암전.




2장




며칠 후, 같은 공원.


문식이 혼자 벤치에 앉아 있다.

문식, 옆에 있던 종이가방에 손을 넣어 무언가 꺼내더니 읽어본다. 흡족한 표정이다.

세진이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등장한다.

세진, 문식의 얼굴을 보자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린다.


문식

강남은 차가 많이 막히지? 아빠는 높은 건물만 보면 그게 나한테 쏟아질 것 같아서 아찔해. 너는 그래도 젊어서 괜찮은가? 사람 살 데가 아니야 거긴. 난 우리 동네가 제일로 좋다. 한적하니 여유 있고. 부자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야.

세진

그런 핑계가 어딨어. 교통 편해, 학군 좋아, 아파트 비싸, 사람들 문화 수준 높아······ 돈만 있음 강 남쪽이 훨씬 살기 좋지. 이런 동네 뭐가 좋다고.

문식

사람 냄새가 나잖냐.

세진

요즘은 잘 사는 동네 사람들이 훨씬 정 있고 매너 있거든?

문식

그러냐? 에이, 이놈의 나라는 강 하나를 두고 사람들을 편 가르기나 시켜놓고 말이야. 정책이 잘못됐어.

세진

지금 아빠랑 내가 부동산 정책 얘기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닌 거 같은데.

문식

오늘은 뭐 해줄까? 무생채 넣고 비빔밥 해주랴? 너 그거 잘 먹잖아.

세진

아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문식

소리 지르지 마. 귀 아퍼. 화 많이 났냐?

세진

말이라고 해?

문식

놀랐지?

세진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야?

문식

아빠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 그래? 다리 좀 불편하신 거 빼고 병 없으시다, 딸린 가족 없다, 처음부터 독신이셨다. 전부 다 사실만을 얘기했는데.

세진

사실대로 미리 말을 좀 해주지 그랬어.

문식

아니 글쎄 아빠가 사실대로 말 안 한 게 뭐가 있냐고 글쎄.

세진

처가 없는 사람이라고? (기가 막혀서) 애초에 처가 있을 수 없는 사람이겠지.



세진, 흥분해서 말을 이어간다.


세진

한복집에 들어갔더니 우리 할머니랑 다른 할머니 한 분이 손을 꼭 붙잡고 앉아 계셔. 내가 그 모습을 어떻게 해석했겠어? 할머니한테 결혼 축하드린다고, 할아버지 되실 분은 어디 계시냐 물어보니까. (숨을 고르고) 나보고 말이야,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아니라면서··· 젊은 애가 고정관념을 좀 버리래. 두 분 모시고 다니면서 한복 옷감 고르고, 사이즈 재고 나오는데··· 한복집에 있는 사람들 다 놀라서 쳐다보고 수군거리고.

문식

다른 사람들도 놀라대?

세진

당연하지.

문식

(웃으면서) 너 진땀 좀 뺐겠네. 애썼다.

세진

아빠 설마 날 보낸 이유가 쪽팔려서야?

문식

창피했냐?

세진

창피했지 그럼! 아빠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문식

말이 안 될 건 또 뭐 있어.

세진

아니야 아빠. 이건 정말 아니야.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이게 말이 되는 소린지. 할머니한테 필요한 건 결혼식이 아니라 치매 치료 같은데? 할머니 정말 어떻게 되신 거 아니냐고? 그보다 아빠는 괜찮은 거야? 할머니랑 같이 치료 한번 받아볼래?

문식

세진아, 흥분을 좀 가라앉혀.

세진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냐고!



문식, 느린 걸음으로 벤치에 가서 앉는다.


문식

내가 하자고 졸랐다,

세진

뭘?

문식

결혼식 말이다. 할머니는 다 늙어서 추하다고 하시는 걸 내가 막 졸랐어.

세진

아빠, 정말 왜 그래? 이런 결혼식에 누가 온다고 일을 크게 만드는 거야? 막말로 무슨 큰 자랑이라고. 남들 알면 좋은 소리 못 들을 거 왜 나서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건데?

문식

난 니 엄마 만날 때 안 그랬다. 너무 좋으니까 여기저기 봬주고 싶고, 막 소문내고 다니고 싶던데. 너는 연애할 때 안 그랬냐?

세진

그거랑 이거랑 같아?

문식

너 보기엔 뭐가 다르냐?

세진

좋아. 백번 양보해. 우리끼리 스몰웨딩 같은 거로 하던가. 작은 식당 같은 데 빌려서. 그냥 우리끼리 밥이나 먹자고.

문식

스몰웨딩 그거 말이 스몰이지. 안 스몰이라며? 아빠도 알 건 다 알아.

세진

지금 농담이 나와?

문식

평범하게 하고 싶어. 남들 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그래서 할머니도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세진

아빠!



문식, 웃음기를 거두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낸다.


문식

옛날에는 여자들이 거의 팔려 가다시피 시집을 갔다. 그 정도는 너도 알고 있지? 할머니도 열여덟에 얼굴도 모르는 웬 남자한테 시집와서 고생 참 많이 했다.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은 나냐?

세진

알지.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셨다며.

문식

직업만 반듯했지, 평생을 한량으로 살다 갔다 그 사람이. 불한당이 따로 없었지. 술만 먹으면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니 할머니를 건드렸어. 해가 나면 해 난다고 때리고, 비가 오면 비 온다고 때리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분다고··· 할머니를 함부로 대하던 사람이었다.

세진

미쳤나 봐. 왜 그랬대, 할아버진?

문식

그때는 그게 잘못이라는 걸 몰랐거든.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지.

세진

할머닌 그걸 참고 산 거야? 아니, 이혼을 하지. 왜 참아?

문식

나 때문에. 자식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사람 곁에서 평생을 나 하나만 보고 참고 살았다 니 할머니가. 그렇게 살다가 이제야 겨우 제대로 된 진짜 짝꿍을 찾은 건데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냐.

세진

그게 이상하단 소리가 아니라.

문식

그럼 뭐가 이상해?

세진

모르겠어. 내 할머니잖아. 다른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왜 남들하고 달라야 하냐고!



사이.


문식

영재 소식은 가끔 듣냐?

세진

난데없이 여기서 영재 얘기가 왜 나와?

문식

니 첫사랑이지, 영재 걔가? 난 니 엄마가 첫사랑이다.

세진

뜬금없이 첫사랑 얘기를 왜 꺼내냐고.

문식

니 할머니는 그분이 첫사랑이래. 시집오기 전에 한 고향에 살았대. 많이 좋아했다 하시더라. 그때는 그 마음이 진짠 줄도 몰랐대. 먼 길 돌고 돌아서 이제야 겨우 제 자리를 찾았다 말씀하시대.



세진, 한동안 문식을 바라본다.


문식

세진아, 좋아하는 마음은 다 똑같은 거야. 내가 가진 거랑 모양새가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천대하면 나쁜 거야.

세진

아빠.

문식

너 할머니 이름이 뭐야?

세진

오늘 여러 번 말 문 막히게 하네 진짜. 기다려 봐봐.

문식

금방 안 떠오르지? 니 할아버지는 생전에 할머니를 한 번도 진짜 이름으로 안 불러 줬어. 그저 “어이, 저기, 야야” 하거나 “문식아, 문식아” 아들 이름 붙여 불렀지. 그런데 그분은 할머니 진짜 이름을 부르시더라. “이보오, 복영 씨. 어여뿐 복영 씨”. 그게 나는 참 듣기가 좋대. 할머니 이제 얼마 못 사셔. 남은 시간이라도 자기 이름으로 편하게 살다 가게 해드리자.

세진

환장하겠네 정말.

문식

그렇게 말수 없고 무뚝뚝하던 니 할머니가 그분 앞에서는 어찌나 수다스러운지. 너 상상이 되냐? 방긋방긋 웃기도 하고 그런다. 아빠는 그걸 보는 데 참 좋더라.



그때, 문식의 핸드폰이 울린다.


문식

(통화하며) 엄니, 나유. 오늘 청첩장 나온 거 택배로 받았어요. 인쇄 이쁘게 잘됐네. 여기에 그 짝 어머니가 보내주신 시도 한 소절 같이 넣었슈. 시가 들어가니 확실히 수준이 달라 보이네. 잉. 모바일 청첩장은 카카오톡으로 보내줄게유. 카카오톡 할 줄 아시쥬? 종이 청첩장 이거는······ (세진의 눈치를 보다가) 오늘 세진이가 들고 갈 거예유. 집에 계실거지? 어? 외출하시게요? 어디 가시게? 대학로? 거기는 왜? 연극 보시고 싶어? (놀라며) 대학로 집회? 곧 새 신부 되실 분이 험한데는 안 가는게 좋은디. 그려유. 조심히 다녀오셔요 그럼. 찻길 조심하고, 돈 아끼지 말고 택시 타고 갔다 오셔유. 두 분이서 안 떨어지게 손 꼭 붙잡고 다녀오셔유.



문식, 전화를 끊는다.


세진

뭐야? 대학로 집회는 또 뭔데?

문식

할머니는 시대를 잘못 탔어.

세진

설마.

문식

니네 할머니 페미니스트야.



문식, 종이가방을 세진에게 건넨다.


문식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놔. 이해하라고 강요는 안 해. 그냥 넌 이런 심부름만 좀 해줘. 이 정도는 해준다고 그랬지? 아빠 오늘 엄청 바빠. 얼른 밥 먹고 움직여야 해. (일어나며) 결혼식 한 번 하는데 뭐 그렇게 준비할 게 많은지. 어휴, 나는 두 번은 못 해. (세진을 보며) 뭐 해? 따라 일어나. 아빠가 무생채를 아주 기가 막히게 무쳤어.



문식, 나가려다 세진을 보고 말한다.


문식

(자랑하듯) 나는 이제 엄마가 두 명이 된다.



문식, 먼저 나가고 세진은 혼란스럽다.

세진, 아빠를 따라가려는데 그때, 빛나가 공원을 지나간다.


세진

김빛나?



빛나, 세진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모자로 얼굴을 푹 가린 채 그냥 지나가려 한다.


세진

빛나 맞잖아?

빛나

아, 쌤.

세진

왜 보고도 모르는 척해?

빛나

딴 사람인 줄 알았어요. 살이 많이 빠지셨네요.

세진

나 그대론데······.



인사하는 빛나의 얼굴 한쪽에 멍이 들었다.


세진

너 얼굴이 이게······.

빛나

저 방학이라 복싱 배우거든요. 연습하다 다쳤어요. 살살 좀 하라니까. 

세진

뭐야, 너.

빛나

너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나요?

세진

누가 그랬니?

빛나

꼰대요.

세진

꼰대······ (놀라며) 아버지? 아빠가 왜?

빛나

우리 아빠 선거에서 떨어졌거든요.

세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를 왜.

빛나

나 때문에 떨어졌거든요.

세진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너 때문에 선거에서 떨어져?

빛나

쌤, 뉴스 잘 안 보시는구나.

세진

요즘 너무 정신없는 일이 생겨서. 무슨 일인데?

빛나

저 신상 다 털렸어요.



빛나, 가방 한쪽에 달려 있던 퀴어 배지를 보여준다.


세진

이게 뭐야. 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빛나

어떤 유튜버가 제 뒷조사를 했나 봐요. (배지를 만지작거리며) 저보고 역겹다고. 아빠한테 정치할 생각하지 말고 자식 교육이나 잘 시키래요. 자식이 이렇게 될 때까지 아빠란 인간이 뭐 하고 있었냐고.

세진

그런 일이 있었구나.

빛나

화목한 집안의 가장인 것처럼 존나 가식 떨더니 제대로 걸린 거죠. 쌤통이다.

세진

나는 진짜 몰랐어.

빛나

뭐를요? 뭘 몰랐는데요? 우리 아빠가 선거에서 진 거? 사람들이 내 뒤를 캐고 다닌 거? 아님 우리 아빠가 가끔씩 나를 때리는 거? 그것도 아님 내가 쌤하고 다른 사람이라는 거?

세진

미안하다.

빛나

제가 그랬잖아요. 쌤은 진짜 사람 볼 줄 모른다고.



세진, 빛나의 말에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세진

지금은 좀 괜찮아?

빛나

지금 이게 괜찮아 보여요? (핸드폰 거울 모드로 얼굴 보며) 커밍아웃은 당당하고 멋지게 하고 싶었는데.



세진,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빛나를 바라본다.


빛나

뭘 그렇게 쳐다봐요. 왜요? 제 정체를 알고 나니 뭐가 다르게 보여요?

세진

그게 아니라.

빛나

제가 가장 힘든 게 뭔지 알아요?

세진

뭔데?

빛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요. 지금 쌤이 나를 보는 것처럼. 우린 모두 똑같은 인간이니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나를 무슨 지구별에 잘못 떨어진 외계인처럼 바라보는 그 차가운 시선들.



사이.


세진

뭐 하나만 물어보자.

빛나

얼마든지요.

세진

언제부터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낀 거야?



빛나, 세진에게 다가간다.


빛나

전요. 한 번도 누군가와 같다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우린 원래가 모두 다른 사람이잖아요. 안 그래요?



세진, 빛나의 대답을 듣고 생각이 많아진다.


세진

참, 나 그 영화 끝까지 다 봤다.

빛나

진짜요? (세진의 입술을 집중해서 보다) 진짜다. 안 떨린다.

세진

네 말대로 특별하더라.

빛나

그렇다니까요. 제 인생 영화에요. 다음 달에 인사동에서 재상영하는데 같이 보러 가실래요?

세진

그러자.

빛나

저 시나리오 진짜 열심히 써서 그런 영화 딱 한 편만 만들고 죽을 거예요. 그래서 그 작가처럼 세상엔 이렇게나 많은 다양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한테 알려주고 싶어요.

세진

꼭 그렇게 되길 바랄게. 그러려면 더 열심히 써야겠던데?

빛나

(무슨 소린가 싶어) 어? 제 시나리오 읽어보셨어요? 진짜?

세진

퀴어영화제라고 들어봤지? 거기 한 번 응모해봐.

빛나

쌤.

세진

근데 후반부로 갈수록 개연성이 좀 떨어지더라.

빛나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보통 꼰대들은 꼭 읽어본다고 하고 안 읽거든요. 역시 쌤은 기간제라 달라요.

세진

야, 너 그거 기간제 교사 차별 발언이다.

빛나

제 말은. 좋다고요. 진짜 선생님 같아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세진

내가 말했었지? 나 영화 동아리 출신이라고? 내 친구 중에 영화판에서 조연출로 일하는 애 있는데. 만나게 해줄까?

빛나

대박. 쌤 최고예요!



빛나, 세진을 껴안는다.

세진, 순간 당황하며 몸을 뒤로 뺀다.


빛나

뭘 그렇게 놀래요? 저 쌤 같은 스타일 진짜 별로예요.

세진

내가 어디가 어때서? 나 어디 가서 빠지는 스타일 아니야.



두 사람 마주 보고 웃는다.

빛나, 공원 풀숲 사이에서 느리게 기어가던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한다.


빛나

어? 달팽이다.



빛나, 달팽이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달팽이를 올려놓는다.


빛나

만져볼래요?



사이.


세진

아니. 아직은.



빛나, 이해한다는 듯이 달팽이를 제자리에 돌려 둔다.


세진

내가 원래 좀 느려. 그 달팽이처럼. 아마 너를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릴 지도 몰라. 어쩌면 이해 못 할 수도 있고.

빛나

괜찮아요.

세진

안 서운해?

빛나

그게 쌤인걸요.



세진,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말을 꺼낸다.


세진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주라. 전해줘야 할 게 좀 있거든.

빛나

뭔데요?



세진, 벤치에 있던 종이가방에서 청첩장을 꺼내 빛나에게 보여준다.


빛나

청첩장이네요. 대박. 쌤 결혼해요?

세진

아니. 내꺼 아니고 심부름.

빛나

아··· 누구 결혼식인데요?

세진

음.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결혼식. 같이 가줄 수 있어?

빛나

물론이죠.



빛나, 세진에게 손을 내민다.

두 사람, 손을 잡고 걸어간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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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3-11-15
환승

환승 윤미희 나오는 사람들 상희 민재 윤아 때 늦은 밤 곳 지하철 안과 밖 무대 무대는 달리는 지하철 안과 지하철을 기다리는 밖으로 나뉜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것만 표현해도 좋다. 1. 주안역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상희, 민재, 윤아 세 사람 모두 검정색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 각자 스마트폰을 보며 혼잣말을 하는 건지 들으라는 건지 모르겠는 말투로 민재 왜 난 검색해도 안 나오지? 윤아 버스 타야 하는데 괜히 지하철 타는 건가? 상희, 윤아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상희 제가 검색할 때는, 신도림에서 갈아타서 홍대입구까지 이렇게 가는 걸로 나오거든요. 민재, 기웃거리고 윤아, 상희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어? 그건 또 다르게 나오네. 윤아 도대체 뭐가 맞는 거야… 상희 성신여대입구까지도 간다고 나오니까 연희동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거예요. 윤아,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민재, 끼어들며 민재 나도 좀 봐줘요. 민재,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민다. 상희,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상희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잠실까지 쭉 갔다가, 잠실에서 8호선으로 갈아타셔서 천호, 거기에서 다시 5호선으로 갈아타야 된대요. 5호선에서는 한 정거장만 더 가시면 되고요. 민재 좀 애매한데… 윤아 이미 돌아가긴 늦었어요. 민재 역 주변에 있을 곳이 있나. 상희 전부 술집뿐인 것 같던데요. 민재 주안역은 처음이거든요. 상희 저도요. 윤아 저도 1호선은 많이 안 타봤어요. 민재 아까 올 땐 1호선 급행열차 탔는데, 윤아 1호선에도 급행열차가 있구나, 민재 우리 잘 도착할 수 있겠죠? 상희 그럼요. 부천행 급행열차가 오고 있다. 윤아 어? 급행열차네요. 민재 이거 타는 거 맞죠? 상희 이거 타거나 좀 기다렸다가 일반 열차 타거나 도착하는 시간은 똑같아요. 민재 왜요? 상희 …부천행이잖아요. 민재 네? 상희 신도림까지는 가셔야죠. 민재 아, 잠시 고민하는 세 사람. 민재 좀 덥지 않아요? 윤아 그냥 탈까요? 어차피 기다리는 거 조금이라도 가면서 기다리는 게… 상희 그래요, 그럼. 문 열리고 탑승하는 세 사람, 빈자리가 많아 좀 떨어져 앉는다. 각자 다시 스마트폰을 보며 윤아 왜 다시 검색하면 자꾸 다르게 나오지? 상희, 눈치만 볼 뿐 대꾸하지 않는다. 윤아 아까 거기서 버스 타고 가서 공항철도를 탔어야 했나 봐요. 잘 모르는 길이라 혼자 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민재, 열차 내부에 붙어 있는 노선도를 바라보며 민재

  • 관리자
  • 2023-11-10
붉은 여인의 초상

붉은 여인의 초상 황수아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현 국내 유명 화가 미현 현의 애인 여인 정체불명의 여인 선예 현의 아내 상인 미술 학원 원장, 화가 현서 강력계 경찰 상우 패션잡지 에디터 변호사 이혼 전문 변호사 부장 신문사 문화부 부장 1장 미술관 무대 정면에 커다란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색이 선명하고 사실적인 풍경화다. 시골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뒷산과 그 앞을 흐르는 개울 한 가족이 피크닉을 즐기고 애완견이 그들과 함께한다. 동화책 삽화로 나올 것 같은 따스한 그림이다. 현, 두 손을 뒤로 맞잡고 자신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대호, 현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간다. 대호 안녕하세요. 작가님. 현 (뒤돌아 대호를 본다.) 대호 한국신문 문화부 기자 이대호입니다. 현 네. 안녕하세요. 대호 전시회 잘 봤습니다. 현 잘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대호 다음 일정이 없으십니까? 현 아내가 오기로 해서요. 대호 아. 그러시군요. 사이 현 (대호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기억나는군요. 아까 기자 간담회 때 저의 근황에 대해 질문하셨던 분이시군요. 대호 네. 그렇습니다. 계속 질문을 드리면 실례일 것 같아 멈췄습니다. 현 제법 곤란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는다.) 대호 더 질문드리면 사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것 같아서요. 현 그림의 연장선상인데 뭐 어떱니까. 궁금한 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대호 그러시다면… 한 가지만 더 질문드려도 될까요.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현 한국신문에서 제 특집 기사를요? 대호 네. 현 고마운 일이죠. 질문하시면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대호 최근 풍경화를 주로 그리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현 근 일 년간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모르던 자연의 풍경에 매료되었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들을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토 개발은 너무 빠른 속도죠. 언제 개발되어 사라질지 모르는 풍경들이니까요. 대호 그런데 원래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작업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의, 아니 백 프로 인물화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 발표되지 않은 풍경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대 시절엔 풍경화 동아리도 했었죠. 언젠가 한 일 년 정도는 풍경화 위주로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작년 안식년을 가지며 여행을 한 게 새로운 발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대호 아. 현 또 물으실 게 있나요? 대호 실례가 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인물화에 흐르던 그 특유의 분위기가 사라졌습니다. 현 특유의 분위기라뇨? 대호 선생님이 항상 그리던 여인은 눈빛과 입매가 아주 미세하게 비대칭이라 독특했죠. 초기작부터 중기, 그리고 최근까지도 그 도발적인 느낌은 점점 강해졌습니다만 풍경화

  • 관리자
  •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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